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전적으로 무능하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결국 전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은혜가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3:20에서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밖에서 서서 기다리고 계시셨던 것일까? 전능하신 능력으로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셔서 인간을 구원해내셔야 하지 않을까?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그동안 잘 다루지 못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성경적인 접근을 시도해보자.

 

1. 들어가며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는가 아니면 파괴되기는 했어도 어느정도까지 남아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초기교부 어거스틴(A.D.354~430)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A.D.1483~1546)는 "인간에게 만약 자유의지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종속되어있는 노예의지일 뿐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의지는 없다"고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종교개혁자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구원에 있어서 전적인 무능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을 위해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바른 적용이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가 어느정도 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보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그리고 전적으로 무능한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롬3장의 말씀을 인용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래서 이 세상 사람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는데 하나도 없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선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말이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매월 일정금액을 헌납하고, 재산을 기부하고 죽는 등의 선을 행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이 틀린 것인가? 아니다. 성경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자가 성경말씀을 잘못 인용하고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롬3:10~12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롬3:9에 나와 있듯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 죄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근거로서 롬3:10~12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에 나와있는 성경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롬3:10~12의 말씀은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가? 그것은 시편14:1~3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인용된 대상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시14:1)다. 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특별히 악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단 하나의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과장된 인용이다.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결국 구원에 이를만한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지은 죄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 죄아래 있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인용이요 잘못된 성경적용이다.

 

3.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 남아있는가?

  그렇다면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정도 타락했으며 어느정도 약해져 있는가? 사도바울은 롬7장에서 인간의 자유의 타락정도를 이와같이 언급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18-21) 그렇다. 사람에게는 선함도 가지고 있지만 악도 같이 가지고 있는데, 아담의 범죄이후 타락한 인간은 선보다는 결국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진단이다. 그렇다. 타락한 인간이라도 선을 아주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도 있으나 결국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음을 말해준다. 만약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의 기준이나 사회법이 없고 양심대로 전혀 행하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 마음대로 살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빼앗고 강포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타락이후 태어난 가인의 행동이다. 가인은 인류 가운데 최초의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 잠재된 죄된 본성은 그의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결국 돌로 쳐죽이는 일까지 서슴치 않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렇다.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타락이후 파괴되었다. 악에 의해 선이 잠식당해버린 것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악이 뛰어들어 눌러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잔인하게 악해지지 아니한 이유는 사회도덕이 있고 종교적인 규율이나 국가적인 법이 있기 때문이다.

 

4.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단해주시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상태를 진단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인데, 사람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는 것이다(마12:30).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에 나온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42장에서는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사42:3)"이라고 했다. 그렇다. 인간은 상한 갈대다. 그대로 놔두면 반드시 꺾여져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이다. 가만히 놔두면 그 등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와서 갈대를 세운 뒤에 싸매준다면 이 갈대는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갈대요. 누군가가 와서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채워주면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는 등불인 것이다.

 

5. 타락했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들 3가지는?

  이러한 현재 인간의 상태에 대한 좋은 예화가 있다. 인간은 물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헤엄을 치고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여기에 살아나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부르짖어 외치는 것이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에게,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에게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하여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정도라면 하나님께서도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는 자신에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라고 하신다(렘29:12~13, 사55:6).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부르짖고 기도하고 구하고 찾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할 몫이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께서 해주실 몫이 아님으 알아야 한다. 그것까지 하나님이 대신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려서는 아니 된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보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부르실 때에는 주저없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하신다(사55: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님께로 나아올 사람들에 대한 자격에 제한을 두시지 않으셨다. 구약시대에는 일시적으로 유대인들만을 초청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이후에는 모든 조건을 다 철폐하셨다. 누구든지 구원얻기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와서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셋째,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신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양심이 있고, 사회적인 법률도 있고, 종교적인 규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이켜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것을 주문하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0-32)",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그렇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우리 스스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할 것인가 말 것인지를 우리가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의지는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구원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인식하고 있어서, 자신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또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가 바로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의 실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은 전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책임은 있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을 찾고 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돌이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대신해주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긴 영역이다. 이것까지 강제하지 않으신다.

