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어떤 책인가? 이신칭의를 들려주는 책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는 결국 파멸을 당한다는 것을 들려주는 책인가? 아마 후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편파적으로 보아왔던 것이다. 사도바울이 들려주는 갈라디아서의 결론, 사뭇 충격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갈라디아서 강해말씀 듣기를 시작했다면, 이제는 결론의 말씀도 들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강해듣기가 끝날 때에는 갈라디아서가 정말 새롭게 보일 것이다.

2020-10-14(수)
제목: 갈라디아서강해(10) -최종회-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2)(갈 5:16~6:18)
https://youtu.be/BCQTsTC4dkA  [혹은 https://tv.naver.com/v/16223214  ]

 

 

1. 들어가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통해서 세웠던 교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에서 금새 떠나, 율법과 혼합된 복음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을 향해 다른 복음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가 다시 율법을 좇아가게 되면 초등학문 밑으로 다시 들어가 종노릇하는 것이 된다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붙잡아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것을 부탁한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골자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본문(갈5:16~6:18)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두번째 부분으로서 성령을 좇아서 행할 것을 권면하라는 대목(갈5:16~26)과 아울러 이것을 다시 정리해주는 요약부분(갈6:1~10), 그리고 마지막 권면과 축도부분에 해당한다(갈6:11~18).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의 인도함받는 삶이 왜 그리 중요한지를 그것을 따른 결과들과 함께 정리해볼 것이다. 그리고 할례자들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진정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들은 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가? 그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어서 회득한 자유를 죄짓는 데에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분으로부터 의를 전가받아 의롭다함을 받은 자이자, 그분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생명을 얻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율법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신분을 가진 자라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더라도 육체의 생명이 마치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되었다고 해서 죄된 본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된 본성을 지닌 육체도 동일하게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육체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내어주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틀림없이 죄된 본성을 따라 죄를 짓는데 자기자신을 내주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왜 그런가?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죄된 본성을 따라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의 음성을 좇아가야 한다. 때로는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 회개도 해야 하고,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칭찬받고 상받을 자가 되도록 오늘도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육체를 따라갈 것이냐 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육체를 따라갈 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3. 육체를 따라가는 자가 맺을 일들과 성령으로 좇아 행하는 자가 맺게되는 열매는 무엇인가?(갈5:19~21, 22~23)

  그렇다면 내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육체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새로 우리 안에 들어와 내 영과 한 영이 되어버린 성령(고전6:17)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따라가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미래가 육체를 따라가느냐 성령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멸망과 영생으로 분리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아주 심각하게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만약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죄된 본성으로 찬 육체를 따라가게 된다면 그는 육체의 일들 곧 15가지의 육체의 결과물들을 얻게 될 것이요 그 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갈5:19~21).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천국에는 들어가는데,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지 못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 자체를 못 들어간다는 뜻인가? 사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차지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편지 가운데 세 번  정도 나온다. 한 번은 고전6:9~10에 나오고, 오늘 본문 말씀(갈5:19~21)에 한 번 더 나오며, 마지막으로 엡5:5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런데 에베소서 5장 5절에 나와있는 말씀에 보면, 육체의 일들을 맺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엡5:6). 다시 말해, 육체를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갈라디아서에는 이것이 곧 "파멸"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엡6:8)(개역개정판에는 '썩어질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8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그영)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그영)으로부터 영생(시대의 생명)을 거두리라(엡6:8)"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썩어질 것"의 헬라어원문을 보면 "파멸, 멸망"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가 쓰이고 있다. 고로 육체의 일들을 맺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다가 결국에는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메시지의 결론이다. 고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뜻은 멸망을 당해 지옥에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자기가 지금 맺고 있는 결과물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과연 사도바울이 언급했던 15가지 육체의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말이다. 특별히 육체의 15가지 일들을 볼 때, '일들'이라는 단어는 복수형태다. 하지만, 성령의 9가지 열매에서 '열매'라는 단어는 단수형태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람이 짓는 죄들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결과들을 맺을 수 있으나, 성령의 열매는 그 중에 한 가지를 맺었는데 다른 것은 맺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즉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충성(신실함)의 열매도 맺고 있을 것이고, 오래참음(인내)의 열매도 맺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육체의 15가지 일들은 어떤 것들이고,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또한 무엇인가? 먼저, 육체의 15가지 일들을 살펴보자(갈5:19~21). 그 일들은 자범죄들의 종류에 따라 4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순결하지 않음에 대한 죄들로서, 1)'음행'과 2)'더러운 것'과 3)'호색'(음탕)이 있다. 두번째로는 불신앙의 죄들로서, 4)'우상숭배'와 5)'주술'(마술)이 있다. 그리고 세번째는 투기와 관련된 죄들로서, 6)'원수맺는 것'과 7)'분쟁'과 8)'시기'와 9)'분냄들'과 10)'당짓는 것들'(편나누기)과 11)'분열들'(파벌들)과 12)'이단들'과 13)'투기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과 관련된 죄로서는, 14)술취함과 15)방탕함과 그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들이 맺게 될 '열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총9가지다. 그것으로는 1)'사랑'(아가페)과 2)'희락'(기쁨)과 3)'화평'(평화), 4)'오래참음'(인내)과 5)'자비'(친절함)과 6)'양선'(선함), 7)'충성'(신실함)과 8)'온유'와 9)'절제'(자기통제)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결과물들이 내게서 나오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신이 지금 멸망으로 가고 있는지, 영생으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4.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성도가 힘써야 할 2가지 일들은 무엇인가?(갈6:1~10)

