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43) 길보아 산 위에서 이스라엘의 별들이 지다(삼상31:1~13)_2022-01-04(화)

https://youtu.be/PkP6w-3YOPs  [혹은 https://tv.naver.com/v/24470520 ]

 

1. B.C.1010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떻게 되었는가?

  블레셋의 5개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시작된 길보아 전투는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군대는 이스라엘의 북쪽 이스르엘 평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블레셋은 그보다 약간 서북쪽 방향으로 약 8km 떨어진 수넴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평지 전투에 능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진격해 들어옴으로 뒤로 밀리게 되었고, 결국 사울의 세 아들인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이 전쟁에서 블레셋을 막다가 그만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80세가 되었던 사울왕은 피신하다가 적의 궁수들이 쏘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된다(삼상31:3). 그러자 사울왕은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 칼을 빼어 나를 죽여다오, 내가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구나" 그렇지만 무기든 자는 감히 왕을 해치지를 못했다. 그러자 왕은 자기의 칼을 뽑아 그 위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왕이 죽은 것을 본 무기든 자도 역시 자기의 칼에 엎드려져 한날한시에 둘 다 죽게 된다. 그러자 이스르엘 평지 건너편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요단강 건너편의 길르앗의 주민들은 자기들도 블레셋으로부터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자기의 성읍을 버린 채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성읍에까지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도 하였다. 

 

2. 사울왕의 사후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사실 그때 블레셋 군사들은 사울왕이 전사한 것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죽은 자들로부터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왕의 목을 벤다. 그리고 그의 목을 자기들의 신인 다곤의 신전에 걸어둔다(대상10:10). 그리고 사울왕의 갑옷을 벗겨 내어 아스다롯 신당에 갖다 둔다(삼상31:10). 그리고 사울의 몸과 사울의 세 아들을 벧산 성벽에 매달아 놓는다(삼상31:10). 그러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무려 21km의 거리를 달려온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벧산 성벽에서 내려 야베스에 가지고 가서 화장하고 동네에 있는 에셀나무 아래에 묻어준다. 그리고 일주일간 금식하며 슬퍼한다. 왜냐하면 처음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암몬 사람들이 야베스를 쳐들어온 일이 었었는데, 그때 사울이 이스라엘 군대 33만명을 이끌고 와서 암몬 사람 나하스를 무찔러 자기들을 건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장례를 고이 치러 준 것이다. 

 

3. 왜 사울은 비참하게 죽게 되었는가?

  왜 사울은 자연적으로 죽지 아니하고 자기의 칼에 엎드려 죽게 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목이 잘리고 몸은 성벽에 걸리는 등의 참사를 겪게 되었는가? 역대상을 보면, 사무엘상 31장과 거의 똑같은 본문이 나오는데, 그런데 역대상에는 사무엘상에서 말해 주지 않는 본문이 나온다. 그것은 사울이 죽은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대상에서는 사울이 죽은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그런데 우리말로 된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 직역해 보았다. 

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를 대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접한 자에게 물어서 구하고 여호와께 구하지 않았기에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그 왕권(왕위)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다. 

 

4. 사울이 비참하게 죽은 이유를 왜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사울이 그 전쟁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을 들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결국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죽임당해야 했는가? 그것에 대해 역대상의 저자는 한 마디로 사울이 여호와를 대적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놓았다(대상10:13). 여기서 '범죄하다(원문: 대적하다)'라는 말은 '마알'이라는 단어로서, 그 뜻이 '대적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울왕이 하나님께 반역 행위를 계속해서 일삼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그는 하나님 앞에 늘 불성실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랬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범죄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모든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판단 기준도 자기 자신이었고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위하여 행한 것들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이 높여지고 자기의 명예가 향상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만약 사울의 명령을 어기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반역 행위로 단죄하여 엄벌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그냥 넘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에 사울왕의 이야기는 비록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던 자라고 할지라도 죽어서 하늘나라에서는 왕 노릇할 수도 없다는 것과 더불어 아예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샘플로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로 다윗왕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는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한 자였지만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서도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한 자였으며, 자기를 높이는 데에 전념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5. 사울이 죽어서 왕 노릇도 하지 못한 채 버림받게 되었던 2가지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울의 이야기를 눈여겨 보아야 할 이유는 이미 1차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는 자가 누군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사실 사울은 원래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할 자로서 부름을 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왕 노릇하는 신분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죽어서 왕 노릇을 하지도 못할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그가 지은 2가지 큰 죄는 대체 무엇인가? 역대상 기자는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아서였다고 말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자기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였던 장본인이었다. 결국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시켜서, 그가 우상 숭배의 죄를 지은 것과 같다고 하셨다(삼상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불순종한 것은 사신 우상(드라빔)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3)"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에게 구하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물어보고 그에게 구하였기 때문이다(대상10:13~14). 그랬다. 사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에 블레셋이 쳐들어왔다. 그런데 그때에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물어 보았는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했더라면 그는 마지막에 가서 비참하게 죽는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인생 말년에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의 국왕인데도,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무당 점쟁이였던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이 큰 죄가 되었던 것이다.
 

