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정이철목사는 왜 진실을 왜곡시키고 거짓으로 부풀려, 진리를 외치는 목회자와 교회를 파괴하려 하는가?"

 

 

  얼마 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우리교회와 저에 관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어떤 목회자가 저에 대해서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며”, “행위구원론을 전파하는 자”라고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 것을 보았다. 과연 이분이 예수님과 진리만을 외치는 목회자라는 말인가? 요즘 진리를 외치는 교회가 줄어들어 좁은 길을 가려는 목회자가 많지 않는 시국에, 어렵게 진리를 외치는 목회자를 이렇게 난도질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바른 믿음을 외치겠다고 하시는 분이 어떻게 사실(팩트)를 말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시켜 말하며, 진리만을 외치는 목회자를 이단사상전파자라고 매도한다는 말인가?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그러한 근거를 대고, 또한 성경 어떤 말씀을 부정하는지를 말해야 옳지 아니한가? 나와 우리교회는 성경 66권을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렇지만 어떤 권위있는 자가 말했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분별하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온전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를 따라가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교리가 성경을 요약해주고 쉽게 성경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하더라 교리는 사람의 작품인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리나 신학사상 중에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도 있고 과장되거나 축소시킨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는 그 교리가 만들어질 때의 한계상황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구약의 원전성경 그것도 대문자사본이 발견되어 그것을 그대로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어찌 과거의 교리를 가지고서 누구의 자신의 교리에 맞지 않으니 틀렸다고고 말할 수 있으며, 어찌 교리를 가지고 이단시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66권의 성경을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러면 성경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뭐래도 목회자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말해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누군가가 어떤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다른 잣대가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경 어디 말씀, 당신이 하는 주장은 이러이러하게 틀렸습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교리에 보니, 당신은 이 교리를 따르지 않고 있으니 당신은 이단사상 전파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 사람은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목회자는 오직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목회자가 어떤 신학자(사람)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하겠는가? 목회자는 모름지기 진리의 말씀만을 외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며, 성경말씀만을 따라가야 한다. 다른 것들은 그저 참고하면서 가면 된다. 교리나 신학사상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의 산물이자 그 시대의 신학작품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미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근거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하는가? 그러므로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한다면 성경말씀 어디에 따라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니 시정하라고 말해야 참된 목회자가 아니겠는가? 비열하게 왜 거짓말을 섞어서 말하는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이 시대를 향해 진리를 외치는 목회자를 보면 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한 목회자와 한 교회를 이렇게 이단취급하는 말을 서슴없이 뱉어내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왜 파괴하려 하는가? 그것은 사탄이 하는 일과 같다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들을 과연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당신도 이것을 따르시오"라고 말한다면 나는 즉시 순종할 태세가 되어있다. 또한 즉시 시정할 각오도 되어 있다. 사과할 각오도 되어있다. 그렇지만 성경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왜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당장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몰라서 그랬다면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설교를 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영상으로 올리는 이가 어찌 성경이 아닌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피눈물나게 하는가? 그도 구원받아야 할 한 형제자매가 아닌가? 그렇면 최소한 예의를 지키고 만에 하나 잘못되었더라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지, 무턱대고 정죄하고 이단취급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제는 팩트를 전하고 싶다. 누구든지 정이철목사라는 분이 어떻게 거짓을 보태어서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가 쓴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목회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믿음 하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믿음과 더불어 회개와 성화가 구원을 얻게 한다는 주장이 점점 대범해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장로교 목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장 통합의 동탄명성교회의 정병진 목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정병진 목사는 언제나 대범하게 행위구원론을 전파한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종교개혁자 칼빈이 교회를 망친 주범이라고 담대하게 설교한다. 이 교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정병진 목사의 구원은 상실되지 아니한다는 주장은 과연 성경적인가?”(3:16-21)라는 설교 영상을 직접 들으며 녹취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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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 특히 구원론에 대해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병진 목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무는 이단사상 전파자임을 알 수 있다. 다른 교단도 아니고 예장 통합의 목회자가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은 앞으로 도래할 한국 교회의 배교와 타락의 실상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만들어 준다. 참으로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심각한 사실을 동탄명성교회 홈페이지에서 보았다. 이 교회에 홈페이지에도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박영돈 박사의 칭의론 글과 영상이 이용되고 있었다. 얼른 세어보니 대략 8개나 게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면서 행위구원론을 전파하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 목사 교회의 홈피에 박영돈 교수의 글과 영상이 대략 8개나 게시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일까? 정병진 목사와 이 교회 신자들이 아무 관련이 없는 박영돈 교수의 글을 악용하는 것인가?

