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교회가 위기다. 내적으로는 여러가지 부패에 휘말려 있고, 외적으로 동성애세력들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2018년의 헌법개정이다. 헌법개정안 속에 동성애 독소조항을 집어넣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일을 위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이제 깃발을 꼿으려하고 있다. 그들은 동성애조항을 헌법에 집어넣음으로서, 더이상 음행이 죄가 아니며 동성애가 정상적인 행위인 것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것을 자유와 해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성애를 장려하고 하나님없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그들을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데, 이들은 기독교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능멸하고 조롱하고 핍박하려고 이 일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이 동성애 법제화를 시도하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가?

 

1. 들어가며

  대한민국은 현재 매우 위기 상태에 빠져 있다. 하나는 동성애를 빌미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이 2018년을 디데이로 잡고 동성애 법제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기독교 내부적인 이유로서, 한국기독교인들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대사회적으로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안팍으로 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특별히 동성애세력들이 기독교를 없애기 위해 지금 똘똘 뭉쳐서 2018년 새 헌법 개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만약 이대로 있었다가는 내년에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기독교인들이 깨어나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동안은 나 홀로 믿는 신앙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핍박하려는 세력에 대해 보고만 있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한편 개인적으로부터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할 때가 왔다. 만약 세상을 향해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이기주의 집단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없는 문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동성애를 합법화세력들의 저의를 알아보고 그 대책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2. 동성애는 어떤 범죄인가?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음행 중에서 가장 극단에 속한 범죄행위다(레18:22,20:13, 롬1:27, 고전6:9~10). 그동안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동성애가 창궐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으셨다. 반드시 거기에 심판을 내리셨다. 만약 지금과 같이 동성애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다면 아마도 지구의 종말은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었고, 로마의 폼페이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를 그냥 동성애자들의 성적 취향 정도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동성애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가장 강력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성애가 세상에 퍼지면 세상은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이 불보듯 뻔하다. 왜냐하면 쾌락만이 난무하게 되고, 가정이 깨지며, 후손이 태어나지 않아 전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 가운데 동성애가 창궐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아니 된다. 저들이 가진 성적 취향이니 저들을 그냥 놔두지 왜 저들의 행동에 대해 굳이 관여해야 하느냐 하면서 관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동성애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성애를 이용하여 청년의 마음을 훔쳐가고 하나님 없는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들이 뒤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거부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므로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세력들이 동성애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하나님께 지금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3. 동성애는 지금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하지만 동성애세력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속내를 알아볼 수 없도록 포장을 한다. 인권과 평등과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사실 오늘날 인권과 평등과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타이틀을 내걸면 어느누구도 그 이슈에 태클을 걸 수 없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다.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이 3가지 단어를 통해서 표현해내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렸다가는 갑자기 사회의 기득권세력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저의를 알고 대처하지 않는다면, 동성애를 법제화하여 기독교가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 서양의 기독교 국가의 전철을 우리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일예배 시간(https://dongtanms.kr/xe/board_OgUo88/30665)에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동성애가 법제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4. 지금 대한민국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나라가 동성애독재국가가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동성애독재국가가 되면 기독교의 모든 활동은 중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제외하고는 모든 행위는 그날 불법이 될 것이다. 길거리에서 전도할 수 없으며, 설교방송을 송출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학교이지만 더이상 채플을 드릴 수 없고 성경공부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복음을 전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동성애독재국가는 아니지만 동성애자유국가 내지는 동성애 합법국가임에는 틀림없다. 동성애를 즐긴다고해서 벌금을 물리는 것도 아니며 감옥에 쳐넣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자는 사실 귀족대우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로 인하여 대부분 발생하는 에이즈의 검사비와 약값 그리고 병원비 등을 국가에서 100%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동성애복지는 한국이 세계최고의 수준인 것 같다.

 

5. 동성애 진영에서는 왜 한사코 동성애를 법제화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동성애진영에서는 동성애를 법제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의 대표적인 이유는 동성애를 죄라고 선언하고 가르치는 기독교와 교회가 싫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동성애는 정상적인 성행위가 되며, 그것을 제지할 방법이 없어지게 되는데, 유독 기독교에서 그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성애진영에서는 사실 2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더이상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마음껏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법제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이 법제화가 되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법제화를 시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전멸당하기 전에 동성애가 법제화되는 것을 우리는 어찌하든지 막아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가 법제화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인데도, 동성애자는 이미 귀족회되어있고 특권화가 되어있다. 그런데 만약 동성애가 법제화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그것을 토대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조롱할 것이 뻔하다. 더이상 기독교를 전파하지 못하게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성애 법제화의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박멸에 있는 것이다.

