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정이철목사는 왜 진실을 왜곡시키고 거짓으로 부풀려, 진리를 외치는 목회자와 교회를 파괴하려 하는가?"

 

 

  얼마 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우리교회와 저에 관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어떤 목회자가 저에 대해서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며”, “행위구원론을 전파하는 자”라고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 것을 보았다. 과연 이분이 예수님과 진리만을 외치는 목회자라는 말인가? 요즘 진리를 외치는 교회가 줄어들어 좁은 길을 가려는 목회자가 많지 않는 시국에, 어렵게 진리를 외치는 목회자를 이렇게 난도질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바른 믿음을 외치겠다고 하시는 분이 어떻게 사실(팩트)를 말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시켜 말하며, 진리만을 외치는 목회자를 이단사상전파자라고 매도한다는 말인가?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그러한 근거를 대고, 또한 성경 어떤 말씀을 부정하는지를 말해야 옳지 아니한가? 나와 우리교회는 성경 66권을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렇지만 어떤 권위있는 자가 말했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분별하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온전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를 따라가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교리가 성경을 요약해주고 쉽게 성경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하더라 교리는 사람의 작품인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리나 신학사상 중에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도 있고 과장되거나 축소시킨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는 그 교리가 만들어질 때의 한계상황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구약의 원전성경 그것도 대문자사본이 발견되어 그것을 그대로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어찌 과거의 교리를 가지고서 누구의 자신의 교리에 맞지 않으니 틀렸다고고 말할 수 있으며, 어찌 교리를 가지고 이단시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66권의 성경을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러면 성경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뭐래도 목회자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말해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누군가가 어떤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다른 잣대가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경 어디 말씀, 당신이 하는 주장은 이러이러하게 틀렸습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교리에 보니, 당신은 이 교리를 따르지 않고 있으니 당신은 이단사상 전파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 사람은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목회자는 오직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목회자가 어떤 신학자(사람)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하겠는가? 목회자는 모름지기 진리의 말씀만을 외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며, 성경말씀만을 따라가야 한다. 다른 것들은 그저 참고하면서 가면 된다. 교리나 신학사상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의 산물이자 그 시대의 신학작품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미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근거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하는가? 그러므로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한다면 성경말씀 어디에 따라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니 시정하라고 말해야 참된 목회자가 아니겠는가? 비열하게 왜 거짓말을 섞어서 말하는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이 시대를 향해 진리를 외치는 목회자를 보면 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한 목회자와 한 교회를 이렇게 이단취급하는 말을 서슴없이 뱉어내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왜 파괴하려 하는가? 그것은 사탄이 하는 일과 같다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들을 과연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당신도 이것을 따르시오"라고 말한다면 나는 즉시 순종할 태세가 되어있다. 또한 즉시 시정할 각오도 되어 있다. 사과할 각오도 되어있다. 그렇지만 성경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왜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당장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몰라서 그랬다면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설교를 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영상으로 올리는 이가 어찌 성경이 아닌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피눈물나게 하는가? 그도 구원받아야 할 한 형제자매가 아닌가? 그렇면 최소한 예의를 지키고 만에 하나 잘못되었더라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지, 무턱대고 정죄하고 이단취급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제는 팩트를 전하고 싶다. 누구든지 정이철목사라는 분이 어떻게 거짓을 보태어서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가 쓴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목회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믿음 하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믿음과 더불어 회개와 성화가 구원을 얻게 한다는 주장이 점점 대범해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장로교 목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장 통합의 동탄명성교회의 정병진 목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정병진 목사는 언제나 대범하게 행위구원론을 전파한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종교개혁자 칼빈이 교회를 망친 주범이라고 담대하게 설교한다. 이 교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정병진 목사의 구원은 상실되지 아니한다는 주장은 과연 성경적인가?”(3:16-21)라는 설교 영상을 직접 들으며 녹취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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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 특히 구원론에 대해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병진 목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무는 이단사상 전파자임을 알 수 있다. 다른 교단도 아니고 예장 통합의 목회자가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은 앞으로 도래할 한국 교회의 배교와 타락의 실상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만들어 준다. 참으로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심각한 사실을 동탄명성교회 홈페이지에서 보았다. 이 교회에 홈페이지에도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박영돈 박사의 칭의론 글과 영상이 이용되고 있었다. 얼른 세어보니 대략 8개나 게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면서 행위구원론을 전파하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 목사 교회의 홈피에 박영돈 교수의 글과 영상이 대략 8개나 게시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일까? 정병진 목사와 이 교회 신자들이 아무 관련이 없는 박영돈 교수의 글을 악용하는 것인가?

[출처]정병진 목사(동탄명성교회)와 고신 박영돈 교수의 칭의론|작성자코람데오

 

  정이철 목사는 첫째, 저를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목회자라고 했다. 어찌 목회자의 입에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에 어떤 참된 목회자가 이신칭의를 부정하겠는가? 또 어디에 이신칭의를 부정한다고 말했는가?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아니 받고, 다른 무엇으로 이신칭의를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희생에 대한 댓가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인가? 우리가 받는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른다는 말인가? 저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그대로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떠서, 정이철목사는 저와 우리교회가 이신칭의를 부정한다고 말하면서 저와 우리교회가 예수님의 부정하고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자처럼 왜 그렇게 비열하게 매도하려 하는가? 주님이 보시고 있지 아니한가? 저와 우리교회는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100% 믿는다. 그런데 어찌 이신칭의를 부정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을 모함하려 하는가? 저와 우리교회는 결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것,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믿는다. 나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기자의 일도 수년동안 해 온 사람이다. 기자는 거짓을 말하면 아니 된다. 그것이 철칙이다. 그런데 어찌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말한다는 말인가?