[출처]정병진 목사(동탄명성교회)와 고신 박영돈 교수의 칭의론|작성자코람데오

 

  정이철 목사는 첫째, 저를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목회자라고 했다. 어찌 목회자의 입에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에 어떤 참된 목회자가 이신칭의를 부정하겠는가? 또 어디에 이신칭의를 부정한다고 말했는가?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아니 받고, 다른 무엇으로 이신칭의를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희생에 대한 댓가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인가? 우리가 받는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른다는 말인가? 저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그대로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떠서, 정이철목사는 저와 우리교회가 이신칭의를 부정한다고 말하면서 저와 우리교회가 예수님의 부정하고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자처럼 왜 그렇게 비열하게 매도하려 하는가? 주님이 보시고 있지 아니한가? 저와 우리교회는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100% 믿는다. 그런데 어찌 이신칭의를 부정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을 모함하려 하는가? 저와 우리교회는 결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것,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믿는다. 나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기자의 일도 수년동안 해 온 사람이다. 기자는 거짓을 말하면 아니 된다. 그것이 철칙이다. 그런데 어찌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말한다는 말인가?

  나는 다만 성경에서는 이신칭의를 통해서 혹 의롭다함을 얻은 자라도 구원을 얻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경고하고 있음을 말했을 뿐이다(딤전4:12~2,1:19, 히6:4~8, 3:12,18~4:1, 10:26~31,계3:5, 14:12, 5:24). 주님더러 주여 주여 말하고 심지어 예언사역을 감당했던 자라도 그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자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마7:21~23). 이러한 근거들은 사실 성경에 수두룩하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지적동의와 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또한 칭의가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이 아니라고 하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8:24,2:12). 그것은 구원의 시작단계라고 말한 것이다(2:16).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딛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여정은 처음에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서 출발한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계신다(요3:16,계3:20). 하지만 구원의 끝은 좁은 문이다(7:13~14,10:22). 예수께서도 “[]청함을 입는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22:14)”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으면 우리는 끝까지 구원의 여정을 잘 마쳐서 최종적으로 천국에 골인해야 한다(딤후4:7~8,18). 곧 우리의 영혼이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의 과정이 끝난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사도바울도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는가?(롬8:24)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빌2:12)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증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목회자더러, 어찌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목회자, 예수님 말고도 구원을 받을 있다고 증거하는 거짓된 종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구를 정죄하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것인가? 나는 이신칭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가 구원과 동일하지 않으며, 이신칭의의 시작은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의 완성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직 성경에 쓰여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한 것 뿐이다. 목사라면 교묘하게 거짓을 획책하지 말고 팩트를 그대로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정이철목사는 둘째, 나더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무는 행위구원론을 전파하는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말했다. 행위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세시대 로마카톨릭의 주장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 필요한 공로가 없거나 부족하면, 연옥에 떨어져서 일정기간동안 연단을 받고, 그들 중에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주장이 천주교의 구원교리가 아닌가? 어떻게 개신교회 목회자가 천주교 사상을 전파하겠는가? 어찌 오직 진리만을 전파하고 오직 믿음과 회개로 천국에 들어오라고 전파하는 목회자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하는가? 생각해보라. 어찌 성경대로 전하고 믿는 목회자가 행위공로로 구원얻는다고 외치겠는가? 제 설교를 들어보라. 유투브에 이미 1,600개 이상의 설교가 다 공개되어 있다. 요즘 시대에 자기의 설교를 유투브에 매일 올리는 목회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말씀 앞에 진실하려고 이렇게 날마다 애쓰고 있다. 오직 나와 우리 동탄명성교회는 성경대로 전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인터넷에 영상을 그대로 올려놓고 또한 글도 올려놓고 있다. 누구든지 정말 참된 진리를 찾기를 원한다면영상설교를 듣고 또한 메시지를 들어 회개하여 참된 구원을 받으라는 마음에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다(1:15, 20:21).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자신의 믿음에 따른 열매로서 행함이 나타난다는 말은 맞는 것이지만,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이나 혹은 부활하신 후에도 분명하게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4:17, 막1:15, 2:5,16, 3:19). 그리고 자신이 가진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고도 말씀하셨다(10:22, 14:12).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회개가 행위라고 억지 주장을 하곤 하는데, 성경 어디에 회개가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가? 회개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믿음을 가진 자에게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한 자가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의 피의 소중함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사도들의 주장처럼 믿고 회개할 때에 받는 것이다(막1:15, 행17:30~31).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행위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합당한 믿음에 따른 증거들에 해당하는 것이다(7:19~27, 2:14,26). 행위는 다만 믿는 자가 진실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회개생활을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행위(공로가 아니라 믿음에 따른 열매들’)는 내가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주는 도구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행위는 나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상급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 예수님 없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구원은 오직 믿고 회개함으로 받는 것이다. 믿었어도 사람은 또 죄를 짓기에 끝까지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 믿었어도 또 죄된 본성과 귀신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또 죄를 지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는 그날까지 회개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예수 없이도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마냥 우리와 우리교회를 행위구원을 전파하는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한다는 말인가? 그게 뭇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란 말인가? 만약 이것 때문에 참된 믿음을 찾고 참된 구원을 향해 열심히 회개하고 있는 성도들이 상처라도 받으면 그 영혼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하는 소리인가? 소자중 한 생명이라도 잘못해서 탈락시킨다면, 기꺼이 연자멧돌을 목에 매고 빠져 죽을 작정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면, 당장 심판을 받아 지옥에라도 떨어질 각오를 하고서 이렇게 남을 정죄하는 것인가? 누가 성경 아닌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라고 권한을 주었는가?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남을 정죄해도 되는 것인가? 혹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라 말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과 교리가 다르고 신학사상이 다르다고 말한다는 괜찮겠지만, 그 사람을 행위구원론자이니 이단사상 전파자라느니 매도하는 것은 목회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파하는 사람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행위구원론자라고 정죄하고는 그것도 버젓이 공개석상에 올려놓은 일은 과연 목회자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만 옳고 남의 생각은 틀리다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신학적인 지식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며, 그런 자는 행위구원론자라가 맞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무책임한 발언이다.