  이미 전 세계 중에서 서양의 기독교국가들과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이 동성애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법제화하였다. 그러므로 더이상 서양의 기독교국가나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에서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유일한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 국가가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기독교국가가 아니지만 선교사들이 구한말에 이 나라에 들어와서 기독교국가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그리고 제헌국회를 열었다. 기독교정신으로 헌법이 제정되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세상 어디에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시골에 모든 마을에까지 교회가 있는 나라가 있는가? 없다. 오직 대한민국 뿐이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사람들이 못 들어갈 나라는 북한 이외는 없다. 모든 나라에 한국사람들은 들어갈 수 있다. 원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나라들 가운데 가장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나라는 이제 대한민국밖에 없다. 미국은 이슬람국가에 선교사로 들어갈 수 없다.

 

6. 그들이 동성애를 법제화시키려고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 동성애바람이 불고 있다. 동성애를 내년에 바꾸려고 하는 개정헌법에 아예 하나의 조항으로 집어넣으려 하고 있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서양의 기독국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동성애가 헌법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여기 잠깐 알아야 할 것은 세상 어떤 동성애허용국가에서도 헌법에 동성애조항을 넣은 국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놀라울 따름이다. 국가를 먹어버리겠다는 속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헌법에 동성애 조항을 넣으려는 시도에 맞춰 거기에 부응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2001년 국가인권위윈회가 출발할 때부터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동성애를 확산하는 숙주역할을 해온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동성애세력들이 장악해버린 것이 벌써 2가지나 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학교를 장악했고, 또 하나는 언론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2년에는 국어사전에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을 삭제하게금 조치했으며, 2003년에는 청소년 유해매체물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 동성애옹호정책을 쭉쭉 펼쳐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첫번째로, 2006년부터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묵인하였으며, 아울러 지방자치단체로 하여금 동성애를 옹호하는 인권조례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도록 권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2011년에는 국가인권위위회가 한국기자협회와 인권보도준칙을 제정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동성간의 성행위와 에이즈의 폐해를 지적하는 기사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키셨다.

  그래서 2010년 경기도의회는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만든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키고 말았는데, 그러한 학생인권조례에 의하면, 학생들이 술과 담배를 하고 문신을 하는 것도 자유이며, 미션스쿨임에도 종교교육이나 예배를 참여시킬 수 없으며, 학생의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시위도 참여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또한 성적취향에 대해 처벌받지 않을 자유가 있어 학생시절에 성관계를 하고 동성애를 한다해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정말 학생들을 위한 선언인가 아니면 학생을 막가지도록 방치하겠다는 뜻인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2007년부터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을 입안하고 2010년에도 차별금지법을 입하려고 시도했으나 그것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 2013년에는 국회의원 66명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여 상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무산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동성애 확산의 주범은 따로 있다. 그것은 서울시에서 2015년부터 서울시청의 공식행사로서 서울 한복판에서 동성애축제(퀴어축제)를 허락해준 것이다. 이로 인하여 동성애 퍼레이드가 대낮에 서울 도심에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요 축제인 것처럼 포장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올해 2017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행사를 정식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7. 2018년 드디어 동성애 조항을 헌법에 넣으려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세력이 2018년 개정헌법에 동성애조항을 넣으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헌법 제36조 조항을 변경하려고 하고 있다. 현재 이 조항의 1항은 이렇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그런데 동성애진영에서는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아는가? 이때부터는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구분이 무려 50개가 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 결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함으로 이해되는 결혼이 무의미하게 되고 성적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동성간의 성행위가 평등하게 되고 합법화된다. 더욱이 이것은 이성과 동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물과 아동과의 성해우이로 정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큰 일이다.

