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사실 매우 닮은 교회다. 교회 안에 거짓된 이단교리를 받아들인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우상숭배를 해도 죄가 되지 아니하며, 음행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아니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사도와 거짓 선지자들을 두 교회는 용납했다. 그 결과 주님은 그들의 심판주로 나타났다. 좌우에 날선 칼을 가지시고, 불꽃같은 눈을 가진 이이자 빛난 주석같은 발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교회는 주의 종과 성도들간에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대체 이 두 교회는 어떻게 달랐고 무엇이 같았는가? 그리고 두아디라교회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적어도 60년 이상이 지난 어느날,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요한이 영 안에서 4번의 환상을 보게 된다. 사도요한은 그때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었고 일곱금촛대 사이에 거니시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시면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신다. 그 편지들 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던 일곱교회들 가운데 네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각 교회들마다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르게 말씀하셨고, 각 교회들의 상황에 맞춰 말씀도 다르게 주셨다. 그렇더라도 예수께서 각 교회에게 주신 말씀은 그 교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의 편지의 말미에 가서 "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지금 성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단호하게 들을지어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 교회를 위해 쓰여진 편지는 그 교회의 상황에 따른 주님의 판단과 처방전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도 주신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앞에 있는 3시간을 통해서 3개의 교회의 형편과 그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배웠다. 주님께서 첫번째로 말씀하신 교회는 에베소교회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만 주의 종들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다. 그리고 두번째 교회는 서머나교회인데, 이 교회는 유대인들과 로마정부에 의해 온갖 핍박으로 고난을 받는 교회였다. 그리고 세번째 교회는 버가모교회로서, 핍박의 때에 순교자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일부 교인들이 발람의 가르침 내지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수용함으로서 거짓 진리와 타협했던 교회였다.
이제는 네번째 교회로서 두아디라교회를 살펴볼 차례다. 두아디라교회는 사실 버가모교회와 비슷하다. 둘 다 잘못된 비진리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가모교회는 주의 종들만큼은 타락하지 않았다. 버가모교회의 주의 종들은 참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타락해버렸다. 둘 다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함으로 교회 자체의 타락을 가져왔는데, 버가모교회가 평신도들이 거짓된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거짓된 진리를 포용하는 정책을 폈던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어쩌면 거짓된 진리를 전혀 수용하지 않은 에베소교회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아디라교회를 통해 주의 종이 거짓된 가르침을 수용했을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주의 종들을 심판하시는지 그리고 타락한 주의 종이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과연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3. 두아디라 도시의 특성과 두아디라교회가 당면했던 심각한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나?
두아디라,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가 살던 도시로 알려진 그곳, 그곳은 무역의 도시였다. 그 지역은 털실과 아마포 그리고 외투 제조업과 더불어 그것을 염색하는 공장이 많이 상주해있던 도시였다. 그러므로 다른 도시로 염색한 옷들을 판매하기 위해서 이 도시 사람들은 '길드'라는 상업조직으로 움직였다. 그러므로 상업과 무역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길드의 조합원이 되어야 했다. 특히 두아디라 조합원들은 태양신인 티림노스(아볼로)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했다. 그들은 이 외에도 다른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조직의 조합원이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연히 조합원의 회합에 나가야 하는데, 그때에 우상 앞에 경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같이 먹어야 했으며, 2차순서로서 음탕한 행위를 저질러야 했기 때문이다. 길드조합원들에게 있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행하는 것은 친목도모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행15장의 예루살렘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우상의 제물과 음행"을 멀리해야 했다(행15:20,29).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두아디라성도들은 비록 할례와 안식일은 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했다.
4. 두아디라교회가 처했던 심각한 상황은 무엇이었나?
그런데 두아디라교회는 교회지도자마저도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세벨은 사실 두아디라교회의 선지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자칭 자신을 선지자라고 했던 이세벨은 그 교회에 들어와서 다른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고 음행의 회합에 나가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세벨선지자도 버가모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교훈과같은 비슷한 가르침을 폈던 것 같다. 하지만 맨 처음에 등장했던 에베소교회는 두아디라교회와는 정반대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니골라당이란 대체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 그들은 영지주의의 한 분파로서, 하나님에 관한 영적인 지식을 터득한 자는 그 어떤 육적인 행위를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혹시 우상을 숭배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으며, 천국에 들어갈 부분은 자신의 영혼이므로 육체가 음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으며 그것 또한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그것과 유사한 가르침을 가지고 두아디라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5. 우상숭배는 어떤 결과들을 초래하는 것일까?
