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정이철목사,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진짜 그럴까?(요10:25~30)

https://youtu.be/fJjjw6xr8iI

1. "바른 믿음"을 추구한다고 하는 정이철목사는 진리를 수호한다고 하면서,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고 하는 자는 기독교의 복음을 허무는 자라고 주장합니다. 정이철목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리고 성경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않고 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신앙의 표본으로 삼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의 말씀(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느냐고 추궁해야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앙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서 벗어났으니, 거짓복음이요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맞는 주장입니까? 정말 구원은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인가요? 그리고 그렇게 주장게 되면 정말 기독교의 신앙을 허무는 것이 되는 것인가요?

 

2. 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곧 루터처럼 오직 믿을 통한 칭의를 강조하고, 칼빈처럼 만세전개인예정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수호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 그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 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요?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칭의"라는 개념도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눅18:13~14)과 사도바울의 말씀(롬4:14)에 나온 바와 같이 회개가 들어가야 온전한 칭의라고 말해야 옳지 않은 것인가요? 왜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바울의 말씀은 제쳐놓은채, 루터나 칼빈의 주장을 따라가야 기독교의 복음을 수호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인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인가요?
 

3.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를 얻는 것이 믿는 그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는 하나의 서정(여정)이라고 말하면서, 칭의의 시작(창15:6, 롬4:3)과 인침(창17:10~11, 롬4:14)과 완성(창22:12,6~18, 약2:21~25)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 생애에 나타난 칭의의 과정(여정)에 대해 말해보시오.

 

 

4. 아브라함은 맨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해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처음으로 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의 믿음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아내의 말을 듣고 첩 하갈을 들여 자식을 얻었기 때문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13년동안이나 외면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래서 그가 받은 할례에 대해 사도바울은 그것이 죄를 씻어내는 세례와 같다고 해석했습니다(롬2:11~12).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 칭의가 성취되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약2:23).

  그렇습니다. 칭의를 얻는 것도 어느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게되는 이신칭의의 시작지점이 있고, 믿음이 흔들렸을 때에 칭의를 회복하기 위한 회개의 과정 곧 인침의 과정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순종을 통해서 칭의가 완성되는 과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믿는 어느 순간의 시점으로 한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도바울과 야고보장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실제 아브라함의 사례의 경우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가 흔들렸던 것처럼,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얻은 채 있는 구원도 다시 흔들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회개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칭의만을 구원의 핵심요소로 주장하는 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니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이미 얻은 구원을 취소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유인즉 구원은 인간편에서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며 그것을 성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에 대한 성취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정은 불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이 성경에 무수히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러한 성경구절을 읽어보셨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성경구절을 다 읽어보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구원을 믿음으로 얻어버렸으니 완성되었다는 완료형구문은 나오지 않으며(소망으로 구원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롬8:24은 예외), 대부분의 말씀들은  다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미래형구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참된 진리보수신앙이라고 우기면서 완료형의 문장이 있다고 제시합니다. 그러한 대표구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니다. 그 예는 요5:24, 요10:28~29, 엡2:8~9의 말씀들입니다. 그렇다면 한글성경말고 헬라어원문성경에서 이 구절의 원뜻은 어떤 것입니까?


5. 구원의 안정성을 주장하는 성경구절로서 요5:24과 요10:28~29과 엡2:8~9의 말씀은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한 구절도 완료형 구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 현재형 구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에서 오히려 애매하게 번역하거나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특히 요10:29의 말씀은 아예 대놓고 오역해놓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이 보다 더 후반기(11세기이후)에 나옴으로 신빙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헬라어소문자사본을 그대로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먼저 나왔으며 원문에 가까운 대문자사본에는 개역개정한글성경처럼 되어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참된 신앙으로 우기는 자들은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고 아무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는 자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상태에서 예수님에게 보내어주신 자들, 곧 예정된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대문자사본은 그러한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다음 링크를 클릭하시면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https://dongtanms.kr/xe/board_ZOLp66/33288). 누군가가 성경을 번역할 때에 이 본문을 왜곡시켜 번역한 것입니다. 아버지게서 아들에게 보내주심으로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대상은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사람이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주신 것은 "그들(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 단수)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엡2:8~9에 나오는 본문도 현재형구문입니다. 완료형구문이 아닙니다. 다만 보조동사로서 완료형구문이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본동사는 현재 직설법 능동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이렇게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 은혜로 그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채로 [현재] 있으니...(엡2:8)" 그렇습니다. 이 구문은 그들이 그때는 구원을 받은 채로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구문이지, 그것이 완료형구문으로서 절대 변동사항이 없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혹시 옛날 들었던 고정관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도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경에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며 성취된 완료형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의 탈락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수두룩합니다. 내일은 성경에 그러한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2월 8일(목)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정이철목사,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관을 말하고 있는가?(눅23:39~43)