  한번 동성애가 법제화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았는가? 그 뒤부터는 모든 법률이 바뀌고 조례들이 바뀌게 될 것이다.그려면 가정법, 민법, 형법이 다 바뀌고, 군의 형법도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가정은 그 기능을 상실할 것이며, 군대에서도 동성애가 자유롭게 허용되어 남자에이즈환자의 90%가 남성동성애로 발생하는데, 군대가 갑자기 에이즈전염의 주범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성애가 법제화되도록 볼고 있을 수만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부수고 하나님을 거역하여 인간의 주인되며 쾌락을 주인삼으려는 시도를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동성애가 법제화되면 가장 먼저 가정이 해체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후손이 태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나라살림은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여 천국가게 만들어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의 선교활동이 중단될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를 죄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벌금을 물게 될 것이고 감옥에 갇힌다거가 나중에는 이 나라에서 영원히 추방되거나 사형언도를 받게 될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우선 두가지다. 첫째, 국회의원들이 동성애독소조항을 개정할 헌법에 넣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개인과 단체가 해야 할 행동을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둘째, 혹시 동성애독소조항이 들어가면, 내년 국민투표시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이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언론에서는 2011년 이후로 동성애를 나쁘게 표현할 수 없도록 통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주님 오실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그때에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 인간의 더럽고 부패한 행위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음대로 살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지들 억울함은 그날 풀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던 그분이 그날 우리의 심판자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믿고 천국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2018년은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어찌하든지 우리 믿는 이들은 동성애가 법제화되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 그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그것을 막아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나라의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건투를 빈다.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사실 매우 닮은 교회다. 교회 안에 거짓된 이단교리를 받아들인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우상숭배를 해도 죄가 되지 아니하며, 음행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아니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사도와 거짓 선지자들을 두 교회는 용납했다. 그 결과 주님은 그들의 심판주로 나타났다. 좌우에 날선 칼을 가지시고, 불꽃같은 눈을 가진 이이자 빛난 주석같은 발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교회는 주의 종과 성도들간에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대체 이 두 교회는 어떻게 달랐고 무엇이 같았는가? 그리고 두아디라교회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적어도 60년 이상이 지난 어느날,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요한이 영 안에서 4번의 환상을 보게 된다. 사도요한은 그때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었고 일곱금촛대 사이에 거니시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시면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신다. 그 편지들 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던 일곱교회들 가운데 네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각 교회들마다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르게 말씀하셨고, 각 교회들의 상황에 맞춰 말씀도 다르게 주셨다. 그렇더라도 예수께서 각 교회에게 주신 말씀은 그 교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의 편지의 말미에 가서 "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지금 성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단호하게 들을지어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 교회를 위해 쓰여진 편지는 그 교회의 상황에 따른 주님의 판단과 처방전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도 주신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앞에 있는 3시간을 통해서 3개의 교회의 형편과 그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배웠다. 주님께서 첫번째로 말씀하신 교회는 에베소교회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만 주의 종들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다. 그리고 두번째 교회는 서머나교회인데, 이 교회는 유대인들과 로마정부에 의해 온갖 핍박으로 고난을 받는 교회였다. 그리고 세번째 교회는 버가모교회로서, 핍박의 때에 순교자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일부 교인들이 발람의 가르침 내지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수용함으로서 거짓 진리와 타협했던 교회였다.

  이제는 네번째 교회로서 두아디라교회를 살펴볼 차례다. 두아디라교회는 사실 버가모교회와 비슷하다. 둘 다 잘못된 비진리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가모교회는 주의 종들만큼은 타락하지 않았다. 버가모교회의 주의 종들은 참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타락해버렸다. 둘 다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함으로 교회 자체의 타락을 가져왔는데, 버가모교회가 평신도들이 거짓된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거짓된 진리를 포용하는 정책을 폈던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어쩌면 거짓된 진리를 전혀 수용하지 않은 에베소교회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아디라교회를 통해 주의 종이 거짓된 가르침을 수용했을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주의 종들을 심판하시는지 그리고 타락한 주의 종이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과연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3. 두아디라 도시의 특성과 두아디라교회가 당면했던 심각한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나?

  두아디라,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가 살던 도시로 알려진 그곳, 그곳은 무역의 도시였다. 그 지역은 털실과 아마포 그리고 외투 제조업과 더불어 그것을 염색하는 공장이 많이 상주해있던 도시였다. 그러므로 다른 도시로 염색한 옷들을 판매하기 위해서 이 도시 사람들은 '길드'라는 상업조직으로 움직였다. 그러므로 상업과 무역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길드의 조합원이 되어야 했다. 특히 두아디라 조합원들은 태양신인 티림노스(아볼로)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했다. 그들은 이 외에도 다른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조직의 조합원이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연히 조합원의 회합에 나가야 하는데, 그때에 우상 앞에 경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같이 먹어야 했으며, 2차순서로서 음탕한 행위를 저질러야 했기 때문이다. 길드조합원들에게 있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행하는 것은 친목도모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행15장의 예루살렘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우상의 제물과 음행"을 멀리해야 했다(행15:20,29).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두아디라성도들은 비록 할례와 안식일은 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했다.

 

4. 두아디라교회가 처했던 심각한 상황은 무엇이었나?

