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한 해 결산하기(4)] 성도라면 끝날까지 추구해야 할 일과 그것을 성취하는 법(빌3:12~14)_2023-12-29(금)

https://youtu.be/Cjc3b2Eu18k [또는 https://tv.naver.com/v/45422918]

 

1. 들어가며

우리 신앙인들이 일평생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일평생 추구했던 것은 아마도 인생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요 그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얻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상얻는 자가 되는 것일까? 천국에서 상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2. 지금까지 천국 백성 가운데서 가장 복된 자로 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약1,000여 명의 중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복된 자, 가장 축복받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인가 모세인가? 다윗인가 이사야인가? 사도 베드로인가 사도 요한인가?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그는 가장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집을 짓고 살고 있기 때문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이러한 집과 이러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을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며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얻는 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그 일에 그는 일평생을 헌신했던 것이다(딤후4:7~8).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삶을 돌아보고 그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3. 사도 바울이 일평생 추구했던 부름의 상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 쉼없이 일평생을 달려갔다. 그리고 끝까지 신실함을 지켰다. 그렇다면 그가 일평생 소망했고 가장 추구했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에게 주시려고 했던 부름의 상이었다(빌3:12~14).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럼, 그가 일평생을 추구했던 부름의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심히 일을 할 경우 그에게 주어지는 보상, 임금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경기장에서 승리하는 자가 얻게 되는 바로 그 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달려간 것이다. 그러므로 상에도 2가지 종류의 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수고한 만큼 주어지는 보상으로서의 상이 있다. 이것을 헬라어로는 '미스도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계22:12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자신이 일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수고한 것에 대한 댓가를 받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 살 집 곧 천국집이 잘 준비가 된다. 그러므로 주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 천국집이 커지거나 혹은 인테리어 장식이 보석으로 더 아름답게 장식되거나, 혹은 집 정원에 있는 분수대와 꽃 그리고 새들이 더 많이 채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진정 추구했던 것은 천국집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 추구했던 것은 천국에서 그가 받을 진정한 상으로서, 경기자가 경주에서 이겼을 때에 받게 되는 그러한 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는 그러한 종류의 상인 것이다. 이는 최종적으로 이기는 최고의 선수가 받는 상으로서 헬라어에서는 '브라베이온'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늘에서 주실 부름의 브라베이온을 위하여 끝까지 달려갔던 것이다.

 

4. 천국에서 브라베이온의 상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국에서 성도가 받게 될 브라베이온의 상은 천국에 입성하는 모든 성도들이 다 받는 상이 아니다. 몇몇의 소수만 받는 상이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상은 한 마디로 면류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면류관은 주님 나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최고의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류관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 중에서 경기를 통해서 최고의 경주자가 된 사람이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브라베이온의 상을 얻기 위해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사도 바울은 빌3:12~14의 말씀과 고전9:25~28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절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고전9:25). 경기장에서 육상 경기를 할 때 최고의 우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제를 해야 한다. 먹을 것 다 먹고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우승하는 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도시에서 2년마다 개최되었던 이스트미안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약 열 달간 철저하게 자기 통제를 했다고 한다. 첫째로는 술을 통제했다. 술을 먹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먹는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이어서 식이요법에 따라 먹어야 할 음식만을 먹고 지냈다. 그리고 셋째는 성적인 유희도 절제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경기장에서 결코 금메달을 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그것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만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절제라는 의미다.

둘째,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전9:26. 빌3:12~14). 달리기 선수는 골인점을 목표 지점으로 설정하고 달려간다. 그리고 권투 선수는 상대방의 얼굴이나 약한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가격을 한다. 그래야 끝까지 달릴 수 있으며, 잘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갈 때에 절대 방향없이 걸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손을 뻗치되 허공에 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설정한 다음 그 길을 줄곧 걸어갔기 때문이다.

셋째, 자기 육신의 몸을 철저하게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 했다(고전9:27).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귀신들의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냥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놀고 먹기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기장에 나가 경주에서 이기기를 경쟁하는 자는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먼저는 쳐야 한다. 멍이 들도록 자신의 몸을 거칠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혹독하게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시켜야 한다. 몸을 영혼의 노예인 것처럼 생각하고 몸을 하나님의 뜻에 예속시키는 것이다. 더이상 반항하지 않도록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야 결국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성도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고로 성도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하늘에서 주님이 주시려고 준비해 둔 부름의 상이다. 하늘에서 우리를 이 땅에 내려보내실 때에 주신 사명을 끝까지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날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태해지고, 안주하려고 하고 더욱이 잘못되면 퇴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룬 것에 대해서 감사는 하되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면서 그냥 거기에 안주하면 아니 된다. 부르심의 상을 얻는 그날까지, 다시 말해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부름의 브라베이온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자에만 주는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곧 '면류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면류관은 천국에 들어온 성도들 중에서 주님 앞에 충성했던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몇 안 되는 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불러내실 때에 우리에게 주려고 작정하신 채 있는, 부름의 상을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2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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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한 해 결산하기(3)] 내가 과연 영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을른지 어떻게 알 수 있나?(마25:14~30)_2023-12-28(목)

