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룻기서강해(07)[최종회] 룻이 낳은 아들 오벳 말론의 아들인가 보아스의 아들인가?(룻4:13~22)_2021-11-16(화)
https://youtu.be/7pC5QoBQQTA [혹은 https://tv.naver.com/v/23595925 ]

 

1. 룻기서는 대체 어떤 이야기인가?

  룻기서는 모압 여인 룻이 기근을 피해 자기 마을에 우거하러 온 유다 지파 베들레헴 사람 말론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고 또한 자기의 시동생마저 죽어 동서와 자기와 시어머니만 남게 되었는데, 다시 자기 민족 사람에게 시집가라는 시어머니의 간절한 권고를 뿌리친 채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다가 좋은 남편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 오벳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2. 보아스는 왜 과부인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나?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동네에 10년 만에 나오미와 룻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 룻은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었다. 따라와 봤자 평생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왔다는 말을 들은 보아스는 참 보기 드문 귀한 며느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룻이 어느 날 자기 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준다. 그리고 자기가 그녀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자라는 알게 된다. 그러나 2순위였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가 자기의 남편이 되어줄 수 없느냐는 청혼을 하게 되자, 그녀를 아내로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그렇지만 기업을 물러줄 제1순위자가 있었기에 물어보았더니 결국 그는 기업을 물어주지 않겠노라고 했기에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으로부터 기업을 사서 주고,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3. 기업 무를 자로서 보아스는 왜 손해날 일을 사서 했는가?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는 원래 보아스가 아니었다. 첫 번째 1순위자가 따로 있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보아스는 제1순위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사, 그가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에게 말했다. 만약 나오미가 내놓은 기업(엘리멜렉의 밭)을 사는 날에는 그녀의 자부였던 룻도 함께 사서 그녀에게 장가들어야 하고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자식을 그녀의 전남편인 말론의 아들로 입적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난다고 하면서 기업을 무를 수 있는 권리를 보아스에게 양도해 주었다. 왜냐하면 기업 무를 자가 나오미와 룻이 가진 밭을 되사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돈도 지출되어야 하며, 룻과 결혼하여 난 첫 번째 아들은 말론의 아들로 입적시켜야 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는 자신에게 손해가 날 것을 예상하고는 도망치듯 가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보아스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보아스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취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댓가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손해날 일이었지만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4. 결혼하여 룻이 낳은 아들은 말론의 아들이 되는 것인가? 보아스의 아들이 되는 것인가?

  룻이 결혼하여 보아스로부터 아들 오벳을 낳게 된다. 그렇다면 룻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과연 말론의 아들인가? 보아스의 아들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오벳은 말론의 아들로 입적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왜냐하면 형사취수제도(신24:8~9)의 말씀에 그러한 내용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율법 규정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신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책에는 오벳은 말론의 아들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보아스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룻기서 기자가 실수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바른 기록인가? 그런데 우선적으로 우리가 알 것은 성경은 틀린 것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사실 성경 말씀은 더하지도 빼지도 말아야 하며, 심지어 틀린 것도 기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이 틀리게 기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현재 우리들은 무엇을 지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형사취수제도를 제1 기업 무를 자는 좁게 보았고, 보아스는 넓게 보았다는 점이 있다. 그래서 기업을 물러주려 할 때에는 지파의 땅이 다른 지파 땅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가까운 친족이 그 기업을 물러주어야 했다. 하지만 형사취수제도는 사실상 보아스가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수는 반드시 자신의 남편의 동생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라고 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신25:5~6). 그런데 보아스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은 말론의 형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형사취수제도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동네의 판결을 담당하던 동네의 장로들의 의견은 달랐다. 비록 보아스가 나오미가 내어 놓은 기업을 사서 도로 줄 뿐만 아니라 나오미의 맏며느리였던 룻을 아내로 취한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낳은 아들은 말론의 자식이 아니라 보아스의 자식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장로들의 결정을 다시 보라.

룻기4:11~12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그렇다. 장로들은 룻이 보아스에게 시집가서 보아스의 가문을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축복했던 것이다. 그녀가 낳을 씨도 보아스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판결을 이미 내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룻이 낳은 아들은 말론의 아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 법적으로는 보아스의 아들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룻의 남편인 말론의 입장에서 보면,  보아스는 말론과 함께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은 형제가 아니라, 아예 가문이 다른, 다른 집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보아스가 장가간 것이 아니라 룻이 시집온 것이라고 해야 맞았던 것이다. 

