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3(금) 금요기도회

제목: 성도에게 과연 불과 물, 보혈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계22: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vzFC4qXDb5E [또는 https://tv.naver.com/v/48263544]

 

1. 들어가며

  구약의 절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칠칠절) 날에 두 덩이의 소제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셨다(레23:16~17). 그런데 이 소제물 만큼은 유일하게 누룩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다(레23:17). 그런데 이 두 덩이의 소제물은 결국 우리 주 예수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가리킨다. 두 덩이의 떡은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와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지 완전히 거룩한 자들의 모임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더욱더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 몸속에 있는 죄된 본성 곧 귀신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은 귀신을 제거하는 데 불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사용할 수 있는가? 대체 불은 무엇이며, 보혈은 무엇인가? 왜 이 불과 물은 우리 몸속에 들어온 귀신을 제거하는 데에 효과적인가? 그리고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 사용할 수 있는가?

 

2. 우리 몸속에 있는 귀신은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우리 몸속에 들어온 귀신은 결코 그냥 순순히 나가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 몸속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몸속에 들어올 때에는 다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서 들어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죄를 지었든지(요일3:8), 아니면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자기에게로 내려왔든지(출20:5) 다 합법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놈들을 밖으로 내보내려 할 때에도 우리 역시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그놈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의 입을 벌려 자백해야 한다(요일1:9). 그리고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 역시 우리의 입을 벌려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요일1:9). 이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귀신을 내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귀신을 내보낼 때는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 그것은 첫째, 자신의 자범죄와 조상들의 우상숭배죄를 자백해야 한다. 그것도 죄들을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한다(이것을 위해서는 '회개기도문'을 활용하시기 바란다). 둘째, 자백했으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령해야 한다. 이때 간접적인 방식으로 명령하는 것이 '십자가 세우기'라면, 직접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회개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귀신이 떠나간다고 생각하겠지만(몇몇 약한 귀신이나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귀신은 그래도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아니다. 귀신은 떠나가라고 명령해야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했으면 귀신더러 떠나갈 것을 명령해야 한다. 그런데 명령해도 떠나가지 않고 버티는 귀신들이 매우 많다. 그때에는 세 번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셋째, 나가지 않는 귀신에게 고통을 안겨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우리의 명령을 듣고도 떠나가지 않는 이유가 2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떠나가라고 명령했지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우리가 내린 명령권이 잘 작동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사가 와서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그들더러 떠나가라고 명령을 했지만 버텨도 괜찮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해서, 그들이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귀신이 떠나가도록 영적 무기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들을 불로 태워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불은 귀신들까지도 태울 수 있는 불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체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신4:24, 히12:29). 그리고 그때 떠나간 귀신이 다시는 달라붙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보혈도 함께 뿌려야 한다. 그러므로 귀신들을 진정 확실하게 떠나가게 하려면 불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리고 보혈도 같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3.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데 사용하는 불은 어떠한 불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만 해도 자신에게서 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단7:9~10).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멸하는(먹어 버리는, 삼켜 버리는, 소멸시키는, 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다(신4:24).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불로 타버리지 않을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 물질세계의 것들도 다 타버리고 영적인 세계의 것들도 다 타버린다. 왜냐하면 그 불은 심판하는 불이기 때문이다(시9:7~8). 그런데 그 불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도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단7:9~10, 겔1:26~27). 그러므로 구약시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에서는 불이 강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성도가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올 때는 무서워 떨어야 했다. 왜냐하면 태우면서 심판하는 불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은 귀신까지도 태워버린다(계20:10). 고로 귀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불을 매우 싫어한다. 불이 자신을 태워버릴 때에 엄청난 고통이 가해진다는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귀신들 대부분은 그러한 불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영권 있는 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명령해도 따르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버티면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에게 영적 무기를 사용해서 귀신에게 고통을 안겨 주어야 한다. 그러한 실행의 대표가 바로 불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권능이기 때문이다. 

