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그리스도인의 율법관(06)] 안식일법, 과연 무엇이 폐지되었고 무엇이 남아 있는가?(엡2:14~1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CJgnLTOAoj4 [또는 https://tv.naver.com/v/48263524]

 

1. 들어가며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면 아니되는가?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사라지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활성화되면서부터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다. 하지만 A.D.66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순교한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에는 안디옥교회 중심으로 그리고 이어서는 로마교회 중심으로 이방인 교회가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A.D.2세기에 이르자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주일만 지키는 교회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결국 교회는 주일만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따르면 안식일은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라고 되어 있는데, 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가?

 

2. 안식일 법이란 무엇인가?

  '안식일' 법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613가지 율법조항들 가운데, 도덕법인 십계명에도 나오고, 의식법의 하나인 절기법에도 나오는 안식을 규정법다.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을 거룩하기 지키기 위하여 그날을 기억하라"는 것이다(출20: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출20:11, 31:17). 이것이 바로 처음 안식일을 제정해주실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이다. 그리고 이 날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는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해야 하겠지만 일곱째 날이 되면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다 쉬게 하라고 하셨다(출20:10). 한 마디로 안식일 법이란 안식일을 기억하고 그 날에는 쉬라는 법인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 법을 재차 규정하고 있는 신명기의 말씀에 따르면, 안식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출애굽기의 원래 말씀과는 다르게 나온다. 그것은 안식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창조주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고로 사람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안식일 자체가 중요해서 가아니라, 안식일을 통하여 사람도 가축도 서로 쉬게 하고, 사람을 창조하시어 만물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할 뿐마 아니라, 자기 민족을 저 애굽에서 구출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왜 인간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안식일이 귀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데, 그것을 인간에 누리도록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애굽의 포로생활에서부터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오직 구원자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잊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을 쉬게 하신 것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에게 감사하기 위함인 것이지, 그날이 중요해서 그날을 쉬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함으로서 일꾼과 노동자도 한 숨 돌리게 하기 위함도 있었던 것이다.

 

3.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했는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식을 제정해주셨다. 그리고 그날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 그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다. 그러한 규례들은 출20:8~11, 신5:12~15, 출31:12~17, 35:2~3에 나오며, 훗날 더 조항들이 추가되 완성이 된다. 

  첫째, 그날에는 어느 누구도 일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출31:14~15, 출35:2, 레23:3). 일을 하게 되면 일에 빠져서 그만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고(출35:2, 민15:35), 그날에는 집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다(출35:3).

  둘째, 그날에 제사장은 떡을 진설하라고 하셨다(레24:8).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안식일마다 지난 주의 떡을 물려내면서 새로운 떡을 떡상에 진설해야 했다. 

  셋째,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을 통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이 날에 드려야 할 제사로는 상번제와 소제와 그리고 전제를 드리라고 했다(민28:3~8,9~10,대하2:4, 3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 되면 양을 아침과 저녁에 상번제로 드렸고 고운 곡식가루에 김을 섞어 소제를 드렸으며 술로 전제를 부어드렸다. 

  넷째, 안식일에는 자기의 육신의 쾌락을 위해 오락을 즐기지 말라고 했다(사58:13~14).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되면 다음과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4.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지하겠다고 하셨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이 지나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가나안인들이 섬겼던 이방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으로는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날에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이 되면 제물을 갖다가 무수히 바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이방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을 향하여 이제는 내 백성이 성전의 마당만 밟고 갈 뿐이라고 말씀하셨다(사1:12).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굴만 보려주려고 나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더이상 헛된 제물을 내게 가져오게 말라. 분향도 하지 말라. 초하루나 안식일과 절기로 모이는 것도 내게 가증하니 더이상 그것을 행하지 말라"(사1:13)고 하셨다. 심지어 이제는 초하루나 정한 절기로 모이는 것도 싫어하신다고 하셨다(사1:14).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이미 떠난 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제물을 더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다(사1:11). 그러므로 얼마 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는 희락과 절기와 월삭(초하루)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지하겠다고 말씀하셨다(호2:11). 

