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1(수) 수요기도회

제목: [골로새서강해(05)] 가까운 인간관계의 윤리와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인사말(골3:18~4:1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1ZPTlgdkPoc [또는 https://tv.naver.com/v/48263532]

 

1. 들어가며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다(골1:7). 그런데 그는 골로새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골로새 옆에 있는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에도 교회를 세운 것 같다(골4:13). 그런데 그 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이단 사조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에바브라에게서 직접 듣고 이것을 바로 잡고자 편지를 써서 두기고의 손에 들려 보낸다. 그때 감옥에서 만나서 개종한 신실한 형제 오네시모에게 빌레몬서를 들려 보낸다. 두 사람을 골로새로 보낸 것이다. 오늘은 골로새서의 마지막 시간으로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 중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지켜야 할 윤리 문제와 기도 부탁과 몇 가지 권면 그리고 로마 감옥에 바울과 같이 갇혀 있는 동료들과 골로새교회 성도들에 대한 인사말을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 간에 어떤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며 더불어 처음에는 바울에게 무익했던 사람이 나중에 유익한 사람이 되고, 처음에는 유익했던 사람이 나중에 무익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만나게 될 것이다. 

 

2. 골로새서 3:18~4:18의 위치는 어떠한가?

  골로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도입부다(골1:1~12). 도입부에서는 골로새서의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축도 및 바울의 감사기도와 중보기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본론부(골1:13~4:6)에서는 바울이 쓰고 싶어했던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은 본론부에서 2가지를 언급한다. 전반부(골1:13~2:23)는 교리를 언급하고, 후반부(골3:1~4:18)에서는 생활을 언급한다. 바울은 본론의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월성을 언급하고, 뿐만 아니라 이단 사조를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본론의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을 언급한다. 그것은 성도들은 위엣 것을 찾아야 하며(골3:1~4),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권면한다(골3:5~11). 그러고 나서 새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 언급한다(골3:12~17). 이어서 바울은 가까운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언급하고(골3:18~4:1), 기도생활과 불신자와의 관계와 언어생활에 대해 언급한다(골4:2~6). 그리고 마지막 종결부(골4:7~18)에서는 바울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의 근황과 골로새교회 성도들에 대한 인사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고로, 오늘 배우게 될 골3:18~4:18의 말씀은 가까운 인간과 지켜야 할 아름다운 윤리와 아울러 개인적인 권면과 그리고 문안 인사라고 정리할 수 있다. 

 

3. 골로새서의 핵심 주제와 보조 주제는 무엇인가?

  골로새서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독론(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바로 골로새서의 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 서신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골로새교회를 개척했던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단 사조들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4가지 이단 사조들 곧 지혜를 강조하는 초기 영지주의, 의식법 준수를 추구하는 유대 율법주의, 천사숭배를 강조하는 신비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금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에 대하여 듣고 그러한 세력들을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리스도는 지혜를 추구하는 영지주의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신 분으로서(골1:19),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요(골2:3), 더욱이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골2:9). 둘째, 그리스도는 의식법을 통해 의로움을 추구하는 율법주의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대의 의식법들 곧 먹고 마시는 음식법과 안식일과 초하루법을 포함한 절기법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단지 그림자일 뿐, 실체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골2:16~17). 셋째,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숭배하고 자의적으로 겸손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을 창조하신 분, 특히 높은 계급의 천사들을 창조하신 분이자(골1:16), 이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골2:10). 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떨어져 나간 타락한 천사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그것들을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신 분이기 때문이다(골2:15). 넷째, 그리스도는 음식 절제를 통해 금욕을 추구하는 금욕주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음식 절제를 통해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경건을 가져다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로새서를 찬찬히 읽어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보조 주제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메시지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일꾼으로 세웠다고 간증했다(골1:25).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이란 바로 성도들 몸에 들어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이신데(골1:27), 이것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다(골1:26). 그러므로 골로새 성도들이 진정 알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들이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골1:28, 2:2).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골로새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영지주의보다도 뛰어나고, 율법주의보다 뛰어나며, 신비주의보다 뛰어나고, 금욕주의보다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잘 전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골4:3).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 속에 담고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4. 가까운 사람들끼리 지켜야 할 기본적인 윤리는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그의 편지 후반부에 배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아름다운 윤리가 있고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때 가까운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세 가지 방면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에베소서를 읽어 보면 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의 확대판이라고 할 정도로 유사하면서 더 깊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내들과 남편들은 서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골3:18~19). 바울은 아내들에게는 자기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그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고전11:3).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며,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고전11:8~9).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처럼, 남편과 아내의 질서를 위한 것으로서, 하와가 자신의 남편인 아담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뱀의 말을 들어서 죄를 지은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남편들에게는 자기의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고 아내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줌과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녀들과 아버지들은 서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골3:20~21). 바울은 먼저 자녀들에게 모든 일들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사람에게 자기의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주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통해서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즉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서 자식이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익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들 곧 부모는 자기의 자녀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 자기 자녀를 화나게 해서는 아니 되며 그들을 낙심케 해서도 아니 된다고 언급한다. 

