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1(금) 금요기도회

제목: [부르심(13)] 나라와 민족에 대한 최종적 부르심, 아 대한민국이여!(창10:21~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lXZaKEIq5Xk [또는 https://tv.naver.com/v/40836392]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 쓰실 때에는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를 불러 쓰시며 또한 국가와 민족도 불러 쓰신다. 다시 말 부르심도 개인을 향한 부르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부르심도 있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부르심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여러 시간들을 통하여 개인적인 부르심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았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부르심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부르심은 여느 부르심과는 달랐다. 그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교회적인 부르심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들 가운데는 지교회의 목회자를 훈련하고 세우고 또한 성도들을 올바른 진리 안에 들어와 천국에 입성하게 해 주는 교회와 사명자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부르심보다 더 큰 부르심도 있으니, 국가와 민족을 향한 부르심도 있다. 그렇다면 국가와 민족을 향한 부르심이란 무엇이며, 그중에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한 부르심은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찾아보고, 나는 이러한 민족적인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2. 민족과 나라를 위한 부르심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 대표는 어느 나라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민족과 나를 위한 부르심이 있다. 어느 나라와 어느 민족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어 쓰시는 것이다. 그 대표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가 출애굽기에서 시작하여 말라기까지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부르심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딱 2가지다. 첫 번째 항목은 그의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창3:15)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는데,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그리고 다윗의 씨를 통하여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다 멸망당하여 사라져야 할 판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그것은 그 민족을 통해서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 주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1:1 신약의 시작을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자손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부르심의 두 번째 항목은 그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켜, 모든 민족 중에서 보배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출19:5~6).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이 부르심을 완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 구원받기를 바라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사실을 확인하신다. 그런데 나라의 본 자손들보다 이방인들이 훨씬 더 예수님을 구주로 더 잘 믿고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두 번째 부르심은 사실상 없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을 믿고 따라는 모든 사람들로 확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다.

 

 

3. 대한민국에 대한 부르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에 대한 부르심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복음의 마지막 주자로서 대한민국을 쓰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기라성 같은 기독교 국가들로서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나라를 더 이상 쓰시지 않고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쓰시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대한민국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쓰시려고 감추어 둔 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셈을 축복하신다. 영적인 장자권이 노아홍수 이후 장자였던 셈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대한민국이 동쪽으로 이동해서 정착한 셈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현재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물은 지금 대한민국에 있으며, 또한 대한민국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4. 왜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을 쓰시려고 하시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쓰시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한민국이야말로 원래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작정한 두 민족 가운데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브리인하면 유대인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어원은 2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강을 건너온 자들'이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에벨의 자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그럼 에벨은 누구인가? 에벨은 셈-아르박삿-셀라로 이어진 자손으로서, 셈의 증손자다.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놀라운 혈통적 비밀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셈을 소개할 때에 에벨 온(모든)자손의 조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창10:21). 그런데 에벨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하나는 벨렉이고 또 하나는 욕단이다. 벨렉은 르우를 낳고, 르우는 스룩을 낳고, 스룩은 나홀을 낳고, 나홀은 아브라함을 낳았으니, 벨렉은 오늘날 유대인들의 조상이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욕단은 어떻게 되었는가? 욕단은 벨렉의 아우로 태어났는데 그의 자식이 무려 13명이나 되었다. 그들 중의 일부가 점차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창10:30). 그리하여 동이족인 대한민국의 시조가 된 것이다. 고로 지금 대한민국의 혈통은 셈의 혈통이며, 정확히 말하자면 욕단의 후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셈의 자손으로 벨렉만을 언급하지 않고, 욕단까지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한 것이다. 그러니 바벨탑 사건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스라엘을 세운 지금의 유대인들과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밝산(태백산) 박달(밝은달=배달)나라를 세운 고조선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B.C.2300년경에 동쪽으로 보낸 셈의 후예인 것이다. 

