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41)](최종회) 부활후 일곱 제자를 만나시고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신 예수님(요한복음21:1~25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O0TdwtND-CM [또는 https://tv.naver.com/v/45421471]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엄청나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시간이 생기기 전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으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요1:1~3).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그분이 바로 나타난 하나님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14,18). 요한복음은 바로 그 예수가 누구신지를 7가지 표적과 7가지 자기선언을 통해 표현해 주고 있으며, 그것은 한 마디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을 공관복음서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것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바로 그 주님 곧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인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40번의 시간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공부해 왔다. 그리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려함이었다(요10:10). 그분은 만세 전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다가 성육신을 입으신 후에 죽고 부활하시어 다시 하나님의 상태로 돌아가셨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기록되어졌다(요20:31). 그런데 요한복음은 20장에서 한 장을 더 할애하여 마무리를 하고 있다.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20장으로 끝내지 않고 21장으로 한 장 더 추가하여 끝내려 한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교훈은 대체 무엇인가?

 

2.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누군지를 소개해 주는 7가지 표적과 7가지 자기선언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이 어떤 책인지를 알려 주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역시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7가지의 표적들과 7가지의 자기선언에 들어 있다. 어떤 학자는 요한복음을 '표적의 책'이자(1~12장) '영광의 책'(13~21장)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요한복음에서도 '표적'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일으키신 표적들은 7가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요21:25). 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사도 요한은 딱 7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첫째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요2:1~11), 왕의 신하의 중풍병을 고쳐 준 사건(요4:46~54),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워 준 사건(요5:2~9),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요6:1~15), 바다를 걸어오신 사건(요6:16~21), 날 때부터 못 보는 자의 눈을 열어 주신 사건(요9:1~8).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사건(요11:17~44)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7가지 표적들은 결국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자 왕이시며, 창조주이자 생명주는 분이라는 것을 증언해 준다.

한편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스스로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는 말씀이 나오는 아주 특별한 복음서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기선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선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9)",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15:1)" 이 7가지 자기선언을 보면, 예수께서 생명이요 빛이요 문이요 목자요 부활이며 길이요 진리와 포도나무인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이러한 7가지 자기선언은 그분이 하나님으로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께서 목자로서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요10:10).

 

3. 부활 후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대체 어떻게 바뀌었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도마로부터 주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요20:28).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 말고도 예수께서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놀라운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하지 않았던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의 대부분이 랍비나 선생님이라는 칭호였다. 심지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고 하는 칭호를 붙이게 된 것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이제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그 주님(호 퀴리오스=the Lord)'이라고 칭한다. 헬라어로 '퀴리오스'라는 칭호에 정관사 '호'를 붙여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에는 한 번도 주님이라는 칭호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인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호'라는 정관사를 붙여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이제 한 분 하나님 그 자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퀴리오스'라는 단어가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종이 주인을 칭할 때(요15:15)나 상대방을 높여서 부르려고 할 때 그렇게 사용했었다(요20:15). 그런데 이러한 칭호가 종교적으로 쓰일 때에는 2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칭호였고 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였다. 그런데 부활 후에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호 퀴리오스'가 된다. 이는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종교적인 칭호에서 기독론적인 칭호로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 '호 퀴리오스'라고 말하면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칭호였던 '주(아도나이,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아버지'라는 칭호로 바뀐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문구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한 장을 더 할애하여 21장을 기록하여야 했는가?

요한복음은 사실 20장으로 끝이 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에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요20:31). 그런데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지 않고 21장으로 끝난다. 왜 그랬을까? 아니, 왜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은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기사를 통해서 살펴보면 적어도 핵심적인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도 미리 말씀해 주셨으며(마26:32), 또한 천사도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마28:7,10),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함이다(요21:1~14).