https://youtu.be/Wi7sif78rZg [또는 https://tv.naver.com/v/45422907]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는 달란트도 있고 은사도 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달란트가 능력을 강조하는 쪽이라면, 은사는 선물을 강조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에게 달란트를 주시는가?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합당한 조건을 따라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오늘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달란트와 은사를 주시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달란트의 분량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인가? 이것은 사실 나 자신이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달란트는 매우 중요한 이슈가 아닐 수 없다.

 

2.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들은 어떤 종들로 나뉘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는 종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종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다(마25:21,23). 즉 이들은 선하고 신실한 종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있다(마25:26). 그런데 이러한 종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씀하셨다(마25:30). 이는 쓸모없는 종이요, 필요없는 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이라 할지라도 어떤 종은 주님이 쓰시기에 꼭 필요한 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은 주님이 보시기에 쓸모없는 종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에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3. 하나님께서 종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그리고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다. 그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를 통해서 그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도 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넘겨받았던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주인을 전혀 이롭게 하지 않았던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고, 주인을 이롭게 한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이들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청기기라는 말은 주인에게는 종이지만 종들에게는 그 종들을 부리는 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청기지 종이란 신분으로는 비록 종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들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종이 바로 청지기 종인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자기 자신의 종들을 불러 놓고 자기의 재산들을 그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넘겨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 맡긴 달란트가 각각 다르다. 하나는 다섯 달란트였고 또 하나는 두 달란트였으며, 또 하나는 한 달란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되 차별하는 것처럼 각기 다르게 맡긴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맡긴 것이다. 주인이 보기에 기분이 좋으니 더 많은 것을 맡겨 주고 기분이 나쁘니 더 악한 것을 맡겨 준 것이 아니라 각기 자신이 가진 능력의 분량에 따라 맡겨 주셨다는 뜻이다.

 

4.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인이 종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던 달란트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것은 첫째로 그것이 능력이자 재능이라는 것이다. 이는 각기 잘 감당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리킨다. 둘째로, 아무리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지 종들에게는 있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로, 주인이 달란트를 맡겨 주실 때에는 각 사람의 분량만큼 맡겨 주신다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의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결산을 할 때에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할 것을 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가지고 더 남기기 위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수고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다음에 또 시작할 때에 나 자신의 기본적인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사람에게 달란트를 맡기실 때에 얼마만큼 맡길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의 수고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5.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달란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달란트는 어떻게 해서 나의 것으로 정해지는가? 그것은 3가지 기준이 있다. 이 기준에 따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달란트를 분배해 주시는 것이다.

첫째, 조상들이 얼마나 심었는가에 따라서 내 달란트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받은 달란트에는 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많이 심었다면 그의 후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을 받고 태어나는 것이다. 즉 조상들이 늘 베풀고 살았던 자는 후손이 물질에 있어서 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나 조상들이 영성가이고 영적 사역자였다면 그의 후손이나 자녀들 역시 아버지보다 더 높은 영성가가 될 수 있고, 더 높은 영적 사역자도 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불만을 가진 자가 나올 수 있다. "누구는 조상을 잘 만나서 복을 누리고 사는데, 왜 나는 조상을 잘못 만나서 이런 고생만 하고 사느냐? 참 세상 공평하지 않구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것은 첫째로 조상이 물려준 것이 꼭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금 복을 누리고 살고 있는 자는 다 조상들의 덕택이라 말한다고 할지라도 정작 본인이 베풀고 살지 않으면 후손들 중에 복받을 자가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달란트의 분량을 이미 정해서 보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왈가불가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어떤 그릇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어떤 그릇으로 나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주인은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참견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달란트를 얼마만큼 받았는지에 상관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어떤 결과를 남기려 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그에게 달란트를 맡기실 때에 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주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지는 사실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어떤 결과를 남기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근거로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든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있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이 다음번 달란트 분배에 있어서 기본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는 지금 내가 얼마나 남겼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그것을 더 잘 감당하고 더 많이 감당할 자산이 사실상 내게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이미 가진 것으로 열심히 일하여 얼마를 남겼는가 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의 달란트의 분량이 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라도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충성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전무후무한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자들이 결국 나중에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듯이 천국에도 들어가고 천국 잔치에도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28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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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한 해 결산하기(2)] 세 가지의 결산 키워드로 살펴보는 야곱의 파란만장한 생애(창32;1~11)_2023-12-27(수)

https://youtu.be/ttnzhbbsKBc [또는 https://tv.naver.com/v/45421465]

 

1. 들어가며

사도 바울은 인생의 결산 키워드로 3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4:7에 나오는데, 3가지다. 먼저 첫 번째는 영적 전투를 통한 영적 성장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얼마나 완수하여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그렇게 맡겨진 사명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3가지 기준에 따라 자신의 인생도 결산해 보며 한 해도 결산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한 사람의 일대기를 바울이 제시한 3가지 결산 키워드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 사람은 구약시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라는 인물이다.