  그리고 둘째, 대한민국이야말로 현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대로 살 수가 있고 성경대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며, 대한민국 사람이야말로 전 세계에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세계 2위의 선교국가이기 때문이다. 지금 서양을 보라. 유럽의 기독교는 폭망했다. 교회가 텅텅 비어 거대한 성당 안에 몇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뿐이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를 보라. 동성애를 인정하고,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 나라가 온통 성적으로 타락하였고, 이것을 반대하는 기독교 세력을 혐오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보라.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도 아니지만 전 세계 나라들 가운데 모든 마을마다 교회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그리고 비록 한국 인구의 1/4정도만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현재 전 세계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사실 우리나라는 1885년에 복음이 처음 들어 왔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제물포에 첫발을 디뎠다. 그런데 다른 나라와는 달 그때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의사였고 박사였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나라에 병원을 세워 주었고 학교를 세워 주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최고의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우리나라를 살린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나라들 가운데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기독교가 전해 준 복음의 혜택을 누리며 성공한 나라는 사실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에 쓰시려고 우리나라를 준비시킨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5. 대한민국은 왜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국가와 민족이 되었는가?

  대한민국의 기원을 밝혀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애를 썼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를 종합해 보면, 대한민국의 기원은 바벨탑 사건 때에 동쪽으로 이동했던 셈의 후손인 욕단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바벨탑 사건 이후 동쪽으로 이동을 했는데 그들은 에서처럼 활을 잘 쏘았다. 그래서 지나족(차이나족=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리켜 '동이족'(동쪽에 사는 활 잘 쏘는 족속)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자기들만의 노래를 만들어 외로움을 달랬으니 그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라는 노래다. '아리랑'이라는 노래의 기원을 연구한 수많은 학자들이 이 나라 일본에 있다. 하지만 1965년 예수원의 창설자 R.A.토레이(대천덕) 신부는 그의 책 "우리와 하나님(예수원, 1988)"이라는 책에서 우리나라의 기원을 욕단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불렀던 노래 '아리랑'이 위대한 찬송가라는 것을 밝혀내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알이랑 민족"의 저자 유석근 목사님이시다. 알고 보니, '아리랑'은 '알이랑(하나님이랑)"을 연음하며 발음한 것이었다. 그분은 평생을 아리랑을 연구하셨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조상은 바로 욕단이며, 이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산을 넘어왔다고 하였다. 그때 우리 조상들이 넘은 산이 바로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 알타이 산맥, 시베리아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래서 그들이 한밝산(백두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밝달(밝은 땅)(배달)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동이족은 어떤 민족이었는가? 그들은 처음부터 하늘의 한알님(하나님)을 섬기는 족속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대 제천의식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는 다 하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의식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과는 달리 우리 민족은 모세오경 같은 경전이 없었으니, 자기가 섬기는 하늘의 하나님을 그만 잊어버렸다. 그리고 무려 5천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1885년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전해 주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 준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정말 달라졌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그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민족이 하늘의 하나님께 제사하며 살던 민족이었다는 것이 우리나라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고인돌 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고인돌은 전 세계의 약 40%가 한국에 있다. 그중에서도 유네스코에 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세 개나 된다. 하나는 인천 강화에, 하나는 전북 고창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전남 화순에 있다. 처음에 사람들은 고인돌을 고대 족장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조사해 보니 그것은 천제단이었다. 그곳에서 하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욕단의 후예들로서, 하늘의 하나님을 섬던 알이랑 민족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에 선교사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찾아 알려 주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민족과 나라가 된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6. 이 시대에 주어진 우리 민족의 사명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지 못했다. 메시야를 낳는 것으로서 그들은 반토막 사명만 완성했을 뿐이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대를 이어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이어받을 민족과 나라가 필요한 것이다. 그 사명을 우리나라가 이어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잘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민족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전 세계 나라들 가운데 우리나라를 보면 된다. 우리나라에는 모든 마을마다 교회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 목회자가 있다. 그리고 매일 새벽에 새벽기도회를 갖는다. 그것도 부족하여 수요기도회, 금요심야기도회를 드린다. 주일도 한 번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모인다. 이런 열심 있는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세계적인 영적 거장들이 다 한국에 있거나 한국 사람이다. 영안이 열려서 지금도 하늘에 있는 생명책을 단 3초 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분이 한국에 있다. 어떠한 큰 무당 귀신이 역사해도 그것을 단숨히 제압하여 제거할 수 있는 분이 한국에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성도들을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 준비되도록 이끌고 계시는 분이 또한 한국 사람이다.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지금도 초대 교회처럼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능력과 기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교회와 사람들은 부지기수이며, 이제는 잃어버린 회개를 찾아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교회가 한국에 있다. 사실 천국은 엄격한 신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천국에서 계급과 신분 그리고 지위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회와 목회자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천국의 실상을 알고 증거하고 있는 주의 종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아니할 수 없다. 