  셋째, 종들과 상전들은 서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골3:22~4:1). 바울은 종들이 자기의 주인에게 지켜야 할 윤리가 있고, 주인은 자기의 종들에게 대해야 할 법도가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앞의 두 관계보다 더욱더 강조한다. 왜나하면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는 두 사람 중에 하나가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였기 때문이다. 그는 빌레몬으로 떠나 도망쳤는데 바울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다. 이에 먼저 바울은 종들은 자신의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그리고 순종을 해도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주를 경외하는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차 천국에서 받을 보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햐면 종들이 주인을 잘 섬김으로 우리 주 예수님을 잘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상전들에게는 자신의 종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할 것을 권면한다. 자신의 종들이라고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육신의 상전들이라도 하늘에 가면 자기 위에 상전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던 두 사람은 누구인가?

  바울은 이제 끝인사로서 자기와 함께 있다가 골로새교회에 보내어지는 두 사람을 언급한다. 한 사람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만나서 함께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갔던 아시아 사람 '두기고'다(행20:4). 두기고는 그때부터 바울과 로마 감옥까지 함께 여행하였는데, 그가 얼마나 신실한 일꾼이었는지, 바울은 그를 특별히 골로새교회를 위해 쓴 편지 전달자로서 선정했던 것이다(골4:7~8). 바울에게 두기고는 정말로 사랑하는 형제였으며, 신실한 일꾼이었으며, 주 안에서 동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또 한 사람을 골로새교회에 보내는데, 그는 골로새교회의 장로(?)격인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망친 '오네시모'였다(골4:9). 그렇지만 그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개종하여 신실하고 사랑받는 일꾼이 되었기에, 그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그를 잘 받아달라고 개인적으로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기 옥중 서신의 하나였던 '빌레몬서'다. 그러니까 두기고가 골로새서를 가지고 골로새로 갔다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서를 들고 골로새로 간 것이다. 

 

6.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함께 일했던 동역자 세 사람은 누구인가?

  바울이 로마에 잡혀갔을 때에 바울은 실로 외로웠을 것이다. 특히 자신과 같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주변에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가 있으면 그러한 사람을 더욱더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진정 바라는 것 중의 하나는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빨리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구원받아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그 주변에 많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에게 따라붙었던 유대인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서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 그리고 유스도로 일컬어지고 있는 '예수'였다(골4:10~11). 이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을 위로해 주었다. 자신을 끝까지 따라오면서 하나님의 왕국 건설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7. 바울에게 찾아온 에바브라와 골로새교회의 후임자 아킵보는 대체 누구인가?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두란노 서원에서 배워서 자기 고향에 복음을 전파해 주었던 '에바브라'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였기 때문이다(골1:7). 그런데 에바브라는 이웃 도시였던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교회도 같이 개척하였던 것 같다(골4:13). 바울은 그들에게 온 에바브라가 얼마나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었는데, 이는 골로새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골4:12). 그리고 그가 로마까지 와서도 얼마나 세 교회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역시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존재이자 가장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바울은 끝으로 빌레몬의 아들인 '아킵보'에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주 안에서 삼가 이루라고 권면하였다(골4:17). 이는 아킵보가 에바브라의 뒤를 이어 골로새교회를 목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 마가 요한과 데마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울의 끝인사 가운데 등장하는 두 사람 곧 '마가'라고 하는 '요한'과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다. 이 두사람은 서로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먼저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에 같이 따라갔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생을 안 해 본 탓인지 선교 중 힘들다고 그만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에,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려갈 것인가를 놓고 바나바와 크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어려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잘 훈련시켜 사역자가 되도록 2차 전도여행에 데려가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을 수행자로 두는 문제로 인하여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싸우고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바울이 이제 로마에 감옥에 갇힌 이후, 마가 요한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함께 바울에게 아주 귀한 동역자가 되어 있었다(몬1:24). 그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마가 요한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바울도 과거의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뒤로 하고 그를 동역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가 요한이 베드로를 따라 로마까지 왔고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해 준 사실이 바울의 귀에 들렸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바울이 잠시 풀려났다가 2차로 감옥에 갇힌 후, 순교하기 직전에 썼던 디모데후서에 따르면, 마가 요한은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존재라고 언급되어 있다(딤후4:11). 마가 요한은 당시에 에베소교회까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의 평가에 있어서 가슴 아픈 사람이 한 사람이 나온다. 그는 골로새서를 보낼 때만 해도 바울에게 신실한 동역자였던 '데마'라는 인물이다(골4:14, 몬1:24). 데마는 아마도 데살로니가 사람 같은데, 아마도 3차 전도여행의 끝무렵에 바울 전도팀과 합류하여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따라갔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야 할지 모르는 감옥생활이 힘들었는지, 그만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가 버렸다(딤후4:10). 그런데 그는 바울의 1차 감옥생활 때만 해도 같이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의 2차 감옥생활 때에 그는 바울을 떠나갔다. 왜 데마는 바울을 떠나갔던 것일까? 누구에게나 복음 전파자로 고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적인 나이가 적은 사람은 복음 전파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힘겨울 수 있다. 그리고 청년 시절의 마가 요한처럼 고생을 안 해 본 사람이었다면 복음 전파의 직무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세상의 안락함과 평안함을 위하여 복음 전파의 직무를 저버리고 떠나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년의 바울을 그냥 놔두고 그를 떠나간 것 만큼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천국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데마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9. 의사 누가와 눔바는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 바울의 선교여행에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의사 누가였다(골4:14). 그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만났던 사람으로서, 아마도 안과 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눈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만나서, 그만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바울의 선교여행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사역하다가도 잠시 바울의 명령을 따라 떠나 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의사 누가는 거의 모든 시간을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울과 함께 겪었던 복음 전파 이야기를 전기 형식으로 쓸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이며, 그후에 예수님의 일대기를 전해 듣고 글로 남긴 것이 바로 '누가복음'이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바울의 선교활동을 위해 일평생 헌신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고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고마운 인물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가 아마 의사 누가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라고 불렀다(골4:14).

