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는 지도자들이 있다. 누가 과연 주님께 칭찬받을 만한 지도자인가? 반대로 누가 과연 주님께 책망을 듣는 지도자인가? 요한삼서는 15절 밖에 안 되는 편지이지만 여기에 그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 들어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람들은 늘 진리의 동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진리의 동역자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며, 이런 자들에게는 어떤 상이 기다리고 있는가? 요한삼서를 통해서 사도 요한이 그토록 축복해주고 싶어하는 지도자가 누군지를 한 번 찾아보자.

2022-01-2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9)[최종회]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과 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책망 및 칭찬(요삼1: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D8A1uHxrHA [혹은 https://tv.naver.com/v/24851377 ] 

 

1. 들어가며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보낸 세 번째 서신으로 알려진 책이다. 사도 요한은 이제 나이가 많아 자신을 '장로'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자기로부터 복음을 받아서 영적인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가이오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고로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목회자에게 보낸 일종의 목회 서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사도 요한이 개인적으로 가이오를 향한 감사와 기대와 권면의 말씀이 들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사도 요한은 왜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을까? 그리고 그 편지에 언급한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고, 조용기 목사님으로 인하여 삼중 축복으로 말해지고 있는 요한삼서 1:2의 말씀만이 아니라, 요한삼서 전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무엇에 감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하여 A.D.90~95년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한 교회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으며, 목회자와 성도 간에는 어떤 협력 관계가 필요한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 지도자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교회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지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삼서, 어떤 책인가?

  요한삼서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장로인 사도 요한이 A.D.90~95년경 소아시아에 있는 어떤 교회의 '가이오'라는 지도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한이다. 일종의 개인 서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의 수신자인 '가이오'는 어떤 교회의 지도급에 있는 인사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굳이 구분하자면, 일종의 '목회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사도 요한은 당신이 파송했던 순회 전도자들로부터 가이오와 그가 속한 교회의 사정을 들었던 것 같다(3절). 그러자 그는 자신이 이전에 그 교회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또한 들은 소식을 가지고 가이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 이때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데메드리오'라는 순회 전도자의 손에 들려서 보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이 편지가 짧게 기록된 것임을 알리면서, 곧 찾아가서 대면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 책은 총 15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문장이지만, 정확하게 편지 형식을 갖추어 쓴 서신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송수신자와 축도(1~4절)가 도입부에 나오고, 본론부(5~12절)에서 자신의 용건을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끝인사(13~15절)로서 이 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사도 요한이 요한삼서를 통해서 가이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소식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정리하면,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 전도 사역자를 영접하여 그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가이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그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또 권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3. '가이오'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되어서 사도 요한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삼서의 수신자로 거론되고 있는 '가이오'는 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가이오가 누군지에 대해서 그를 모든 면에서 다 알 수는 없다. 사실 그가 어느 교회에 속한 일꾼인지도 성경에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그를 그 교회의 참된 일꾼이자 지도자로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특히 진리 안에서 사도 요한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1절, 5절).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편지의 첫 부분인 도입부와 그리고 중간 부분인 본론부의 앞부분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사도 요한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였으며(1절), 둘째로, 그는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 있던 자였다(3절). 이것을 두고 사도 요한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셋째로, 그는 사도 요한의 전도를 통해 영적인 자녀가 되었던 사람 같아 보인다(4절). 그리고 넷째, 그는 그 교회를 방문한 순회 전도자들을 잘 영접하고 그들을 지극히 대접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5절). 그러므로 가이오라는 인물은 사도 요한이 매우 칭찬하는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도 요한이 '가이오'라는 지도자에게 꼭 전해 주고 싶어했던 말씀은 무엇인가?

