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도 많은 신자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일까? 여기 바로 그 이유 3가지가 정확하게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이 어떤 곳인지 적어도 3가지가 나온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실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경고하는 바를 마음에 새겨들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늘도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가?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지 말자.

2021-09-10(금) 금요기도회
제목: 바른종말신앙(23) 예수 믿고도 지옥에 가는 이유와 그곳에 있는 세 장소들(마25:10~4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jcUvBZObWc  [혹은  https://tv.naver.com/v/22395960  ] 

 

1. 들어가며

  오늘날 과연 무엇이 올바른 종말신앙인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오늘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바람직한 종말신앙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신앙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성도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 3가지 비유를 보니 성도들 중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도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들 중에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은 어떤 장소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천국에도 차등 상급이 있는 것처럼 지옥도 차등 지옥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결단코 지옥에 들어가지 말고 꼭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마치는 날,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천국에는 상급에 있어서 차등이 있는가? 

  장차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에서도 과연 차등 상급이 존재하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마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장차]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렇다. 천국에서도 크다 일컬음을 받을 자가 있고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자가 있는 것이다(마5:19). 특히 예수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에 큰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그곳에서 왕노릇하는 자 곧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럼 누가 천국에서 작은 자인가? 그는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들어가는 자들이다(마23:11~12). 

눅19:16-19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마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장차]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다. 천국에서도 왕의 신분으로 참여할 자가 있으며, 섬기는 자로도 참여할 자가 있는 것이다. 특히 천국에서 왕으로 참여하는 자는 여러 고을들(도시들)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들의 공력에 따라서 여러 도시들을 다스리는 자가 있을 것이며, 몇 안 되는 고을들을 다스릴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왕들을 섬기는 시녀와 경호원과 같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와 섬기는 자의 사이는 이 세상에서와 같이 명령복종이나 상하주종관계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곳에서 비록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끄럽거나 주눅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을 자신이 쓰임받는다는 것 자체로 한 없는 기쁨이 가득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3. 지옥도 형벌에 있어서 차등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데도 차등이 존재하는가? 그렇다. 천국에 차등이 존재하는데 지옥은 다 똑같은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 큰 오산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는 자인데도 일평생 못된 짓하다가 죽기 전에 간신히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 사람이 과연 천국에서 과연 왕노릇하는 왕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행한대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왕노릇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시겠는가? 마찬가지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사람도도 다 똑같이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지옥에서도 그들이 들어가는 장소가 다르며 그들이 받을 형벌에 크고 작음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지옥에서의 형벌이 크고 작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데, 적어도 3가지 형태의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형벌이 약한 지옥으로서 '성밖' 지옥이 있다(마25:10~12, 계22:14~15). 여기서 '성밖'이란 거룩한 신부들이 들어가서 거할 새 예루살렘 성의 바깥을 일컫는 표현으로서, 이곳 역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다. 왜냐하면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없는 장소이자 주님이 결코 방문하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날 심판 때에 버림당하는 장소가 성밖이기 때문이다. 둘째, 중간 정도의 지옥으로서 '바깥 어두운 곳' 지옥도 있다(마25:30). 이 지옥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가장 혹독한 지옥으로서 '영원한 불'이 있는 장소가 있다. 이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가득한 지옥이다. 이 세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4. '성문 밖'의 지옥은 누가 들어가며 어떤 장소인가?

  그렇다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성문 밖의 지옥은 누가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은 어떤 장소인가?

  첫째, '성박'에는 누가 가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성문 바깥의 지옥은 한 마디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들어가는 장소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길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 안에 들어가 혼인잔치를 하지 못한 채 밖에 버려지게 되었는가? 그때에 열 명의 처녀 모두가 다 등을 준비했다. 그때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더 준비한 상태여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신랑이 더디 나오게 되므로 기름이 다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늦은 때에 신랑을 맞으러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미련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말했다. "당신의 기름을 좀 주시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둘 다 쓰기에 부족한 양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밤에 기름을 사러 떠나게 된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신랑이 집 밖으로 나왔기에, 그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던 신부들을 신랑과 함께 신랑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나머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가 결국 성밖에 남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처녀가 들고 있던 등과 더 필요했던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열 처녀가 다 들고 있던 등은 계4:5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혹은 시119:105에 나온 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기름은 성령이나 성령충만이거나 말씀이거나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름은 성령충만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름은 분명히 값을 주고 산 것이니 거져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로 우리는 여기서 '기름'이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재료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어떤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회개의 눈물일 수도 있고, 금식일 수도 있고, 십일조와 같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우선 드리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시간의 십일조도 될 수 있다. 