 

6.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신약성경의 증거는 무엇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 가장 잘 표현해주는 문구가 신약에도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3:20의 말씀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렇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신다. 우리 인간이 가진 권한을 강제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그분은 밖에서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분은 전능자이기에 집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 사람을 구해낼 수도 있으시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고 전능하신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손길을 뿌리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우리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아니 전능자이신 주님께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강한 자가 자신이 약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행위를 할 때 뭔가를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러므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하기에,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아니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하나님이 다 해주시고 그분은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인간의 능력의 한계로는 우리 스스로를 절대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수영도 하지 못하는 자가 물에 빠졌다고 가정해보자. 어찌 스스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물에 빠진 우리가 부르짖어 소리침으로, 자신을 해달라고 구원자를 향해 외칠 수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죄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주님께 아무런 도움의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주님이 자꾸 와서 우리를 주시면 사탄이 참소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그 죄값으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 자는 반드시 주님께 살려달다고 외쳐야 한다. 그분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마음 문 밖에 서 언제부터 그곳에서 다려왔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 자신의 험난한 인생에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기를 기뻐하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써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다음의 질문에 답해봅시다>

1.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초기교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루터의 견해는 어떠했었나?
2.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정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인가?(롬7:18~21)
3.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어떠한 것인가?(사42:3)
4. 인간이 비록 타락했어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는 어느정도까지는 되는가?(렘29:12~13, 사55:6,1~2, 겔18:23,30~32, 사55:7)
5.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은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나?(계3:19~20)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2개 내지는 3개가 아니라 오직 한 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천주교의 아이콘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잡수시거나 서로 토론하고 계시고 있는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3가지 직무를 수행하고 계시다. 그분은 그 일을 심판하시는 날 직전까지 행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그 일은 대체 무엇인가? 

 

1. 들어가며

  에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그분은 보좌우편에 앉으셨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다른 보좌가 있지 아니한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 어디에 앉으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원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그리고 성경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잘못 넘겨짚으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기 쉽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씀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2.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씀이 있는가?

  성경을 읽다보면 난감할 때가 가끔씩 있다. 그 대표적인 용례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표현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막16:19,골3:1,히10:12)"는 표현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12:2)"는 두 가지 표현이 다 나온다. 어찌 되었든지 이 두 가지 표현을 한데 모아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이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또다른 예수님의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보좌는 2개 3개가 아니라 오직 한 개뿐이다.