  그리고 누가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진짜 허물고 있는가? 누가 기독교신앙을 강력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무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란 말인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는 자가 기름부음을 받은 목회자요, 바른 진리를 외치고자 하는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가? 남을 정죄하려면 사실에 근거하여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기자들도 짐작으로 말해서는 아니 되는데, 오직 진리만을 말해야 할 목회자가 무엇인가를 보태서 진실을 왜곡시키고, 거짓말을 더해 남을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매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죄가 안 보이니 이것 저것 묶어서 이래서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뭐가 다른가? 그것은 앞뒤가 다른 빨갱이들이나 하는 수법이다. 그것은 마귀와 귀신들이나 행하는 수법이다(8:44). 마귀가 하와를 속일 때에 어떻게 했는가를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그때 마귀가 한 말에는 진실도 있었다. 모두가 다 거짓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에다가 슬쩍 거짓말을 보태서 말하지 않았던가! 보통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잘 간파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그렇게 믿어버리는 믿음 약한 성도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는 진실만을 외쳐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말 때문에 성도들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 왜 예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죄로 정죄를 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진리만을 외치셨기 때문이다(8:45~46). 하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을 이용하여 얼마나 못된 짓(예를 들어, ‘고르반제도)을 일삼았던가? 그리고 성경에다가 뭔가를 보태서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들을 휘어잡으려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종교지도자들의 행태를 잘 알고 있다. 종교지도자들이 써먹은 것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서, 성경의 본뜻을 빗나가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만큼은 진실해야 한다.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 이리저리 엮어서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서, 자신들만의 율법해석(미쉬나, 탈무드, 장로들의 유전)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고 매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진실을 말했지만,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신성모독죄를 지었다고 정죄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생각이나 잣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정죄하고 죽이는 짓을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로 족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했던 예수께서는 그만 그들로부터 정죄를 받았고 결국 죽임까지 당하셨다. 말해보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든 자가 과연 세상권력자들이었던가? 아니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성경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해서 함부로 남을 매도하거나 한 말을 엮어서 왜곡시켜 말하면 안 된다. 그 책임은 반드시 자기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옥형벌이라면 지옥형벌이라고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셋째, 나더러 기독교신앙에 대한 이해 특히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는 목회자인량 매도했다. 정이철목사는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만세전의) 택하심과 믿음으로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참된 성경적인 구원론인량 말했다. 그러나 참된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것이 참된 구원이 아니겠는가? 믿고 회개해야 구원얻는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기에다가 뭔가를 보태면 아니 된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만세전의 택하심 곧 만세전의 예정에 의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언제는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말했다가, 만세전에 예정대로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과연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선택한 자만 구원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만약 그런 본문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헬라어성경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여기에 대해서는 제 다른 설교들을 참고하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초청을 받은 자들 중에 선택을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22:14).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믿을 때에, 그가 선택을 받는 것이다(5:40, 3:16, 5:24, 7:37~39). 우리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만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믿다가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도 아니 된다.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와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한 번 받은 선택이 유효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넷째, 저를 한국교회의 배교와 타락을 이끌어 가는 자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교회의 배교의 타락의 주범이 과연 누구인가? 성경대로 말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증거하려고 애쓰는 자인가? 아니면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온갖 범죄들을 저지르고 있는 애꿎은 목회자와 성도들 때문인가? 성경 어디에 만세전에 개인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성경 어디에도 개인이 만세전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예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구절은 전부 개인사역예정에 관한 것 뿐이다.