  나는 다만 성경에서는 이신칭의를 통해서 혹 의롭다함을 얻은 자라도 구원을 얻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경고하고 있음을 말했을 뿐이다(딤전4:12~2,1:19, 히6:4~8, 3:12,18~4:1, 10:26~31,계3:5, 14:12, 5:24). 주님더러 주여 주여 말하고 심지어 예언사역을 감당했던 자라도 그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자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마7:21~23). 이러한 근거들은 사실 성경에 수두룩하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지적동의와 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또한 칭의가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이 아니라고 하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8:24,2:12). 그것은 구원의 시작단계라고 말한 것이다(2:16).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딛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여정은 처음에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서 출발한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계신다(요3:16,계3:20). 하지만 구원의 끝은 좁은 문이다(7:13~14,10:22). 예수께서도 “[]청함을 입는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22:14)”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으면 우리는 끝까지 구원의 여정을 잘 마쳐서 최종적으로 천국에 골인해야 한다(딤후4:7~8,18). 곧 우리의 영혼이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의 과정이 끝난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사도바울도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는가?(롬8:24)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빌2:12)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증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목회자더러, 어찌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목회자, 예수님 말고도 구원을 받을 있다고 증거하는 거짓된 종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구를 정죄하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것인가? 나는 이신칭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가 구원과 동일하지 않으며, 이신칭의의 시작은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의 완성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직 성경에 쓰여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한 것 뿐이다. 목사라면 교묘하게 거짓을 획책하지 말고 팩트를 그대로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정이철목사는 둘째, 나더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무는 행위구원론을 전파하는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말했다. 행위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세시대 로마카톨릭의 주장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 필요한 공로가 없거나 부족하면, 연옥에 떨어져서 일정기간동안 연단을 받고, 그들 중에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주장이 천주교의 구원교리가 아닌가? 어떻게 개신교회 목회자가 천주교 사상을 전파하겠는가? 어찌 오직 진리만을 전파하고 오직 믿음과 회개로 천국에 들어오라고 전파하는 목회자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하는가? 생각해보라. 어찌 성경대로 전하고 믿는 목회자가 행위공로로 구원얻는다고 외치겠는가? 제 설교를 들어보라. 유투브에 이미 1,600개 이상의 설교가 다 공개되어 있다. 요즘 시대에 자기의 설교를 유투브에 매일 올리는 목회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말씀 앞에 진실하려고 이렇게 날마다 애쓰고 있다. 오직 나와 우리 동탄명성교회는 성경대로 전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인터넷에 영상을 그대로 올려놓고 또한 글도 올려놓고 있다. 누구든지 정말 참된 진리를 찾기를 원한다면영상설교를 듣고 또한 메시지를 들어 회개하여 참된 구원을 받으라는 마음에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다(1:15, 20:21).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자신의 믿음에 따른 열매로서 행함이 나타난다는 말은 맞는 것이지만,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이나 혹은 부활하신 후에도 분명하게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4:17, 막1:15, 2:5,16, 3:19). 그리고 자신이 가진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고도 말씀하셨다(10:22, 14:12).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회개가 행위라고 억지 주장을 하곤 하는데, 성경 어디에 회개가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가? 회개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믿음을 가진 자에게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한 자가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의 피의 소중함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사도들의 주장처럼 믿고 회개할 때에 받는 것이다(막1:15, 행17:30~31).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행위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합당한 믿음에 따른 증거들에 해당하는 것이다(7:19~27, 2:14,26). 행위는 다만 믿는 자가 진실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회개생활을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행위(공로가 아니라 믿음에 따른 열매들’)는 내가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주는 도구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행위는 나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상급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 예수님 없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구원은 오직 믿고 회개함으로 받는 것이다. 믿었어도 사람은 또 죄를 짓기에 끝까지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 믿었어도 또 죄된 본성과 귀신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또 죄를 지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는 그날까지 회개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예수 없이도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마냥 우리와 우리교회를 행위구원을 전파하는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한다는 말인가? 그게 뭇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란 말인가? 만약 이것 때문에 참된 믿음을 찾고 참된 구원을 향해 열심히 회개하고 있는 성도들이 상처라도 받으면 그 영혼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하는 소리인가? 소자중 한 생명이라도 잘못해서 탈락시킨다면, 기꺼이 연자멧돌을 목에 매고 빠져 죽을 작정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면, 당장 심판을 받아 지옥에라도 떨어질 각오를 하고서 이렇게 남을 정죄하는 것인가? 누가 성경 아닌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라고 권한을 주었는가?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남을 정죄해도 되는 것인가? 혹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라 말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과 교리가 다르고 신학사상이 다르다고 말한다는 괜찮겠지만, 그 사람을 행위구원론자이니 이단사상 전파자라느니 매도하는 것은 목회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파하는 사람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행위구원론자라고 정죄하고는 그것도 버젓이 공개석상에 올려놓은 일은 과연 목회자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만 옳고 남의 생각은 틀리다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신학적인 지식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며, 그런 자는 행위구원론자라가 맞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무책임한 발언이다.