  그럼, 사도 요한이 편지를 써서 가이오에게 꼭 들려 주고자 했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가운데 있는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대접한 것에 대하여 가이오를 칭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렇다. 가이오는 자기 교회를 방문하는 순회 전도자를 잘 영접하였으며 또한 그러한 복음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해 주고 교회를 떠나가는 날에는 사역자들이 다음에 머물 장소까지 잘 가실 수 있도록 교통비와 숙박비와 식비 등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머물고 있던 에베소 교회까지도 그 교회를 다녀온 순회 전도자들을 통해 그 교회의 소식을 잘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가이오가 베푼 사랑과 선한 행위가 너무 귀하다는 것이다. 사실 순회 전도자들은 자기가 복음을 전파한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제공받지 않는다면 힘겨운 선교생활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늘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가이오는 달랐다는 것이다. 사실 순회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방인에게서는 어떤 사례나 답례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렇게 순회 전도자를 잘 챙겨 준 그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 즉 '진리의 동역자'라고까지 불러 주었다. 그러므로 오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역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었다고 하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냥 안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복음 선교 사역에 기도나 물질로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8절).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누가 과연 복음 전파 사역의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최전방 일선에 나가서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야말로 복음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사역인 것 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전방 사역자가 그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후방에서 병참과 무기를 비롯하여 그에게 여러가지 보급품을 잘 전달해 주는 후방 사역자가 꼭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해서 복음 전파 사역에는 아무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오히려 후방 사역자들도 전방 사역자들 못지 않게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전도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디오드레베'는 어떤 인물이며, 왜 그는 사도 요한으로 꾸중을 듣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본론부 후반에 등장하는 '디오드레베'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9~10절의 말씀에 따르면, 그는 첫째, 가이오가 지도자로 있는 바로 그 교회의 지도자들 중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로 보인다(9절). 왜냐햐면 그는 교회에서 성도들을 출교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10절). 둘째, 그는 사도 요한의 복음 사역자들을 악한 말로 헐뜯었던 자였다는 것이다(10절). 그가 비난했던 사역자들 안에는 심지어 사도 요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뿐만 아니라 그는 사도 요한이 보낸 복음 순회 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고 배척했던 인물이다(10절). 그리고 넷째, 성도들 중에서 순회 전도자들을 환영하고 환대하는 성도들을 교회에서 출교시키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한 말씀으로 다섯째,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교만한 자요 안하무인이었다는 것이다(9절). 그는 교회에서 항상 첫째가 되기를 원했었다. 누군가를 다스리고 지배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곧 그 교회에서 중요한 법이었고 그가 한 번 말하면 다른 사람은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고 제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순회 전도자들이 자기 교회를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들을 섬기거나 대접할 줄을 몰랐으며, 교회 성도들 중 그들을 대접하는 자들을 오히려 책망하고 출교하는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낮아지지 못했던 교만한 자요, 자기 말을 주입시키려 하는 강포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가이오 더러 절대 그를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고 권면한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악한 자요 더욱이 하나님도 본 채 있지 않은 자였기 때문이다(11절). 그는 사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였다. 그는 영적으로 볼 때에도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자였던 것이다. 

 

6. '데메드리오'는 누구이며, 그는 무슨 일 때문에 이 편지에 등장하고 있는가?

  이제는 요한삼서에 등장하는 마지막 인물에 대해 주목해 보자. 그는 누구였는가? 그의 이름은 '데메드리오'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도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다. 특히 사도 요한이 시무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의 증언이 참이라고 인정해 주는 자였다. 그는 한 마디로 순회 전도자로서 모든 교회에서 인정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 나오는 데메드리오는 장로인 사도 요한이 쓴 편지를 가이오에게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자로서, 가이오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순회 전도자였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데메드리오가 가이오의 교회에 당도하면 그를 합당하게 전송하고 그의 필요를 채워 줄 것을 권면하였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은 채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요한삼서는 장로인 사도 요한이 어떤 교회의 지도자였던 가이오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한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지도자의 자격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어떤 지도자는 하나님께 칭찬들을 만한 지도자였지만 반대로 어떤 지도자는 악한 지도자로서 성도들이 멀리 해야 할 지도자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중에 가이오는 정말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있는 참된 지도자였기에 사도 요한은 그를 축복한다. 그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그의 육체도 강건하기를 기도한다(2절).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교회를 방문하는 복음 전파자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진리의 동역자로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상을 얻을 지도자였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있었다. 디오드레베는 악한 지도자였다. 순회 복음 전도자를 영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악한 말로 비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회 성도들이 복음 전도자를 대접했다고 그를 교회에서 출교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으뜸되기를 좋아하여 교회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였지 도무지 섬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본받고 누구를 귀감으로 삼을 것인가? 덧붙여 사도 요한은 말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자와 함께 일하는 자가 곧 진리의 동역자라는 것이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이들에게 같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더욱더 주 안에서 복음 전파에 노력하고 복음 전파자와 함께 동역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다운로드] 요한삼서 헬라어 직역 및 명령과 선포문(https://dongtanms.kr/89801)

1. 요한삼서강해.pptx

2. 요한삼서강해.pdf

 

2022년 01월 26일(수)

정병진목사

 