 

5. 안식일 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안식일 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언제 알려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을 통해서다.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부름받은 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었다. 그는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자, 율법으로 업하기로 소문난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A.D.34년경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자(행9:1~9), 자기는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왔던 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자기를 포함한 유대인들이 그동안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온 것은 실제가 오면 없어지게 될 모형이자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제외한 의식법들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소개해주는 모형이자 그림자이기 때문이다(히10:1). 그것은 실체가 오면 폐지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골2:17).

  그러자 그는 이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부터는 의식법을 지켜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도 되는 것이고, 의롭다 함도 받으며, 구원도 얻게 된다고 설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의 편지를 통하여, 율법에서 의식법들은 모두 폐지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갈4:8~11, 골2:16~17). 더이상 이방인들이 의식법들을 지키지 않아도 이미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했으니 그분 안에 거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갈4: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6. 그리스도인들은 왜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게 되었는가? 그것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안식일은 더이상 지키지 않아도 될 임시법으로서,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소개해주는 모형이자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은 언약백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부터는 할례받은 언약백성의 특권을 없애버리셨다. 형식적으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다고 해서 언약백성이 되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더이상 모형이자 그림자인 안식일법을 붙들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들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몰론 이것은 오늘날의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그러므로 안식일 법은 구약의 의식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제는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함께 모여, 구원자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셋째, 기독교를 공인해주었던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해 줌에 따라 공휴일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안식일 법은 의식법으로서 절기법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덕법인 십계명에도 나온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식일은 의식법에 속한다. 일종의 절차법인 것이다. 안식일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전혀 모를지라도, 절차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면 언약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법은 실제법이 오면 사라져야 할 법이었다. 그러므로 의식법으로서 안식일 법은 더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법으로도 주어진 안식일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도덕법으로 주어진 안식일 법만큼은 폐지하신다고 바울을 통해서 알려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 곧 에베소서 2:15에 나오는 말씀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계명의 율법이라도 폐지한다 것을 말해주었다(히7:18~19, 히8:7, 10:9). 그렇다고 모든 십계명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오직 의식법으로서 십계명에 들어온 안식일법만 폐지된 것이다. 

엡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히7:18~19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7. 나오며

 

 

 

2024년 02월 18일(주일)

정보배목사

2024-02-04(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귀신이 떠나가게 하기 위한 정말 중요한 요건은 무엇인가?(엡5:1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MyyjRg8BSuU [또는 https://tv.naver.com/v/48258851]

 

1. 들어가며

  귀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작 무엇이 필요한가? 오늘날은 귀신이 가득 찰대로 가득 차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오실 시기가 다 되었기 때문에 귀신의 활동도 그만큼 증가된 것이다. 한 마디로 지금은 귀신 충만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에서부터 노인에게 이르기까지 귀신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증상을 고쳐 보기 위해 우선은 병원부터 찾는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문제가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중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영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여 귀신쫓는 목사님들을 수소문하여 찾는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기도 받을 때에는 좀더 나은 것 같지만 기도가 끝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그리고 며칠 지나면 또 그 모양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안수해 주는 사역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즉 사역자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귀신축사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을 통해 축사사역에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살피고 온전한 귀신축사를 통하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2. 귀신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사역자의 문제인가 아니면 본인의 문제인가?

  지금의 시대는 귀신이 총출동하여 활동하고 있는 시기다. 사람마다 귀신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신기가 나타나거나 우울증세를 앓고 있는 분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보면, 신내림 굿을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교회에 나가서 귀신을 쫓아주는 목사님을 만나서 귀신을 떼어내야 한다든지 하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신내림을 받자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싫고, 그래서 귀신쫓는 사역자들을 찾게 된다.

