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수메르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수메르어가 해독되기 시작하자,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는 곧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창세기 1~11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창조이야기, 에덴동산이야기, 노아의 홍수 이야기, 바벨탑 사건)이 성경의 기록보다 1천년 이상 앞선 수메르인들의 점토판에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메르인이 바벨탑사건까지 다 알고 있다가 다른 장소로 이동었던 인류의 후손이라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래된 고대의 문명이나 기록들은 다 창세기 11장 바벨탑사건까지만 나온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잘 모른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할 때 일본이 자행한 만행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날조하고 없애버린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대역사인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해 버렸다. 무려 20만권 이상의 상고사의 기록들이 불에 탔고 없어지고 말았다. 거기에는 우리 고조선이 어떤 나라였고 어떤 신을 섬기고 살았는지 기록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다행히 복원된 고조선의 8조 법금을 살펴보니, "제1조 너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정성을 다해 순수하게 섬겨라. 제2조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서 온 것이니 너희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니라."을 찾아냈다.
  고조선은 놀랍게도 하늘의 상제이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던 민족이었던 것이다. 단군은 밝달임금을 이두식으로 쓴 것이다. 밝달이란 밝은 땅이라는 옛 말이다. 그렇다. 바벨탑사건으로 인하여 언어가 혼잡해지자, 그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것에 대한 수많은 증거자료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려 2200년간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겨왔다는 사실이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이 B.C.2333년이고 제47대 단군을 끝으로 고조선이 멸망하게 되는데, 그때가 B.C.108년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무려 2천년간을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겨왔던 민족이다. 그 흔적은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고조선의 후예들의 풍습 즉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제천의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A.D.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제2년에 불교가 전래되고 이어 백제와 신라가 불교를 수입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급격하게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석가모니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이 나라가 망하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는가? 이어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되자 이번에는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되어 조상신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조선 500년의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조상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나라는 일본에게 패망하고 만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나라도 잃어버리고, 언어도 잃어버리고, 이름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미국의 선교사들을 보내주시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는 영영 역사의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질 뻔 했다. 선교사들이 이 나라에 들어와 보니 제일 놀란 것은 이 백성들이 다 흰 옷을 입고 다니더라는 것이다. 세상천지에 흰 옷만을 고집하며 입고 사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제사장만이 입는 옷을 말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전해주기 전에 이미 이 나라사람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늘의 상제 곧 하나님을 섬기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 놀랐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패망한 이 나라에 하나님신앙을 선교사들이 되찾아 준 것이다. 그렇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외래종교요, 조선시대의 조상신을 섬기는 유교가 외래종교이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서양종교를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라. 우리 민족은 고조선 때부터 빛이 시작되는 장소인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었다. 백두산의 천재단과 마니산의 천재단은 왕이 하나님을 섬기던 장소였고, 각 고을에는 고인돌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1884년부터 들어온 기독교는 삽시간에 삼천리조국강토를 하나님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되찾은 이 나라는 다시 부강해지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지다 보니, 신명기의 우려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시 우상숭배에 빠져가는 한국교회가 되고 말았다. 추도(추모)예배와 장례예배 그리고 꽃을 바치는 행위가 다 우상숭배의 변형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죽은 자를 위해 드리는 모든 의식은 우상숭배 행위다. 죽은 자는 그 영혼이 이미 천국에 가버렸거나 지옥에 떨어지고 없는 것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곳에다가 절을 하고 음식을 차려놓고 꽃을 바치게 되면 누가 와서 그 경배를 받겠는가?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이 조상들의 흉내를 내고 그 경배를 받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또 다시 저주가 그 집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130년전 선교사들이 다시 찾아준 하나님을 우상숭배로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혼합종교, 잡탕종교를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천주교가 그러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도 이미 그러한 사상이 들어와 있음은 애석한 일이다. 큰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선교사들을 보내주셨는데, 다시 우상숭배을 버젓이 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으로 하여금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국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만을 섬기기 원하신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2천년의 흑암의 기간을 기다리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셨는데 왜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가?