둘째, 그것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베드로가 그만 3번씩이나 강력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는데, 주님께서도 이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의 사도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다(요21:15~17). 그래야만 이제 성령강림 후에 복음 전파의 대표주자로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주님께서 사도 요한을 주님이 올 때까지 머물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 와전되어 주님의 재림시까지 사도 요한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하는 오해를 불식시켜 주기 위함이다(요21:18~23).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은 주님께서 그를 주님 재림 때까지 살려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베드로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사명을 받은 자는 자신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 갈릴리 출신의 7명의 제자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다시 갈릴리 바다로 떠나갔는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진짜 부활했다는 것을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통해 보여 주셨다. 물론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도 사람을 만나 당신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줄곧 예루살렘에서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도 당신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려 주실 필요가 있으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다시 사도로서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복음 전파의 기수로 쓰실 이유가 있는데,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 그를 처음에 사도로 부르신 것이 갈릴리 바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고난받기 전에도 갈릴리에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출신의 7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 것은 이제 예수께서 돌아가셨으니 고향으로 가서 옛날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자 함이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기서 만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을 처음 부름의 자리로 불러서 그들을 다시 사도로 세워 주시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6. 베드로를 다시 사도의 대표자로 세우기 위해서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사도의 대표자로 세우기 위해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추되었던 그의 권위를 다시 세워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강력하게 부인했던 죄책감으로부터 그를 놓아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시작하자면서 옛날 그를 처음에 불렀을 때의 자리와 그가 주님을 부인했던 자리를 한 곳에 셋팅을 하신 채 기다리셨다. 먼저, 베드로를 처음 불렀을 때로 돌아가게 했다. 그것은 7명의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게 유도하신 다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게 하여 고기를 심히 많이 잡히게 한 것이다(요21:3~6). 그러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사도 요한이 금방 알아보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 분을 '그 주님'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큰 배에서 내려 약 90m나 되는 거리를 헤엄쳐 육지에 있는 주님께로 나아간다. 둘째,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그것은 육지에 숯불을 피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요21:9).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당시 대제사장의 집에 있을 때에도 숯불이 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요18:18).

그리고 주님은 숯불에 물고기를 굽고 계셨고 떡을 굽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들이 잡아온 생선을 구워서 아침 식사를 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미 숯불에 굽고 있었던 물고기와 떡은 누가 준비하신 것인가? 그것은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식사거리를 더 풍성하게 만드셨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주님께서 시작하는 것이니, 주님의 시작을 믿고 따라오면 우리의 것을 통해서 더 풍성히 해 주신다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7. 베드로에게 던진 3가지 질문은 무엇이며, 이것은 오늘날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윽고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것은 거의 동일한 질문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도 같았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이때 예수께서 3번씩이나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던진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상처를 씻어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과거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버린채 딛고 일어설 수가 있었다.

둘째, 첫 번째의 질문에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거기에 있는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요구였던 것일까? 그런데 당시 상황을 살펴보고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투톤'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남성복수만 되는 것이 아니라 중성복수도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단어가 남성복수 지시대명사였다면 '이 사람들보다'라고 번역해야 하겠지만, 중성복수 지시대명사로 쓰였다면 이 단어는 '이것들보다'라고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실상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가 더 옳은 번역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그때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그때 이것들 곧 베드로의 주변에 있는 것들은 배들이나 물고기들이나 바다나 주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명령을 따라, 고기를 잡는 어부로서의 일보다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주님께서 약간의 뉘앙스가 다른 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세 번의 질문 가운데 두 번은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아가파오)고 질문하셨었다. 그러므로 처음 두 번의 질문은 베드로에게 부담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서, 조건없는 사랑이자 희생적인 사랑이요 끝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자신은 아가페의 사랑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필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필레오)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서 '필로스'의 사랑'이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서 친구가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의리를 지키는 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때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아가페의 사랑으로는 사랑할 수 없어도 이제는 적어도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세 번째 질문을 던질 때에는 그러면 네가 나를 '필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게 또 무슨 질문일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이 근심이 된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서는 내가 적어도 필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자신의 대답을 통해서 파악하신 것이 아니냐고 대답한다.