  그런데 두아디라교회는 교회지도자마저도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세벨은 사실 두아디라교회의 선지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자칭 자신을 선지자라고 했던 이세벨은 그 교회에 들어와서 다른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고 음행의 회합에 나가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세벨선지자도 버가모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교훈과같은  비슷한 가르침을 폈던 것 같다. 하지만 맨 처음에 등장했던 에베소교회는 두아디라교회와는 정반대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니골라당이란 대체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 그들은 영지주의의 한 분파로서, 하나님에 관한 영적인 지식을 터득한 자는 그 어떤 육적인 행위를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혹시 우상을 숭배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으며, 천국에 들어갈 부분은 자신의 영혼이므로 육체가 음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으며 그것 또한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그것과 유사한 가르침을 가지고 두아디라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5. 우상숭배는 어떤 결과들을 초래하는 것일까?

  초대교회와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두아디라교회의 주의 종들은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상업조직에서 탈퇴하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그렇게 선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 줄 한 사람의 전령을 만난 것이다. 이세벨이라는 여선지자가 나타난 것이다. 믿는 자는 비록 길드조직에 참여하여 우상을 숭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아니하며, 길드조합원들과 음행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가르쳤다. 결국 두아디라교회의 주의 종들마저도 그만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성도들 중에는 초대교회의 순수한 가르침 곧 참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성도들이 있었다. 주님은 그들을 격려하시면서 자기들이 붙들고 있던 진리를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붙들고 있으라고 격려하셨다. 그래서 결국 이기는 자에게는 철장권세와 새벽별의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거짓된 진리를 선포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께서 그들을 정확히 가려낼 것이며,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고서 그들을 짓눌려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전지하신 분이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금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때도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세벨 본인에게는 질병의 징계로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주의 종들에게는 커다란 환난이 닥쳐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세벨의 자녀들(육적인 자식이나 영적인 후손들)에게는 철저히 사망의 재앙으로 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을 만나면 그때라도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듯 싶다.

 

6. 한국교회의 우상숭배의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문제를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과 비교해보면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두아디라교회와 같은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교회는 이미 우상숭배행위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주의 종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자행하고 있는 우상숭배행위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에게 제사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기독교식으로 포장한 것이 바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이다. 사실 추도예배는 불신자들의 조상제사를 기독교화시킨 것이다. 안의 내용물은 그대로 두고 형식의 틀만 바꾼 우상숭배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고전10:20을 보라.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조상제사를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귀신들에게 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적인 사실을 전혀 모르던 우리민족은 조선 500년동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조상제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예수믿는 자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조상제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결국 우리민족의 조상제사장려와 기독교의 우상숭배금지명령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7. 한국교회의 추도예배와 장례예배,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던 차에, 1897년 정동감리교회 이무영이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맞이하여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추도예배를 창안하였다. 그 이유는 부모도 몰라보는 불효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그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핍박을 면해보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추도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결국 1934년에는 감리교에서 추도예식을 아예 예배모범집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구세군과 성결교가 이 의식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장로교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또한 이 의식을 수용하였고, 이제는 모든 교단이 다 예식서에 추도예식과 장례예식을 넣어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귀신을 섬기는 추도식과 장례식이 그만 예배의 형식을 띠고 공식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으로 큰 일이다.