https://youtu.be/DLz6EiWBwe4

 

1. 미국에서 "바른믿음"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정이철목사는 전 총신대교수이자 풀러신학교 교수이신 김세윤교수를 일컬어 "성경을 허무는 이단적 구원론"을 설파하는 자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유보적 칭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단적이라는 것입니다. 김교수님은 칭의가 곧 구원의 완성은 아니며, 종말의 최후심판 때까지 칭의는 유보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을 이단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사랑과 진리교회 담임목사이신 벤자민 오목사님을 대표적인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하였으며, 저에 대해서는 칼빈의 예정론이 교회를 망치는 이단사상이라고 했다고, 믿음 외에 올바른 행위가 구원의 요건이라고 당당하게 설교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섞어서 매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보태서 말하고 있으며 왜곡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칼빈의 사상 중에서 만세전개인예정론이 성경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절대 없음, 있으면 그것은 개인사역예정임). 또한 저는 다만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믿는 이들 중에서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믿음 외에 올바른 행위가 구원의 요건(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성의 한 편 강도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즉 저는 구원의 요건으로 예수님의 말씀하신대로 믿음과 회개로 구원받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이철목사는 제가 회개를 외쳤다고 기독교의 복음을 허무는 자이며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 않은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믿음과 회개로 구원얻는다고 주장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그리고 어떤 신학자가 "회개"를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까?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당연히 회개할 수밖에 없으니, 믿음을 가진 자는 회개해야 하며, 회개할 때에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니, 믿음과 회개가 구원얻는 조건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정이철목사의 주장처럼 성경을 축소해서 말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말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구원얻는다고 했습니까?(막1:14, 마4:17, 요5:24, 10:27~28, 눅24:47, 계2:5,16,21~22, 3:3,19)

 

 

2. 목회자는 팩트를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해서는 아니 되며, 더해거나 왜곡시켜 말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기본 덕목입니다. 아니 인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증거하기를 애써 왔으며,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100퍼센트 그대로 믿고 따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바른 신앙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넘어가도 아니 되며 그것들 중에 어떤 것들을 내 생각의 잣대로 계산하여 빼놓고 말해서도 아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신학사조나 어떤 교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해서는 아니 됩니다. 거기에는 빠진 것도 있고 보태진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리의 기록인 성경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실 훌륭하신 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당시에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기에 그들도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진리만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오직 믿음"이라고(물론 이것만 말한 것은 아니나 후대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자가 많음) 강조한 것은 분명 실수한 것입니다. 루터라도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오히려 믿음"이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세전개인구원예정과 만세전개인멸망예정을 말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오히려 만세전에 예정이 있었음을 말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 없는 것을 보태서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하고,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3. 오늘날에 한국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지만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와 죄악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을 해도, 오순절 성령운동을 해도, 기름부음 사역을 해도, 치유사역을 해도 부패한 냄새는 하늘을 찌를듯 합니다. 그래서 요즘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 자체와 우리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깨끗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진실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온갖 죄를 다 짓고 다니기 때문입니다(문제는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죄를 짓고도 왜 회개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믿고 있기만 하면 괜찮다고 혹시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그래서 구원은 안전하다고, 자신만큼은 꼭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한국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기형적인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까?

