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는 역시 바울 서신과 비교해 볼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유1:5 헬라어원문). 그리고 그분을 만유의 대주재로 소개한다. 파격적이다. 그리고 그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육체를 더럽히고 영혼을 더럽히는 음행의 죄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오늘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의 허리끈을 다시 졸라매줄 것이다.

 

2022-02-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유다서강해(02) 유다서에 등장하는 구원론과 천사론과 심판론(유1:5~7)

https://youtu.be/kqmqo7nhyww [혹은 https://tv.naver.com/v/25318020 ]

 

1. 들어가며

  유다서는 좀 특별한 책이다. 이 책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그동안 다른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고백이 나올 뿐만 아니라 '위경'이라는 책에서 인용된 구절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다서에는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이 나오지 않고 한 번 받은 구원이라도 그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한다. 또한 천사들의 타락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오늘 이 시간은 유다서 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서,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 곧 유다서의 개론으로서 유다서의 저자와 기록시기 그리고 편지의 대상과 편지를 쓴 목적에 이어지는 본문으로서, 본론의 첫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 말씀은 유다서를 왜 쓰고자 했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이단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적 전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부분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있 될 것이며, 성도들의 구원관이 보다 더 확실하게 정립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 및 소돔과 고모라의 성의 멸망에 따른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2. 유다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유다서는 편지글이다. 그러므로 편지형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 책이 비록 25절 밖에 안 되는 대단히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서신형식이 모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서신 형식에 따라 이 책을 구분한다면, 이 책의 구조는 도입부(1~4절), 본론부(5~23절), 종결부(24~25절)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도입부(1~4절)는 유다가 수신자들에 대한 본인의 문안인사 및 서신의 집필동기를 간략하게 쓰고 있다. 이때 그는 이렇게 썼다. 헬라어로 직역해본다.

유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런데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받은 채 있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에게 지켜주심을 받은 채 있는 이들에게 [편지한다]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들에게 증가되어지길(많게 되기를) 원한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의 공동의(일반의, 공통의) 구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부지런함으로 [계속] 쓰는 것을 행하면서, 성도들이 한번(단번에) 넘겨받았던 믿음을 위하여 [계속] 힘써 싸우도록 너희에게 권면하면서, 편지를 써야할 압박(필요)을 가졌다. 4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슬그머니, 몰래)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러한 심판(정죄) 안으로 미리 기록된 채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함(호색, 음탕, 성적인 방종)으로 바꾸고 있고, “유일한(단 하나의, 홀로) 대주재(세상의 소유주, 주인)이며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는 자들이다”. 

 

3. 유다서에서 소개해주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유다서는 다른 책에 비해서 아주 독특한 부분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을 '대주재'와 구약시대의 '여호와'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경책으로 알려진 "모세의 승천기"와 "에녹서"의 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위경에 기록된 말씀이 정경에 들어왔는가? 사실 정경과 외경 및 위경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먼저 유다가 예수님을 홀로 한 분이신 '대주재'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와 예수님이 구약시대 출애굽을 인도한 참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음을 소개해주고 있는 대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이었던 유다가 자신의 친형이었던 예수님을 2가지로 고백하고 있다. 첫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주재(데스포테스)'라고 고백하고 있다(유1:4). 그는 예수님을 "유일한(단 하나의) 대주재이며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유1:4)"라고 고백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주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다(행4:24). 그런데 그 명칭을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구약시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여호와라고 고백하고 있다(유1:5). 헬라어 원문(NA28)을 보면, "예수께서 한 백성을 애굽의 땅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신 후에 두 번째로는 믿지 않았던 자들을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유1:5). 이는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만군의 여호와로 고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의 성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20년 이상을 형과 동생으로 같이 살았던 유다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은 유다가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 친유대적인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본문이라고 하겠다. 