  신구약성경을 다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한 개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사6:1~10, 단7:9). 구약시대에는 그곳에 앉아 계신 분이 여호와이시다(사6:8). 하지만 요한계시록 22장에 의하면, 그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 내지는 "여호와의 보좌"라고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한다(계22:1,3). 그렇지만 여기에 쓰인 '보좌'라는 단어는 단수명사다. 즉 보좌가 한 개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광경에 대한 계시의 종점에서는 그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라고도 말하며, "어린양의 보좌"라고도 말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이면서 어린양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혹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의 보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을 다 상징적인 것으로 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메튜헨리는 예수께서 보좌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이렇게 주석한다. "그것은 그의 위엄있는 주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게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권세가 부여된 것이다. 지금 그는 창세전부터 그에게 있었던 영광으로 영화롭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호크마주석에서는 "거기서 예수는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개념은 상징적인 개념이다.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볼 수가 없으시며, 우주에 충만하시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오른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왼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개념이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쓰였다.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기15장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노래한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조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15: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오른손이 있는가? 영이신 그분에게는 보이는 오른손이 없다. 그분이 권능으로 홍해 속에 세계최강의 애굽군대를 수장시킨 것을 빗대어서 모세가 주의 오른손이이 영광을 드러냈다고 말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세로서 애굽군대를 쳐부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을 일컬어 그분의 오르손이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시편에서 다윗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8)"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분의 권능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을 일컬어 자신의 오른쪽에 그분을 모시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에게는 사실 오른편과 왼편이 따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이 곧 예수께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5.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기까지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대체 무슨 일을 하셨길래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히브리서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그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10:12~13)"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이서 지상에서의 속죄사역의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심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감당해야할 속죄사역을 다 완성하시고 승천하사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게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6.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님의 보좌가 있지 아니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 혹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있는 또 다른 보좌가 있고, 거기에 예수께서 앉아계시는 줄 착각한다. 아니다. 성경 66권을 다 뒤져보라. 오직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 개 뿐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2개 내지는 3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중세시대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아이콘들에는, 하나님이 세 명의 사람 혹은 세 명의 날개달린 천사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들이 보좌에 앉아 있을 때에는 3개의 보좌 위에 세 분이 각각 따로 앉아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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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중세의 사람들은 가운데의 보좌에는 성부 하나님이 앉아계시고, 그분의 오른쪽에 있는 보좌에는 성자예수님이 앉아계시며, 그분의 왼편에 있는 보좌에는 성령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보좌는 한 개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천주교인들 중에도 중세의 아이콘을 한 번만이라도 본 자는, 천국에 하나님은 세 분으로 계시며, 하나님의 보좌도 3개가 있고,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앉아있는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 개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 앉아계신다.

 

7. 천국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어떤 일을 수행하시는 것일까? 중세시대 하나님에 관한 그림을 보면, 세 분이 둥그렇게 앉아서 뭔가를 잡수시고 있는 듯한 그림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본 자는 세 분 하나님이 서로 어떤 협의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시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세 분 하나님이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을 상상하지 말라. 그런 장면은 오직 중세시대 아이콘에만 있을 뿐이다. 또한 세 분이 모여서 어떤 음식을 먹지도 아니하신다.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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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적이 있으셨다. 또한 죽고 부활하신 적이 있으셨다. 그러므로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27b~18a)" 그렇다.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사람이 되신 유일한 이유는 한 가지다. 오직 피흘리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피흘릴 수가 없으므로,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오직 흠없는 피가 필요했기에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히9: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육신을 입고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음을 알 수 있다(사9:6, 요1:14). 그래서 온 인류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그분은 사람이셨던 목적을 위해 일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행하시는 3가지 일이다.

  첫째, 하늘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일하신다(히8:1~2).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히8:1-2)" 그는 하늘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는 일을 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으로 오시어, 모든 인류의 죄를 속해주시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대제사장으로서 골고다언덕에서 속죄일제사를 드리셨고, 천국에 올라가셔서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앞으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대제사장으로서 일을 하실 것이다. 인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을 구주로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의 죄를 자동적으로 용서해주시는 아니하신다(요일1:7,9). 그러므로 죄를 지었으면 즉시 지은 죄를 회개하기 바란다.

  둘째, 하늘에서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일하신다(롬8:34, 딤전2: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그렇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주신다. 지금 이 지상에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고 있지만(롬8:26), 천상에서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중보기도해 주시고 있다.

  한편, 요한사도는 예수께서 천국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하실 뿐만 아니라, 보혜사인 중보기도자로서 사역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1-2)" 그렇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그냥 쉬시고 있는 것이 아니시다.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자로서  끊임없이 사역하고 있으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2:5)"께서 지금도 중보자의 일을 하고 계신다.