초대교회와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두아디라교회의 주의 종들은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상업조직에서 탈퇴하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그렇게 선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 줄 한 사람의 전령을 만난 것이다. 이세벨이라는 여선지자가 나타난 것이다. 믿는 자는 비록 길드조직에 참여하여 우상을 숭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아니하며, 길드조합원들과 음행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가르쳤다. 결국 두아디라교회의 주의 종들마저도 그만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성도들 중에는 초대교회의 순수한 가르침 곧 참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성도들이 있었다. 주님은 그들을 격려하시면서 자기들이 붙들고 있던 진리를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붙들고 있으라고 격려하셨다. 그래서 결국 이기는 자에게는 철장권세와 새벽별의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거짓된 진리를 선포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께서 그들을 정확히 가려낼 것이며,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고서 그들을 짓눌려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전지하신 분이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금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때도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세벨 본인에게는 질병의 징계로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주의 종들에게는 커다란 환난이 닥쳐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세벨의 자녀들(육적인 자식이나 영적인 후손들)에게는 철저히 사망의 재앙으로 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을 만나면 그때라도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듯 싶다.
6. 한국교회의 우상숭배의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문제를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과 비교해보면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두아디라교회와 같은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교회는 이미 우상숭배행위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주의 종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자행하고 있는 우상숭배행위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에게 제사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기독교식으로 포장한 것이 바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이다. 사실 추도예배는 불신자들의 조상제사를 기독교화시킨 것이다. 안의 내용물은 그대로 두고 형식의 틀만 바꾼 우상숭배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고전10:20을 보라.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조상제사를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귀신들에게 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적인 사실을 전혀 모르던 우리민족은 조선 500년동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조상제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예수믿는 자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조상제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결국 우리민족의 조상제사장려와 기독교의 우상숭배금지명령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7. 한국교회의 추도예배와 장례예배,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던 차에, 1897년 정동감리교회 이무영이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맞이하여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추도예배를 창안하였다. 그 이유는 부모도 몰라보는 불효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그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핍박을 면해보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추도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결국 1934년에는 감리교에서 추도예식을 아예 예배모범집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구세군과 성결교가 이 의식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장로교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또한 이 의식을 수용하였고, 이제는 모든 교단이 다 예식서에 추도예식과 장례예식을 넣어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귀신을 섬기는 추도식과 장례식이 그만 예배의 형식을 띠고 공식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으로 큰 일이다.
성경을 보라. 과연 죽은 자를 놓고 예배드렸다는 장면이 나오는가? 시체는 부정한 것이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한 자가 되어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사망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며, 시체는 사탄이 즉시 접수하여 자신의 것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시체를 놓고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그런 전례가 성경에 없고, 예수님께서도 한 번도 그것을 허락하신 경우가 없다. 초대교회도 그랬다. 그러므로 육체가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즉시 시체에서 빠져 나간다. 이때 믿고 회개한 자는 생명의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지만, 믿지 않고 회개치 못한 자는 사망의 부활의 몸을 입고 지옥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시체는 그 사람의 껍데기일 뿐 거기에 그 안에 영혼이 들어있지 않다. 한편 아담이 타락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사탄과 귀신들은 지금도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을 안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는 즉시 귀신이 속에 들랄날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시체 앞에 절을 하거나 향을 피우거나, 국화꽃을 바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곧 변형된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절대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려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우상숭배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지가 약 100년이 조금 넘었다. 그래도 3~4대가 예수믿는 집안은 많지 않다. 대부분 1대 내지는 2대가 예수믿는 집안이다. 하지만 2~3대가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 되었는데도 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저주와 징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왜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환난과 사건사고에 불신자들처럼 동일하게 휘말리고 있을까?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같은 우상숭배행위를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개신교단에서는 우상의 제물(음식)을 만들 때, 십자가를 긋고 만들면 해가 없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우상에게 절만 하지 않으면, 우상의 제물을 만들거나 그것을 먹어도 상관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아니다. 다 똑같은 우상숭배행위다(시106:28~29).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불의의 사건사고에서 확실히 벗어나려면 우선적으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같은 우상숭배행위를 그쳐야 한다. 예식서에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화장예배)를 빼내서 버려야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15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결과를 낳는 것과 같다. 그렇다. 출애굽기20:5을 보라. 거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식 3~4대까지 우상숭배죄의 댓가를 묻겠다고 말씀하셨다. 우상숭배는 나 때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죄없는 자손 3~4때까지 해악을 입게 한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라도 혹시 우상숭배행위를 용납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있다면 즉시 그것을 그쳐야 한다. 만약 우상숭배행위를 그치지 않는다면, 믿는 자라도 계속해서 불치병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커다란 환난 가운데 던져질 것이다. 그리 자식들은 갑자기 비명횡사할 것이 뻔하다. 미국의 릭워렌 목사를 보라. 이슬람의 신 알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다가 그의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해서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상숭배행위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는 죽어서 불못 곧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계21:8).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처럼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절대 용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과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죽어서는 지옥의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