 

  ​나는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내 한 목숨을 우리 주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아니 온 세계에 영혼들이 바른 구원관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 오직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증거했던 그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야 나도 천국에 들어가고 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다.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구원받게 되는 자격을 얻게 되었음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원의 근거를 모두 다 마련해 주었으니(구원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없으니), 우리더러 믿으라고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도록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주님의 음성을 그대로 순종하고 그것을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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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이제 말씀드립니다.

 진실을 왜곡되이 말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리고 오직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외치는 목회자를 이단사상 전파자로 매도하는 정이철 목사에게 정중하게 말씀드립니다.

​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이철목사님께서 쓰신 글이 본인의 오해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과하시기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우리교회 성도들에게도 사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못 판단하고 왜곡되게 올린 글도 삭제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서머나교회, 부활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는 7가지 유형의 교회들을 언급하셨다. 그중에 두번째로 언급하신 교회가 바로 서머나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을 향한 주님의 책망이 없다. 오직 격려와 칭찬만 있다. 세상 천지에 격려와 칭찬만 들을 수 있는 교회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아무리 뛰어난 성도라 할지라도 한 가지쯤은 책망받을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그 어떤 책망도 듣지 않았다. 대체 이 교회는 어떤 교회였길래,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과분한 평가를 받았을까?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있을 텐데, 그때 칭찬듣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서머나교회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은 그것을 알아보자.

 

1. 예수님은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를 언급하셨을까?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어떤 유형의 교회로 분류할 수 있을까? 예수님에 의하면, 교회 총 7가지 유형의 교회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소아시아에 현존하고 있던 교회들의 모습이다. 그 교회들은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당시에 현존하고 있던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초기교회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있게 될 역사적인 교회의 유형과도 흡사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첫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에베소교회는 거짓 이단적교회를 분별하다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서, 기독교초기교회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예수부활이후~ A.D.96년경). 그리고 두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서머나교회는 로마의 도미시안황제의 황제숭배강요 때부터 기독교신앙이 로마의 공식종교로서 인정되기 전까지의 교회로서(A.D.96년경~313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세력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아 순교하는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버가모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세상과 타협하는 로마공인시대의 교회를 가리키고(A.D.313~590년), 두아디라교회는 영적인 지도가가 타락의 극치를 달리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A.Ds.590~1517년). 그리고 사데교회는 1517년 종교개혁이후의 1,700년까지 시대의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지녔지만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면서 갖은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교회는 말세지말의 교회상으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성하지만 영적으로 거의 죽어있어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러한 일곱교회의 기록 순서가 소아시아의 지역위치상으로 볼 때 시계가 돌아가는 방향과 똑같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러한 배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역시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기록 순서 또한 기독교회의 역사적인 변천순서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아시아에 있었던 두번째 교회 곧 로마의 도미시안황제 의한 황제숭배강요이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기독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서머나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서머나"라는 도시와 서머나교회의 상황을 알아보자.

  먼저, 서머나도시와 서머나교회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머나라는 이름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이라는 뜻이다. 특히 서머나라는 도시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서, 헬라의 유명한 시인 호머의 출생지라는 설이 있는 바로 그 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 역시 다른 도시처럼 황제숭배를 강요받던 도시였다. 만약 이것을 거절했을 경우에는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유대인들의 시기질투심이 한몫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A.D.70년을 기점으로 유대인들이 대거 서머나교회로 이주하였고, 서머나에서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당시 서머나도시의 절반이 유대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은 가만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단의 앞잡이인 로마정부를 꼬드겨 로마황제를 자신의 주님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들을 같이 철저히 죽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언급하신 경고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머나교회는 이처럼 불굴의 믿음, 모진 고난과 박해속에서도 지키는 자신의 믿음, 그리스도로부터 칭찬만 듣는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직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는 일곱교회 중에서 오직 서머나교회 뿐이다.

 

3.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그 교회의 상황과 칭찬 그리고 축복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으며, 서머나교회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서머나교회는 오직 칭찬만 받은 교회였는데, 그들은 어떤 칭찬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약속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계2:8~11)을 직접 헬라어에서 직역하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가. 서머나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8절. 그리고 서머나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에게 [단호하게] 쓰라(기록하라, 편지하라). 이것들을 처음이요 그리고 마자막인 분이 말한다. 이분은 [과거에] 죽었다 그리고 [과거에] 살아나셨다.

  그렇다. 서머나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계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첫째,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시다. 이는 예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던 하나님 자신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준다(사41:4,44:6,48:12).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48: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그리고 둘째, 그분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인가? 또한 그분은 일으키심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살아나신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을 보면, 공관복음서와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분은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으신 분이다(마16:21,17:23). 즉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입장에서 보면, 그분은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은 것이다(고전15:3~4,13~14,17,20, 행2:23~24,32). 하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인류구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신 것이며, 스스로 생명을 취하여 부활하신 것이다(계2:8).