  셋째,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영적인 피조물인 천사들의 왕으로서 일하고 계신다(벧전5:22, 엡1:20~21, 히1:3).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벧전3:22)",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20-21)" 그렇다.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모든 천사들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얻을 후사들을 돕고 섬기라고 천사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도 하신다(히1:14). 그러므로 우리가 위험한 일을 당할 때에도 안전하게 보호받는 이유는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돕는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의 왕도 지배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귀신들의 왕인 사탄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믿는 이들을 지배하려 한다 해도,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시어 귀신을 쫓아내도록 권한을 주신다(막16:17~18). 그래서 믿는 이들은 주 예수께서 보낸 천사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악한 천사로부터는 지키심을 받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부터는 선한 천사들의 도움을 받고, 지상과 음부에 있는 귀신들로부터는 예수의 이름으로 지키심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8. 나오며

  그렇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다른 어떤 보좌가 있어 거기에 예수께서 앉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를 잘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영광스럽게 되셨으며, 권세와 능력을 얻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가 죽고 부활하신 분이시므로 천국에 들어가셔서 3가지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 하나는 대제사장으로서 회개하는 모든 이들의 죄를 씻어주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천상의 왕으로서, 하늘의 돕는 천사들을 보내 성도들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귀신들로부터 우리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해주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 예수께는 천국에서도 우리를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분량의 구원얻을 자를 다 얻게 되시어 재림하실 때까지 주님은 결코 쉬지 않으시는 것이다. 우리주 예수님을 찬양하라. 지금도 우리를 위해 쉬지도 않으시고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자로서, 왕으로 일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하라. 아멘. 할렐루야!!!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아담의 범죄할 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파괴되기는 했어도 어느정도 남아있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어느정도 작동되며, 특히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 어느정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어거스틴과 루터는 자유의지는 남아있지 않으며, 남아있다면 노예의지만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계3:20에서 문밖에서 서서 기다리시며 노크하시는 주님은 잘못된 행동인가? 오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남아있으며 그 의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을까 아니면 파괴되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기독교 초기 신학자였던 어거스틴(A.D.354~430)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A.D.1483~1546)는 "인간에게 만약 자유의지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종속되어있는 노예의지일 뿐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의지는 없다"고 말하였다. 정말 인간은 더이상 자유의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선을 전혀 행할 수도 없고, 구원을 얻기 위한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을까? 오늘 우리는 지난주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교회와는 달리 정반대에 속한 한 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가 문밖에 서있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까지 자유의지는 어느정도까지 필요하며,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과연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맨 마지막에 위치해있는 "라오디게아"교회다. 이 교회는 분명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면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 예수님께 속한 교회 가운데 하나다(계1:11,20,2:1).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이 교회를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하시고 있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인가? 이 교회는 뜨뜻미지근하여 주님께서 토해내버릴 만큼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교회였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구원얻을 영혼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다. 교회구성원 전체가 영적인 일에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분명 주님의 노크소리를 들었지만 예수님을 그때까지 계속해서 냉대해온 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셨다. 그 교회를 쳐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교회를 붙잡고 있었다. 왜 그러시고 있었을까? 차라리 그 교회를 생명책에서 지워버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주님은 이 교회를 끝내 버리지 않고 계시다. 그날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 밖에서 그들이 문열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3. 라오디게아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교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물질적으로 부자였던 교회여서 무슨 일에 있어서 어려움이 전혀 없는 넉넉한 교회였다. 둘째, 주변의 다른 교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없던 교회였다. 다시말해,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의 공격도 그 교회에게는 없었다. 이세벨과 같은 거짓선지자가 주의 종으로 사역하고 있지도 않았다. 돈이 많은 동네에 위치한 교회여서인지, 로마황제를 숭배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황제우상숭배거부로 인하여 당할 고통들도 전혀 없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살지 않아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항목이다. 셋째, 라오다게아교회는 영적으로 무력한 교회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어떤 영적인 필요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그 어떠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은 그들의 영혼과 장차 받을 하늘의 기업을 위하여 그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별로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진단은 이렇다. "너희가 '나는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영적으로 볼 때 거지다." 그들은 영적으로 볼 때, 참으로 비참했고 가련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매우 가난했으며, 눈이 멀어있었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다(계3:15~17).