 

5. 오벳이 보아스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2가지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룻이 낳았던 오벳은 겉으로는 말론의 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제 법적으로는 보아스의 가문에서 태어난 보아스의 아들로 입적되었다(룻4:18~22). 왜냐하면 보아스는 말론의 친형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을 아내로 취한 것은 형사취수제도를 광범위하게 적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는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보아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수용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 앞에 다음과 같은 2가지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진정 복을 받을 사람은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자기와 상관이 있을 수 있는 어떤 끈을 사용해서라도 그 둘을 연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순위자는 그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둘째, 보아스처럼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진정 남을 도와주려는 자는 결국 그 복을 자신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벳이 엘리멜렉이나 말론의 족보에 등장하지 않고, 보아스의 족보에 등장하는 두 번째 이유라고 할 것이다.

 

2021년 11월 16일(화)

정병진목사

 

 

2021-11-14(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룻기서강해(06) 왜 보아스는 손해 날 것을 스스로 선택했는가?(룻4:1~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N16RviI1Lw [혹은 https://tv.naver.com/v/23595140 ]

 

1. 들어가며

   룻기서에 보면 설명이 잘 안되는 부분들이 더러 있다. 그중에 룻기서 4장에 나오는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로서 제1순위자가 처음에는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준다고 말했다가 다시 번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에 처음에는 나오미가 내놓은 기업을 사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사지 않겠다고 바꾼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게 하면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해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 사람의 기업을 손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가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나기 때문에 나오미의 밭을 사지 않겠다고 한 것은 보아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닐 것이다. 제1순위자가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나는 일이었다면 역시 보아스에게도 아마 똑같이 손해가 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보아스는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나선 것인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보아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왜 그가 훗날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는지까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고엘제도와 형사취수제도(계대결혼제도,수혼제도)는 의무였는가?

  룻기서에서 기업 무를 자였던 보아스와 룻의 결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고엘'제도와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형사취수제도(=계대결혼제도, 수혼제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룻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고엘제도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고엘제도란 형제가 가난해져서 기업을 팔았을 때, 그에게 가까운 형제가 그 판 것을 도로 사서 돌려주는 제도를 가리킨다(레25:25). 이때 '기업을 사서 도로 주는 자'를 '고엘(구속자=기업 무를 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엘의 우선 순위는 그의 형제다. 그리고 만약 기업을 물러줄 형제가 없다면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 순이다(레25:48~49). 그런데 이때 조건이 하나 있다. 기업 무를 자가 무를 힘(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을 사 줄 능력이 없으면 기업을 물러주고 싶어도 그렇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형사취수제도'를 알아 보자. 형사취수제도라는 말은 형이 죽었을 때에 그의 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 주는 제도를 가리킨다(신25:5~10, 마22:24). 이때 동생은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서 형의 아들이 되게 하여 기업을 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부터는 자신의 아들이 된다. 이러한 법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 여자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고, 자녀없이 홀로 불쌍하게 사는 미망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압 여인이었으나 유다 지파 베들레헴 사람으로서 엘리멜렉의 장자 말론의 아내가 되었으나 과부가 되었던 룻의 경우는 고엘제도와 수혼제도도 같이 필요한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3. 나오미의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는 왜 기업을 산다고 했다가 사지 않겠다고 번복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오미가 전남편인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들인 말론과 기룐의 기업을 팔려고 내놓았을 때, 왜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로서 제1순위자였던 아무개는 처음에는 그 기업을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가 왜 포기하고 말았는가? 그는 포기할 때에 자기의 기업에 손해가 나는 일이기 때문에 안 하겠다고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는 자신이 손해를 보는 고엘이 되지 않겠다고 한 것인가?