 

4. 구약시대의 불은 신약시대에 어떻게 물로 바뀌었는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불'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이제는 불이 아니라 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다. 그래서 '생명수' 혹은 '생수'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이후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에서 이제 은혜의 보좌로 바뀐 것이다(히4:16). 구약시대만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하게 불이 흘러나왔지만 이제는 생명의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계22:1~2). 이 생명의 물이 흘러나와 생명의 강을 이루고 생명강 좌우에 생명나무들을 키운다. 그러면 생명나무는 1년에 달마다 12번씩 과일을 맺는다. 그리고 이 물은 더 흘러나와서 천국의 온 땅을 적신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집 마당 유리바닥에 이 생명수가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이 물은 지금도 영적으로 볼 때, 말씀을 선포하는 강대상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불로 보여졌고 불로 체험되었을 뿐이다. 실은 불이 물이요, 물이 곧 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은 이후, 이제는 불은 물로 보이며, 또한 물로써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물, 이 둘은 사실은 서로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지은 자에게 그것은 불로서 체험되기 때문이요, 죄를 용서받은 자에게 그것은 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서 더러움을 씻기시며 청결하게 하신다고 말이다(사4:4). 불이 곧 물이요, 물이 곧 불이기 때문이다. 둘 다 더러움을 태우는 것이자 씻어내는 것이다. 

 

4. 귀신을 쫓아낼 때 우리는 불과 물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불과 물은 누구든지 다 경험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다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귀신을 제거할 때에는 그것이 불로써 작용하기 때문이요, 회개하여 귀신을 제거한 자에게 그것은 생수로써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서는 불이 먼저이고 물이 나중이라는 것이다. 이는 먼저 불로써 죄와 악과 귀신을 태워버려야, 우리에게 하나님의 불은 물이 되어 체험되기 때문이다. 사실 불은 성질적으로 볼 때 매우 뜨겁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세계에서나 영의 세계에서나 마찬가지로 그렇게 쓰인다. 그러므로 귀신도 뜨거워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제거할 때에는 물이 아니라 불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귀신이 어느 정도 제거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을 주시기 시작하신다. 생수를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원함을 느낀다. 그러면 마음과 육체의 병이 고쳐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몸의 장기들이 신선하게 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가 일어난다. 하늘의 평강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5. 주의 보혈은 어느 때에 필요한 것인가?  

  그렇다면 주의 보혈은 어느 때 어디에 필요한 것인가? 사실 천국에서는 보혈이 없다. 거기에는 더 이상 보혈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보혈은 사실 육체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실 때에 보혈은 가지고 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십자가에서 다 흘리고 가셨다. 그러므로 보혈이 있는 장소는 지금 이 세상인 것이지 결코 셋째 하늘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보혈의 능력과 보혈의 혜택을 맛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보혈의 능력과 보혈의 혜택을 맛볼 수가 있는가?

  그것은 첫째, 우리가 회개할 때다. 회개하면 보혈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보혈이 우리에게 뿌려지고 발라지고 흘러들어 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보혈을 달라고 요청할 때다. 만약 성도가 회개를 했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몸에 보혈을 부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러면 보혈이 우리 몸에 부어진다.

  그러면 귀신들은 보혈을 보고 무서워한다. 보혈이 들어왔을 때에 그것이 뱀인 자기들의 몸에 닿으면 귀신의 살(뱀의 살)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혈이 들어오면 귀신은 더 이상 자신이 사람의 몸안에 붙어 있어야 할 근거가 사라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잘려진 곳에 보혈을 부어 버리면, 그들의 몸이 서로 붙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귀신들은 지금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행위책에 그 사람의 죄가 지워졌는지를 볼 수 없다. 하지만, 보혈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의 죄가 사해졌는지를 비로소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혈은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혈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즉시 보혈이 우리에게 들어온다. 그러면 천국에서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며(지워지며), 이 땅에서는 귀신들이 고문을 당하다가 떠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보혈이 우리 몸에 들어 있으면 귀신이 다시 들어오는 것이 어렵게 된다. 보혈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가 그만 자신의 몸이 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6. 성도라면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사용할 권한이 있는가?

  성도라면 누구든지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사용할 수 있는가? 있다. 그가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을 받은 자라면 그는 누구든지 불과 물과 보혈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의 양은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우리는 충분하게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늘 말씀에 그 비밀이 들어 있다(계22:17). 왜냐하면 신약의 물(생수)은 구약의 불과 같다. 그런데 그 물은 누구든지 와서 마실 수 있는 물이요 사용할 수 있는 물이다. 그런데 어떤 자에게 그것이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명수의 세계로 초청하는 두 존재의 비밀에 달려 있다. 하나는 성령(그 영)이요 또 하나는 신부이다. 

  계22:17 성령(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취하라) 하시더라 

  첫째, 성령, 정확히는 그 영에게 달려 있다. 그 사람 속에 얼마나 그 영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느냐에 따라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커질 수도 있고 더 작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성령으로 충만케 되지 않는 자는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충만하게 경험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아무리 안수자가 강한 불을 갖고 있어도 자기 속에서 성령께서 내보낼 수 있는 불의 양이 적으면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도 덜 태워지는 것이다. 