요한이서는 누가 썼으며, 누구에게 쓴 책인가? 이 책을 왜 초기 교회 사람들은 '요한이서'라고 명명했는가? 사도 요한은 왜 요한일서 외에도 요한이서의 편지를 써 보내야만 했는가? 초신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또한 누구를 가장 조심해야 하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왜 이단세력들을 가까이하면 아니 되는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오늘의 말씀이다. 2022-01-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8)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미혹하는 자를 물리치는 방법(요이1: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qdK5RJyMtQ [혹은 https://tv.naver.com/v/24488603 ]

 

1. 들어가며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사실 요한이서는 성도들에게 왠지 낯설은 책이다. 왜냐하면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 비하면 그리 많이 읽혀지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서 이어서 나오는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의 저자였던 사도 요한이 쓴 것일까? 아니면 '장로'로 지명된 어떤 특정한 무명의 인물이 기록한 것인가? 그리고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대체 어떤 관련이 있길래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 있는가? 이제 곧 요한이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요한이서는 전형적인 편지 형식의 서신서이다. 편지로서 요한이서를 보면 오히려 요한일서가 파격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송신자와 수신자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문안인사나 끝인사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이서와 요한일서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가정하에 요한이서를 본다면, 이 책은 과연 어떤 목적을 따라 기록된 것인가? 요한일서에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내용이 있어서 저자가 그것을 요한이서에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요한일서의 편지를 보내고 난 후 수신자들에게 발생한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에 저자가 다시 요한이서를 써서 보낸 것인가? 기왕 요한이서를 공부하려 들어왔다면, 지금이야말로 요한이서를 제대로 공부할 때가 아닌가 싶다. 

 

2.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요한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요한이서는 이 책을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는 분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이1:1). 그렇다면 이 '장로'라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헬라어로 보니, '호 프레스뷔테로스'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그 장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로'는 사도 요한인가 아니면 다른 특정한 인물인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요한이서의 내용과 필체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 제목이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 붙어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이서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용어들이 요한일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리, 아버지와 아들, 사랑, 새 계명, 처음부터, 미혹하는 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 적그리스도" 등이 아예 똑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중심주제도 거의 같다.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미혹하는 자를 주의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이서는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구체적이고 실체적이다. 즉 요한일서에 비해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 사도 요한은 그의 나이가 90세 정도는 되었기에 장로라고 명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초대 교부들 대부분은 요한이서를 사도 요한 저작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폴리캅(Polycarp), 이레네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이 그렇다. 다만 이 책의 저자가 자기자신을 가리켜 ‘장로’(1:1)로 표현한 것을 두고 사도 요한이 아니라 다른 익명의 장로(Eusebius, Papias)로 추측하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장로’라는 호칭이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연륜이 많은 자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벧전 5:1), '장로'라는 호칭은 사도 요한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나이가 많은 사도 요한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 책은 대체 누구에게 써 보낸 책인가?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함을 받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1:1))" 혹은 "선택함을 받은 너의 자매들의 자녀들(1;13)"이 그 수신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부녀' 혹은 '너'로 지칭되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부녀'를 헬라어로 보면, '퀴리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퀴리오스'('주')의 여성형 명사로서, 어떤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퀴리아'를 어떤 개인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우리'와 '너희'가 비교되면서 등장하는데 개인을 지칭하기 보다는 교회공동체를 향해 부르는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이서의 수신자로 등장하는 '퀴리아'란 아마도 교회공동체를 지칭하는 대유명사인 듯 하다. 그러므로 여기어 덧붙혀 퀴리아의 자녀들 역시 교회공동체의 각 구성원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4. 요한이서는 왜 기록했으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장로는 왜 요한이서를 기록해야 했는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본 저작을 나이 많은 장로였던 사도 요한으로 가정한다면,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고 얼마 안 있어서 써 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본 서신의 내용이 요한일서를 읽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교회공동체를 향한 사도 요한의 칭찬과 기쁨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이1:4~6). 그리고 둘째, 이 편지를 써 보내야 했던 직접적인 목적이 중후반에 나오기 때문이다(요이1:7~11). 그것은 바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인 세력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다. 그것도 그들을 결코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에 어떤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장로 요한은 이 책을 곧이어 써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이서는 편지 형식을 고스란히 갖춘 전형적인 서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를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나면, 장로 요한이 에베소교회나 혹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회람용 서신으로 이 편지를 기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편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이 편지의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전하는 인삿말(1:1~3)이다. 그리고 둘째는 본 편지를 보내는 2가지 주된 목적(1:4~11)이 나온다. 그리고 셋째는 끝 인삿말(1;12~13)이 나온다. 