  한편, 우리말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살아나셨다”고 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은 이 문장들은 전부 수동태문장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은”이라는 뜻이다(동사 에게이로의 직설법, 완료, 수동태, 3인칭, 단수). 하지만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복귀하신 후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을 취하여 부활하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죽임을 당할 것과) 제삼일에 살아나야(일으키심을 받을)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일으키심을 받을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고전15:3-4 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일으시킴을 받으사)

고전15:13-14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일으시키심을 받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일으키심을 받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일으키심을 받은)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일으키심을 받으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일으키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일으키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당신이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두려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주신 말씀이다. 비록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당하여 어떤 경우에는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고난과 죽음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죽임당해 순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첫 번째의 사망에 해당할 뿐이지, 둘째 사망의 해는 결코 받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고 싶으신 것이다.

1:18-19 [현재]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나를 위하여] 죽었었노라(,,,중디)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는 채로] 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나. 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해 무엇이라고 칭찬하셨는가?

9절.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알아온 채 있다. 그러나 [너는] [현재] 부요하니라. 그리고 자기자신을 유대인들이라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있는] 훼방(신성모독)[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회[].

  사실 서머나교회는 오직 칭찬만 들은 교회들 2개 교회 가운데 한 교회다. 그렇지만 그들을 겉으로만 본다면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으로는 극한 환난을 당하고 있었고, 신앙을 유지하려다보니 물질적인 궁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부자라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꾸중만 들었던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떠한 교회였는가? 그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한 교회였으나 영적으로 매우 가난한 교회라고 꾸지람만 들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다면,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 장본인은 누구였는가? 놀랍게도 그 핵심세력이 유대인들이었고, 로마정부가 유대인들과 함께 그 일을 하였던 것이다. A.D.70년의 일이다. 예루살렘 도시가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함락당하기 전에, 많은 유대인들이 서머나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나중에는 로마정부와 협잡을 통해서 서머나교회를 악랄하게 핍박했다. 실제로 서머나의 초대감독이었던 폴리갑이 빌라델비아 성도 11명과 함께 A.D.155년에 죽임당할 때에 그 핵심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처형날짜는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선느 그들이 비록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사탄의 모임이라고 격노하셨다.

 

다.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과 축복에 대한 약속은 무엇이었는가?

10절. [너는] [계속해서] 장차 [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있어라. 볼지어다. 장차 마귀가 너희들로부터 감옥 안으로 던지려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미래에] 십일의 환난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계속해서] [너희 자신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고 있어라. 그러면 [내가] [미래에]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승리관)을 줄 것이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에 대해 박해가 또 다가올 것임을 미리 알려주셨다. 성도들이 어떤 고난을 통과한다고 해서 그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사탄의 회인 유대인들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결탁하여 장래에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몇 사람은 죽게 할 것이라고 예고해주셨다. 하지만 더불어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몇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도의 생사여탈권은 참소하는 자 곧 사탄에게 있지 않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에 있다. 그러므로 사탄을 쥐고 계신 예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특별히 여기서 십일동안이라는 말씀에서 "열"이라는 숫자는 열 뿔(12:3, 13:1, 17:3,7,12,16)에서도 알려주듯, ‘충만이나 완전수이기는 하나 제한된 숫자임을 가르쳐준다. 이는 믿는 자들이 완전한 고통이 수반되는 고난을 받기는 하겠지만, 동시에 그 시간이 제한된 시간만 해당하며 몇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셈족의 독특한 표현에서도 나온다. 그것은 창24:55의 말씀이. 그것은 아주 짧은 제한된 기간을 가리킨다.

24: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렇다면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도들은 과연 언제까지 믿음이 지조를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죽을 때까지다. 순교하기까지 성도는 자신이 가진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순교의 현장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귀가 자신의 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성도들은 순교적인 죽음을 항상 각오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육신을 벗는 그날에, 생명의 면류관(승리관)을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면류관은 왕관(디아데마)이나 제관이 아니다. 그것은 올림픽의 최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승리관이다. 그렇다. 천국에 가면 제일 큰 상급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것은 주님과 신앙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는 자이다. 그리고 복음전하는 자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고난받고 순교하는 것에 대해 결코 슬퍼하지 말고 감사하고 기뻐하라.

