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미워하여 해하려고 계속해서 시도하는 대적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연대하여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3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날마다 그를 저주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힘있는 사람을 시켜서 그를 없애버릴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기회를 봐서 그도 죽여버리고 나도 죽겠다는 각오도 덤벼드는 것이다.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그런데 시편118편의 저자는 제4의 길을 모색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대체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대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일까?

 

1. 들어가며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요 또 하나는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지식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체험은 기도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믿음이 필요하다. 성경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에게 간구하는 소원을 들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은 시편118편에 나오는 저자를 통해서 그가 직접 기도를 통해 체험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시편118편에 등장하는 시인(시편저자)는 무엇 때문에 기도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떤 경험을 했길래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크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분명 어떤 고통스런 현장에 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살 소망마저 끊어지게 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시편저자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었다. 대체 어떻게 엄청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까?

 

2. 시편118편은 어떤 시편인가?

  우선 우리는 시편118편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그리고 시편저자의 고통의 원인과 대처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시188편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떠한가? 잘 알다시피 시편은 총150편의 시인데, 그것들 중에서 표제어가 없는 시편은 총34편이 있. 그런데 시118편은 표제어가 없는 시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저자는 누군지를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시편118편을 할랄시편의 하나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랄시편은 시113편에서 118편까지인데, 특히 시113~118편의 할랄시편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인들이 유월절이 되면 사용하는 시편이다. 유월절 식사를 하기 전에는 시113~114편을 노래하며,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는 114~118편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시118:25~26의 말씀의 경우는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감람산으로 가실 때에 불렀던 노래였다(마26:30). "호산나 호산나~"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시편들 중에서 시113~118편까지를 낭독하고 노래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편113~118편이 출애굽과 연관되어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편기자가 시편113~118편을 쓴 것이다. 특별히 시편118편은 출애굽 후,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던 "바다의 노래(출15장)"에서 많이 따왔다. 예를 들어보자. 시118:14절은 출15:2에서 그대로 따왔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15:2)" 그 뿐만이 아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시118:1,29은 출15:13에서),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시118:28은 출15:3에서), "여호와의 오른손(시118:16~17은 출15:6에서)"는 구절은 출애굽기 15장의 "바다의 노래"에서 다 따온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편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옛날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118편은 고통과 억압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던 찬양시편인 것이다.

 

3. 시편118편의 저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시편118편의 저자는 왜 이 시편을 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 시편기자도 과거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통과 억압상태에 있었다가 고통에서 풀려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편저자는 무슨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그 고통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먼저, 이 시편기자가 겪었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이 시편기자가 겪었던 고통은 2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으로 인한 고통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으로 인한 고통이었다. 먼저 그의 고통은 사람으로 인한 고통이었는데, 대적이 시편기자를 미워하되 계속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혼자 시편기자를 죽이려했지만, 나중에는 연대하여 죽이려고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타민족까지 합세하여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이 시편은 사울왕이 다윗을 추격하여 죽이려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울왕은 백성들이 다윗을 더 좋아하자 시기질투심이 발동하여, 다윗을 없애고자 시도하였다. 당시 사울의 군대장관으로 발탁된 다윗은 같이 식사하다가도 사울왕이 던진 창에 맞아 죽을 뻔하기ㄹ르 2번씩이나 경험해야 했다. 그러가 사울왕이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하면서 블레셋군대에 보내 다윗을 죽이려고도 시도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결국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사울왕은 포기하지 않고 무려 10년동안 다윗을 쫓아다니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가 벌떼처럼 자기를 에워싸면서 포위망을 좁혀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다윗에게 있었다. 다윗이 마온황무지에 있을 때에 사울왕에 의해 더이상 도망칠 곳도 없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삼상23:26).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에 맞딱뜨려야 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훈련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지만,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다(시118:17~18).