2022년 01월 04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42) 위기를 극복한 다윗에게서 왕으로서 기품이 배어나오다(삼상30:1~31)_2022-01-03(월)

https://youtu.be/Y0Va-0XFa9Q  [혹은 https://tv.naver.com/v/24416893 ]

 

1.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투에서 빠지게 된 다윗과 그의 600명의 사람들이 마주하게 된 쓰라린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하마터면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스라엘과 일으킨 전쟁에 참여할 뻔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살던 시글락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그 사이에 기가 막힌 일이 발생한 상태였다. 즉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말렉이 쳐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다 남부를 침노하였고 그 마을들 중에는 시글락도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시글락을 불살랐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사로 잡아갔다. 이에 불타고 있는 성읍을 바라보았던 다윗의 그의 사람들은 그만 주저 앉아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주군이었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2. 최대의 시험거리에 직면한 다윗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갔는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한 백성들은 그만 다윗을 돌로 치려고까지 한다. 그러자 다윗은 모든 책임을 통감함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이 일이 터진 것이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에 망명한 것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엄중한 현실을 보고 그저 주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한 가닥의 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렇더라도 처자식들은 아직 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즉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그래서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한 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아말렉을 쫓아가라고 하시고 잡혀간 것들을 도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응답해주신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600명의 군사와 더불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대적을 향하여 출발한다. 그런데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200명의 군사는 그만 지쳐서 브솔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러자 다윗은 그들에게 짐을 맡기고는 400명의 군사만 거느리고 적을 행햐 떠나는데, 문제는 적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또다시 긍휼을 베풀어주신다. 가다가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한 노예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소년에게 음식을 주어 정성껏 돌보자 그가 기운을 차리게 되는데, 그는 애굽의 소년으로서 아말렉 사람의 종이 되었던 소년이었다. 그런데 병이 들자 주인이 그를 버리고 그만 가버린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의 신변안전을 보장해주기로 하고 그의 뒤를 따라간다. 그는 정확히 아말렉 족속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는데, 그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자 다윗과 400명의 군사는 적진을 일격에 습격하여 새벽부터 이튿날 해가 저물 때까지 아말렉을 친다. 그리하여 낙타를 타고 도망친 400명의 청년을 제외하고 아말렉인들은 전부 죽게 된다. 그리고 잃어버린 모든 처자식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되찾게 되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얻게 된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약탈한 것들이다. 

 

3. 전리품을 나눌 때에 다윗이 세운 규례는 무엇이었는가?

  이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자신의 처자식은 도로찾게 되었고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 그러다가 브솔시내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였다. 거기에는 지쳐서 남아있던 200명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러자 좀 불량한 사람 곧 전쟁에 참여했한 자들 중에 악한 자가 다윗에게 말했다. "주군, 저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얻은 전리품은 저들에게 주지 말고, 오직 저들은 각자의 처자식만을 데리고 가게 합시다." 그러자 다윗이 그들에게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번 전쟁은 우리가 잘 해서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들을 우리 손에 넘겨준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전리품을 우리들만 차지한다는 것은 아니 될 말이오. 전쟁터에 나갔던 자들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러서 짐을 지키던 자들이나 분깃은 다 똑같이 나누도록 하시오." 그런데 다윗의 이 말 한 마디는 200명이 군사들이 평생 자기의 목숨을 바쳐 다윗을 지킨 이유와 연결된다. 그랬다. 다윗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넉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자기와 자기의 부하 400명이 전쟁을 잘 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저는 전쟁승리의 공을 자기에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림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4. 다윗은 전리품들을 누구에게도 보냈는가?

