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왜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러나 이 땅에는 선한 부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맞는 부자들은 대체 어떠한 부자인가? 그리고 성도들이 살다가 만나게 되는 고난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무조건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 되는가? 아니면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할까?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 그 고난의 종류와 성격도 한 번 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난의 종류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도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가 말해주는 성경적인 부자관과 아울러 고난을 대처하는 2가지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022-05-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6) 부한 자들에 대한 경고와 고난을 이기는 방법(약5:1~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YTSLQNVBEM [혹은 https://tv.naver.com/v/26610514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각 장마다 부한 자들에 대하여 언급을 한다(약1:9~10, 2:1~7, 3:15, 4:3~4, 13~16). 왜 야고보는 짧은 편지 속에서 부한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많이 할애하여 언급하였던 것일까? 이는 우리가 서신서를 읽을 때에 그 편지의 배경이 되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편지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성경을 읽다보면 그 편지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A.D.49년어간에 로마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에게 보내었던 편지였다. 그런데 A.D.49년 경에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오(A.D.42~54)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본인이 유대교를 믿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믿든지 상관없이 로마에서 떠나야 했다. 그러므로 이 즈음이 바로 유난히도 경제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던 때다. 특히 유대인들은 B.C.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거의 대부분 전 세계에 흩어져서 살았는데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짓고 살았다. 또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는데,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은행업이었다. 고리대금업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중에는 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이들 부자들이 재물을 취득하는 데에도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재물을 사용하는 데에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본론부의 마지막에 가서 최종적으로 강력 선포한다. 그리고 나서 이 편지의 마지막 주제인 고난의 문제를 언급한다. 성도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만나게 될 고난 대처법의 아주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야고보서 5장은 어떤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가?

  야고보서 5장은 크게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야고보서 1장 19절부터 시작된 본론부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불의한 부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의 말씀이다(1~6절). 그리고 이어서 5:7~20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야고보서의 결론부로서 고난에 대한 성도의 바른 대처 방법을 언급한 것이다. 5:7~20의 결론부는 또 다시 2개로 나뉘어지는데, 7~11절에서는 고난당하고 있는 의인들을 향한 메시지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주의 재림을 고대하며 인내하는 태도로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12~20절에서는 고난에 대한 바른 대처 방법으로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왜 야고보는 부자들에 대하여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재물 자체가 악하거나 정죄받아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율법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하셨다. 즉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28:4-5)"라고 말씀하던 것이다. 또한 선한 부자의 사례도 성경에 나온다. 대표적인 경우를 들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자기 밑에 집에서 길리우고 훈련받은 병사 318명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 식구는 적어도 1,000명 이상 될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 땅에서 거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창14:14). 뿐만 아니라 동방사람 욥은 어떠했는가?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부자였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에는 양과 낙타와 소와 암나귀와가 넘쳐났으며, 종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욥1:3).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도 다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선한 부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부자들에 대해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한 것인가? 그것은 당시 부자들이 재물을 취득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이 재물을 사용하는 것 역시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있었고, 또한 그렇게 해서 모든 재물을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데 그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들이 품꾼들의 품삯을 주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하였다(4절). 이것은 약한 자를 억압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며 품꾼들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두지 말라는 율법말씀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레19:13). 그리고 곤궁하고 가난한 품꾼을 학대하지 말고,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가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고도 말씀하셨다(신24:14~15). 만약 그렇지 않다가 품꾼들이 여호와께 호소라도 할 경우 그것이 죄가 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 부자들은 율법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 추수한 품꾼들에게 주지 않은 삯이 소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만군의 귀에까지 들렸던 것이다(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의 재물은 이미 썩어 있고, 그들의 겉옷은 좀먹었으며, 그들의 금과 은은 이미 녹이 슬어있다고 말이다(2~3절). 그러니 곧 그들에게 불어닥칠 심판의 날이 찾아오면 그들의 비참함인하여 울라고 경고하였다. 그런데 당시 부자들은 약한 자들의 재물을 착취하는 일에만 죄를 짓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재물을 쓰되 자기의 쾌락을 위해 그리고 사치하는 데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5절). 더욱이 그들은 의로운 자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까지 범하고 있었다(6절). 그러니 야고보는 어느날 그들이 불같이 살라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3절). 

