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관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회개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였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다윗은 죄용서를 받았지만 그 죄에 대한 결과를 오랜동안 치러야 했다. 왜 그랬을까? 그런데 신약시대 이후 우리의 모든 막힘과 질병과 사건사고의 배후에는 꼭 귀신들이 있었다.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2020-12-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9) 회개에 담긴 놀라운 2가지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민14:17~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dcL-yo4GntQ [혹은 https://tv.naver.com/v/17508313  ]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로 깔고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 믿을 때에, 회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에, 믿기는 믿게 되었지만 왜 믿어야했는지, 어떻게 믿을 때에 제대로 믿는 것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었지만 행복한 삶은 경험하지 못하고, 불신자처럼 질병에 시달리고, 가난에 허덕이며, 자녀들의 길이 열리지 않고, 삶에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하는 핵심내용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질병과 가난과 저주에 시달려왔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한다. 

 

2. 출애굽1세대들은 왜 가나안 땅에서 징계를 받고 죽어야 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들은 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 가운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과거 광야로 나온 출애굽1세대들의 이야기가 그 해답을 우리에게 들려줄 것이다. 그렇다.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광야로 탈출시켰다. 그리고는 얼마후 장차 그들이 들어갈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 각지파에서 1명씩의 정탐꾼이 가나안땅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40일동안 가나안을 정탐했다. 그리고 와서 보고를 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곳에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이 살고 있어서, 우리들은 메뚜기와 같아서 만약 우리가 들어갔다가는 전부 칼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여 통곡하였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고가서 가나안 땅에서 죽이려 하는가?"하면서, 한 지휘관을 세우고는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다. "내가 아무렴 너희들을 가나안 땅에서 죽이려고 끌고 나왔겠느냐"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염병으로 쓸어버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모세가 즉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때 모세의 한 마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스라엘 민족을 살릴 수가 있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이 백성을 죽이신다면, 주의 명성을 들엇던 이방인들이 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어서 광야에서 죽이고 말았다"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민14:20).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다음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해서 죽지 않았고 죄사함을 받았던 출애굽1세대들이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던 것인가? 

 

3. 죄용서와 죄의 결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의 의미와 그것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주셨면 정말로 그는 용서받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에 대한 벌은 받지 아니하는가? 아니다. 죄의 결과는 또다른 문제다. 다윗도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지만 일평생에 걸쳐 벌을 받았야 했음을 기억해 보자. 고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혔다든지, 아니면 다른 이들을 괴롭혔다든지 하여 죄를 짓게 되면, 누군가는 그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받지 않는다면 내 후손중에서 누군가가 그 벌을 받게 되어있는 것이다. 죄는 용서받아도 그 형벌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은 자는 반드시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모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출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다. 하지만 벌은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아들들과 손자들과 그리고 삼사때기지 벌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 우리후손이 조상들의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조상들이 지었던 죄의 결과를 우리와 우리후손이 받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4. 회개에 관한 2가지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죄를 회개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크게 2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우리가 지었던 죄들을 용서받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행위책에서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덮어져서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두고 "죄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지은 죄가 깨끗히 씻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들을 말씀히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의 결과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 바로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죄[들]를 자백하면(시인하고 있으면), 그는 미쁘시고(신실하시고) 의로우사(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들]를 [단번에] 사하시며(용서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부터] [단번에]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런데 사실 우리의 내면을 영안을 열어 들여다보았더니, 우리가 죄를 짓거나 우리의 조상들이 죄를 지었다면 귀신들이 우리의 몸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게 되기 때문이며(요일3:8), 하나님께서 뱀에게 사람의 육체의 성분을 먹고 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창3:14).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하늘의 행위책에 우리의 죄목이 기록될 뿐만 아니라 ,귀신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몸 안에 들어와있는 세력들(귀신들 곧 뱀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나갈 것을 명령하면 그것들이 떠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들이 우리 몸 속에 있을 때에 그들은 우리에게 온갖 재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귀신들이 우리 몸 안에 들어오게 되니, 그때부터 질병이 나타나게 되고, 가난하게 되고, 우리의 자녀들의 앞길의 막히게 되어, 우리가 온갖 저주가운데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회개하게 되면 이러한 역사가 중단되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5. 우리는 어떻게 할 때 바르게 회개하는 것인가?