  성경을 보라. 과연 죽은 자를 놓고 예배드렸다는 장면이 나오는가? 시체는 부정한 것이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한 자가 되어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사망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며, 시체는 사탄이 즉시 접수하여 자신의 것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시체를 놓고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그런 전례가 성경에 없고, 예수님께서도 한 번도 그것을 허락하신 경우가 없다. 초대교회도 그랬다. 그러므로 육체가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즉시 시체에서 빠져 나간다. 이때 믿고 회개한 자는 생명의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지만, 믿지 않고 회개치 못한 자는 사망의 부활의 몸을 입고 지옥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시체는 그 사람의 껍데기일 뿐 거기에 그 안에 영혼이 들어있지 않다. 한편 아담이 타락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사탄과 귀신들은 지금도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을 안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는 즉시 귀신이 속에 들랄날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시체 앞에 절을 하거나 향을 피우거나, 국화꽃을 바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곧 변형된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절대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려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우상숭배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지가 약 100년이 조금 넘었다. 그래도 3~4대가 예수믿는 집안은 많지 않다. 대부분 1대 내지는 2대가 예수믿는 집안이다. 하지만 2~3대가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 되었는데도 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저주와 징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왜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환난과 사건사고에 불신자들처럼 동일하게 휘말리고 있을까?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같은 우상숭배행위를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개신교단에서는 우상의 제물(음식)을 만들 때, 십자가를 긋고 만들면 해가 없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우상에게 절만 하지 않으면, 우상의 제물을 만들거나 그것을 먹어도 상관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아니다. 다 똑같은 우상숭배행위다(시106:28~29).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불의의 사건사고에서 확실히 벗어나려면 우선적으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같은 우상숭배행위를 그쳐야 한다. 예식서에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화장예배)를 빼내서 버려야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15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결과를 낳는 것과 같다. 그렇다. 출애굽기20:5을 보라. 거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식 3~4대까지 우상숭배죄의 댓가를 묻겠다고 말씀하셨다. 우상숭배는 나 때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죄없는 자손 3~4때까지 해악을 입게 한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라도 혹시 우상숭배행위를 용납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있다면 즉시 그것을 그쳐야 한다. 만약 우상숭배행위를 그치지 않는다면, 믿는 자라도 계속해서 불치병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커다란 환난 가운데 던져질 것이다. 그리 자식들은 갑자기 비명횡사할 것이 뻔하다. 미국의 릭워렌 목사를 보라. 이슬람의 신 알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다가 그의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해서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상숭배행위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는 죽어서 불못 곧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계21:8).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처럼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절대 용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과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죽어서는 지옥의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서머나교회, 부활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는 7가지 유형의 교회들을 언급하셨다. 그중에 두번째로 언급하신 교회가 바로 서머나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을 향한 주님의 책망이 없다. 오직 격려와 칭찬만 있다. 세상 천지에 격려와 칭찬만 들을 수 있는 교회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아무리 뛰어난 성도라 할지라도 한 가지쯤은 책망받을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그 어떤 책망도 듣지 않았다. 대체 이 교회는 어떤 교회였길래,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과분한 평가를 받았을까?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있을 텐데, 그때 칭찬듣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서머나교회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은 그것을 알아보자.

 

1. 예수님은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를 언급하셨을까?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어떤 유형의 교회로 분류할 수 있을까? 예수님에 의하면, 교회 총 7가지 유형의 교회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소아시아에 현존하고 있던 교회들의 모습이다. 그 교회들은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당시에 현존하고 있던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초기교회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있게 될 역사적인 교회의 유형과도 흡사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첫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에베소교회는 거짓 이단적교회를 분별하다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서, 기독교초기교회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예수부활이후~ A.D.96년경). 그리고 두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서머나교회는 로마의 도미시안황제의 황제숭배강요 때부터 기독교신앙이 로마의 공식종교로서 인정되기 전까지의 교회로서(A.D.96년경~313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세력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아 순교하는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버가모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세상과 타협하는 로마공인시대의 교회를 가리키고(A.D.313~590년), 두아디라교회는 영적인 지도가가 타락의 극치를 달리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A.Ds.590~1517년). 그리고 사데교회는 1517년 종교개혁이후의 1,700년까지 시대의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지녔지만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면서 갖은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교회는 말세지말의 교회상으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성하지만 영적으로 거의 죽어있어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러한 일곱교회의 기록 순서가 소아시아의 지역위치상으로 볼 때 시계가 돌아가는 방향과 똑같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러한 배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역시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기록 순서 또한 기독교회의 역사적인 변천순서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아시아에 있었던 두번째 교회 곧 로마의 도미시안황제 의한 황제숭배강요이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기독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서머나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서머나"라는 도시와 서머나교회의 상황을 알아보자.

  먼저, 서머나도시와 서머나교회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머나라는 이름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이라는 뜻이다. 특히 서머나라는 도시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서, 헬라의 유명한 시인 호머의 출생지라는 설이 있는 바로 그 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 역시 다른 도시처럼 황제숭배를 강요받던 도시였다. 만약 이것을 거절했을 경우에는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유대인들의 시기질투심이 한몫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A.D.70년을 기점으로 유대인들이 대거 서머나교회로 이주하였고, 서머나에서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당시 서머나도시의 절반이 유대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은 가만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단의 앞잡이인 로마정부를 꼬드겨 로마황제를 자신의 주님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들을 같이 철저히 죽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언급하신 경고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머나교회는 이처럼 불굴의 믿음, 모진 고난과 박해속에서도 지키는 자신의 믿음, 그리스도로부터 칭찬만 듣는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직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는 일곱교회 중에서 오직 서머나교회 뿐이다.