  둘째, 신부가 얼마나 깨끗한가에 달려 있다. 신부는 어떤 존재인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정절을 지켜온 자다.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들만이 결국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장에 서 있는 신부들을 보라. 웨딩드레스는 또 얼마나 희고 깨끗한가?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지어 옷이 더렵혀져 있는 자는 불과 생수를 체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빨리 자신의 더러워진 몸을 예수님의 피에 씻어야 한다(계7:14). 그것은 바로 자백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는 회개하라. 회개해야 피가 자기에게 뿌려지고 덮여지고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비로소 깨끗해진다. 피가 귀신들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성도들은 누구든지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체험할 수 있고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양에 있어서는 각자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내가 더 많은 양의 불과 물 그리고 보혈을 사용하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핵심은 '회개'에 달려 있다. 얼마나 회개를 많이 했으냐, 얼마나 회개를 간절히 했느냐에 따라서 더 많은 양의 불과 물을 가져다 쓸 수 있으며 또한 보혈도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불은 물과 똑같은 것이다. 그것이 죄를 태우고 귀신을 태울 때에는 불로 사용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강하게 할 때에는 물(생수)로 사용되는 것 뿐이다. 둘 은 지금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보혈만큼은 불과 물과 비교할 때에 약간 다르다. 보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 그때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쏟으시고 가셨다. 그러므로 보혈은 이 세상에만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혈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그것은 죄를 씻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죄를 인격화시키면 귀신들이다. 즉 귀신들을 씻어내서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피인 것이다. 그러므로 피가 우리 몸속에 들어오면 귀신들은 홍수처럼 쓸려 떠나간다. 그러므로 회개를 할수록 더 많은 양의 피를 우리 몸에 흘려보낼 수가 있다. 그러면 큰 영이라도 우리 몸에서 버틸 힘이 없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예수님의 피를 당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다. 회개하면 할수록 불이 내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태워버릴 수 있고, 회개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생수가 우리 몸속에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하면 할수록 더 많은 양의 피가 우리에게 공급되므로 귀신도 쓸려나가기 때문이다. 

 

 

2024년 02월 23일(금)

정보배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그리스도인의 율법관(11)] 나팔절은 무슨 절기이며, 앞으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레23:23~25)_2024-02-23(금)

https://youtu.be/NBUBqwD03Po [또는 https://tv.naver.com/v/48263541]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연중 일곱 절기들 가운데 나팔절이 있다. 나팔절은 이스라엘 연중 절기들 중에 다섯 번째 절기로서, 아주 특별한 절기다. 왜냐하면 연중 일곱 절기들 가운데 유일하게 나팔을 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연중 일곱 절기들 중에 굳이 나팔절 절기에는 나팔을 불라고 하셨는가? 대체 나팔을 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날만큼은 나팔을 불라고 한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의 나팔절 절기는 그리스도에 의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그리스도와 나팔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2. 이스라엘의 연중 일곱 절기 가운데 '나팔절'이란 어떤 절기를 가리키는가?

  이스라엘의 연중 절기에는 7개의 절기가 있다. 이러한 절기들 중에 앞의 4가기 절기 곧 유월절(1.14)과 무교절(1.15~21) 그리고 초실절(1.18)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3.5)은 봄의 절기에 해당하며,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채 있다. 그리고 3가지의 가을의 절기가 더 있는데, 이러한 절기에는 나팔절(7.1). 속죄일(7.10)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수장절)(7;15~22)이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나팔절'은 어떤 절기인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나팔절은 칠칠절(오순절,맥추절) 다음으로 지키는 절기로서, 7월 1일에 지키는 절기인데,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나팔을 불어 기념하라고 하신 날이다(레23:24). 그리고 그날은 절기의 안식일로도 지켜야 함으로 그날에는 어떤 노등도 하지 말고 성회로 모이라고 하셨다(레23:24~25). 