 

4. 시편118편 저자는 어떻게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를 이길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 시편저자는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시도하는 대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기도"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이다(시118:5).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첫째, 날마다 사울왕을 저주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둘째, 몰래 기습적으로 사울왕에게 다가가서 그의 숨통을 끊어놓을까도 생각했을 것이다. 셋째, 자신의 외할머니의 나라인 모압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여 사울왕을 제거하도록 부탁헀을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우리의 원수를 직접 처리하려고 시도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원수는 더 악랄하게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그렇다면 다윗은 이 문제 앞에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을까? 다윗은 크게 2가지의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하나는 기본적인 믿음으로서 하나님은 선하고 인자하심이 끝이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시118:1,29).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선의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끝까지 붙들고 기도했던 것이다(출34:6). 또 하나는 구체적인 믿음으로서, 다음 4가지의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나를 있게 한다 하더라도 절대 나를 죽음으로까지는 몰고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했던 것이다(시118:17~18). 둘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의 억울함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했던 것이다(시118:6~7). 다윗은 당시 이렇게 기도했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삼상24:15)" 그리고 셋째,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며, 나를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했던 것이다(시119:10~12, 15~16).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다윗의 기도의 내용이다. 다윗은 사울왕을 죽여달라고 요청하거나 저주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울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2번씩이나 맞이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24:12)",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26:10)" 그렇다. 원수를 나를 죽이려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원수를 직접 손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지 우리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닌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건져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넷째, 마지막으로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이다(시118:22~23). 그렇다. 다윗은 자신의 형편처지를 지금은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이나 지도자들이 몰라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장차 자신을 당신의 나라를 위해 요긴하게 사용하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우리도 아무리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우글거리고 나를 해하려 에워싼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 자리에서 절망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윗을 보라. 다윗은 10년동안 사울왕으로부터 쫓김을 받는 신세였지만,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사울왕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처리해주셨지 다윗이 행한 것이 없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사울왕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를 온전히 다윗에게 떼어 주셨으며, 다윗은 그후 이스라엘에서 가장 영광스런 왕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었다. 믿음이란 선하고 인자하신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받아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문제 앞에서 문제만을 놓고 걱정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문제 앞에서 대적을 저주하거나 대적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를 구원해주시기를 요청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당신의 오른팔로 우리를 안으실 것이고, 환난중에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다. 그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요긴한 돌로 쓰임받게 해 주실 것이다. 건투를 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는 어떤 자일까? 다윗은 시편14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한 사람을 소개한다. 그런데 중의적인 방법으로 그를 소개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두번째 부인의 전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가 누구이며, 그 최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1. 들어가며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는 누구인가? 사실 교만이라는 품성은 원래 인간의 품성이라기보다는 사탄의 품성이었다. 그가 하늘에 있을 때에 제일 처음으로 교만한 마음을 품었고, 그 마음을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도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탄의 품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곧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면서, 교만한 자의 최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는 누군가?

  시편14편에서 다윗은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다윗은 그가 바로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시14:1). 그렇다면, 이 세상에 가장 교만한 사람의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다윗은 시편14편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의 특징들을 4가지로 열거해 놓았다. 이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은 첫째,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주인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횡포를 통제할 수는 없다(시14:1). 둘째, 그는 늘 자의적으로 행한다. 그래서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일하며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아간다(시14:3). 그리고 셋째, 열심히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내어버린다(사14:4). 그래서 자신에게 방해되는 모든 것들은 제거해버리거나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넷째,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미워하며 핍박한다(사14:6).

 

3. 다윗이 초기에 경험했던 교만한 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렇다면, 다윗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다윗은 그의 이름을 중의적으로 표현했다. 다윗을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했다(시14;1). 여기서 우리는 '어리석은'이라는 형용사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나발'이라는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윗의 초기 도피생활 가운데 그에게 악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마온출신의 나발이라는 사람이었다(삼상25:2~3). 그는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었다. 그에게는 양이 3천마리, 염소가 1천마리나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종들도 여럿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완고했고, 행실이 악했으며, 은혜도 몰라보는 파렴치한이었다. 어느날 다윗이 같이 도피하는 자들 600명과 함께 갈멜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 갈멜에 있는 나발의 양떼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준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둘이 상종할 동안에 누군가 다치거나 양떼 중 잃은 것이 없었다. 어느날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자신의 소년 10명을 보내 나발로부터 무엇인가 은혜를 구했다. 하지만 나발은 자신의 떡과 물과 고기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다윗은 자신의 군사력으로 얼마나 나발의 양떼들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았다. 하지만 나발은 그 은혜를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의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칼을 찬채 나발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발의 종 하나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주인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에게 고하였다. 아비가엘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니 즉시 떡과 포도주, 요리한 양고기와 볶은 곡식 그리고 건포도와 무화과뭉치를 자루에 넣고 나귀에게 싣고 다윗이 오는 길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그의 지혜로운 말은 다윗을 감동케하고도 남았다. 결국 다윗은 그녀를 받아주었고 그녀의 남편과 종들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아비가일이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발이 왕의 잔치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있지 아니한가? 그러자 그 다음에 술이 깬 나발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나발은 그 즉시 마음이 무너지면서 몸이 돌과 같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0일 후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자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자 훗날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아비가일을 데려와서 자신의 두번째 아내로 삼는다.