 

7. 나오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을 사용하려고 하시는가? 그것이 셈의 후예로서 이 땅에 남겨두신 또 하나의 히브리인이어서일까?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그들 결국에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선택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 답게 그리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바로 그것을 잘 해내고 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국가들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얼 안 있으면 주님이 오실 것이다. 아마 우리 세대 내지는 우리 다음 세대에는 오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성도들을 만들어 내야 하는 막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천국에서 보다 더 보좌 앞쪽으로 나아가서 예배드릴 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키가 바로 '회개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비밀과 사명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바로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따르는 표적들이 초대 교회처럼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우리 자신의 막중한 과제이며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2023년 07월 21일(금)

정보배목사

 

[참고 동영상]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부르심(12)] 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부르심도 있는가?(계2:18~29)_2023-07-21(금)

https://youtu.be/0prg8rO3iqc [또는 https://tv.naver.com/v/38329011]

1. 부르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부르심에는 개인적인 부르심도 있고 교회를 향한 부르심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적인 부르심 혹은 국가적인 부르심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다양한 부르심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부르심에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그리고 넘치도록 주실 하나님의 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부르심이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하나님께서 불러서 쓰신 자들에 대한 부르심으로 대부분의 부르심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부르심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를 향한 부르심도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은 보편적인 계획이 아니라 그 시대에 그 교회가 감당해야 할 특수한 사역을 가리킨다. 

 

2. 교회에 대한 부르심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도가 죽었을 때에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렇듯 일반적인 부르심 말고 어떤 특정한 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부여하신 부르심도 있다. 그것을 '교회에 대한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교회는 예배과 교육, 선교(전도)와 친교와 봉사를 통하여 교회에 등록한 성도들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양육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부르심이 있는 특별한 교회들이 있다. 이러한 교회는 자기 교회의 성장과 성숙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다. 이 교회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파송하는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내 교회 내 성도만을 챙기는 교회는 교회에 대한 부르심이 있는 교회는 아니다. 바른 진리를 전파하여 바른길에서 어긋나게 가고 있는 성도들을 깨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교회가 바로 이러한 교회인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개척하여 세웠던 에베소 교회와 같은 경우인데, 이 교회는 소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면서 교회에 파송할 지도자들을 양육하였다. 

 