  둘째, '성 밖'은 어떤 장소인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성밖은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 밖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집은 신랑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신랑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비유이므로, 문밖은 곧 예수님의 집 밖 곧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의 바깥을 가리킨다. 그러 성 밖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이 장소는 어둡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빛은 성 안에만 둘러비치기 때문이다(계21:23). 그러므로 성 밖은 어두운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성밖으로 버려진 사람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주님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이다(마25:12).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마7:23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결별이 있는 장소가 그곳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단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버려진 채 있는 영혼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그들이 형벌을 받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장소다. 

 

5. '바깥 어두운 데' 지옥은 누가 들어가며 어떤 장소인가?

  그렇다면 두번째로 성문 바로 바깥 쪽 말고, 성으로부터 더 떨어진 바깥 쪽의 어두운 곳 지옥은 누가 들어가게 되며 그 장소는 또한 어떤 장소인가?

  첫째, '바깥 어두운 데'는 누가 들어가는지를 살펴보자. '바깥 어두운 데'에 대한 헬라어직역은 "더 바깥 쪽의 어두움'이라는 장소다. 이곳에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들어가는 장소다. 왜냐하면 주인이 돌아올 때 이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무려 6천 데나리온을 받은았다(1달란트=6천데나리온, 노동자의 20년치의 품삯). 하지만 주인을 악덕고리대금업자로 알고는 주인에게 돈을 불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땅에 감추어두었다가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 그러나 실제 그는 게으른 자였기에 일하기 싫어했다. 종이 되어서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자기를 믿고 많은 돈을 맡겨준 주인을 기쁘시게 해야 했지만 그는 주인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자가 바로 "바깥 어두운 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바깥 어두운 데'는 어떤 장소인지 살펴보자.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만을 지칭한다. 고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자는 다 성 밖에 버려질 것이다. 그런데 성 밖이라는 장소에는 바로 성문 뽀짝 옆만이 아니라 성벽으로는 더 멀리 떨어진 장소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에 그렇게 성령께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셨건만 그 말에 순종하지 못한 자신이 밉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더 캄캄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들의 게으름과 은혜를 모른 체 것에 대한 값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기 자신에 한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전체를 읽어보게 되면, "바깥 어두운 데"라는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세 종류가 나온다. 첫째는 유대인들이다(마8:11~12). 이들은 원래 하나님의 왕국을 물려받는데 우선순위가 주어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왕국에 처음부터 초대된 자들이었으나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영영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과 같은 혈통적인 조건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둘째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혼인잔치에 입을 예복을 입지 않은 채 그 잔치자리에 참여한 사람이다(마22:11~13). 이 무익한 종들은 왕의 사환들(천사들을 의미하는 것 같음)에 의해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데로 던져지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셋째는 한 달란트 받았으나 악하고 게을러서 그것을 묵혀두고 일하지 않은 종이다(마25:24~30). 주님은 이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선하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천국에 들어와서 기업을 얻기를 원하셔서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을 악하게 보고, 더욱이 자신이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결국 더 바깥 쪽의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외에도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또 다른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마24장에 나오는 종으로서, 자기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셨던 "악한 종이다" 그런데 이 종은 한 달란트 받은 종보다 더 나쁘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보다 더 고통스러운 장소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서 채찍질을 당하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부분의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마24:48~51).

 

6. '영원한 불' 지옥은 누가 들어가며 어떤 장소인가?

  마지막으로 세번째로 영원한 불 속으로는 누가 들어가며, 그곳은 어떠한 장소인가?