  이 사람이 바로 나발이다. 나발은 하나님이 없다고 사는 자였다. 오직 자신의 부와 권력을 믿고 자신의 육체의 쾌락만을 위해 살아온 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실천하지 않았다. 고아와 객과 과부를 선대하라고 했지만 그는 객들인 다윗의 소년들에게 매우 인색했다. 아니 그들을 경멸했다. 또한 자신의 양떼를 보호해주고 종들을 지켜준 은혜를 저버렸다. 그가 바로 어리석은 자 곧 나발이었던 것이다.

 

4. 교만한 자의 최후는 어떻게 돌변하게 되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 곧 악한 자의 종국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것이다(시14:5)" 이 말은 악행을 저지르며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맘대로 살아가는 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대변해준다. 악인 혹은 교만한 자의 최후는 한 마디로 비참하다. 왜냐하면 심판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발은 다윗을 악하게 대한 것에 대해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윗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그만 낙담하여 그의 몸이 돌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다. 죽음이 자기를 엄습해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공포에 질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여, 겸손히 선행을 실천하고 회개생활을 해 온 자는 죽을 때의 모습이 다르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겸손하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들을 용서해주실 것을 겸손히 간구한다. 그리고 주님의 속죄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천군천사가 자기를 데리러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만한 자 곧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오직 자기자신만을 믿고 살아온 자는 죽음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그에게 죽음은 공포 그 자체다. 심판을 받아 어떤 상황에 떨어질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발이 그랬다. 자신의 부요와 권력을 믿었을 때에는 가진 자로서 무수한 횡포를 저질렀다. 하지만 자기보다 더 힘쎈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었기에, 나발은 그만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화나 제대로 되었을까 의심스럽다. 밥이나 제대로 목으로 넘어갔을지 의심스럽다. 결국 나발은 10일이 지난 후에 죽고 말았다.

 

5. 나오며

  그렇다. 악인은 자신의 악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은 빨리 죄인의 신분으로 자신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악인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다. 그리고 오직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 살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도 않고 자비를 베풀지도 않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자신이 악하게 살아왔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동안 자신이 인생을 잘못 알고 살아왔음을 겸손히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긍휼을 간구해야 한다. 자신의 지은 죄들에 대한 주님의 속죄를 간구해야 한다. 그래야 심판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지 않게 된다. 그래야 죽을 날이 가까울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충만해진다. 건투를 빈다.


 

사도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의인들이 여럿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나 욥과 다니엘 등은 의인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의인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종교개혁자들은 의인의 반댓말을 악인이라고 해석해 버렸다. 즉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선을 행하지도 못하는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에 휩싸여 있는 자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려고도 하지 않고,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도 아니하고 있다. 큰 일이다. 어디서부터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늘 그 실마리를 찾아서 떠나보자.

 

1. 들어가며

  사도바울은 롬3:1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아니다. 성경에 보면, 의인이라고 기록된 자들이 나온다. 구약성경에는 적어도 4사람이 나오고, 신약성경에는 3사람이 나온다. 족장시대에는 노아과 욥과 롯이 의인이었고(창6:9,겔14:14, 창18:23), 선지자들로서는 다니엘이 의인이었다(겔14:14).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세례요한의 부모였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의인이었고(눅1:6), 이방인으로서는 고넬료가 의인이었다(행10:22).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한 것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틀린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은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쓰인 배경과 문맥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인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의인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정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인지, 의인이 있다면 어떤 자를 의인이라고 하는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믿는 이들도 주님 앞에 어떤 각오와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정말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는가?