  그런데 다윗의 덕망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은 이 다음의 일에서 더욱 더 빛이 난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기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같이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남방 주변에 있는 유다지파의 장로들과 성읍들에게 전리품을 보내게 한다. 먼저는 유다의 장로들에게 선물을 보낸다(삼상30:26).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유다의 각 성읍에까지 전리품을 나누어 준 것이다(삼상30:27~31). 그런데 시실 유다 성읍의 주민들 중에 다윗을 밀고한 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들에게까지 선처를 베풀어 준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유다백성의 잘못을 하나도 묻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에게 많은 긍휼을 베풀어준 것이다. 그러자 훗날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할 때가 이르게 되었을 때에, 제일 먼저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5. 끝내는 천국에서 왕노릇할 자리에서 떨어진 사울 왕과 그 자리의 최고 꼭대기에 올라간 다윗,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에는 이 땅에서도 왕이었지만 천국에 들어가서도 왕노릇하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바로 '다윗'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왕이었지만 천국에서는 왕이 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는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반대의 길을 걸어갔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 그들은 과연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때 사울왕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 혹시 자신의 체면을 잃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기도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삼상30:7~8). 사실 사울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전쟁에 승리했을 때에도 그는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데에 관심을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에만 늘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철저히 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가라 하고 갔고 멈추라 하면 멈추었던 것이다. 셋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를 어떻게 말했는가?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에도 그것을 자기가 잘 한 것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모든 영광은 자신이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윗은 전리품도 자기가 취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기뻐하였다. 그러자 훗날 사울이 죽었을 때에 유다지파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을 유다족속의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2022년 01월 03일(월)

정병진목사

 

2022-01-02(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상강해(41) 사울 왕의 경우처럼 교만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10가지 특징은?(삼상28:15~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skdXwu_crE [혹은 https://tv.naver.com/v/24416813 ]

 

1. 들어가며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비운의 인물을 한 사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사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40세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국의 초대왕으로 등극하였지만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악한 조짐은 왕이 된지 2년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국이 튼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다시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의 나이가 62세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의 명령에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 왕을 세운 것을 매우 후회하신다고 하셨다(삼상15:11). 그리고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18년동안이나 더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이는 그가 혹시 회개하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말년이 되자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를 떠나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결국 전쟁이 터졌고 그 전쟁의 승패를 알아보려고 신접한 무당을 찾아간 다음날 그는 길보아 전쟁에서 전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울왕이 이렇게 버림당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교만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왜 그는 교만해진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울왕의 교만이 얼마나 발전했으며,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고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2.'교만함'의 죄란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하는 이 용어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겸손하거나 온유함이 없이 자기 생각과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시대에는 '교만'은 죄의 목록에 들어간다(막7:22, 롬1:20, 딤후3;2). 그러나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교만함이 죄라고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만은 모든 죄의 출발이요 씨앗과도 같다. 교만함에서 많은 죄들이 가지를 치고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교만함의 대명사는 역시 '사울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자신을 높이려고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왕의 경우를 보면, 그의 교만함은 이내 더 많은 죄를 산출하였으니, 다윗을 보고는 시기질투심이 터져 나왔고 이내 혈기분노의 죄가 합쳐져서 '미움'의 죄로 싹트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움의 마음은 '살인'의 감정으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이 죄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자신이 교만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사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벗는 죄의 문제가 교만함의 문제요 음란함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못 되었으면 즉시 회개함으로 이러한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구약시대에 율법에는 교만한 마음이 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사울왕으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범죄가 결국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는 우상 숭배의 죄라고 말씀하셨다(삼상15:23). 즉 교만함은 권위를 무시하는 데에서 그 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판단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의 죄는 자기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처럼 우상시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교만함을 드러낸 사울의 예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죄가 곧 점치는 죄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다. 즉 교만함의 죄는 십계명에 나오지는 않아도, 십계명 중에서 1계명과 2계명을 어긴 죄와 동일한 죄라고 평가되는 것이다. 

 

3. 사울왕에게서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울왕에게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만한 자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히 죄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꾸 변명을 한다. 그는 42세 때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으며(삼상13:13), 또한 62세 때에도 역시 아말렉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둘 다 회개하지 않았다(삼상15:13~15). 

  둘째, 교만한 자는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자존심이 매우 강해서 자기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끌고 들어가려 한다. 자기를 지지해주는 자를 위해서는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지만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결단코 가만 두지 않는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도 섬기려고 하였다. 그러므는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였다(삼상15:20). 

  셋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이 저지른 행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사울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사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바라신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삼상15:22). 

  넷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면서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가 위임된 권위자의 말도 무시해버린다. 사울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자기가 왕으로 가진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삼상15:30).

  다섯째, 강포하고 폭력적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만함은 보통 혈기와 분노와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만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혈기와 분노가 장난이 아니다는 것이다. 사울은 처음에는 아주 겸손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출 줄도 알았으며, 자신의 아랫사람의 말도 경청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왕으로 등극하자 그는 안하무인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아들이라도 가만 두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을 돕는다고 장자 요나단도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삼상20:33). 그리고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미명하에 놉 땅에 있는 제사장들을 다 죽이는 파렴치한 일도 자행하였다(삼상21:16~19). 