  첫째, '영원한 불 속'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는지 살펴보자. 그곳에는 마25장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염소'가 들어간다(마25:41,46). 이들은 믿는 자들만을 먼저 불러 하늘에서 심판하실 때에 주님의 보좌 왼편에 서게 될 자들인데, 이들은 결국 심판후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게 된다. 그럼 왜 이들은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염소였고 또한 교회에서 염소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양(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 왕국을 기업으로 물려받을 자들)과 함께 생활해오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자신이 염소였는지를 모르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헬라어 원문으로 '염소 새끼"라고 나온다(마25:32~33). 그런데 그들이 자기가 염소였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들이받는 가끔씩 염소짓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일이 매번 지속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했었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또한 자신들도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행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고 높여지는 일에만 열심을 내었을 뿐, 자기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일에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마디로 외식하고 가증스러운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다고 판단되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하고 섬기고 있는 이들을 개무시하며 살아왔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극히 보잘 것 없다고 여기던 그들은 실은 천국에서 왕의 형제들로서 천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인데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이 주인이었다. 그들은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의 입맛에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자들이었으며,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남도 천국에 못들어가도록 자들로서 인도하는 그룹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 같다. 

  둘째, 그들이 들어가게 될 '영원한 불'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자. 그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장소는 한 마디로 영원한 형벌의 장소와 고통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뜨거운 불이 소금치듯 하고 있기 때문이다(막9:48~49). 뿐만 아니라 유황이 타고 있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장소다(계14:10). 그리고 그곳에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귀신들)도 함께 들어가는 장소다(마25:41). 아마도 이들에 의해 고문을 당할른지도 모른다(계14:10). 그리고 거기에는 구더기가 있어 부활체를 갈아 먹기도 하고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아픔은 육체보다 더 큰 장소이다(막9:48). 또한 뜨러운 기운에 목마르지만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고 먹을 수 없는 장소다(눅16:24). 그곳은 또한 둘째 사망이 있는 장소다(계2:11, 20:6, 21:8). 주님과 영원히 단절된 장소인 것이다. 고로 그곳에는 생명나무도 없고, 생명수도 없다(계22:14). 밤낮으로 쉴 수 없어 하루가 살기 힘든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살아야 한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지옥의 고통만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주님의 임재가 없는 그곳, 칠흙같은 어둠이 가득한 그곳. 그리고 형벌이 기다리고 있어 매일 채찍질을 당하고,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속에서 처참한 고통을 영원히 겪어야 하는 그곳에 우리는 결단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그 방법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첫째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라고 하셨다. 그것이 이미 받은 성령의 등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도록 날마다 기름통에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댓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우리의 영원을 위한 값진 준비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길을 가야 한다. 둘째,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았던 종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하셨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버려진 자와 같은 나를 해 주께서 귀한 것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그분께 충성하는 것이다. 조금만 놔두면 게으르려고 하는 자신의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남긴 분량만큼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하여,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달란트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양에 속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자신이 어떤 일을 했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믿음으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구제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선교를 하는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봉사하는 주의 종들을 잘 돕고 섬기는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어도 그렇게 섬기는 것이다. 생색내지 말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의 합당한 열매대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대로 천국에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을 살아온 자는 믿음과 회개에 따라 살아왔으니 꿈에도 그리는 새 예루살렘 성 안의 신부가 될 것이다. 

 

202년 09월 1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22)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대체 누구인가?(마25:40)_2021-09-10(금)

https://youtu.be/rxzq5E4QKB4  [혹은 https://tv.naver.com/v/22380631  ]

 

1.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누구인가? 본문에 따르면, 최소한 불신자는 아니다. 그들도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왔지만(마25:44), 믿음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지 않았던 것 뿐이요, 자기가 보기에 보잘것 없다고 판단되어지는 일을 하지 않은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최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이지 불신자들이 아니다(마25:44).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은 자신이 불못에 던져질 염소인지를 그날 '그리스도의 심판대'(고후5:10)에 불려 올라간 상황에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무엇인가 느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행동과 언어가 혹 염소가 아닌가 생각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원문에 보면 '새끼 염소'들이었기 때문이다. 다 자란 염소들이었다면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염소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겠지만, 아직 새끼 염소라 가끔씩 돌출된 자신의 행동이 염소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내 자신의 경력과 그래도 주님을 위해 행한 것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자신은 염소가 아닐 것이라며 위안을 삼아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염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자들은 회개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건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잠깐은 회개하는 듯하지만 진실로 눈물 콧물 쏟아내면서 회개한 일이 없는 것이다. 회개를 목숨걸고 하지 않으며, 삶의 우선순위의 제일 순위에 놓지도 않는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이다. 