셋째, 주님이 아신다는 동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두 번의 주님이 아신다는 대답에 사용된 단어는 '오이다'였으나, 마지막에 가서 베드로가 사용했던 주님이 아신다는 단어는 다른 단어이기 때문이다. 앞의 단어는 '오이다'였지만 뒤의 단어는 '기노스코'였기 때문이다. 그럼 맨 나중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 채 있습니다(오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필레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기노스코)." 그렇다. 여기서 주님이 항상 아시고 있었던 것은 '오이다'의 앎이다. 이러한 앎은 직관적인 앎이다. 무엇인가를 듣고 묻고 배우거나 경험해서 아는 앎이 아니다. 그냥 아는 신적인 앎인 것이다. 그러나 '기노스코'의 앎이란 누군가에게서 듣고 배워서 경험적으로 아는 앎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때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자신의 대답을 듣기 전에 주님은 이미 원래부터도 잘 알고 계셨겠지만 이제는 자신의 대답을 통해서도 얼마나 자신이 주님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들어서 아실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다섯째,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 번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후에 세 번 다 다르게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그가 장차 사도로서 해야 할 사명에 관한 것들이었다. 첫 번째는 '내 작은 양들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양'이라는 단어는 아주 어린 양을 지칭하는 '아르니온'을 가리키며, '먹이라'는 말은 '보스코'라는 단어로서 '먹이를 주다, 양떼를 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내 [다 자란] 양들을 목양하라'고 하셨다. 여기에 나오는 양은 다 자란 '프로바톤'을 가리키며, '목양하라'는 말은 '포이마이노'라는 단어로서, '양을 돌보다, 양을 지키다, 목자가 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 [다 자란]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양은 다 자란 양은 '프로바톤'을 가리키며, '먹이다'는 단어는 '보스코'라는 단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베드로는 이제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예수믿게 하는 일 곧 '아르니온'을 만들어서 치는 일도 해야 하며, 동시에 이미 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목자로서 그들을 하나하나씩 치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이제 성도들을 주님의 양떼로 생각하여 그 양떼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온전하게 자라도록 목양해야 하는 것이다.

 

8. 베드로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주님의 예언은 어떤 것이었는가?

베드로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신 예수께서는 이어서 베드로가 그가 젊어서는 자기의 원대로 살았다면 늙어서는 남이 바라는 것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요21:18). 이는 그가 장차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지를 알려 주는 예언과도 같은 말씀이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주님께 묻는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기를 내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너를 향하여는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라고 대답하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 말은 와전되었고, 나중에는 사도 요한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 말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만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이 땅에 머물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밝히 교정해 주기 위해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굳이 덧붙여 요한복음 21장에 기록해 둔 것이다. 그렇다. 남이야 어떤 길을 걸어가든 모든 사역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9. 요한복음은 누가 썼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사도 요한이 썼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내증이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지만 요한복음 21:24의 말씀을 요한복음 중에는 사도 요한이 쓴 것이 아닌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한 본문이 오직 요21:24의 한 구절인지 더 많은 구절이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구절이 있을 수 있음을 요21:24의 구절은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자.

요21:24 이이는 이것들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제자이며 그리고 이 일들을 기록했던 제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그렇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1인칭 복수 '우리'는 적어도 사도 요한은 아니다. 누군가가 제 삼 자의 입장에서 사도 요한의 저작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라는 존재는 사도 요한을 직접 보았거나 그의 증언을 직접 들었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은 간다. 그렇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들을 가리켜 '요한 공동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도 요한이 최초로 기록했던 말씀에 더 말씀을 추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마지막 부분에 왔을 때에, 요한복음 21:24에 한 구절을 더 추가했을 것으로만 추정이 된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기술이 사도 요한이기 때문에 이 기술이 사실이라는 것을 자기들이 보증한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요한복음이 못다 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못다 한 이야기는 또 무엇이 있을까? 여기에다가 다 기록하지 못한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요한복음의 저자는 말한다(요21:25).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셨던 바 다른 것들도 많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기 대문이다. 심지어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책들로 기록되고 있는 것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면서 주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분을 믿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을 간추려서 여기에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믿고 그분을 힘입어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11. 나오며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이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고(高)기독론의 책이다. 이는 이 책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믿어야만 누구든지 아버지의 생명이요, 썩지 않을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며 또한 부활생명인 예수님이 갖고 있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고 듣고 공부할 때에 반드시 생명을 발견해야 한다. 만약 요한복음을 접해 보았는데도, 예수께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면, 그는 요한복음을 잘못 본 것이요 잘못 공부한 것이다. 그렇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인 것이다. 이는 그분이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생명의 물이요, 생명의 떡이자,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만 주셨던 생명이었다(요5:26). 그리고 하늘나라 곧 아버지의 집은 거듭 태어남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자만 들어가는 장소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이러한 생명은 과연 어떻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그분을 생명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분을 자기의 마음 속에 생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도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그 생명을 죽는 날까지 부인하지 말고 꼭 간직하고 지켜낼 때에 우리는 영생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2023년 12월 27일(수)

정보배목사

2023-12-20(수)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40)] 예수님의 부활과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2)(요20:19~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N47xDdaPMH8 [또는 https://tv.naver.com/v/45421382]

 

1.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자들에게 어떤 소식이 되었을까? 사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자신들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무덤에 있던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당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시작하셨다. 가장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도마가 빠진 열 명의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여드레를 지나서는 도마가 있을 때에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 주셨다. 그러자 그 위대한 도마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어떤 의미였는지를 재조명하면서, 도마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로 재조명되었는가?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께서 죄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며, 그분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막10:45).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렇게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생명의 확장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요20:17).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때부터 자신의 제자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20:17). 그날 막달라 마리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라.