3. 성경에 나타나 있는, 부르심이 있는 교회의 사례는 어떤 것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교회들 가운데 부르심이 있는 교회는 약 3개 정도 나온다. 첫째는 안디옥 교회가 있다(행11:19~26). 안디옥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전도하여 세운 교회다. 지도자가 없었던 이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바나바를 파송해 주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시 다소에 있는 바울을 불러다가 함께 사역했다. 그러자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하였다. 이 교회는 자기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다른 이방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지만 2차 때에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섰다. 그리고 3차 전도여행부터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빌립보에 갔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운 교회였지만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에베소교회가 있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에 세운 교회인데, 주님께서는 바울을 이곳에서 3년간 머물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 중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상관없이 주의 말씀으로 훈련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훈련하게 하였다. 그때 훈련했던 장소가 바로 '두란노서원'이다. 그리하여 에베소교회는 바울을 통해 훈련받은 지도자들을 각 지역으로 파송하여 목회를 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아주 이상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두아디라 교회가 있다. 두아디라교회는 A.D.95년경 소아시아에 있었던 교회로서, 자기 교회 안에 선지자 이세벨을 통하여 여러 주의 종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에베소 교회를 본받아 자기 교회에서도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이세벨이 훈련받는 주의 종들에게 진리의 길을 가르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믿는 사람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으니, 성도들이 비록 상업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더 나아가서는 이방 신전의 창기와 음행을 저질러도 상관없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상숭배하면 불못에 떨어지며, 음행을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을 때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다. 그러나 이세벨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교회는 교회를 위한 부르심을 실천하고 있었지만 잘못된 길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부르심이 있는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고로 부르심이 있는 교회는 일반적인 교회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첫째, 교회를 향한 부르심이 있는 교회는 개 교회만 사역하는 종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시대적인 사명자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사명자였다. 그리고 그가 순교하자 이어서 디모데가 그 사명을 이어 받았고,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이 그 교회의 사명을 이어받아서 사역하였다. 고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러한 사명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2:1). 둘째, 이러한 교회는 자기 교회의 성도들만을 훈련하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훈련받고 양육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훈련하고 또한 지도자로 양육시킨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각 교회에 다시 파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 자체가 다르다. 개 교회 중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명자에게 주된 역할이 있지만, 모든 성도들도 사역에 따라 각기 필요한 역할이 주어짐으로 그 일을 같이 감당한다는 것이다. 즉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5. 부르심이 있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로 부르심이 있는 교회는 자기 교회의 자원을 자기 교회 교인들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우주적인 교회의 성도들과 지도자들을 훈련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자는 참된 진리의 말씀을 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세벨처럼 가짜 복음을 전해 주어 함께 망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르심이 있는 교회의 사명자들은 어떤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하는가? 첫째는 기본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관을 가르쳐야 한다. 다시 말해 회개없이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둘째는 바른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 그리스도론, 성령론, 성령의 은사와 능력, 마귀론, 귀신론,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회개, 종말론, 그리스도의 재림 등에 관하여 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사역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도행전처럼 지금도 역사하는 교회가 되고,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는 마지막으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 쓰고 상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은 엄격한 계급 조직 사회이기 때문이다. 계급에 따라 예배드리는 자리가 달라지고, 사는 장소도 역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이 있는 교회는 지금 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제대로 알려 주어 이제부터라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2023년 07월 21일(금)

정보배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부르심(10)]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 사도 바울(딤후2:1~13)_2023-07-19(수)

https://youtu.be/gQq3Fvex23k [또는 https://tv.naver.com/v/38328972]

1.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쓰시는 사명자에 대한 부르심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쓰시려고 부르시는 부르심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 되어지는 일이다(딤후1:9).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쓰시는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그 사람이 잘 하는 것을 보고 훗날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하시고 보낸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을 자주 바뀔 수 있는 사람의 결정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취하시기 위함이요, 인간의 실패로 인하여 마귀의 조소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명자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동역자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의사 누가처럼 바울의 동역자로서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데마처럼 중간에 그 길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간 사람도 있었다(딤후4:10~11).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2. 바울에 대한 하늘의 부르심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늘의 부르심으로 바울을 불러내셨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바울의 다메섹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불러내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실 때에는 총 3가지의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자'와 '사도'와 '교사'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딤전2:7, 딤후1:11). 다시 말해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예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지도자를 세우며 교회를 세우고,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사명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거의 모든 은사를 다 주셨으나, 귀신을 보는 은사만은 주시지 않았다. 귀신이 자꾸 보이면 사람에게 실망하여 그들을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사역자로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딤전2: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케뤽스)와 사도(아포스톨로스)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디다스칼로스=교사)이 되었노라 

딤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케뤽스)와 사도(아포스톨로스)와 교사(디다스칼로스)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3.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그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하는 권면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그들의 길이 평탄할 것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박해를 받는 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주께서 항상 동행하면서 앞길을 인도해 주시고, 위험과 죽음으로부터 그를 건져내셔서, 그로 하여금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격려하시며 이끄신다는 것이다(딤후1:12, 3:10~12, 4:17~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신의 눈앞에 닥친 난관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딤후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3:10~12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4:17~18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4. 자신의 소명을 따라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잘 감당하여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언급하였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해 주시되,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주신다고 했다(딤후2:10, 4:18). 그렇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서 사는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언급한 '천국에 들어가도록 주시는 구원'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으면 구원을 다 이룬 줄 안다.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죽는 날에 그의 이름이 지워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은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축복이 주어진다고 언급했다.

