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27) 개인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과연 어느 때에 쏟아지는가?(렘25:15~29)_2023-03-10(금)

https://youtu.be/Mhu-n7NCv0E [또는 https://tv.naver.com/v/34139656]

 

1. 개인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 임하는가?

  개인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 임하는가? 하나님께서 개인과 민족에게 심판하시는 때가 있다. 그때가 진정 오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죄는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에게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가 있으니, 그 때는 바로 그 사람에게 죄가 가득 찼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많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가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형벌받을 죄를 그날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많은 죄를 짓고 살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징계가 임하지 않는 것은 그가 심판받을 만한 죄가 아직 가득 찬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남유다가 제20대 시드기야왕 때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남유다가 르호보암 때부터 시작된 바벨론의 침략으로 결국 20대 시드기야왕(재위 B.C.597~586) 때에 멸망하게 된 것은 그동안 남유다가 지은 죄가 드디어 벌할 만큼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남유다의 14대 왕 므낫세(재위 B.C.697~642) 때에 이미 심판받을 죄의 분량이 거의 가득찼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재위 B.C.715~686)의 신앙과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지 않았고 조금 더 존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유다가 범죄함으로 남유다는 그만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죄가 가득 차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되면, 그 심판은 결코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기 전에 빨리 회개함으로 죄의 분량을 비워야 한다. 

 

3. 개인의 심판은 어떠한가?

  국가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심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개인의 죄는 조상들로부터 지은 죄들의 결과(악한 영들)가 계속 자기 후손에게 내려가다가 어느 때가 되어 죄가 가득차면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아무리 선하게 살고 있어도 그 사람에게 징계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다윗의 경우다.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데려가셨는가? 그렇게 성군이었던 다윗의 자식들이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으로 죽어야 했는가? 그리고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을 하고 정권을 탈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 10명과 더불어 대낮에 동침하는 사건이 발생해야 했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막아주시지 않은 것인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다윗이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핀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지는 때에 관한 말씀을 대입해 보면 답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죽게 된 것은 다윗이 지은 죄의 분량이 그때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적진에서 죽이게 한 살인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야 장군을 죽인 바로 그 죄가 다윗에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심판이 임하는 바로 그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살인죄는 필연적으로 심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그 죄를 짓고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통회 자복하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이지 않고 그 아들을 죽게 한 것이다. 사실 그때 다윗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회개함으로 인하여 잠깐 가득 찬 죄의 분량이 약간 비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사망이 임하지 않고 그의 아들에게 사망이 임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 집안에 흐르는 사망의 저주가 다윗의 아들 대에서는 멈추지 않는다. 셋째 아들 압살롬이 첫째 아들 암논을 죽였고, 아들 솔로몬이 넷째 아들 아도니야를 죽였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의 간음죄도 역시 다윗이 심판을 받을 마지막 순번의 간음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다윗이 회개를 했기 때문에 간음죄로 인한 형벌이 아들 대에 나타나는 것이다. 첫째 아들 암논이 배다른 동생 다말을 범하게 되고, 셋째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왜 남유다의 가장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에게서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가 태어나게 되었는가?

  남유다는 총 20명의 왕들이 있었다. 그중에 13번째 왕은 히스기야왕이었다(재위 B.C.715~686).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남유다의 20명의 왕들 가운데 가장 선한 왕이요 칭찬받는 왕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상들을 제거하고 율법 말씀을 지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위기를 넘겼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재위 B.C.697~642)는 남유다의 20명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종류의 우상을 다 섬겼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몰록신에게 제물로 바쳤고, 자신을 꾸짖는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썰어서 죽였기 때문이다(히11:37). 그런데 생각해 보면 히스기야는 잘못한 일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왕이었는데, 왜 므낫세가 그렇게 악한 죄를 많이 저지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히스기야 이전의 왕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그 집안에는 악한 영들이 가득 들어찬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왕이 그렇게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므낫세에게는 윗대 선조들이 지은 죄로 인해 악한 영들이 엄청 많이 내려온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왕 때에는 문제가 없었다. 예를 들어, 거대 제국 앗수르가 쳐들어왔으나 히스기야의 기도로 인해 그 위기를 넘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므낫세가 12살이 되었을 때에 다시 악한 영들이 내려와 활동을 하므로, 므낫세는 악한 영들에게 속아서 온갖 악행과 우상숭배를 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왕하21:1~11). 다시 말해 히스기야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했던 왕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회개를 통하여 자기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을 비교적 많이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그대로 므낫세에게 내려가서 므낫세가 완전히 악한 영들의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와 그의 어머니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왕21:1, 사62:4)의 기도 덕분에 므낫세가 60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회개를 하여 천국에는 들어가게 된다(대하33:12~13). 

