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모범적인 기도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떤 것이며, 인간의 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하는지가 나온다. 그중에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인간의 관심사는 각각 3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관심사와 주께서 가르쳐준 관심사는 과연 같은 것일까? 그리고 주기도문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송영은 왜 들어간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래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기도한 후에 저절로 나오는 탄성을 공동체가 전수해 준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지난 한주간 진행되었던된 특별새벽집회 주기도문 강해의 핵심사항들과 마지막 송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2019-09-09(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기도문강해(0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https://youtu.be/az7Re8m-OhY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일주일동안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으로서 주기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주기도는 이 세상의 끝 날까지 성도들이 드려야 할 마땅한 기도이자 꼭 필요한 기도다. 주기도를 보면, 그것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는 기도의 대상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할 내용여섯 가지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영이 나온다.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배웠고, “기도할 내용여섯 가지는 지난 9월 특별새벽집회 주간의 새벽시간을 통해 나눴다. 이제 오늘은 주기도문의 부록으로 첨가되어 있는 송영에 관해 살펴볼 차례다. 이러한 송영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가 초기교회의 신앙고백의 하나로도 쓰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오늘은 주기도문의 전체내용을 조감해보고, 마지막 송영 찬송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기도의 대상에 나타난 하나님은 대체 누구신가?

  우리는 지난 주일 기도의 대상에 대해 배웠다. 그분은 하나님도 아니고 여호와도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배웠다. 주기도문은 2가지 형태가 남아 있는데 마태복음의 것(6:9~13)과 누가복음의 것(11:2~4)이 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보면 아버지라는 호칭 앞에 다른 수식어들이 더 있는데, 그것은 하늘들 안에 계시는 우리의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아버지로만 머물러 있으실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계획을 그분이 품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들에 계신 분으로서, 모든 것 위에 초월해 계신 절대주권자이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며,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게 비는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기도해야 할 여섯 가지 기도제목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난 한 주간동안 새벽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실제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기도의 제목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 쪽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간구이며 또 한 쪽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간구다.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간구는 다시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간구이며, 하나님의 나라(왕국,통치)를 위한 간구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한 간구다. 즉 하나님의 이름나라이 바로 첫 번째 하늘을 위한 간구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인격을 가진 다른 존재들 곧 사람이나 타락한 천사들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것을 배웠다. 그럼, 언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것은 주님의 뜻이 성취될 때. 만세전에 계획했던 주님의 뜻이 이 땅 위에 펼쳐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특히 그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직접 당신이 이루실 때.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당신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어질 때, 하나님은 아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단순히 한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임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배웠다. 그럼, 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오도록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는 세력이 아직 땅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기도제목에서 더 자세히 배우게 되겠지만, 우선 여기서 알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장소가 이 땅이면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내 마음 속에서 이뤄지면 내 마음 속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예수믿는 자가 되었다고 하더라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우리는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늘 기도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 안에서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뤄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는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인 것들이 있다. 하지만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란 거대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저 하늘에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이루는 것을 거역하는 세력이 있다. 그들의 대장은 사탄마귀고 그를 추종하는 타락한 천사들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거역하는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버렸고 그들을 위한 감옥(음부, 지옥)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하지만 사탄마귀는 거기에서 왕좌를 펴놓고는 왕노릇을 하면서 지금도 음부의 문들을 통해 귀신들을 이 땅 위에 올려보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귀신이 이 땅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산출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이 땅 위에서 육체를 입고 살고 있는 우리의 필요에 대한 3가지 간구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먹을 양식죄용서보호에 대한 청원이다. 이 청원은 사실 좀 더 면밀히 분석해보면, 사람의 육체와 마음()과 영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 우리는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신의 육체의 생존을 위해 양식()”을 구해야 한다. 천사는 육체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사람은 육체를 지녔기에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원문에 따르면, “생존에 필요한 양식이었고, 그것을 위해 간구하는 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꼭 육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초기교부들의 해석도 있었다. 특히 그것은 우리의양식이며, “매일기도해야 함을 배웠다.

