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는가? 그들은 자신의 영혼이 열린 문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보전하고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들을 핍박하는 세력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믿는 유대인들이었고 더불어 불신 로마교황세력이었다. 왜 그들은 기독교인을 핍박했을까? 그리고 두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되어 진리의 말씀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구원에 관한 진리의 말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들어가며

  소아시아에 일곱교회들 가운데, 서마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칭찬과 격려와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도 분명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며, 사탄마귀와 귀신들의 유혹과 시험과 핍박을 받았을텐데, 어떻게 되어 그들은 책망이나 꾸중 하나 없이, 주님으로부터 오직 칭찬과 격려와 약속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 우리는 이 두 개 교회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통해서(계2:9, 3:8~10),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들 교회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불어닥친 환난과 고난을 이겨냈다는 점이다. 특히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작은 능력밖에 가지지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켜냈으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을 열어둔 채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셨으며,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받는 환난과 고난 때문에 하늘에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지켜냈던 예수님의 말씀 즉 예수님에 관한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오늘날 현 시대에 우리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 곧 천국에 들어가게 도와주는 참된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무엇일까?

 

2. 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지키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테레오'라는 단어로서, "지켜내다. 보존하다. 보전하다. 그대로 간직해내다"라는 뜻이며,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준수하다. 실천하다, 준행하다. 순종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는 "보전하다"이다. 그러므로 이들 교회가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순종했다는 의미보다는 그들이 깨달았던 말씀 그리하여 열린 천국문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말씀을 그들이 지키어 보전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지켜내려 했던 말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계2:9-10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3:8-10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 주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참된 성도들이 받아야 했던 환난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이나 빌라델비아성도들이나 칭찬들었던 공통적인 특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환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왜 기독교인에게 해를 가했을까? 그것은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지키려고 했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께서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하지만 오직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저주받을 신성모독자들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유대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선민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 그들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마16:16), 더 나아가 그분은 주님이요 하나님이시다(요20:28). 하지만 이것을 믿는 믿음 때문에 서머나와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과 어려움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이어서 로마정부로부터도 핍박을 받았다. 당시 로마는 도미시안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그 칭호를 예수님에게만 적용할 뿐, 세상통치자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도미시안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원형경기장에 굶주린 사자에게 풀어놓아 물어뜯어 죽게 하였으며, 화형시켜 죽인 것이다.

 

4.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어떤 자가 환난을 받고 있으며 또한 고난을 받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다고 하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고 정죄하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만들어낸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면 정통이라고 말한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주장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니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에 예수님에 대한 칭호이다.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고 부활하신 이후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신다. 동시존재가 가능한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후 그리고 승천이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적이 있었던 하나님이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찍 죽임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요,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이시다. 세종대왕을 아무도 장헌세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제한시켜 칭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불러야 한다.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아무 일이 없는데,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서, 그분이야말로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전능한 하나님이자 보혜사라고 하면 이단이나 삼단이니 하면서 핍박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그래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신앙고백하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로마황제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이 두 교회는 자신이 가진 믿음을 지켰다. 그 믿음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그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기에 그렇게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팩트(사실)이기에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지켜나갔던 것이다.

 