  그리고 누가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진짜 허물고 있는가? 누가 기독교신앙을 강력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허무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란 말인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는 자가 기름부음을 받은 목회자요, 바른 진리를 외치고자 하는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가? 남을 정죄하려면 사실에 근거하여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기자들도 짐작으로 말해서는 아니 되는데, 오직 진리만을 말해야 할 목회자가 무엇인가를 보태서 진실을 왜곡시키고, 거짓말을 더해 남을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매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죄가 안 보이니 이것 저것 묶어서 이래서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뭐가 다른가? 그것은 앞뒤가 다른 빨갱이들이나 하는 수법이다. 그것은 마귀와 귀신들이나 행하는 수법이다(8:44). 마귀가 하와를 속일 때에 어떻게 했는가를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그때 마귀가 한 말에는 진실도 있었다. 모두가 다 거짓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에다가 슬쩍 거짓말을 보태서 말하지 않았던가! 보통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잘 간파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그렇게 믿어버리는 믿음 약한 성도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는 진실만을 외쳐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말 때문에 성도들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 왜 예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죄로 정죄를 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진리만을 외치셨기 때문이다(8:45~46). 하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을 이용하여 얼마나 못된 짓(예를 들어, ‘고르반제도)을 일삼았던가? 그리고 성경에다가 뭔가를 보태서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들을 휘어잡으려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종교지도자들의 행태를 잘 알고 있다. 종교지도자들이 써먹은 것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서, 성경의 본뜻을 빗나가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만큼은 진실해야 한다.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 이리저리 엮어서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서, 자신들만의 율법해석(미쉬나, 탈무드, 장로들의 유전)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고 매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진실을 말했지만,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신성모독죄를 지었다고 정죄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생각이나 잣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정죄하고 죽이는 짓을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로 족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했던 예수께서는 그만 그들로부터 정죄를 받았고 결국 죽임까지 당하셨다. 말해보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든 자가 과연 세상권력자들이었던가? 아니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성경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해서 함부로 남을 매도하거나 한 말을 엮어서 왜곡시켜 말하면 안 된다. 그 책임은 반드시 자기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옥형벌이라면 지옥형벌이라고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셋째, 나더러 기독교신앙에 대한 이해 특히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는 목회자인량 매도했다. 정이철목사는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만세전의) 택하심과 믿음으로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참된 성경적인 구원론인량 말했다. 그러나 참된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것이 참된 구원이 아니겠는가? 믿고 회개해야 구원얻는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기에다가 뭔가를 보태면 아니 된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만세전의 택하심 곧 만세전의 예정에 의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언제는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말했다가, 만세전에 예정대로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과연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선택한 자만 구원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만약 그런 본문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헬라어성경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여기에 대해서는 제 다른 설교들을 참고하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초청을 받은 자들 중에 선택을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22:14).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믿을 때에, 그가 선택을 받는 것이다(5:40, 3:16, 5:24, 7:37~39). 우리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만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믿다가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도 아니 된다.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와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한 번 받은 선택이 유효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넷째, 저를 한국교회의 배교와 타락을 이끌어 가는 자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교회의 배교의 타락의 주범이 과연 누구인가? 성경대로 말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증거하려고 애쓰는 자인가? 아니면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온갖 범죄들을 저지르고 있는 애꿎은 목회자와 성도들 때문인가? 성경 어디에 만세전에 개인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성경 어디에도 개인이 만세전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예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구절은 전부 개인사역예정에 관한 것 뿐이다.

 

  ​나는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내 한 목숨을 우리 주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아니 온 세계에 영혼들이 바른 구원관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 오직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증거했던 그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야 나도 천국에 들어가고 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다.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구원받게 되는 자격을 얻게 되었음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원의 근거를 모두 다 마련해 주었으니(구원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없으니), 우리더러 믿으라고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도록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주님의 음성을 그대로 순종하고 그것을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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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이제 말씀드립니다.

 진실을 왜곡되이 말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리고 오직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외치는 목회자를 이단사상 전파자로 매도하는 정이철 목사에게 정중하게 말씀드립니다.

​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이철목사님께서 쓰신 글이 본인의 오해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과하시기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우리교회 성도들에게도 사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못 판단하고 왜곡되게 올린 글도 삭제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도 일을 하실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삼위일체방식으로 일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탄마귀도 그렇게 일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더불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핍박하고 미혹하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사탄은 붉은 용으로서 일하고,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뿔 가진 짐승으로서, 거짓선지자는 두 뿔 가진 어린양으로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 뿔 가진 짐승 일명 "적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대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람인가 아니면 천사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어떤 세력인가? 그리고 이 짐승이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짐승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은 과연 성경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42달이나 1,260일 그리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와 천년왕국의 천년이라는 기간은 이 짐승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모든 비밀이 한꺼번에 풀릴 수 있는 성경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정체와 역할과 활동기간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이것이 바로 몇 줄로서 이 세상의 역사를 요약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니까 말이다.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이 승천한 이후에는 또한 성령을 보내 일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삼위로 계신다는 신학적인 틀이 생겨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탄도 하나님처럼 삼위일체방식으로 자신을 표출하고 일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름하여 악의 삼위일체가 그들인 것이다. 악의 삼위일체란 악한 자인 '사탄마귀'와 그가 지상으로 내보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들을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라고 부른다(계16:13). 그러므로 오늘은 악의 삼위일체 중에서 두번째에 해당하는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에 관한 말씀(계13:1~10)으로서, 이 짐승이 지상으로 올라와 어떻게 활동하며, 또한 성도들을 어떻게 핍박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심판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 주님은 과연 언제 재림하실까?

  예수께서는 언제 재림하실까?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언제 종말이 오는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한 해도 우리 주님의 재림은 이미 임박해있는 듯 했다. 하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순교자의 숫자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백성의 숫자가 채워지지 아니한 것이지 않아 싶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천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무한정 이 세상의 시간을 계속 연장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반드시 이 세상에는 종말이 올 것이고 그날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끝내실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언제 주님이 오실 것인가? 그것을 요한계시록의 표현으로 말하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일곱번째 나팔이 울려퍼지는 날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11:15). 그렇다고 해서 딱 숫자적으로 일곱번째 나팔이냐 하는 것은 아닌듯 하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숫자는 항상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곱번째 나팔이란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는 그날을 의미한다고 보면 좋겠다.

 

3. 일곱번째 나팔이 울려퍼질 때 일어나는 3가지 결과들

  그렇다면, 일곱번째 나팔이 울려퍼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 때에은 3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계11:18). 하나는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과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다. 둘째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인 불신세력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셋째, 죽은 자들을 백보좌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즉 '상'과 '멸망'과 '심판'이 최종나팔이 울려퍼질 때에 일어나는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심판은 그들 치하에 내리는 일곱가지 재앙들(일곱대접심판)과 아마겟돈전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내려질 때까지, 그들은 성도들에 대해서 어떤 일을 자행할까? 바로 그 내용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데,  바로 두 짐승에 활동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열뿔달린 짐승)에 대한 이야기요, 또 하나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두뿔가진 어린양)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둘에 대한 배후조종은 "붉은 용"이 하고 있다(계12:3). 붉은 용에 대한 것은 이미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다루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아담을 타락시켰던 창세기3장의 옛뱀이자 사탄마귀다(계12:9). 그는 하늘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 찬양을 담당하던 천사장이었다. 그가 타락하여 하늘에서 이 세상 안으로 내어쫓겨났고,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에는 무저갱에 갇혀 있다. 하지만 그냥 그곳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지구와 연결된 통로인 음부의 문들을 통해 이 세상 위로 자기의 하수인들을 적극적으로 내보내,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쓰는 존재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바다로부터 올라오게 될 짐승이요, 또 하나는 땅에서부터 올라오게 될 짐승이다.