  바울은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자유롭게 된 자들이 해야 할 2가지 일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한다(갈6:1~10). 그것은 첫째, 성도가 서로 짐을 짊어지라는 것이다(갈6:2).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는 육체의 열매를 맺고 있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더욱 더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그러한 열매를 맺고 있다고 그것을 떠버릴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나 늘 점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짐을 일부러 남에게 맡기지 말라고도 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되 말씀을 배우는 자는 그분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나중에 심은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자유로 육체를 위해 심지 말고 성령(그영)을 위해 심으라는 것이다(갈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위해 계속해서 씨뿌리는 자는 결국 "파멸"의 거두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감으로 성령을 위해 씨뿌리며 살아가는 자는 결국 영생(시대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바울은 성령을 위해 씨뿌릴 때에 주의할 점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당장 거두는 것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의 피로 하나된 믿음의 가정들에게 대해서는 더욱 더 선한 일을 행하라고 하였다. 

 

5. 그리스도인이면서 할례자인 이들은 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받기를 강요하는 것인가?(갈6:11~13)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기를 원하는 자들의 실체에 대해 폭로한다(갈6:11~13).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2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는 그렇게 하여 과격한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면해보려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도 할례를 받게 하여 자신이 그들도 그렇게 만들었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그들의 교만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들은 할례만 받았을 뿐, 그들 자신도 다른 율법조항들은 지키고 있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는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기에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진정 자랑해야 할 것들, 2가지는 무엇인가?(갈6:11~18)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으로서 진정 자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자기의 사례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자랑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한다고 했다(갈6:14). 여기서 "십자가"는 자기를 죽이는 도구를 가리킨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도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겼다고 했다(갈2:20). 그리고 또 한 번은 죄된 본성으로 가득차 있는 "육체"도 역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겼다고 했다(갈5:24). 그리고 이제는 세번째로 "세상"도 십자가가 못박아 죽음에 넘겼노라고 말했다(갈6:14). 왜냐하면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이 주는 유혹에 노출되기 때문에, 세상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길 때에라야 비로소 자랑할 것은 없어지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두번째로 자랑할 것은 자신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들(자국들,낙인들)"이라고 했다(갈6:17). 그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매맞기도 하고 찢기기도 하고 해서 남겨진 육체의 상처들이 곧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돈과 명예와 인기와 쾌락을 자랑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과 육체와 세상을 죽음에 넘긴 것과 세상 유혹마저 이기고 오로지 복음전파에 진력함으로써 입게된 상처를 자랑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지난 10번의 시간을 통하여 갈라디아서를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갈라디아서만 딱 떼어서 공부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려는 핵심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까지 균형을 잡고 언급하려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사람들이 갈라디아서를 찾는 목적의 상당 부분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칭의는 구원의 여정에서 첫 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은 구원을 책임져주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신칭의가 신앙의 핵심인 것인량 언급하기도 하고, 이신칭의를 받았다면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스스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중점적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만약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신칭의를 얻었다면, 그는 이제 그 자유로 육체의 본성을 따라서 죄짓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데 그것을 사용해야 하며(갈5:13, 6:2),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데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갈5:16, 6:8).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갈6:8).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결론이자 최종적인 경고다. 그런데도 수많은 성도들이나 주의 종들이 이 부분을 놓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전9:27에서도 자기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려는 데에는 자기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전에 한 일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그날도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빌2:12~14). 마치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것마저 구원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는 자신이 영적인 싸움을 다 싸웠으며,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했다(딤후4:7~8).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들에게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허락하실 것이지 칭의를 받았다고 자신을 방종에 맡기는 자에게는 아닌 것이다(딤후4:18). 건투를 빈다. 