 

4. 성도들이 고난에 대처하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고난을 만났을 때에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성도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에 대처하는 방법 2가지를 소개하고 있다(7~20절). 하나는 그때에 인내하라는 것이다. 길이 참으라는 것이다(7~12절).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는 것이다(13~20절). 그것도 자기의 죄를 고하면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고난을 만났을 인내하여야 하며, 어떤 고난을 만났을 때에 기도해야 하는가? 사실 성도들이 만나는 고난에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핍박같은 고난이 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할 때에 가족이나 또는 불신자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고난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럴 때에는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마5:10~12). 그러므로 이때에 성도들이 해야 할 대처는 그러한 고난을 참아내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을 당할 때에 자기에게 고난을 주는 대상에게 대항하라는 말씀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핍박자들 위해 기도하라고만 나온다(마5:44). 그러므로 고난 중에서도 사탄이 사람을 통해 주는 고난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잘 견뎌내야 한다. 이는 핍박자가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고난은 우리나 우리의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다. 그러한 고난에는 질병의 고난, 가난의 고난, 자녀의 불행의 고난 등이 있다.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무조건 참아내는 것이 온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고난이 왜 자기에게 주어졌는지를 파악하고 그 고난에 맞게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죄를 회개하면서 대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16절). 다시 말해,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무조건 인내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죄들을 회개하여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5. 사탄이 주는 핍박과 같은 고난에 직면했을 때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성도들은 사탄이 사람을 통해 주는 고난에 대해서는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를 저주하거나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고 기도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수가 있는데, 그러면 그가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길이 영영 차단이 될 수도 있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라. 사실 성경 전체를 볼 때에 사탄이 성도들을 핍박할 때 대처하는 방법에는 2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도망치라는 것이다(마24:16~20).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길이 참으면서 핍박을 견뎌내야 한다고 했다. 길이 참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고난 대처법들이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야 하듯이 참아내는 것이다(7절).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핍박같은 고난이 오면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인가? 야고보는 그 이유를 3가지로 언급한다. 첫째는 주님의 강림이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9절). 곧 심판주가 오셔서 핍박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주가 곧 와서 그의 억울한 사정을 신원해 주실 것으므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 경우 결코 원망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둘째는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절).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말했던 선지자들도 다 이와같이 고난을 견뎌내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내하는 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복을 준비해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절). 대표적인 경우로서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든다.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고난을 겪어야 했다. 제일 처음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다 잃었으며, 2차 때에는 7남 3녀의 자녀까지 잃었다. 그리고 3차 때에는 자신의 건강과 가정마저 잃게 되었다. 그런데 70인역에 의하면 그는 약 70년 동안을 악성종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참아내었다. 기다린 것이다. 기도를 쉬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방문을 받게 되었고 진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회개한 끝에 이전보다 2배나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 기도하면서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언제가 해결해주실 날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는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붙여서 언급하였다(12절).

 

6. 자신이나 자기의 조상들의 죄에 관련된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고난 중에서도 자신이나 자기의 조상들의 죄에 관련되어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야고보는 고난에 대처하는 두번째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13절). 그런데 기도할 때에 2가지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다. 하나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병낫기를 기도하라는 것이었다(14절).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16절). 또 하나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죄를 서로에게 고백하라고 하였다(16절). 이것은 질병 치료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다시 말해, 사람이 걸리는 질병이 바로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인류가 죄를 짓기 전에는 질병도 없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질병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죄를 처리해야 한다. 특히 남에게 억울한 일을 하게 만들어서 찾아오는 질병은 반드시 당사자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질병에 걸리게 되었을 경우 대부분은 그것이 영적인 이유와 맞물려 있다. 그 사람 안에 악한 영들이 들어와서 질병을 일으킨 것이다. 모든 질병이 귀신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죄를 지었을 때에 들어오는 귀신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더 실제적인 사실은 자기의 지은 죄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보다는 자기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 때문에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조상들에게 들어가 있던 악한 영들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들어가서 질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때 질병으로 역사했던 악한 영이 후손에게 들어가면 그 후손에게 질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이 질병의 경우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어서 자기의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런 것이 없이 기도한다면, 비록 의인의 간구로 인하여 병이 나았다고 할지라도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사람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철저히 자기와 자기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서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를 언급한다(17~18절).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비가 오기를 기도했더니 하늘이 문을 열고 비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그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3년 6개월동안 기근이 찾아온 것이었으며, 우상숭배의 죄를 그치자 큰 비가 다시 내렸던 것이다(왕상17~18장). 그렇다.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불어닥친 고난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부록처럼 야고보는 형제들 중에 미혹을 받아 진리에서 떠난 자라도 돌이킬 수 있도록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면 그렇게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며, 그의 지은 죄들을 덮을 수 있다고 말한다(19~20절)

 