  우리가 회개하여 귀신들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어떤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은 자범죄들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도 다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목사님의 딸은 18년동안이나 무기력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갑자기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자매의 과거를 영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이 자매님의 14대 조상이 어떤 소녀를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이 보였다. 우물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인신제사를 드렸다든지 아니라면 겁탈을 한 것이 탄로날까봐 우물에 빠뜨려 죽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린 소녀가 물에 빠져 허욱적대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이 목사님의 딸은 물소리만 들어도 극혐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소녀가 우물에 빠져 죽어갈 때에 물소리를 들어가면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 사모님은 그때부터 밥짓기 위해 씽크대 물도 제대로 한 번 틀어보지 못했고, 세탁기도 못 돌렸다는 것이다. 14대 조상이 지은 죄값을 이제 지금 목사님의 따님이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누군가 죄를 지었으면 그 벌을 누군가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조상 중에 남을 억울하게 모함했거나 죽였거나 혹은 고문했다면 그 죄의 결과는 후손인 누군가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우리 교회와 관련된 성도에게서 실제로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때 내가 지은 죄만을 회개하는 것으로 회개를 다 했다고 하면 안 된다.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벌을 반드시 물을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출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그냥 두지)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죄악)을 자손(아들들과 손자들과) [그리고]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벌하리라)
  둘째, 얼마만큼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거나 소홀히 여겼던 회개에 관한 두번째 사실은 지은 죄의 숫자만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제도를 보더라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속죄제물은 한 번만 사용가능한 것이었다. 하나의 제물을 계속해서 다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들어와서도 이 원칙은 동일하다. 지금은 과거 우리 주 예수께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린 이후인지라, 다시 속제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지은 죄의 숫자만큼 본인의 입술로 자백해야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회개했으면 자신은 모든 죄가 다 용서된 줄로 안다. 아니다. 한 번 회개했으면 그 죄만 용서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은 죄의 숫자만큼 회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가 죄를 지은 숫자만큼 채워서 회개의 분량을 채워야 했던 것이다. "국민북스"라는 출판사를 통해 "회개"라는 책을 출판한 김석곤목사는 회개의 분량이 어느정도 되어야 하는지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자범죄를 회개하는데에도 하루에 2시간씩 회개한다면 적어도 3~4년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회개를 쉽게 얕보았던 것이다. 아니다. 회개는 내가 죄를 지은 분량만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회개할 죄가 나와 나의 윗대의 모든 조상들까지 있으니, 윗대조상이의 우상숭배의 죄까지 회개하려 한다면, 실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셋째,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회개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는 것이다. 처음 믿을 때에 돌이킴으로 회개하는 것으로 회개는 시작되지만, 과거의 모든 죄들은 우리의 입술로 자백할 때에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내 입술로 시인하여 죄를 회개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날에 지었던 범죄의 결과들을 우리가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죄를 철저히 자백함으로 용서받아야 한다. 그래야 귀신들이 우리 몸 속에서 제거게 된다. 그래야 죄의 결과로부터도 우리도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조상 때부터 지은 죄들로 인해 우리 몸 안에 들어온 귀신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때부터 저주를 받았기에, 세력이 작은 놈들은 뱀들이 되었고, 큰 놈들은 용이 되었다. 이때 우리 몸 속에 들어오는 귀신들은 대부분은 작은 놈들이다. 이것들은 보통 실뱀의 형태로 우리 몸 안에 들어오는데, 이 실뱀들도 자기네끼리 엉겨붙어 뭉치게 되면 좀 더 큰 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은 낱낱의 죄를 전부 다 자백하지 않는다면, 그놈들은 다른 놈들 때문에 계속 붙어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낱낱의 모든 죄를 다 토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간다.

  그런데 그렇게 낱낱이 자백하면서 회개했는데도 나가지 않는 뱀들이 있다면, 그때에는 금식해야 한다. 우리가 금식하면서 회개하면, 우리 몸에 단단히 부착하고 있던 이놈들은 우리 몸에서 헐렁헐렁해진다. 그때 쫓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혹 떨어져나가지 않는 놈들이 있다면 우리는 세번째 방법을 써야 한다. 그것은 속죄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나와 내 부모 중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 절이나 무당에게 많은 물질을 바쳤던 분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들 중에는 그 신들에게 바친 것보다 하나님께 바치는 데에 너무나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속에 들어온 귀신들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우대받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속죄예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회개하면 즉시 귀신이 떠나간다. 시16:4에서도,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했으며, 예수님께서도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에는 그들에게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나병환자의 조상 중에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분명이 있는데, 그들 중에는 물질로 다른 신들을 섬겼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마8:3~4). 또한 귀신이 잘 나가지 않고 문제가 있을 때에는 혹시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았거나 훔쳤거나 빌렸지만 값지 않은 것이 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에는 율법규정은 본물에다다가 1/5을 추가하여 변상하라는 속건제사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레6:5). 오늘날에는 그림자법은 율법규정대로 할 수는 없겠지만, 성의를 보여서 되갚아주면서 회개한다면, 귀신이 떠나가고 불치병도 낫게 되는 것이다. 혹 당사자를 찾지 못하겠으면 친척을 찾아서 그에게 주면 되고, 친척도 못찾겠으면 그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레6:5). 

 

6. 회개할 때 주의할 사항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회개할 때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할 사항 몇 가지가 있다면 첫째로, 회개할 때에 귀신들이 발악으로 인하여 약간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프거나 다치거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여 겁먹어서 순간에 저지르는 일이니 우리가 되레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십자가 세우기"를 하여 그놈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면 도움이 된다. 둘째로, 회개를 시작했는데도 내게 별 진전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지금 회개의 분량이 차고 있는 중인데, 그것을 모른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조금만 더 회개하면,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지만 어떤 빈 병에 물ㅇ르 채우면 그것이 차고 넘칠 때가 오듯이 꼭 넘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셋째로, 혼자 회개하기보다는 함께 부부나 가족이 함께 회개하면 훨씬 더 회개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목회자가 회개기간을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회개할 필요가 있다. 

 

7. 나오며

  이렇듯 회개할 때에는 내가 죄은 죄만을 회개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도 함께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할 때에는 한 두번 하고 회개를 끝낼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분량만큼 많이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할 때에는 마음 속으로나 눈으로만 회개하지 말고, 반드시 소리를 내어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법적인 증거로서의 효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믿고 나서 회개할 때에는 전부다 자백함으로 회개하는 것이지 한 번 회개한 것으로 다 회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회개했는데도 별 차도가 없을 때에는 금식하며 회개하길 바란다. 그리고 재물을 다른 신에게 많이 바친 자는 속죄예물을 주님께 바치면서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의 것을 빼앗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약시대에는 속건제물을 주님께 드렸듯이 변상의 차원에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회개를 실천하게 되었을 때에는 주로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인가? 그때에는 내 속에 들어와 있던 귀신들이 점차 힘을 잃고 떠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까지 막혀 있었던던 길이 쫙 열려지게 된다. 그렇게 낫지 않던 질병이 낫게 된다. 자녀가 잘 된다. 새어나가던 물질도 다시 들어와 쌓이기 시작한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엄청난 축복인데, 그때부터는 다니엘의 경우처럼 영안이 열려져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고 환상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신령한 은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님께 왔다갔다하는 하늘길이 뚫어짐으로 기도응답도 아주 잘 된다. 그렇다. 회개를 제대로 잘 하기만 하면, 건강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천국으로 입성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진짜로 회개다운 회개를 하여서 회개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살기를 바란다. 