 

2020년 10월 14일(수)

정병진목사

 

아담의 타락이후,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남아있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성령을 받게 된 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설명하면서, "자유"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선포한 이러한 자유는 과연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인가? 아니면 그것으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자유의지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 놀라운 성령의 계시가 있다.

2020-10-07(수) 수요기도회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9)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1)(갈 5:1~26)
https://youtu.be/zH_eE8HZZM0  [혹은  https://tv.naver.com/v/16118340 ]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나 자유가 주어져 있다. 하지만 이 자유가 어떤 자유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란 대체 어떠한 자유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인간의 의지는 루터가 말하는 노예의지처럼 앞으로 한 발자국도 스스로 내딛지 못하는 의지인가 아니면 정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자유의지인가?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을 통하여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과연 무엇을 위한 자유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조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하여 놀라운 새로운 빛이 비춰지기를 바란다. 

 

2. 갈라디아서 5장의 위치는?

  갈라디아서 5장은 일종의 "실천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과연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실 갈라디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갈1~2장까지로서, 일종의 "변론편"이다. 여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과 사도직의 신적 기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둘째로, 갈3~4장은 일종의 "교리편"이다. 여기에는 율법의 행위과 믿음을 비교하고, 율법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율법의 한계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과 자유로운 아들에 관한 비교가 나온다. 그리고 셋째로, 갈5~6장의 말씀은 교리편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써, 이것은 일종의 "실천편"이라 하겠다. 그것은 약속을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갈라디아서 5:1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대헌장(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2~12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인가?"에 대한 말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준수하려는 자의 일례인 할례준수를 들어서, 할례준수의 무익성과 그 해악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13~6:10에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에 대한 해설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말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는 일이며,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인 것을 언급한다. 

 

3. 노예의지와 자유의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갈라디아서 5장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것에 대한 올바른 사용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에 관한 말씀이다. 언젠가 루터는 종교개혁을 펼쳐나감과 동시에 늘 노예의지론을 강조했다.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죄를 짓기 위한 의지 곧 노예의지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도의 견인(보존)을 주장하면서, 인간에게는 더이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해버렸다고 말했다. 이것을 일컬어 후대사람들은 "전적인 무능[력]"이라고 교리화시켰다. 이는 아담의 타락은 육체와 영혼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이므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 편으로 맞는 말이지만, 한 편으로는 틀린 주장이기도 하는데도 말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전적인 무능은 잘못된 교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의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님께서 다 해주셔야 된다고 한다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당신에게 나오기를 초청하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죄인들을 초청하셨다. 즉 부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면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는 갖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준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가 비록 죄를 짓는 노예의지가 되어버렸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것에 대해서 반응할 정도는 남아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인간의 상태를 정의하실 때에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며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마12:18~21)" 그렇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며 동시에 꺼져가는 심지인 상태인 것이다. 그대로 가만히 둔다면 인간은 꺾여지고 말 것이며, 불도 그만 꺼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것에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있다. 그래서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가기가 턱없이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인간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잡고 그분의 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래서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에 주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다(갈4:6). 여기서부터 인간에게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전에만 해도 인간은 죄를 짓기를 더 좋아하며 그만 죄에 넘어가는 노예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심으로 인하여 죄의 욕구보다 더 강한 성령의 욕구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과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은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죄된 본성을 가진 육체를 쳐 복종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성령의 의지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에 얽매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 장본인이기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받을 모든 저주를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늘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자유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있는 자는 다시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기를 원하는 자 곧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3가지를 말했다. 

  첫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할례를 받는다면 그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는 무효화되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갈5:2).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할례를 받은 자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떠앉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자유인이 도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갈5:3).셋째,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끊어졌고, 은혜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갈5: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오직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고 한 것이다(갈5:6).