 

2. 야곱의 생애는 어떻게 결산할 수 있는가?

야곱의 생애를 결산한다면 그는 과연 성공적인 인생을 살다간 사람일까? 결론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본인이 천국 백성 가운데 이기는 자의 예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꿈치를 잡은 자 야곱에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이스라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둘째, 본인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12아들들 중에서 2명의 아들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도 지금 천국에서 24장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인 유다와 요셉도 24장로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인생은 어떻게 되어서 성공적인 인생이 되었을까?

 

3. 바울이 가르쳐 준 첫 번째 결산 키워드로 볼 때 야곱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는가?

야곱의 첫 번째 결산 키워드로 볼 때, 야곱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대적과의 싸움에서 상당한 영적 진보를 이룬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출생의 한계에 부딪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결코 출생의 한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축복의 언약계승자가 되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한 끝에 언약계승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차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장자의 권리도 없었고 또한 장자의 축복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것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기도를 통해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처자식과 가축 떼들을 다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로 승리함으로 인해 결국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의 얍복강의 철야기도이다. 이때 야곱은 두 무리의 군대를 보게 되는데(창32:1~2), 이들은 야곱의 기도에 대처하려고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야곱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여 한 무리는 자기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었고(창32:24), 또 한 무리는 에서에게 보내 에서의 미움과 시기 질투심, 폭력과 살인의 마음을 제거하고 그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창33:8).

 

4. 바울이 가르쳐 준 두 번째 결산 키워드로 볼 때 야곱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는가?

바울의 두 번째 결산 키워드로 볼 때 야곱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자였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 2가지 사명은 첫째로, 본인이 언약계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자신이 낳은 열두 명의 아들들을 다 언약계승자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결국 야곱은 이뤄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이루는데 결코 공짜로 그것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기꺼이 댓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댓가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고로 지금 내가 무엇인가 축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내 조상들 중에 누군가가 씨를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누리기만 하고 씨를 뿌리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후손은 누릴 것도 없을 것이며, 자기 자신도 또한 천국에 들어가서 누릴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그는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도 기꺼이 댓가를 지불했으며, 또한 열두 명의 아들들을 얻기 위해서도 기꺼이 댓가를 지불했다. 그는 장자권을 얻기 위해 팥죽을 쑤어야 했으며, 죽을 각오를 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12아들들을 얻기 위해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거의 품꾼처럼 살았으니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아내를 4명이나 얻었고 자식들로 아들은 12명, 딸은 1명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불철주야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친 까닭 때문이다.

 

5. 바울이 가르쳐 준 세 번째 결산 키워드로 볼 때 야곱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는가?

바울이 가르쳐 준 세 번째 결산 키워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야곱은 정말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것을 끝까지 믿었으며 그것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첫째는 엄마가 가르쳐 주었고 둘째는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준 것이었다. 먼저 야곱은 그의 엄마인 리브가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했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듣게 되었다(창25:23). 그때 야곱은 그것을 마음 깊이 새겼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반드시 그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둘째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누워 잠을 자는데 그때 꿈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장차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며, 그의 자손이 많아짐으로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켜 주셔서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약속을 철저히 믿고 따랐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벧엘에서 시작되어 다시 벧엘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 바울이 제시한 결산 키워드와 하늘에 있는 천국집의 항아리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바울이 일러 준 결산 키워드를 가지고 장차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보게 될 천국집의 항아리는 사실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인생이 꼭 천국집에 비치되는 3가지의 항아리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첫째, 야곱의 '기도' 항아리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벧엘에서도 기도하였고, 얍복강에서도 기도하였던 그의 삶 전체가 기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야곱의 '땀'의 항아리는 더할 나위 없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대가 없이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살 때에도 다 자신의 피나는 노동력을 지불함으로 인하여 마침내 네 명의 아내들을 얻을 수 있었고, 처가살이 20년의 세월을 통해 아들들 12명과 딸 하나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야곱의 '눈물'의 항아리는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는 부모의 곁을 떠날 때부터 눈물로 세월을 많이 보냈기 때문이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는 길도 힘들었고, 외삼촌 라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도 힘들었고, 또한 형 에서의 손아귀에게서 벗어나는 일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27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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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한 해 결산하기(1)] 바울이 알려준 한 해를 결산하는 3가지 기준은 무엇인가?(딤후4:7~8)_2023-12-26(화)

https://youtu.be/kgRemDneBjI [또는 https://tv.naver.com/v/45421459]

 

1. 들어가며

2023년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한 해를 어떻게 달려왔는가?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과연 무엇을 성취했으며 또 아직은 이루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올 한 해 동안 이루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한 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과연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결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결산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2. 한 해를 결산하는 3가지 기준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제시했는가?