7. 나오며

  말세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것은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재물은 하나님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용해야 하고(마6:19~20,33), 객과 고아와 과부 같은  약한 자를 돕고 구제하는 데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하나님과 복음전파를 위해 물질을 사용했다면 그는 하늘에서 합당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 땅에서 약한 자들을 구제했다면 그와 그의 후손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재물 자체만으로 볼 때에 재물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재물을 취득하는 과정이 부당하다거나 그 재물을 사치와 방탕에 쓴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을 취득할 때에는 언제나 합당하게 취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거나 약한 자를 돕는 데 사용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오늘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성도들을 마귀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가 고난에 처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2가지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고난이 핍박으로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어떤 고난이든 그 고난을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에서 큰 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죄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 주는 고난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고난에는 질병의 고난, 물질의 고난, 자녀의 앞길의 고난 등이 있는데, 이때에는 먼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그에게서도 죄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영적인 세력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도록 권세를 주셨는데 이때에 귀신도 함께 쫓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질병은 귀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치유를 받되 완전한 치유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를 특히 십계명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병이 들면 우선 병원부터 찾아간다. 그리고 의사부터 만나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왜나하면 대부분의 질병은 죄를 지어서 우리 안에 악한 영이 역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 앞에 먼저 나가 죄를 고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에게도 찾아가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완전한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응급처방과 땜질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평생 죄와 더불어, 질병과 더불어, 가난과 더불어 그리고 자녀걱정과 더불어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04일(수)

정병진목사

 

세속적인 삶은 결국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를 새 예루살렘 성밖에 살게 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가 생명책에서 이미 기록된 자기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과연 어떤 방법을 제시했을까? 여기 정말 놀라운 방법이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022-04-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5) 세속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법(약4: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olIrNDz5_s [혹은 https://tv.naver.com/v/26518760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교리서가 아니다. 야고보서는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일종의 윤리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산상수훈(마5~7장)과 많이 닮아 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의 윤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야고보의 윤리 지침은 사실 야고보가 익히 들어서 자신의 삶에 배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그는 대체 누구에게서 산상수훈과 같은 말씀을 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했던 베드로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는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약4:6,10, 벧전5:5~10).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로마 치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체 무엇을 편지하였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지침을 내린 것인가?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야고보서 4장을 다루고자 한다. 야고보서 4장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짝하는 삶의 원인이 무엇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자녀라면 과연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인지를 기록하고 있다(약4:1~12).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돈을 벌며 살기를 원하는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약4:13~17). 이제 야고보가 성령으로 기록한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2.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싸움과 다툼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 후반부에서 위로부터 난 지혜와 땅에 속한 지혜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약3:13~18). 그리고 이제 4장에 들어와서 세상 욕망에 대한 경계와 아울러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에 대해 교훈한다(약4:1~12). 그리고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한다(1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 속의 내부에 있는 '정욕(헬라어, '헤도네')이라고 말한다(1절). 그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싸움과 다툼을 하게 되는 원인은 바로 정욕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것 때문에 평생을 상대방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게 될 것이다(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이것을 그냥 놔 둔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5절). 

 

3.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순결을 지켜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본성이 가득한 자기 자신 곧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그 욕망을 제어한 채 성령의 음성을 좇아 살아갈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야고보는 2가지를 먼저 언급한다. 첫째, 인간이 욕심을 내지만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언급한다(2~3절). 그것은 2가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절하). 생각해 보라.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그 욕심을 이루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는가? 그러므로 욕심 자체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이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 구하되 정욕으로 쓰려고 악한 동기에서 구하기 때문에 욕심을 내지만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3절). 자신의 정욕의 필요를 따라 구하는 악한 동기를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구하는 기도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인지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몹시 바라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욕망이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서 받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이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그릇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데, 사람은 도리어 교만할 뿐만 아니라 교만을 불러 일으키는 마귀를 대적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8절). 야고보의 편지는 일종의 윤리 지침서와 같다고 서두에서 말씀드렸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있는 바는 산상수훈과 비슷하며, 베드로전서와도 비슷하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언급한다면 토라(율법서)와 잠언서를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윤리의 기본 강령을 율법의 십계명에서 따온다. 그리고 각각의 내용들은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그가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6절, 잠3:34). 교만이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오직 자기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가 최종 권위가 되고 싶어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의 권위마저 업신여기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마음을 주는 사탄 마귀의 지배하에 일평생 매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며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서로 싸우고 다투며, 미워하며 시기하는 것이다(2절). 

 

4. 하나님을 향하여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어서 야고보는 하나님을 향하여 합당한 삶을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며, 결국 성령의 소욕도 따라갈 수 없다고 언급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바로 9절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회개'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이러한 문제를 놓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의 웃음이 결국에는 애통으로 변할 날이 올 것이며, 우리의 즐거움은 근심으로 바뀔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9절). 그렇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성령의 음성을 쫓아 살아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 이것을 깨닫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니,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깨닫지도 못한 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묶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도 그냥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상태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와 음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이런 자는 결국 진실한 성도들이 휴거받을 때에 들림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종의 날까지 남겨져서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더러운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오직 회개에서 나오는 것이다. 

 

5. 사람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정욕을 이기는 회개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정욕을 이기는 회개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안을 열어서 인간의 내부에 있는 죄된 본성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7:15~16). 예수께서는 이때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셨다. 그것은 바로 12가지라고 하셨다(막7:20~23). 