5. 오늘날 우리가 보전해야 할 진리의 말씀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진리의 말씀을 보전해야 하는 것일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게 된다는 것을 보전해야 하는가? 그리고 한 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만세전에 예정하신 작정대로 된 것이니, 내가 어떻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보전해야 하는가? 아니다. 둘 다 틀렸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없다. 아니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오직 복음을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셨다(막1:15, 마4:17). 예수께서는 때가 찾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막1:15). 여기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기쁜 소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으며,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에 대한 소식이다. 이것을 믿을 때, 사람은 자신의 죄를 사함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신의 과거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난 죄를 다시 돌이켜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죄값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였던 아담의 타락이후 곧바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흠없는 속죄제물의 희생제사를 통한 대속을 약속해주셨다. 그래서 그 약속을 예수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인류는 단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요14:6). 그렇지만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만으로 자동적으로 죄가 용서되지는 않는다. 회개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자백할 때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는 것이다(요일1:9). 그러면,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자신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의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열리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지은 죄들은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는 것이다. 자백하는 것은 마음 아파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회개는 거기에다가 의지적인 행동의 변화도 수반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첫째는 흠없는 속죄제물인 예수의 피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우리의 자백과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6. 아담의 후손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어떤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신의 죄도 동시에 같이 자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그 순간에 갑자기 죽게 된다면 그 사람은 죄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날 죽지 아니한다. 더 많은 시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살 때에 자기자신 속에 있는 죄된 본성이 자신을 가만 놔두겠는가? 아니다. 또한 우리 밖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이 우리를 유혹하지 않고 가만 놔두겠는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살 사람은 사실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죄를 짓기 마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날마다 지은 자범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때 회개할 것은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율법말씀이나 그 말씀의 정신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행한 것이나, 하라고 한 것이지만 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때에는 먼저 지은 죄를 자백하고 그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께서 용서를 간구한 다음, 다시는 그 죄를 범치 않겠다고 하는 다짐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7. 구원에 관한 바른 영적인 말씀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러므로 한 번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으며,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말씀은 성경에 없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칭의를 얻은 것이 곧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그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 칭의의 옷을 입은 자라도, 지은 죄를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더렵혀진 옷을 깨끗하게 씻어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자신의 더럽혀진 행실을 깨끗히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것 뿐이다(계7:14). 그렇다.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 안으로 들어온 자라도 얼마든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노정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알라. 그리고 믿음에서 파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그랬기 때문이다(딤전1:19~20). 그리고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의 교인이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랬기 때문이다(행5:1~11).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즉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가운데 사데교회에서 주신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서 지는 자는 이미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울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계3:5).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라고 권면했다(빌2:12). 여기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는 명령은 명령법 현재 형태다. 이것은 계속해서 그렇게 행함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나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그것은 내 안에 죄된 본성이 들어있어서 그것이 언제든지 일어나 나를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성령충만을 받아서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일을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 한다(고전9:27). 그렇지 아니하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고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구원관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구원관이다.

 

8. 나오며

  이렇듯 오늘날 성도들은 바른 구원관을 정확히 알고 실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을 간직하고 보존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어떠한 환난과 핍박과 죽음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간직하고 보존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구원은 보장받을 수가 없다. 구원을 위한 만반의 준비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다 준비해 놓았지만, 그러한 구원의 은총이 내게 머물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은 죄들에 대한 자백과 회개를 날마다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보전해야 한다. 한 번 믿는 것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죽기 전에 회개하여 자신의 모든 죄들을 다  씻어낸 다음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인가? 사람의 눈에 보기에 부러움을 살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인정해주실 뿐만 아니라 훗날 천국에 들어가 면류관을 얻는 그러한 교회인가?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7개 교회가운데 2개 교회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가 그 경우다. 이 두 교회는 꾸중 하나 받지 아니하였고 칭찬만 들었다. 이 교회들 중에서 오늘은 빌라델비아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진짜 꿈꾸어야 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찾아보도록 하자.

 

1.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보통 교회가 설립되고 수년이 지나게 되면 어떤 교회를 꿈꾸게 될까? 보통의 경우, 다음과 같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첫째, 유치부부터 교육시스템이 잘 갖추고 있어 마음놓고 아이를 교회에 보낼 수 있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둘째, 우리교회에서도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있고 예언이 있어서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셋째,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빠뜻한데, 교회를 다니면서 세상에서도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넷째, 교회 건물이 반듯하고, 교인수도 많아서, 누구든지 “나도 이 교회 한 번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다섯째, 내가 섬기는 목사님이 기독교계의 유명인사로서,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어하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여섯째, 우리 주님이 곧 오신다고 하는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우리 주님의 다시오심을 잘 준비하여, 환난전에 들림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곱째, 멋진 성가대와 찬양단이 있어 하나님의 성호를 아름답게 찬양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꿈꾸어야 할 교회는 어떤 것인가?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1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그러므로 우리도 앞으로 바라보아야 할 10년의 꿈을 꾸기 위해, 주님이 바라시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길 원한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조명해볼 교회는 A.D.95년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해있던 빌라델비아교회의 경우다.