사도 바울은 그가 쓴 마지막 고별편지를 통해서 자신을 향한 인생 결산 기준을 3가지로 말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디모데후서 4:7에 나온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씀을 구분해 본다면 첫째, 나는 영적 전투를 해서 과연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했는가 그리고 둘째,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함으로 나는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에 나는 얼마나 신실함으로 충성했는가 하는 것을 자기에게 묻는 것이다. 그래서 한 항목마다 자기의 점수를 매겨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합산하고 다시 셋으로 나누면 올해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결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나의 점수는 얼마나 되는가?

 

3. 한 해 결산의 첫 번째 기준은 무엇인가?

한 해 결산의 첫 번째 기준은 나는 과연 선한 싸움을 얼마나 싸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싸운다'라는 동사는 '아고니조마이'라는 동사로서, 그 의미가 3가지다. 그것은 '경쟁하다', '싸우다', '노력하다'는 뜻이 있다. 그럼 첫째 항목부터 살펴보자. 첫째는 나는 과연 얼마나 '선한 경쟁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이 남과의 경쟁이었다면 선한 경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얼마나 더 회개했으며 충성했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와 경쟁하여 자기를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고전9:25~27).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절제할 것은 절제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고군분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의 대적 마귀와 얼마나 피나게 싸웠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의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엡6:12). 사실 우리는 귀신들과 치르는 이 영적 전쟁에 따라 영적인 신분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만큼 귀신과의 싸움은 필연적인 것이다. 셋째는 내가 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일에 얼마나 더 노력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빚으시는 아름다운 인격과 신앙을 갖추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 이미 이루었다는 자만심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푯대를 바라보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빌3:12~14).

 

4. 한 해 결산의 두 번째 기준은 무엇인가?

한 해를 결산하려 할 때 두 번째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달려갈 길을 얼마나 잘 마쳤으며 그리하여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달려갈 길'은 노정이라는 뜻으로서 경주로 대비한다면 '경주 코스'를 얼마나 제대로 달렸으며 그래서 어떤 결과를 얻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결산은 반드시 내가 걸어가야 할 사명을 결산하는 데에 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행20:24). 왜냐하면 그 사명을 위해서 자신이 이 땅에 보내어졌으며, 그 일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산은 반드시 자신의 사명에 대한 열매를 보아야 한다. 그럼,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그것은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를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무의미한 한 해를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해의 결산의 두 번째 기준은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알고 그 사명에 충성하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 중에 "나는 아빠 엄마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면 크게 성공한 것이다. 자녀가 결산의 열매가 되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5. 한 해 결산의 세 번째 기준은 무엇인가?

한 해를 결산하는 세 번째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신실했는가 혹은 충성했는가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개역성경으로 번역된 '믿음'은 다른 곳에서는 '신실함' 내지는 '충성'으로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을 무렵에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자신의 신실성에 대해 말한 것이지 믿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결산하려 할 때에 보는 세 번째 기준은 역시 신실성 혹은 충성도이다. 그렇다. 우리의 결산은 단지 영적 전쟁이나 사명 감당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실성의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신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 맡은 종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이 구해야 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때에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고 했던 것이다(계2:10).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과연 충성스러운 사람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환난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환난이 와도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충성하고 있었다면 그는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빨리 회개하고 주께 돌아가 신실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6. 한 해의 결산을 통해 성공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던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한 해 동안 영적 전투를 잘 치렀고, 사명을 잘 감당했으며, 충성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복을 주시는가? 그것은 면류관의 복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충성한 자들에게만 주시는 놀라운 하늘의 상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면류관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한 해를 살아왔는가? 혹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또 아침해가 떠올라서 또 한 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상은 '면류관' 상은 사실상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 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여러 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해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면류관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면류관 상은 사도 바울만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한 채 열심히 자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예배드릴 때에 자기의 면류관을 쓴 채 예배 장소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때 그 사람이 이 지상에 있을 때에 얼마나 살았는지가 고스란히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그 시간에 표현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혹 그것이 하나라도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란다.

 

 

2023년 12월 26일(화)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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