  이어서 11절에성도 이기는 자들에게 대한 축복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11절. [현재] 귀를 가지고 있는 이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현재]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단호하게] 들어라. [현재] 이기고 있는 자는 두 번째의 죽음으로부터 결코 [단번에] 해를 받지는(부당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또다른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두 번째 죽음의 해를 결코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사망이란 하나님과 영영 분리되는 죽음을 가리키는데, 고난을 이겨낸 자들에게는 이것을 결코 맛보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기는 자가 결단코 불못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4. 나오며

  에베소교회가 바른 진리를 수호하고 그것을 분별하려다가 주의 종들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한다면, 서머나교회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과 궁핍함 속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켜낸 교회라고 할 것이다. 핍박과 고난을 이겨낸 서머나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와 함께 오직 칭찬만 들은 교회가 되었다. 그렇다.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과 궁핍함 앞에서 떨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미래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의 삶속에서 비굴한 사람이 되지 말라.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죽음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고, 그곳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고난이 온다고 해도 염려하지 말라. 제한된 시가만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당하라. 그리고 떨지 말라.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고 그분만을 따라가자. 건투를 빈다.

기도란 무엇이며, 어떤 기도가 과연 응답을 가져오는 기도일까? 우리는 기도와 부탁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른 채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해봤자 별로 소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는 기도를 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말씀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릴 수 있다.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다.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체험하지도 못한 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기도체험없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고 갈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주님이 말씀해주신, 응답받는 기도방법의 정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기도에도 원칙과 정석이 있다.

  기도에도 원칙이 있으며 정석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기도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에서 과연 원칙과 정석을 잘 따르고 있을까? 눅11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 곧 기도할 내용에 관하여 먼저 말씀해주셨다(눅11:1~4).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 즉 기도의 방법에 관하여서 말씀해주셨다(눅11:5~13).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가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이며,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가 바로 강청하는 벗의 비유의 핵심이다(눅11:5~8).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내용도 알고 있어야 하겟지만, 더불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방법대로 기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받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기도의 방법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곧 기도의 방법의 정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곧 마7:7 말씀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대부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하지만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사실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말씀은 주제별로 묶은 묶음집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은 시간차별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복음서가 아니라, 중요한 주제들을 한 묶음씩 묶어놓은 복음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들려주신 주옥같은 산상수훈의 말씀은 배경없이 그냥 등장한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은 다르다. 누가복음은 묶음집 복음서가 아니기 때문에 마7:7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마7:7의 말씀은 사실 강청하는 벗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방법에 관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3. 강청하는 벗의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기도의 방법에 관해 알려주셨던 강청하는 벗의 비유의 말씀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여행하는 C라는 친구가 어느날 예고없이 밤늦게 A라는 친구집에 찾아왔다. 그런데 A라는 친구는 C를 먹여줄 음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A라는 친구는 이웃의 B라는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B는 이미 문은 닫힌 상태에 있고 아이들도 함께 침소에 누워있으니, 어떻게 일어나서 음식을 주겠느냐며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하지만 A라는 친구의 요청은 끈질기다. 계속해서 친구를 불러가며 문을 두드리면서 떡덩이를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B는 그가 자신의 벗됨을 인하여서는 주지 않겠지만 그의 간청함으로 인하여 그에게 떡덩이를 빌려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7:7의 말씀 곧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 배경을 알면,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단순히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웃집 친구 C에게 떡을 빌리는 A라는 친구의 강청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A라는 친구가 C라는 친구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B라는 친구에게 부탁을 한 것이 중요한 요지다. 그런데 A라는 친구는 한 번만 슬쩍 말을 던져보고 그냥 되돌아갈 친구가 아니었다. C라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어찌하든지 B로부터 떡덩어리를 가져갈 속셈으로 그곳에 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쉬지 않고 B를 불러대면서 계속해서 문을 노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왜 B라는 친구는 그 늦은 밤중에 일어나서 A라는 친구에게 떡덩이를 빌려주어야 했는가? 친구사이여서 그랬는가? 아니다. 그럼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귀찮아서다. 안 주면 계속해서 큰 소리를 자기를 불러가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릴 것이니, 차라리 빨리 주고 돌려보내버리기 위해 떡덩이를 빌려준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한글개역개정판에서는 "간청함을 인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이상의 뜻을 지닌 단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몰염치로 인하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끈질기게 졸라대며 강청하되, 염치 불구하고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빵을 빌려줄 때까지 염치도 잊은 채 뻔뻔스러울 만치 계속해서 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4. 기도란 무엇이며, 부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하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어떤 기도가 결국에 응답을 받는가를 배울 수 있다.

  먼저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이 비유에서 기도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 내게는 없기에 그것을 내줄 수 있는 대상을 찾아가서 그에게 요청하되 그것을 얻어오는 것까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 기도가 과연 진짜 기도인지 아니면 부탁으로 하는 것인지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부탁은 해달라고 요청하는 단계에서 끝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들어주면 좋고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바로 부탁인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다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결국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도가 그동안 부탁으로 끝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기도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탁만 하는 기도였다면, 이제부터는 정말 얻는 기도로 바꾸어가기를 간곡히 바란다.