 

2.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떻게 되어서 심판주이신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불꽃같은 눈으로 전 인류과 지구를 감찰하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각 교회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딱 2개교회만 책망하지 않으시고 칭찬해주셨다. 그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첫째, 그 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였다. 서머나교회의 경우이다. 둘째, 진리의 말씀을 보존하는 교회였다. 빌라델비아교회의 경우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떻게 되어서 심판주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을 수가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를 말씀해주셨다. 첫째, 그들이 비록 작은 능력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낙심하지도 않았고, 자기에게주어진 길을 쉬 포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계3:8). 그렇다. 빌라델비아교회는 부자교회도 아니었고, 유명한 목회자를 모신 교회도 아니었다. 그 교회는 능력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그 교회는 수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받으면서 그들이 받았던 말씀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 교회가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받은 말씀대로 준수했다거나 순종했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켰다는 "테레오"라는 동사로서, "지키다, 지켜내다, 보전하다, 보존하다, 간직하다"는 뜻이다. 그랬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지켜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말씀을 끝까지 지켜낸 것일까? 무슨 말씀을 쉬 팽개치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보전한 것인가? 그것은 11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서 면류관을 얻게 해주는 말씀이었다. 그들이 비록 외형적으로 빗가번쩍한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하늘에서 면류관을 얻게 되는지 분명한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그 말씀은 끝내 지켜냈다는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냈다는 뜻이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오는 핍박과 고난을 견디어냈다는 뜻일 것이다. 셋째, 그 교회는 그들을 힘들게하는 온갖 박해속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머나교회의 경우와 비슷하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두 군데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하나는 유대인들이요 또 하나는 로마정부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만 믿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했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힘들게 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금융권을 장악했는데, 이로서 경제를 흔들고 있던 유대인들은 도시나 정부의 세력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밋보이면 그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어거하였고, 도시에도 추방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빌라델비아교회의 성도들은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로마정부도 가면갈수록 살아있는 황제의 숭배를 강요해왔는데,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황제숭배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황제를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로마로부터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그들은 오직 예수님께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3. 모든 행위를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3가지는 무엇인가?

  그러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약속해주셨을까? 그것은 3가지다. 첫째는 사탄의 앞잡이가 된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잘못했음을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의 발 앞에 엎드리어 사과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고, 핍박받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우리 주님이 많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유대인들 스스로 알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계3:9). 둘째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인내로서 지켜냈기 때문에, 정작 온 세상에 임하여 모든 사람들을 시험하게 될 시험의 때로부터 그들을 지켜보존해주겠다고 약속해주셨다(계3:10). 그러나 세대주의적 종말론자들은 계3;10의 말씀은 잘못 곡해하여 자기들 편할 때로 인용하고 있다. 대환난의 때가 오면 환난 직전에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을 면제받고 하늘로 휴거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아니다. 계3:10은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그런데 개역한글성경이 좀 오해할만하게 번역해놓기는 하였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헬라어원문을 보자. 이 말씀은 "내가 땅 위에 거주하는 자들을 시험하려고, 온 거주지 위에 막 오려고 하는 시험의 때로부터 너를 지켜줄(보전해줄) 것이다"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하지만,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이미 고난을 다 이겨낸 자들이기 때문에 그때에 가면 그 환난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환난전에 성도들은 휴거되지 아니한다. 모두가 환난을 통과한다(마24:29). 다만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었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러한 환난의 때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4.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것은 오늘 이 시대 가운데 빌라델비아교회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볼 때에 작은 것 밖에 가지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가 성도의 규모가 작다고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반듯한 성전 건물이 없다고, 교육시스템이 잘 갖추어지 않았다고, 멋진 성가대나 찬양단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거나 천국에서 면류관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가 많은 것들이 없고 부족함으로 참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고난을 통해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비록 능력이 작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서 면류관을 얻도록 해주는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면 그 교회를 붙들어야 한다. 둘째, 지금 현재 시험과 핍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잘 견뎌내어, 장차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여 고통을 안겨줄 시험의 때로부터 보존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 고난은 지금받느냐 아니면 나중에 받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성도라면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으로 곧장 가지 않고 광야로 간 것과 같은 것이다. 모든 성도는 가나안인 천국에 들어가지 전에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환난전에 휴거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기를 바란다. 주님은 환난후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5. 나오며

  그러니 성도들이여,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하지 않고 번드르하지 않아도, 교회중에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말씀이 있고, 천국에 들어가서 얻게 될 면류관을 위해 힘써 달려갈 것을 권면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붙들기를 바란다. 지금 환난을 피한다고 해서 환난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근시안적인 신앙생활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규모는 작아도, 목사님이 유명인사가 아니더라도, 성가대와 멋진 찬양단이 없다 할지라도, 아이들교육시스템이 덜 갖춰져 있다해도,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기적이 안 나타난다 해도, 참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과 천국복음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붙들어야 한다. 우리교회는 바로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사람이 고난을 받게 되는 원인에는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범죄 때문이요, 또 하나는 사탄의 시험이나 핍박 때문이며,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뜻인 경우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출애굽후 광야에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무엇인가? 그것은 욥의 회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은 자신에게 고난이 불어닥칠 때 대처하는 법에 알아보자.