요20:17[헬라어 직역]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붙잡지 말고 있어라.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를 향하여 올라간 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나의 형제들을 향하여 가고 있어라.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단번에] 말하라. 내가 올라간다. 나의 아버지를 향하여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를 향하여]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항하여]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을 [항하여]”

그렇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생명의 해방'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앞서 일어난 예수님의 성육신은 '생명의 잉태'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셨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는 오직 한 사람 곧 예수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는 그분을 가리켜,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의미로서 '독생자'라고 불리었다(요3:16).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여, 믿는 자들에게 나눠주시려고 드디어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요12:24).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군중들에 의해서 일어난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나눠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희생이었던 것이다(요10:18).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이제는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눠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나눠주기 위한 방법이 곧 생명주는 영이 되신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이었다. 이는 성령을 믿는 자들 속에 주심으로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생명을 나눠주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나눠주시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한 후,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은 이제 모든 믿는 자들 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하게 되었다. 성령에 의한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요한복음이 다시 한번 생명의 책이라는 것이 입증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생명의 잉태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생명의 해방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도마가 있을 때에 다시 찾아와 그에게 당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사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요20:22). 하지만 그때에 도마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믿지 아니한 제자였기에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8일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 도마에게 특별하게 하셨던 말씀이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20:25). 그렇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지내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그만이 마가 다락방을 들락날락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도마가 있을 때에 일부러 다시 찾아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도마를 따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20:27 다음에 그분이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손가락을 여기에 [계속] 가져오고 있어라. 그리고 [너는] 나의 손들을 [단번에] 보아라. 그리고 [너는] 너의 손을 [계속] 가져오고 있어라. 그리고 [너는] 나의 옆구리(늑골) 안으로 [단번에] 넣어라. 그리하여 믿지 않는 이로 있게 되지 말고 있어라. 오히려 믿는 이로 [있게 되고 있어라]”

그렇다.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당신의 구멍난 양손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도마의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구멍 속에 넣어보게 하셨다. 그것은 커다란 못자국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당신의 구멍난 옆구리까지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도마의 손을 내밀어서 옆구리 속에 넣어보게도 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커다란 창자국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당시 도마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들 앞에 나타나신 분이 정녕 그들이 3년 반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도마에게 자신의 구멍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신 것은 그런 뜻 뿐이었을까? 아니었다. 만약 그것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한 확실함을 알려 주려는 것이었다면, 도마도 역시 그날 주님을 보고서, 이전에 했던 베드로나 마르다의 경우처럼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도마는 그날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다. 도마는 그때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이제는 도마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4. 그날 도마의 신앙고백은 어떤 의미였는가?