 

5. 장로 요한이 첫 인사말에서 전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장로 요한은 서두 인삿말(1:1~3)에서 각 절마다 '진리'에 대해 언급한다. 이 편지의 발신자인 장로 요한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채 있는 모든 자들"도 역시 수신자인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언급한다(1절). 그리고 진리가 장로 요한 및 그와 함께 있는 이들 안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그 진리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한다(2절). 그리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와서 진리와 진리 안에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3절). 그렇다면 장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진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진라('알레데이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이서의 말씀과 함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책을 함께 검토해본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장로 요한이 쓰고 있는 '진리'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도 동시에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말이다(요1:17, 14:6). 또한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는 분이시다(요8:40,45). 그리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말씀 또한 진리다(요17:17,8:40) 더욱이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요15:26, 16;13).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요한이서에서는 진리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이 나온다. 그것은 '진리'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요이1:2,9). 고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이 곧 진리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말씀이 곧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하는 말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마귀가 하는 말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거짓이다(요8:44).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인량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 때에 그 사람은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17:3). 그래서 장로 요한은 진리를 받은 자는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행하는) 자라고 말했다. 특히 장로 요한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썼다(요이1:4).

 

6.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어 장로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 때문에 매우 기뻐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어 아들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소유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것이며, 진리를 소유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장로 요한은 "진리가 우리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요이1;2)"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행하고) 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진리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대로 행하는 것을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요,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이1:4~6).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려고 화목제물로써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따로 있는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요1:1~3,14,18, 딤전3:16),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마1:23). 즉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은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셨던 것이다(사9: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 그리고 그분의 몸을 우리 인류의 화목제물이자 속죄제물로 바치신 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된 모든 믿는 이들은 자기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품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자 처음부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요이1:6).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7. 당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늙은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왜 그토록 심히 중요하게 여긴 것일까? 특히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을 적그리스요 미혹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진술에는 엄청난 더 큰 비밀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에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인정은 결국 이단이 되느냐 정통 신안을 갖는 것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세력들의 미혹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각기 다른 존재로 보고 있었으며, 예수와 그리스도를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 자체를 부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또한 부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이와같은 많은 진술들을 부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주 크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고 혹은 부인하는 것은 그 바로 진리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미혹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를 분별해주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과 멸망 곧 천국과 지옥이 갈려지기 때문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만 보았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문제라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인지 아닌지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안았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정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은 죄를 지은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지 않으셨다면 모든 인류는 죄의 댓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또한 죽어서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모람들 가운데에는 그 어떤 사람도 대속제물로 죽을만한 흠없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부인하는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8.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받아주지 말고 멀리해야 하는가?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자기의 집 안으로 모셔들이지 말고 그들을 멀리 해야 하는가? 심지어 노 사도는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암덩어리로 누룩과 같이 그들을 용납할 때 많은 영혼이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고는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행하신 것인데,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 큰 일이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육신은 일종의 타락이다. 그들은 신성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는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초신자들이 잘 알 리가 없다. 더욱이 영지주의자들은 초기교회의 성도들의 손님대접 습관을 악이용하려고 하기 땜누에 그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손님대접하는 일은 구약시대부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따라, 히브리인들이나 지금의 베두인들까지도 기본적으로 실천하는 풍습이었다(히13;2, 롬12;13, 눅9:3~5, 10:7~11). 그런데 이것을 악이용하여 마치 자기들이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인량 가장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은 쉽게 이들의 마수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노 사도는 요한일서를 보낸 후에 빨리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둘째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교회가 이단세력에 의해 잠식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는 아예 집에 들이지도 말라.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도 건네지 말라. 만약 그들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들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단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장로 요한은 일차적으로 그런 자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힘써 일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이1:8a).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온전한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요이1:8b). 그리하여 이단에 빠진 것을 회개하지 못하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영원한 멸망에 처하고 말 것이다. 

 

9. 나오며

  장로 요한은 위와 같은 교회의 현실과 이단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기에 교회의 성도들에게 요한일서의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마긍로 파피루스 종이나 잉크로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요이1:12~13). 그렇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이단 세력들이 여기 저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 특히 요즘 들어와 이단들은 성도들을 호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알레고리컬 성경해석법을 들이밀며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비유로 하신 말씀의의 실체를 알려준다고 접근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비밀을 제대로 깨우쳐주는 것인량 가장하여 미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이단들은 대부분 지식을 사용하는 악한 영들 가운데 상당히 높은 계급의 영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성경의 비유해석과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온다면 먼저 그를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믿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단은 교만한 말장난으로 그것을 피해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에 장로 요한은 초신자들은 이러한 이단 세력들을 처음부터 아예 용납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마치 훌륭한 성경교사인 것처럼 가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에, 분별력 없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들의 미혹에 금방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 사도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빨리 내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때 사용할 기준은 이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첫째,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부인하는가 인정하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와 예수님이 한 분이신가 아닌가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거나 잘못 전하는 자는 이단의 세력이 될 수 있기에, 이런 자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한 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딛3:10~11). 