  둘째,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서 자신의 를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빚의 탕감이라는 비유로 이것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당시 주기도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대상은 전부 유대인들로서,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면제년희년규례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는 자가 하고 있어야 할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우리 믿는 이들은 자신에게 아주 작은 백 데나리온의 채무를 가진 자의 빚을 탕감해주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마지막심판의 날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다.

  셋째, 우리는 시험 안으로 이끌리지 않고 악한 자로부터 건짐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시험은 세 가지 의미로서, 단순히 마귀의 유혹(Temptation)”만을 의미하는 시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기 위한 테스트(Test)”로서의 시험도 들어 있고, 우리의 믿음의 분량과 상급을 높여주기 위한 시련(Trial)”으로서의 시험도 같이 들어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악한 자 마귀의 시험으로부터의 구출은 저주받은 귀신들이 주는 온갖 저주들 곧 가난과 질병과 우환과 사건사고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한 뒤 그들을 대적하는 기도도 해야 한다.

 

4. 우리는 어떠한 송영으로 하나님께 찬양해야 하는가?

  이제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 위에 한 가지 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송영에 관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기도들을 잘 드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그분이 행하신 일들에 관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행한 일에 대해서 그분이 찬양받는 매우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것들이 그분에게 돌려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3가지. 첫째, 모든 나라(왕국)가 그분의 것으로 돌려져야 하고, 둘째, 모든 능력(뒤나미스)이 그분의 것으로 돌려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영광(독사)이 영원토록 그분의 것으로 돌려져야 한다(대상29:11).

대상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사탄마귀는 이 영광을 자신을 차지하려고 시도한 놈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탄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합당하게 처벌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업적들을 찬탈하려 시도한 그들을 하나님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높이는 자를 주님은 구원할 것이고 저 영원한 천국에 데려가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다. 아멘.

 

2019년 9월 8일(주일)

정병진목사 


과연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시험하시는가? 왜 예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인가?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의 핵심은 시험과 악한 자로부터의 보호에 대한 간구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시험하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좀 안 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말인가? 그런데 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는 "악한 자로부터 구해달라"는 뒷문장이 전부 빠져있는가? 왜 인간의 필요에 대한 간구에 악한 자가 등장하고 있는가? 이러한 영적 비밀은 인간에 필요에 관한 세번째 간구에 들어 있다.

2019-09-07(토) 2019년도 9월 특별새벽집회 여섯째날
제목: 주기도문강해(07)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6:13)
https://youtu.be/lZUc5tZ6TT0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에 관하여 말씀을 듣고 있다. 그중에서 어제는 인간의 필요 가운데 두 번째 기원으로서, 죄용서의 간구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죄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죄의 용서라는 단어가 아니라 빚의 탕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죄용서의 의미가 사실은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으신다.”는 의미에 가까운 뜻이었고, 지옥에 갈 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해 남의 죄를 용서하는 실천적인 삶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은 장차 죽음 후에 서게 될 심판의 때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사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빚진 것을 탕감받은 자로서 나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죄용서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수한 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일종의 감사의 표현과도 같은 것이며, 그것은 결국 마지막 날 나 자신의 심판의 잣대가 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오늘은 주기도의 마지막 기도 제목으로서, 인간의 필요에 있어서 세 번째 기원인 시험이나 악한 자로부터의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간구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2. 인간의 필요를 위한 세 번째 간구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3가지 간구와 아울러 우리의 필요를 위한 3가지 간구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에 관한 필요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관한 간구였고, 인간에 관한 필요는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용서와 보호에 관한 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 인간의 필요에 관한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간구. 그런데 이 문장은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개역성경으로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런데 이 문장에서도 뒷문장에 생략된 것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를이다. 이제 헬라어 원문에 따라 세 번째 간구를 직역해보자.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시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마시고, 오히려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건지시옵소서”. 그런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 의하면, 뒷 문장 전체가 나오지 않는다. 즉 누가복음은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시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마소서로 끝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악한 자로부터 건짐을 받도록이라는 문장에서 공통분모와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봄으로 파악할 수 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신가?