  그리고 바울은 인사말의 끝무렵에 골로새교회의 성도였던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녀는 '눔바'라는 여인이다(골4:15). 그녀는 골로새교회의 성도였는데 자신의 집을 교회로 쓰도록 내 준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내 주어 복음 전파의 장소로 제공했던 빌립보 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와 같은 여인 같다. 그리고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이었을 때 고린도에서 만나서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어 준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 세상에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헌신한 인물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그들 때문에 복음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 나오며

  바울은 1차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들었던 골로새교회의 개척 소식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파의 굳은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특히 에바브라가 그에게 와서 들려준 개척 교회의 이야기는 바울로 하여금 정말 가슴을 뛰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골로새교회가 그만 이단 사조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은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보낸다. 마치 자기가 개척한 교회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을 골로새서를 통해서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위협했던 세력들을 향하여 바울은 하나씩 하나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믿고 따르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탁월한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를 가리켜 사람들은 '기독론'의 교과서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누군지에 관하여 그토록 짧은 서신 안에 이렇게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골로새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그전에 보내어진 라오디게아서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면 우리는 더더욱 놀라운 영적 비밀들을 알 수 있었을텐데, 아쉽지만 라오디게아서는 현재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골로새서에 기록된 말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 세력에 맞설 수 있으며, 유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금욕주의 세력에도 맞설 수가 있다. 이 세상에는 주 예수보다 더 뛰어난 것은 정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예수님만을 배우고 주 예수님만을 자랑하자. 그리고 그분만을 전하자.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024년 02월 21일(수)

정보배목사

2024-01-31(수) 수요기도회

제목: [골로새서강해(04)]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그리고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바꾸는 법(골3:1~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1gtjHeXbf64 [또는 https://tv.naver.com/v/48258893]

 

1. 들어가며

  골로새서는 어떤 책인가? 한 마디로 그리스도론에 관한 책이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월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잘 파악할 수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놀라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이라고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가 바로 골로새서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골로새서는 교리적인 말씀만 기록한 책이 아니다. 이어서 실생활에 관한 말씀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골로새서 3:1~17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 실천적인 덕목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골로새서 3:1~17의 위치와 내용은?

  골로새서는 크게 3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는 도입부(1:1~12)와 본론부(1:13~4:6)와 종결부(4:7~18)로 나눌 수 있다. 이중에서 본론부는 또한 크게 2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반부(1:13~2:23)는 교리적인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이단 사조에 대한 경계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3:1~4:6)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부분으로서, 그리스인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 말씀인 골로새서 3:1~17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3:1~4)은 땅의 것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추구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3:5~11)은 땅의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옛 사람의 습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셋째 부분(3:12~17)은 위에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새 사람의 신앙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3. 위에 것과 땅의 것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성도는 이것들 가운데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바울은 신앙인의 삶의 실천 덕목으로서 '위에 것들과 땅의 것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위에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골3:1~2). 왜냐하면 땅의 것들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것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것들에 대해 항상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치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세례의 연합의 교리 곧 동일시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에 우리도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롬6:3~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는 나의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롬6:6). 이는 죄를 짓기 좋아하는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자신은 새 사람이 되었으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된 후에 위에 것들을 생각하고 땅의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날마다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간주함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롬6:11). 

  특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인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주는 영을 받아 산 자가 되었는데, 이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말했다(골3:3).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밖에서 보았을 때는 잘 모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있지 않는 것이 아니니,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에 우리들도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골3:4). 

 

4. 땅의 것으로서 옛 사람의 성품과 행실들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버렸던 옛 사람의 성품과 행실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머물러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 안에 받아들인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땅에 있는 지체를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했다(골3:5~6). 그렇다면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땅에 있는 지체들 곧 육체를 따라가게 되면 어떤 성품상의 열매를 맺게 되고 어떤 말과 행동의 열매를 맺게 되는가? 바울은 이것에 대해 5가지 성품상의 열매를 언급하였고, 이어서 5가지 행위상의 열매를 언급한다. 