 

2022년 01월 0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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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01-05 요한이서 헬라어직역과 명령과선포.pptx

2. 2022-01-05 요한이서 헬라어직역과 명령과선포.PDF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으며 또한 악한 자 사탄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런데 사도 요한은 거듭난 성도들이 악한 사탄마귀를 이기는 것까지 목표를 두고 요한일서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래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기본적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세상과 마귀는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꼭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세상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21-12-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7) 세상과 그리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요건은 무엇인가?(요일5:4~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9oJxCxVEGRs [혹은 https://tv.naver.com/v/24416355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용 양육교재와 비슷하며, 초기영지주의 이단예방을 위한 좋은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이 신앙의 기본요소를 갖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분과 교제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요한일서의 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요한일서의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사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다. 이 말씀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의미와, 내가 생명을 자기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 싸움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요한일서 5:4~21의 위치는?

  요한일서는 구분짓기가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주제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굳이 요한일서를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처음 1~2장은 하나님과의 교제(코이노니아)라는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놈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죄'라고 정의하고 그 죄는 오직 자백함으로 용서받을 서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결국에는 죄짓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그는 마귀에게 속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어서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적인 관점에서 성도의 합당한 신앙과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4~21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서 성도란 하나님께로부 난 자들인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자로서, 이들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사용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자는 사탄마귀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승리하는 비결을 이 부분이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세상을 이기는 성도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몇 가지로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을 칭하는 호칭을 통해 알려준다(요일2:12~14). 거기에 보면, 성도들에 관한 호칭이 3~4자기 정도가 나온다. 그것들은 '자녀들' 혹은 '아이들'이 있고, '청년들'과 '아비들'이 있다(요일2:12~14). 여기서 '자녀들'이란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계신 이"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4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영적으로 강한 자들로서 영적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물리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란 어린아이의 단계를 넘어선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 모두는 이미 회개하여 죄사함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을 넘어서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 곧 악한 자 자체를 대적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4. 성도들이 꼭 이겨야 할 2가지 대상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을 요한일서 5:4~21에서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언급한다. 그 중의 하나는 '세상'이고, 또 하나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다. 무릇 성도라면 세상을 이겨야 하고 사탄마귀를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세상이나 혹은 마귀는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때 사용하는 무기이자 방편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 요한일서 5:4~17절에서 언급을 하고, 이어서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는 요한일서 5:18~21에서 언급을 한다. 

 

5. 어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할 때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여기서에 언급된 '세상'이라는 단어는 이미 요한일서 2:16~17에서 말했던  바로 그 단어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즉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할 뿐더러 사탄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이 세상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에게 때로는 인기와 명예를 안겨주기도 하고, 칭찬과 부귀를 안겨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의 유혹을 잘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 세상의 본질이 바로 사탄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놓여) 있다"고 말한다(요일5:19).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더라도 어찌하든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성도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고 또한 이길 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오직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요일5:5).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 태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성도가 또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 요한은 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길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일서에서도 사도 요한이 답하고 있지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을 지칭할 때에 그렇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나타내신 것이라는 말한다. 즉 나타난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서 여호와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은 언제는 영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이지,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인 주제에 자기를 하나님으로 빙자하여 말하느냐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다.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분은 하나님으로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기에, 자기자신을 아들이라고 늘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아들로도 계시고 그때부터는 아버지로도 함께 계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에는, 육체를 입지 않는 신성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하였고 사람의 태를 빌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려 할 때에 조심할 것은 그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분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사탄마귀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해 주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요일5:6~9). 그리고 세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이 땅에 보내어진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증거 곧 '물'과 '피'와 '그영(보혜사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물과 피와 성령이 어떤 것이기에, 이 셋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는가? 사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둘이다. 그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증거'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그중에 사람들의 증거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있었으나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던 자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이 지금 그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증거를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이들은 죽고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증거 이외에 또다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다. 그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것이다. 왜나하면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물'과 '피'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실 때 취하신 인성의 일부분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그때 물질세계에 속한 것을 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육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육체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 몸을 가지고 승천하심으로 그 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그렇지만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는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천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늘에 가셔서 그분이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오셨으며, 이 육체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해주시고 있다(요15:26).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기도 하신다(요14: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인 것이다. 