그런데 도마가 그날 그때에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예수님을 주님 가운데 한 분이자, 또한 하나님 가운데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마의 신앙고백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여 주고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면서 도마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고백 안으로 이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마의 신앙고백은 아주 잘 고백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마의 신앙고백은 신성모독죄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여러 하나님들 중의 한 분으로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있기 때문이다(요6:4). 그러므로 그들은 결단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다. 만약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었던 도마가 했던 신앙고백은 그저 예수님을 주님 가운데 한 분이나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나타남으로서,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왜 도마에게 나타나 당신의 손들의 못자국을 보여 주었는지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던 날에, 그의 머리 위쪽에 죄패가 하나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글귀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히브리어와 로마아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예슈아 하 나자레이 브 멜레크 하 예흐딤"이다. 해석하면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다. 그런데 이 글자에서 앞 글자만 따오면 '여호와'라는 말로서 '신명사문자'에 해당한다. 놀랍지 아니한가? 그날 빌라도 총독이 달아 놓은 명패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께서 여호와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는 신명사문자 곧 '요오드 헤 와우 헤'를 해석하면, "손을 보라. 못을 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는 손에 못이 박혀 있는 분을 보게 되거들랑 그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빌라도가 붙이게 한 죄패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있는 인간 예수가 곧 구약시대의 경우로 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마의 신앙고백은 "당신이야말로 나의 여호와이시요 나의 엘로힘(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5. 그날 도마의 신앙고백에 나오는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렇다. 그날 도마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정도가 아니었으며, 그분은 그리스도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하나님 자신이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했던 여호와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두 분이 될 수 없기에,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나타남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날 고백했던 도마의 신앙고백 가운데 "나의 주님"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호 퀴리오스 무'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my Lord'이지만, 헬라어의 문장을 살려서 한국말로 직역한다면, '나의 그 주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주님(퀴리오스)'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주님(퀴리오스)이라는 단어가 총 49회가 나온다. 하지만 신약성경 전체서 '퀴리오스'라는 단어가 총 658회 쓰였다. 그런데 그중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퀴리오스'라는 모든 단어는 단 한 번도 예수님 이 외에 다른 분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키워드가 바로 '퀴리오스'인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대체 누구에게 사용하던 칭호였을까? 그것은 보통 3가지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일반적인 용어로서 종이 주인을 부를 때에 쓰는 호칭이었든지 아니면 그냥 상대방을 높여서 부를 때에 '주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둘째는 종교적인 칭호로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주님'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퀴리오스'를 오직 기독론적인 칭호로서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퀴리오스'가 사용될 때에는 꼭 정관사를 붙여서 '퀴리오스'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호 퀴리오스(the Lord)'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칭호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겠다.

 

6.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2가지 신앙고백을 제공한다. 그중의 하나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는 것이다(요11:27). 공관복음서를 보면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하였다고 나온다(마16:16).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아니라 나사로의 친여동생이었던 '마르다'가 했다고 나온다(요11:27). 그렇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도 한 것이고 마르다도 했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수석 사도나 남자도 아니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여자의 신분이었던 마르다라는 여인이 그러한 신앙고백을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넘어서, 또 하나는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의심했던 자요, 3년 반 동안이나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진실로 믿지 않았던 도마의 입에서 그러한 고백이 나온 것이다. 그는 사실 죽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살아 돌아와서 자신을 만져보게 하는 예수님 앞에 도마는 완전히 거꾸러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때까지 예수께서 하셨던 모든 말이 다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도마도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 의아한 것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듣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의구심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앞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보여 준 손의 못자국을 통해서 도마는 이제 의심없이 예수님을 여호와이자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도마는 그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 중에 가장 먼 곳으로 예수님을 전해 주려고 떠났다. 그것은 '인도'라는 나라였고, 인도에서 다시 선교를 떠나 한국 땅까지 왔었다. 그때 도마는 우리나라의 가야 땅에 와서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어 그를 왕으로 삼아 가락국을 세우게 했다. 그런데 '가야'라는 나라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삼국 모두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에 따라 가야는 역사의 흔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니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역시 도마의 경우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날 우리나라에 와서 못다 이룬 선교의 꿈을 이뤄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2023년 12월 20일(수)

정보배목사

 

2023-12-0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9)] 예수님의 부활과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1)(요20:1~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SkgJx8fjoMs [또는 https://tv.naver.com/v/45416766]

 

1. 들어가며

  에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것과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20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이는 둘 중의 누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능력과 효과를 각각 다르게 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주에 다루었던 요한복음 19장 가운데 언급하지 못했던 부분과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주장과 사도 요한의 주장을 서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을 당시 현장의 모습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에게는 결코 죽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셨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값을 담당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날 예수께서 치르신 고귀한 희생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날 예수께서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몸에 채찍에 수없이 맞으신 것은 우리를 질병에서 낫게 하기 위함이었다(벧전2:24). 사실 예수께서 그날 대속의 죽음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아무런 고난 없이 그냥 죽임만 당하시면 되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의 삯은 고난당함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날 두 번씩이나 엄청나게 채찍으로 맞으셨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까지 쓰셨다. 그리하여 머리에서도 피가 흘러내렸고 온 몸에서도 살이 찢겨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고난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어떤 속죄제물도 채찍에 맞고 죽는다는 예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 주님께서는 일부러 맞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를 정신적인 질병에서 해방하게 위함이었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육체적인 질병에서도 해방하려 함이었기 때문이다(사53:5, 벧전2:24, 출23:25~26). 그분의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심은 또 하나의 예언에 대한 성취되였던 것이다. 고로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는 기적적으로 병에서 낫는 자들이 있다. 