  그러나 당시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했다. 들의 적은 누룩 곧 작은 율법주의적인 오류들이 결국 온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갈5:7~9).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갈5:10). 사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할례를 전파했더라면 그는 아무런 핍박도 받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골로 갈라디아성도들을 어지럽힌 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거세하듯 잘못된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갈5:11~12).

 

5.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대체 무엇을 하라고 주신 자유란 말인가? 그것은 그것으로 자신의 육체에게 기회를 주어, 마음껏 죄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갈5:13).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약속의 자손인 예수님을 믿어 자유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로서, 죄된 본성으로 가득 찬 육체를 따라가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갈5:16).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순전한 자유를 가진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 그 자유로서 오히려 사랑으로서 서로에게 종노릇해야 한다고 했다(갈5:13). 그리고 둘째, 자기를 성전 삼고 거하시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며, 영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갈5:16~18). 

 

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데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누군지도 정확히 모른 채,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자가 많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까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기는 이미 모든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지신이 어떤 죄를 짓더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인류의 죄값을 다 치렀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모든 인류의 죄값을 속량하고도 남음이 있는 피이기는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회개하지도 않은 자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며, 아짓 짓지도 아니한 죄까지 용서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후에는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 마음껏 죄를 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성령의 인도함을 잘 받을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갈5:18). 왜 사도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영의 인도를 받으라고 말했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사람의 영"과 그리고 둘이 "연합된 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성령"이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가 다 의역이었다. "거룩한 영"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그 영"이거나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는 "영"이라는 단어만 나올 뿐이다. 특히 갈5:18에 나오는 성령은 "그 영"도 아니라 그냥 "영"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5:18에 나와있는 "영"은 무슨 영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먼저, 갈5:18에 나오는 "영"은 무슨 영인가? 그것은 "성령"이 될 수도 있고, 성령과 사람이 하나된 "그 영"이 될 수도 있으며, "거듭난 사람의 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갈5:18에 나오는 영은 수식어나 정관사가 정확히 붙어있지 않기에, 사람의 거듭난 영을 가능성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잘 알파시피, 사람들은 자신의 영의 상태에 따라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영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영과 보혜사 성령의 영이 하나된 연합된 영일을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서 편지는 이미 믿음으로 성령받은 자들에게 보낸 편지이기에(갈3:2). 이 사람들의 영은 불신자의 영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며, 최소한 거듭난 성도들의 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된 영으로서 "그 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단순히 "영'이라고 언급하여서,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거듭난 사람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더 강조할 때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6:17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하나의 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후3:17에는 "이제 주님은 그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주 예수께서 성령으로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믿어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모두에게 다 자신의 영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는 성령과 우리의 영은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죽는 그날에는 성령과 우리의 영의 분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들이지만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영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한다. 그 영을 슬프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엡4:30). 만약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도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아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죽는 날에 가서 성령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분의 책망에 순종하여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성령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성령께서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류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죄된 본성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하여 죄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전까지, 사실 모든 인류는 죄된 본성에 갇혀 그것들에게 종노릇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이 범죄하고 있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율법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죄를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임시법인 율법에 갇혀있는 자들을 놓아주고 인류의 새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저 하늘로 되돌아셨고 대신 우리 영 속에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과는 천양지차 다른 성령의 경륜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제는 성령께서 직접 우리에게 죄를 깨우치시고 바른 길을 안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잘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성령이 누구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을 성령으로 잘못 알고 잘못 인도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잘 몰라 성령의 인도를 잘 따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믿는 이들의 영 속에 들어와 우리의 영과 하나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전6:17). 한 마디로 우리가 죽기까지는 성령은 나의 영과 분리될 수 없는 연합된 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사람의 영에 더 강조점을 두어 말하면, "영의 인도"라고 말할 수 있고, 성령에게 더 강조점을 두어 말한다면, "성령의 인도"도 될 수가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제 성도는 성령과 하나된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 안에 성전삼고 들어와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잘 따라가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 이 시간에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2020년 10월 07일(수)

정병진목사

 

갈라디아 성도들은 율법 아래에 있었는가 아니면 복음 아래 있었는가? 그런데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기를 원다. 그만 바울 유대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쉬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약속을 믿고 성령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율법 아래 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아래 있고자 한다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율법언약과 약속언약을 비교하여 낱낱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말씀을 듣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그것을 설명해주었다.