  사도바울은 롬3장 10~18절을 통해서, 유대인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으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더욱이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는데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 정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우리는 사도바울이 롬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관하여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면,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 부패에 빠져 있으며,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전적 타락의 교리를 무작정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정말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기까지 우리가 해야 할 도리나 책임은 아주 없는 것일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으려고 나와야 한다고 하셨고,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것도 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하는 것인가?

 

3.인용성경구절에 대해서, 관주가 잘못 연결되는 바람에 빚어진 놀라운 진실

  먼저, 우리는 롬3:10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와 이 본문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한다. 롬3:10에 나오는 의인과 반대되는 자는 11~12절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전혀 찾지도 아니하며 선을 전혀 행하지도 않는 자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롬3:10~12의 말씀은 시편14:1~3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성경에 자그맣게 기록된 관주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거기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이다. 우선 롬3:10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렇다. 그런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대한 관주를 보면, 이 말씀이 구약에 있는 시편14:1이하를 인용한 것이라고 쓰여있다. 그러니 모든 독자들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구약성경 시편 14:1이하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시편14편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없다. 다만, 그 다음구절인 롬3:11~12의 말씀이 시편14:2~3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어디에 있는 말씀일까? 구약성경을 전부 뒤져보면, 이 말씀에 가장 가까운 말씀은 전도서 7장 20절인 것을 알 수 있다. 전7:20은 이렇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과 롬3:11~12의 말씀은 한 본문에서 따온 말씀이 아니다. 또한 롬3:13~18의 말씀도, 시편14편에 나오는 말씀들이 아니다. 이 말씀들은 여러 군데의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복합인용성경구절들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롬3:10~18의 말씀이 시편14편 1절이하에서 인용한 말씀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롬3:10의 관주에 이 본문이 시14:1이하를 인용한 것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래의 각주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누군가가 달아놓은 것일 뿐 정확무오한 해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적어도 롬3:10~12의 말씀은 만큼은 시14:1~3에서 왔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4. 사도바울은 무슨 뜻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했는가?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7:20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는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롬3:9의 말씀을 인용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죄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롬3장10절이하에서 말하는 의인의 반대는 죄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좀 다르다. 구약성경에는 의인의 반대어구로 대부분 쓰인 것은 악인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서는 의인의 반대는 악인이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사람을 지칭하고, 악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저주를 받을 사람을 가리킨다. 특히 시편과 잠언에 보면, 의인과 비교되는 사람이 거의가 다 악인으로 나온다. 시편에서는 13번을, 잠언에서는 무려47번이나 나온다. 그리고 성경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약 78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왜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은 의인의 반대개념으로 악인을 언급할 것일까? 그것은 한 사람은 복을 받지만 한 사람은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롬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전부 다 구약에 나오는 성경구절로서, 의인이 아닌 악인들의 경우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도바울이 롬3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악인이라는 것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죄아래 놓여있는 죄인인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알려주려하다보니 구약성경에 기록된 자들 중에서 악인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5. 바울의 의도와는 잘못 나가버린 종교개혁자들의 해석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이 본문을 이용하고 있는가? 이 본문을 전적 타락 내지는 전적인 무능력의 증거구절로 인용한다. 모든 사람은 의인이 아니며, 전적으로 타락해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전적인 무능력의 상태에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롬3:10에서 말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의 말씀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죄 아래 놓여 있으므로 죄를 범하는 죄인이라는 뜻일 뿐, 모든 사람들이 다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6. 롬3:11~12에 나오는 악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롬3:11~12에 나오는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다 치우쳐 무익한 일만을 일삼으며, 선을 전혀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시편14:1에 나온다. 시편14:1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 이와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럼, 시14:1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어리석은 자'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하지도 아니한다. 한 마디로 그는 악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롬3:11~12에 말하고 있는 자는 시편14:1에 나오는 악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자기마음대로 악을 저지르고 있는 자는 대체 누구일까? 시편14편은 다윗의 시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다윗이 익히 알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그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압살롬이 아닌가 말하기도 하는데 압살롬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시편14편에서 그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할 뿐더러 아주 부패한 자요 선을 전혀 행하지도 않으며, 악을 행하는 자이며,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시14:1~6). 하지만 그가 누군지를 히브리어 본문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발'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도 다윗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말했다. "원하옵나니 내 주(다윗)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어리석은) 자니이다(삼상25:26)" 그렇다. 미련하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나발'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14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는 나발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가 행하였던 모든 일들이 시편14편에 나오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발은 유다지파의 갈렙족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마땅히 베풀어야 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했으며, 자신이 받은 은혜마저도 갚을 줄을 몰랐으며,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괴롭혔고, 자기에게 주어진 물질을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썼다. 그러므로 롬3:11~12에서 말하고 있는 자는 나발과 같은 자인 것이다. 결국 롬3:11~12에 나오는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악행만을 일삼는 나발과 같은 자를 가리킨다.