 

5. 기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정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과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정석의 기도인가? 그것은 강청하는 기도다. 기도에도 정석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보자. 부르짖는 기도가 정석인가 아니면 조용히 묵상으로 하는 기도가 정석인가? 그것은 전자다. 왜냐하면 부르짖을 때에 그 사람의 간절함이 전달되며, 부르짖지 아니하면 생각을 귀신이 사로잡아 잠념에 빠지게 하고 졸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조건 통성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강청하는 기도가 정석인가 아니면 고상하게 드리는 기도가 정석인가? 그렇다. 강청하는 기도가 정석이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그렇다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왜 B라는 친구가 A라는 친구에게 떡덩이를 빌려주고야 말았는가? 그것은 A가 하도 강청해서다. 계속해서 끈질기게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안 주면 줄 때까지 그렇게 요청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라는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계속해서] 괴롭하게 하지 말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A라는 친구가 끝질기게 요청하여 B라는 친구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란 끈질기게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을 얻어낼 때까지 말이다. 그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도에 관한 말씀의 요약으로 주셨던 마7:7의 말씀(=눅11:9)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도 전부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들이다. 여기서 잠깐, 헬라어에만 있는 과거 명령법과 현재명령법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헬라어구문에서 과거 명령법은 한 번 단호하게 결단성있게 행동할 것을 명령할 때에 사용하는 명령법이다. 하지만 현재 명령법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줄기차게 행동해야 할 것을 명령할 때에 사용하는 명령법이다. 그런데 마7:7의 말씀(=눅11:9)은 전부다 현재명령법 구문들이다. 다시 말해, 기도에 관한 명령은 한 번만 구하고, 한 번만 찾고, 한 번만 두드리라는 명령이 아닌 것이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고로 우리는 강청하는 벗의 비유를 통해서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번만 기도하고 끝낼 것이 아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는 끈질기게 계속해서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인 것이다.

 

6.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기도는 어떠한가?

  당신은 과연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몇 번 기도해보다가 어떤 응답이 없으면 "이건 주님의 뜻이 아닌가 보네'하고 끝내버리는 기도가 아닌가?내가 죄를 너무 많이 지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기도를 쉬고 있지는 아니한가? 아니면 내가 너무 내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이기적인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안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예 기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이것 저것 따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려하다는, 기도 하나 드리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할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기꺼이 기도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번 기도했으면 끈질기게 응답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줄기차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7. 나오며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비유를 딱 3번만 말씀하셨다. 그런데 첫번째 비유(눅11:5~8)와 두번째 비유(눅18:1~8)가 다 강청하라는 기도의 방법에 관한 비유였다. 이중 두번째 비유는 눅18:1~8에 나오는데, 불의한 재판관에게 송사를 요청하는 어느 과부에 관한 비유다. 이 비유에서도 과부는 강청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못된 재판관이었다. 하지만 하도 그 여인이 자신을 괴롭게 하므로 재판해주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의 원칙은 바로 강청기도인 것이다. 고상하게 주님의 뜻을 다 헤아려보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 많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한 사람들이 생각해볼 기도이지 이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이 생각해볼 기도가 아니다. 내 필요를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지금 당장 강청하는 기도를 시작해보라. 주님은 오늘도 강청하며 끈질기게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찾고 계시며, 그러한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건투를 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포기한다.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더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혹시 삶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돈벌어서 해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우리 사회가 확실히 먹고 살기에는 어느정도 부족함이 없는 시대에 되어버린 것일까? 그런데 만약 기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아본 일이 없는 자가 어찌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즉 기도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기도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할까?

  믿는 자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을 목숨 걸고 하지 않는다.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기도가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못살고 못입고 하던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닐듯 싶다. 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과연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러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크게 실망하지도 않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왜 이렇게 뜨뜻미지근한 신앙이 되어버렸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도가 왜 필요하며, 어떤 기도를 드려야 제대로 응받받는 기도를 드리는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는 성도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요소이지만 어떤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가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보고자 한다.

 

2. 왜 성도들은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왜 필요한 것일까? 성도들은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며 비는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기도하는 일이다. 또한 기도는 시간과 땀과 눈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기도도 일종의 노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일은 육체로 보기에는 약간 피곤한 일이 될 것이며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왠만한 문제라면 그냥 자신이 풀어버리려고 하지 하나님 앞에 일부러 기도하러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며 그분이 나를 위해 준비해둔 천국이 진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때에 비로소 자기에게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땀과 눈물을 필요로하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기도는 정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천국의 실재를 믿을 수 있는 좋은 도구이자,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통로이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3. 기도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가?

  그런데 성도들의 기도에 있어서 가장 큰 관건은 과연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주실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그것만 확실히 알 수 있다면 많은 성도들이 기도에 뛰어들 것이다. 자, 묻겠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기도를 들으시며 또한 응답해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기도에 관한 놀라운 영적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다. 그것은 마7:7~8에 나온다.