  그리고 이날은 이스라엘의 농작물의 절기로 보았을 때, 밀추수가 마쳐지는 날이기도 하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실절에 처음으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한다. 이뗘 처음 익은 보리 한 단을 하나님께 바치고 추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칠칠절(오순절,맥추절)까지 보리추수를 계속한다. 그리고 칠칠절이 되면 보리추수를 마치고 이제는 밀의 추수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밀의 추수는 나팔절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초실절에서 칠칠절 그리고 나팔절까지의 기간은 보리와 밀의 추수기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해마다 칠칠절이 되면 두 덩이의 새 소제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는데, 하나는 보리의 소제이요 또 하나는 밀의 소제다. 그런데 이때 누룩을 넣어서 소제물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유월절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무교절에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초실절에 부활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는데, 이때부터 영혼의 추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모든 믿는 자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초실절 직후에는 '보리추수'로 예표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칠칠절이 지난 후부터는 밀의 추수가 시작되듯이 이방인의 추수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밀의 추수가 끝마쳐지게 되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성도돌을 홀연히 변화시켜 공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3.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 나팔을 부는가?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나팔은 언제부는가? 그것은 적어도 3가지 일이 있을 때,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그것은 민수기 10장에 나온다. 첫째, 천부장이나 이스라엘 온 회중을 모아서 소집하려고 할 때 나팔을 불었다(민10:2,7). 그것은 어떤 소식을 전달하고자 함이다. 둘째, 전쟁하러 나갈 때다(민10:9). 즉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물리치려고 나갈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팔을 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 희락의 날과 정한 절기와 초하루가 되었을 때애 나팔을 불라고 했다(민10:10). 그러므로 초하루날인 나팔절에는 반드시 나팔을 불어야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나팔은 단지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적인 차원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한 일종의 신호였던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나팔소리는 전쟁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고, 새로운 시작의 절기를 알려주는 신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왜 해마다 7월 1일에 나팔을 불라고 하신 것일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날에 나팔을 불라고 하신 것일까? 그것은 이날이 아주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날은 민간력으로 양력 설날 곧 1월 1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1일은 첫째 날로서 어떤 것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7월 1일에 나팔을 불라고 하신 것은 어떤 것의 시작을 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적어도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5. 나팔절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께서는 어떻게 절기를 지키실 것인가?

  우리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나팔을 불게 할 때 적어도 3가지 핵심적인 사항이 있을 때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첫째, 온 회중을 모으려 할 때였고 둘째, 전쟁하러 나갈 때였으며, 셋째, 정한 절기를 알려주려고 할 때였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수께서도 이때 나팔절을 성취하기 위해 셋째 하늘에서 공중으로 오실 것이다.

  이때 그분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첫째, 천사로 하여금 나팔을 불게하여서 구원받은 택한 성도들을 공중으로 불러 모으시는 일이다(마24:30~311). 이때 예수님의 재림은 이중적이어서 예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날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및 휴거는 동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초실절 이후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중에 어떤 이는 왕노릇하기도 하는데, 그 기간은 나팔절이 되기전까지다. 참고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은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여 휴거될 것이고, 이어 살아서 남아있는 성도들이 부활하여 휴거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때 죽은 성도들은 개인적인 부활을 하여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오실 때에는 곧바로 천국에 가지 않고 공중으로 간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겟돈에서 악의 세력들과 전쟁하기 위해서다. 

 

마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둘째, 재림하시는 예수께서는 그때 데리고 온 천국성도들과 천사들 그리고 그날에 불려올린 성도들과 함께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치르실 것이다(계19:11~16). 이때 참여하는 군대는 두 종류로서, 하나는 선한 천사들의 군대가 있고 또한 동시에 성도들의 군대가 있다. 그리고 선한 천사들은 악한 천사들인 귀신들과 싸울 것이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탄에게 속하여 전쟁에 참여한 악한 자들을 치게 될 것이다. 이때 성도들이 사용하는 전쟁용 무기는 칼과 철장이다. 그러므로 이날 전쟁할 때에 공중에서 천사에 의해 나팔이 불어질 것이다. 

 

계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셋째, 이날 또한 나팔이 울려퍼지는 이유는 새로운 절기,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계11:17). 이날 나팔소리는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신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신천신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구약에 절기로서 약속된 나팔절이 완성될 것이다.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2024년 02월 23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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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그리스도인의 율법관(10)] 이스라엘의 칠칠절(오순절)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레23:15~22)_2024-02-22(목)

https://youtu.be/Z4k-guRORuI [또는 https://tv.naver.com/v/48263535]

 

1. 들어가며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계1:8). 그러므로 그분은 시간과 공간 밖에서 모든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그분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계획하신 것이고 그것을 지금도 성취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의 만세 전의 계획은 천지창조 때부터 그분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계시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계속 계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가 다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다. 모든 피조물들이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들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골1:16). 특히 인간을 향한 모든 계획은 그리스도 없이는 어느 것 하나라도 이뤄질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죄인된 인간이 구원받아 죄사함을 받으며 부활체의 영광을 입을 때까지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여정도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뤄진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이스라엘의 절기법에 고스란히 예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은 이스라엘의 7대 절기 가운데 칠칠절(맥추절), 신약으로 치자면 오순절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 칠칠절 혹은 오순절은 어떤 절기인가?