 

2020년 12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언제 오시는가? 환난전인가 환난후인가? 성도들의 휴거는 단회적인가 아니면 여러 번 있게 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은밀한 강림인가 공개적인 강림인가? 과연 7년대환난이 있으며 그것은 다니엘의 한 이레와 일치하는가? 단일세계정부에 의한 짐승의 표 666시스템은 베리칩으로 갈 것인가? 천년왕국은 지상에 펼쳐질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이 이 하나의 메시지 안에 다 들어있다. 2020-12-2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8) 성도들의 휴거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무엇인가?(마24:4~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AO7eP6u93s [혹은 https://tv.naver.com/v/17363962 ]

 

1. 들어가며

  종말에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고 우주적인 종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부활하는가? 지난 주일에 우리는 개인의 부활시기에 관한 말씀을 나눴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 무덤에 가서 잠을 잔다거나 낙원에 가서 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의 절기상 초실절의 열매 곧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며, 그때 이후부터 계속해서 추수가 이어지다가(개인적인 부활이 있다가), 맥추절(칠칠절)에 가서는 한꺼번에 추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주적인 부활"이라고 한다고 배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를 처리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제 오늘은 이러한 개인적인 부활이 아니라 우주적인 부활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과연 언제이며 그때가 되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같은 사건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건인지, 그리고 이것은 은밀하게 있는지 아니면 공개적으로 있는 것인지도 살펴볼 것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과연 환난전에 오시는지 아니면 환난후에 오시는지도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지어 등장하는 여러가지 소주제들도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 성도들의 휴거는 과연 언제 일어나는가? 그것은 단회적인 반복적인가? 그리고 그것은 은밀하게 일어나는가 공개적으로 일어나는가?

  성도들의 휴거란 있는가? 있다면 언제 있는가? 사실 성도들의 휴거시에 관해, 환난전에 있다는 분들도 있고 환난후에 있다 하시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그 답을 들려준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우 분명하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은 마24:4~14의 말씀과 마24:30~31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다 답이 나온다. 그래서 오늘은 헬라어성경에서 그 본문들을 직역하여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면 금방 수많은 종말론의 문제들을 풀 수가 있다. 

마24:4~14 [헬라어직역] (4)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희를 미혹하지 않도록 계속 주의하고 있어라. (5)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장차 내 이름으로 인하여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기를, ‘나는 그리스도요’. 그리하여 그들이 장차 많은 이들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너희는 장차 전쟁들과 전쟁들의 소문들을 계속해서 듣는 것을 하려고(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계속해서] 불안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하고 있어라. 왜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은 아직 아니다. (7) 왜냐하면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장차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장차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소를 따라서(곳곳에) 기근들과 지진들이 장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해산의 고통이 시작이다. (9) 그때에 그들(사람들)이 너희를 장차 환난 속으로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장차 살해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 의하여 미움을 받고 있으면서 장차 있을 것이다. (10) 그리고 그때에 많은 이들이 장차 실족하게 될(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장차 그들은 서로들을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들을 미워할 것이다. (11) 그리고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장차 일어나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많은 거짓선지자들)은 많은 이들을 장차 미혹할 것이다. (12) 그리고 무법한 일(불법, 악행)이 증가되어지는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의 사랑이 장차 차가워질(식어질) 것이다. (13) 그런데 끝까지 견뎠던(기다렸던) 자, 그이는 장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14)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이 왕국의 복음이 온 거주지(사람이 사는 곳)에 장차 전파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끝이 장차 올 것이다.

마24:29~31[헬라어직역] (29) 그런데 저 날들의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장차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달이 장차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별들이 장차 하늘로부터(아포)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들의 능력들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30) 그리고 그때에 사람의 아들(인자)의 표적이 하늘 안에서 장차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자기를 위하여 장차 가슴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의 아들(인자)이 하늘의 구름들 위에서 많은 영광과 능력과 함께 오고 있는 것을 장차 볼 것이다. (31) 그리고 그분(인자)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자신의 천사들을 장차 파송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천사들)은 그분의 선택받은 이들을 하늘들의 끝부분들로부터(아포) 하늘들의 끝부분들까지 네 바람(사방)으로부터 장차 함께 모을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환난 후에 오신다고 했다(마24:29). 그리고 성도들의 휴거는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일어나는 동시적인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마24:31).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나 성도들의 휴거는 단회적이며 공개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땅의 모든 족속들이 인자가 재림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마24:30~31). 그리고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게 될 "우주적인 부활"은 곧 "휴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주님께서 공중으로 먼저 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가 되면 성도들은 구름속으로 끌어올려져서 주님을 영접하러 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죽은 자들과 그때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한꺼번에 순차적으로 부활을 입어 공중으로 휴거되어 올라가게 될 것이다(살전4:16~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우주적인 부활을 가리켜 흔히들 "휴거"라고 따른 용어로 부르는 것이다. 

 

3. 예수재림 전에 7년대환란이 있는가?

  오순절 교단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2가지 양상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께서 공중으로 오셔서 은밀하게 알곡성도들을 휴거시킬 방면이 있고, 이어서 공중에서 혼인잔치가 7년간 베풀어지고 땅에서는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대대적인 핍박이 자행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경에는 대환난이 분명 있다고 나오기는 하지만, 7년대환난이나 7년공중혼인잔치라는 말인 직역이든 의역이든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지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니엘의 70이레에서 한 이레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환난과 대환난에 대해 언급할 때에 분명이 언급하셨지만, 그때를 7년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전혀 없으며, 또한 대환난의 날도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단축시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기 때문이다(마24:21~22).

마24:21-22 왜냐하면 그때에 큰 환난이 장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의 시작으로부터(아포) 지금까지 일어난 적이 없고, 결코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22 그리고 만일 저 날들이 단축되지 않았다면 모든 육체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날들은 선택받은 이들 때문에 장차 단축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누구나 다 자연적인 재난을 다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 성도들도 함께 핍박을 받고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러한 환난은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지막의 시기가 이르게 되면, "대환난"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환난을 두고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사도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언급한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다니엘서에서 가져온 말인데, 3년반(42달, 1260일)을 일컫는 또다른 표현이다. 이런 마지막 때의 짐승이 출현하여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이라고 했다(계13장). 그러나 42달의 기간은 환난의 기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의하면, 그 기간은 성도들이 광야로 피신하여 양육받는 기간이라고도 했기 때문이다(계12:14).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두 증인이 나가서 활동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기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11:3). 여기서 "두 증인'이라는 모세와 엘리야같은 사람들로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표자들로서, 십계명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치고, 회개를 촉구하는 주의 종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3년반의 기간은 짐승에 의해 핍박의 기간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이 보호받고 양육받는 기간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두 증인들과 같은 마지막 시대의 사명자들에 의해 천국복음이 선포되는 기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계13:5 또 [첫째]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2:14 그 여자(사내아이를 낳은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계11:3 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다니엘의 한 이레는 그리스도의 초림예언인가 재림예언인가?