 

3.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그 교회의 상황과 칭찬 그리고 축복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으며, 서머나교회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서머나교회는 오직 칭찬만 받은 교회였는데, 그들은 어떤 칭찬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약속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계2:8~11)을 직접 헬라어에서 직역하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가. 서머나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8절. 그리고 서머나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에게 [단호하게] 쓰라(기록하라, 편지하라). 이것들을 처음이요 그리고 마자막인 분이 말한다. 이분은 [과거에] 죽었다 그리고 [과거에] 살아나셨다.

  그렇다. 서머나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계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첫째,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시다. 이는 예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던 하나님 자신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준다(사41:4,44:6,48:12).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48: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그리고 둘째, 그분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인가? 또한 그분은 일으키심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살아나신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을 보면, 공관복음서와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분은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으신 분이다(마16:21,17:23). 즉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입장에서 보면, 그분은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은 것이다(고전15:3~4,13~14,17,20, 행2:23~24,32). 하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인류구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신 것이며, 스스로 생명을 취하여 부활하신 것이다(계2:8).

  한편, 우리말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살아나셨다”고 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은 이 문장들은 전부 수동태문장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은”이라는 뜻이다(동사 에게이로의 직설법, 완료, 수동태, 3인칭, 단수). 하지만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복귀하신 후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을 취하여 부활하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죽임을 당할 것과) 제삼일에 살아나야(일으키심을 받을)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일으키심을 받을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고전15:3-4 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일으시킴을 받으사)

고전15:13-14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일으시키심을 받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일으키심을 받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일으키심을 받은)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일으키심을 받으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일으키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일으키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당신이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두려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주신 말씀이다. 비록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당하여 어떤 경우에는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고난과 죽음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죽임당해 순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첫 번째의 사망에 해당할 뿐이지, 둘째 사망의 해는 결코 받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고 싶으신 것이다.

1:18-19 [현재]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나를 위하여] 죽었었노라(,,,중디)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는 채로] 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나. 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해 무엇이라고 칭찬하셨는가?

9절.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알아온 채 있다. 그러나 [너는] [현재] 부요하니라. 그리고 자기자신을 유대인들이라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있는] 훼방(신성모독)[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회[].

  사실 서머나교회는 오직 칭찬만 들은 교회들 2개 교회 가운데 한 교회다. 그렇지만 그들을 겉으로만 본다면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으로는 극한 환난을 당하고 있었고, 신앙을 유지하려다보니 물질적인 궁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부자라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꾸중만 들었던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떠한 교회였는가? 그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한 교회였으나 영적으로 매우 가난한 교회라고 꾸지람만 들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다면,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 장본인은 누구였는가? 놀랍게도 그 핵심세력이 유대인들이었고, 로마정부가 유대인들과 함께 그 일을 하였던 것이다. A.D.70년의 일이다. 예루살렘 도시가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함락당하기 전에, 많은 유대인들이 서머나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나중에는 로마정부와 협잡을 통해서 서머나교회를 악랄하게 핍박했다. 실제로 서머나의 초대감독이었던 폴리갑이 빌라델비아 성도 11명과 함께 A.D.155년에 죽임당할 때에 그 핵심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처형날짜는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선느 그들이 비록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사탄의 모임이라고 격노하셨다.

 

다.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과 축복에 대한 약속은 무엇이었는가?

10절. [너는] [계속해서] 장차 [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있어라. 볼지어다. 장차 마귀가 너희들로부터 감옥 안으로 던지려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미래에] 십일의 환난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계속해서] [너희 자신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고 있어라. 그러면 [내가] [미래에]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승리관)을 줄 것이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에 대해 박해가 또 다가올 것임을 미리 알려주셨다. 성도들이 어떤 고난을 통과한다고 해서 그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사탄의 회인 유대인들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결탁하여 장래에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몇 사람은 죽게 할 것이라고 예고해주셨다. 하지만 더불어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몇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도의 생사여탈권은 참소하는 자 곧 사탄에게 있지 않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에 있다. 그러므로 사탄을 쥐고 계신 예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특별히 여기서 십일동안이라는 말씀에서 "열"이라는 숫자는 열 뿔(12:3, 13:1, 17:3,7,12,16)에서도 알려주듯, ‘충만이나 완전수이기는 하나 제한된 숫자임을 가르쳐준다. 이는 믿는 자들이 완전한 고통이 수반되는 고난을 받기는 하겠지만, 동시에 그 시간이 제한된 시간만 해당하며 몇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셈족의 독특한 표현에서도 나온다. 그것은 창24:55의 말씀이. 그것은 아주 짧은 제한된 기간을 가리킨다.