  '칠칠절'이란 초실절 이후 일곱 안식일을 계수한 뒤 그 다음날인 곧 50일째 되는 날에 새 소제로서 두 덩이의 떡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절기를 가리킨다(레23:15~16). 그래서 이 날을 가리켜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부른다. 날짜로 계산한다면, 이 날은 3월 5일 정도가 될 것이다. 이날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나온지 약 3개월이 된 시점이자, 시내산 아래에 진을 쳤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칠칠절 날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이라고 가르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가리켜 '맥추절'이라고도 말씀하셨다(출23:16). 왜냐하면 이 절기를 농사의 절기로 보았을 때에는, 보리 추수를 끝마치고 밀 추수를 시작하는 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날은 무교절의 절기와 같이 절기의 안식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날에는 일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성회로 모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레23:21). 그리고 이 날에 하나님께 올릴 제사로는 소제와 번제 그리고 속죄제와 화목제이다(레23:18~19). 

출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3. 칠칠절에 드려지는 새 소제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칠칠절에 드려지는 새 소제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 중에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다. 이것을 '소제'라고 부른다(레2:1~16). 그런데 소제제사를 올릴 때에는 하나같이 누룩을 넣지 않는 소제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다. 즉 곡식을 빻아서 고운 가루를 사용해 하나님께 드리는데, 여기에는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레2:11). 그런데 단 하나, 오직 칠칠절에 드리는 새 소제의 제물만큼은 누룩을 넣어서 구운 떡으로 드리라고 하였다(레23:17).

  왜 하나님께서는 소제제사 가운데 유일하게 칠칠절의 소제제사만큼은 누룩을 넣어서 구우라고 한 것일까? 그것은 구약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약시대 이 절기가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칠칠절의 성취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인데, 이때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탄생한 탄생한 교회는 누룩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룩'이란 작지만 크게 퍼져나가는 잘못된 교리들이나 잘못된 가르침 그리고 전통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크게 보았을 때에는 그것은 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칠칠절에 드리는 소제제사에는 왜 누룩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다. 

 

4. 칠칠절 즉 오순절은 어떻게 신약시대에 성취되었는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칠칠절 곧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강림하심으로 성취된 절기다. 왜냐하면 유월절 양으로 피 흘려 죽으신 예수께서 무교절에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초실절에 살아나셨는데, 그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 날에 비로소 성령으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순절에 오신 성령께서는 두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셨다. 그중 하나는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교회 곧 예루살렘 교회다(행2:1~4, 37~41).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인들로만 구성된 교회 곧 고넬료 가정의 교회다(행10:44~48). 하나님께서는 두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셨는데, 이것이 바로 새 소제로 드려지는 두 개의 빵의 성취인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두 덩이의 떡 곧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와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하나님께 올려 드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때 드리는 소제물에는 유일하게 누룩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다. 이는 교회 안에 죄가 있지만 그것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사람이 다 죄된 본성인 귀신들을 제거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람치고 성령받아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육체 속에 귀신들이 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회심의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일단 성령을 주신다. 그래서 이때에 성령께서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가신다. 그러면 인간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육체 속에는 귀신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일평생에 걸쳐 회개를 계속해서 자기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한다. 

 

5.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기간에 성도들이 꼭 이루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성도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 왜 죄가 있는 상태에서 구원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어떤 죄도 다 용서받으니,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다. 그런 뜻으로 죄가 있는 상태에서 구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다 청산한 후에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먼저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자는 먼저 구원을 받고 그러고 나서 그 다음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구원을 먼저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정말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날마다 철저하게 우상숭배의 죄와 자범죄를 회개하여 귀신으로 더럽혀진 상태에 있는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인 귀신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이 우리가 죽어서 부활체를 입을 때에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럽고 빛나는 옷을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우리가 어찌 오묘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B.C.1446년경에 주어진 절기법 안에는 에수께서 속죄양으로 오셔서 죽으신 후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으로 오실 것이 다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께서 그때부터 교회를 세워 나가실 터인데, 이때 세워지는 교회의 순서가 먼저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가 될 것이며, 이어서 고넬료 가정으로 구성된 이방인 교회가 될 것임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 교회는 이미 추수가 끝나고 있는 유대인의 보리로 만들어진 떡 한 덩이와 이제 시작하고 있는 이방인의 밀로 만든 떡 이방인의 밀 한 덩이를 같이 소제물로서 요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추수는 그대로 이뤄졌다. 이것이야말로 칠칠절의 예언에 따른 영혼의 놀라운 추수인 것이다. 