  그렇다면, 다니엘이 말한 바 "70이레"의 예언은 과연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인가 아니면 재림에 관한 예언인가? 그 답은 단9:24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 

단9:24,26 네(이스라엘) 백성과 네 거룩한 성(예루살렘)을 위하여 일흔(70) 이레(7)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6 예순 두 이레(62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그렇다.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성을 위한 예언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6가지 예언의 성취로 완성되는데 그것은 기름부음받은 자의 출현과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의 파괴로 끝이 난다. 고로 이 예언은 종말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이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한 예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은 천주교의 리베라 신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왜곡되어서, 다니엘의 70이레의 마지막 한 주간(한 이레=7년)에 해석으로 비화되었다. 그래서 그 기간(7년)을 따로 떼어 먼 미래에 있을 일로 곧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스라엘과 7년간의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라고 곡해시켜버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임에도 불구하고, 재림예언의 둔갑하게 되어 퍼져나가고 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러한 해석은 자의적인 해석이요 성경을 문맥을 무시한 불행한 해석인 것이다. 

 

5. 마지막 시기가 되면 적그리스도에 의한 단일정부가 탄생할 것이며,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도 세워질 것인가?

  오늘도 단일세계정부 음모론자들은 정말로 마지막 시기가 되면 로마의 뒤를 잇는 유럽연합의 국가에서 적그리스도(짐승)가 등장하게 될 것이고, 그 짐승에 의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될 것이며, 짐승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 곧 단일세계정부가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사실 다니엘서 2장과 7장만 읽어보더라도 우리는 마지막 시기가 어떤 시기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열 발가락시대"와 "열 뿔시대"라고 나온다. 여기서 열발가락 혹은 열 뿔은 다 로마제국이 망하고 거기에서 분열된 나라들을 지칭한다. 특히 다니엘 2장에 보면, 하늘에서 뜨인 돌이 날아와 열발가락을 쳐서 부순다. 그러니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진흙으로 만들어진 신상이 깨드려져서 태산을 이룬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마지막 네번째 짐승에 대한 묘사가 좀 더 자세히 나온다. 그런데 이때도 역시 짐승과 열뿔이 등장하고 있다. 즉 세계의 영적 세계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짐승과 국가를 통치할 열 나라들(상징적으로 많고 충분한 나라들)이 계속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용과 거짓선지자(둘째짐승)도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 셋이 결국 한데 모여 아마겟돈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계16:16). 고로 마지막 시기가 되더라도 어떤 한 사람에 의해 세계 모든 정부가 통제받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혹 어떤 흉내내는 일이 나타날른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시기에 [먼저]짐승(적그리스도)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성을 맺을 때에는 제3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져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것도 거의 일어나지 않을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전제사와 제물은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었고,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2천년전 골고다언덕에서 마지막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려 속죄를 완성했기에, 우리는 더이상 모형과 그림자와같은 양이나 소의 제물이 바쳐질 필요가 없어졌다(히9:11~12). 그래서 초대교회 스데반집사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다(행7:48). 성령이 오신 다음부터는 교회가 구약의 성전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3의 성전이 세워진다고 아무리 외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에 가서 의미없는 메아리로 끝날 확률이 크다. 

 

6. 베리칩이 과연 마지막 시대의 짐승의 표 곧 666인가?

  마지막 시대에 등장하게 될 "짐승"과 더불어,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마지막 시대에 베리칩은 짐승의 표라고 불릴 수 있는가?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렇다고 믿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이것도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리칩이 666이 되려면, 베리칩은 짐승의 표이므로, 짐승이 누군지가 먼저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짐승의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의 숫자값이 666이라고 했으니, 베리칩이 짐승의 표가 되려면 짐승이 누구며, 그러한 짐승의 이름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짐승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는데도, 베리칩이 666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은행의 수표를 가져가서는 시중은행에서 현찰로 바꿔달라고 억지로 시도하는 것이나 똑같다. 그러면 창구직원에서 곧 은행이 설립될 것이니 돈이나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 같다. 앞뒤가 틀린 것이다.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이름값이 666인 짐승이 나온 적이 없다. 결국 짐승의 표는 짐승을 경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표식으로서, 우상숭배자들이 사탄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7. 천년왕국은 과연 지상에 문자적으로 펼쳐질 것인가?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인가? 이것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천년왕국 전에 있는 아마겟돈 전쟁이 있고, 천년왕국 후에 있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는데, 이 두 가지의 전쟁은 하나의 전쟁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분들은 말세가 되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에 의해 인류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이 터질 것인데, 이 전쟁 때에 짐승과 거짓선지자는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지지만, 용은 무저갱에 약 천년간 갇히게 되며, 이후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는 잠깐 사탄이 풀려나 지상에서 살던 사람들 곧 곡과 마곡을 모아 전쟁을 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헬라어원문을 읽어보면,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은 하나의 전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곡과 마곡의 전쟁 후에 사탄마귀도 불못에 던져진다고 하기 때문이다. 헬라어원문을 보면, 이 때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사탄과 함께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계20:10). 계16:16에 보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하나가 되어 일으키는 전쟁이 아마겟돈전쟁이며, 이 셋이 한꺼번에 불못에 던져지는 전쟁이 곡과 마곡의 전쟁이다. 고로 우리는 이 두 전쟁이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문자적으로 이 지상에 펼쳐지지 않음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천국에 먼저 들어간 성도들이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끝무렵에 하나님께서 사탄마귀에게 무저갱으로부터 잠시 내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3년반의 대환난의 끄트머리에 있을 일인 것이다. 