먼저 우리는 인간의 필요를 위한 두 번째 간구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구의 용서가 먼저 있어야 했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 번째 간구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가 시험하는가에 관한 문제. 세 번째 간구는 과연 우리가 시험받을 때에,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는가 아니면 다른 존재가 시험하는 하는 문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가? 만약 이러한 문구가 올바른 표현이라면, 주님의 이러한 세 번째 간구는 다른 곳의 성경말씀과 충돌될 수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이다.

1:13~14[직역] 시험을 받고 있으면서, 아무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는다고 [계속해서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그분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욕심에 이끌림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것에] 유인을 받으면서 시험을 받는다.

그렇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시험하지 않으시며,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신다. 다만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미혹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사람을 시험하는가? 결론적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존재는 사탄마귀(1:13, 22:31,46, 고전7:5). 그래서 마귀는 시험하는 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4:3, 살전3:5).

1:13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22:31,46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너희는]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4. 성경에서 시험혹은 시험하다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정리해보도록 하자. 헬라어로 시험이라는 단어는 페이라스모스라는 명사인데, 이 단어는 동사 페이라조에서부터 나왔다. 그런데 이 단어의 뜻은 다양하게 쓰였다. 적어도 3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시련을 겪게 하다의 뜻이 있다. 이러한 뜻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는 문장에 잘 나와 있다. 둘째, “유혹하다. 걸려넘어지게 하다, 죄짓게 하다는 뜻이 있다. 예로,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들어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에 나온다(22:40). 셋째, “테스트하다. 검사하다는 뜻도 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후13:5)”는 말씀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11:17)”라는 문장에도 나온다. 특별히 마지막에 쓰인 뜻은 도키마조”(입증하다, 검사하다)라는 단어와 그 뜻이 동일하다. 그런데 이 단어는 위에서 말했던 3가지 용례를 모두 포함하는 문장으로 훨씬 많이 쓰인다. 그러므로 이 시험이라는 단어가 문장에 따라 다른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많게는 위에서 말했던 3가지 의미를 함께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걸려넘어지게 하거나 유혹하여 죄짓게 하는 의미로서의 시험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5.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 안으로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인간을 위한 세 번째 간구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 안으로 데려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초기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우리로 사탄에 의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는 뜻이라고 해석했고, 라틴어본 불가타성경을 편찬한 제롬은 우리로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 문장은 우리가 약할 때에는 사탄의 유혹에 들어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으며, 시험으로부터 시련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의 상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의미임도 살펴보았다. 또한 이 기도는 우리가 시험에 들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의미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음도 살펴보았다.

 

6. 인간의 필요를 위한 세 번째 간구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이 세 번째 간구에서 우리가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복음의 주기도문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비교해 볼 때 알 수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비해 짧다. 왜냐하면 오히려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건지시옵소서라는 문장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이 문장도 있고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시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마소서라는 문장도 같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시험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가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힘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악한 자의 유혹이 있을 때라는 것이다. 우리말성경에는 악한 자를 중성명사로 번역하여 그냥 이란 단어로 번역해놓았지만 이 문장은 중성명사로 해석하기보다는 악의 실체인 악한 자마귀라고 번역함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하겠다. 고로, 마태복음에서는 덧붙여 다만, 악한 자 마귀로부터 건져달라는 기도를 더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 나오며

주기도문 가운데 인간의 필요를 위한 간구는 우리의 양식과 용서와 보호에 관한 말씀이지만 좀 더 분석해보면, 그것은 인간의 육체와 마음과 영을 위한 간구라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악한 자인 사탄마귀의 속성과 특징과 역사방식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주기도마저 하지 않는다면 마귀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마귀의 유혹과 속임수를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손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도 기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즉시 대적기도를 통해서 그들 세력을 물리치는 기도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2019년 9월 7일(토)

정병진목사 


하나님께 죄용서를 구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실천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 것인가? 왜 예수께서는 죄용서에 대한 기도를 빚진 것을 탕감받은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을까? 또한 죄지은 자들에 대한 용서가 먼저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 것이 먼저인가? 그리고 한 번 죄용서를 받은 자는 죄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골고다 언덕의 예수의 피로 이미 다 용서된 것인가? 주기도문 가운데 죄용서에 관하여 유대인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부록이 달려있는 놀라운 죄용서의 말씀이 여기에 있다.