  첫째,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옛 사람의 것을 생각하면 옛 사람의 성품상의 열매로서, 음란(음행)과 부정(불결함)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의 5가지 열매가 계속해서 나타난다고 말했다(골3:5). 특히 그중에 탐심은 우상숭배와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골3: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새 사람이 되었다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땅의 것에 두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위에 것에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에 둔 영은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하지만, 생각을 육체에 두면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롬8:5~6). 

  둘째,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옛 사람의 것을 생각하면 옛 사람의 행위상의 열매로서, 분함(분노)과 노여움(격동)과 악의(나쁨)와 비방(중상모독)과 부끄러운 말(논설), 특히 거짓말이라는 5가지 열매가 계속해서 나타난다고 말했다(골3:8).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것들을 날마다 옷을 벗듯이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옛 사람의 열매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꾸 벗어버려 자기에게서 옛 사람의 열매가 축적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5. 옛 사람의 삶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

  이어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옛 사람의 삶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첫째는 옛 사람과 그 사람의 실행들을 무장해제시켜야 한다고 했다(골3:9).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더 이상 그것이 우리 자신을 주장할 수 없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날마다 옛 사람의 옷을 벗겨버려서 무장해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장해제시킨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펰듀오마이'라는 동사로서, '옷을 벗어버리다', '무장해제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딱 2번 나오는 단어로서, 골2:15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라는 문장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러니까 골2:15에서는 이 단어가 '무력화하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 뜻은 '무장해제시키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옛 사람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를 무장해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옛날에 전쟁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행진하면서, 적을 포로로 붙잡아 개선 행진에 동참을 시킬 때에, 적의 장수들의 옷을 다 벗겨버림으로 그들이 어떤 계급을 지녔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적의 장수라도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가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장수로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즉 나의 옛 사람이 이미 패배하여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공포하는 것을 날마다 지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새 사람을 옷입어야 한다고 했다(골3:10). 이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승리자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옛 사람의 성품들이 그대로 묻어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서 새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의 옷을 늘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따라서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옷을 입는 것은 생각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옛 사람이나 타고난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를 죽음에 넘기는 것은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에게 늘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는 새 사람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6. 하늘의 것으로서 새 사람은 어떤 성품상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맺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늘의 것으로서 새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품상의 열매는 대체 어떤 것이 있는가?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새 사람으로서 입어야 할 성품상의 옷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은 5가지의 성품상의 열매에 2가지를 더해서 총 7가지의 성품상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기본적인 5가지 성품상의 열매를 가리켜, '긍휼(동정심)과 자비(친절함)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인내)'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2가지의 '용서'와 '사랑'을 더하여, 총 7가지의 성품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골3:12~14).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둠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에게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하겠다 싶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나를 겸손하게 하옵소서, 겸손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자신 안에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들어온 그리스도에게로 자신의 영을 돌이킨 후에,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겸손이십니다."라고 그분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때도 역시 우리 자신을 영으로 돌이킨 후에,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용서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용서가 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주장하고 있어서 감사드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고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골3:15~16).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즉 말을 하든지 아니면 일을 하든지 항상 주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상적인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골3:17)

 

7. 나오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새 사람이 되었어도 만약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지 않는 한 그는 옛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로 옛 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외치면서 실행하면 된다. "죄짓기를 좋아하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시체다. 시체가 죄를 짓는 것 보았는가? 나는 이제 죽었으니 죄를 지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러고 나서는 둘째로, 날마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자신의 몸을 이제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골3:2). 다른 말로 말하면, 날마다 옛 사람과 그의 행위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그리스도를 따라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옷을 입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골3:9~10).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계속해서 실행에 옮겨보라. 그러면 달라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죄짓기를 좋아하는 자신은 점차로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이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4년 01월 31일(수)

정보배목사

2024-01-24(수) 수요기도회

제목: [골로새서강해(03)]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가게 하는 것들(골2:1~2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gU5mxjQoCRk [또는 https://tv.naver.com/v/46736963]

 

1. 들어가며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다. 아마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에 두란노 서원에서 공부하고 자기 고향에 갔던 에바브라(골1:7)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다. 그런데 그가 A.D.62~63년경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에게서 배운 에바브라가 개척한 골로새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열매맺어 자라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한다. 하지만 당시 고충도 있었으니, 당시 골로새교회에 이단 세력이 침투하여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골로새 성도들을 격려하고 이단 세력들이 누구며 그들이 가진 해악성을 폭로하고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증거하기 위해 편지를 써 보낸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이다. 그래서 오늘은 골로새서 세 번째 강해 시간으로서 골로새서 2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골로새서 2장을 통해서 숨어 있는 주제로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배우게 될 것이고, 이어서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4종류의 이단 세력과 그들의 해악성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2. 골로새서 2장의 위치는?