2020-09-23(수)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8) 바울의 호소와 율법과 약속의 차이(갈4:12~31)
https://youtu.be/Wupnxjx5As8  [혹은 https://tv.naver.com/v/15933048  ]


 

 

1. 들어가며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쉽게 무너지고 말았는가? 그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던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아들이자 상속자로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종의 영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인 예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그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벌써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율법의 규례들을 준수하는 자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들은 금새 바울이 전해주었던 복음에서 떠나 율법을 규례들을 지키는 자들로 변질되어 버렸는가? 그러자 바울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신앙으로 돌아올 것을 편지로 써보낸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교리편(3~4장)에 해당하는 부분 중 마지막 부분(갈4:12~31)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들이 복음전파초기에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고 따랐으며 바울에게 헌신적이었는지를 밝히면서(갈4:12~20) 이제 다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하게 되었다면서, 그들은 원래 어떤 사람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하갈의 아들과 사라의 아들의 경우를 들어서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2. 갈라디아 성도들은 종으로 구원받았는가 아니면 상속자로 구원받았는가?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렇다. 그들은 어리석었다. 그는 종으로 부름받은 것도 아니고 종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했기 때문이다(갈3:29,4:1,7). 왜냐하면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움부터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얻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의 아들의 영을 마음 가운데 받아들여의 하나님의 아들들로 탄생했기 때문이다(갈4:5~6). 그때 그들 속에 아들의 영인 성령께서 아들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갈4:6).

  하지만 아무리 아들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상속자로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태어난 아들에게 초등교사(몽학선생)를 붙여 준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아들로서 그리고 상속자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그때가 바로 그들이 어렸을 때다. 그래서 태어나서 14살 때까지 아들은 후견인의 지도를 받으며, 25세때까지는 청지지의 지도를 받는 것이다(갈4:2). 이때 "후견인"은 보다 더 어릴 때에 주인의 아들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책임을 맡는데, 후견인은 그때에 주인의 아들에게 초등학문(기본원리)을 가르친다(갈4:3). 그리고 나면 이어서 "청지기"가 그 아들을 맡아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킨다. 그러나 후견인이나 청지기는 결코 아들이 아니며, 종이다. 한 마디로, 그는 주인의 아들을 가르치는 종인 셈이다.

  그렇지만 25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지기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아들은 없다. 아들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재산을 자기가 관리해야 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로마시대의 미성년자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와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들로 탄생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어렸을 때에는 후견인과 청지기와도 같은 율법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년이 되어서 상속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자서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종의 지도를 받으려는 사람이 되고 있느냐고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한다(갈4:8~111). 왜냐하면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부터 종으로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었고 또한 후견인과 청지기로부터 훈련을 받아 이미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갈4:7).

 

3. 복음전파 초기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떻게 바울을 아끼고 사랑했는가?

  그렇다면,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왔을 때에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일까? 바울은 처음부터 갈라디아 지역들 곧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에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갔던 것일까? 그의 간증을 들어보면, 바울이 그쪽으로 가게 된 것은 그가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에 육체의 질병을 통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너희도 알아온 채 있다(갈4:13). 그랬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간 것은 어떤 질병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지대인 밤빌리아에서 고산지대인 갈라디아지역으로 갔던 것이다. 추정컨데 그가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고혈과 설사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받아주였고 치료해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바울이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육체의 연약함(아스테네이아)"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다. 어떤 이는 바울이 다메섹도상의 체험에서 눈이 고장나서 안질로 고생했다고 말하기도 한다(행9:9). 왜냐하면 갈라디아 성도들을 바울을 사랑해서 그들의 눈들이라고 빼어서 주려고 했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갈4:14).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주장인듯하다. 왜냐하면 다메섹 체험이후 바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진 것은 그의 영안이 열린 경험이었을 것이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기들의 눈들이라도 빼어서 주려고 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바울을 아끼고 사랑했고 존경했으며, 그에게 헌신적이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는 바울이 앓고 있었던 질병은 귀신들려 고통받는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고린도후서10:10을 근거로 하는 주장인데,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 보이기는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바울에게 사탄의 사자(천사) 곧 귀신을 붙여주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것은 그가 받은 계시가 너무나 큰 것이어서 스스로 높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 귀신이 그의 몸에 들어갈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간질병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간질병"이라는 질병은 정신질환으로서 그의 의식(혼)이 완전히 귀신에게 사로잡혀 귀신의 통제하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바울이 그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공부해 보면,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귀신이 들어갈 수는 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수백 마리 내지는 수천 마리의 귀신들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세력이 약한 귀신들은 사람에게 영향을 못 미치는데, 그것이 뭉치게 되거나 세력이 큰 놈이 들어가면, 몸의 어떤 부분에 질병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더라도 바울의 질병은 결코 간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 자체가 복음전파자로서의 부적격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다가왔던 유대율법주의적인 성도들이 실은 어떤 자들이었는지를 들려준다. 그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열심을 냈던 것은 좋은 뜻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성도들을 바울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간질시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들에게 열심을 내어 종노릇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갈4:17). 무엇이든지 좋은 일로 열심하는 것은 허용이 되겠지만 나쁜 뜻으로 열심을 내는 것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또다시 그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갈4:19).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따라 갔는데 그것은 안타깝게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4. 율법언약와 약속언약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신에게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상기시켜준다. 즉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누군지를 알게 됨으로 인하여, 유대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다시는 넘어가지 말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두 언약을 비교해서 그들에게 말해준다. 사람에게는 2가지 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율법언약"이요, 또 하나는 "약속언약"이라는 것이다(갈4:24). 그런데 사람이 만약 율법언약을 믿고 따라가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상태라 할지라도 종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약속의 언약을 듣고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처음부터 "약속의 자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성도들이 종의 멍에에 매여 종노릇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라의 자녀가 되었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갈4:23).  