24: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렇다면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도들은 과연 언제까지 믿음이 지조를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죽을 때까지다. 순교하기까지 성도는 자신이 가진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순교의 현장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귀가 자신의 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성도들은 순교적인 죽음을 항상 각오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육신을 벗는 그날에, 생명의 면류관(승리관)을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면류관은 왕관(디아데마)이나 제관이 아니다. 그것은 올림픽의 최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승리관이다. 그렇다. 천국에 가면 제일 큰 상급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것은 주님과 신앙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는 자이다. 그리고 복음전하는 자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고난받고 순교하는 것에 대해 결코 슬퍼하지 말고 감사하고 기뻐하라.

  이어서 11절에성도 이기는 자들에게 대한 축복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11절. [현재] 귀를 가지고 있는 이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현재]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단호하게] 들어라. [현재] 이기고 있는 자는 두 번째의 죽음으로부터 결코 [단번에] 해를 받지는(부당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또다른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두 번째 죽음의 해를 결코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사망이란 하나님과 영영 분리되는 죽음을 가리키는데, 고난을 이겨낸 자들에게는 이것을 결코 맛보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기는 자가 결단코 불못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4. 나오며

  에베소교회가 바른 진리를 수호하고 그것을 분별하려다가 주의 종들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한다면, 서머나교회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과 궁핍함 속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켜낸 교회라고 할 것이다. 핍박과 고난을 이겨낸 서머나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와 함께 오직 칭찬만 들은 교회가 되었다. 그렇다.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과 궁핍함 앞에서 떨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미래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의 삶속에서 비굴한 사람이 되지 말라.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죽음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고, 그곳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고난이 온다고 해도 염려하지 말라. 제한된 시가만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당하라. 그리고 떨지 말라.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고 그분만을 따라가자. 건투를 빈다.

기도란 무엇이며, 어떤 기도가 과연 응답을 가져오는 기도일까? 우리는 기도와 부탁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른 채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해봤자 별로 소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는 기도를 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말씀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릴 수 있다.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다.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체험하지도 못한 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기도체험없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고 갈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주님이 말씀해주신, 응답받는 기도방법의 정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기도에도 원칙과 정석이 있다.

  기도에도 원칙이 있으며 정석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기도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에서 과연 원칙과 정석을 잘 따르고 있을까? 눅11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 곧 기도할 내용에 관하여 먼저 말씀해주셨다(눅11:1~4).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 즉 기도의 방법에 관하여서 말씀해주셨다(눅11:5~13).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가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이며,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가 바로 강청하는 벗의 비유의 핵심이다(눅11:5~8).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내용도 알고 있어야 하겟지만, 더불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방법대로 기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받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기도의 방법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곧 기도의 방법의 정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곧 마7:7 말씀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대부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하지만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사실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말씀은 주제별로 묶은 묶음집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은 시간차별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복음서가 아니라, 중요한 주제들을 한 묶음씩 묶어놓은 복음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들려주신 주옥같은 산상수훈의 말씀은 배경없이 그냥 등장한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은 다르다. 누가복음은 묶음집 복음서가 아니기 때문에 마7:7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마7:7의 말씀은 사실 강청하는 벗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방법에 관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3. 강청하는 벗의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기도의 방법에 관해 알려주셨던 강청하는 벗의 비유의 말씀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여행하는 C라는 친구가 어느날 예고없이 밤늦게 A라는 친구집에 찾아왔다. 그런데 A라는 친구는 C를 먹여줄 음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A라는 친구는 이웃의 B라는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B는 이미 문은 닫힌 상태에 있고 아이들도 함께 침소에 누워있으니, 어떻게 일어나서 음식을 주겠느냐며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하지만 A라는 친구의 요청은 끈질기다. 계속해서 친구를 불러가며 문을 두드리면서 떡덩이를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B는 그가 자신의 벗됨을 인하여서는 주지 않겠지만 그의 간청함으로 인하여 그에게 떡덩이를 빌려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7:7의 말씀 곧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 배경을 알면,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단순히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웃집 친구 C에게 떡을 빌리는 A라는 친구의 강청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A라는 친구가 C라는 친구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B라는 친구에게 부탁을 한 것이 중요한 요지다. 그런데 A라는 친구는 한 번만 슬쩍 말을 던져보고 그냥 되돌아갈 친구가 아니었다. C라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어찌하든지 B로부터 떡덩어리를 가져갈 속셈으로 그곳에 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쉬지 않고 B를 불러대면서 계속해서 문을 노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왜 B라는 친구는 그 늦은 밤중에 일어나서 A라는 친구에게 떡덩이를 빌려주어야 했는가? 친구사이여서 그랬는가? 아니다. 그럼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귀찮아서다. 안 주면 계속해서 큰 소리를 자기를 불러가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릴 것이니, 차라리 빨리 주고 돌려보내버리기 위해 떡덩이를 빌려준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한글개역개정판에서는 "간청함을 인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이상의 뜻을 지닌 단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몰염치로 인하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끈질기게 졸라대며 강청하되, 염치 불구하고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빵을 빌려줄 때까지 염치도 잊은 채 뻔뻔스러울 만치 계속해서 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4. 기도란 무엇이며, 부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하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어떤 기도가 결국에 응답을 받는가를 배울 수 있다.