  그러면 이때에 두 종류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전혀 자신에게 반응도 없고 차도도 나타나지 않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자기 안에 큰 귀신이 들어 있어서 귀신이 자신을 감추고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사역자가 능력이 부족해서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분명 안수를 받았을 때에는 귀신이 떠나가는 것 같지만 안수를 받고 집에 돌아오거나 며칠 지나면 또 옛날과 똑같아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역자들을 수소문하여 찾게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떼어내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면 자기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사역자를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찾아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 사역자가 귀신쫓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귀신들린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3. 사역을 받았을 때 진짜 귀신이 쫓겨나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사역자로부터 귀신축사를 받았을 때에 진짜 귀신이 나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그것은 첫째, 사역자가 매우 큰 영권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즉 사역자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강력한 영권을 가지고 있어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즉시 귀신을 쫓아주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라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러한 사역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500년 짜리 혹은 천 년 짜리 귀신을 단번에 쫓아낼 영권을 가진 사역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실제로 그렇게 강력한 사역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에 귀신을 방어할 자생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귀신이 또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다시 들어오는 귀신은 절대로 그냥 혼자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귀신은 강제로 쫓겨났기 때문에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그 귀신이 다시 들어올 때에는 자기보다 더 크고 힘이 센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 악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럴수록 귀신들림의 현상은 더 강화된다. 그럼, 치료에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다. 

  둘째,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생력을 갖춘 상태에서 귀신을 떠나보내는 경우이다. 이는 자기에게서 귀신을 떠나보내되 오로지 사역자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힘을 키워가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다. 이런 자는 떠나간 귀신으로부터 확실히 공격을 덜 받는다. 그리고 떠나가는 귀신은 많아지지만 들어오는 귀신은 점점 더 없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귀신축사의 경우라고 하겠다. 

 

4. 실제적으로 귀신은 어떤 경우에 잘 떠나가는 것이며 떠난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않는가?

  축사사역을 해 보면 어떤 자에게서 귀신이 잘 떠나가며, 또한 떠난 귀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경우다. 

  첫째, 회개를 충분히 한 상태에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신이 사람의 몸속에 들어올 때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갈 때에도 합법적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귀신은 왜 들어오는가? 그것은 본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것이다(창3:14, 요일3:8). 그러나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도 귀신이 들어온다. 즉 조상들 속에 들어 있던 귀신들이 나와서 그의 후손에게 들어가는 것이다(출20:5). 그런데 이 둘은 둘 다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진정 귀신을 떠나가게 하려면 귀신이 떠나가는 합법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이든지 아니면 조상들이 지은 죄이든지 그 죄들을 진심으로 자백함으로 회개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부터 깨끗하기 때문에 귀신은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죄를 인격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 몸속에 들어 있는 귀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야 귀신도 역시 합법적으로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씻어버리기 때문에, 귀신들도 그 사람 속에 들어가야 할 법적인 근거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많이 하고 귀신축사를 받을수록 귀신은 잘 떠나가는 것이며, 떠나가는 귀신도 다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떠나가는 귀신도 합법적으로 떠난 것이므로 해코지도 하지 못한다. 

  둘째,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불은 사역자에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축사사역자가 귀신들린 자를 안수해 보면, 자기에게서 불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사역을 받는 당사자에게서도 불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에게서 불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귀신도 잘 떠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때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귀신들렸던 당사자가 자기 방어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귀신이 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들어올 때에는 더 악한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불이 사역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당사자에게서도 나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역자에게서 불이 나와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귀신들린 당사자에게서도 불이 올라와서 귀신을 태울 때에 귀신들이 꼼짝없이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고로 당사자 안에 전혀 불이 없을 때에는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귀신들을 밀어낼 힘이 없기에 귀신을 잘 쫓아내지 못한다. 그럼 귀신은 어디에 들어 있고, 성령은 어디에 들어 있는가? 귀신은 우리 육체에 들어 있고 성령은 우리 영 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바깥쪽에 있는 귀신들을 밀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불이 나오면서 동시에 은사자의 불이 들어와서 귀신을 태우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도 고통을 참다가 참다가 너무 아프기 때문에 떠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를 사역자에게만 돌리지 말라. 이 세상 축사사역자 치고 귀신을 떠나보내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사역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사역자의 조건 외에도 귀신을 쫓아보내려는 자가 믿음이 없을 때에는 자기의 속에서부터 성령의 불이 전혀 타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귀신은 그냥 버텨내는 것이다.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부터 강력하게 불이 들어오고 또 안에서 불이 밀고 치고 올라오면 귀신들은 당황한다. 그러면 그 강력한 불에 자신의 몸이 타버린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그 불의 고통을 참고 참다가 마침내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들린 당사자는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불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성령님이 들어 있지 않는 자는 귀신을 쫓아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사역자에게 부탁하기 전에 자기 안에 먼저 성령님을 모셔들여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5. 성령의 불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귀신을 태워 고통을 안겨주는 성령의 불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선 첫째로,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성령의 불은 안수자에게서도 나오고 귀신들린 자 속에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린 당사자는 성령의 불이 오로지 안수하는 사역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불은 은사자에게서만 나와서 귀신들린 자에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영에서부터도 동시에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신 상태이기 때문이다(고전3:16, 6:19~20). 그러므로 귀신들린 당사자가 안수를 받을 때에는 안수자의 불만 의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성령에게서부터 함께 불을 바깥쪽으로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불은 사람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불은 사실 우리의 지성소인 영 속에 계신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성령의 불은 우리 믿는 이들의 영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불은 하늘에서도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의 제단에 있는 불을 천사들이 가지고 내려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천사들 중에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하늘의 제단으로부터 불을 가지고 와서 안수받는 자의 머리에 붓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아무래도 높은 영적 계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럴수록 불의 양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역자가 높은 계급일수록 천사도 큰 천사가 불을 가지고 와서 사역자를 돕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하늘에 있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를 부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부터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불과 자기 속에서부터 나오는 불을 귀신들린 당사자의 몸에 집어넣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다. 