마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가. 기도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기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먼저, 기도는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구한다'는 뜻은 헬라어로 '아이테오'라는 동사로서 '요청한다.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 동사와 비슷한 단어가 또 있는데 그것은 "기도한다(프로슈코마이)"는 동사와 "부르짖는다(외친다, 소리지른다)(크라조)"는 동사가 있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며,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그냥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어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귀가 먹으셨는가? 왜 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하실까? 그것은 부르짖는 태도가 기도의 바른 자세이기 때문이리라. 부르짖는 것은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응답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가? 그것은 동사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기도한다는 동사들이 거의 전부가 다 현재 명령법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헬라어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용법으로서, 기도는 한 번만 굳게 마음먹고 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동사에 대한 명령법의 형태가 과거 명령형이 아니라, 현재 명령형이기 때문이다. 헬라어 명령법에는 현재 명령법과 과거 명령법이 있는데, 현재 명령법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행하라는 명령이지만, 과거 명령법은 단호하게 한 번 굳게 마음을 멀고 행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기도에 관한 명령어는 거의가 다 현재 명령형으로 나온다. 이는 기도는 한 번으로 끝낼 성질이 아니며, 끊임없이 계속해서 해야 할 일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기도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주실 때에, "항상 기도하고 있어야 하고, 낙심하지 말고 있어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해주신 적이 있으셨다(눅18:1). 그것은 억울한 일에 대해 재판을 요청하는 어느 가난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비유에 들어있다. 어떤 도시에 돈만 밝히는 나쁜 재판관이 있었다. 그런데 한 과부가 그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쁜 재판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과부가 찾아와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재판관이 마음을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고 만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18:7-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분이 들어줄 때까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께 요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한다(마7:7~8). 한 번만 기도드리고 끝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나하면, "구하라"는 동사가 현재 명령형 형태이며,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는 동사가 미래 수동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도는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며, 기도에 응답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있을 것인데 그 시기는 우리가 정할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뜻이다. 특히 기도응답구문은 능동태구문이 아니다. 이는 '그것이 주어질 것이다'는 수동태 문장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기도가 끝마쳐질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기도는 시작하지만 기도를 끝내시는 분은 오직 그분이다. 기도응답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기도를 시작했으면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분으로부터 기도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4. 기도는 한 번으로 끝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계속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한 번만 드려도 기도에 응답해주시면 참 좋을텐데, 왜 계속해서 끊임없이 요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드리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렇다. 초신자 때에 하나님은 기도에 금방 응답해주신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가 하나님이 살아계신지를 알고 하나님을 믿고 붙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한 번의 기도에 즉각즉각 응답하시는 경우는 흔지 않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요청하고 찾고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고 싶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정말 하나님만을 찾고 의지하는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다(눅18:8).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정말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쉬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도 않을 것이며 중도에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응답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5.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분이시다(시65:2). 그분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소리를 들으신다. 사실 그분은 우리 지구로부터 이억만리 떨어진 머나먼 셋째하늘에 계신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을까? 우리는 옆집에서 말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이억만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는 우리 인간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지구에는 수만명의 기독교인들이 동시에 기도할텐데 어떻게 기도를 들으실 수 있을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심을 알 수 있다(창17:1). 그분은 시공간에 제한을 받는 피조물이 결코 아니시다. 그분은 창조주요 절대자요 전능자이시다. 그래서 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 우주 가운데 오직 그분만이 신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기도를 동시에 들으실 수 있고 동시에 응답하실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면 천사가 그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보고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우리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보고할 때에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금향로에 담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소부재하신 신이므로 동시에 우리의 기도를 다 각각 따로 들으시고 동시에 응답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만큼은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귀로 들으신다(시18:6, 6:9). 다만 천사가 중간에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고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를 다 천사가 담아서 하나님께서 바친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임을 알라. 천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시대 참 신앙의 인물들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직접 듣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히스기야왕을 보라. 그는 자신이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힘을 벗어나는 일에 부딪혔을 때에 하나님 앞에 가서 엎드렸다(왕하19:20, 20:5). 그렇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한 창조주이며 절대자이신 것이다.

 

6. 나오며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사무엘선지자처럼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드린 기도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하늘에 향처럼 연기가 되어 올라가기 때문이다(계8:3~5). 그래서 하나님께 전달된다. 그러나 기도는 한 번으로 끝낼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며, 상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하는 봉사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면, 기도도 일종의 자신의 상급이 되어 천국집을 멋지게 꾸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힘들지만 자기의 주변을 둘러보라. 의외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내 집안과 친척과 동료가, 내 교회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게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 보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기도를 일삼아 하기를 바라며,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가 많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훨씬 더 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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