막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의견들)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무분별)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렇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12가지 항목을 영적으로 분석해 보면, 전부다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뱀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란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육체 속에 음란의 영이 있기 때문이요, 사람이 탐욕을 부리는 것은 자기 육체 속에 탐욕의 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이러한 악한 영들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훈련을 하면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날마다 영성 운동을 하거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틀어박혀 있지 않는 한 이러한 훈련은 지속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세상과 접촉하며 살지 아니할 수 없고, 또한 이 세상과 접촉하다 보면 세상의 것이 욕심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속에 악한 영을 계속 내버려둔 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적합한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회개하여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아예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고 회개에 집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다 죄용서를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하느냐며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 엄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이러한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난 모든 아기의 육체 속에는 이미 더러운 영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내 육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8~20)"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 내 속에 거하는 죄된 본성이 문제인데, 바로 이것의 실체가 바로 악한 영들(뱀들)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내가 범죄하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영들이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조상들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조상들의 육체 속에 악한 영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회개하지 않고 죽었을 때에 그 악한 영들이 그의 자손에게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계명에 나와 있다(출20:5). 그러므로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 조상들과 부모 속에 들어 있던 영이 내 육체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들 때문에 거기에 내가 지은 죄가 더해져서 점점 더 악한 영들이 내 몸에 쌓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들을 내보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들을 회개하고 내가 지은 죄를 날마다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평생 죄된 본성을 정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회개함으로 이러한 영들을 밖에 있는 것부터 한 겹씩 떼어 내면 언젠가는 이 영들을 다 내보낼 날이 오고야 말텐데, 처음부터 아예 이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다. 회개해 보라. 직접 해 보면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다. 

 

6. 왜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아니 되는가?

  이처럼 야고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먼저 말한다(6~10절). 그것은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이것을 추종케 하는 마귀를 버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하고도 즉각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고 했다(9절). 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에 대해 언급한다(11~12절). 그것은 자신의 형제들을 함부로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율법을 제정자도 아니며 율법의 심판자(재판관)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형제 모두가 율법의 준행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절). 오직 형제의 잘못됨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사람을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12절). 그렇다. 사람이 죄된 본성 곧 자기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어할 때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려는 마음보다는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꺼내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남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죄된 본성은 사실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그 원인은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회개하여 내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뽑아내는 데에 중점을 두라. 그것이 바로 성도의 올바른 자세인 것이다. 
 

7. 세상의 물질을 얻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조건 나쁜 일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3~17절).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일인가 아니면 그것은 허용되는 일인가를 말한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 부분을 읽지 못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장소와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을 야고보가 책망하고 있기 때문이다(13절).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돈 벌 계획을 세우지도 말아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야고보의 권면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다. 돈을 벌려고 해도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정해 놓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육체의 이익만을 위하여 돈 벌 계획을 세워 놓고 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이 어느 날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자신이 일평생 애써서 모아 둔 모든 물질이 하루 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을 벌어들일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디에 쓸 목적으로 계획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는 것으로 판가름 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중심에 바르지 못한 것 곧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욕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을 벌어들일 계획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부합되는 삶이라면 그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직업을 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할 것입니다(16절)"라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때가 참 많다. 다시 말해, 자기가 돈을 버는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언급하는 것처럼,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이 분명히 죄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죄라는 것인 줄 우리는 알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미래를 온전히 준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죄된 본성을 이기는 법에 대해서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사람이 스스로 죄된 본성을 이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 기록해 놓았다. 그것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다. 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명의 성령의 법 가운데서 사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사도 바울이 제시해 주는 방법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완벽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이는 많지 않다. 왜 그런가? 그렇게 훈련을 받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 처했을 때에는 금방 옛날로 다시 되돌아가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죄된 본성 곧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도와주는 다른 방법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육체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더러움의 실체 곧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뱀들)을 회개를 통해 내보내는 것이다(출20:5, 요일1:9). 이 방법은 정말 대단한 방법이다. 한번 내보낸 영은 내 몸에서 깨끗하게 제거되기 때문에, 만약 회개하여 음란의 영을 내보내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음란의 영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실로 놀라운 영적인 발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했다. 자신이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를 따라가고 있다면 그때에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고 말이다(약4:9). 그래야 우리 속에 있는 죄된 본성들의 실체 곧 악한 영들이 우리 속에서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우리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죄된 본성에게 승리를 거두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악한 영들을 다 내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러한 회개를 지속한다면, 우리도 어느 정도 죄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죄된 본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에서 헤매이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다. 회개만이 이 모든 것의 열쇠인 것이다. 야고보는 말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 역시 죄가 된다고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또한 그분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눅12:46).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자. 주님을 다시 만날 그 영광스러운 날을 위하여...