 

4. 주님께서는 왜 라오디게아교회를 쳐내버리지 아니하셨을까?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이 교회를 정리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지를 잘라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촛대를 그냥 옮겨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꼭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왜 그 교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대랼 3가지 정도다.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를 떠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씀을 듣는 예배의 자리에 그들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 구성원 하나하나가 아직은 죽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들이 회개하고 충성할 기회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이 회개하여 변화되기만 하면, 그들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이 비록 뜨뜻미지한 신앙을 지녔지만 그들의 신앙의 불은 아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잠재적인 능력이 언젠가 그리스도의 손에 올려놓아지기만 하면 그들도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5. 라오디게아교회를 위한 2가지 처방전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2가지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한 가지 행동을 하고 계셨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문한 처방책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첫째,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다(계3:19). 그 일을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라는 것이었다(계3:18). 둘째, 돌이켜 잘못된 것을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심을 내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이고, "회개하라"는 것은 과거 명령형이다. 현재 명령형은 지속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므로,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는 뜻이며, 과거 명령형은 시급함을 동반하는 형태이므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예수님은 한 가지 행동을 하고 계셨는데, 그것은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지만 그들의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서서"라는 동사를 보니, 직설법 완료 능동태구문이다. 그리고 '두드리노니"라는 동사는 직설법 현대 능동태구문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문밖에까지 와서 서 있었던 것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날도 주님은 그들의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 언제부터 거기에 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거기 오셔서 밤을 지새우셨는지, 추운 겨울에도 찾아왔었는지, 무더운 여름에도 찾아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고 그날도 서 계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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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느정도 남아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인간이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찾아오셔서 노크하신다고 할지라도, 문을 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자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한 것이다. 만약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주님은 문밖에서 서 기다리시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허용과 수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6. 인간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계3:19에 나오는 주님의 처방전에 따르면, 2가지가 요청된다. 첫째, "계속해서 쉬지 말고 열심을 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즉시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그것을 실천하되 계속해서 도전해보고 또 도전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뭔가를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체질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질 것이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단번에 확실히 돌이켜 회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영적인 경건함을 위해 나아가야 할 자신을 위해 방해되는 것이 놓여있다면 즉시 쳐내버리시기를 바란다. 그것이 혹 말씀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너희들 스스로 그 일을 하기가 어려우면 내게 도움을 청하라. 나는 항상 너희들 마음 문 밖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단다." 그렇다.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행동에 옮기기가 정 어려우면 주님께서 문을 열어드리고 그분이 내 삶 속에 들어오시도록 허용하라. 그러면 전능자이신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이다.

 

7. 우리 주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성도들을 향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셨다. 그분은 "나는 아멘이요, 충성된 참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다"고 하셨다(계3:14).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첫째, 주님은 자신을 "아멘"이라고 하셨다. 즉 "나도 그렇게 됨을 믿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그렇게 되도록 해주시겠다는 뜻이다. 둘째, 주님은 자신을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은 거짓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신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시겠다는 뜻이다. 셋째,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이는 이전까지 그들이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 채 영적인 거지처럼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라도 결단하기만 한다면 새 창조의 놀라운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분이 지금 우리의 마음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은 능력이 적어서 밖에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동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들어와 일하시도록 결단을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8. 나오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첫째는 영적인 일에 더욱 더 열심을 내는 데 사용하기를 바란다. 내 영혼과 천국을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라. 둘째,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잘라버리는데 자유의지를 사용하기 바란다. 어떤 것이 영적인 일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즉시 그것을 잘라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전능자를 자신의 인생길에 모셔들이라. 그분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하라.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하라. 그러면 그분이 일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새 창조의 역사를 쓰실 것이다. 건투를 빈다.