 

 

4. 한국교회의 기형적인 신앙의 배후에는 사실 잘못된 구원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바른 진리를 외쳤을 것이라고 믿었던 종교개혁자들마저도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있음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도 있습니다(계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처럼 사도가 아닌 자들은 분별하는 지혜가 부족했던 것 같음), 그리고 차마 목회자들만큼은 거짓을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들의 삐뚫어진 신학사상(그러나 성경은 삐뚤어진 것이 없습니다)이 그만 성도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종교개혁의 중요가르침 즉 "오직 믿음"을 강조하고, 이어서 성경에도 없는 "만세전개인구원예정"을 강조하는 바람에 발생한 심각한 병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는, 오직 믿기만 하면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인 것처럼 가르쳐버렸고,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병폐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관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입니까? 아니면 "만세전개인구원예정"입니까? 아니면 "믿어도 회개함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5. 지금 한국교회는 온전한 믿음도 아니고 온전한 회개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믿음도 온전한 것이 아니며, 회개도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로는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믿음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강조하지 않은 데서 온 것입니다(롬10:22).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중에서 한쪽 측면이 빠저버렸거나 약화된 탓입니다. 다시 말해 공생애 때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잘 하고 있으나(주는 그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16:16), 부활후의 예수님의 대한 신앙고백이 없거나 약화된 것입니다(요20:28).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분은 현재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주님(아도나이)이십니다. 그분은 부활이후 전능자로 복귀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이전에는 창조주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지금도 창조주이십니다). 이것을 잘 모르니 하찮은 귀신과의 싸움에서도 비리비리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참으로 믿고 회개했다면 그는 그때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약 그때 죽는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믿는 즉시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수십년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믿음에 따른 열매들이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쳤어야 하는데, 루터처럼 해 버렸습니다. 야고보의 주장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값싼 구원을 전한 것입니다. 점검하는 열매로서의 믿음의 증거는 뒷전에 놓고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가르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교인의 문제점은 온전한 회개를 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첫째로,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에는 구원탈락의 가능성에 대해서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히브리서기자도, 사도바울도, 사도요한도 그것을 중엄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은 비록 죄를 짓는다고해도 자신이 만세전에 예정되었다면 자신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구원의 초청에 응하여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셨던 것이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영역이므로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없으니 그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것이 전부라고 가르친 것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이 해야 할 기본적인 책임과 응답마저 필요없다고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하나님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닌데(물론 성경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하나님께서 강제로 하게 하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 죄가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냥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회개생활을 지금 어떻습니까? 여기에 문제는 없습니까?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믿고 회개해서 천국갑시다.
2018년 2월 7일(수)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정이철목사,. 그가 외치는 행위구원론의 기준은 과연 합당한가?(마7:19~27)
https://youtu.be/s44uodEP_vU

 

1. 미국에서 "바른 믿음"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정이철목사(자신이 총신출신이라고 밝히고 있음)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현재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파와 가깝다"고 말한 전 총신대 김세윤교수에 대해서 행위구원론자라고 하고,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고신대 박영돈교수를 이단옹호자라고 매도하더니, 지난 1월 10일에는 정병진목사(동탄명성교회)에 대해서 기독교의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구원론자요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그분이 쓴 글을 보았더니, 믿음과 더불어 회개와 성화가 구원을 얻게한다는 주장을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행위구원론이 무엇이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른 구원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단정죄를 하려는 거짓된이단판별사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행위구원론"같은 말로 매도하기를 잘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위구원론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교회사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해보십시오.

 

2. "행위구원론"이란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중세시대를 열기 직전에 펠라기우스(A.D.354~418)라는 사람이 주장한 이단사설입니다.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펠라기우스가 말한 그의 사상을 요약해보면, 그것은 이렇습니다. "첫째, 인간은 본성은 선하며 선하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둘째, 모든 태어나는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셋째, 아담의 범죄는 단지 개인적인 일에 불과하다. 넷째,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에 성령의 역사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비성경적인 주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주장이 왜 비성경적인 주장인지 말해보십시오(시51:3~5, 롬5:12, 요16:7~9, 마12:20).