  그렇다면, 바울은 '율법언약'과 '약속언약'을 어떻게 비교해서 말한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두 여인을 들어서 설명하였다. 아브라함에게는 첩을 얻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부인이었던 사라의 몸종이었다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이 된 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는데, 그녀의 신분은 종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가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의 첫아들인 '이스라엘'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셨다. 그리고 13년후에 다시 와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그것은 그가 다시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겠다는 표시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그에게 다시 돌아오게 될 때가 올 텐데, 그때에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1년만에 아브라함이 정말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게 된다. 그 바로 '이삭'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으며,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난 아들이었던 것이다. 둘 다 아들인 것을 분명하나, 여종을 통해 난 아들은 아들이나 종과 같은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아버지의 품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아버지의 재산도 상속받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인 사라를 통해 난 아들 이삭은 아들이면서 또한 상속자였다. 왜냐하면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아버지의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갈을 "율법언약"이라고 명명했으며, 자유로운 여자 사라는 "약속언약'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제정될 때에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이어져서 바울 당시 율법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런데 약속은 약속이 제정될 때에는 아브라함에게 제정하신 것으로서,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된 것이기에,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고로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살게 되고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5.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요약했는가?

  그리고 그때도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을 박해한 것처럼, 육체를 따라갈 것을 주장하는 유대율법주의적인 교사들이 성령으로 따라가야 할 것을 주장하는 바울을 핍박하고 있었던 것이다(갈4:29).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때 당시 여종과 그녀의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여종의 아들이 결단코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이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율법주의적인 교사는 이제 갈라디아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알레고리적인 비유인 두 언약를 들어서 서로 비교하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이야말로 약속을 따라 난 아들이자 상속자이며, 또한 성령을 따라 난 자들로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할 자들인 것을 명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바울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하지도 못했을 율법언약과 약속언약의 차이를 여종(하갈)의 자녀(이스마엘)와 자유로운 여자(사라)의 자녀(이삭)를 비교함으로써, 갈라디아 성도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유대율법주의적인 교사들을 갈라디아교회에서 당장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없는 자들로서 그를 따라가는 자도 그렇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부터 종으로서 태어났던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종의 자식이 들어와서는 사라의 아들을 잘못 인도하더니 결국 핍박하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성경의 가르침은 정확하다는 것이다. 하갈도 분명히 이스라엘이라는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았지만 둘 다가 결코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종의 자녀로 살려고 하느냐면서 그들을 책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로 산출되는 모든 이방인 성도들은 처음부터 아들의 영인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에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기초를 잘 닦아야 한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서 기초를 잘 닦았다면 이제는 하늘나라의 상속자이기에, 상속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 땅 위에서 펼쳐가나는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일이다. 그 방법은 다음주에 차근차근 배워보도록 하자. 