 

6. 축사자의 도움으로 귀신을 떠나보내려 할 때 당사자는 어떻게 자기 안에 성령의 불을 더 강하게 지필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축사사역자의 도움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려 할 때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부터 얼마나 불이 타오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고로 자기의 속은 아주 냉랭하고 차가운데, 사역자만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자기 방어 능력을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귀신을 축사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귀신은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귀신들린 자신이 사역자로부터 안수받을 때에만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라면 축사받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한다. 그러한 축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불은 내 속에서도 타오르게 해야 한다. 내 속에서도 장작불 같은 것이 타올라야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속에서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가? 그것은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다(엡5:18). 그럴려면 찬송도 뜨겁게 불러야 하고, 기도도 뜨겁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귀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귀신이란 어떤 존재이며 왜 어느 때에 우리를 공격하는지를 배우고, 또한 귀신축사에 사용되는 예수의 이름이 과연 얼마나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진 이름인지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수록 귀신은 더 잘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성경을 공부한 적도 없고, 땀흘려 기도한 적도 없으며, 찬송도 대강 부르면서, 사역자의 능력만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 보내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성령이 충만케 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7. 나오며

  사실 귀신축사는 축사사역자와 귀신들린 당사자가 합력할 때 가장 큰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역자의 안수를 받으면 자기 속에 있는 귀신이 떠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회개도 제대로 한 적이 없으면서 사역자에게서 안수를 받아 귀신을 쫓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다.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 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귀신이 떠나가도록 허용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축사자는 영권을 더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당사자는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영에서부터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역자가 손만 대면 귀신이 떠나갈 정도로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으면서 오로지 사역자의 능력만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한 축사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귀신으로부터 받는 고통만 더 가중시킬 뿐이다. 축사자나 당사자나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요, 물질만 낭비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철저히 회개하라. 회개기도문으로 철저히 자신의 죄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개를 했으면 능력 있는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더욱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도 자기의 속에 있는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면서 사역자로부터 불의 안수를 받아야 한다. 자기는 여전히 냉랭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역자만 의존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축사방법이 아닌 것이다. 