  먼저, 그가 나오미가 내놓은 기업을 사겠다고 했던 이유부터 알아보자. 그는 나오미의 죽은 남편이었던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친족이 처음에는 밭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오미는 나이가 많은 과부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재혼을 해도 결코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룻1:11~13). 그러므로 자기가 나오미가 내어 놓은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기업을 사서 그녀에게 준다고 할지라도 어차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그녀의 모든 기업은 당연히 자신의 차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얼른 그 기업을 물러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보아스가 말했다. 나오미로부터 기업을 살 때에는 룻도 같이 사서 룻과 결혼하고 그 낳은 자식을 말론의 아들로 입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오미의 기업의 제1순위자는 금방 마음이 변해 버렸다. 왜냐하면 나오미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룻과 결혼해야 하며, 그녀가 자기의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자기의 자식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사 준 기업도 말론의 아들의 몫이 되어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1순위자는 금방 그 밭을 사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가 버린 것이었다. 

 

4.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나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왜 나오미가 내놓은 기업을 사겠다고 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오미의 기업의 제1순위자 다음 순번이었던 보아스는 왜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날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나오미의 기업을 되사주기로 결정하고 동시에 룻과 결혼할 것도 결정한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는 비록 자신은 나이가 많았지만 현숙한 아내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고엘이 될 수 있는 친족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로는 제1순위자인 아무개와 보아스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미의 밭을 살 수 있고 룻을 아내로 취할 수 있는 고엘으로서 자격을 갖춘 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왜냐하면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아직 결혼하지 못한 미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결혼해서 아내가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과부를 취하여 두 번째 부인으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과 결혼할 수 있는 총각이어야 하고, 기업을 사 줄 만한 부자여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1순위자는 자신은 고엘이 되지 않겠다고 도망치듯 가 버렸다. 그 이유는 룻을 자신의 아내로 취하고 싶은 생각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땅만 차지할 욕심이 있었을 뿐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달랐다. 자기의 밭에 보리 이삭을 주우러 왔던 룻과 이미 안면이 있었고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어 그녀에게 대해 아주 좋은 감정과 평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자신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달라고 청혼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눈이 볼 때, 그녀에 대한 그의 평가는 한마디로 '현숙한 여인'이었다(룻3:11). 그럼, 그녀가 현숙한 여인이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솔로몬이 썼던 잠언 31장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적어도 3가지 조건을 가진 자여야 한다. 첫째는 근면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한다(잠31:13~16). 둘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야 한다(잠31:29~30). 셋째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라야 한다(잠31:31). 그런데 룻은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기업에 손해를 보더라도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어 했던 것이다. 

  둘째, 그에게는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히브리어로 '헤쎄드'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율법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겨진 자와 버려진 자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셨는데, 보아스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신24:19~21). 그러므로 이삭을 주우러 나온 그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환들에게 곡식을 줍고 있는 룻을 위해 이삭을 조금 떨어뜨려 놓으라고도 했었고, 룻에게는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고 했으며, 식사할 때에는 볶은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룻2장).

신24:19-21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5. 나오며

  그렇다. 룻은 자신의 재산에 손해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룻이 현숙한 여인이었기에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픈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이 누구의 아들이 되든 아내를 얻기 위한 마음에 기꺼이 댓가를 지불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심성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헤쎄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꺼이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기업을 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부였던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 인간의 기업 무를 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정확히 예표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남편을 잃어버려 과부가 되어 있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기꺼이 우리의 남편이 되어 주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분명히 손해가 날 것이 분명한 일이긴 하였지만 그분이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버려진 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내면에서는 가난하고 잃어버린 것이 많아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 대하여 헤쎄드의 마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영원히 버림받은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우리의 신랑이 되어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헤쎄드의 마음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평생 그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일평생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드리워진 과부의 운명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2021년 11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술람미여인과 솔로몬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둘 다 우리 죄인인 인간과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에 관한 야이기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이방인인 죄인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요, 후자는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어서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었고, 거룩한 신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 에 나오는 메시지에는 그 질문에 관하여 계시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2021-11-12(금) 금요기도회
제목: 룻기서강해(05) 룻의 청혼,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룻3:6~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ddANXzL8xxs [혹은 https://tv.naver.com/v/23599766 ]

 

1. 들어가며

  룻기는 아가서와 상당히 비슷하다. 왜냐하면 둘 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 성도들 간의 결혼을 언급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가서에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룻기서에서는 보아스와 룻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둘은 성격상 하나님의 신부가 될 두 종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중에 아가서에서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은 비록 시골 처녀로서 유대인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의 신부를 예한다. 그렇다면 룻기서에서 신부는 어떠한가? 그것은 그녀가 과부이면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둘 다 신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결혼에 골인한 것은 똑같다. 신구약성경의 주된 메시지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처음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오지만 나중에는 이방인인 교회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룻기서가 아가서에 비하면 훨씬 더 교회 중심적이자 신약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룻과 보아스 간에 일어난 청혼 소식을 접하면서, 누가 먼저 상대방에게 청혼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왜 상대방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 주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2. 보아스와 룻은 누가 먼저 청혼을 했는가?