 

8.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 속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육체를 입으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분이 직접 인류의 죄를 대신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히9:22). 그리고 죽음이 인류가 범죄한 죄값이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인류의 죄를 속죄할 피는 더러운 피로서는 아니 되고, 깨끗한 피여야 했기 때문에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피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지고 오셨던 것들 중에 중요한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실 때에 그 속에 생명을 주어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이 땅에 있는 유한한 생명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는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이었다. 즉 독생자였던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만을 가지고 있으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 주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서 생명나무를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라는것이다. 하지만 첫째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둘째 아담으로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죽고 부할하신 후에 그는 생명을 나눠주시기 시작하셨는데, 그가 쓴 방법은 당신 대신에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시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방식으로 오심으로서, 그분이 오실 때에는 영으로 오시지만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오시어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있는 한 하나님의 생명도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죽은 날까지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 어떤 일이 불어닥쳐도 그분을 부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던 성령께서도 떠나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 생명은 그가 죽는 날까지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계속해서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범하였어도 성령은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죄를 지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령께서도 그 사람을 떠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 속에는 누구나 다 영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아들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잇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자기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5:1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고 있는 너희에게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요일5:13)". 

 

9.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믿는 이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말은 자기 속에 보혜사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고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주는 영'이라고 하였다(고전15:45). 그분이 생명주는 영 곧 보혜사 성령이 되어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나 성령이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이 발현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상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람이 그 생명을 받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의 죽어있던 영이 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성질이 곧 빛이요 진리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어둠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거짓말도 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이 생명을 받은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진리를 말하며,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요한 사도는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부부터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죄를 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요일5:14~17).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10. 죄들 중에 '사망에 이르는 죄'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난제가 하나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다. 대체 사도 요한은 어떤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했으며, 왜 그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겠노라고 말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성령훼방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하는 것을 성령훼방죄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 보다 더 원문상으로 정확히 말하면, '사망을 향하여 있는 죄'라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하니 '사망에 이르는 죄'는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은 '생명'의 반대말이며, 여기에서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망도 역시 육체적인 사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사망을 뜻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해,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짓는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영원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불신앙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죽을 때에 영원한 사망 안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였지만 영원한 사망에 처하는 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한 번 믿었다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 죄와 상관없이 자신은 구원받는다고 믿는 죄를 가리킨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면 그는 죽는 날 그이 속에 들어있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실 것이다. 죄를 다 처리하지 못한 자까지 주님은 그를 천국에 억지로 데려가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직 죄를 청산한 자만 천국에 데려가신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사람이 되셨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내지 못한 자는 결국 남게 된다. 죄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는 매일 자기의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책망을 멀리하고 죄짓고 살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우리 속에서 책망하시고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성령의 책망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구약의 사울왕처럼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이러한 죄가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이다. 

 

11. 악한 자 사탄을 이기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탄마귀를 '악한 자'라고 칭하였다. 그것도 다섯 번 나오는데, 다 사탄마귀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요일2:13~14, 3:12, 5:18~19). 그는 선한 자가 아니라 악한 자다. 그는 선과 악을 알고 있지만 악에 물들어 있는 자다. 그는 악을 밥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는 한 마디로 악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잔인한 자다. 그는 냉혹한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에게 속아넘어가 그의 영원히 갇혀 있을 감옥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의 공격들 즉 유혹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과 지혜만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롭고 미가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상당히 큰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의 힘과 타락한 본성에 휩싸여 있는 우리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탄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사탄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힘입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탄마귀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일4:4). 사탄마귀는 피조물이고,우리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사탄마귀의 권세와 능력과 지혜는 제한적이지만 우리 주님은 무제한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힘입는다면 그를 거뜬히 이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듭 태어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셨던 자인 예수께서 그를 지켜주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를 손댈 수 없다고 했다(요일5:18).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안에 전능자께서 들어와 계시는데 어찌 그 놈이 함부로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그 놈이 우리에 접근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될 때다(요일3:8).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를 이기셨던 예수님을 힘입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회개하기만 하고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면 우리는 거뜬히 사탄마귀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광야의 시험에서 3대 0으로 예수님에게 판정패 당했으며, 3년반 뒤에 십자가에서 KO패 당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그가 죽였기 때문에, 그의 계급이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마귀는 불법을 사용하여 그가 가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때 그는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는 무저갱에 갇혀 이 지상에 못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잠깐 풀려서 올라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지금도 지하세계에게 자신의 부하들은 올려보내 그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쫄 필요가 없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는 예수님 앞에서는 패배자이기 때문에 그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내 안에 사탄마귀보다 더 큰 이가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라. 그리고 담대히 맞서라. 마귀를 대적하면 그가 피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피하지 않으면 성령의 검으로 그의 머리를 찔러버리고 그의 몸을 싹뚝 잘라버리라(영의 세계에서 그렇게 명령하면 된다). 그가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신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공개한다. 그분은 말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지만 실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는 것이다(요일5:20). 그분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것불렸다는 것과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고 해서 그분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다른 표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무렵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그렇다. 그분의 신성은 하나님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신성한 그분이 육신을 입어 인성을 잠시 취하신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고 부활하실 때에 그분의 몸은 신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끌어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한 세계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분이 비록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낮춰 불러서는 아니 되겠기에 그분을 참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이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공생애 마지막에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랬다. 하나님이 보내셨던 분, 그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던 분은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자기자신을 우상에게서 멀리할 것을 주문하였다(요일5:21). 그런데 이말을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보면, 자기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켜내라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지면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부분은 다른 설교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도 요한은 초신자들에게는 이 부분까지 다 설명해 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이 부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다. 