 

2024년 02월 04일(주일)

정보배목사

 

2024-01-2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하나님의 경륜(15)] 어떻게 하면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롬12: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JCH4Yg62Vk0 [또는 https://tv.naver.com/v/46735346]

 

1. 들어가며

  성경 말씀에 따르면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살전5:23, 히4:12).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성 성분 중에서 구원을 받는 순서는 영에서부터 시작하여 혼으로 그리고 육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생명주는 영이신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신다(딤후4:22, 고전6:17). 그러므로 생명이 들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된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신다. 그러면 사람이 거듭 태어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우리는 혼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혼의 구원이 이뤄지는가? 그럴려면 혼의 영역에도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와야 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혼의 영역에 거처를 정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혼은 육신에 팔려 늘 죄를 짓는데 빨랐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성도가 되었으면 혼도 처리를 해야 한다. 그래서 혼의 영역에도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혼의 영역에 그리스도께서 거처를 정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는 2가지 실제적인 가르침이 있다. 오늘은 혼을 구원하는 2가지 실제적인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2. 사람의 혼(魂)(헬, 프쉬케)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혼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혼(soul)이란 영과 육이 만났을 때에 생겨나는 정신적인 것으로서, '생각(知)'과 '감정(情)'과 '의지(意)'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을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에게는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의 혼(프쉬케)을 가리켜 '자기 자신'이라고 가르쳐 주셨다(마16:24~26, 눅9:25).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이 곧 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혼은 일종의 '자아(自我)'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헬라어로 보면, 혼은 '프쉬케'라는 단어다(히브리어로는 '네페쉬'이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성경에 따르면, 혼을 '혼'이라고 번역한 곳이 많지 않다. 거의 없다. 신약성경에는 총 91번의 '프쉬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그것을 '혼'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곳은 단 2곳 뿐이다(살전5:23, 히4:12).

  그럼, '프쉬케'라는 단어는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어떻게 번역되어 있을까? 그것은 대부분 '영혼'(마10:28), '목숨'(마6:25), '마음'(마11:29), '생명'(막3:4,계12:11)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행2:43, 7:14), '영(靈)'(롬2:9, 고전15:45), '심령'(벧후2:8), '뜻'(빌1:27), '명(名)'(벧전3:20)'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역들은 전부 의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확한 번역은 혼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살전5:23, 히4:12).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어에서 '혼'은 '넋'을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문맥에 따라 각기 다른 말로 번역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번역들은 성경 원문을 따라 성경을 보기 원하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혼의 뜻이 무엇인지를 더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사람의 혼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혼은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모든 혼은 이미 악해진 상태로, 부패한 상태로 그리고 더럽혀진 상태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로 인해 혼이 이미 망가졌기 때문이다. 혼이 더 이상 원래의 용도로 쓰임받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혼은 어떤 용도로 창조되었는가? 원래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에 창조된 혼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중립적인 상태에 있어 마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혼은 마귀의 생각에 의해 물들었고 결국 범죄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의 혼은 마귀를 꼭 닮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며 죄를 짓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2가지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그렇다. 사람의 혼을 변화시키려면 첫째는 예수믿기 전의 혼 곧 이전의 혼을 부인해야 한다(마16:24). 즉 이전의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의 자기 자신의 혼은 이미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마16:24). 이는 십자가에 못박아 자신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혼이 죄짓기를 좋아하는 옛 사람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혼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분배받아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4. 혼의 생각을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자기의 혼을 부인한다는 뜻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부정하고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바꾸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혹 예수님을 믿어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여전히 옛 사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자라면 혼의 3가지 영역에서 달라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중의 첫 번째는 생각의 영역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는 혼이 주는 생각을 버리고 아예 생각을 영에 두어, 영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다(롬8:6).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탄의 열매로서 사망을 맺지만, 영의 생각은 성령의 열매로서 생명과 평안을 맺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따라 살려 한다면,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생각('누스')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롬12:2). 고로 혼의 생각을 새롭게 하려면 생각을 혼에 둘 것이 아니며, 육신에 두어서도 아니된다. 그는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롬8:6).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영과 성령이 결합되어 하나 되어 있는 영에 놓아 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이 새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새로워지면 그는 영에게 역사하고 있던 그리스도께서 혼의 존재 안으로도 들어와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혼의 감정과 혼의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5. 혼의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제 혼의 감정과 의지를 새롭게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번째는 혼의 감정을 새롭게 하는 것인데, 이는 옛날의 자신의 혼의 감정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우고 난 후, 자신의 감정을 예수님의 감정으로 바꾸는 것이다(요8:29). 그럼 예수께서는 어떤 감정으로 살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자신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은 자신도 슬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자신도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방식을 나도 똑같이 따라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혼의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데에 사용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드리는 것이다(요6:38). 그럼 예수께서는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셨던 것일까? 그분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다(눅22:42).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신을 이 땅에 보내셨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려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예로서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자(마16:21~23). 예수님에 대한 계시적인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고, 죽임을 당한 뒤에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실 것이라고 말했는데, 베드로는 예수께서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베드로의 생각(의견)은 사탄의 생각이었다. 이때 베드로의 생각은 혼이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사탄에게 장악된 상태였기에 사탄이 원하는 말을 그가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혼 안에 사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엄한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혼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각 곧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성취하는데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6. 나오며