 

4. 악의 삼위일체인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정체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보았던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열뿔 가진 짐승)의 정체란 무엇인가? 대체적으로 이 짐승에 대해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두뿔 가진 어린양)에 대해서는 "거짓선지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열뿔 가진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적그리스도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부르기에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왜냐하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행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쪽에서 활동하는 이 세상의 세력의 집합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한편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하나님을 믿는 쪽에서 활동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짐승"과 "거짓선지자"에 해당한다(계16:13~14). 짐승과 거짓선지자는 용과 더불어 악의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삼위일체가 바로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인 것이다. 말세중의 말세가 되면, 이들 셋이 함께 활동하여 이 세상에있는 왕들을 집합하여, 하늘로부터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마지막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른다(계16:12~14). 그런데 이 전쟁에서 이 세 영들은 주 예수께 붙잡히게 되고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산 채로 붙잡혀 유황 불붙은 곳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계19:19~20). 그후에는 곧바로 용 곧 사탄마귀가 붙잡혀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계20:10). 그리고 나머지 이 세상의 왕들과 이 왕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의해 전부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계19:15). 그러면 독수리 떼가 그 시체를 배부르게 먹을 것이다(계19:21). 사실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그리고 용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곧 귀신들의 영들이다(계16:14).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천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사람인 적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안 된다. 그가 사람을 붙잡아서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은 누구인가?

  자, 그렇다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짐승 곧 열뿔 달린 짐승의 정체를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그것은 계13:1~10에 나온다. 먼저, 사도요한이 보았던 바다에서 올라오고있는 짐승의 모습을 살펴보자(계13:1~2). 우선 이 짐승의 모습에 대해서 헬라어원문으로 살펴보자. 

(1) 그리고 [나는] 바다로부터 [현재] 올라오고 있는 짐승[같은 것](정관사없음)을 보았다. 열 개의 뿔들과 일곱 개의 머리들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것의 열개의 뿔들 위에 왕관[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것의 머리들 위에는 신성모독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2) 그리고 [내가] 보았던 그 짐승은 표범과도 닮았는데 [아직까지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의 밭들은 곰의 [발들]과 같고, 그것의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다. 그리고 그 용이 자기의 능력을 그리고 자기의 보좌를 그리고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

  첫째, 이 짐승은 열 뿔과 일곱 머리를 지녔다고 했다. 영락없이 사단을 쏙 빼닮았다. 사단마귀도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던 이 짐승은 이미 다니엘선지자를 통해서 그가 누군지가 나와 있다. 그것은 장차 미래에 있어질 세상제국에 대한 환상들이었다(단7:3~8, 15~22, 23~28).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열뿔 가진 짐승이 바로 이 세상에 장차 출현할 거대한 네번째 제국이나 그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네번째 제국은 열 뿔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열 뿔은 열 왕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단7:24). 그리고 열 뿔 가운데 세 뿔을 뿌리로부터 뽑아버리고 등장하는 한 작은 뿔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말로써 대적하는 자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42달, 1260일, 3년반)동안 하나님의 성도들을 괴롭힐 자인 것도 알 수 있다(단7:25).

  그런데 둘째, 사도요한은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표범과 비슷했으며, 발은 곰의 발을, 입은 사자의 입을 가졌다고 했다. 이것은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의 동물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자'는 다니엘시대의 첫 제국으로 신바벨론왕을 의미하며, 곰은 바벨론을 이은 메대와 바사(페르시아)의 왕을, 표범은 메대와 바사를 이을 헬라제국의 왕을 의미한다(단7:15~22, 8:19~25). 그러나 네번째 제국은 그때만 해도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을 본 것이다. 그 짐승은 열 뿔과 일곱 머리를 지녔으며, 모양은 대체적으로 표범과 같았으며,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었다. 고로 이 넷째 제곡은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 그리고 헬라제국의 장점을 지고 태어나는 거대한 제국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그 제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는 헬라제국에 이어서 거대제국을 형성한 로마다. 로마제국이 다니엘이 말한 열뿔 가진 넷째제국이며, 이 제국이 바로 그때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다니엘이 본 네 제국들도 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지구가 땅이 30%이고, 바다가 70%인 것을 감안한다면,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은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세력자들인 것을 알 수 있으며, 곧이어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거대 제국에 미치지 못하는 예언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사도요한이 본 열 뿔가진 짐승 곧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은 로마제국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면 열 뿔 가운데 세 뿔을  뽑아버리고 올라온 "작은 뿔"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세 뿔이 뽑힌 후, 쇠퇴해진 로마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든 제국이자 그 제국의 왕을 가리킬 것이다. 고로 그는 바티칸의 로마교황이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로마교황은 로마제국의 후신으로서 죽어가는 로마를 다시 세워서 천년동안 전 세계를 통치했던 대제국의 강자다.