 

1. 들어가며

  고난은 사람만이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천사들은 육체가 없기에 고난을 받지 아니한다. 육체가 없는 존재는 고난을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 중의 일부가 지금 지옥 불구덩이 속에 있지만, 그들은 그 어떤 뜨거움을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의 뜨거움에 노출된다해도 그러한 뜨거움 때문에 몸이 데는 일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육체를 가졌기에 고통을 느낀다. 뿐만 죽은 후에도 부활의 몸을 입고 살아야 하기에, 인간의 육체가 가졌던 고통과 아픔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오순절이후에 사람은 죽은 즉시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간다. 믿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생명의 부활을 얻고 천국으로 즉시 들어가며, 믿지 않아 죄사함을 받지 못한 채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는 사망의 부활을 얻어 지옥으로 즉시 들어간다. 하지만 지옥에 들어간 부활의 몸(부활체)는 고통과 아픔을 느낀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어찌하든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사람은 육체를 지녔기에 고통과 아픔을 느낀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곧 육체가 있다는 것은 고난을 겪는다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이 육체를 가졌기에 가질 수 있는 특권은 무엇인가?

  하지만 사람이 육체를 지녔기에 가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것은 육체를 지녔을 때에만 상급을 쌓을 수 있으며, 죄를 지었어도 육체를 지녔을 때에는 회개할 기회를 갖는다는 점이다. 천사는 육체가 없어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반대로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회개할 기회도 없다. 그러므로 천사의 한 번 타락은 영원한 타락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다시 회개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하늘에서 쫓겨남을 받았을까? 미루어 짐작하건데,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으로 들어오실 전후의 시기라고 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 번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과 그의 천사들(귀신들)은 다시는 천국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육체가 없기에 회개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모여 천국과 같은 모형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 지구 속에 있는 음부가 곧 지옥이 그곳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곳에 가면 사탄의 보좌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타락한 천사들 곧 귀신들이 사탄을 하나님을 섬기듯 섬기고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탄도 하나님 노릇을 하듯 그곳에서 왕노릇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죄를 대신 해결해 줄 메시야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하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하여, 천국에 데려가려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이 하늘에서 쫓겨난 존재가 되었음에 대한 후회를 대신 앙갚음하는 것이다.

 

3.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낳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아마도 사탄의 시험을 받으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고 믿는 자들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어찌되었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고, 그들만을 천국에 데려가신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천국자녀를 생산하는 밭에 해당한다. 그리고 언젠가 천국자녀를 다 얻게되면,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이 세상밭이 필요치 아니하므로 이 세상을 불태워 없애버리실 것이다. 사실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만물과 지구를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천국자녀를 얻기 위함이다. 그래서 온 우주만물을 먼저 창조하셨고, 그 한 가운데 중심에 지구를 창조하셨으며, 지구의 중심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만들어 모양을 만든 다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믿는 하나님의 자녀를 얻어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다.

  하지만 교만한 사탄의 방해가 그 중간에 있었다. 뱀으로 변화하여 인간을 유혹하여 그만 인간을 범죄케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받으시려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죄값을 대신 치르셨다. 그리고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셨다. 이것이 복음전파다. 이러한 일은 만세전의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속죄제물로 대신 죽으실 메시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무려 350가지 이상의 예언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대로 이루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해야 할 구속사역을 다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탄생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안식처는 이 세상이 아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세상을 탈출하여(엑소더스, 출애굽) 천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시키려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죄문제를 해결하는 자뿐이다.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을 때에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을 탈출할 수가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3:8).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탈출시키려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사실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해야 할 일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수용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이 세상을 탈출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탈출시키기 위해 하신 일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속죄제물로서 죽으신 것을 믿지 아니하므로 죄용서를 받지 못하여 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완성하셨음을 믿는 자다. 그러면 그에게는 하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면서 그 생명을 가진 자가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4. 인간에게 고난이 닥칠 때 어떻게 대처햐야 하는가?