 
  오늘은 우리교회가 일곱번째 맞이하는 생일날이다. 7년전에 이곳 동탄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는데, 벌써 7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과연 우리 교회는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꼭 필요한 교회인가? 아니면 있으나마나 한 교회인가? 아니면 필요없는 교회이자 없어졌으면 좋은 교회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셨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었다(마16:18).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땅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셨을까?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천국열쇠를 주려고 하심이다(마16:19). 사실 베드로는 그 일에 첫번째로 당첨된 인물이다. 그래서 먼저 그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처럼 바른 신앙고백자들을 모아 교회를 세워갈 것이며, 그에게 천국열쇠를 주실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지옥 간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이 시대에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프로테이지가 믿는 자들이라도 고작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목사들도 지옥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교회에 관한 말씀 말고 또한 교회에 관해 우리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신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마16장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른 신앙고백자들에게 천국열쇠가 주어질 것이며, 그렇게 해서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 하셨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3장에  가 보면, 부활승천하신 후에 사도요한에게 주신 교회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베드로가 들었던 말씀이 육신을 입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라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들었던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는 하늘보좌에 앉으시어 교회와 우주를 통치하시고 있는 하나님으로서 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때 주신 말씀을 읽어보았는가? 그 말씀은 축복의 말씀보다는 책망과 훈계의 말씀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 왜냐하면 벌써 교회가 타락했고 벌써 교회가 세속화되어 있었으며, 벌써 교회 안에 불순물이 들어와 교회가 세상의 종교와 혼합되어 있거나, 그 신앙의 내용 자체가 왜곡된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통해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천국열쇠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천국에 골인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로부터 약 65년이 지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교회에게주신 말씀에 의하면, 비록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는 성도들은 둘째사망의 해(불못)ㄹ르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도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11,3:5).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더불어 사도요한의 그물깁는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마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최초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는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르 부르신다. 하지만 사도요한은 그물을 수선하고 있을 때에 부르신다. 그래서인지 베드로는 그문을 던져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받았으며, 요한은 찢어진 교회의 그물을 수선하는 사도로서 쓰임을 받았다. 
  사도요한을 통해 부활승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들어보라. 거기에는 2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하나는 교회가 더 이상 바알신앙을 받아들여서는 아니되며 그것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가 믿고 있는 신앙고백 중 잘못된 신앙고백을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나 자신은 안전할 것이며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빨리 안약을 사다가 발라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아야 하며, 자신의 더럽고 부패한 모습을 회개한 뒤 흰 옷을 입어야 하며,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금과 같은 신앙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씀한다(계3:8). 오늘날로 표현한다면, "한 번 구원받았다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니, 내가 받은 구원은 안전하다다."라는 것들이다. 만약 그 교리가 맞다면, 왜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리고 믿는 자들 중에서 우상숭배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불못에 던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겠는가?(계21:8). 그러므로 자신의 지옥갈 죄들을 전혀 보지 못한채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 때문에 지금도 교회는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바른 교회는 어떤 교회를 가리키는 것인가? 주님처럼 성도들을 천국보내는 교회가 바른 교회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넘어지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는 교회가 바른 교회다. 교회가 크다고, 시스템이 좋다고, 제자훈련을 받은 리더가 많다고 좋은 교회가 아니다. 결국 영혼이 천국들어가게 해 주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에서 우리 영혼의 돌봄을 받아야하며, 이러한 영적 진리들을 깨닫고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주님께서 이 시대에 바라는 교회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셔 한 일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일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한 가지로 대답하신다. 그것은 그분이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오셨으며 또한 그 일을 하시고 가신다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그 이름이 어떻게 아들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아버지의 이름' 성경에 나온대로 그대로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말씀하신 "당신의 이름"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우리가 알 것은 아버지의 이름은 모세시대에 비로소 공개되었는데 그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훼"이셨다(출3:14-15). 개역한글성경이 쓰인 용례로 보면 '여호와'이시다. 그 이름의 뜻은 '스스로 계신 자' 혹은 '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분'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계신 자라고 할 때에 그분의 이름의 뜻은 '자존자'이다. 하지만 '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분'이라고 칭할 때 그분의 이름의 뜻은 '전능자'이다. 곧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자존자요 전능자라는 뜻을 합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셨다. 그때 아들이란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다. 