 

4. 예수께서 '대주재'이시며, '여호와'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오늘날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오늘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가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인 A.D.70~80년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자 '여호와'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유대인들인데, 그중에서 예수님의 친동생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중간에 유다를 변화시킨 충격적인 사건을 상정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의 친동생들 중에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요7:5).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께서 잠깐 자신을 착각하고 떠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확 달라졌다.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었기 때문이다(고전15:6~7). 그건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으며, 문들을 닫아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들어올 수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더이상 선지자나 교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깝게도 유다서 1:4~5에 나오는 "대주재"와 "예수님"을 번역할 때, 성경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 책들이 허다하다. 특히 킹제임스 버전 쪽의 성경책들은 전부다 이 2가지를 잘못 번역하고 있다. 킹제임스 번역본의 하나인 킹제임스 흠정역을 우선 보자. 이 번역본에 따르면 유1:4~5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전에 이것을 알았을지라도 내가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곧 '주'께서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고 그 뒤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1:4~5). 그렇다. 우선 킹제임스 번역본에서는 '대주재'라는 단어를 '주 하나님'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주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로 구별시켜놓았다. 즉 예수님 이외에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따로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예수님을 더이상 한 분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번역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분을 '주께서'라고 번역해놓았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NA28)은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우리말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께서'라는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헬라어성경과 킹제임스 버전 쪽의 성경책은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킹제임스 쪽의 번역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다수사본' 혹은 '공인원문(표준원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TR(Textus Receptus)에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본은 11세기 이후에 나오는 소문자 사본으로서, 그 권위가 많이 떨어지는 사본들이다. 보다 다 원문에 가까운 사본은 초기(4~5세기)에 나오는 대문자사본들로서, 이 대문자사본에서는 예수님을 '대주재(데스포테스)'라고 표기하고 있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내신 분도 '예수님'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소문자사본 계열에서는 예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서로 나누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구약의 여호와가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번역하려고 한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여호와(아버지)도 하나님이요, 예수님도 하나님이며, 성령님도 하나님이신데, 여호와는 예수님이 아니며, 예수님은 성령님이 아니고, 성령님은 여호와(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생각에 천국에 아버지 하나님은 한 가운데에 있는 보좌에 앉아계시고, 오른쪽에는 예수님이 앉아계시고, 왼쪽에는 성령님 혹은 비둘기가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고백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분이라고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서 족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되었고 활동하셨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 분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이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뒤에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이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동시에 활동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진실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지 않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음란을 일삼고 있는 이단 세력들에게 유다가 예시해주는 3가지 심판은 무엇인가?

  유다는 경건하지도 않고 음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하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장차 받게될 심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 이미 일어났던 3가지 심판의 사건들을 예시한다. 첫째는,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심판받아 죽었다는 것이다(유1:5). 다시 말해 애굽에서는 출애굽 세대들은 비록 애굽에서 구출을 받았지만 자신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결과 결국 광야에서 엎드려 죽어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처음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처소를 떠나간 천사들을 하나님께서는 큰날의 심판때까지 영원한 쇠사슬로 흑암 아래에 가두셨다는 것이다(유1:6).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주신 지위와 그 직분을 망각한 그들의 최후를 유다는 영원한 흑암이라고 말했다. 셋째,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 스보임(신29:23, 호11:8)이 음란하고 동성애를 행함으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유1:7).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육체를 더럽히고 음란을 일삼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고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 이 본문말씀이다.

 

6. 유다서에 나오는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유1:5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구원론의 관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친유대적인 서신들로서 유다서나 야고보서 그리고 히브리서는 구원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서신들만을 대해왔던 성도들은 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낙관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의롭지 아니한 자라도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분의 의가 자기에게 전가되어 의로워진다는 말에 익숙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모든 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는 그가 처음 예수믿었을 때의 구원의 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구원의 여정의 첫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칠 즈음에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가서도 열매가 없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맨 끝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신앙의 모든 여정을 끝마치려 하는데, 행위의 열매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헛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서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출애굽1세대들이 1차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들이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완성하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땅 곧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망불평하고 음행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해서 나온 1세대들은 다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예정을 따라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온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광야에서 범죄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여 육체는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게 하셨을지라도만 이미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니 그의 영혼 만큼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바램일 뿐이다. 신약시대 사도 바울의 설명을 보라. 사도 바울은 출애굽1세대들이 분명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멸망받은 것이라고 했다(고전10:5).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본보기가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10:11).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히3:16~19). 그들은 안식의 장소에 못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말하고 있는 바,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지만 광야에서 멸망받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처음 믿었을 때에 구원받았던 사실을 것을 두고 자신의 미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을지라도 다시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요, 범죄한 것을 자백하여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다가 말해주고 있는 성경적인 구원관이다. 