  골로새서는 총 4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편지다. 골로새서는 알려진 바와 같이 편지의 양식으로 쓰인 글이다. 그리고 그 구성은 도입부(1:1~12)와 본론부(1:13~4:6)와 종결부(4:7~18)로 삼분되어 있다. 이중 도입부와 종결부는 대부분의 서신서의 기본적인 틀처럼, 도입부에서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표기하고 있고, 종결부에서는 축도로 된 간단한 인사와 감사와 기도 및 마지막 당부와 끝맺는 인사의 내용을 쓰고 있다.

  이것 중에서 본론부(1:13~4:6)는 다시 교리적인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전반부(1:13~2:23)와 실천적 권면을 내용으로 하는 후반부(3:1~4:6)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본론부의 전반부(1:13~2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아울러 자신의 사역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본론부의 후반부(2:1~23)에서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위한 자신의 진정한 수고와 염려 그리고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조와 그 해악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안녕에 대한 바울의 염려(골2:1~5),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권면(골2:6~7), 이단 사상의 경계(2:8), 그리스도의 신성(골2:9~10),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완전성(골2:11~15) 및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풍조와 그 해악성(골2:16~23)을 다루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3. 골로새서 2장에 나타난 중심 주제와 숨은 주제는 무엇인가?

  골로새서 2장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세력으로서 4가지 이단 사상과 그것들의 해악성'이다. 사실 골로새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이단 사상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자신이 골로새교회를 개척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 성도들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어도, 에바브라를 통해서 들은 소식에 따라 깊은 고민을 한다.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흔들고 있는 4가지 이단 세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그럼,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세력은 누구였는가? 골로새 2장에 보면 그 세력은 총 4종류로, 첫째는 지혜를 강조하는 '영지주의'였고(골2:4,8), 둘째는 의식법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 율법주의'였다(골2:16). 그리고 셋째는 천사를 숭배하는 '신비주의'(골2:18,23)와 마지막으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등을 절제케 하는 '금욕주의'(골2:21~23)였다. 그러자 바울은 이러한 이단 사상들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왜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인지를 설명한 뒤에, 골로새 성도들이 믿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한 분인지를 통해 그 사상을 박살낸다. 이것이 바로 겉으로 드러난 골로새서 2장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골로새서 2장에서 또 다른 숨겨진 주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인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골2:2). 그런데 우리가 골로새서 1장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이단 사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임을 배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시고, 속죄자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의 먼저 나신 이이자, 창조주이시며, 만물보다 먼저 계신 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자, 시작이며, 죽은 자들의 먼저 나신 이이시며, 만물의 으뜸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임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영광의 소망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탁월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바울은 1장에서 숨은 주제로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언급하였다(골1:25). 이것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로서 바울의 시대에 비로소 성도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 비밀은 유대인에게든지 이방인에게든지 예수님이야말로 얼마나 뛰어나고 풍성한 분인지에 관한 소식이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분이 믿는 이들 속에 거주하고 계신다고 했다(골1:27). 이것을 가리켜 골로새서 2장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골2:2). 왜냐하면 이분을 제대로 알게 되면 모든 이단 사상들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야말로 인간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 가운데 침투한 이단 세력들 곧 영지주의와 유대 율법주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 사상과 같은 것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한다. 

 

4. 믿는 자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비밀인가? 

  그리스도가 왜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1단계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 속에 분배해 주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만세 전에 사람을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러고 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이 계획을 방해하는 세력인 뱀 곧 사탄 마귀가 등장하여, 아담에게 먹기 좋은 과일의 형태로 제시된 생명과를 따먹기 전에, 선악과를 먼저 따먹게 함으로 생명 분배의 시기가 뒤로 늦춰지고 말았다. 또한 인간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그분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대속을 위한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령으로 믿는 이 속에 들어오시고 계신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신가? 그것은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첫째로, 그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의 또 다른 나타남으로서 이제는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심으로 당신이 가진 신성한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 병도 고칠 수 있고, 기적도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분은 인간의 모든 여정을 손수 겪으시고 통과하심에 따라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할 어떤 어려움과 시험도 다 그분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분은 지금도 셋째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의 영 속에 동시에 거하심으로 이 문제들을 풀어 주시고 있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의 풍성함과 부요함이 곧 우리의 풍성함과 부요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골2:10). 그리고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 죄가 생명을 가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듯이 오늘날 생명주는 영을 받은 우리도 죄가 우리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면 죄를 이기게 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이기는 지혜로운 말씀을 하셨듯이, 우리 또한 생명주는 영을 통해서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나올 이단 사상 중의 하나인 영지주의를 이기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5.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세력들은 대체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왜 그리스도보다 못한 초등학문 수준인 것인가?

  바울이 골로새서 2장에 언급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세력은 적어도 4종류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사람의 유전으로 내려온 것들이며, 세상의 초등학교(기초 원리) 수준의 것일 뿐이다(골2:8,20). 왜냐하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예수님에 비하면 세상의 지식과 사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골2:8~9). 그렇다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이단 세력들은 대체 어떤 것들이었는가?