  여기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열 뿔을 가졌다는 것은 뿔은 권세를 상징하고, 열(10)은 충만한 숫자를 의미하므로, 이 짐승이 충만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일곱 머리를 지녔다는 것은 머리는 지혜와 다스림을 상징하고, 일곱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하므로, 이 짐승이 매우 지혜로운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통치를 구현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이 다니엘의 환상에서처럼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단7:21,25, 계13:7). 그리고 이 짐승의 통치기간도 다니엘서의 기록과 같이 42달로 일치한다(단7:25, 계13:5). 여기에 나오는 "42달"은 3년반의 기간으로서, 영적으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이것은 이전 강해를 참고바람). 만약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이 짐승(사탄의 화신)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이 거대제국의 왕들에게 경배하고, 이 제국의 왕들이나 왕들의 형상 앞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자는 결국 사탄이 주는 소유의 표시, 666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짐승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6. 42달, 1260일. 3년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천년왕국의 천년동안의 기간은 각각 어떤 의미인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 전까지의 기간은 영적으로 볼 때 3년반(42달, 1260일, 한때와 두때와 반때)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로 이 기간 동안에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이방인들에게 의해 짓밟히게 될 것이며(계11:1~2), 두 증인이 십계명준수와 회개를 외치다가 순교할 것이다(계11:3~6). 그리고 사내아들(그리스도)을 낳은 여자(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체)가 광야로 도망가서 핍박받는 기간이 바로 그 기간이다(계12:6,13~17). 그리고 이 기간은 역시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열 뿔가진 짐승이 통치하는 기간(계13:1~10)이며, 이 기간은 이미 천국에 올라가 그곳에서 왕노릇하는 자들로 치자면, 그들이 그곳에서 천년동안 왕노릇하고 있는 기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42달과, 1260일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천년왕국의 천년의 시기는 다 동일한 기간에 대한 각각 다른 표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고찰했을 때에는, B.C.1446년경 이스라엘백성에서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간 머물게 되는데, 그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머문 기간도 영적으로 다 똑같이 일치하는 기간에 해당한다.

 

7. 왜 성도들은 42달동안 짐승에 의한 핍박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이 세상의 거대한 제국과 그 왕의 핍박하에 두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이 세상제국과 그 왕에 의해 핍박당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때로는 풀무불이나 사자밥이 되게 하시는가? 그것은 초기 구원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의해 주어는 것이지만, 그가 광야같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죄를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시험하시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을 통과한 자만이 결국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라.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체)이 광야로 날아가 거기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면서 또 자식들을 낳고 있다. 하지만 이때 이 여인은 계속해서 용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지켜서 보호해주신다. 다만 이 여인이 낳은 씨들(후손들)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두 짐승들에 의해 핍박당하고 미혹당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기는 바로 이 짐승들에 의해 핍박당하는 시기다. 그러나 이때 핍박의 주체인 용을 보라. 용은 무저갱에 갇혀 있기에, 직접 핍박하지는 못하며, 다만 그의 하수인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통해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이다.

 

8. 나오며

  그렇다. 사탄은 지금도 바다짐승과 땅짐승(거짓선지자)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짐승과 거짓선지자를 이용하여 이 세상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이 핍박과 환난을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성도들이 이 핍박과 환난을 이겨내었던 2가지 방법을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로서 이기는 것이며,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기는 것이다(계12:11). 어린양의 피로서 이겼다는 말은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여 마귀의 공격을 이겨냈다는 뜻이다. 그리고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겼다는 것은 죽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마귀를 이겼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 성도들 중에 몇을 죽는 데에 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노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마10:28).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줄기차게 성도에게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외치고 있다(계13:10). 그러므로 여러분과 우리 모두는 다 이러한 환난(42달)을 통과해야 한다. 환난받기 전에 훌쩍 휴거되어 공중에 올라가서는 환난을 면제받는다고 하는 헛소문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것에 관련된 성경말씀을 헬라어원문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계3:10).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계시와 예수님의 증언(마24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성도들이여,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그 환난의 날들을 감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자(마24:22). 그리고 환난이 지난 후에 우리 주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두자(마24:2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를 이겨낸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임을 명심하자(계11:18). 건투를 빈다.

 

2018년 1월 10일(수)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보다 더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학이고 교리요 신앙고백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나 교리 그리고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성경과는 많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에 들어와서서 많은 이들이 성경을 따라가기보다는 신학노선을 따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믿고 있는 신학노선이 최고라고 알고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아니다. 아무리 내가 아무리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신학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무턱대고 그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오늘은 칼빈주의의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교리가 과연 얼마나 성경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혹 성경을 말하고 있다면 어떤 것이 보다 더 성경적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고백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었지 왜 이딴 것까지 알아야 하는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된다. 하지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는데 어떻게 잘 믿을 것인지는 생각해 보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지에 대해서 도와주는 자료들을 찾게 된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교리서나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전 세계 교회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교리 내지는 신앙고백이 있다면, 뭐니뭐니해도 1648년에 영국에서 나온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일 것이다. 대부분의 장로교 교회들이 이 신앙고백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개혁의 노선이자 정통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거기에는 성경과 어긋된 신앙고백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채택된 신앙고백은 바꾸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리고 한 번 신앙고백이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으로 고착화되는 것이 대체로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행할 것인가의 표준은 반드시 성경이어야 한다. 즉 성경에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고 믿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두꺼운 66권의 성경책을 읽기보다는 보다 더 손쉽게 신앙생활하고자 교리집이나 요약집이나 신앙고백서를 찾게 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날 신앙고백의 가장 큰 근간이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두 교리 곧 칼빈주의의 신앙강령과 알미니안주의 신앙강령을 성도의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알미니우스(A.D.1560~1609)는 칼빈의 제자의 제자다. 그는 칼빈의 가장 신실한 제자였던 베자(A.D.1519~1605)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둘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알미니우스는 칼빈(A.D.1509~1564)이 죽기 5년 전에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칼빈의 제자 베자가 타락전예정론을 외쳤을 때에 그것에 반기를 들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는 평신도가 나타났다. 그는 코른헤르트(A.D.1522~1590)였다. 그러자 베자는 자신의 제자였던 알미니우스를 시켜 코른헤르트의 부당함을 반박하게 했다. 그래서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는데, 아뿔싸, 나중에 보니 코른헤르트가 훨씬 더 성경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알미니우스는 베자를 오히려 반박하게 된다. 그러자 베자는 다른 제자인 고마루스(A.D.1563~1641)를 통해, 알미니우스를 반박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알미니우스와 칼빈간의 신학적 쟁투가 시작된다.

  그러다가 칼빈도 죽고 베자도 죽는다. 그러자 알미니우스의 제자들 46명이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항론서 5개 항목을 의회에 제출하게 된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도르트회의(A.D.1618~1619)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때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는 추정하는 46명에게 변론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이들을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해버린다. 그리고 칼빈이 주장했던 5대항목만을 정통교리라고 선포해버린다. 그리고 이 교리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결국 1648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된 것이다.