 

2. 양과 염소를 심판하는 심판이 백보좌 심판이 아닌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양과 염소를 심판하는 이 심판이 백보좌 심판(계20:11~15)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전에 살펴본 대로, 백보좌 심판은 [보]상이 있는 심판이 아니라 불 못에 던져지는 심판이기 때문이요,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 후에 있을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근거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41절에 나온다. 그것은 이 심판이 있은 후에 염소들이 영원한 불에 던져지게 되는데, 이때까지 여전히 마귀와 그의 천사들은 아직 불 못에 던져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사탄 마귀(용)와 그의 천사들(귀신들)이 아직 불 못에 던져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백보좌 심판은 언제 있는가? 백보좌 심판은 용과 귀신들을 불 못에 던진 후에 일어날 일들이라는 것이다. 고로, 장차 불 못에 던져지는 일은 첫째,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염소에 해당하는 자들이 제일 먼저 그곳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둘째, 용과 귀신들이 그 다음으로 그곳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셋째, 불신자 곧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그곳에 최종적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3. 본문에서 염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본문에서 염소들은 결국 자신을 '염소'라고 결코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염소인 자들을 가리킨다. 곧 자기 자신은 '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염소'인 자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양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양이 아닌 자들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염소란 자기는 양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양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가짜 양들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때에는 "의인들 중에서 악인을 갈라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3:49~50). 자기를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악인인 자로서, 결국 풀무불(불의 웅덩이)에 던져질 자들이 염소인 것이다. 

 

4. 의인들이 섬겼던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의인들이 섬겼던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구약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으로서 여호와께서 보시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객(나그네)과 고아와 과부들'을 가리킨다(신14:29).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는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들이요, 가난한 자들의 대명사로 통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도와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들'로서 좁은 의미의 '지극히 작은 자들'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형제들'에 해당한다. 그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 형제들'이란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40절에 보면, 왕(임금)께서 '내 형제들'이라고 했으니, 그들은 왕의 형제들임에는 틀림없다. 즉 그들은 이미 천국에서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형제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부터는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는데, 그들 중에 이기는 자들이 곧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이다. 즉 천국에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공중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가리켜 '이 내 형제들(these my brothers)'이라고 했던 것은 이들이 예수님 바로 곁에 뒤따라온 자들로서 천국에서 이미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5. 이 땅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땅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헬라어 원문을 따라 직역해보면, '보잘 것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보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에 아주 미약해 보이는 자들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중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를 가리키지 않는 이유는 이미 천국에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이 그때까지 저주를 못 벗어난 자들로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못 먹고 못 마시고 못 입었던 이유는 이들이 저주를 받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마음을 알고 보니,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낮아져서 누군가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하바드 대학이나 프린스턴 대학을 나와 그곳에서 멋진 의사가 되었지만 주님의 마음을 알고는 그곳에서의 편안한 삶을 다 내려놓고 낮고 천하고 가난한 나라 이 대한민국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온 이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무엇인가 부족하여 외국이나 오지에 가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돈을 벌 수 없어서 헐벗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저주가 있어서 혹은 죄를 지어서 이들이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12사도들을 보라. 그들이 못할 일을 해서 옥에 갇혔는가?(눅21:12, 행4:3, 12:5). 또한 사도 바울을 보라. 그가 배운 것이 없어서 못 입고 못 먹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가?(고후11:23,27). 히브리서를 보라. 그들은 주님 때문에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혔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나그네로 살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던 것이다(히11:36~37). 또한 일제 시대 주기철 목사를 보라.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함으로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못 위를 걸어가야 했는가?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자기의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를 내려놓은 채 특수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고, 선교사들이 되어 일하고 있으며, 교회를 개척하는 개척 목사들이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기 곧 대환난의 시기가 되면 오직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옥에 갇히고 매맞고 죽임당하는 지극히 작은 자도 있을 것이다. 