 

13. 나오며

  요한일서를 공부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정말 암송해야 할 요절이 많은 성경책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기초적인 영적인 진리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요한일서는 자범죄 용서를 위한 자백의 중요성(요일1:9)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사랑'이라고 하는 정의하고 있다(요일4:8,16).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요일2;1). 그리고 이 세상 안에는 악한 자가 있어서  이 세상이 그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으며(요일5:19), 악한 자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다고 말한다(요일2:16).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이며(요일2:2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한다(요일4:2~3). 그러므로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분별하라고 권면한다(요일4:1). 그리고 요한일서는 진리의 성령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요일5:6),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으로서(요일5:6),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요일2:27). 특히 요한일서는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 그를 '악한 자'라고 부르며(요일2;13,14, 3;12, 요5:17,18), 죄를 짓게 되면 누구든지 그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요일3: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그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요일3:8).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인 아벨을 쳐죽인 것도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었으니(요일3;12),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요일4:20).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죄라고 가르쳐준다(요일3:15). 그리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만큼 귀한 일은 없다고 말한다(요일3:16). 더욱이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며(요일4:10),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고 말한다(요일4:14). 하나님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만일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요일4:12).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5:5). 그리고 성도가 세상을 이기려면 그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한다(요일5:4).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알려준다(요일5:7~8). 그리고 예수께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에, 누구든지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아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요일5:12).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거듭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악한 자라도 그를 만질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요일5:18).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는 것이다(요일5:20).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할 때 암송할 성경구절들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요한일서가 바로 이러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틈나는대로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를 읽고 또 읽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살기를 바라며, 믿음을 사용하여 악한 자를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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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9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홀로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들로서 직접 오신 것인가?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빛이시며 또한 사랑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체현으로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도 말한다. 그럼 요한 사도는 왜 아들의 탄생을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라고 말하는가? 그 비밀을 이제 캐내어보자.
2021-12-1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6)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요일4:7~5: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J9G5XwBFBw [ 혹은 https://tv.naver.com/v/24117952 ]

1. 들어가며

  요한일서의 내용과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사실 요한일서는 전체를 한 덩이로 읽거나 특정 구절을 통해서 은혜받기는 쉽지만 그 속에서 구조를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구조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직선적 논리 순서를 따르지 않고 순환론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서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요한일서 2장에서도 나오고 있지만(요일2:9~11), 또한 3장에서도 다시 나오며(요일3:14~16), 그리고 4장에서도 또 나오기 때문이다(요일4:20~21). 그렇더라도 요한일서의 주제를 살펴보면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2장에서는 생명을 가진 자들의 교제(코이노니아)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3~4장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도들이 가진 신분과 거기에 따른 합당한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장에 가서는 믿음을 통한 승리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펴 보게 될 요한일서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참 사랑에 근거한 계명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도 이번 시간의 핵심 키워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하여 '사랑'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 '사랑'의 구체화된 역사적인 사건과 '사랑'이 어떻게 우리 믿는 이들에게까지 혜택을 베풀어 주는지 그 메카니즘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곧 계명에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도들의 사랑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7~12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사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인 것을 천명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일4:8).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요일4:11).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두 번째 속성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요일4:8,16). 사실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에 있는 생명의 교제(코이노니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으로서 '빛'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요일1:5). 그런데 이제 형제 사랑의 실천을 교훈하면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사랑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을 살펴보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곧 사랑은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지 모두가 다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은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며 이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 '하나님(데오스)'이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선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정관사가 붙어 있는 명사는 주로 '주어'로 사용된다면,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는 명사는 주로 '서술어'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요소들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거꾸로 역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는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 되셨던 예수님을 빼 놓고서 '사랑'을 운운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원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이 거기에 있다고 해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공동체나 개인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필리아' 사랑이든지 혹은 '에로스' 사랑이든지 그들도 역시 사랑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두고서 하나님이 거기에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만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으며,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해서 나타난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었고 그것의 실체가 나타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출현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자신이 보낸 독생자를 통해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치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일4:12, 요1:18). 아니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때 하나님께서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직접 밖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이다(요일4:9~10).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화목 제물이자 그리고 구원자로 보내셨기 때문이다(요일4:10,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4.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라고 하는가?