 

8. 성도들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수많은 미혹들이 있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그렇다면, 왜 성도들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수많은 미혹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적으로 그것은 주님께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마24:4~14). 그것은 이미 선택받아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이라도 사탄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옥으로 끌고가려는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더욱 더 큰 문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성경을 원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말장이라고 일컫는 마24장이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지 않으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말을 듣고는 없는 것까지도 만들어내며 또한 문맥을 무시한 해석까지 내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셋째, 잘못된 여러가지의 종말론의 교리들을 마치 성경의 진리인량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교리에 맞는 성경구절을 여기저기서 끼워맞츰으로 잘못된 해석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나도 거짓선지자가 되어 선택받은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세에는 미혹하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해석을 잘못하는 주의 종들이다. 특히 종말론에 관한 잘못된 해석을 하는 자에 의해 귀한 영혼이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9.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바른 종말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종말신앙은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3가지를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첫째, 미혹을 주의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개인적인 종말에서부터 우주적인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비성경적인 교리나 주장들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헬라어원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환난에 대비하는데 혹 우리가 환난성도가 된다면 어떠한 핍박과 죽음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말고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환난전휴거 맹신이 무서운 것은 환난이 없다고 믿다가 그만 환난에 닥치게 될 때 그들에게 나타날 반응이다. 그들은 환난을 이겨낼 힘을 비축해두지 않은 탓에, 그 현장에 막상 부딪히게 되면 대부분은 핍박과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부인해버릴 것이다. 고로 주님의 재림은 환난후에 있고 성도들도 환난후에 휴거된다는 것을 알고 잘 대비하고 있으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즉시 우리는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입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천국가게 할려면 회개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가 천국이라는 것을 일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10. 나오며

  믿음이란 주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바로 세우고 그때를 날마다 잘 준비하는 것이다. 혹 우리 시대에 그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그때를 잘 준비했다가 주님에 대한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잘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너끈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들어가서도 면류관을 쓰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천국집에 수많은 보화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이겨낸 만큼 그리고 주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한 만큼 많은 보석들과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2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잘못된 부활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성도들을 나태하게 만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며 슬퍼하게 할 것이다. 또한 지금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모른채, 죽으면 잠자는 상태에 있다가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심판받고 그때에 가서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찌 지금 회개하고 지금 충성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바른 부활신앙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연 성도는 언제 부활하는가? 그리고 상급은 언제 받는가? 왜곡되어 있는 개인의 종말신앙관을 이제 성경의 진리로 살펴보자.

2020-12-13(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7) 잘못된 부활신앙을 바로 잡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고전15:20~26)
https://youtu.be/FkHW3sl1tbc [혹은 https://tv.naver.com/v/17205826 ]

 

1. 들어가며

  우리가 개혁해야 할 신앙 중에는 종말론이 그중에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교단의 교리가 종말론에 있어서 성경과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도들의 개인 종말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 성경과 어긋나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를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는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때인가? 어떤 교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중간상태에서 곧 잠자는 상태로 있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서 쉬고 있다가 부활한다고까지 말한다. 과연 어떤 견해가 성경이 말하는 견해인가? 성도들의 개인적인 부활에 관하여 주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말했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과 많이 빗나가 있는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와 아울러 성도들의 부활과 사망권세가 무너진 것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개인적인 종말관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우리가 개인 종말론에 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종말론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이 잘못 되었을 때에 과연 어떤 결과들이 도출되는가? 적어도 3가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환난과 핍박을 받지 않고 훌쩍 휴거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환난후에 오신다(마24:29~30). 둘째,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죽은 이후에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태만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죽으면 곧바로 자신의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올바른 종말신앙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종말론으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언급한 바로 바로 그 종말관이요 종말신앙이다. 

 

3.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할 때에 신앙고백을 한다. 보통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가 요약되어 있다. 거기의 두번째 항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목이다. 그리고 그것의 첫번째 항목은 그분의 성육신에 관한 항목이다.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서 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사람되심은 사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흠없는 속죄제물로 죽으시기 위함이다. 두번째 항목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분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또한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 그 항목이다. 그리고 세번째와 네번째 항목은 그분의 승천과 재림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항목이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죄가 사함받고 자기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왜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통해 나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답은 틀린 대답은 아니나, 분한 대답은 아니다. 왜냐화면 그분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을 가르쳐주기 위함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핵심을 비켜나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왜 부활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왜 부활하셨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인류를 대신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인가? 이런 이유도 사실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를 말하지 않은 진술이자 핵심을 놓치고 있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는 대체 무엇이 그 핵심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께서 무소불휘의 힘을 가진, 아담 안에서 왕노릇하고 있던, 사망의 권세를 처리하시어 쓸모없게 하셨다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요소일 뿐, 굳이 부활하지 않으셔도 별 상관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의 문제를 처리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의 문제를 처리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담이후 인류 위에 왕노릇하고 있는 사망이 무너지고 박살났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최초로 사람이셨던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던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사망 권세다. 모든 것의 끝은 사망으로 끝나고, 그러면 모든 사람은 다 사망권세 아래에 놓이기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신 예수께서 사망을 당한지 3일만에 약속대로 살아나셨다. 이는 사망권세를 이기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음부에서 걸어 나오셨다. 이것은 음부가 그분을 붙잡아두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음부에서 걸어나오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예수께서 이루신 것이다. 고로 그분이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분이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이고 그분이 사망권세를 무너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로 인해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최초의 열매 곧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5. 예수님의 죽으심의 두번째 의미는 무엇인가?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망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기(없이하기) 위함이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히2:24). 그렇다. 그분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혹은 사망을 이길 수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망을 쓸모없게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멸하시기 위하여"라는 단어를 보면, 헬라어로 "카타르게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쓸모없게 하다. 무효화시키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사탄마귀가 멸망당한 것은 아니었다. 사탄은 지금 현재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지구의 땅 속 음부에서 자신의 부하들인 귀신을 올려보내어 자신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 마귀가 가진 사망권세를 쓸모없게 만드신 것이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카타르게오"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다. 24절에 한 번, 26절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런데 26절에 나오는 "카타르게오"는 잘못 번역되어 있다. 먼저 우리말 번역을 보자.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이 말은 사망은 맨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아 있어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가서야 비로소 멸망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는 말을 거부하는 번역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렇게 쓰여있지 않다. 그럼, 헬라어원문에서는 26절이 어떻게 쓰여있는가? "맨 나중의 원수로서 사망은 [현재] 쓸모없게 되고 있다." 그렇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의 사망의 상태를 그대로 묘사해주고 있는데, 사망은 그때도 "쓸모없게 되고 있었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무너뜨리고 3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망권세는 이제 더이상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 이후부터는 죽은 즉시 사망권세에서 놓임받게 된다.  