  그렇다면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는 2가지가 필요다.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또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가. 꼭 하지 말아야 할 것 3가지

  첫째, 인간에게 고난이 닥칠 때 꼭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그것은 첫째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0:10). 원망은 고난을 통과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탈출하는 것까지 방해한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백성의 예를 보자. 그들이 비록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왔으나 그들 중에 원망하던 자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14:27~30). 여기에 나오는 '애굽'이란 이 세상을 의미하며, '가나안'땅은 천국은 상징한다. 결국 출애굽한 자라도 이 세상에서 원망불평을 계속하는 자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낸 것은 광야에서 죽게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과연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자신의 양식을 바꾸어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를 하나님께서 테스트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테스트를 통과한 자를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데려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광야에 나왔다고 해서, 그래서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해서, 쉬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아니 된다. 광야는 우리를 죽이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를 시험하는 장소요, 우리의 순종여부를 테스트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것에 대한 꿈과 비전과 사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광야로 나온 것은 고난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요 잠시 잠깐 있을 일에 불과하다. 우리가 광야로 나온 것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광야로 나온 우리의 목표는 천국에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육체를 지닌 고통 가운데 살아도 우리의 꿈은 천국이어야 하고, 천국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천국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그곳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 꼭 해야 할 것 3가지
  이제는 둘째, 인간에게 고난이 닥칠 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욥이 고난을 받을 때에 했던 것과 비슷하다(약5:7~18). 그렇다면 고난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 일을 하는 것이다. 첫째는, 회개하는 일이다. 사람이 받는 고난 중에는 자신이 지은 죄나 조상의 우상숭배로 인한 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엎드리어 자신을 돌아보고 죄가 떠으르면 그것부터 회개해야 한다. 둘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을 구하고 그리고 그 해결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문은 열리게 될 것이다. 셋째는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인내로 참아 기다리는 것이다. 농부가 길이 참아 곡식을 거두듯이,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씨를 뿌렸는데 그날 곡식을 거둘 수가 있겠는가? 어느정도 자라고 결실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병충해를 이기지 못하면 결실하지 못한다. 사탄의 핍박과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알곡이 될 수 없고, 알곡이 되지 못하면 천국창고들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주는 어떠한 핍박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견뎌야 한다. 때로는 피해 달아날 때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버가모 경우 안디바처럼 몇 사람은 죽임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으로서 자기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요, 천국에 들어가서도 영원토록 빛나게 될 면류관을 얻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에 고난을 겪는다. 하지만 육체를 지녔기에 회개할 기회도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고난이 자신에게 불어닥친다해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고난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3가지가 있다. 원망하지 말아야 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고난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회개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과 인내로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대로 살아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인내하여, 이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소개되고 있을까?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소개되고 있을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다가 크게 놀란다. 에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1:17). 이것은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자기선언이었다(사41:4,44:6,48:12).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표현을 자기에게 쓰신 것일까? 한편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이 표현을 쓰기 전에 인간예수님이 누구셨으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소개한다. 천국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분의 공생애 사역을 더듬어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의 계시의 책이며 예언의 책이다. 그러니 대부분은 상징과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내용 중에는 있는 그대로를 읽기만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느정도 이해가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3장이요, 21~22장이다. 나머지 4장부터 20장까지는 환상과 이미지가 등장하되 3중7중재앙으로 겹치듯 등장하고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많이 들어 있다. 이것은 이때까지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의 역사 가운데 밝혀진 여러가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한편 요한계시록의 편지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의 서두에 있는 인삿말 특히 인삿말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성령님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예수님은 또한 어떻게 묘사되어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원문 그대로를 살펴보아서 예수님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2.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은 누구신가?(계1:4a, 8)

  우리는 지난 두 차례의 강해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성령님은 또한 누구신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를 살펴볼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점 더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 1:4~6에 나오는 말씀을 성부와 성령과 성자 곧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소개라고 언급한다. 과연 요한계시록 1:4~6에 나오는 말씀은 과연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에 대한 소개일까? 그렇다면, 헬라어원문에서는 과연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먼저, 계1:4~6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에서 직역해보도록 하겠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 안에 있는 일곱교회들에게 [편지한다]. 너희에게 은혜를 그리고 평강을 [기원한다]. [지금]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그리고 [당신자신을 위하여] [지금도] 오고 있는 이로부터. 그리고 일곱 영들로부터. 이는 그의 보좌 앞에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5 신실한 증인, 죽은 자들로부터 먼저 나신 이 그리고 땅의 왕들의 통치자. 우리를 사랑하셨던 이에게 그리고 그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에게. 6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우리를 제사장들과 그리고 왕들로 만드셨다. 그에게 영광이 그리고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계1:4~6의 말씀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계1:4에 나오는데, 그분은 "지금도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그리고 지금도 오고 있는 이"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누구라고 하는 직접적인 자기소개는 아니다. 다만 사도요한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분이시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누구라고 직접적으로 소개하셨을까? 그것은 요한계시록1:8에 나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8절에 따로 떼어서 다시 소개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아.