시51:3-5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요16:7-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마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3. 펠라기우스가 주장했던 거의 대부분은 다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최초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의 내면에 죄성을 가진 채 태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은 모태로부터 자신이 죄가운데 태어났고 그래서 죄를 범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했으며(시51:3~5), 사도바울도 한 사람 곧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했습니다(롬5:12). 그리고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은 필요적인 것임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16:11). 왜냐하면 인간의 상태는 이미 죄로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여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의 상태가 전적으로 무능력하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셔야 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인간이 죄로 오염되기는 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인간이 그것을 반응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향하여 바르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진단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마12:20, 사42:1~3).

마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사42:1-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구원얻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사도들이 증언했던 참되고 바른 구원관은 어떤 것입니까?(막1:15, 마4:17, 눅24:47, 행5:30~31, 20:21)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5. 고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실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회개가 필요하며, 회개하는 자가 비로소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이철목사는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증언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는 정병진목사를 행위구원론자로 매도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가르침이나 만세전개인예정 및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칼빈의 가르침을 제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루터와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루터나 칼빈처럼 위대한 신학자라도 성경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루터나 칼빈같은 신학자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회개가 구원을 위한 행위라고 언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이철목사는 무슨 근거로 회개를 말하면 그것이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그것을 남들을 정죄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기준을 세워놓으면 그것이 진리이고 정통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소용이 없고 자기의 말이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믿음에 따른 열매로서의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비록 그것을 구원의 기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약하면, 행위는 첫째로, 자신이 온전한 믿음을 가진 채 그 믿음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척도(바로미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약2:14,21~26). 둘째로, 구원을 받으면 그것이 상급으로 내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마16:27,계22:12).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장차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사람들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7:19~20).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기준을 "믿음과 회개"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믿음과 회개와 행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마7:21~23, 마6:1~4, 눅18:11~12, 마7:1~5)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렇습니다. 행위(정확히는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행위들)를 구원으로 기준으로 제시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죄성을 자기 내면에 가지고 있고 밖에는 귀신들이 유혹하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구원의 기준의 하나로 넣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첫째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데 그것을 기도와 말씀으로 해결하지 않은채, 행함으로 떼우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7:21~23). 예를 들어 믿음이 부족하고 회개하지 않아도 자기는 빠짐없이 주일성수했고 십일조를 내고 봉사하고 있으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꾸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의를 행하려고(보이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6:1~4, 눅18:11~12). 그리고 셋째로, 행위를 하지 못하는 남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7:1~5).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르게 예수님을 믿었으면, 일생동안, 계속해서, 매일, 죽을 때까지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8년 2월 6일(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정이철목사, 그가 전하는 이신칭의와 우리 주님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된 이신칭의(롬3:19~28)

https://youtu.be/TX8iVIbYBdQ

 