 

 

2022년 04월 27일(수)

정병진목사

 

잠언기자는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고 말했다(잠18:21).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말이 야고보서에도 등장한다. 그는 어느 누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말과 지혜를 통하여 자기가 올바른 믿음 안에 서 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많고 많은 주제들 가운데 왜 '말'과 '지혜'를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믿음의 예로 거론한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참된 '말'과 '지혜'는 대체 어떤 것인가?

 

2022-04-20(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4) 올바른 혀의 사용과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지혜(약3:1~18)_2022-04-20(수)

https://youtu.be/23NzJNFg4vk [혹은 https://tv.naver.com/v/26371385

 

1. 들어가며

  모든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비로소 참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첫 장에서 시련을 통해 입증되는 믿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2장에 와서는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 오늘 제 3장을 통하여 야고보는 '말의 올바른 사용으로 입증되는 믿음(약3:1~12)'과 더불어 '지혜의 올바른 사용으로 입증되는 믿음(약3:13~18)'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왜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을 언급한 후에 다른 주제가 아니라, '말'과 '지혜'의 올바른 사용으로 입증되는 믿음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야고보는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혜'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권면하였는가? 오늘은 말과 지혜를 통해 입증되는 참된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야고보서 3장은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

   야고보서 1:2~18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란 시험(시련)에 의하여 검증되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1:19~2;26에서 야고보는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바른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오늘 3장의 말을 하였다. 그럼, 야고보는 3장에서 어떤 말씀을 하였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먼저 3:1~12에서는 '말의 올바른 사용으로 입증되는 믿음'을 이야기했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비록 신체 중 크기는 작지만 인생의 수레바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혀'의 바른 사용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3:13~18에서 야고보는 지혜의 바른 사용으로 입증되는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야고보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삶에 선한 열매가 맺혀야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삶에서 시기와 다툼(이기적인 야심)등의 악한 열매가 맺힐 때에는 그 지혜가 이 땅에 속한 것이며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정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세상의 악한 지혜를 사용하지 말고 하늘로부터 오는 선한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3. 야고보는 '말'과 '지혜'를 왜 삶 속에서 입증되어야 할 믿음의 두 방면의 예로 선택했는가?

  야고보서를 읽을 때에 처음 느끼는 느낌은 무엇인가? 그것은 야고보서의 전체 말씀이 예수께서 들려주신 산상수훈의 말씀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말씀 중에서 적어도 21개의 말씀이 산상수훈의 말씀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산상수훈의 말씀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야고보서의 말씀과 산상수훈설교의 인용 비교표는 다음과 같다. 

 

  야고보서 산상설교(마태)   야고보서 산상설교(마태)
1 1:2 5:10~-11 12 3:6 5:22
2 1:4 5:48 13 3:10~12 7:15~20
3 1:5 7:7~12 14 3:17~18 5:9
4 1:9 5:3 15 4:4 6:24
5 1:12 7:14 16 4:10 5:3~5
6 1:20 5:22 17 4:11~12 7:1~5
7 1:22 7:21~27 18 5:2~3 6:19~20
8 2:5 5:3 19 5:10 5:12
9 2:13 5:7 20 5:11 5:10
10 2:13 6:14~15 21 5:12 5:33~37
11 2:14~16 7:21~23      

 

  그렇다면, 이어지는 3장의 본문에서 야고보는 왜 삶 속에서 '말'과 '지혜'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일까? 이것은 야고보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로고스)'와 '지혜(소피아)'는 예수님의 선재성과 그분의 신성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스승 내지는 선지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베드로가 그분을 '당신은 그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도 그 고백이 무색할만큼 금새 잊어버린 뒤에, 자신의 일신상의 위험이 찾아오자 금새 주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이러한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친동생들의 신앙과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죽었던 예수께서 3일만에 살아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사건 때문이다. 그것도 자기들이 있던 곳의 문이 닫혔는데 그분이 불쑥 나타나신 것이다. 그것은 그분은 죄없는 분이셨다는 사실과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었다. 그러자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동생들은 급격히 달라지게 된다. 그분의 실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스승이나 형님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고백하기 시작한다. 그때에 그들이 맨 처음으로 고백한 그분에 대한 신성한 칭호는 "주님"이라고 고백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역시 야고보서의 편지를 통하여 적어도 9번 이상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했다(약1:1, 1:12, 2:1, 4:10, 4:15, 5:7, 5:8, 5:14, 5:15). 그런데 이러한 칭호는 구약시대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 붙히던 칭호였다. 그런데 이 칭호를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말씀'과 '지혜'로 선재하고 계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선재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성도들이라면 그들은 이 땅에서 말할 때에는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말해야 하며, 지혜를 사용할 때에는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한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서 3장의 말씀의 핵심이다. 