계1:8 나는 알파 그리고 오메가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지금]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지금도] 오고 있는 이, 전능자.

 그렇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이시다. 그분은 시간을 쥐고 계신 분이며, 시간 밖에 계시는 분이시며, 지금도 앞으로도 시간을 만들어가시는 절대자이시다. 그리고 계1:8에 의하면, 그분에 대한 호칭이 나오는데 그것은 "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것이며, 지금도 오고 있는 이라고 소개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은 전능자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다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하셨다(계1:1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소개하셨다. 이는 단어들만 교체한 것일 뿐 똑같은 뜻이다. 그렇다. 시간을 창조하셨던 그분께서 언젠가는 옛창조를 끝내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21장과 22장이 다시 시간이 없는 상태를 언급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가면, 예수께서 당신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계21:6, 22:13). 이 말씀을 직역해 보자.

계21:6 그리고 그(보좌에 앉으신 이)가 내게 말씀하셨다. "그것이 이루어진 채 있다." "나는 알파 그리고 오메가이다, 처음 그리고 마지막이다." 내가 [지금] 목말라하고 있는 자에게 선물로서 생명의 물의 샘물로부터 줄 것이다.  

계22:13 나(예수)는 알파 그리고 오메가이다. 처음 그리고 마지막. 그리고 시작 그리고 마침.

  그렇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자, 시작과 마침이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소개하신다. 그런데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자신을 소개하신 예수님처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사41:4, 44:6, 48:12). 이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같은 여호와와 예수님의 자기선언을 종합해보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구약에서 여호와라고 자기를 소개하신 하나님은 곧 요한계시록에서 자기를 예수님이라고 소개하신 분과 하나라는 사실이다. 곧 여호와께서 예수님으로,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3. 요한계시록에서 성령님은 누구신가?(계1:4b)

  이제는 사도요한이 인삿말에 소개되어 있는 성령에 대해서 살펴보자. 계1:4에 의하면, 성령님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보좌"는 "지금도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그리고 지금도 오고 있는 이"의 보좌를 가리킨다. 그런데 요한게시록에서 "지금도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그리고 지금도 오고 있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다. 결국 "그의 보좌"는 주 하나님의 보좌인 것이다(계19:4). 그런데 시간이 없어지는 그날에 이르면, 그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된다(계22;1,3).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영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분이 하나님의 영이자(계4:5), 어린 양의 눈들(계5:6)이라고 소개한다.

계4:5 그리고 뇌성들과 음성들과 번개들이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리고 불태움을 받고 있는 보좌 앞에 일곱 등불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5:6 그리고 내가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 보좌의 그리고 네 생물의 한가운데 안에, 그리고 장로들 한가운데 안에, 마치 [이미] 살해당한 채 있는 것과 같은, [이미] 서 있는 채 있는 어린양이 [있다]. 일곱 눈들 그리고  일곱 뿔들을 [현재] 가지고 있는, 이는(이 눈들은) [이미] 온 땅 안으로 보내심을 입은 채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다.

  그런데 구약성경 스가랴서를 보면, 일곱은 여호와의 눈들이라고 한다(슥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하나님의 영이요 어린양의 눈들이며, 온 땅 안으로 보내심을 입은 채 있는 분이다. 여기에 나오는 숫자 일곱은 이 땅 안에서의 완전수를 의미하므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자 여호와의 눈이며, 어린양의 눈으로서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시는 완전한 영을 가리킨다. 결국 사도요한이 인삿말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령님은 성부와 다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사역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가?(계1:5a~6a)

  그렇다면, 사도요한은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인삿말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했을까? 사도요한은 여기서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사도요한은 인삿말 후에, 자신의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가 같은 큰 음성을 듣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가 사람의 아들 같으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인 것이다. 