2019-09-06(금) 2019년도 9월 특별새벽집회 다섯째날
제목: 주기도문강해(06)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마6:12)
https://youtu.be/Rynf_L20wy0


1. 들어가며

오늘은 주기도문 가운데 인간의 필요에 관한 두 번째 간구에 대해서 배우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꼭 용서받아야 할 죄들 사함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필요에 있어서 죄들 사함을 위한 기도를 절대 빠뜨리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죄들에 관한 용서를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죄들의 용서를 구할 때에 우리가 꼭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죄사함을 비는 기도를 왜 빚진 것을 탕감받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인가? 그리고 사람이 예수님을 한 번 믿게 되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에 대해서 이미 다 용서받았으므로 죄용서를 위해 비는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오늘은 주기도문 가운데 인간의 필요에 관한 두 번째 간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 인간의 필요를 위한 두 번째 간구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인간을 위한 필요 가운데, “일용할 양식곧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구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때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우리말성경의 번역을 보면 이 문장에 있어서만큼은 의역을 시도했다. 왜냐하면 이 문장에는 ”(하마르티아,sin)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오페일레마,debt)이라는 단어만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을 헬라어 원문에 따라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빚진(죄지은) 자들을 탕감(용서)해 주었던 것처럼, [당신은] 우리의 빚들(죄들)[단번에] 탕감(용서)하여 주옵소서

3. 왜 예수께서는 죄들에 대한 용서를 빚들에 대한 탕감으로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왜 인간을 위한 두 번째 간구가 우리들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한 용서라고 알고 있는가? 그리고 한글번역본에서도 그렇게 번역해 놓았는가? 그것은 이 본문을 누가복음의 그것과 비교해보았을 때에 에 대한 의미가 곧 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1:4). 이제 이 기도에 대한 누가복음의 것을 우리말로 직역해보자. “그리고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빚진 모든 자들을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의 죄들을 우리에게 [단번에] 용서하여 주옵소서그렇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에 대한 탕감은 곧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토라(율법)을 배우고 자랐는데, 그때 이미 면제년”(15:1~3)희년”(25:10)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죄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두 가지 율법규정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유대인들은 면제년(7)이 되면, 아무런 조건이 없이 채권자는 자기의 이웃과 형제가 진 빚들을 전부 면제(탕감)해주어야 했다(15:1~3). 그리고 심지어 희년(50)이 되었을 때에는 팔렸던 사람이나 팔렸던 토지까지도 다 되돌려주어야 했다(25:10)(그러나 실제로 시행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유대인이라면 이 토라를 안식일에 회당에서 낭독했고 또한 어려서부터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죄사함은 면제년과 희년에서 말하고 있는 탕감같은 것이라고 들려주었을 때 그들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조건없는 죄들의 용서.

4. 자기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었던 12명의 제자들에게 인간의 필요에 관한 두 번째 간구를 통해, 자신이 지은 빚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의 조건이 달려있었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었던 같이라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만약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문장 그대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죄용서를 받는 것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 달려있다는 이 문장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러한가?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았는데, 무슨 죄용서를 위해 간구해야 하느냐면서 이 문장을 빼야 한다는 자들이 있었다(물론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리고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었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용서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분명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었던 것처럼,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간구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빚진 자에 대한 탕감의 비유(18:23~35)”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보면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 하지만 갚을 것도 없었고 갚을 능력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엎드려 절하며 간청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놓아 보내면서 그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 하나의 목을 잡고는 빚을 갚을 것을 독촉하였는데, 그도 엎드려 내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그를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본 동료들이 그 사실을 주인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 넘겼다는 것이 이 비유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을 다 용서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지 않고 있다면, 장차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 비유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누가 하나님께 청원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남들이 내게 지은 죄들을 용서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여 이미 다 용서받았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우리는 또한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매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회개를 하고 있는 자라도 지금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지 않는 자라면, 그 사람은 배은망덕한 자로서 마지막 심판의 때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인간에 필요한 두 번째 간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을까봐 주기도문 후에 부록으로 한 말씀을 더 하셨다. 그것이 바로 마6:14~15의 말씀이다.