  둘째, 예수께서 그날 양 손에 대못이 박히신 것은 우리를 가난의 저주에서 해방하기시 위함이었다(고후8:9).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당신의 양 손에 못이 박히셨다. 그것도 큰 못이 손바닥을 뚫고 지나갔다. 그래서 지금도 천국에 가서 보면 예수께서는 손바닥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영적으로 볼 때 손은 재물을 관장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난하게 되거나 물질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일종의 저주인데, 영적으로 보면, 사람의 손이 아주 작거나 잘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귀신이 재물을 모으는 사람의 손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는 가난으로부터 해방받는 자들이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가난의 영들을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를 통해서다. 고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누구나 가난해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예수님을 믿게 되면 가난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서 가난의 영을 떠나가게 해야 한다. 

  셋째, 예수께서 그날 자신의 두 발에 대못이 박히신 것은 우리의 형통과 앞길 막힘의 저주에서부터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다(요삼1:2). 왜나하면 영적으로 볼 때 사람의 발은 영통과 앞길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곳에 악한 영들이 달라붙어 있으면 모든 일에 형통함이 오지 앟고, 앞길이 막힌다. 특히 자녀들의 앞길이 늘 막히게 되는 것은 자녀의 발에 악한 영들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우리 대신 두 발에 못이 박히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날 예수께서 자신의 발목에 못이 박힌 것은 사실 예수님의 발이 아니라 귀신들이 못박힌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발목에 못이 박히심으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형통함과 앞길이 열려지는 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없이는 어떠한 복도 받을 수가 없다. 

 

3.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십자가 위에 달린 죄패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실 때에 로마총독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죄패를 붙히게 했다. 그래서 그날 죄패가 붙었다. 그런데 그때 죄패에 기록된 문구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문구였다(요19:19). 그런데 이러한 문구는 히브리어로만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헬라어와 로마어도 같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실은 사복음서 기자들 가운데 오직 요한만이 전해주는 것이다(요19:20).

  그렇다면 이 죄패가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것을 성경책에 기록으로 남겨놓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이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요, 한 분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손이 못에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를 다 합치면, 신명사문자러서 '여호와(야훼)'라는 단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신명 사문자의 사전적인 의미도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효오드 헤, 와우 헤'로서, '손을 보라. 못을 보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으로서, 그분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이 죄패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실 것인데, 그때 그분이 누군지는 '손을 보고 못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훗날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4. 십자가에 달린 채 있었던 예수님은 왜 자신의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일까? 

  사실 예수님에게는 친 남동생들로서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 등 적어도 네 명의 남동생들이 있었다(마13:55). 그리고 복수의 여동생들도 있었다(마13:56).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친동생들에게 자신의 모친을 맡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십자가와 함께 있던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위탁한 것이다(요19:26~27).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 아무리 영적인 일을 하는 자라도 육적인 부모를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혹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일찍 죽임을 당하는 처지였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다른 아들에게 맡긴다. 그런데 그때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십자가까지 따라온 남자는 오직 요한 사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요한 사도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기신 것이다. 지금도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가보면,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이 목회했던 장소가 흔적으로 남아있는데, 거기에는 마리아의 무덤도 같이 남아있다. 

  둘째, 예수님께서 중대한 일을 맡기실 때에는 끝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자에게 맡겨주신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친동생도 그날 예루살렘에 같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십자가 아래에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요한이 거기에 있었다. 그날 십자가 밑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 중에 유일하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까지도 잡아다가 죽이려는 판국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내란선동죄로 잡아가둔다는 것은 매우 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도 그에게 맡은 사명을 그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5. 예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날 해질녁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유대력으로 보면, A.D.30년 1월 13일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13일은 수요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6시부터는 그 다음 날이 시작되는데, 그날이 바로 1월 14일(목)이었다. 그리고 그날을 시간적으로 보면 목요일 저녁시간이다. 그리고 그날은 '유월절'날이다. 그런데 이 날은 절기의 안식일이었기에 모든 유대인들은 쉬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1월 15일은 무교절의 첫날이었다. 그런데 이날도 절기의 안식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날에도 역시 쉬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바로 초실절이었다. 곡식의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되, 감사함으로 드리는 감격적인 절기였던 것이다. 그날은 이날은 안식일은 아니다. 이러한 규례에 대해서는 레위기 23장을 보라. 그런데 유월절이 되기 하루 전날, 모든 가족들이 한 곳에서 모여, 4인가족을 기준으로 유월절 양을 잡는다. 그때 자기 집의 출입구 좌우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른다. 그런데 초실절은 절기의 안식일은 아니다. 성회로 모이지는 않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은 또한 놀랍게도 주간의 안식일이었다. 즉이 이 날이 토요일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우리 주님께서는 음부에서 꼬박 3일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다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날은 초실절이었다. 그러므로 그날에는 밀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려야 했다. 