  하지만 성경주석가들은 의인이 아닌 자들은 모두 나발과 같은 자라고 해석해버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해있으며,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만을 살펴보아도, 예수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많지는 않지만 선을 행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불치병이나 위급한 일이 발생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죄인은 될지언정 악인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지, 악인을 회개시키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마9:13). 악인이란 누군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으며, 자기 맘대로 행하는 자다. 이런 자는 결국 구원받을 수가 없다. 나중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도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불못에 던진다고 하셨다(마13:49~50). 의인 중에서 죄인을 갈라내어 불못에 던진다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하며 악행을 일삼는 자 곧 악인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우리는 나발과 같은 악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성령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면 즉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잠28:13에서도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고 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받을 수 없고, 다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속죄의 방법을 통해서만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선만을 행하고, 아주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나발과 같은 악인은 아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않고, 선을 행하지도 아니하며, 부패하여 온갖 악행만을 일삼는 자를 가리킨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 오직 하나님께서 마련해준 속죄를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속죄를 받아 죄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야 용서받은 죄인이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겸손한 시인과 회개 그리고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용서받는 죄인이 되고 칭의인이 되어, 천국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사람이 죽으면 낙원과 음부로 가는가? 아니면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가? 한편, 낙원과 천국, 음부와 지옥은 어떻게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갈 자는 만세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자유의지도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가? 이사야의 말씀은 메시야에 관한 놀라운 예언들이 빼곡할 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도 상당히 많은 말씀들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말씀을 비교하면서, 천국과 지옥, 특히 지옥에 대해서 더 소상히 알아보고, 우리가 어디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이사야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만큼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이사야를 읽으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며, 이사야를 읽으면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이사야서는 회개의 복음서다. 이사야서는 1~39장까지가 한 파트인데, 거기의 주제는 '심판'이다. 그런데 40~66장 곧 두번째 파트의 주제는 '회복(구원)'이다. 회개가 심판을 이길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이사야 66장은 회복에 관한 메시지임과 동시에 심판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이다. 특히 오늘 이 시간에는 심판후에 나타나게 될 2가지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 및 지옥에 관해 비교하면서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새 하늘과 새 땅에 곧 천국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게 될 것인지, 불타는 지옥에는 누가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지옥에 어떤 곳이며 누가 들어가게 되는지, 지옥의 실상에 대해서도 샅샅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두 주 전에 이사야강해(45)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통해서 천국이 어떤 장소이며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오늘은 지옥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다룰 것이다.

 

2. 이사야는 누가 천국에 누가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는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 누가 들어가며, 지옥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는가? 이사야선지자는 누가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와 누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인지 그 대상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준다. 첫째, 누가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가? 그것은 비록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 하더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들어간다(사66:15~17). 이것은 오늘날에 들어와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준다. 그리고 둘째,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나아와 영광의 주님을 알고 그분을 널리 전파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언급한다(사66:18~21). 사실 구약시대만해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백성 정도였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통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에는 그들이 지켜야 할 법도도 있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사장적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다. 먼저 믿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어 그들도 구원받게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사명을 잘못 사용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는 남을 배척하는 데에 사용하고 말았고, 사명은 외골수, 자기만 챙기는 것으로 사용하고 말았다. 결국 누가 지옥에 떨어지며 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가? 그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막론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그리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3. 천국과 지옥, 낙원과 음부는 어떻게 같으며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장차 우상숭배자들과 악인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이란 대체 어떤 곳인가? 이사야에서는 지옥의 전단계인 음부(스올)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다. 지옥은 어떤 곳이며, 음부는 또 어떤 곳인가? 그리고 의인들이 들어가게 될 낙원과 천국은 또 어떤 곳인가?