 
4. 야고보는 바른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라고 하였는가?
  야고보는 제3장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실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약3:1~2). 그러면서 선생이 되려고 많이 애쓰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선생된 자는 장차 더 큰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1). 즉 선생된 자로서 약한 지체를 실족하게 하면 그가 받을 심판이 너무나 막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 마디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면 말할 때에 조심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말하는 자는 말하는 것을 조심해서 말해야 하는가? 야고보는 2가지로 그 이유를 말한다. 첫째, 말하는 혀는 온 몸의 지체 중에서 작은 것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를 만큼 엄청난 영향력과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 야고보는 혀가 비록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3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첫째로,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도 역시 작은 것이지만 쏜살같이 달리는 말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둘째로, 거친 바람들에 의해 밀려가는 큰 배들도 지극히 작은 '키'에 의하여 사공의 뜻대로 운행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큰 숲일지라도 작은 불이 나무에 붙어버리면 얼마나 큰 파괴력으로 숲을 불태워버리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둘째,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은 다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진 채 있지만 오직 사람의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쉬지 아니하는 악이 나오고있고 죽이는 독이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절). 그러므로 혀는 불이며, 불의의 세상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6절). 또한 그 불은 마치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6절). 
  그렇다면,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바른게 사용하는 것이 되는가? 이것에 대해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이미 자기 안에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따라 올바른 말만을 선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9~12절). 왜냐하면 과거 예수믿기 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 있는 사탄마귀에 속하여 악과 독이 가득한 말을 해왔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이 된 자들은 자기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따라 선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하나님께 속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한 입으로 어찌 주님이자 아버지인 하나님(혹은 주님이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을 찬송하면서 동시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채 있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기에 새 사람은 그리스도에 속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마치 하나의 샘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혹은 짠 물)이 같이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11절). 세상에 있는 샘도 두 가지 다른 물을 낼 수 없는데,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악한 말을 하고 있느냐면서 책망한다. 그것은 마치 무화과나무에서 감람나무의 열매를 따는 것과 같고, 포도나무에서 무화과의 열매가 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5. 야고보는 교사가 지혜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떤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는가?

  이어서 야고보는 지혜와 명철을 사용하여 남을 가르치는 자가 사용할 지혜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악한 지혜로서 사탄마귀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선한 지혜로서 예수님의 지혜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혜가 어떻게 '선한 지혜'도 있고, '악한 지혜'도 있느냐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는 선한 지혜이기 때문이요, 사탄마귀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악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한 지혜의 특성과 그것의 결과를 그리고 악한 지혜의 특성과 그것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첫째, 그는 선한 지혜의 특성과 그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야고보는 먼저 자신이 지혜와 총명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어떤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한다(13절). 그것이 과연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먼저 선한 지혜는 그것의 특성이 총 8가지라고 말했다(17절). 그것은 성결하고(순결하고), 화평하고(평화롭고), 온화하며(관대하며), 양순하고(순종을 잘 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들이 가득하고, 편견(치우침)이 없고, 거짓이 없다고 했다(17절). 그러므로 선한 지혜를 사용하면 반드시 선하고 온유한 행위로서 그 결과가 나타난다고 했다(13절). 그런데 이러한 8가지 지혜의 특성은 곧 산상수훈의 8복과 매우 흡사하게 보인다(마5:1~12). 그것은 아마도 선한 지혜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누군든지 의의 열매를 거두기를 원한다면 그는 화평을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다(18절).

  둘째, 야고보는 악한 지혜의 특성과 그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야고보는 지혜에도 악한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로부터 나오는 이 악한 지혜가 결국 첫 사람 아담을 죄로 무너뜨린 것처럼 악한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가 과연 악한 지혜라고 할 수 있는가? 즉 악한 지혜의 특성은 대체 무엇인가? 야고보는 악한 지혜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특성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땅 위에 속한 것이요, 정욕적이며, 귀신적이라고 했다(15절). 그렇다. 악한 지혜는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하거나 거룩하지 않다. 그리고 악한 지혜는 정욕적(혼적)인지라 그것은 늘 자신의 정욕을 채우도록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기에 '귀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한 지혜를 사용한다면 그에게서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에는 2가지 증상이 있다. 하나는 독한 시기심으로 지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14절,16절). 그리고 또 하나는 다툼(이기적인 야심이나 당파심)으로 지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14절,16절). 그러므로 이러한 악한 지혜는 2자기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것은 '혼란(소요)'와 모든 악한 일들(실전행위)이다(16절). 그렇다. 우리가 악한 지혜를 따라가면 화평하지도 않으며 혼란만 가중시키며, 악한 일들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6. 나오며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A.D.45~49년경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고보는 어디서 들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보았는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산상수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낮춘 뒤에 자신의 형이었던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선재하신 그리스도 혹은 신성한 주님으로서 고백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야고보서는 제3장에서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말'과 '지혜'에 대해서 언급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 성도들은 이제 그분이 사용하던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그분이 사용하신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옛습관을 쫓아서 지옥불에서부터 나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마귀에게 속한 악한 지혜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믿기 전에 이미 조상으로부터 악한 뱀들을 물려받은 이들은 자신이 원치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악한 말과 악한 지혜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지혜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있다면, 우리가 말과 지혜를 점검해서 내가 과연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는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이 쓰는 언어는 예수님의 언어로 만들어야 할 것이며, 자신이 사용하는 지혜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2022년 04월 20일(수)