  보아스는 유다 베들레헴 지방의 유력하고 덕망는 재력가였다(룻2:1). 더군다나 그는 신앙도 매우 좋았다(룻2:4, 12). 그런데 어느 날 자기의 동네에 룻이 들어온다. 시어머니를 따라온 며느리였는데 그녀는 같은 동족이 아니었다. 모압인으로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룻2:6,10). 그렇지만 보아스는 그녀에 대해 은혜 베풀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그녀로부터 완곡하고도 부드러운 청혼을 받게 된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룻3:9)"라고 말한 것이다. 이 표현은 룻이 보아스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다는 청원으로서, 자신을 아내로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다(겔16:8). 이것은 보아스가 아니라 룻이 청혼을 먼저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룻이 먼저 청혼을 하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한 4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보아스야말로 룻이 시집왔던 무너진 엘리멜렉의 집안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두 명 중의 한 명의 고엘(기업 무를 자)이었기 때문이다(룻3:9, 2:20).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우리가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게 되고 그 소문의 진실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만이 내 인생 문제의 유일한 결자인 것을 믿는것과 같다고 하겠다. 

  둘째, 그동안 부딪혀서 경험했던 보아스의 사람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행동이 남편감으로서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첫째로, 자상한 남자였다. 자기가 부리는 사환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인격체로서 대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룻2:4). 둘째로,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선한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룻2:10,20), 셋째로는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였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의 계명에 따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선대할 줄 알고 있었으며(신24:19~24, 레19:9~10), 자기가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요 계대 결혼 제도를 알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그녀는 자부를 안식할 수 있는 곳에 시집보내고 싶어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룻3:1).

  넷째, 마지막으로는 그녀가 이삭줍기를 통하여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과 영구적으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보아스를 남편으로 두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룻이 이삭줍기를 통해 시어머니를 섬기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말 시어머니를 잘 모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베들레헴의 유력한 재력가이자 기업 무를 자에게 시집가는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룻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시어머니 상의하였고 시어머니의 의견을 따라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룻3:1~6). 그리하여 룻은 보아스의 마음이 진정 룻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더욱이 그 작전(?)을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밤시간을 이용하여 조용히 진행하였다. 

 

3. 왜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받아 주었는가?

  그렇다면 왜 보아스는 이방인이자 과부였고 보잘 것 없었던 룻의 청혼을 받아 준 것인가? 보아스는 사실 자기 동네에 들어온 과부 룻에 대해 관심이 있기는 있었다. 왜냐하면 보아스 자신에게 알려진 그녀에 대한 소문 곧 그녀의 삶과 신앙이 그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소문은 이렇다. 첫째로, 그녀가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실 모압 지방에서 살고 있을 때에, 자기 동네에 임시로 거주하러 온 외국인을 만나 결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잘 공경하고 모셨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잘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녀는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서인 오르바처럼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지만 시어머니를 떠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권유처럼 자신의 고향에 남아 재가하여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통해 믿게 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자기 민족의 우상신인 그모스를 섬겨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죽은 남편의 뒤에 끝까지 남아서 시어머니를 섬기고 있는 룻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의 날개 그늘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왔다는 것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룻2:11~12). 그리고 셋째는 그녀가 젊은 나이(약 23세 이쪽 저쪽이었을 것이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시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픈 열망에 따라 시어머니의 말을 청종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룻3:10). 그렇다. 그녀는 당장 눈에 보이는 쾌락을 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미래를 바라보며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보아는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를 아내로 취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4. 보아스가 룻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보아스가 룻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녀의 집안에 고엘(구속자, 기업 무를 자)이 어 주는 일이었다. 첫째로, 나오미가 팔려고 내놓은 기업을 사 주어 그 기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둘째, 그렇게 마음씨가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여인을 자신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사실 보아스 자신도 나이가 많아 젊은 처자들이 마음을 쓰지 않는 판국이었기에 보아스는 이번 기회에 장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룻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부인 자신을 내로 맞이해 준다면 평생 안식처를 얻게 되는 것이니 만큼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좀 있다 더 살펴보겠지만 장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친족이 되시어 오셨는지를 알게 해 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5. 죄의 고된 노역에서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룻기서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늙은 늦깍이 총각 보아스가 과부인 모압 여인 룻을 만나 결혼했다는 것을 후대에 전하려고 기록한 책일까? 만약 그것이 이 책을 남긴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이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게 하신 이유는 이 책을 읽을 모든 독자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모든 성경의 기록은 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요5:39), 우리의 신랑 예수님과 그의 신부인 우리들의 결혼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룻이 먼저 보아스에게 청원을 했던 사실은 분명한 뜻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요청하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것으로서 이 이야기는 어떤 영적인 교훈을 함유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 인간은 자신의 살 길이 막막해져서 소망이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가 주님을 붙잡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그러한 상태에서 가만 있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핑계를 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두고서 하나님께 원망의 화살을 돌리는 어리석음의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이야기는 구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 우리 인생의 절망적인 상태를 누가 가장 잘 알고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능자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오직 보아스로 예표된 우리 주님 뿐이시다. 결국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구원받느냐 마느냐 하는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오직 그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가 겸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만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여, 나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소서!!!" 