  사람들 중에는 왜 서양 종교의 하나인 기독교를 믿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좋은 종교가 많이 있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종교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 건져 주는 그러한 종교는 없다. 그건 우리나라에도 없고 외국에도 없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주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분에게는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하여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요3:16). 그러나 이러한 일은 성경의 기록을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어디 하루 아침에 되어진 일은 결코 아니다. 맨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롬5:12). 그리고 모든 인류는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창3:14). 그러므로 이러한 범죄에 예외는 없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허리에 씨로 들어 있을 때에 같이 범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 가운데 이러한 문제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인고 하면 사망이요(롬6:23),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가 일어난다(계2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죄값을 대신할 제물을 이 땅에 보낸 일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시다. 그 일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 수천 년을 예언을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드디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그 일이 성취가 되기에 이른다. 그 사건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 사건이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해시켜 준 것이다. 

 

5. 예수님의 오심은 과연 있던 아들의 오심인가 하나님 자신의 오심인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하신(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 곧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니까, 하늘에 이미 있어서 활동하고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라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곧 시간 밖에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맞는 일이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 이미 하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성육신될 때에 그때에 그분은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이 나오셔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품 속에서부터 나와서 성육신하신 것이다(요1:18).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아들은 없었는가? 아니다. 구약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 이미 그분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하나님의 품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하나님 자신의 오심인 것이지 또 다른 아들의 오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삼위삼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원래 한 분이셨다. 그러다가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표현이 훨씬 더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것이고,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므로,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에서 계시는 그분은 아버지라 불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버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 아들로 오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나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는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지금도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직 하나님께서 아들로 출현하기 전의 시대였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다만 약속의 말씀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죽어서 낙원으로 갔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눈에 볼 수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사도 요한도 역시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분과 식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대화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약속한 바대로 구원자이심을 알려 주시고, 드디어 공개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원래부터 죄가 없는 분이시요,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시므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로 가셨다. 그리고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보혜사 성령 곧 그분의 영이신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영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보내신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요일4:1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며 그리스도로 믿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함께 하신다. 이러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약속으로 전달되거나 아들에게서 실현되었으며 지금은 보혜사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그것을 효과있게 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인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 3가지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으로서 그분이 몸소 나타나셨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3가지 혜택이 주어진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자에게 베풀어지는 3가지 놀라운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요일4:16). 물론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그분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요일4:13, 3:24). 고로 이러한 성령이 죽을 때에도 떠나가지 않는 자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심판날에도 담대함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요일4:17).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자신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로 인하여 이미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회개를 통해서 그것을 유효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인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분의 구속 사역과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그날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셋째,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는 항상 어둠에 있는 자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불안하다. 어둡다.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와 저주로부터 벗어난 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매여 있지 않는다. 믿음과 회개로 두려움은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받아본 일이 없거나 그 사랑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8.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발로적인 증상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자연발로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였다(요일4:19).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자들은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마지 못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요일4:19).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다(요일4:20). 왜냐하면 보는 바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응당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새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5:2~3).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사랑의 드러남이요 실천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틀린 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라고 말했어야 정확히 맞추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뭐니뭐니해도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분 안에는 처음부터 사랑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곧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밖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을 속죄 제물이자 화목 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고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만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것은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할 때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곧 하나님 자신의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미 대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후 당신을 대신하여 성령을 보내 주신 이상 그분이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B.C.8세기경 남유다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렇다.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그분은 기묘자인 모사(보혜사)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자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시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서 그분의 기름부음을 내 안에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껴지면,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라. 

 

2021년 12월 1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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