정병진목사

 

[다운로드] 야고보서 3장 헬라어 직역

1. 2022-04-20 야고보서강해(04) 3장 강해.pptx

2. 2022-04-20 야고보서강해(04) 3장 강해.pdf

 

왜 성도들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가? 과연 믿음만 붙들고 있어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구원을 받아서 장차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오늘 야고보서 2장과 마주 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과는 색깔이 상당히 다르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설마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버리고 야고보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여기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2022-04-06(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3) 이웃사랑 계명 실천과 행함 없는 믿음의 허구와 실상(약2:1~26)_2022-04-06)수)

https://youtu.be/pRdwIFZJ_gw [혹은 https://tv.naver.com/v/26081592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총5장의 108구절로 이루어진 야고보가 쓴 서신이다. 야고보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A.D.49년 직전의 교회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이 저작이 A.D.45~49년의 기록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현재 신약 27권의 성경책 가운데에서 가장 빨리 기록된 성경책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내증에 따르면, 로마의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 이후 A.D.34년경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그런데 그때 당시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는 일부가 안디옥으로 건너가서 A.D.40년경 하나의 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교회를 위해 바나바를 파송했고 바나나는 사울을 데려다가 같이 사역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다가 로마의 전 지역으로 흩어진 나머지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석하였고 거기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이러한 정황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때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2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며 또한 아주 잘못된 일도 행한 채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 편으로는 그들을 위로하려고 이 편지를 썼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오늘은 그가 쓴 제 2장의 말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여러 정황들이 많이 포착된다. 대체 이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또한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들 중에서도 야고보는 이들을 향하여,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해야 했는가? 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던 것인가?

 

2.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이때 야고보서라는 편지를 받고 있는 이들은 대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으며,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가? 우선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야고보서 2장이 들려주는 정보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첫째, 매주일 유대인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2절). 둘째, 이들 중에는 가난한 자들도 있었고 부자들도 있었다(6절). 그런데 셋째, 이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8~11절).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 이웃사랑하기를 자기의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이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21절). 여기서 '우리'라 함은 야고보와 이 편지의 수신 대상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들이 유대인들인 것은 '회당'이라는 표현과 아울러 율법말씀의 인용하고 있고 그리고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인 '아브라함'과 여호수아에 나오는 '기생 라합'을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유대인인 것을 말해준다. 다섯째, 이들은 자유의 율법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있었다(15~16절). 여섯째, 이들은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었다(19절,1절). 이들은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3.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먼저,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2가지였다첫째로,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은 종교적인 핍박도 같이 겪고 있었다(5절). 그럼 이러한 어려움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당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어려움을 끼치고 있는 자들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동족 유대인들이었으며 그리고 또 하나는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로마 황제로 추정이 된다. 그렇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동족에 의하여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가? 그리고 왜 로마 황제예배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먼저, 이들이 같은 동족의 유대인들로부터 겪고 있던 어려움부터 살펴보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도 역시 안식일이 되면 유대교 회당으로 나가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그때 유대인들로부터 잘못된 것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바로 회당에 손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들어오는 부자들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남루한 옷을 입고 들어오는 가난한 자들은 외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의 수신자들도 역시 이것을 고스란히 배워서 그대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는 유대인 부자들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부자들은 첫째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말했다(6절). 그리고 둘째로, 부자들은 사실 이 편지의 수신자를 압제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6절). 그리고 셋째로, 부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가서 세우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 모임 중에 유대인으로서 부자들이 왔을 때에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가난한 자가 들어왔을 때에는 저기 서 있든지 아니면 자기들의 발판 아라에 있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죄라고 지적한다(3절). 

  더욱이 이때는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는 때였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는가?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A.D.45~49)는 로마의 제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Claudius, 재위A.D.41~54)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사도행전에 등장하고 있는 '글라우디오'를 가리키며, 바울이 항소하려 했던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황제 때에 중요한 3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이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천하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헹11:28). 그래서 민심이 흉흉해진 것이다. 둘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는 것이다(행18:2).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타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때 로마인이었던 브리스길라도 자신의 남편이자 유대인이었던 아굴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고린도로 이주하여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방령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불안한 마음을 더 갖게 만들었다. 셋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자신의 조부인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조모를 신으로 예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석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어서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산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더욱더 가난한 자들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도 위태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로마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인 유대인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며, 로마인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아물러 신앙(종교)생활의 어려움도 같이 겪어야 했던 것이다. 