 

 

이사야는 구약의 복음서라 일컫는다.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많은 메시야예언을 담고 있기 때문이요, 또한 40장 이하부터는 그 순서까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문서선지자였던 이사야서의 내용 가운데,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대체 어떤 것이 들어 있을까? 그리고 이사야선지자는 여타의 다른 선지서에서는 결코 말하지 못한 놀라운 예언들을 쏟아놓고 있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메시야의 예언 곳곳마다 녹아있는 메시야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이사야에서 증거하고 있는 메시야의 2가지 신분에 대해 폭넓게 살펴보자.

 

1. 들어가며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약 360여가지 나온다. 특히 구약의 복음서라 일컬어지는 이사야서에서는 총40여가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나오는데, 메시야에 관한 중요한 예언들을 거의 다 담고 있다. 즉 메시야의 신분, 메시야의 잉태와 출생, 메시야의 공생애,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 메시야의 부활과 승천, 메시야의 재림, 메시야가 가져오는 새 하늘 과새 땅까지 그 영역이 안 미친 것이 거의 없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사야서에 흩어져 있는 메시야에 관한 여러가지 예언을 한 데 모아서 살펴보고자 한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크게 그분의 신분에 관한 예언과 아울러 그분의 생애에 관한 예언이 있다. 그렇다면 메시야의 신분에는 사람으로서 갖는 신분과 하나님으로서 갖는 신분이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사람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유일하신 분이다. 특별히 이사야서는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그분의 인성에 관한 예언과 아울러 그분의 신성에 관한 예언이 동시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출생에서 재림에 이르는 메시야의 일생을 통해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한다. 놀랍게도 이사야선지자는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면서 그분의 신성을 말하는 독특한 예언서이다.

 

2. 이사야의 예언 속에 나타난 메시야의 2가지 신분

  이제는 이사야의 예언 속에 나타난 메시야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간에는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 즉 메시야의 잉태과 출생, 메시야의 혈통, 메시야의 공생애, 메시야의 재림 속에 나타는 예언들을 살펴보되, 메시야의 인성과 아울러 신성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가. 메시야의 잉태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의 신분

  첫째, 메시야의 잉태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의 신분에 대해 살펴보자.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야가 어떻게 잉태되어 출생할 것인지를 아주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다. 그런데 다른 선지서와는 달리 이사야에 나타난 메시야의 잉태에 관한 예언은 좀 다르다. 사실 그동안 다른 곳에서는 메시야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임이 예언되어왔다(창3:15).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출생할 것임도 예언되었다(마1:1). 그런데 이사야선지자는 그분의 출생에 관한 새로운 놀라운 비밀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메시야가 처녀의 몸 안에 잉태될 것이고 또한 처녀의 몸으로부터 탄생할 것이라는 점이다(사7:14). 다시 말해, 이사야서에서 메시야는 남녀의 사랑으로 엄마의 뱃속에 잉태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서 처녀 마리아의 태중에 임신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사람으로 잉태되어서 엄마 마리아의 뱃속에서 열 달동안 성장한 후에 출생하였다. 하지만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야로 탄생할 그분에 대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그분이 분명 '인간'으로 탄생할 것이지만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그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사8:10, 마1:23).

  그렇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은 처녀 태중에서 창조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분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진짜 아버지는 마리아의 법적인 남편인 요셉이 아닌 것이다. 굳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표현하자면, 그분은 하나님이며(요16:28), 성령이시라고 해야 한다(눅1:35). 그러므로 태어나실 바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주었다. 마리아의 태중에 열 달동안 잉태되었다가 출생했기에 예수님의 어머니를 마리아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마13:55). 거꾸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막6:3)" 그러나 남자없는 잉태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언제 하나님의 아들 혹은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셨는가? 그것은 동정녀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실 때부터다. 구약시대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라는 존재가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비록 하나님의 경륜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탄생하시므로 만세전부터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가 그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예수님은 만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천국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아버지께로부터 밖으로) 나와 세상에(세상 안으로) 들어왔고, (내가) 다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아버지를 향하여) 가노라(요16:28)" 그러니 하늘에서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한 분으로 계셨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 따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나오신 것이다. 그러다가 구속사적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다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다. 그러므로 만세전부터 하나님은 한 분으로 계셨고, 부활승천 이후에도 하나님은 한 분으로 계신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신구약성경이 공히 증거하는 말씀이요, 특히 이사야서는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수십여차례 증거하고 있다.