 

7. 유다서에 나오는 천사론은 어떤 것인가?

  유다서는 천사들에 관하여도 언급한다. 유다는 천사의 존재를 당연시한다. 그러나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천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분파가 있었다. 그들은 사두개파들이다(행23:8). 그들은 '천사'만 인정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영'도 없다고 하고 '부활'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다는 천사들이 있으며, 그 천사들도 역시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유1:9에 보면, 천사장(천사들의 우두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가엘'이다. 그리고 천사장인 미가엘이 마귀와 변론을 하였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렇다. 천사들 중에는 더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장의 계급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어떻게 되어서 심판을 받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유1:6). 그들은 맨 처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지음을 받았다(시103:20~22). 그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창조된 존재였다(히1:14).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지 않고 자신이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다. 그들의 가진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을 시켜,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를 섬기려하지 않고 자신이 섬김받기를 선택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버리셨다. 그때는 아마도 최소한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영원한 쇠사슬(영적인 어떤 제한)을 묶여 흑암(어둠) 아래에 갇혀진 것이다.

  그럼, 그들이 갇혀진 '어둠(조포스)'이란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의 나라인 천국의 반대편으로서, 이 우주와 지옥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곳은 늘 어둡다. 먼저는 공중인데 이는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엡2:2). 그리고 일부는 지옥 어두운 곳에 던져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벧후2: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싸울 대상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이라고 하였다(엡6:12).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범죄하면 하늘에서 쫓아버리는데, 하물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데려가시겠는가?

 

8. 유다서에 나오는 심판론은 어떤 것인가?

  또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비롯한 아드마와 스보임의 심판도 알아야 한다(신29:23, 호11:8). 유다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사건을 통하여 언급했기 때문이다(유1:7). 그럼, 어떻게 되어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의 이웃 도시들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교회에서 활동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음란하였고 다른 육체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내려 그 성들을 다 태워버리셨다(창19:24). 그러자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나는 모든 것들이 다 파괴되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규정해놓은 것을 행하는 것은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여 그 죄를 씻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나 천사들은 다시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을 위한 속죄제물과 속죄의 피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속죄의 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자백함으로 그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을 수 있다. 심판 받기 전에 죄를 회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것뿐이다.  

 

9. 나오며

  오늘 우리는 평소 때 잘 접해보지 아니한 친유대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쓴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은 참으로 놀랍고 또 놀랍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홀로 유일한 만유의 대주재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분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유1:4~5). 늘 하나님을 삼위로만 생각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확실히 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분은 지금도 삼위로 일하시고 계신다. 특히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몰래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초기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육체가 사람의 영을 더럽힐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혹시 믿는 자가 음행을 저질러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유다는 이들이 잘못된 거짓 선생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이들을 경고하기 위해 유다서를 썼다. 그런데 원래 이 편지는 공통으로 받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전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단세력이 매우 위험한 세력이었기에 유다는 그들과 힘써 싸워서 올바른 신앙을 수호하라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얻은 구원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유다가 가르쳐준 구원론은 한 번 얻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례가 보여준가고 유다는 말했다. 그리고 자기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도 심판을 받아 흑암 아래에 갇혀있다고 했다(유1:6). 그리고 죄 중에서도 음행의 죄 특히 동성애의 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되 그런 자들은 불못에 보내신다고 유다는 언급하였다(요1:7).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 지은 죄들을 빨리 회개하여 악한 영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귀신들이 들어오는 통로를 만들어 주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죽는 날 우리는 결코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회개하며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다. 