 

6. 왜 안식후 첫날 새벽미명에 먼저 무덤에 도착한 여자 막달라 마리아와 다소 젊었던 사도 요한은 왜  먼저 도착해 있어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히려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도록 양보해 주었는가?

 

 

  

7. 왜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년에게 놀라운 생명번식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는가?

 

 

 

 

8. 예수께서 제자들이자 친구들인 사도들을 자신의 동생으로 만들기 위해 하신 일은 무엇인가?

 

 

 

 

9. 나오며

 

 

 

 

 

 

2023년 12월 06일(수)

정보배목사

 

2023-11-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8)]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요19:17~4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GGoSKw1R44w [또는 https://tv.naver.com/v/45415351]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과 고소에 따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하지만 빌라도가 아무리 심문해 보아도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자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의 눈치를 보던 총독 빌라도는 민란 주동자인 바라바는 놓아주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고 만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처형당하셨고 그리고 매장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처형당하시는 장면(요19:17~30)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의 장례 절차(요19:3~42)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처형 기사와 장례 기사를 살펴보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에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내용은 생략하고 거기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기록한 것 같다.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를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에서는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과연 어떤 의미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2. 공관복음에서는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는 예수님의 처형 기사 4가지는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처형 기사를 기술하고 있는 복음서는 총 5가지다. 그중에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공관복음서에는 요한복음에 기술되지 않는 예수님에 관한 처형 기 나온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 5가지다. 이것도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조금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첫째로, 빌라도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군대에게 예수님을 넘겨줄 때에 채찍질과 희롱을 했다는 것이다(막15:16~20, 마27:27~31). 이때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운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하면서 가짜로 꿇어 절하고,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자, 로마 군병들이 구경꾼의 하나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다는 것이다(마27:32, 막15:21, 눅23:26).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을지라도 그의 아들들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가 초기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렇다.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지고 가면 그것은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큰 복이 된다. 셋째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여인들이 울자 예수께서 예루살렘 딸들로 하여금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울지 말고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다는 대목이다(눅23:26~31). 넷째로, 예수님과 함 십자가에 못박혔던 두 강도에 대한 이야기다(눅23:39~43). 누가복음의 기사에 따르면, 두 강도 중에 어느 한 명이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고 예수님은 죄가 없음을 언급한 후에 자신의 영혼을 위탁하자, 예수께서 그의 고백을 받아 주셔서, 그날 그의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다섯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성전의 둘째 휘장의 한가운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이다(막15:38, 눅23:45).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은 확실히 공관복음서를 통해 기술되고 있는 장면들을 많이 생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미처 공관복음서에서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기술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처형 장면과 예수님의 장례 장면을 근거리에서 직접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관복음서가 들려주고 있는 기사와 요한복음의 기사를 상호 비교해 볼 때에 보다 더 정확한 기사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다. 

 

3. 예수님의 처형과 장례에 있어서 공관복음서에서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 기사는 무엇인가?

  반대로 처형과 장례에 있서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의 기사도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 3가지다.

  첫째,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두 명의 강도의 다리는 꺾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기에 그분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는 것이다(요19:32~33).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시체들로 인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이 죽었는지 한 군인 확인 사살을 했으니 그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칼로 찔러보았다는 것이다. 그랬더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요19:34). 그런데 이것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기술이라고 하겠다.

  셋째, 예수님을 장사지내려 할 때에 아리마 요셉 외에도 니고데모가 와서 함께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요19:39~40). 그러니까 예수님의 장례는 아리마 사람 요 혼자 하지 않고, 니고데와 함께 장례를 치른 것이다. 이때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약 백 리트라(33~34kg) 가져왔었다. 이는 예수님의 장례를 왕의 장례처럼 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몰약과 침향은 왕의 장례에 사용되는 값비싼 물품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 중에서 몰약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가져온 예물 중의 하나로서(마2:11), 시체에 대한 방부제 역할과 시체 부패 방지 역할을 해 주는 향품이다. 그리고 침향은 오늘날 우리에게 알로에로 알려진 것으로서 건조제와 방취제로 사용되는 향품이다. 그리고 아리마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달라고 해서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기 때문이다(마27:57, 요19:38). 그는 사실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다(막15:43, 눅23:50). 그런데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경건한 사람이었다(눅23:51, 막15:43). 그래서 속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기에, 그가 죽으면 사용하려고 파놓은 새 가족묘가 골고다의 언덕에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데, 바위를 깎아서 무덤을 만들어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시기는 예수님 죽음 이쪽 저쪽이었다고 한다. 