 

3.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

  그렇다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칼빈주의보다는 알미니안주의가 훨씬 더 성경적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알미니안주의가 100%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알미니안주의도 잘못된 교리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들의 주장이 왜 성경적이며 왜 성경적이지 않는지를 하나하나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가. 칼빈주의의 5대강령

  먼저, 칼빈주의의 5대강령을 살펴보자.

  첫째, 전적 타락. 이것은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해 있으며(렘17:9, 롬3:10~12), 전적으로 무능하다(시14:2~3)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로 인하여 부패하긴 했지만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전적으로 무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결코 이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부어지게 되면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롬3:10의 말씀 곧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문장은 실은 시14: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전7:20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롬3:11의 말씀은 시편14:2을 인용함으로서,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로서 나발같은 자가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롬3:10~11의 말씀은 롬3:9의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들에 대한 인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11의 말씀은 롬3:9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할 뿐,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하여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한다는 말씀인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마12장에서 자신이 메시야로서 사역하고 있음을 구약성경 이사야 42:1~4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고 죄성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볼 때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갈대가 상하긴 했으나 완전히 상한 것은 아니며, 심지가 꺼져가고 있으나 완전히 꺼지지는 아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베푸시어 성령으로 도와주시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다시 살아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무조건적인 선택.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하신대로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는 선택하신다는 것이다(롬9:11,15, 엡1:5,9,11). 그런데 이 주장은 더더욱 틀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떤 개인을 구원하신다고 단 한 번이라도 예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롬9:11의 말씀은 큰 자인 에서가 어린 자인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사역적인 예정에 해당하는 말씀인 것이지 구원에 관한 개인 예정의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으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택적 개인 구원 예정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롬9:13에 나오는 말씀 곧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25장 때부터(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말라기서로부터 인용한 말씀(말1:2~3)으로 1,600년 뒤에 결국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려 망령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결국 큰 자이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제한 속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하셨는데, 이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요6:37,39,10:29).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모든 인간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 다만, 그것을 믿지 못해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제한 속죄에 대한 근거로서 요6:37,39과 10:29을 인용하는데, 사실 이 구절들을 헬라어성경으로 보면 우리말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요6:37과 39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로 보내주시는 자(남성,단수)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한다는 말씀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이 두 구절은 둘 다 어떤 사람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둘 다 중성단수명사로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주시고 있는 것(중성,단수)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께로 다다를 것이라는 말씀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마지막 날에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것"은 예수께 구원받으려고 나오는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부어주시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지혜과 명철, 성령과 분별력 등이 있을 것이다.

  넷째, 불가항력적인 은혜.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이때 그 사람은 이러한 은혜에 저항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어 전부 다 구원받게 된다는 주장이다(요6:37).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불러낸다는 것은 맞지만, 때로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는 이것을 택할 것인가 저것을 택할 것인가 하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롬1장의 말씀처럼 사람 중에는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인간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할 없는데, 왜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요청하시겠는지를 말이다(계3:20). 아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할 수 있는 작지만 조그마한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죄인이기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섯째, 성도의 견인(인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적으로나 최종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의해 능력으로 끝까지 지킴을 받는다는 교리다(요5:24, 10:27~30, 롬8:35~39, 딤후4:18). 다시 말해, 일단 진정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두 번 다시 아주 타락하는 일이나 멸망받는 일이 없다고 하는 교리다. 이는 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 것이며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되었다. 이미 믿음으로 중생하여 영생을 가진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그러한 사례가 무수히 나온다. 구약에서는 아간과 시므리와 사울왕이 나오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고(행5:1~11), 딤전1장에 보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도 있다(딤전1:19). 그렇다고 사람이 믿음으로 얻은 영생을 잃어버리는 시점은 예수님을 버린 그 시점이 되지는 않는다. 한 번 주신 영생을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둬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죽는 날에 실행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심판받을 때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을 가진 자가 타락했어도 자신이 죽기전까지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언제든지 다시 되돌이킬 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혜 아래에서 회개하면 되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들어가는 영생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살전5:19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계속해서 범죄한 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있는 영생은 영적으로 볼 때 점점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믿다가 핍박 때문에 주님을 부인한 자라도 주님은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나,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심판 때에 부인당하게 될 것이다(마10:32~33).

 

나. 알미니우스의 5개 항론

  이제는 알미니우스를 지지했던는 46명의 탄원서에 나오는 항론서 5개항목에 대해 살펴보자. 알미니우스 지지자들이 주장한 5가지 항론서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성경적인 주장들이 많으나 모두가 성경적인 주장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 조건적인 선택.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하시되, 믿고 순종 안에서 견딜 자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으며, 하나님께 반항적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죄와 진노 아래 두시고 저주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예정론의 변형일 뿐이다. 그래서 이 주장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이 믿고 순종 안에서 견딜 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했다고 말하지만, 칼빈의 예정론과 타협안을 제시한 듯인 인상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 예정하셨다고 말한다(엡1:3~6,11). 하지만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고 말씀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누구나 복음을 듣고 주님이 부르실 때에 응답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엡3:16, 요7:37~38, 계22:17). 그러므로 이미 믿음과 회개를 통해 영생을 받았던 자라도 믿다가 주님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떠나서 죄를 짓게 된다면 그는 구원으로부터 탈락될 수 있다. 물론 죽기 전까지 회개한다면 그는 다시 구원을 항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우스의 첫번째 항론은 틀린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변형된 예정론의 수용이기 때문이다.