  첫째,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람을 미혹하는 초기 영지주의가 있었다(골2:4,8). 이들은 지혜를 강조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아마도 2세기 경에 꽃을 피웠던 영지주의의 초기 세력이 아닌가 싶다. 이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영지 곧 영적인 지식(그노스시)을 함께 소유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공교로운 말(골2:4)과 철학 및 헛된 속임수(골2:8)로, 골로새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은 다 사람의 전통일 뿐이요 초등 원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으로서(골1:19, 2:9), 그분 자신이 온 우주의 지혜와 지식의 보화의 창고이시기 때문이다(골2:3). 그러므로 그분은 구약의 요셉이나 다니엘,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우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영지주의자들에게 물으러 갈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영 속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에게 가면 되는 것이다. 

  둘째, 율법의 의식법들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가 있었다. 이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만 믿어서는 아니 되고, 구약의 율법들로서 의식법들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믿는 자라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골2:11), 레위기 11장에 규정하고 있는 먹과 마시는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골2:16). 또한 유대인들의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골2:16). 결국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어도 유대인처럼 율법의 의식법도 같이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말한다. 구약의 의식법들로서 제사법, 정결법, 음식법, 절기법 등은 다 장래 일의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골2:17). 그리고 오히려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셨으니 그분을 믿고 따르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모든 믿는 자들은 굳이 유대인처럼 율법의 의식법들을 준수해서 거룩해지고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완성되었고 그래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도 예수믿는 자들 중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이미 안식을 주셨기에, 그분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안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할례도 마찬가지다.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받아야만 약속의 언약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하여 완고한 자신의 마음 가죽을 벗겨서 영적인 할례를 받는다면 누구든지 언약 자손이 되는 것이다(골2:11). 

  셋째, 겸손한 척 천사를 받들어 숭배하는 신비주의가 있었다(골2:18,23,10). 당시 골로새에 침투한 이단 사상들 가운데에는 천사 숭배사상이 있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크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에게 직접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을 수종들고 받들고 있는 천사들이 중간에 있으니, 믿는 성도들이라도 천사들에게 겸손히 자신의 일을 부탁하면 다 들어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자신이 미가엘 천사장을 보았다고 하거나, 가브리엘 천사장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꽤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일부러 그렇게 겸손한 척 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어떤 효능도 없으며, 하나님을 섬기라고 창조된 종인 천사들을 섬기고 말았으니 비록 그는 최고가 받을 수 있는 상(브라베이온)을 받는 데에 많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골2:18). 이것이 바로 "아무도 꾸며진 겸손과 천사들의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불리하게 판정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다. 

  넷째, 인간의 육체의 모든 욕망을 절제시키는 금욕주의가 있었다(골2:21~23). 그것은 술과 고기 등을 절대 접촉하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대지도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육체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제한해야 거룩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이들이 당시에 교회에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끝났다고 말씀해 주셨다. 즉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이상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막7:18~20).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 따르면, A.D.36년경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구약의 음식 규정에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된 짐승이라 할지라도 이미 깨끗해졌으니 어떤 것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행10:11~15). 그러므로 음식으로서 자신의 경건 생활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러한 발상은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고, 또한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부딪힌 많은 문제들의 해답을 멀리 가서 찾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이미 한 포의 알약이 되어 우리 영 안에 계신다. 그리고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과 지혜와 지식이 가득 들어 있다. 그리고 그분 안에는 인성의 모든 효능들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분도 인성을 가지고 살았지만 세상 욕망과 귀신의 유혹을 다 이기시고 자기 안에 이러한 승리들을 넣어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에게로 돌이킨다면, 영 안에 계시는 분이자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돌아보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의 문제를 헤쳐 나갈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권세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는 것이다. 또한 세상의 어떤 유혹도 이길 수 있도록 그러한 욕망을 죽음에 넘기는 죽음의 효능도 주시고, 어떤 고난 중에서도 견딜 수 있는 초월의 능력도 같이 주신다. 또한 어떤 귀신도 제압할 수 있는 왕의 권세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우리가 어딘가가 아프면, 먼저 자신이 지은 죄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완전한 치료자이십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잘 모를 때에는 "주 예수여, 당신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시고 치료자가 되어 주시고 등이 되어 주시며 또한 빛이 되어 주실 것이다.  