 

 

2024년 02월 22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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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1(수) 수요기도회

제목: [골로새서강해(05)] 가까운 인간관계의 윤리와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인사말(골3:18~4:1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1ZPTlgdkPoc [또는 https://tv.naver.com/v/48263532]

 

1. 들어가며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다(골1:7). 그런데 그는 골로새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골로새 옆에 있는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에도 교회를 세운 것 같다(골4:13). 그런데 그 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이단 사조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에바브라에게서 직접 듣고 이것을 바로 잡고자 편지를 써서 두기고의 손에 들려 보낸다. 그때 감옥에서 만나서 개종한 신실한 형제 오네시모에게 빌레몬서를 들려 보낸다. 두 사람을 골로새로 보낸 것이다. 오늘은 골로새서의 마지막 시간으로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 중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지켜야 할 윤리 문제와 기도 부탁과 몇 가지 권면 그리고 로마 감옥에 바울과 같이 갇혀 있는 동료들과 골로새교회 성도들에 대한 인사말을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 간에 어떤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며 더불어 처음에는 바울에게 무익했던 사람이 나중에 유익한 사람이 되고, 처음에는 유익했던 사람이 나중에 무익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만나게 될 것이다. 

 

2. 골로새서 3:18~4:18의 위치는 어떠한가?

  골로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도입부다(골1:1~12). 도입부에서는 골로새서의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축도 및 바울의 감사기도와 중보기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본론부(골1:13~4:6)에서는 바울이 쓰고 싶어했던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은 본론부에서 2가지를 언급한다. 전반부(골1:13~2:23)는 교리를 언급하고, 후반부(골3:1~4:18)에서는 생활을 언급한다. 바울은 본론의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월성을 언급하고, 뿐만 아니라 이단 사조를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본론의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을 언급한다. 그것은 성도들은 위엣 것을 찾아야 하며(골3:1~4),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권면한다(골3:5~11). 그러고 나서 새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 언급한다(골3:12~17). 이어서 바울은 가까운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언급하고(골3:18~4:1), 기도생활과 불신자와의 관계와 언어생활에 대해 언급한다(골4:2~6). 그리고 마지막 종결부(골4:7~18)에서는 바울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의 근황과 골로새교회 성도들에 대한 인사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고로, 오늘 배우게 될 골3:18~4:18의 말씀은 가까운 인간과 지켜야 할 아름다운 윤리와 아울러 개인적인 권면과 그리고 문안 인사라고 정리할 수 있다. 

 

3. 골로새서의 핵심 주제와 보조 주제는 무엇인가?

  골로새서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독론(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바로 골로새서의 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 서신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골로새교회를 개척했던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단 사조들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4가지 이단 사조들 곧 지혜를 강조하는 초기 영지주의, 의식법 준수를 추구하는 유대 율법주의, 천사숭배를 강조하는 신비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금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에 대하여 듣고 그러한 세력들을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리스도는 지혜를 추구하는 영지주의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신 분으로서(골1:19),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요(골2:3), 더욱이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골2:9). 둘째, 그리스도는 의식법을 통해 의로움을 추구하는 율법주의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대의 의식법들 곧 먹고 마시는 음식법과 안식일과 초하루법을 포함한 절기법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단지 그림자일 뿐, 실체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골2:16~17). 셋째,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숭배하고 자의적으로 겸손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을 창조하신 분, 특히 높은 계급의 천사들을 창조하신 분이자(골1:16), 이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골2:10). 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떨어져 나간 타락한 천사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그것들을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신 분이기 때문이다(골2:15). 넷째, 그리스도는 음식 절제를 통해 금욕을 추구하는 금욕주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음식 절제를 통해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경건을 가져다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로새서를 찬찬히 읽어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보조 주제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메시지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일꾼으로 세웠다고 간증했다(골1:25).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이란 바로 성도들 몸에 들어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이신데(골1:27), 이것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다(골1:26). 그러므로 골로새 성도들이 진정 알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들이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골1:28, 2:2).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골로새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영지주의보다도 뛰어나고, 율법주의보다 뛰어나며, 신비주의보다 뛰어나고, 금욕주의보다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잘 전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골4:3).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 속에 담고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4. 가까운 사람들끼리 지켜야 할 기본적인 윤리는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그의 편지 후반부에 배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아름다운 윤리가 있고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때 가까운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세 가지 방면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에베소서를 읽어 보면 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의 확대판이라고 할 정도로 유사하면서 더 깊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내들과 남편들은 서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골3:18~19). 바울은 아내들에게는 자기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그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고전11:3).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며,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고전11:8~9).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처럼, 남편과 아내의 질서를 위한 것으로서, 하와가 자신의 남편인 아담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뱀의 말을 들어서 죄를 지은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남편들에게는 자기의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고 아내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줌과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녀들과 아버지들은 서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골3:20~21). 바울은 먼저 자녀들에게 모든 일들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사람에게 자기의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주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통해서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즉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서 자식이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익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들 곧 부모는 자기의 자녀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 자기 자녀를 화나게 해서는 아니 되며 그들을 낙심케 해서도 아니 된다고 언급한다. 