  둘째, 보편적인 속죄(요3:16, 요일2:2). 이것은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화해와 사면획득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래도 믿는 사람만이 속죄의 효력를 실제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나하면, 딤전2:6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요한도 요일2:2에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에수께서는 골고다언덕에서 모든 인류의 속죄를 위한 피를 흘리셨고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것도 단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러므로 속죄제사는 두 번 드릴 필요가 없다. 단 번의 제사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할 만한 충분한 효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속죄를 믿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의지. 이것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은혜를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자유의지의 작용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고 새롭게 되려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수행하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반응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절반 정도 맞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왜나하면 죄아래 놓여있는 인간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꺾여진 갈대는 꺾어지고 말 것이며, 꺼져가고 있는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때에 자신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기를 원한다면 그는 구원 안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저항가능한 은혜. 이것은 인간의 선행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지는 않으며, 그것은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느정도 성경적인 주장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딤전2:4)고 했고, 아무도 멸망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벧후3:9)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고,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에 따라 하나님은 그에게 선행적인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문밖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저항 가능한 은혜가 없다면, 그분은 문을 두드리실 필요가 없으며, 당신의 소원이 이런 것이다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 그냥 당신 뜻대로 행하시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오라고 하신다.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거절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0%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은혜로부터 탈락. 이것은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생명주시는 영에 참여한 자들은 사탄에 의해 실족하거나 낚아채이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지하시고 붙들어주신다(요10:28)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쪽에 가까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을 때에 주시는 영생을 영원히 주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영생은 믿는 자가 죽을 때까지 주어지는 생명이다. 그 생명이 다음 세대(세상)까지 가져가려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럴려면, 믿는 자는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견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양태에 따라 견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견인은 조건적인 견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요5;24)"이라는 단어에도 주목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영생이라는 단어는 "영원한 생명"을 단축해서 부르는 말인데,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아이온(age)'에서 온 형용사다. '아이온(age)'은 '시대, 세대, 세상'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영생(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시대의(단수)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것보다 더 원어적인 번역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대부분 그것을 "영원한 생명(영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 "영원히(영원토록)" 혹은 "세세토록"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때 "영원히"나 "세세토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복수) 톤 아이오논(복수)"이다. 이 뜻은 "아이온들(시대들,세대들)의  아이온들까지"다. 곧 "세대들의 세대들까지(till the ages of the ages)"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에 대해서는 "영원히"나 "세세토록"으로 번역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문구는 무려 12번이나 나온다(계1:6,8, 4:9,10, 5:13, 7:12,10:6,15:7, 19:3, 20:10, 22:5). 그리고 이 문구는 다 하나님을 향하여만 쓰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대들의 세대들까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생(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이 문구와는 쓰임새가 전혀 다른 표현이다. "그 시대(단수)의 생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진다는 말씀은 곧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유효한 생명을 가진다는 뜻이다(요일5:12). 그러므로 믿을 때에 받았던 영원한(시대의) 생명이 다음 세대(세상)까지 이어지게 하려면, 우리는 끝까지 좁은 길을 가야만 한다. 그것을 계속 유지하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4. 나오며

   오늘날에 와서 보면 종교개혁자들에 대하여 많은 아쉬움을 갖게 된다. 왜 루터는 바울의 서신만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야고보서는 성경에서 빼버리려고 했는지 아쉽기만 하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라도 얼마든지 죽기전에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건만, 루터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더욱이 종교개혁의 완성자인 칼빈은 또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는 자신의 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낫으로 목을 잘라 죽이던지, 화형시켜 죽이던지 여러가지 고문으로 사람들을 처형한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어찌 복음으로 무장된 신학자라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었는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향해 일체 함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들도 성경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향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온 우주 가운데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이는 우리 주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100%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자들이든지, 교리든지 하는 것은 얼마든지 성경을 잘못 인용하거나 요약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믿는 우리가 구원의 마지막 순간가지 긴장을 놓치 않고 믿고 회개하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빌2:12). 건투를 빈다.


2018년 1월 7일(주일)

정병진목사

 

이 세상의 역사는 대체 누가 이끌어 가는 것인가? 권력 있는 자인가? 아니면 돈있는 자인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올려져 있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움직인다고 일러준다. 그러나 그것을 펼쳐보여서 거기에 기록된대로 움직이도록 할 존재가 필요하다. 한 힘쎈 천사는 그분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친다. 다시 말해 이 온 세상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움직일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질문은 항상 주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만약 그분이 아닌 다른 존재나 사람에게 가서 묻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쓰라린 아픔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에게 모든 인류의 역사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계신 어린양은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그리고 그분은 왜 보좌에 계신 이처럼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것일까? 이것은 요한계시록 5장이 전부다 답해준다.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은 한 장소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와 그 주위에 있는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에는 '보좌 위에 앉아있는 이" 곧 하나님이 좌정해 계신다. 그리고 그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들과 24장로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여러 종류의 창조물들이 시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보좌 위에 계신 이에게 네 생물들과 24장로들이 경배하며 찬양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장에는 보좌 앞에서 보좌에 앉은 이로부터 두루마리를 취한 어린양에게 경배하며 찬양을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굳이 이것을 나눠서 표현해 본다면, 계4장에서는 보좌에 앉은 이에 대한 찬양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계5장에서는 보좌 앞에 어린양에 대한 찬양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보좌 앞에 있는 어린양이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어린양에게 찬양과 경배를 돌리는 존재들 중에서도 24장로들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한 장엄한 모습과 천상의 존재들에 의한 놀라운 찬양

  먼저, 요한계시록 4장을 잠깐 살펴보자. 요한계시록 4장은 "보좌 위에 계신 이"를 보여준다. 그분은 분명 존재하는 분이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는 없는 존재다. 다만 어떤 빛깔로 표현되고 있을 뿐인데, 그분의 모습은 벽옥(푸른빛) 같고, 홍보석(붉은 빛) 같았다. 그리고 그 보좌을 둘러서 '무지개'가 있는데 그 모양은 일곱색깔 무지개가 아니다. 녹보석(녹색)과 같았다.

  그리고 바로 보좌 중앙과 옆에는 앞뒤에 눈들이 가득한 네 생물들이 날고 있었다. 이들의 모양은 그룹천사(얼굴모양이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모양)와도 비슷하고, 스랍천사(여섯 날개를 가님)와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아니다. 이들은 4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하나는 사자같고 하나는 송아지(그룹) 같고, 하나는 사람같고 마지막 하나는 독수리같았다(겔10:14). 이 생명체는 아마도 이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대표하는 존재들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네 생물들이 보좌 위에 앉아계신 이에게 밤낮 쉬지않고 뭔가를 하고 있다. 그것은 찬양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 반타원형으로 24개의 보좌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흰 옷을 입고 금면류관을 쓰고 있는 24장로들이 앉아있었다. 이들은 신구약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인 것 같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가룟유다 대신에 사도바울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됨)들로 구성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또한 보좌 위에 앉아있는 이에게 찬양하고 있다. 이것이 4장의 모습이다.