  사람이 새롭게 되는 부분은 영에서부터 시작되며, 이어서 혼과 육으로 이어진다. 이때 영은 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즉시 생명주는 영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그때 아버지의 생명이 자신의 영에게 공급(분배)이 된다. 그러면 영은 이제 성령과 하나가 된다(고전6:17). 그러므로 그때의 영은 성령의 영과 나의 영이 하나된 연합된 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우리는 영으로 돌이키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연합된 영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럼 그때 우리의 영은 어떤 영이 되는가? 첫째로 주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이 된다. 둘째로 깨끗해진 양심을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셋째로,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가르침을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이 다음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때부터는 사탄에게 넘어가 있는 우리의 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에 있는 생명을 혼에게로 흘러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에 계신 그리스도가 혼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혼을 부인해야 한다. 이전에 자신이 혼을 따르던 것을 그쳐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내 영의 인도에 맞추어 드리는 것이다. 오직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주님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의지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혼의 영역에 있어서도 변화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서 혼의 구원을 이뤄가는 것이다. 

 

 

2024년 01월 21일(주일)

정보배목사

2024-01-14(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하나님의 경륜(08)] 하나님의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는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요10: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Ga2vrUgUu-g [또는 https://tv.naver.com/v/46735255]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품으신 첫 번째의 뜻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려 함이었다(요10:1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그냥 거기서 끝마친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하나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표현해내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해낼 영역은 단지 영(靈)의 영역 뿐만 아니라 혼(魂)과 육(肉)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표현해 내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것을 위해서 사람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어야만 한다(요10:10). 그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표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의 종류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 종류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1:26~27, 고후4:7).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충분히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만세전에 품으신 하나님의 경영계획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을 요약하면 2가지 분배가 그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생명(life)'의 분배이며 또 하나는 '땅(earth)의 분배'다. 그런데 이 둘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다. 이때 '생명'이란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키며,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본성인 생명을 나누어 주어 인간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기를 바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앞 부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놈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천사였다.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지혜롭고 창조되었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던 루시엘(나중에 사탄 마귀가 됨)이 타락하여 뱀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한 것이다(창3:1~6, 계12:9). 이는 아담이 생명과를 먹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기에 앞서,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서 사망을 취하게 하였기 때문이다(창2:17, 롬6:2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한 사탄마귀를 멸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땅을 기업으로 분배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뒷 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들이라도 마귀와 영적 싸움을 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지라도 거기에서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과 싸워서 그들을 쫓아내는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3. 생명을 얻게 더 풍성히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첫째로, 자신의 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야 한다(요10:10a, 요20:31). 그런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이 땅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에게 분배해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양으로 묘사된 인간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이자 생명으로 믿고 그분을 영접해야 한다(요1:12). 그러면 예수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시어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신다(고전15:45). 그러면 그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게 된다. 그러면 그시로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둘째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이유가 단지 인간에게 생명만을 주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하게 얻도록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요10:10b).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생명을 가지고 들어온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자기 자신 안에서 풍성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세가지 영역 곧 영과 혼과 몸의 영역에 있어서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다. 영도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고, 혼도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며, 육도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 곧 인간이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4. 사람의 영에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의 영이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을 위해서는 사람의 영이 어떤 것인지부터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즉 자신의 영과 접촉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영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넘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靈, 히브리어=루아흐, 헬라어=프뉴마)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람 안에 들어있는 '속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내적 기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영은 그 특징이 영이 육체와 함께 있을 때에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영이 사람의 육체를 떠난다면 그 육체는 생명이 정지되어 죽음에 이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듭난 성도가 자기의 영과 접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을 영으로 돌이킬 때 가능해진다. 즉 자신의 속에 있는 영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자신의 영을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영이시고 사람도 영을 가지고 있는데(요4:24), 사람이 자신의 영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영 안에서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접촉할 때 만족을 얻게 되고 평강을 누리고 기쁨을 갖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영이 피폐되지 아니하고 풍성하게 하려면 매일 자신의 영에게 양식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사람의 육체의 양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으로서 밥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혼의 양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지식들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의 양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명기의 말씀(신8:3)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마4:4), 사람의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과 접촉하고 영을 사용하려면 하나님께 예배를 영 안에서 진리로 드려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에 자신의 영을 사용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사람의 혼과 육에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영 뿐만 아니라 사람의 혼과 육에도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영과 반대로 하면 된다. 사람의 영은 피조물인 귀신이 들어올 수 없는 영역으므로 이 영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그 영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이후 혼과 육은 사탄의 지배하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제 혼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려면 가장 먼저, 첫째로 혼을 부인하고(마16:24) 그것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갈2:20). 이 부분에 대해서 나중에 더 자세히 배우겠지만, 혼의 영역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혼을 처리하여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생각을 부인하고,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며, 의지를 성령께서 복종시켜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의 혼의 영역에도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 성령께서 주인이 되심으로 혼이 육체를 벗어나 영과 하나가 될 수가 있다. 자신의 혼이 부패한 육체와 하나가 되어있는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혼이 생명을 가진 영과 하나가 되어있는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부른다(엡4:22~24).