  둘째,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게 된다고 했다(딤후2:10). 그렇다. 성도가 받아야 할 구원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다. 그런데 사명에 충성한 자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도 같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원한 영광이란 영원토록 빛나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빛이 나는데 그 빛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사람이 받은 영광의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얼마나 빛이 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참고로 천국에서 가장 빛이 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워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이다(딤후4:7). 

  셋째,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된다고 했다(딤후2:11~12).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천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갈 사람은 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실컷 죄짓다가 마지막에 가서 회개하여 간신히 천국에 들어간 사람과 자신의 일생을 바쳐 주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충성한 사람이 어찌 똑같은 영광을 얻겠는가? 아니다. 사명을 따라 죽기까지 충성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의 신분을 왕의 신분으로 높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지위가 바로 70줄로 구성된 144,000석의 보좌에 앉는 것인데, 그중에서 1~6번 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하는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가 된다고 했다(딤후4:7~8). 천국에서 사람의 지위는 그가 예배드릴 때에 과연 얼마나 보좌 가까이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확인할 수 있다면, 천국에서 얼마나 영예를 받는 사람인지는 그의 집에 가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의 집에 가면 1층에 면류관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그의 영예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1층 로비에 비치된 투명한 유리 테이블 위에 면류관이 놓여 있는 자는 매우 영광스러운 자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면류관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주의 일에 전혀 힘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면류관은 1개에서 수십 개까지 있으며, 이때 면류관이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상장은 1층 천국집의 벽에 걸려 있다. 

 

5. 주께서 이 땅에 보내신 사명자와 더불어 주의 일에 힘쓰던 자들이 받을 복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받을 복을 언급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이름이 천국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빌4:2~3). 그중에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리고 글레멘드라는 사람의 이름들이 나온다. 그렇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천국복음 전파에 힘썼던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는 그들이 죽을 때에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가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딤후4:8). 다시 말해 면류관은 사명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의 재림의 때에 상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주님께 충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충성하자. 그리고 부지런하여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자. 이는 주 안에서 행하는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날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딤후4:8, 고전15:58).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2023년 07월 19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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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부르심(9)]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귀신을 보는 은사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행16:16~18)_2023-07-18(화)

https://youtu.be/Zkfm5WFwOs8 [또는 https://tv.naver.com/v/38328958]

1. 사도 바울이 받은 신령한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바울이 받았던 신령한 은사는 아주 많다. 바울은 거의 대부분의 은사를 받았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안 열림의 은사, 환상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치유의 은사, 믿음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대부분의 은사를 다 받았다. 다만 한 가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귀신을 보는 은사'이다. 바울은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는 못한 것 같다. 귀신을 보는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이자 영판단의 은사에 속하는 은사인데, 바울은 귀신을 쫓는 은사는 받았지만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2. 사도 베드로가 받았던 은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린양의 12사도였던 베드로는 어떤 은사를 받았을까? 사실 베드로 역시 사도 바울이 받았던 은사를 다 받았다. 다만 은사가 강하고 약하고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베드로도 역시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안 열림의 은사, 환상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하지만 베드로는 남들보다 더 큰 은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의 하나는 '능력행함의 은사'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던 이를 단숨에 일어서게 하였다(행3:6).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파워의 은사'도 강했다. 그가 설교하면 사람들이 변화되어 즉시 주께 굴복하는 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한 번의 설교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중에 3천 명, 5천 명을 변화시켜, 그들을 세례교인이 되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도 베드로 역시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베드로 사도 역시 귀신을 쫓는 은사만 받았지, 귀신을 보는 은사는 받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신약의 위대한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 못했던 것인가?