1. 정이철목사는 지난 1월 10일 자신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바른 믿음" 사이트에 정병진목사(동탄명성교회)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거기에 보니, 정병진목사(동탄명성교회)는 강력하게 기독교신앙을 파괴하고 행위구원을 전파하는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매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살펴보았더니, 첫째,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있어서라고 적었는데, 그 내용으로는 믿음과 더불어 회개와 성화가 구원얻게 한다는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이분은 칭의와 구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행위구원론을 전파한다고해서 그렇다고 하였으며(행위구원의 본질적인 규정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독교신앙에 대한 이해 특히 구원론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라고 말했으며(자신의 신학사조와 교리와 다르면 이단옹호자라고 합니다), 넷째, 종교개혁자 칼빈이 잘못되었다고 담대하게 설교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칼빈을 어찌 그렇게 평가하느냐고라는 것입니다(칼빈도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님만 온전한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은 우리 주님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이신칭의가 무엇인지 좀 정리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과연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롬2:13)
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2.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자가 과연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내면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된 본성이 나오고 있고, 밖에서는 죄짓도록 유혹하는 귀신들의 유혹과 공격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절대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취하신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롬3:20~22, 24~26)
롬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4-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 그렇습니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귀신들의 유혹을 받는 사람치고는 율법의 613가지 규정을 다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사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롬6:23)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죄값을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롭다고 칭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의 죄값을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행하신 행위를 믿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칭의인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고 외적인 신분의 변화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고로,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빠지면 절대 칭의를 얻을 수 없는 그것은 무엇입니까?(롬3:24~28, 갈2:16)
롬3:24-2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4. 그리고 사람이 칭의를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면 사람이 인정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눅18:13)과 자신의 지은 죄는 비로소 고백할 때에 예수님의 피로 씻겨질 수 있기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1:9). 그러므로 칭의는 필연적으로 회개를 동반해야 합니다. 사실 온전한 칭의가 되려면 회개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6세 때에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자신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은 많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어서 의를 얻었습니다(창15:6).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를 말을 듣고 인간적인 방법 곧 육체를 따라서 첩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었습니다(창16장).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무려 13년동안이나 그를 떠나셨고, 결국 아브라함은 할례를 통해서 두 번 다시 육체를 따라 살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 다시 믿음과 약속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언약이며, 이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골2:11~12). 곧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회개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에는 믿음이 핵심이지만 반드시 회개가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칭의의 근간은 예수님이지만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피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사람이 칭의를 얻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눅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나옵니다. 그럼, 예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눅18:13~14)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5. 그렇습니다. 우리는 눅18:13에서 세리의 기도를 봅니다. 그런데 헬라원문으로 그 본문을 보면,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이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자기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인인 것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속죄가 필요한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세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합니까? "오직 믿음(축소된 칭의)"을 외친 종교개혁자 루터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루터나 칼빈의 말을 고대로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집니까? 아닙니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전체적인 말씀을 믿고 그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칭의는 사람이 의롭게 되려면 율법의 행위를 다 지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하나님의 속죄를 바라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의 칭의가 믿음에 근거하지만 거기에는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알 수 있습니다.
한편 신약의 야고보 장로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비로소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약2:21). 만약 이 말씀을 루터의 칭의론에 근거해서 본다면 정면 충돌하는 말씀입니다. 행함으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으니까요.(실제로 루터는 야고보서와 유서의 서문에서 "나는 야고보가 내 성경의 진정한 정경의 기자들 가운데 자리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만 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는 사람으로 바울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베드로도 있고 사도요한도 있으며 야고보장로도 있습니다. 이때 야고보장로는 사람이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행함으로, 다시 말해서 순종함으로 그의 믿음의 열매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칭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회개의 과정을 거쳐 순종함으로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칭의는 창세기 15장과 17장과 22장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롬4장과 약2장에서 가르치는 바요, 우리 주님께서 눅18장에서 세리의 기도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려주신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병진목사는 이신칭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의 참된 의미를 성경을 따라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회개가 동반되어야 함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쳐놓고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문구적인 가르침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정이철목사는 정병진목사가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행위구원을 말하여 강력하게 기독교신앙을 부정하는 자라고 언급했습니다. 성경대로 전하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전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신학사조와 교리에 맞지 않다고 판되면 당신과 저와는 신학사조와 교리가 맞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것은 하등의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좁은 신학적인 지식의 잣대를 들이내밀어 그것만이 옳으니, 성경이 전체적으로 말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면 "이단사상전파자"라고 매도해도 되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칭의의 뜻과 칭의의 과정을 가감없이 선포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칭의의 본질을 이야기한 것이 그렇게 잘못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오늘은 조금(?) 이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말세가 되다보니 성경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이상하게 취급하고 오직 한낱 어떤 신학자가 옳게 말했으니 그것을 따르라고 종용하면서 그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이철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칭의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훼손하고 있을 뿐더러(고정관념으로), 자신의 생각의 잣대로 말하는 것도 모자라, 진실을 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와 동탄명성교회를 이단사상전파자로 매도하고 악의적으로 표현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참되게 전하려는 주의 종으로 하여금 피눈물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목회자가 해야 할 도리일까요?

2018년 2월 5일(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참고] 정이철목사의 글
정병진 목사(동탄명성교회)와 고신 박영돈 교수의 칭의론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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