  그리고 나서 둘째로, 육체를 쳐복종시켜야 한다(고전9:27). 그래서 육체를 죄를 짓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의의 병기로 만들어야 한다(롬6:13). 그런데 육체는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그때는 죄된 본성이 거하는 공간이 된 상태에 있었다. 여기서 죄된 본성이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 인간의 몸 속에 침투해 들어온 뱀들 곧 귀신들을 가리킨다. 죄된 본성을 인격화하면 그것이 곧 뱀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쳐복종시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몸 속에 거하고 있는 귀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들이 떠나갈 수 있도록 철저히 회개하고 그들이 떠나갈 것을 명령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체까지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하려면 영적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내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혼까지도 동시에 처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육체 속에 들어있는 귀신들을 내 보내지 않는 한 우리는 귀신이 주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어도 병이 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형통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깐 빈 틈을 이용하여 귀신이 주는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회개를 통해 귀신이 떠나갈 준비시키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 그들이 우리 몸에서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우리의 육체도 의의 병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흙이었던 우리의 육체가 어느새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지어진 천국집을 갖게 되는 것이다. 

 

6. 나오며

  사람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으려면 생명이신 주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한다(계3:20). 이를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람처럼 호흡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부활 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요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 그분은 바람처럼 호흡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영역은 우리의 영(靈)이다. 영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자기 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가, 자신의 혼과 육의 영역까지 생명이 지배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라.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얼마가 자신의 영 안에 들어오신 생명주는 영을 접촉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 옛 사람에게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영 안으로 돌이키는 것을 하실행하고 있는가? 더욱이 이미 부패한 본성으로 가득 차 있는 육체를 따라가는 자신의 혼을 과연 얼마나 부인하고 있는가? 혼을 과연 얼마나 죽음에 넘기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이제는 혼을 부패한 육체로부터 떼어내어, 생명주는 영과 연합된 자신의 영과 연결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육체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귀신을 제거하는데 얼마나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들어온 귀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저주도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귀신이 우리 몸에서 떠나갈 것이며, 그들이 가져다준 저주가 스스로 우리에게서 떠나가겠는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내가 지은 자범죄와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자백할 때에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 회개야말로 죄인들이 구원얻는 시작의 문이며 구원의 완성을 향한 마지막 관문인데도 그것을 모른 채 회개도 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영 안으로 돌이키는 자도 거의 없고, 혼을 부인하고 죽음에 넘기고 있는 자가 많지 않다. 그러나 이제 우리라도 시작해보자.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2024년 01월 14일(주일)

정보배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