 

3. 귀신을 보는 은사는 어떤 것인가?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둘 다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안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 모두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으며, 또한 천사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은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는 귀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귀신인지를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귀신을 구체적으로 보는 은사를 받은 분들이 더러 있다. 이분들은 빛의 은사 쪽에 강하신 분들이다.

  은사에는 크게 '빛의 은사'가 있고, '불의 은사'가 있다. 빛의 은사는 눈으로 보는 쪽의 은사를 가리키고, 불의 은사는 능력을 행하여 기적과 치유를 행하는 쪽의 은사를 가리킨다. 물론 빛의 은사를 가진 자나 불의 은사를 가진 자는 귀신을 쫓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 딱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강한 은사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을 보는 은사는 어떤 계열의 은사일까? 귀신을 보는 은사는 한 마디로, 빛 계열의 은사이다. 참고로 빛 계열의 은사를 받으면, 영분별이나 영판단을 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사와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귀신들과 뱀들을 영안으로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도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천사와 예수님을 잘 보았지만 귀신은 잘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귀신을 잘 보는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귀신의 종류까지도 다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무당 귀신이 있다면 무당 귀신으로부터 파생된 귀신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때 파생된 영으로는 혈기 분노의 영, 시기 질투의 영, 살인의 영, 폭력의 영, 우울의 영, 이간질하는 영, 분리의 영, 유흥의 영, 망하게 하는 영 등이 있다. 귀신을 보는 은사를 가진 분들은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파생된 영들까지 다 볼 수 있다.

  그럼, 이들은 이러한 영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무당의 영 정도라면 그 영이 무당의 모습을 취하여 자신을 보여 주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지만, 혈기 분노의 영은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 속에 들어와 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귀신들에게 달려 있는 꼬리표를 보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기에 '혈기 분노'라는 글이 쓰여 있다면, 그녀는 '혈기 분노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영들을 보지 않은 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 것이다. 

 

4. 바울이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 못했던 간접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를 정리해 본다면 먼저 다음과 같은 간접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눈에는 제거되지 않은 악한 영들이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바울에게는 아주 쎈 귀신들이 눈속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그것들이 온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귀신들을 잘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바울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던 사울이었을 때에,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 설 수 있었고,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남녀를 막론하고 감옥에 처넣는 일까지 도맡아 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살기가 등등한 사람의 눈속에 무당 쪽에서 파생된 영들인 살인 폭력의 영들이 가득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지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가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았을 때에 일부의 영들은 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갔었다. 하지만 그때 모든 영들이 다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 영들이 자주 그에게 안질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눈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발 쫓아 달라고 주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사탄의 천사인 눈의 가시를 빼주지 않으셨다. 그가 받은 은혜와 계시가 너무나 커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놔두신 것이다. 

 

5. 바울이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지 못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다양한 종류의 귀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양한 종류의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았다면 일평생 귀신을 보고 귀신의 종류를 알려 주고 귀신을 쫓는 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귀신 전문가가 아니라 말씀 전문가가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에게 귀신을 보는 은사는 주지 않으신 것 같다. 둘째, 만약 그가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았다면 바울이 진정 해야 할 사명 곧 말씀을 가르치고, 목회자를 훈련시키고, 교회를 세우며, 교회로 파송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으며, 모든 일을 다 맡아서 주관할 수도 없다. 자기만이 잘 하는 영역이 있고, 자기가 맡아서 해야 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바울더러 바울만이 할 수 있는 일 곧 이 땅에 보내어진 바로 그 목적을 잘 완성할 수 있도록 귀신을 보는 은사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셋째, 만약 바울이 귀신을 보는 은사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볼 때 그가 가진 흠부터 보게 됨으로 그 사람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기대를 하지 못해서, 그들을 주님의 일꾼으로 성장시키는데 제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귀신을 보는 특별한 은사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바울 자신이 자신에 대한 주의 부르심에 충성할 수 있도록 바울에게 취한 어떤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나 바울이 '은사 내림의 은사' 내지는' 은사를 세워주는 은사'까지 가지고 있던 위대한 사도들이었기 때문이다. 

 

2023년 07월 18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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