 

6. 성도들은 과연 언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단의 교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부활하시는 시기는 죽은 즉시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이후의 세대들 가운데,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하여 부활체를 입고 곧바로 천국에 있는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증거로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성경상에 나타난 증거가 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라고 말씀하셨다(요5:25). 그렇다면, 이때 "죽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진짜 죽어서 무덤 속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영이 죽어있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영이 죽어있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8)"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을 가리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영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한 자는 자신의 육체가 죽은 다음에 곧바로 생명의 부활로 직행한다는 뜻이다. 즉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요5:29). 그리고 사도바울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써보낸 전편의 편지에서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알려주었다(살전3:13).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있기에 주께서 그 성도들을 데리고 오시기 때문이다(계19:14).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부활의 순서를 언급하고 있는데, 첫 열매는 그리스도이며, 두번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다(고전154:23). 주께서 그날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던 성도들을 데리고 오시기 때문이다. 

  둘째, 구약시대에 절기상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레위기 23장에 들어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시작하여,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맥추절,오순절), 나팔절, 초막절(장막절,수장절), 속죄일 등의 총 7가지 절기를 지킨다. 그중에 세번째 절기가 "초실절"이다. 이 초실절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안식일이 지난 그 다음 날을 가리킨다. 그리고 초실절에는 맨 처음 익은 곡식 이삭 한 단을 요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다(레23:10~11). 이는 보리 중에 제일 처음으로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드리는 것은 보리 이삭의 한 단이다. 그리고 나서 보리추수를 계속한다. 그 기간이 50일 정도 된다. 그리고 50일째 되는 날은 한꺼번에 추수를 한다. 이것이 바로 칠칠절(맥추절, 오순절)이다. 그러니까 칠칠절은 한 마디로 보리추수를 끝내는 날이다. 그렇다면, 왜 초실절에 한 묶음으로 이삭 한 단을 드리라고 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의 시작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까지 죽어서 낙원에 들어가 있던 구약의 성도들도 이 날에 예수님을 따라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려하자 말리면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고 하셨던 것이다. 아직 요제로 자신이 드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날 주께서는 구약의 성도들과 함께 요제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여 지금도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외 오면, 한꺼번에 부활이 일어날 것이다. 이날 우주적인 영혼의 추수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절기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첫 열매되심은 예수께서 그날에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고 이어서 계속해서 성도들의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일러준다. 

  셋째, 이미 천국에 들어간 자들의 실제의 증거가 있다. 지금 성도들은 죽으면 구약의 성도들처럼 영혼의 상태로 낙원에 가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있는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천국에 성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무려 12번 이상을 언급하고 있다. 최초의 언급은 요한계시록 6:9~11에 나온다. 이들은 천국에 있는 제단(분향단제단)에서 자신의 피를 신원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들은 아마도 순교자들일 것이다. 이미 순교자들이 천국에 있어서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가서 하나님께 청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는 지금 거기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 이러한 실제적인 증거는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천국과 지옥을 갔다왔다고 하는 간증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천국에 가보면, 이미 면류관을  쓰고 있는 성도들도 있고, 자기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상급심판까지 다 받고 천국에서 그 영광을 누리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중간상태로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에 상급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천국에서 그 상급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죽어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7.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죽은 후에 다들 잠자고 있는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잔다"는 뜻은 신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죽은 이가 계속해서 사망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도가 죽으면, 그는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까지 사망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도가 죽으면 잠자고 있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살아나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께서 이미 사망권세를 이기고 쓸모없게 하셨기에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성도들에게 이러한 제대로 된 부활신앙 곧 개인적 종말신앙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3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성도들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다(계2:8~10).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 성도들이 죽게 되었을 때에 자신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죽음 앞에서 담대해질 것이다. 특히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상황에서,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흔들리지 않고 죽음 앞에 의연히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죽음을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다(살전4:13). 죽음은 껍데기인 육신을 벗는 작업일 뿐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사망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불과하기에 죽음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가 죽었는데 그것을 두고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은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장례예배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뻐할 일을 왜 슬퍼해야 하는가? 셋째, 회개나 충성을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회개하고 지금 충성하기 위해서다(고전15:57~58). 지금 죽으면 곧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기 때문에 지금 회개하는 것이다. 지금 죽으면 바로 하늘에서 상급을 받기 때문에 좋은 상급을 얻기 위해 지금 충성하는 것이다. 주님 앞에 충성하고 수고한 만큼 우리가 상급을 받는데, 어찌 시간을 지체할 수 있겠는가? 어찌 뒤로 미루겠는가?

 

8. 나오며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부활하셨는데 어찌 교회인 몸이 따라서 부활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리스도만 2천년전에 부활하고 모든 성도들은 다 사망 권세 아래서 2천년동안 잠자는 상태로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은 지금도 하나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처럼 사망을 정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얻어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머리로서 첫 열매가 드려졌으니 그 다음에 죽은 성도들도 차근차근 익은대로 곧바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시온산에 14만 4천명이 서 있는데, 그들은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6에 보면,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첫 열매로 드려지신 후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죽은 성도들은 지금도 개인별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고전15:23). 이들을 가리켜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우주적인 추수가 일어난다(고전15:24). 그때는 성도 전체가 부활할 것이다. 이것을 "둘째 부활"이라고 한다. 고로 성도들은 개인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우주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둘째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죽는다고 죽음을 무서워할 것도 아니며, 다른 이가 죽었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생명이 붙어있는 한 회개를 더 많이 하고 충성하여 장차 들어갈 나라에서 상얻는 자로 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2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대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해주셔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담당할 어떤 영역이 있기는 하는 것인가?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것을 두고서 행위구원론을 펼치는 것이라는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오늘은 구원론에 관한 성경적 견해가 대체 무엇이며, 거기에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미경을 쓰고 들여다보도록 하자.