  먼저 천국과 지옥에 관련된 용어부터 정리해 보도록 하자. 먼저, 음부와 지옥에 대해 알아보자. '음부'란 구약시대에는 '스올(히브리어)'이라 불리웠고, 신약시대에는 '하데스(헬라어)'라고 불린 용어다. 음부는 그늘진 낮은 아랫곳을 지칭하는 용어다.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음부를 '스올'이라고 용어그대로 번역하고 있다(민16:30,욘2:2, 합2:5).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개역성경에서 '음부'라고 번역한 것을 그대로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마11:23,행2:27,계1:18,20:14). 이제는 지옥의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구약시대에는 '지옥'이라는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지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마5:22,29,30), 이때 예수께서 사용하신 사용하신 '지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게헨나'라는 단어다. 지옥을 알려주는 데에는 아주 적절한 용어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게헨나'라는 뜻이 '힌놈의 골짜기' 혹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수18:16,왕하23:10,대하28:3). 이스라엘의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 아래쪽에는 쓰레기소각장이 있었다. 거기에서 구약시대 때만해도 몰록신의 숭배가 있었다. 그때에 사람들은 자식을 불가운데서 지나가게 하여 태워죽였다(렘7:31,32:33). 나중에 그 장소는 예루살렘 도시 안의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그곳은 항상 유황을 태워서 불이 계속 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에 '힌놈의 골짜기'는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장소 혹은 불과 유황이 타는 곳이라는 의미로 각인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지옥이라는 개념을 이러한 장소를 빗대어 사용하신 것이다. 고로 '지옥'이란 영원히 불타는 장소라는 의미였던 것이다(마5:22,막9:43,49).

  그런데 구약시대와 예수께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성한 후에 '음부(스올)'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곳이 '지옥(게헨나)'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 음부라는 장소가 신약시대이후 지옥에 되어버린 것이다. 구약시대에 음부라는 장소는 불타는 장소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이후에 악인이 들어가는 지옥도 여전히 불타고 있는 장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사역 이후부터는 음부라고 부르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지옥'이라고 불러야 한다.

 

4.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제는 음부와 지옥의 차이를 조금 더 알아보자.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들어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귀신들이 없었다. 사탄마귀만이 타락한 상태에서 천국에서 죄를 지은 인간들을 참소하는 일을 도맡아 행하고 있었다. 그때만해도 자기 밑에 귀신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귀신'이라는 용어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직전이나 직후에 사탄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날 때 함께 마귀를 따르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계12:7~9).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귀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라.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얼마나 많이 귀신들이 등장하고 있는가? 그때에 이미 귀신들은 음부의 문들을 통해서 지구 위로 올라와서 사람들을 죄짓기 위해 미혹하고 있었다. 물론 음부의 문들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구약시대에 욥이나 히스기야왕은 음부의 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욥17:16, 사38:10). 물론 예수님도 그와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마16:18). 그렇지만 사탄마귀와 귀신들은 자신을 성령으로 위장하여 거짓 능력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미혹하고 있다. 또한 거짓 환상과 꿈을 보여주어 미혹하고 있으며, 오늘날도 계속해서도 거짓 예언을 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구약시대 악인들이 들어가는 감옥이었던 음부(지옥)가 언젠부턴가는 귀신들의 처소가 되었던 것이다.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예수께서 탄생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귀신들이 하늘에서 쫓여내려와서 음부(지옥)에 들어가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죄를 지은 인간들은 한 번 지옥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지만, 귀신들은 지금도 지구와 연결된 음부의 문들을 통해서 지구 위로 올라와 온갖 거짓과 미혹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은 더이상 음부나 낙원으로 가지 않는다. 그 시기부터는 누구든지 죽는 순간에 부활체를 입는다. 이때 의인들은 생명의 부활을 입고 천국으로 곧바로 들어가며, 악인들은 사망의 부활을 입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구약시대까지만해도 의인들은 죽어서 '낙원'으로 올라갔고(눅23:43), 악인들은 죽어서 '음부' 지구의 땅 속에 있는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민16:33). 하지만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낙원을 천국으로 옮겨버리셨다(엡4:8, 시68:18). 그래서 구약시대에 구원받았던 자들이 다 한꺼번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음부는 지옥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때에 타락한 천사가 음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지옥에는 귀신들과 악인들이 함께 거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만약 지옥(게헨나)에 떨어지게 된다면, 그는 거기에서 당분간 타락한 천사들 곧 귀신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거기에 있는 귀신들은 정말 악랄하다. 더이상 자기들이 천국(하나님이 계시는 셋째하늘)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 떨어진 영혼들을 더 강력하게 고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 지옥(음부)의 4가지 특성은 무엇인가?