 

2024년 01월 24일(수)

정보배목사

2024-01-03(수) 수요기도회

제목: [골로새서강해(01)] 골로새서, 과연 어떤 책인가?(골1:1~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MgvjZNC5z1U [또는 https://tv.naver.com/v/45422967]

 

1. 들어가며

골로새서, 과연 어떤 책인가?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쓴 13권의 신약성경 가운데 한 권의 편지다. 이 책은 사도 바울이 A.D.62~63년경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 썼던 4권의 성경책들 곧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의 책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바울이 썼던 13권의 편지 가운데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9권이며, 목회자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또한 4권이다. 그런데 이들 9권의 교회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바울이 개척하지 않았던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로마 교회와 골로새 교회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았던 골로새 교회에게 왜 이 편지를 써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 편지의 중심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편지는 에베소서와 상당히 유사하여 에베소서의 축소판처럼 느껴지는데, 어떻게 되어서 에베소서와 비슷한 편지가 쓰여졌던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는 에베소서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골로새서 강해 각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골로새서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2. 골로새서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썼던 책인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인 바울은 자신의 형제인 디모데와 함께 골로새에 있는 거룩한 이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골1:1~2). 그러므로 어쩌면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편지는 바울 자신이 혼자 썼다는 사실을 이내 밝힌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인삿말(골1:1~12)을 보면, 주어가 1인칭 복수('우리')로 나오기는 하지만, 인삿말이 끝나자마자 주어를 1인칭 단수('나')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편지의 말미에 가서도 바울은 '나 자신이 친필로 문안한다'고 기록함으로써 이 편지를 바울이 직접 쓰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골4:18). 그러므로 이 편지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편지임에 틀림 없다.

그럼, 바울은 지금 언제 어디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와 함께 갇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골4:10), 또한 자신은 당시에 결박당한 채 있다고도 말했던 것이다(골4:18). 그리고 당시 자신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고 있다고도 언급을 하였다(골1:24). 왜냐하면 당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채 고난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는 로마 감옥인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도 학자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대략 A.D.62~63년경에 이 편지를 썼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3. 에바브라와 바울은 대체 어떤 일로 아는 사이가 되었는가?

골로새 교회는 사실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다. 그 교회는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였기 때문이다(골1:7~8, 4:12). 그런데 에바브라는 그때 골로새 교회만 개척했던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는 다른 두 도시들 곧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 지역 교회의 설립에도 많이 관여하였었다(골4:12~16). 그가 다른 두 교회들을 시간적인 간격을 둔 채 개척했는지, 아니면 두 교회가 개척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것이고, 다른 두 개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많이 수고했다는 것이다(골4:12).

그럼, 에바브라는 어떻게 되어서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던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3차전도여행(A.D.53~58)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고 있으면서 3년간 신학교를 운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두란노 서원에서 공부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때 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후 회심하였고 또한 자신의 고향인 골로새로 가서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던 것이다(골4:15, 몬1:2). 한 마디로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이자 바울로부터 파송받아 교회를 세운 동료 종이었던던 것이다.

 

4.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은 골로새 교회에 왜 이 편지를 써야 했는가?

그렇다면 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은 교회에게 정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 편지를 썼던 것일까? 그것은 에바브라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서 자신과 골로새 교회의 근황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골1:7~8). 이는 바울이 에바브라를 자신의 동료 종(골1:7)이자 예수의 종(골4:12)이라고 일컫는 부분에서도 그 힌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럼 왜 바울은 이 편지를 써서 두기고를 통해 골로새 교회에 보냈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자신에게서 복음을 들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교회가 잘 자라서 당시에도 열매맺고 있다는 소식을 에바브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골1:7~8). 영적으로 본다면, 자기의 아들이 나가서 교회를 개척했고 그 교회를 성공적으로 성장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매우 기뻤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격려해주려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둘째는 그러나 그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에바브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골2:8~23). 그래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려고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5. 당시 골로새 교회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었는가?

에바브라가 개척했언 골로새 교회는 당시에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상의하고자 에바브라가 로마로 달려간 것이다. 그때 에바브라고 전해준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교회가 3가지의 위험에 직면에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 골로새 교회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미혹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골2:8).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으로서, 이것이 교회 내에 침투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세상의 철학사조가 교회 안에 침투해서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지혜 사상으로서, 이것은 3세기가 되면 초기 교회를 흔들어놓을 만큼 큰 영향을 미쳤던 영지주의의 발아형태였다. 왜냐하면 당시 이러한 사상은 누구든지 영지(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그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육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과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의 창고라고 언급을 하면서(골2:3),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에온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골2:9~10).

둘째, 골로새 교회가 유대주의적 율법론적 구원관에 미혹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골2:16). 그것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만 믿어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록 자신이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누구든지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아야 하고 안식일도 지켜야 하며 음식도 가려서 먹는 등 정결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먹고 마시는 것을 구별해야 하고, 안식일을 비롯하여 절기나 초하루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율법 가운데 의식법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사도행전 10장에 의하면, 그리스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더이상 필요가 없어져서 폐해진 것들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이 와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니 골로새 교인들도 흔들린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법들은 장래에 나타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는데(골2:17),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를 하고 있으니 흔들릴만도 하다.