 

나. 메시야의 혈통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의 신분

  둘째, 메시야의 혈통에 관한 메시야의 신분에 대해 살펴보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혈통에 관한 2가지 놀라운 계시를 전달해준다. 하나는 인성의 측면에서 메시야는 이새의 후손에서 나올 것을 말했다. 다시 말해, 메시야는 유다지파사람인 이새의 아들로 오실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가지(호테르)가 나며, 그 뿌리에서 한 싹(네째르)이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메시야를 '이새의 가지'라고 했다. 이는 이새의 아들인 다윗이 메시야의 예표임과 동시에, 이새의 가지(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은 여기서 한 걸음에 더 나아간다. 다시 말해,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가지(호테르)임과 동시에 신성의 측면에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네째르)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사람이라고 일컬어진 것은 그분이 '네째르'이기 때문이다(마2:23). 이 말은 이새로부터 올라운 다윗처럼, 예수님은 이새처럼 다윗의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지만, 그분은 다윗의 하나님, 다윗의 주인되신 다윗의 창조주이신 것이다. 어느날 메시야의 공생애의 일주일 어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기 위해 여러가지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 한 마디의 질문으로 더 이상을 그들이 질문하지 못하게 했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시110:1에 나오는 예언적인 시편말씀을 인용하여, 이때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칭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자 그후로 더이상 예수님께 질문하는 자가 없었다.

 

다. 메시야의 공생애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의 신분

  셋째, 메시야의 공생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살펴보자.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야의 출현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서 시작될 것임을 예언하였다(사40:3~5). 여기에 나오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메시야를 천거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광야의 외치는 자'가 여호와이시며 하나님이신 그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하였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다시 말해 오실 메시야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이실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먼저 오리라고 예언되 엘리야 곧 세례요한의 천거를 받아 시작된다(막1:2~3).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야의 신분이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실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메시야의 공생애의 활동예정지를 이사야선지자는 갈릴리라고 하였다(사9:1~2).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다(마4:15~16,23). 그런데 이사야는 갈릴리에 큰 빛으로 오셔서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분이 여호와라고 증거하였다(사9:1~2). 고로,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인간이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라. 메시야의 재림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의 신분

  넷째, 메시야의 재림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살펴보자. 이사야선지자는 다시오실 하나님은 여호와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분이 그의 처소에서 나오셔서(사26:21), 그분이 재판장이자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했다(사33:22). 그리고 그날에 여호와께서는 리워야단과 용인 사탄을 죽이시고, 하늘의 높은 군대 곧 타락한 천사들을 벌하시며,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땅의 왕들을 벌하실 것이라고 했다(사24:21~23). 그리고 맨 나중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했다(사25:8~9). 그런데 신약성경에 보면, 이 모든 일을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 행하실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고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다시 오실 재림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3. 나오며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나신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약의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이렇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신6:4, 사43:10~12, 막12:29),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메시야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엡1:3~6).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메시야로서 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시는 것이었다(사9:6, 요1:14). 이러한 예언은 최초의 문서선지자인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문서로 남겨졌으며(사7:14, 11:1, 40:3, 9:1, 26:21), 그후 약 700년 뒤에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 것이다(마1:23). 구약시대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신 예수님은 이미 만세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다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유대땅 베들레렘에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요1:1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아버지의 품속으로 밖으로 나오시어 하나님 밖에 존재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 속에 계시다가 드디어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통해 태어나심으로 밖으로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는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이 땅에는 아들이 계셨으며, 또한 성령으로 함께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마3:16~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기가 쉬울 것이다(요1:18). 우리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임마누엘 하신 것이다.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오직 그분에게 돌릴지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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