  셋째, 오늘날 구원을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내가 당신을 믿기로 결정했으니, 당신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겠소그러나 지금 나를 어디 한번 구원해 보시오"라고 말이다. 그러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과거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매우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의 모습은 적어도 그녀 모습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그녀는 보아스에게 어떻게 자신을 구속해 달라고 부탁했는가? 그녀가 처음 이삭을 주러 나갔을 때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그 보리 밭의 주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가? 그녀는 그때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낮추며 엎드리며 말했다. "나는 이방 여인에 불과한 사람인데도, 왜 당신은 내게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나를 돌보아 주시나이까(룻2:10)"라고 했다. 그때 보아스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잘해 주는 것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분에게 "나의 아도나이(주인)"라고 칭하면서, "나는 당신의 하녀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겸손히 말했던 것이다(룻2:13).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쓰러져 가는 가문을 건져낼 수 있는 분이 보아스라는 것을 진실로 아는 자로서 말도 했고 행동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보아스는 룻의 청원에 대해서 어떠한 대답을 했겠는가?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3:11). 그렇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고엘이 되어 주겠다고 기꺼이 응답한 것이다. 

 

6. 나오며

  오늘날 주님께 구원을 바라고 요청하는 우리의 모습은 실로 어떠한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응당 당신이 나를 책임져 줘야 할 것이 아니냐는 태도는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 앞에 엎드릴 존재일 뿐, 그분 앞에 고개를 쳐들고 왜 내가 부탁한 것을 안 들어주느냐면서 따질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먹을 것조차 걱정해야 할 처지였고, 영원히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이나 주러 다닐 판이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친족이 되어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땅으로 오셔서,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과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건져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해 주셔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택하신 그분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로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우리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를 선택하신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와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 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도 오직 우리 주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뿐이다. "주 예수여, 나로부터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받으소서!"

 

2021년 11월 12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룻기서강해(04) 우연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가장 위대한 섭리의 시간(룻1:22~2:7)_2021-11-12(금)

https://youtu.be/WbeI3iujpYU [ 혹은 https://tv.naver.com/v/23599444 ]

 

1. 인생의 성공의 잣대는 무엇인가?

  인생의 성공 잣대는 잘 사는 것이요 건강하게 사는 것일 수 있으며, 자녀가 잘되는 것일 수 있다. 재력자와 권력자가 되는 것,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자녀가 출세하는 것 등은 인생 성공의 잣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생 성공의 잣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보이는 물질세계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된 성공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영원한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곧 인생 성공의 열쇠는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며 결국에 나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오미는 처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으로 이주할 때에는 풍족하게 나왔으나 다시 고향으로 갈 때에는 비어 돌아가게 되었으니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그녀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 중에 가장인 자신의 남편을 잃어버렸고 자기의 두 자식을 잃어버렸으니 확실히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녀는 2가지를 붙듦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째 그녀는 회개를 붙들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녀는 효심이 가득하고 신앙이 좋은 며느리인 룻을 데리고 돌아왔으니 그녀는 진짜 복된 인생으로 바뀔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룻이 이삭을 주우러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인가?