셋째, 골로새 교회가 세상의 초등학문인 금욕주의나 천사숭배 사상에 의해 미혹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골2:20~21,18). 골로새 교회를 흔들어놓은 세 번째는 바로 금욕주의와 천사숭배 사상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것이든지 붙잡아서도 아니되고, 맛보아서도 아니되며, 만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육체를 철저히 복종시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름하여 '금욕주의'가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못입고 못먹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사상은 몸을 괴롭게 하는 데에는 지혜있는 모양이나 실제로 육체의 본성을 이기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골2:2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혼란을 겪고 있는 3가지 당면한 문제를 바르게 교정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 편지를 써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6. 골로새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바울이 썼던 편지들을 살펴보면 주로 교리편이 앞부분에 배치되고 생활편이 뒤에 배치가 된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를 보면, 교리편은 1~11장에 배치되어 있고, 생활편은 13~16장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경우, 교리편은 1~3장에 나오지만, 생활편은 4~6장에 나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골로새서도 교리편이 1~2장에 먼저 나오고 있으며, 생활편은 나중에 3~4장에 나온다. 특히 골로새서의 경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월성을 제시를 통한 이단사상을 경계하는 부분이 앞에 나오고(1~2장), 성도의 거룩한 삶을 권면하는 부분이 뒤에 나온다(3~4장).

그리고 내용적으로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골로새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먼저는 서론 부분으로서 1:1~12에서는 골로새서의 송수신자와 중보기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본론부분으로서 2:1~23에서는 그리스도의 탁월성 및 이단에 대한 경계의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3:1~4:6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권면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부분으로서 4:7~18에서는 개인적인 권고와 문안인사 그리고 끝인사가 나온다.

그리고 서론부분인 1:1~12의 부분은 일종의 도입부로서, 가장 먼저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표기 및 축도가 나오고(1~2절), 이어서 복음에 근거한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감사가 나오고(3~6절), 고로새 교회의 개척자인 에바브라에 대한 칭찬이 나오며*7~8절), 마지막으로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가 나온다(9~12절).

 

7.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왜냐하면 그 구조에 있어서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게 편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골로새서의 본문이 에베소서의 본문보다 더 짧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두 서신은 A.D.62~63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에 갇혀 있을 때에 쓴 것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에베소서를 먼저 쓰고 골로새서를 나중에 쓸 수도 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대도시이고 골로새라는 도시는 시골의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에베소서를 더 많은 분량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골로새서를 먼저 쓰고 좀 더 확대해서 에베소서를 쓸 수도 있다. 보통 복음서의 기록이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어떤 구조와 내용에서 닮아 있는가? 첫째로 구조가 똑같다. 이는 둘 다 교리편이 나오고, 또한 생활편이 나중에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로, 내용도 매우 유사하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가 그 내용에 있어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가장 먼저 구속 곧 죄사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늘의 천사들의 계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생활윤리로서 아내들과 남편들, 자녀들과 아비들, 종들과 자녀들에 대해서 권면을 둘 다 똑같은 순서대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첫째로,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골로새서의 본문이 에베소서의 본문보다 짧다는 것이다. 둘째로, 둘 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에베소서는 교회론을 부각시키고 있다면, 골로새서는 그리스도론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를 다음과 같은 7가지 항목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몸(엡1:23), 단체적인 새 사람(엡2:15), 하늘나라의 시민(엠3:19), 하나님의 가족(엡2:19), 성전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2:21),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아내(엡5:25,32), 영적 전사(엡6:12)가 그것이다.

그리고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그분을 높이고 있다. 구속자(골1:1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1:15),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골1:15), 창조주(골1:16), 만물보다 먼저 계신 이(골1:17), 몸인 교회의 머리(골1:18), 시작이자 근본(골1:18),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골1:18), 만물의 으뜸(골1:18), 아버지의 충만(골1:19), 영광의 소망(골1:27), 하나님의 비밀(골2:2),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의 창고(골2:3), 주와 그리스도(골2:6, 3:24),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골2:9),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골2:20), 이긴 자(골2:15), 온 몸의 머리(골2:19),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이(골3:1), 생명(골3:4), 만유(골3:11), 만유 안에 계신 이(골3:11).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

 

8. 골로새서의 주제는 무엇이며,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골로새서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월성을 제시를 통한 이단 사상의 경계와 성도의 거룩한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한 마디로 '탁월하신 그리스도'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까지 많은 것들을 제시한 신약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로부터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들으면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유대교적 율법주의과 천사숭배 및 금욕주의가 어떻게 잘못되었고 이것들보다도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골로새서를 읽을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은 '비밀'이라는 단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으로서 사람 속에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시려고 생명주는 영이 되어서 사람 속에 들어와 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체현이듯이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골로새서는 짧지만 참으로 귀한 책이다. 이 짧은 책에서 이렇게 많은 영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먼저 신기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이렇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그리고 위대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기만 하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다(골3:11). 그리고 그리스도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의 머리이시자, 모든 천사들의 머리이시다. 그분이 모든 만물 안에 계시면서 만물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붙잡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들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단사상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껏 모형과 그림자 속에서만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실로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하여 지금도 우리는 보좌와 주권, 통치와 권세를 쥐고 있는 모든 악한 영들(귀신들)마저 이길 수가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무장해제시키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자. "아멘, 주 예수여, 영원히 찬양받으소서!" 아멘.

 

 

2023년 01월 03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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