  셋째, 종들과 상전들은 서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골3:22~4:1). 바울은 종들이 자기의 주인에게 지켜야 할 윤리가 있고, 주인은 자기의 종들에게 대해야 할 법도가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앞의 두 관계보다 더욱더 강조한다. 왜나하면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는 두 사람 중에 하나가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였기 때문이다. 그는 빌레몬으로 떠나 도망쳤는데 바울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다. 이에 먼저 바울은 종들은 자신의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그리고 순종을 해도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주를 경외하는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차 천국에서 받을 보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햐면 종들이 주인을 잘 섬김으로 우리 주 예수님을 잘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상전들에게는 자신의 종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할 것을 권면한다. 자신의 종들이라고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육신의 상전들이라도 하늘에 가면 자기 위에 상전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던 두 사람은 누구인가?

  바울은 이제 끝인사로서 자기와 함께 있다가 골로새교회에 보내어지는 두 사람을 언급한다. 한 사람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만나서 함께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갔던 아시아 사람 '두기고'다(행20:4). 두기고는 그때부터 바울과 로마 감옥까지 함께 여행하였는데, 그가 얼마나 신실한 일꾼이었는지, 바울은 그를 특별히 골로새교회를 위해 쓴 편지 전달자로서 선정했던 것이다(골4:7~8). 바울에게 두기고는 정말로 사랑하는 형제였으며, 신실한 일꾼이었으며, 주 안에서 동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또 한 사람을 골로새교회에 보내는데, 그는 골로새교회의 장로(?)격인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망친 '오네시모'였다(골4:9). 그렇지만 그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개종하여 신실하고 사랑받는 일꾼이 되었기에, 그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그를 잘 받아달라고 개인적으로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기 옥중 서신의 하나였던 '빌레몬서'다. 그러니까 두기고가 골로새서를 가지고 골로새로 갔다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서를 들고 골로새로 간 것이다. 

 

6.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함께 일했던 동역자 세 사람은 누구인가?