 

2021년 09월 1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21) 지극히 작은 자 및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신가(마25:34~46)_2021-09-09(목)

https://youtu.be/yZvL3FQan0g  [혹은  https://tv.naver.com/v/22365583 ]

 

1. 성경(헬라어 원문)이 말씀하고 있는 양과 염소 비유의 핵심 사항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첫째, 이 비유가 성도들의 심판에 관한 비유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심판을 받은 후 새 예루살렘 성에 준비된 왕국을 상속 받든지 아니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가든지 하는 심판이다(고후5:10, 마16:27, 벧전4:17~18). 이 일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 공중으로 성도들을 불러 올리신 직후에 일어날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지상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것이고 이어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이다(계20:11~15). 고로 이 심판은 결코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백보좌 심판의 비유가 아니다. 그 이유는 백보좌 심판에서는 상을 받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심판 받는 염소도 왕 앞에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마25:44).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염소들도 직접적으로 행하지 않았던 것이지 생색내는 일을 해 왔던 자들이다. 둘째, 이 비유는 성도들 중에서 영원한 불 곧 불 못에 던져지는 자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셋째, 그런데 그날 심판의 순간까지 자기가 염소였는지를 잘 모르고 있고, 자신의 행위(외식이겠지만)를 몰라주는 왕에게 항의를 할 정도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그날 그 시각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지 믿을 때에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언젠가 죽어보면 알 것이다. 

 

2.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인가? 둘 다 성도들인데, 양들은 자기들이 행했던 것을 자랑하거나 생색내는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들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그날 심판대에 불려 가는 그날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불렀다(마25:37,46). 그런데 염소는 달랐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드러나거나 높여지는 일에는 기꺼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곧 보잘것 없는 자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들 생각에 멋있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마23:29-30)" 그렇다.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 때에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군지 헬라어 원문을 보니, 그들은 다 자란 '염소'가 아니라 '염소 새끼'(에리포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내가 혹시 염소는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 내가 염소이겠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지 벌써 수십 년이 되었고, 내가 장로와 집사인데, 결코 그럴 리가 없지'라면서 넘겨 버린 일이 있던 자들이다. 성경은 심판의 그 순간까지 자신이 염소였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3. 양과 염소의 비유는 행위 구원을 알려 주는 심판의 비유인가?

  또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가지고 행위 심판 구원론으로 몰고 가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 곧 주리고 목마를 때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와보았다는 말이 꼭 그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았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은 그 판단이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로 첫째,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한편 강도(아마도 오른편 강도였을 것)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눅23:43). 둘째, 여기에 나오는 그들의 행위는 자기들이 구원 받기 위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믿음에 따라 그들의 삶 속에서 맺혀지고 있는 일종의 열매들이었기 때문이다(마7:20). 한마디로 그들의 그러한 행동들은 구원 받기 위한 행위들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믿음에 따른 열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섰지만 결국 마지막 심판 때에는 열매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고 늘 자신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4. 성도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대체 누구인가?

  인자의 심판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야말로 창세로부터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해 주신다(마25:34). 그렇다면 그들이 돌보아 주었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보면, 그들은 주린 자와 목마른 자이며, 나그네다. 그리고 그들은 헐벗은 자요, 병든 자이자 옥에 갇힌 자이다. 그럼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마태복음 24~25장에 나오는 문맥에 따라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따라 해석해 보면, 이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2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구약적인 개념에서 정의한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신약적인 개념에서 정의한 것이 하나 있다. 먼저, 구약적인 견해에서 정의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란 그가 신자와 불신자를 떠나서, 객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소외되고 힘없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신14:29). 가난하고 소외된 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 등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에서도 객(나그네)과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꼭 돌보아 주어야 할 약한 자들로서 여호와께서도 이들을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신약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들로서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님의 형제들이 될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얼핏 보기에는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만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신14:29). 특히 어려움과 고통받는 자들이 그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약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영적으로 보아서 예수님의 피를 나눈 자들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들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쓸모없는) 자"라는 대상은 그때 왕과 레벨이 같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날 심판하고 계신 이가 왕이시고 그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 옆에 있는 그분의 형제들은 곧 왕의 형제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곧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그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로서, 천국에 있는 땅 위에서 왕 노릇하고 있던 고귀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 무조건 '가난한 불신자들, 소외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해석하면 아니 된다. 창조적인 관점에서 넓게 생각한다면 이들도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 중, 사람들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럼, 이들의 진짜 실체가 누구인지는 내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021년 09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9)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과 차이점은(마25:3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BUpMsvKnu8  [혹은 https://tv.naver.com/v/22308344  ]