 

4.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가 행한 책망과 충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들을 향하여 첫째로, 그들이 자기의 동족인데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그들을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율법말씀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그 율법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부자가 있었지만 이들은 역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특히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교회의 성도들을 엄히 책망하였다. 이들은 그때 영광의 주님으로 하늘에 계시지만 한 때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마굿간에 태어나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아파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는데, 지금 영광의 주님을 믿는 수신자들은 가난한 자를 더욱 더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들에게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준수하라고 권고한다(8절). 왜냐하면 다른 율법 말씀은 잘 지키고 있어도 이웃사랑 계명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라이기 때문이다(8~9절). 그러므로 야보고는 그들을 향해 엄하게 충고한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동도 하라는 것이다(12절). 다시 말해, 자유케 하는 율법 곧 복음은 성도들에게 어떤 의무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말씀을 들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3절). 그렇다. 우리가 충분히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지 않고 끝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한다면,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지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라며, 긍휼을 베풀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5.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가?

  이어 야고보는 자신의 형제들이 궁핍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자기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15~16절).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14절).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17절). 그러한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유대인 부자들과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전한다. 그것은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귀신들도 역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지만, 귀신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야고보 당시에도 성도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믿는 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뒤따라올 때 그 믿음을 가리켜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우리에게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자신에ㅐ게서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며, 또한 자신을 천국에까지 데려다 줄 것이며, 더욱이 자신을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일이다. 이것은 다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믿음은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입증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가 아니면 행함으로 비로소 얻어야 하는가?

  이어서 야고보는 약2:20~26의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칭의가 믿음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제시한다. 아브라함과 기생라합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효력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야고보는 이때 창세기에 나오는 두 인물들 곧 히브리인이었던 '아브라함'이라는 남자 인물(창12~25장)과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이방인 '기생라합'이라는 여자 인물을 예로 든다(수2장). 이 둘은 믿음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다음의 2가지를 채웠던 자였기 때문이다. 첫째는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비로소 온전케 되었다는 점이다(22절). 여기에서 '온전케 되었다'는 말이 완전하게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도 자기아들 이삭을 제단에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비로소 그 믿음이 실제라는 것이 입증이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가 있으니, 그녀는 "기생 라합"이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녀는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 천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기생집을 하면서 소문을 들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기꺼이 자기들이 믿었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결단을 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최초로 행한 것이 여리고성을 정탐하려고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 명을 은밀하게 숨겨두고 잘 도망가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기생 라합은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여리고성의 멸망으로부터 건져낼 수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들이다. 그렇다. 자신이 이제 가을 나무가 되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지 않은 나무라면 과연 이 나무가 열매맺는 나무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7.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칭의론과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론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칭의론은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믿음이지만, 야고보는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같이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칭의라는 것도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과 함께하는 믿음이어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칭의론이다. 그러하면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욌는 자들이며,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역시 성경말씀에 이미 나와 있다.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정립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도 역시 손쉽게 풀 수가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선언적인 칭의가 아니라 그것이 성장하여 충만케 되는 칭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것을 두고서 그를 의롭다고 칭하셨다. 하지만, 창세기 22장에 가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칭의가 충만케 된다. 그러니까 창15장의 믿음의 칭의가 창22장에 갔을 때에 비로소 가득찬 칭의가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전부터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의 믿음도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22절).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칭의는 이제 시작으로서의 칭의이자, 선언적 의미의 칭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22장의 칭의는 완성으로서의 열매가 가득한 칭의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미 갖고 있었던 칭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입증이 되는 칭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자신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입증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전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고 충만한 믿음이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8. 나오며

  어떤 사람은 지갑이 회개를 해야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라도 기꺼이 남을 위해 내어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람은 자기 욕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에 진정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지가 그에게서 입증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풍성한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변환경이 좋지 않거나 자신의 앞날이 걱정이 될 때에는 쉽게 자신의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는 즈음에도 여전히 똑같다면 어떡하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오늘 나누었던 말씀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약2:19).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또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 정도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믿는 이들의 상당수는 지금도 시작으로서의 칭의가 인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기에게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다. 자신이 이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면 그에게서 아직 행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성으로의 믿음을 점검할 때인데도 자신은 시작으로서의 믿음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 사람의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지금 진정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은 100미터 달리기 선수인데, 트랙의 출발 선상에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선수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고백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의심해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제는 행함으로서 입증되는 믿음을 나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그래서 그날에 가서 후회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4월 06일(수)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