2020-12-0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6)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자유의지는 의미가 없는가?(마12: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E_ey0jnNy8  [혹은 https://tv.naver.com/v/17065335  ]


 

1. 들어가며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구원론에 관한 메시지를 나눌 터인데, 그중에서 인간론과 관련지어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참된 구원론은 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아들이면서 회심하고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첫째는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준비된 후에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베풀어질 때다(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다). 그리고 둘째로, 누구든지 이 복된 메시지를 들었을 때에 이때까지 자신이 사망의 길로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 길로부터 돌이킨 후에 자신이 지었던 지난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이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이 과연 어느 선까지인지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조명하심이 함께 하기를 빈다. 

 

2. 성경적인 구원론을 저해하는 "산데만주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 개신교회에 어느새부턴가 산데만주의가 치고 들어와 터줏대감의 자리를 차지한 지도 벌써 300년이 넘었다. 산데만주의는 1,720년 스코틀랜드의 '존 글래스'에 의해 시작된 구원론으로서 절대신앙주의를 가리킨다. 이것은 롬10:9~10에 기록된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선포에 누구나 지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단사설이다. 그런데도 산데만주의자들은 오직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죄를 탐닉하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죄를 깨닫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외면한 채 책망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다. 다만, 그들은 과거에 믿었던 단 번에 가진 믿음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것이고, 그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해설교의 대가였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이단적인 사설이며, 기독교신앙이 아니라고 질타했다. 

 

3. 오늘날 개혁교회의 신앙은 어떠한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에 개혁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도 위와같은 산데만주의와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가진 분들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만세전 예정만을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으며,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가짜신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가르쳐준 신앙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원을 항상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 완성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 말을 지금도 듣고 있고, 또 나를 보내셨던 분을 지금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요5:2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승천하사 하늘로 가신 예수께서는 한 번 얻은 구원일지라도 결국 죄와 사탄과 사망에 지는 자는 죽을 때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계3:5). 더욱이 계13:10, 14:12에 따르면, 이미 믿음을 가졌던 자라도 환난과 죽음에 직면하여서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4.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교리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근원을 찾아가 올라가가보면 우리는 2가지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의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에서 그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거스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또 하나는 믿음지상주의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서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부터 보자. 이것은 구원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히 맞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하였기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 곧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롬3:23).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인류의 죄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담당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오직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 되심과 그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구원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얻은 구원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고, 죄를 짓고도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자들은 한 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했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하며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초청했어도 스스로가 구원의 길을 버리고 간다면,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버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기로 하고서는 약혼을 했다 하자. 그런데 이 여자가 그런 상테에서도 계속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과연 약혼한 남자와 결혼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데 하나님께서 속아주어서 우리와 결혼해주시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과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계속해서 세상과 마귀를 사랑하고 그 길로 가는 자는 결국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 이제는 믿음지상주의를 살펴보자. 이것은 중세구원론의 핵심인 행위구원론에 반대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의 공로나 선행에 의한 구원관이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믿음만 가져도 구원을 받으며, 이미 믿음을 가졌으면 그는 만세전에 구원이 예정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믿음지상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시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음성을 귀기울여 듣는 인간이라면 그는 세상과 마귀로부터 돌이키게 된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구주로 섬기기로 결정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래서 구원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한 번 회심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는다. 고로, 구원은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회심의 회개와 자백의 회개를 통해 점차로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맞기는 하지만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믿음지상주의는 잘못된 신앙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으니 그런 자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계22:14).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관문은 회개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의의 옷을 예수님의 피로 깨끗히 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의 기저에는 어떤 것이 깔려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배경에서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가 나왔는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른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은 완전히 타락해 있어야 하고 전적인 무능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든 과정을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절대적으로 망가져 있어야 했고, 이미 망가져 있는 자는 절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도 없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것에 가장 합당한 성경말씀을 찾아서 대입하려 했으니, 그렇게 해서 나온 말씀이 바로 로마서 3:10이하의 말씀이다.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을 이해할 때,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고 전적으로 무능해져 있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개입하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래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아니하실 분이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롬3:10에 대한 잘못된 해설에서 비롯된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롬3:10의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그것이 사람의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의 상태에 관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구약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말씀을 살펴보자. 

 

6. 사도바울이 말했던 "의인이 아닌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좀 더 롬3:10이하에 다한 사도바울의 이해에 접근을 해보도록 하자. 롬3:10의 말씀은 사실 롬3:9에 대한 결론을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롬3:9절부터 말씀을 살펴보자. 