여러분은 혹시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마1:21에 의하면, 그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이것을 원어대로 해석하자면,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여호와"라는 글자에다가 "구원"이라는 글자를 합친 단어가 바로 '예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예수는 딴 이름처럼 보이나 사실은 한 이름이다. 그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아들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사9:6, 요1:1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었노라고 말씀하셨다(요17:6).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제자들을 지켜주시기를 중보기도하셨다(요17:11-12). 또한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요17:26).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은 사실 부르기가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통해 가르쳐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만 그 이름의 음가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여호와'일까 아니면 '야훼'일까? 지금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분의 이름의 뜻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인류를 죄가운데서부터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차적으로는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게 하셨다. 그리로 그 다음 이제는 아버지께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라는 이름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나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고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었다(눅10:17). 또한 예수님도 부활승천하실 때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오직 예수의 이름만을 쥐어주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은 첫째, 인류를 구원하는 이름이요, 둘째, 권세있는 이름이다. 우리가 직접 능력있는 천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어도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그를 상대할 수 있다. 아니 그 세력들을 결박할 수 있고, 떠나라고도 명령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3가지 중보기도를 드린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겨진 제자들을 지켜주십사고 기도했다(요17:11-12). 둘째, 아버지의 이름이자 아들의 이름이 된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자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요17:15). 그리고 셋째, 더불어 아버지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했다(요17:17).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말씀은 곧 예수의 이름이요 곧 예수님이시다(요1:18).
  이제 당신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보라. 그리하면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여 아버지의 권세로 인류구원사역을 잘 감당했듯이, 우리들도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권세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사역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인류구원사역을 감당함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엄청난 영광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실 것이다(요17:22-24).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이름을 찬양하라.  
  악한 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을 악한 자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받으실까? 오늘 요한복음 11장 45부터 12장 11절까지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제공한다.
  오늘 본문(요11:45-12;11)은 예수께서 공생애 말기에,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는지와 아울러 향유를 허비한 마리아의 도유를 예수님은 왜 칭찬해주셨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 예수께서는 분명히 죄가 없으신 분이셨고 또한 산헤드린공회로부터 어떤 정죄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되어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예수님의 표적행하심은 사실 수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 보라. 38년된 중풍병자를 치유한 것도 엄청난 기적인데 그분은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까지 살리셨다.
  하지만 그러한 표적행하심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말 한 마디로 천국도 보낼 수 있고, 지옥에도 보낼 수 있었던 무소불위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분노와 시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 모의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때 산헤드린 공회의 회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민족을 죽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죄는 없지만 예수께서 죽어 주어야만 자신의 민족이 평안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죽여야 한다는 말했다. 어찌 유대의 최고사법기구 산헤드린공회가 이러한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악한 자 가아뱌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렇다. 뱀의 혀를 지녔던 가아바는 산헤드린의 욕심을 시행하도록 합당한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 악한 자들이란 오직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든지 다 동원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집단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가아바의 방향 제시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했으며 대대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사용해서 오히려 당신의 섭리를 이뤄가시기도 하신다. 왜 그런가? 가아바의 예언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한편, 유월절 엿새전 유다의 베다니에서는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 했던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리아는 엄청나게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그것을 전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 기름은 예수님의 머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나중에는 발까지도 흘러내렸다. 그러자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갑자기 일어난 광경에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그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향유는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부활은 시신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러니 향유가 있더라도 무엇이 소용이 있었겠는가? 마리아는 자기를 잘 알지 못했던 사이에 예수님의 육신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던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슬픔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헌신이라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며 칭찬해 주신다. 우리도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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