 

2020년 09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복음만 있으면 되는가? 이들에게 율법은 구시대의 유물이며, 유대인들에게 지켜야 할 법도이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폐지해버리셨기 때문에 관심밖에 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없으니, 율법은 폐기처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게 맞는 주장인가? 율법은 2천년전에 이미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것인가? 이 율법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2020-09-16(수) 수요기도회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7)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한계(2)(갈3:10~4:11)
https://youtu.be/E3kmhETBNEY  [혹은 https://tv.naver.com/v/15815875  ]

 

 

1. 들어가며

  바울이 말하려는 율법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인가?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과 그리고 "율법"을 어떻게 구분하여 말을 했는가?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의 주장처럼, 할례를 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외치는 사도바울은 과연 율법무용론자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율법지속론자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가 이방인들의 교회였던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증거하였던 율법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는 왜 믿음은 강조하면서도, 회개는 강조하지 않았던 것인가? 율법과 관련하여 그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은 참으로 많다. 그런데 그것의 상부부분이 갈라디아서와 그리고 로마서에서 답을 해 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바울의 율법관에 관하여 좀 더 넓고 포괄적으로 폭넓게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는가? 그리고 율법은 과연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율법이 지난 한계는 대체 무엇인가? 이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2.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와 율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관하여 2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율법의 행위들"에 관하여 말하고, 또 하나는 "율법" 자체에 관하여 말한다. 사도바울은 먼저 "율법의 행위들"과 "믿음(언약)"을 비교한 다음, 이어서 "율법"과 "믿음(복음)을 비교하여 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했던 그 복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헤테로스, different) 복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고 있는 갈라디아성도들을 엄히 책망하는데, 그때 바울이 말했던 "다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다가 율법의 행위들 특히 율법의 의식법들까지 지켜야 칭의도 얻고 구원도 얻는다는 복음이었다. 고로, 여기서 바울이 말했던 "율법의 행위들"이란 율법 중에서 주로 의식법을 가리키고 있는 바, 할례를 행하고, 절기도 지키고, 음식도 가려서 먹고,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지도 않는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자체를 부정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폐했던 의식법의 규례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다가 추가한 것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기능을 소개하고, 이어서 율법의 한계까지를 언급한다. 이것은 율법이 결코 복음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까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그 이유를 밝히 말하려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결코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율법의 행위들 곧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켜야만이 칭의도 얻을 수 있고 구원도 얻을 수 있는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이었지,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야 했던 이유와 목적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신 것인가? 그것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세분하여 말하면, 4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첫번째 목적은 사람들이 범법(법을 위반함)함으로 추가된 것이라는 것이다(갈3:19). 왜냐하면 율법이 없으면 자신이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추가로 주신 것이다(롬3:20). 그러므로 사도바올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롬3:20). 둘째,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두번째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심히(한층 더) 죄가 되게 하기위함이다(롬7:13). 무엇이 죄인지를 규정하는 항목이 없다면 자신이 죄인인지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무엇이 죄인지를 규정하는 항목이 있다면 그것을 보면 자신이 정말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세번째 목적은 범죄(탈선, 이탈)이 더 많아지게 하려 함이다(롬5:20). 율법을 모르고 있는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 자인자 잘 모르고, 자신은 단지 몇 가지 죄만 지은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말씀을 더해줌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죄들을 짓고 있는지를 뚜렷히 알게 되어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자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네번째 목적은 자신이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얻고도록 하기 위함이다. 곧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는 하나의 군으로 만들어 그리스도께서 인도해주는 초등교사의 일을 하도록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4. 율법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고로 바울은 율법은 그전이나 현재나 초등교사로서 그 기능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서 삶의 현장에서 숱한 역경과 환란들에 노출되면서 비로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이 주어짐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상태에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한결같은 탄식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다. 그것을 본인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데까지는 나아가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에게 가면 그 문제가 해결받을 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것들은 율법들 중에서도 의식법이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고로 사람들은 의식법들의 규정을 통하여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율법에 있는 의식법들을 통하여 의식법에 나오는 것들의 실체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분에게로 가면, 율법의 의식법들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 안식(쉼)을 얻고자 함인데, 사실 이땅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는 것이다. 일평생 고단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일요일에 조금 쉴 수 있을른지는 몰라도 영혼은 항상 고단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만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붙잡으면 된다. 그러면 안식일의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깨닫게 하시고 주시고자 하는 안식이 실현되는 것이다. 고로 율법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적극적으로는 예수 안에는 안식이 있고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점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금도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참된 안식과 치료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5. 