 

3. 천상에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있는 어린양은 누구이신가?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두루마리 책을 취하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양은 환상 속에 나오는 모습이지 실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어린양은 일곱 뿔들과 일곱 눈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계5:6). 만약 어린양이 실재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린양은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어린양의 모습을 통해서, 그분이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사도요한은 보좌 위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 위에 일곱인으로 봉인되어 있으며, 안팎으로 쓰여있는 하나의 두루마리 책이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특별히 그 책이 "일곱 인으로 봉인되었다"고 함은 그 책이 "완전한 책"임과 동시에 "비밀스러운 것"임을 말해주며, 또한 권한을 가진 자 외에는 아무나 열어볼 수 없는 책인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때 어떤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그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가?(계5:2)" 그런데 하늘 안에서나 땅 위 혹은 땅 아래에 있는 그 어떤 존재라도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없었다. 그래서 그만 울고 있었는데, 그때 24장로들 중의 하나가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한 분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사도요한 앞에 보여진 그분은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린양이 누군지를 살펴보자. 사도요한은 24장로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두루마리를 취하는 어린양에 관하여 2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분은 유다지파의 사자(Lion)이며, 다윗의 뿌리라는 것이다(계5:5). 둘째, 그분은 일찍 죽임을 당한 듯한 어린양이라는 것이다(계5:6).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분을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한 것은 그분이 유다지파의 후손으로서 왕적 직무를 수행할 자임을 말해준다(창49:8~10). 뿐만 아니라 그분을 '다윗의 뿌리'라고 한 것은 그분이 다윗을 만드신 이 곧 다윗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말해준다(계22:16, 사11:1,10).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다윗'이란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열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루마리를 취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 그렇다. 어린양은 곧 예수님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며, 다윗을 만드신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사도요한은 그순간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보게 된다(계5:6).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분을 어린양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환상을 통해 본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속제물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세상 죄를 지고 가셨던 그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그가 본 것이다(요1:29).

  그렇다. 하늘에서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사자이자 다윗의 뿌리이면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시다. 그분은 왕이시며 또한 속죄제물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특별히 어린양에게 뿔들이 7개가 있다고 한 것은 어린양께서는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어린양에게 눈들이 7개가 있다고 한 것은 그분이 온 땅을 완전하게 감찰하고 계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신 것을 알려준다. 한편, 어린양의 눈들에 대하여 사도요한은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들"이라고 했다. 이는 어린양의 눈들이 곧 성령을 의미함을 가르쳐준다. 그렇다. 이 눈들을 성령을 가리킨다. 특별히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는 그 눈들에 대해 "여호와의 눈들"이라고 표현했다(슥4:10). 그 눈들은 하나님의 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자 예수님의 눈으로서 온 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영인 것을 알 수 있다.

 

4. 천국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행하는 2가지 직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지내는 것일까? 그것은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총체를 표현하는 24장로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은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을 경배하고 있는 4생물과 24장로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들 중에 24장로들의 손에 두 가지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금으로 만들어진 금 거문고였고, 또 하나는 금대접이었다. 그리고 그 대접 안에는 향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거기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천국의 들어간 성도들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천국의 들어간 성도들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딱 두 가지의 직무를 수행한다. 하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왕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먼저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거문고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도 한다. 이 두 가지 사역을 일컬어 천국백성의 "제사장적 직무"라고 부른다. 그렇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제사장적인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5. 왜 어린양은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가?

  그렇다면 어린양은 어떻게 되어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은 24장로들의 찬송소리를 통해서, 어린양되신 예수께서 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지 3가지를 알게 된다. 하나는 그분이 인류의 구속사역을 위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계5:9b).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분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피로 그들을 사셨기 때문이다(계5:9b).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는 그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왕국과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계5:10). 그렇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어린양이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특히 어린양이 하나님으로서 동일한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뒤 그분은 인류의 대속사역을 위해 죽으셨으며, 자기의 핏값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천국에서 왕들과 제사장으로서 삼으셨다.

 

6. 천만천사와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과 그리고 화답

  그리고 이어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또 하나의 직무가 있으니 그것은 왕적인 직무다. 천국에서 왕으로서 통치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럼 대상은 누구인가? 우선은 천사들일 것이고 또하나는 천국에 있는 피조물들일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 가면 누구든지 왕처럼 산다. 누구든지 천사를 부릴 수 있으며, 천국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부터라도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아니한가? 우리 모두 꼭 천국에 들어가도록하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관한 찬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서 24장로들을 둘러선 천천만만의 천사들의 찬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만만의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계5:12)" 그렇다. 죽임당한 어린양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무려 7가지나 되신다. 그것은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신 것을 말해준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늘과 땅과 땅속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찬양을 했다. 그들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 권능을 돌렸다(계5:13). 그러자 4생물들도 "아멘"이라고 화답하였고, 24장로들도 엎드려 경배를 하였다.

 

7. 나오며

  그렇다. 천사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상관없이 모든 천국의 존재들이 똑같이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양드리고 경배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실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나님께 찬양드리기를 그렇게 좋아하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더 사랑해주신 것은 아니었을까? 기왕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도 이제는 정말 찬양하는 일에 더 감사와 감격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기도하는 일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일도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되어서도 예수님의 재림때가지는 계속해서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도 주님을 찬양하자. 오직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자. 그리고 주님께 기도를 올려드리자. 하나님이 비록 전능하신 분이라도 우리가 자유의지를 사용해 그분을 거절한면 전능하신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놓으면, 하나님께서는 강제로라도 그 일을 행하실 수 있다. 그분에게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믿는 역사도 일어날 수 있다. 성도들이여, 찬송하고 기도하자. 정말 찬송하고 기도를 일삼아서 행하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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