  먼저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이 비유에서 기도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 내게는 없기에 그것을 내줄 수 있는 대상을 찾아가서 그에게 요청하되 그것을 얻어오는 것까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 기도가 과연 진짜 기도인지 아니면 부탁으로 하는 것인지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부탁은 해달라고 요청하는 단계에서 끝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들어주면 좋고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바로 부탁인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다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결국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도가 그동안 부탁으로 끝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기도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탁만 하는 기도였다면, 이제부터는 정말 얻는 기도로 바꾸어가기를 간곡히 바란다.

 

5. 기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정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과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정석의 기도인가? 그것은 강청하는 기도다. 기도에도 정석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보자. 부르짖는 기도가 정석인가 아니면 조용히 묵상으로 하는 기도가 정석인가? 그것은 전자다. 왜냐하면 부르짖을 때에 그 사람의 간절함이 전달되며, 부르짖지 아니하면 생각을 귀신이 사로잡아 잠념에 빠지게 하고 졸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조건 통성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강청하는 기도가 정석인가 아니면 고상하게 드리는 기도가 정석인가? 그렇다. 강청하는 기도가 정석이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그렇다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왜 B라는 친구가 A라는 친구에게 떡덩이를 빌려주고야 말았는가? 그것은 A가 하도 강청해서다. 계속해서 끈질기게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안 주면 줄 때까지 그렇게 요청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라는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계속해서] 괴롭하게 하지 말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A라는 친구가 끝질기게 요청하여 B라는 친구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란 끈질기게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을 얻어낼 때까지 말이다. 그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도에 관한 말씀의 요약으로 주셨던 마7:7의 말씀(=눅11:9)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도 전부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들이다. 여기서 잠깐, 헬라어에만 있는 과거 명령법과 현재명령법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헬라어구문에서 과거 명령법은 한 번 단호하게 결단성있게 행동할 것을 명령할 때에 사용하는 명령법이다. 하지만 현재 명령법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줄기차게 행동해야 할 것을 명령할 때에 사용하는 명령법이다. 그런데 마7:7의 말씀(=눅11:9)은 전부다 현재명령법 구문들이다. 다시 말해, 기도에 관한 명령은 한 번만 구하고, 한 번만 찾고, 한 번만 두드리라는 명령이 아닌 것이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고로 우리는 강청하는 벗의 비유를 통해서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번만 기도하고 끝낼 것이 아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는 끈질기게 계속해서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인 것이다.

 

6.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기도는 어떠한가?

  당신은 과연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몇 번 기도해보다가 어떤 응답이 없으면 "이건 주님의 뜻이 아닌가 보네'하고 끝내버리는 기도가 아닌가?내가 죄를 너무 많이 지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기도를 쉬고 있지는 아니한가? 아니면 내가 너무 내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이기적인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안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예 기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이것 저것 따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려하다는, 기도 하나 드리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할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기꺼이 기도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번 기도했으면 끈질기게 응답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줄기차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7. 나오며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비유를 딱 3번만 말씀하셨다. 그런데 첫번째 비유(눅11:5~8)와 두번째 비유(눅18:1~8)가 다 강청하라는 기도의 방법에 관한 비유였다. 이중 두번째 비유는 눅18:1~8에 나오는데, 불의한 재판관에게 송사를 요청하는 어느 과부에 관한 비유다. 이 비유에서도 과부는 강청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못된 재판관이었다. 하지만 하도 그 여인이 자신을 괴롭게 하므로 재판해주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의 원칙은 바로 강청기도인 것이다. 고상하게 주님의 뜻을 다 헤아려보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 많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한 사람들이 생각해볼 기도이지 이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이 생각해볼 기도가 아니다. 내 필요를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지금 당장 강청하는 기도를 시작해보라. 주님은 오늘도 강청하며 끈질기게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찾고 계시며, 그러한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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