  여섯째,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도 자기가 잘나서 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가 이러한 사람이라고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잊고 산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일평생 동안 하나님을 높였다는 대목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돌려야 할 그 순간에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했던 것이다(삼상15:12). 

  일곱째, 자기를 높히려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자기가 높아져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싫어한다. 지는 것을 싫어한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싫어한다. 이 사람에게는 오직 자기의 체면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름이 명예스럽게 된다면 거금도 거뜬히 내는 편이다. 심지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는 하나님도 이용한다. 교만의 특성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기에 교만한 사람은 대개 시기와 질투심도 매우 강하다. 사울은 그랬다. 사울은 모든 백성 앞에 자기가 높아지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다윗이 전쟁에 승리하여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자기에게는 천천을 돌리자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마음 먹는다(삼상18:7~9).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두 딸 메랍과 미갈까지도 이용한다(삼상18:17~27). 

  여덟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특히 자기를 꾸중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니 주의 종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귀가 닫혀져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울은 40세에 왕위에 올라 80세에 죽는다. 그런데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했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62세 때에 치른 아말렉전투 이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오게 된다. 그뒤로 18년동안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살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 블레셋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 엔돌에 신접한 무당을 찾아가서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에게는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음성으로도 계시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삼상28:6). 

  아홉째,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것은 비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언제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함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사울이 그랬다. 사울의 평생에 진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대목이 없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었고 자기가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이다. 교만한 자는 항상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행세만 했을 뿐이다(삼상15:30)

  열째, 늘 남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판단받아야 할 대상이요 연약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다. 내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남은 비판하는 데에 아주 익숙하지만 자기를 판단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자기 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그리고 자기 아들 요나단의 이야기를 귀감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강요할 뿐이었다(삼상20:30~31). 

 

4. 나오며

  베드로도 사실은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혈기와 분노도 있었고 시기와 질투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기가 앞장서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날에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자신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했지만 자기가 위험해 처해지자 그는 그만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만약 주님께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시험에 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남긴 첫 번째 편지 속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매우 강조해서 말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벧전5:5-6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렇다. 어디 교만한 자가 사울뿐이며 베드로 뿐이겠는가?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교만한 마음이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만함의 선봉자이었던 사탄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외식하려고 하고, 생색내려 하고, 자기 이름내기를 기뻐하는 자를 사탄은 가만 두지 않는다. 그 사람 속에서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혈기와 분노를 일으켜서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교만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만의 영들이 역사해서 교만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교만한 가문에서태어난 사람이 교만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늘 자신을 낮추는 것에 더욱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를 즐거워해야 한다. 늘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생활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이 우리를 일생동안 지배하려고 웅크리기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때로 금식도 해야 한다. 그래야 교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주 안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어 주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우리는 다만 묵묵히 우리가 감당할 일을 해야 한다. 남의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음을 알고 남을 판단하기 전에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2022년 01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40)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왕의 치명적인 범죄의 결과?는(삼상28:1~19)_2021-12-31(금)

https://youtu.be/6GO1hW-RiN0  [혹은 https://tv.naver.com/v/24416475 ]

 

1. 사울 왕이 80세 되던 해에 블레셋이 쳐들어왔다. 사울은 두려운 나머지 어떻게 했는가?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지 40년이 되었을 때에 블레셋이 또 쳐들어온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블레셋 방백 5명이 똘똘 뭉쳐서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자 사울은 그들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의 나이도 나이이지만, 블레셋 군대의 숫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여호와께 물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떠한 응답을 하지 않는다. 꿈으로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2. 다급해진 사울에게 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일어났지만 사울은 어떻게 전쟁을 치를 것인지를 물을 데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행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게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악령이 그에게 역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님로부터는 어떤 신령한 계시가 떨어질 지가 없다. 둘째, 다윗을 도왔다고 몰아부쳐서 죄없는 놉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을 도와준 것이 뭤기에 사람을 시켜 놉 땅에 있는 모든 제사장들과 가축까지 몰살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사울은 제사장에게서 찾아가서 물을 수 앖다. 살아남은 아비아달 제사장은 이미 다윗에게 도망친 상타에 있기에, 또한 우림과 둠밈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셋째, 아말렉과의 전투명령을 듣고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그이후 사무엘은 사울 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또한 후에 사무엘도 죽고 사울의 눈에서 사자리고 없다. 그리고 사무엘로부터 훈련받은 선지자들의 무리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하나 남은 갓 선지자는 지금 다윗에게 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물을 수 있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3. 엔돌에 신접한 여인은 왜 처음에는 변장한 사울을 몰라보았지만 곧 알게 되었는가?