 

4.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공관복음서의 처형 기사를 보면서,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자는 그 십자가를 '자기 자신에게 속한 십자가' 곧 자기의 십자가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19:17). 그렇다면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어떻게 예수님 자신에게 속한 십자가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십자가'는 사형 도구다. 이 십자가형의 사형 방법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였는데, 로마에서 반역자 내지는 흉악범을 죽이는데 사용했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사형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형 방법은 사람을 즉시 죽이는 사형 방법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아서 죄수들이 며칠간 못에 박힌 채 고생하다가 죽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사형 방법 중에서도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 죄수가 실제적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이유는 탈수증세로 죽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횡경막이 폐를 눌러서 숨을 쉬지 못해 질식사로 죽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 형벌은 과연 예수께서 극악무도한 죄를 지어서 받게 된 형벌이었는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일종의 모함에 의해 억울한 죽음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정죄했던 그 정죄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대 종교 최고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가 그를 정죄한 것은 신성모독죄였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장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었다(요19:7, 마26:64~66).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셨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것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죄를 지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자신이 이 세상에 보내어진 목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그것이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징계 조치를 철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엇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는 것이었다. 대속의 죽음을 위해 예수께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5.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기록과 요한복음의 기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놓고 그것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와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왜 죽으셨는지를 다른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째,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분명하게 제시한다. 제일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렇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피 흘려 죽어, 모든 사람들의 죄값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기꺼이 속죄양이자 유월절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둘째,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기술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려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라.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양들 우리 인류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생명을 해방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만약 그 생명을 아들만 갖고 있으면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지만 예수께서는 자 생명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해방하여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공급해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으신 뒤에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15:45). 그것이 자신이 죽으신 근본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자신이 가진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 그 생명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생명의 공급도 원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나눠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생명 분배의 목적이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두 번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가 범한 죄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속죄양이 되시어 대신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죄를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명을 자신을 통해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눠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공관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로마 병사가 에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그곳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요19:34). 예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그런데 오후 6시가 되면 유월절 절기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사람의 시체를 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시체로 인하여 부정해져서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숨겨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한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기에 빌라도 역시 아무런 의심없이 그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준다. 그래서 장사를 치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로마 군병의 확인 사살이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었다. 그러자 그때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 그런데 사람이 죽기 전에는 결코 옆구리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피만 나올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피와 물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로마 군병이 옆구리를 찔렀을 때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확실하게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때 흘려진 피와 물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훗날 요한일서의 편지에서 이렇게 증언을 해 주었다(요일5:5~8). 

요일5:5~8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에게 물과 피 뼈와 살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에는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가져가셨다. 그렇지만 그의 몸속에 있던 물과 피는 어떻게 하셨는가? 주님께서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쏟아 놓고 가셨다. 그러니까 그의 부활의 몸에는 피와 물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러한가? 로마 군병에 의해서 이 땅에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것을 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동시에 사람도 되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렇다 예수께서 그날 흘리셨던 피와 물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서 '피'는 기본적으로 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속에 말씀하셨고, 성만찬 말씀 가운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바로 그분이 인류의 속죄를 위해 흘리는 피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생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와서 생명강을 만들었고, 그 생명강의 물이 떨어져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물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대신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표상이 바로 '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대화속에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3:5). 그리고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당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그녀에게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4:13~14).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그분이 인류의 속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분의 물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께서 이 지구에 영원한 간증으로서 그분의 피와 물을 남겨 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속죄함을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물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분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요한복음서에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두 가지 목적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결국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물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점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과 속죄에 그 사역의 촛점을 맞춘 기록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물과 생명에 촛점을 맞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두 가지 것 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결코 우리들 중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께서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사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속죄와 생명분배야말로 그분이 이 땅에서 꼭 성취해야 할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우리 주 예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올려드린다. 

 

 

2023년 11월 29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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