 

 

2022년 02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유다서는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의 책들 가운데 맨 마지막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그리고 내용도 비교적 짧다. 25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짧은 편지를 통하여 상당히 많은 영적인 진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진리들을 소개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왜 이 책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이 책이 들려주는 예수님은 대체 누군지를 오늘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2022-02-09(수) 수요기도회

제목: 유다서강해(01) 유다서 어떤 책이며 무엇 때문에 기록했는가?(유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C8_XIAWeN4 [혹은 https://tv.naver.com/v/25059062 ]

 

1. 들어가며

  유다서는 25절의 아주 짧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신앙에 관한 상식적인 생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많이 묻는다.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리고 성령론에 있어서, 정경론에 있어서 기존의 신학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배경이 헬라적인 문화가 아니라 히브리적인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더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신약성경 중에서 공동서신을 읽어보았던 독자라면 그는 이 책을 읽을 때에 자신의 눈을 다시 한 번 깜빡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서의 내용이 베드로후서와 너무나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책을 썼을까? 베드로인가 아니면 유다인가? 이 모든 질문을 오늘 하루에 다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몇 번의 강해시간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들려주는 교훈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유다서 강해의 첫 번째 시간으로서 ,이 책의 개론적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누가 이 책을 썼으며 그리고 누구에게 쓴 것인지 그리고 왜 유다는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를 중심으로 유다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맨 나중에 그리스도론에 관하여도 조금 터치하고자 한다.

 

2. 이 책은 누가 썼는가?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2가지로 소개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 이 책 곳곳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다(유1:1). 먼저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편지를 쓸 때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로 표현한 사람은 이 책의 저자만 아니다. 특히 사도바울도 역시 자신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롬1:1). 여기서 '종'이라고 함은 단순히 일꾼이나 심부름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종'이라는 개념은 '노예(둘로스)'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철저히 아는 자가 주인의 분부만을 기다릴 때에 이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으며, 오직 주님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는 굳은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아주 겸손한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책의 저자인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한다.

 

3.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유다의 형제로 소개되고 있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 세 명 정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세배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다(마4:21, 10:2)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최초로 순교한 사도였다(행12:2).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야고보의 형제는 유다인 것인지 요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다(마10:3, 막3:18, 눅6:15, 행1:13). '작은 야고보'라고도 불렸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그의 형제가 '요세'였다(막15:40).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유다는 알패와의 아들인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상정할 수 있는 인물은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가 남아 있다. 예수께서는 친동생들로 적어도 4명의 남동생들과 2명이상의 여동생들을 두었다. 남동생들의 이름으로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여동생들도 있다(마13:55, 막6:3).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야고보의 막내동생으로 보이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는 야고보의 둘째 동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야고보를 형제로 둔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대교회의 모든 전승들은 이 책의 저자인 유다를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로 본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한 것은 당시 이 편지를 쓰고 있던 시기에 '야고보'는 너무나 잘 알려진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자신을 예수님의 친동생이라고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4. 이 책은 누구에게 쓴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수신자를 대부분 지역에 관련하여 명기를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1:2)" 혹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엡1:1)"이라고 수신자를 명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서에는 어떤 특정 지역이 나오지 않도 다만 어떤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그 대상이 누군지를 3가지로 쓰고 있다(유1:1). 첫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둘째,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이미 사랑을 받은 있는 자들이자, 셋째, 그리스도에게 지켜주심을 받은 채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그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것을 말해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채 있는 이들이요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지켜주심을 받고 있으니, 상당히 구원에 가까운 성도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편지와 아주 유사한 편지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25절 가운데 19절이나 일치하는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후서'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베드로후서의 기록목적과 유다서의 기록목적이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매우 친유대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수신자는 아무래도 바울적인 복음이 아니라 베드로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편지를 보냈던 수신자들을 살펴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니만큼 유다서의 수신자들도 친유대적인 사람들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5. 이 책은 왜 쓴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유1:4). 그렇지만 유다는 먼저 이 편지의 서두에서 원래 자기가 편지를 쓰려고 했던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구원론에 관하여 그들에게 써보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유1:3).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들의 지키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내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받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 곧 모든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에 관하여 쓰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갑자기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몰래) 들러온 어떤 사람들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들은 이단세력을 가리킨다. 이들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이들은 영지주의 이단 세력으로서 은밀하게 믿음의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들은 옛적부터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유1:4).

 

6. 유다서의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가만히 침투해 들어온 이단세력이란 대체 누구인가?