계1:5-6 신실한 증인, 죽은 자들로부터 먼저 나신 이 그리고 땅의 왕들의 통치자. 우리를 사랑하셨던 이에게 그리고 그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에게. 6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우리를 제사장들과 그리고 왕들로 만드셨다. 그에게 영광이 그리고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인삿말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도요한은 인삿말에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그리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구절로 나누어서 설명하자면, 계1:5절상반절에서 사도요한은 사람이셨던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으며, 계1:5하반절부터 6절상반절에 사도요한은 사람이셨던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삿말에 나오는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분이시다. 바로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계1:5a)

  그렇다면 이땅에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누구신가? 첫째로 그분은 신실한 증인(순교자)이시다(계1:5a). 계3:14에 의하면, 예수님은 신실한 증인이자 참된 증인이시다. 뿐만 아니라 계19:11에 의하면, 백타를 타고 재림하시고 있는 예수님이 등장하는데, 그분의 이름이 바로 신실과 진실이라고 나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대충 사신 것이 아니다. 신실하고 충성되게 사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그리고 충성되게 집행하며 사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먼저 나신 분'이시다(계1:5a). 여기에 나오는 '먼저 나신 분'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프로토토코스'라는 말로서, 번역할 때 3가지로 번역된다. 그것이 사람일 경우에는 '장자(맏아들)(시89:27,골1:18,롬8:29,히1:6)'로, 동물의 경우에는 '맡배, 첫것'으로, 식물의 경우에는 '첫열매, 맏물(아파르케)'로 번역한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죽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죄값이 사망인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 죄를 없이하시려고 인류의 죄를 전가받아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죽임당할 죄들을 지은 적이 없으셨다. 또한 그분에게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기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하여 부활의 첫열매(고전15:20)가 되셨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셋째로, 그분은 땅의 왕들의 통치자가 되셨다(계1:5a). 여기서 그분이 왕들의 통치자가 되셨다 하는 것은 그분이 하늘에 땅의 왕들 곧 이미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천국의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는 성도들의 왕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계5:9~10).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왕들 중의 왕이시며, 주들 중의 주이시다(계17:14,19:16). 이것은 바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충성되이 살다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뒤 승천하사, 하늘과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시고 주들의 주가 되신 예수님에 대한 소개다.

 

나. 한 때 사람이셨던 예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는가?(계1:5b~6a)

  이어서 사도요한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소개한다. 사도요한은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3가지로 소개한다. 첫째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계1:5b). 여기의 사랑은 아가페사랑이시다. 자기를 희생하신 희생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말만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시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13:1,34~35, 15:9). 친히 사람사랑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둘째로,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로서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해방해주셨다(계1:5b). 이것은 하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피를 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하신 일이다. 그분은 인류의 속죄를 위한 피를 흘리기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사람이셨던 그분은 이제 믿는 우리 성도들을 왕들과 제사장들로 만드셨다(계1:6a). 천국에 들어가면, 우리 성도들에게 2가지 직책이 주어진다. 하나는 왕으로서의 직책이요, 또 하나는 제자상으로서의 직책이다(계5:10, 20:6). 여기서 왕이라 함은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서 천사들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뜻이며, 천국에서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함은 2가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가리킨다. 사실상 천국에서는 이미 속죄가 끝난 이후의 시기와 상태이므로, 제사드릴 일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제사장으로서 성도들이 할 일은 첫째,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는 계속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하는 일을 한다. 즉 천상에서 드리는 성도들의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는 없어지므로,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감당해야 할 일은 찬양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린양으로 오시어 행하신 일을 영원무궁토록 찬양하는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계4:11). 그러니 성도들이여, 이 땅에서부터 우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한편, 천국에서는 우리 성도들 즉 천국에서 제사장노릇을 하는 우리 인간들만 찬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계5:8~11).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수천 수만의 천사들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양을 드린다(계4:8, 5:11~12). 천국은 찬양의 나라인 셈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의 편지 서두에서 인삿말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눈이신 성령 그리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역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에 관한 진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승천후에 하늘에 오르시어 원래의 하나님으로 되돌아가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어디에 소개되어 있는가? 그것은 인삿말 이후에 곧이어 나오는 일곱 금촛대 사이를 왕래하시는 인자같은 이의 환상에 나온다. 다음주에 이것을 만나보도록 하자. 영원토록 찬송받으신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에게 부와 지혜와 찬송과 영광, 존귀와 힘, 능력을 돌리고 돌리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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