 

1.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는 3가지의 천국 입성 및 심판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열 처녀의 비유이며(1~13절), 두 번째 비유는 달란트 비유이고(14~30절),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31~46절). 

 

2.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의 3가지 비유는 각각 독특한 점도 있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들이다. 그럼 무엇이 같은가? 첫째, 이 세 가지 비유는 마지막 날에 있을 성도들의 상급과 심판에 관한 비유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급보다는 심판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듯 보인다. 왜냐하면 종말과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들을 언급하는 본문들 가운데 모두 비유의 끝은 각성과 경고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비유가 아마겟돈전쟁(곡과 마곡의 전쟁) 이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의 비유라고 한다면 상(급)에 관한 언급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여 불못에 던지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상급도 있고 심판도 있다. 성도들에 관한 상급과 심판에 관한 비유인 것이다. 둘째, 이 세가지 비유는 성도들이 심판을 받게 되면 딱 둘로 갈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문 밖(새 예루살렘 성의 진주문 밖)에 영원히 버려질 자와 성 안에 들어가 혼인잔치를 하는 신부들로 갈라진다.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먼저 주인의 즐거움(혼인잔치)으로 들어간 후에 주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맡게 되는(므나의 비유와 합치면 여러 고을들 위에 왕노릇하는 것) 자가 있는가 하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 자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따르면,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된 채 있는 왕국을 상속받을 자와 저주를 받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로 갈라진다. 셋째, 재림의 때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심판주로 오신다. 사실 초림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형체를 입고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한없이 높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만민을 공의대로 심판하실 심판주이기 때문이다. 

 

3. 주께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성도들을 심판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많은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은 초림의 예수님과 같아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왠만한 잘못은 다 용서하시어 모른 채 넘어가주실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랑의 주님이 아니시다  공의와 심판의 주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셔서 보좌에 앉으시는 분은 우리를 심판하시되, 우리의 믿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그랬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랬으며,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그러하신다. 모두가 다 그들의 행위들에 따라 성 안과 성 밖의 지역으로 나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의 '행위'란 구원얻기 위해 행하는 행위들이 아니다. 믿음을 갖고 있고 회개하는 자라면 당연히 열매로서 나타나는 행위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열매나 믿음에 따른 어떤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날 심판의 때에 성 바깥에 남겨지거나 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거나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을 시작하지만 우리의 노정의 끝나는 날에 받을 심판은 우리의 행위를 따른 심판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날 심판대에 앞에 섰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미리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4.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은 진정 사실인가?

  그렇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는 사랑과 용서의 주님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공의와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날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는 우리의 믿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긴 행위들을 따라 심판하신다. 그런데 그날 그 심판의 장소에서 어떤 사람은 상을 받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모두 다 부정적인 경고의 성격이 매우 강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날 심판의 때에는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씀들이 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19:27-29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눅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5. 이 비유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비유의 차이점은 심판 후에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최종적인 장소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상 받을 장소도 각각 차이가 있고, 벌을 받을 장소도 각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열 처녀의 경우를 보자. 열 처녀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그녀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것을 말해 주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 밖에 버려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경우를 보자. 이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즐거움(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같은 것)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악하고 게으른 종은 더 바깥의 어둠의 장소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셋째로, 얌과 염소의 경우를 보자. 이 비유는 실천적으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던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처소 곧 왕국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염소의 비유는 그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았던 자들로서 그래서 버림을 받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되는 자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할 장소가 각각 다르다. 그들은 성밖이나 바깥 어두운 곳이나 영원한 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이러한 곳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는 죽은 후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나아갈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므나의 비유처럼 왕노릇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기업을 차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021년 09월 07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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