6:14~15[직역] 왜냐하면 만일 너희가 그들의 잘못들을 사람들에게 용서한다면, 역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장차 용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너희가 사람들에게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들을 장차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미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지었던 죄를 용서받은 자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주지 않는 삶을 그가 살고 있다면, 그는 종말의 심판대에 가서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지옥에 떨어질 큰 죄들을 용서받은 자답게 다른 사람들의 잘못도 용서해줄 줄 알아야 한다. 즉 이미 용서받은 자로서의 실제가 없이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죄를 결국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는 사실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자들이다. 자신의 몰인정부터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간의 사이에 있는 죄에 대해 용서를 실천하지 못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양식) 없으면 육체의 생존이 불가능하듯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용서해주지 않는 자는 장차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오늘날에 예수를 믿고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저주와 질병, 환난과 자녀의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 자신의 지은 죄들이 용서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는 회개한다고 말하지만 용서받은 자로서 오히려 남들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의 필요를 위한 두 번째 간구는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간구임에 틀림없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여기서도 지옥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며, 죽어서도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9년 9월 6일(금)

정병진목사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단지 하나님의 필요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필요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셨다. 3대3의 비율로 기도를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사람을 위한 제일 처음 필요는 육체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라고 하셨다. 그것도 개인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특별히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는데, 이것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2019-09-05(목) 주기도문강해(05)
제목: 주기도문강해(05)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https://youtu.be/GMi2yeGJnCg

1. 들어가며

우리는 어제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필요에 관한 3가지 기도(기원)에 대해 배웠다(6:9~10).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인간의 필요에 관한 3가지 기도(기원)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6:11~13). 사실 예수님은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셨던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너무나 잘 아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을 위한 필요만 기도하지 않고 우리 인간의 필요를 위한 기도도 하라고 하셨다. 역시 예수께서 가르쳐준 기도는 균형잡힌 기도에 틀림없다.

 

2. 하늘과 땅의 필요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이며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기도의 대상에 대한 호칭에서도 이미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는 표현이다. “하늘들 안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며, “우리의는 우리 인간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하늘의 필요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경륜)이자, 우주적인 것에 관한 기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부터 우리는 땅의 필요에 관해 배우게 될 것이다. 특히 사람에 대한 기도는 (4기원)”용서(5기원)”보호(6기원)”에 관한 기도인데, 그것을 풀어보면, 것은 육체에 관한 기도요, “마음에 관한 기도이며, “”(사탄마귀)에 관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영혼육을 가진 사람이기에 자신의 육체가 굶주리게 되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고, 자신의 마음이 상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뒤틀리게 되어 있으며, “영적인 외부적인 요소를 제어하지 못할 때에는 저주 가운데 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의 3가지 구성요소로서, 육체와 마음과 영에 관한 문제를 놓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 한편, 하늘의 필요가 2인칭단수대명사인 당신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관한 것이었다면, 땅의 필요는 1인칭복수대명사인 우리의” “양식과 용서와 보호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오늘은 사람이 갖는 제일 처음의 문제로서, 육체의 생존에 관한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제일 첫 번째 기도는 무엇인가?

사람에게 필요한 제일 첫 번째 기도제목은 육체의 생존에 관한 문제. 그것은 양식(, )”에 관한 문제다. 인간은 육체를 가졌기에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6:11)” 그런데 이 본문도 우리말성경으로 보면 중요한 수식어가 하나 빠져 있다. 그것은 양식앞에 1인칭복수대명사로서 우리의라는 수식어가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식은 나의 양식이 아니며 우리의 양식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의 제4기원은 우리의 양식을 우리에게 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시는 시간은 오늘이며, 그리고 그 양식도 풍성한 양식이나 쌓아놓을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양식인 것이다. 고로 헬라어원문에 따라 제4기원을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일용할 우리의 양식을 오늘 우리에게 [단번에] 주옵소서.