  당시 교회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온 이단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인지에 관하여 유다는 3가지로 언급을 한다(유1:4). 첫째는 이들은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색욕거리,호색,성적인 방종)으로 바꾸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그들은 유일한(단 하나의 홀로) 대주재(세상의 소유자와 주인, '데스포테스')이자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세력이 바로 A.D.1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초기 영지주의자"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따라 영과 육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쾌락주의자와 금욕주의자, 이렇게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유다서에 등장하는 영지주의자는 바로 전자인 쾌락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영과 육은 서로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육으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어 음란을 죄악시하지 않았기에 교회를 야금야금 도덕적으로 부패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지고지신의 하나님 곧 육체를 가지지 않는 최고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었기에 때문에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도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육과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인류의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존 성도들에게 영지주의자들의 침투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 유다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한 번 얻은 믿음의 도를 허물어 뜨리려는 이단들의 세력과 맞써서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유1:3).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영향을 받아 색욕거리를 좇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지 못한채 멸망으로 치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7.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어떤 내용을 이 책에 담은 것인가? 이 책의 내용은 비록 이 편지가 짧은 글이라 할지라도 서신서의 형식을 잘 갖춘 책인 것인 만큼 서론부과 본론부와 결론부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서론부(유1:1~4)에는 송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삿말이 나오고(유1:1~2) 이어 이 편지를 쓴 목적이 나온다(유1:3~4). 그리고 본론부가 나온다(유1:5~23). 이러한 본론부의 내용은 이단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단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의 바른 신앙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즉 바른 믿음의 터 위에 자신을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주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부(유1:24~25)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끝을 맺는다

 

8. 이 책의 저자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이단에 대한 경계에 관한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정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외경들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저자인 유다는 이러한 외경의 기록을 인용하여 심판의 확실성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경들에 대한 기록에 관하여는 다음 번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유다가 언급하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을 우선 살펴보도록 한다. 유다는 이때 이단세력에 대항하여 성도들이 그들과 제대로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정의인데, 그 정의는 실로 놀랍기만 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인 유다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로서,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유다는 히브리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다음의 2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 유다는 예수님을 홀로하나이신 유일한 '대주재'라고 소개한다(유1:4). 그는 예수님을 "홀로 하나이신(유일한) 주재"라고 소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재'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라는 용어로서, 세상의 소유자요 절대 주권자 곧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로만 사용되었던 용어다. 고로 누가복음 2장에서 선지자 시므온도 자신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재여(데스포타),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하였던 것이다(눅2:29).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 구성된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대주재여(에스포타), 천지와 바다와 그것들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행4:24)"이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에게서 사용할 수 있는 이 칭호를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예수님에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두 분일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있으며,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에게만 칭할 수 있는 용어로 칭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유다가 예수님의 칭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사용하고 있고(벧후2:1), 이미 천국에 들어간 순교자들도 예수님을 칭할 때에 사용하는 칭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계6: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지만 그분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사9:6).

  둘째, 유다는 예수님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여호와'라고 소개한다(유1:5). 유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지만 두번째로 믿지 아니했던 자들을 멸망시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헬라어원문에 따라 번역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만 거의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는 분명하게 말한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고 그들 중에서 당신을 불신하고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자들을 광야에 엎드려뜨리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마1:23). 그러므로 삼신론적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보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누가 앉아계시지를 보라.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상에 계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이를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21:5~6, 22:12~16).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이 땅에 계시는 분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니 하늘에는 아버지가, 이 땅에서는 아들이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게 되신 것이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9. 나오며

  유다서는 히브리적인 신앙의 사고를 가진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기록한 독특한 신약성경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서신들 속에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도 더러 발견할 수가 있다. 그중에서 예수님의 한 분 하나님 되심과 여러 외경들에 대한 자유로운 인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만 굳어져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다소 생소하기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쓰신 신약 27권의 신약성경을 선물로 받았다. 그중에 우리는 유다서라는 독특한 편지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이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가 말씀하고 있는 칭의관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정의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사도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면 루터가 야고보서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시대의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거의 다 공개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지금의 성도들은 종교개혁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의 실제와 신학의 공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온전하지 못했던 것들이라도 이제는 온전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서가 삼위일체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접근방식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 새롭기만 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거나 축소된 예수님에 대한 실체를 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번에는 영지주의 이단의 실체가 무엇이며, 더불어 천사의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는 외경들의 기록을 통하여 성도들이 영적인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2월 0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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