  보통 사람들은 신접한 여인 곧 무당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무당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도 다 자기도 본 것 체험한 것만을 알고 있을 뿐, 자기가 보지 않거나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도 자신의 세계에서 높은 계급을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굳이 현장에 파송받지 않아도, 자기 밑에 있는 영들에게 정보를 입수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울이 물을 데가 없을 때 그가 찾아간 곳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었다. 사울이 왕이 되자 이스라엘 내에서 무당과 박수들을 추방했기에 숨어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울은 변장을을 하고 거기에 들어갔고 또한 무녀에게 자기가 그녀에게 물으러 온 일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때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그때 그녀는 자기에게 물으러 온 존재가 사울 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울 왕 속에 있는 영이 그녀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녀도 깜짝 놀란다.

 

4. 엔돌의 신접한 무당은 변장하고 찾아온 사울을 어떻게 왕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는가?

  엔돌의 신접한 무당과 무당이 불러올린 사무엘이 누구인가? 진짜 사무엘인가 귀신이 변장한 가짜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여인 속에 들어가 역사하고 있던 영(실은 뱀으로 뇌의 혈관을 다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은 사실 계급은 좀 낮은 놈이었다. 그런데 보통 무당들은 자기에게 역사하고 있는 영이 계급이 높기 때문에 손님으로 찾아온 사람이 데리고 온 영에게 물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일로 점치러 왔는지를 금방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물어보지 않아도 이미 정보를 파악한 귀신들이 무당에ㄴ게 알려주기 때문에, 손님들을 그냥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접한 여인은 그가 누군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높은 계급의 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했을 때에 그녀는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사울왕에게 역사하고 있는 영이 타락한 천사들 중에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는 사탄마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울에게 역사하고 있던 영이 자기에게 역사하고 있는 영보다 훨씬 더 계급이 높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탄과 귀신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구약시대에는 아직 사탄의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혹은 천지창조 직후에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말은 틀린 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인 루시퍼가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진행되는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사탄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천지창조 때에 타락하여 그가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아시고 있었지만 아직 하늘에서 쫓아버리지는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사탄마귀를 여전히 악한 일을 실행하는 쪽에 쓰고 있었다. 특히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영을 거두어가신 뒤에는 당신이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역사하게 한 것이다(삼상16:14~16). 여기서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잘 아야 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았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있는 악한 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사탄마귀는 구약시대만 해도 하나님께서 보낸 영으로서,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파송받아 일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 영이 지금 사울 왕에게 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울 왕에게 있던 그 영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다가가서 자신을 사무엘의 모습으로 바꾼 다음에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악령들 중에 높은 계급을 한 귀신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가 있다. 

 

5. 엔돌의 무당이 불러올린 사무엘은 왜 사무엘이 진짜로 온 것이 아니라고 판정할 수 있는가?

  사실 오늘날까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이 진짜 죽은 사무엘인가 아니면 악령인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불려올려왔던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하는 모든 말 가운데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악령들은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잘 맞추기도 한다. 그들이 보았던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은 꼭 가족에게만 들어간다. 그래야 몇 대 전부터 알고 있던 죽은 조상의 정보를 가지고 그의 후손을 속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려 올라온 사무엘(사무엘로 가장한 사탄마귀)은 사울과 사무엘만이 알고 있던 특별한 내용까지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일 곧 "전쟁에 패할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게 될 것이다" 는 것을 정확히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귀신들은 사실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도 역시 과거를 보았고 경험했던 사실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려올라온 사무엘은 미래의 일까지 정확히 예언하였다. 어쩌면 진짜 사무엘이 올라와서 예언한 것처럼 정확했다. 그런데 이 사무엘이 실은 가짜다. 사탄마귀가 자기의 몸을 바꾸어 지금 사울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알아야 할 것은 구약시대만 해도 사탄마귀는 아직 하늘에서 쫓겨난 신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늘 그는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욥1~2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 그때부터 사울에게 역사해온 영이 바로 사탄마귀로서 이제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의 입술을 통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탄마귀는 아직까지 하나님이 부리는 종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만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려올라온 사무엘의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탄마귀를 붙잡아서 쓰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울 왕이다. 사울은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 사울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서 귀신은 그냥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애처로운 모습이 아닐 없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이러한 일은 십계명 중에서 1~2명을 대놓고 어긴 것이 된다. 고로 사울이 무당을 찾아가 물어본 것은 대단히 중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다음날 전쟁터에서 상루은 자신의 두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이 무당에게 물어보아서 되겠는가? 이제는 그러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기를 바란다. 회개하면서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히 시인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다윗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21년 12월 31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