롬3:9-15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우선, 롬3:10이하의 말씀들은 롬3:9의 근거로 제시되는 말씀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약성경의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가져왔던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은 모든 사람은 다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이라는 뜻을 따라 가져온 구약성경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의미로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해져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자도 없도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지못하는 자들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롬3:10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롬3:11~12의 말씀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롬3:10의 말씀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롬3:10과 롬3:11~12의 말씀은 전혀 다른 구약성경에서 가져온 서로 다른 본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롬3:10의 말씀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며, 롬3:11~12의 말씀은 또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관주를 찾아본다. 대체 이 말씀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려고 말이다. 그런데 관주를 보니 롬3:10~12의 말씀은 시14:1이하와 시53:1이하에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으니, 롬3:10의 말씀은 응당 시편14:1이나 혹은 시53:1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14:1이하와 시53:1이하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이 없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본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경 전도서 7:20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선을 행하면서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없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본문으로서 전7:20의 말씀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롬3:10~11의 말씀은 또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가? 이 말씀은 시14:1이하와 시53:1에서 가져온 말씀들이다(두 개의 본문은 대동소이하다).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고로,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부패하여 그 행실이 가증한 자는 "어리석은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악한 자 "나발"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편14편의 말씀과 그 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시편14편의 저자는 "다윗"이다. 그런데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보라. 그것은 "나발"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다윗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없는 자를 "나발"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성경 사무엘상 25장의 나발이야기에 나온다. 마온에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갈멜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옆에서 다윗도 사울왕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윗의 사람은 6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양떼를 지켜주었을 뿐 그 양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나발이 양털을 깎을 때가 되자, 다윗은 소년 10명을 보내 그동안 자신이 그를 선히 대한 것에 말하면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발은 악한 자였다. 그는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 사는 종이 많다는데, 어디서 온 지인도 모르는 자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작정하였다. 그런데 나발의 하인들 중 한 명이 나발의 처 아비가일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즉시 떡과 고기와 건포도, 무화과 뭉치 등을 챙겨 다윗에게로 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어리석은) 자니이다(삼상25:25)" 그러자 다윗은 그녀의 말을 듣고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나발은 자기를 위해 잔치를 배설하고 즐기다가 그만 자초지종을 듣더니 며칠이 못되어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14편에서 나발을 대신하여 "어리석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14:1이하의 말씀은 베풀어준 은혜도 몰라보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며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롬3:10에 나오는 죄인에 대한 설명을, 롬14:1~3에 나오는 악인의 설명을 가지고 설명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죄인들 중에는 나발과 같은 악인도 있는데, 모두를 다 악인 취급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7. "죄인"과 "악인"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롬3:10에서 말하고 있는 "죄인"과 롬3:11~12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죄인과 악인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말하였다. 

시1:4-6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렇다. 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으며 회개하지도 않고 악하게 살아가는 악인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악인들은 결코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죄인" 중에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할 수 있으나, 악인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문을 닫고 하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13:49-50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렇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자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악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 일어날 일도 말씀해주셨다. 그때에는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의인들 중에서 악인들을 갈라내어서 풀무불에 던져넣을 것이라고 하셨다. 심판의 날까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그치지 않는 자는 결국 풀무불(지옥불)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의인들 중에서 죄인들을 갈라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죄인들 중에는 성령의 책망하는 음성을 듣고 돌이켜 회개할 자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롬3:10의 말씀은 "죄인"에 대한 설명이요, 롬3:11~12의 말씀은 "악인"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롬3:10에 나오는 "죄인"은 다윗과 같이 죄를 지은 후에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돌이켰던 회개하는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롬3:11~12에 나오는 "악인"은 나발처럼 책망을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며 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며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왜 누군가 악인에 대한 설명을 롬3:10에 나오는 죄인에 대한 설명으로 바꿔치기한 것인가?

  그럼, 누가 관주를 잘못 기재하여, 롬3:10의 말씀이 나발과 같은 악인에 대한 설명이라고 끌어간 것인가? 정확히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언제부터 관주가 달아졌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원을 찾아가 보니, 우리나라에서 관주성경의 최초는 1911년에 신약성경을 발행할 때였다. 그것도 미국에서 1907년에 발행된 스코필드 관주성경에서 따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1800년대 어느 선에서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 같아 보인다. 

  다만,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제4판 최종본, 1559년)에 보면, 롬3:10이하에 대한 해설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롬3:10~12을 말씀을 써놓고는 괄호 안에 (참고, 시편14:1이하, 시53:1이하)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칼빈이 롬3:10과 롬3:11~12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칼빈도 역시 악인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롬3:10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성경말씀에 대한 장절 표기가 칼빈시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펼쳐지기 전까지 누구도 성경에 장절을 표기하지 않았는데, 1551년에 프랑스 파리의 인쇄업자였던 스테파노스가 처음으로 신약성경에 장절표기를 시도하였고, 그 무렵에 칼빈이 그것에 대한 추천사를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이하의 말씀이 시14:1이하에 있다고 표기한 것은 칼빈이 최초가 아닌가 추측을 해 볼 뿐이다. 그런데 후대에 가면서 그러한 사실은 점차 고착화되었으니,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관주성경은 칼빈처럼 롬3:10의 말씀의 관주를 시14:1, 53:1이하의 말씀이라고 달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버젓이 말이다. 

 

9.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는 대체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지상주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며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정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은 다윗처럼 죄인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롬3:11~12의 나오는 나발 곧 "악인"의 상황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인 것이다 모두가 다 악인은 아닌 것이다. 그중에는 나발과 같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악을 일삼는 악인도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은 이러한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실수였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이라도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으면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올 자도 있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가르쳐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한 인간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께서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은 어떻게 말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앞에서 줄곧 설명했으니 생략하고, 예수께서는 과연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바로 오늘 말씀(마12:20)에 나오는 인간이해다. 곧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은 상한 갈대처럼 꺾여진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놔두면 반드시 갈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꺼져가는 심지(혹은 등불)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놔두면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람을 막아주고 기름을 보충해 준다면 다시 활활 타오를 수가 있다. 바람인 귀신들의 공격을 차단해주고, 기름인 성령을 보내어 깨닫게 하시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있거나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해 있어서 스스로는 절대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는 된다고 말이다.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고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 번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내게로 나아오라.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그리고 왜 성령께서도 "오라. 와서 원하는 자는 생명수를 받으라(계22:17)"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사람이 비록 타락은 했어도 주님의 초청에 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사람은 주님의 초청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거절할 것인가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이렇듯 선택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떻게 주님과 성령께서 구원으로 그들을 초청하고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책망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날에 주님께서 사람을 불러다가 심판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것에 대한 처벌로서 심판할 때에 그들은 어느누구도 항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타락해 있어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적어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에 반응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11.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실 때에 즉시 마음의 문을 열고 구원의 초청을 수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현재의 상태에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탈출하여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돌이켜 회개하여 주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다시 범죄하게 되었을 때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묻혀 지내다가 그만 회개하지 않고 불못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21:8). 그러면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3:5). 뜨뜻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3:19). 열심을 내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이며, 회개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실 때에 속히 응답해야 한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회개한 죄인 다윗처럼 구원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죽어 악인 나발처럼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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