  사람이 들어가게 될 음부 혹은 지옥은 대체 어떤 곳일까? 음부(지옥)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절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욥7:9). 둘째, 그곳에서 불과 벌레들로 인하여 형벌을 받는데, 그들을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사66:24,14:11,요17:14). 음부에 귀신들이 들어가기 전까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2가지 형벌만을 받고 있었다. 하나는 불로 소금치듯함을 받는 것이었다(마5:22,막9:43,눅12:5,눅16:24). 그리고 또 하나는 구더기나 벌레들에 의해 살이 파먹히는 고통을 받는 것이었다(막9:48~49). 그러나 귀신들이 그곳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귀신들로부터도 온갖 고문을 받고 있다. 지금도 귀신들은 온갖 고문의 도구들을 사용해서, 지옥에 들어오는 영혼들을 고문하고 있는데, 그 방법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생각만해도 오줌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A.D.397년 카르다고 종교회의를 통해 요한계시록이 정경이 되기 전까지 교회들마다 회람되었던 묵시록이 더 있었는데 베드로의 묵시록도 있었고, 바울의 묵시록도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묵시록을 보면, 귀신들에 의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고문받고 있는 장면이 적나나하게 나온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렇지만 지옥에서는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장소라는 것이다((계9:6). 불에 타든지, 벌레에게 먹히든지, 귀신들의 고문에 의해 박살을 나든지 해서 죽는다고 해도 다시 재생되어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이다. 넷째, 거기에서 밤낮으로 쉬지 못하고 서 계속해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밤같은 시간이 찾아와 쉬는 시간이 없다.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이다. 밤낮 할 것없이 쉼없이 고통받는 곳이다(계14:10~11).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귀신들로부터 고문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영혼들처럼 우리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귀신들에게 당하는 고문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때인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된다면, 그곳에 있는 귀신들은 지옥의 맽 밑 곧 무저갱에 쳐넣어질 것이다(눅8:31). 그때에는 지옥에는 오직 불신자들만이 남게 되고, 귀신들은 다 무저갱으로 떠나갈 것이다. 그래도 불과 벌레들로 인한 형벌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6. 나오며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차례다. 만세전에 구원얻을 자와 멸망받을 자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면 어떻게 심판날에 우리를 심판하시겠는가? 미리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완전하지는 않아도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면 반응할만한 양심을 우리에게 남겨놓으셨고, 자유의지를 남겨놓으셨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을 때에 그것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또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이도 또한 우리들 자신임을 알라.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영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도 천사도, 마귀와 귀신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 또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죽고나면 즉시 다른 영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아도 우리는 둘 중의 한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의 한 곳은 천국이요 다른 한 곳은 지옥이다.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고 싶은가? 그곳은 천국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믿음으로 메시야를 믿고 자신의 죄를 처리한 자는 영원한 안식의 장소인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죄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계속해서 죄짓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불과 유황이 타는 장소이며, 벌레들이 가득차 있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죄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이 들어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천국와 지옥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간증들을 다시 한 번 철저히 읽어보라.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라. 그리고 그것들 중에 자신이 가야할 곳을 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곳이 여러분에게는 꼭 천국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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