 

4. “일용할 양식이란 대체 어떤 양식을 가리키는가?

일용할”(개역개정) 또는 필요한”(새번역)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시오스(epiousios)”는 사실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신약전체에서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각각 한 번씩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의 어떤 그리스 문헌에서도 이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의 어원을 통해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볼 수밖에 있다. 먼저, “에피우시오스는 전치사 에피(epi)”에다가 우시오스(ousios)”가 합쳐진 단어다. 그래서 만약 이 단어가 에피에다가 이에나이(ienai, 오다,가다)”라는 단어와 합쳐진 경우라면, 이 단어의 뜻은 오고 있는 날을 위한내일을 위한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한편 이것이 에피(epi)”에이나이(einai, 있다.존재하다)”와 합쳐진 경우라면, 이 단어의 뜻은 존재를 위한”, “필요한”, “생존을 위한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 따르며, 전자의 해석은 좀 어색하다. 왜냐하면 그 양식을 오늘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내일을 위한 양식을 오늘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아마도 오늘을 위한이거나 생존을 위한혹은 필요한의 뜻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인간의 필요는 딱 3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의 처음에 육체를 위한 필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가장 효과적인 번역으로는 생존에 필요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은 번역이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양식에 대하여 나를 위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식(먹을 것)을 구하되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양식(먹을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출16장에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주실 때에, 그날그날에 필요한 양식만 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양식도 한 사람이 한 가족을 위해 새벽에 나가서 거둬들이라고 했다는 것과 매우 관련이 있는 것이다(16:16,21). 다시 말해, 양식은 개인이 아닌 우리의 양식으로서 최소 가족을 위한 양식이었지, 결코 개인의 배부름을 위한 양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달라고 할 시기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하신 것은 필요한 양식을 구하되 그것을 먼 미래를 위해 쌓아놓아 그것을 축적하는 용도로서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5. 주기도의 네 번째 기도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네 번째 기도제목 곧 [당신은] 생존에 필요한 우리의 양식을 오늘 우리에게 [단번에] 주옵소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영적인 비밀들은 이런 것이다.

첫째, 우리는 주기도를 매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기도제목들은 몰라도, 오늘 우리가 배우는 네 번째 기도에서는 오늘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생존을 위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어제의 양식을 오늘 달라고 기도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16장의 만나를 보면, 해가 내리쬐면 그날 내린 만나는 그 시간에 녹아서 없어졌다). 둘째, 이것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자신을 삶을 위탁하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4기원은 먼 미래에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하는 기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의 기도는 생존을 위한 양식을 구하는 정도여야지 결코 비축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축적해놓기 위해 과도한 양식을 구하는 것에서 결국 싸움이 발생하게 되고 좀 더 크게 되면 국가와 민족의 전쟁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에 필요한 양식을 얻을 수 있음에 늘 감사하자. 그리고 오직 나의 생존만을 위해 양식을 구하거나 나의 안녕을 위해 그것을 쌓아두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의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만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특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란 사람의 생존을 위한 일상적인 음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지 그것을 펑펑 쓰고 즐기기 위한 잔치 곧 고기와 포도주와 같은 것을 구하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넷째, 사람이 자신의 육체의 보존을 위해 양식을 달라는 기도드리는 일을 결코 죄악시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육체가 살아가려면 반드시 육체의 생존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더불어 이 기도가 오직 육체의 양식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단정해서도 아니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육체에게는 떡이 필요하지만,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도 필요하기 때문이다(4:4).

 

6.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가 생존을 위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되, 육체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비는 기도를 꼭 매일 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육체의 양식을 위해 비는 기도를 두고 너무 세상적이라고 치부하지도 말라. 육체가 강건할 때에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병기로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식을 구하되 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고 축적하기 위한 과도한 욕심으로 구했다면 그것을 내려놓고 이웃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바란다. 잘못되면 그것이 사회와 국가까지 병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의 필요가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오늘도 양식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9년 9월 5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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