  시어머니와 룻이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왔지만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그들에게 당장 무엇이라도 먹을 것이 필요했기에, 며느리 룻은 곧바로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나간다. 왜냐하면 그때가 마침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초실절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날 찾아간 곳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유력한 자였던 보아스의 밭이었다. 보아스는 당시 재력있는 유지였다. 그래서 그는 큰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로 그해에 추수하는 일들을 직접 보려고 자기의 밭으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그 밭에 룻이 와서 이삭을 줍고 있었다. 성경은 말한다.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은 '우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곳에는 '마침' 보아스가 와 있었다고 말이다(룻2:3~4).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나고 있는 귀중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3.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리는 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가?

  룻이 우연히 그 밭에 갔으나 보아스는 일부러 그 밭에 나갔다. 어찌되었든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이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 보아스는 다른 과부들도 와서 이삭을 줍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와서 이삭을 줍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룻은 달랐다.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모압 지방에서도 괜찮은 집안 사람이었기에 때문에 그녀의 옷차림과 움직임은 전통적인 베들레헴 사람과는 조금 달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젊었었다. 예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금방 보아스의 눈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를 사환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모압 지방 사람이었는데 말론에게 시집와서 남편이 죽은 뒤에 시어머니를 따라온 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두고 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이 일이 장차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따르려는 이방인들을 취하여 자신의 아내를 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한 밭에서 만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가지였다. 이것들이 다 맞아 떨어져서 룻과 보아스가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 그때가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에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기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룻과 보아스는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둘째, 보아스는 나오미가 내놓은 엘리멜렉의 밭을 살 수 있을 만한 재력가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 밭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보아스와 룻은 못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셋째,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율법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고 한다면 룻을 현숙한 여자이자 매우 신앙이 돈독한 여자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넷째, 그의 마음이 약자들을 배려하는 긍휼과 인애(헤쎄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부자라고 해서 그의 인심이 후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신앙도 좋았던 보아스는 인품도 훌륭하여 약자들을 배려할 줄 아는 자비로운 자였던 것이다. 다섯째, 아마도 그가 나이는 좀 들었겠지만 그때까지 총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엘리멜렉의 밭을 살 수는 있어도 룻을 부인으로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하나님의 간섭이요 섭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4. 룻과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실 룻과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둘이 만나게 하여 결혼시킴으로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고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만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당시 룻과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첫째, 먼저 보아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었고, 그 마을의 유력한 재산가였으며, 자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도 귀히 여길 줄 아는 부드러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그는 긍휼(헤쎄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약하며 아프고 불쌍한 자를 잘 돌아보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오미와 룻이 가진 기업(토지)을 물러줄 수 있는 능력가로서, 순번이 2번째인 사람이었다. 그러면, 룻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 그는 과부였고, 이방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격이 고결하였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며,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낮은 곳에 내려가서 일도 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순종적이었으며, 효심이 가득했고, 무엇보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고향과 친적과 아비집이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이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으며,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앙이 좋았던 사람이었기에 서로가 의지가 되었고 기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5. 신앙하는 영적인 감각이나 신앙의 결단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신앙이 좋았던 보아스가 나중에 신앙을 갖게 된 사람 룻과 만났다는 것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아닌가 생각되어 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보아스나 룻이 서로의 처지를 알고 있었지만 둘 다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사실 보아스라는 이름과 룻이라는 이름 자체가 들려주는 교훈도 상당하다. 사실 성경에서 우연하게 등장하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보아스의 이름을 보자. '보아스'라는 말은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변 나라의 말로 풀이하면 '복된 자, 힘센 자'이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어의 어원으로 풀어보면 그 이름의 뜻은 '재빠름, 민첩함'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영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을 때에, 즉시 자기의 것이 되게 하는 자는 그것에 대해 민첩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보아스는 이러한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룻'이라는 이름은 '친구' 혹은 '우정'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녀는 처음부터 결코 시어머니를 배신하거나 떠날 수 없는 사람으로 아예 안배가 되어 있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영적으로 민감하여 하나님이 보내시는 싸인을 금방 헤아릴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년 11월 12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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