율법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율법말씀만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키고, 도덕법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율법 자체만으로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이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갈3:2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또한 죄를 심히 죄되게 할 뿐더러 죄가 더 많아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죄지은 자들이 회개한다면 그 죄을 씻을 수 있도록 인도한느 역할도 감당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율법이 그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생명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아들은 자신이 받은 생명을 오직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만 믿는 자들에게 주기 때문이다. 즉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만 주신 그 생명을, 아들은 또 보혜사 성령에게 보내시어서, 모든 믿는사람들 속에 집어넣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자기자신을 잘 다스리고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죄된 본성까지는 다 이겨낼 사람은 없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거기에서 궁극적인 안식과 평강와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붙들어야 생명의 은혜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은 줄 수는 있을른지 모르지만 결코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서, 율법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오늘날에도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인가? 율법을 과거의 구닥다리의 유물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아니다. 결코 아니다. 율법은 지금도 여전히 소극적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에게까지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여전히 소극적이지만 그 기능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는 율법은 죄를 짓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죄가 죄되게 하고, 죄가 더 많아지게 함으로 예수님을 붙잡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아뢰고 또한 그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일을 돕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으며, 율법의 행위로서는 결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있을 것이라는 갈3:19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율법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율법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죄인인지를 잘 모를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율법이 없기 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었고, 그러한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는 그들이 과거 애굽 땅에서 어떠한 죄를 짓고 살아왔는지를 깨우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죄를 지으면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와 양의 짐승의 제사로는 인간의 죄가 용서될 수 없으며, 진짜 흠없는 사람이 오셔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할 것임을 미리 가르쳐준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의 임시법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한시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은 더이상 필요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해 버렸으니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죄된 본성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제 갓 태어난 갓난아기(네피오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시민들에게서 있는 초등교사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기까지는 초등교사로부터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초등교사는 주인의 아이들을 일정기간동안 보호하고 양육하고 가르치는 일을 맡는데, 그때 주인의 아들이 상속자가 될 때까지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지도하고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다. 이것을 "초등교사(몽학선생)"라 부르는 것이다. 이때 초등교사는 그 집의 있는 종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의 초등교사의 역할이 곧 율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초등교사에도 나이에 따라 두 종류의 교사가 따라붙게 되는데, 그들은 "후견인"과 "청지기"라고 불린다(갈4:1~2). 그런데 후견이니나 청지지가 나 종들이다. 먼저 첫째로 주인의 아들은 후견인의 양육과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는 주인의 아들이 보다 더 어렸을 때(~14세까지)에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초소양교육을 그로부터 받는 것이다. 이는 후견인은 만4세에서 14세가지의 중인의 아들 곁에서 그를 교육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25세까지는 "청지기"에서 붙혀서 상속자로서의 소양교육을 받게 한다. 아들일지라도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독립적으로 상속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아들들은 청지기의 지도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을 이끌어갈 수 없는 미성숙한 자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는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초등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두고서 사도바울은 "초등학문"이고 불렀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기초소양, 기초원리를 가리켜 "초등학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주인의 아들에게 초등교사가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유대인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성도가 되면 대부분은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율법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사람도 죄된 본성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의 공격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고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보조적으로 율법을 곁에 주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도덕법(십계명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7. 나오며

  바울의 서신 가운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매우 강조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믿는 자들 마음 속에 내주하도록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그러한 구조로 편지(책)이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불구하고 오늘날 과연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는가? 아니 성령이 누구시며 어떻게 자기를 인도하는지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렇듯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반드시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도록 보내어진 성령을 받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더라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들에게 율법은 일종의 죄에 대한 책망교과서가 되어준다. 율법이라고 부지런히 읽고 그것으로 자신을 비춰보아서 자신이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자백함을 통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율법이라고 곁에 놓고 공부하고 읽어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살펴보고, 죄목이 발견될 때마다 즉시즉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죽는 날에 자신이 지었던 죄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면 최소한 율법을 읽고 배워서 거기에 나온대로라도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 최종관문은 결국 죄를 회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죽는 날에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하여 죄를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에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살아서는 귀신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니, 저주가 떠나가고 질병도 사라지며, 건강하게 살고,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함께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9월 1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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