  바울이 로마에 잡혀갔을 때에 바울은 실로 외로웠을 것이다. 특히 자신과 같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주변에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가 있으면 그러한 사람을 더욱더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진정 바라는 것 중의 하나는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빨리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구원받아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그 주변에 많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에게 따라붙었던 유대인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서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 그리고 유스도로 일컬어지고 있는 '예수'였다(골4:10~11). 이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을 위로해 주었다. 자신을 끝까지 따라오면서 하나님의 왕국 건설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7. 바울에게 찾아온 에바브라와 골로새교회의 후임자 아킵보는 대체 누구인가?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두란노 서원에서 배워서 자기 고향에 복음을 전파해 주었던 '에바브라'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였기 때문이다(골1:7). 그런데 에바브라는 이웃 도시였던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교회도 같이 개척하였던 것 같다(골4:13). 바울은 그들에게 온 에바브라가 얼마나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었는데, 이는 골로새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골4:12). 그리고 그가 로마까지 와서도 얼마나 세 교회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역시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존재이자 가장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바울은 끝으로 빌레몬의 아들인 '아킵보'에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주 안에서 삼가 이루라고 권면하였다(골4:17). 이는 아킵보가 에바브라의 뒤를 이어 골로새교회를 목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 마가 요한과 데마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울의 끝인사 가운데 등장하는 두 사람 곧 '마가'라고 하는 '요한'과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다. 이 두사람은 서로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먼저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에 같이 따라갔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생을 안 해 본 탓인지 선교 중 힘들다고 그만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에,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려갈 것인가를 놓고 바나바와 크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어려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잘 훈련시켜 사역자가 되도록 2차 전도여행에 데려가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을 수행자로 두는 문제로 인하여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싸우고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바울이 이제 로마에 감옥에 갇힌 이후, 마가 요한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함께 바울에게 아주 귀한 동역자가 되어 있었다(몬1:24). 그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마가 요한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바울도 과거의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뒤로 하고 그를 동역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가 요한이 베드로를 따라 로마까지 왔고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해 준 사실이 바울의 귀에 들렸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바울이 잠시 풀려났다가 2차로 감옥에 갇힌 후, 순교하기 직전에 썼던 디모데후서에 따르면, 마가 요한은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존재라고 언급되어 있다(딤후4:11). 마가 요한은 당시에 에베소교회까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의 평가에 있어서 가슴 아픈 사람이 한 사람이 나온다. 그는 골로새서를 보낼 때만 해도 바울에게 신실한 동역자였던 '데마'라는 인물이다(골4:14, 몬1:24). 데마는 아마도 데살로니가 사람 같은데, 아마도 3차 전도여행의 끝무렵에 바울 전도팀과 합류하여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따라갔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야 할지 모르는 감옥생활이 힘들었는지, 그만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가 버렸다(딤후4:10). 그런데 그는 바울의 1차 감옥생활 때만 해도 같이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의 2차 감옥생활 때에 그는 바울을 떠나갔다. 왜 데마는 바울을 떠나갔던 것일까? 누구에게나 복음 전파자로 고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적인 나이가 적은 사람은 복음 전파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힘겨울 수 있다. 그리고 청년 시절의 마가 요한처럼 고생을 안 해 본 사람이었다면 복음 전파의 직무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세상의 안락함과 평안함을 위하여 복음 전파의 직무를 저버리고 떠나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년의 바울을 그냥 놔두고 그를 떠나간 것 만큼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천국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데마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9. 의사 누가와 눔바는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 바울의 선교여행에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의사 누가였다(골4:14). 그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만났던 사람으로서, 아마도 안과 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눈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만나서, 그만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바울의 선교여행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사역하다가도 잠시 바울의 명령을 따라 떠나 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의사 누가는 거의 모든 시간을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울과 함께 겪었던 복음 전파 이야기를 전기 형식으로 쓸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이며, 그후에 예수님의 일대기를 전해 듣고 글로 남긴 것이 바로 '누가복음'이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바울의 선교활동을 위해 일평생 헌신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고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고마운 인물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가 아마 의사 누가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라고 불렀다(골4:14).

  그리고 바울은 인사말의 끝무렵에 골로새교회의 성도였던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녀는 '눔바'라는 여인이다(골4:15). 그녀는 골로새교회의 성도였는데 자신의 집을 교회로 쓰도록 내 준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내 주어 복음 전파의 장소로 제공했던 빌립보 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와 같은 여인 같다. 그리고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이었을 때 고린도에서 만나서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어 준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 세상에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헌신한 인물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그들 때문에 복음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 나오며

  바울은 1차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들었던 골로새교회의 개척 소식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파의 굳은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특히 에바브라가 그에게 와서 들려준 개척 교회의 이야기는 바울로 하여금 정말 가슴을 뛰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골로새교회가 그만 이단 사조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은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보낸다. 마치 자기가 개척한 교회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을 골로새서를 통해서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위협했던 세력들을 향하여 바울은 하나씩 하나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믿고 따르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탁월한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를 가리켜 사람들은 '기독론'의 교과서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누군지에 관하여 그토록 짧은 서신 안에 이렇게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골로새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그전에 보내어진 라오디게아서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면 우리는 더더욱 놀라운 영적 비밀들을 알 수 있었을텐데, 아쉽지만 라오디게아서는 현재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골로새서에 기록된 말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 세력에 맞설 수 있으며, 유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금욕주의 세력에도 맞설 수가 있다. 이 세상에는 주 예수보다 더 뛰어난 것은 정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예수님만을 배우고 주 예수님만을 자랑하자. 그리고 그분만을 전하자.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024년 02월 21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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