 

5. 오늘날 우리들에게 임하는 저주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고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임하는 저주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집안이 가난하게 살고 있고, 병에 시달리는 자가 많으며, 자녀들의 앞길이 막히고 일찍 죽는 자가 발생하는 것은 다 자기 자신과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수도 없이 내려와 나와 내 가문의 사람들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회개하여 그 악한 영들을 내보냈다고 한다면 자기의 시대에 저주를 받지 않겠지만, 회개하는 자가 없었다면 죄는 쌓이고 쌓여서 나의 시대에 형벌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회개하는 자 없이 믿기만 하는 성도였다면 그 믿음으로 혹시 간신히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을른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의 육신의 삶은 가난하고 병들고 자녀들의 앞길이 막히는 저주를 계속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결코 우리들의 자백없이는 우리 몸에서 떠나가지 않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자기의 대에 이르러 죄값을 치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죄는 반드시 누군가가 죄값을 치르거나 혹은 회개를 통해 악한 영들을 제거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면 나와 내 후손에게 들어가는 악한 영들을 우리는 결코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회개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는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게끔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받아야 할 저주들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023년 03월 1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26)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 70년이 가르쳐주는 영적 교훈(렘25:12~38)_2023-03-09(목)

https://youtu.be/jzwP9e9Ncjo [또는 https://tv.naver.com/v/34139641]

 

1.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에 대한 심판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운명에 대해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고 말씀하셨다(렘25:11). 그때 남유다가 폐허가 됨으로 놀랄 일이 일어날 것이며, 남유다의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기간을 얼마로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망당할 것이며, 일부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뒤에 70년간 바벨론의 왕을 섬기다가, 70년이 마치게 되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긴다고 말씀하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70년이라는 기간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해석을 보면 총 3가지로 나뉜다. 첫째, 70년은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어 황무한 채로 지내는 기간이다. 둘째, 한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기간이다(시90:10). 셋째, 얼마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다. 사실 이 셋은 다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이 황무한 채로 있는 기간으로서 70년을 어떻게 보는가? 학자에 따라 2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바벨론의 1차 침공(B.C.605)에서 바사 왕 고레스의 해방령으로 인한 제1차 포로 귀환(B.C.537년)으로 온다. 그러면 68년 정도의 기간이 된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B.C.586년)에서부터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 건축(B.C.516년)까지의 기간으로 본다. 이것은 딱 70년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바벨론의 왕을 섬긴다는 표현에 따르면, 그 시작점은 B.C.605년의 제1차 포로로부터 시작하여, B.C.597년 2차 포로, 그리고 B.C.586년 3차 포로까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나는 시점을 보면, 제1차 포로 귀환(B.C.537년), 제2차 포로 귀환(B.C.458년), 제3차 포로 귀환(B.C.445)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 연대기의 저자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실제적인 것은 다르다면서, 바벨론의 1차 침공은 B.C.590.10.10에 있었으며, 바벨론의 1차 포로 귀환은 B.C.502.09.24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바벨론 포로 기간은 딱 70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성전 파괴는 B.C.588년에 있었으며, 제2성전 준공은 B.C.517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바벨론의 포로 기간은 69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로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 기간은 약 70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3. 왜 70년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 기간을 70년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그 의도를 살펴보자. 남유다의 포로 기간은 실제적으로 약 70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실제적인 숫자임과 동시에 상징적인 숫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70년은 '7' 곱하기 '10'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7'은 완전수를 가리키며, '10'은 충만한 수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로 70년이라는 숫자를 풀면,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뜻은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죄값을 치르는 완전하고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은 죄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하신 기간으로서, 70년은 남유다 백성들이 필연적으로 죄값을 담당해야 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4. 바벨론 포로 70년이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 70년이 들려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값을 물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민족이 담당해야 할 죄값은 일종의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얼마 정도 되는지는 하나님만이 정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번 어떤 벌을 정하셨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가 없다. 또한 그 죄값을 피해갈 수도 없다. 그 죄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다. 예외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명자로 보내신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다. 반드시 죄값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회개하는 자나 사명이 있는 개인이나 민족은 죄값을 받기는 받지만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심판의 세기와 강도는 조금 낮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심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그 벌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를 많이 하거나 공적을 많이 쌓아 둔 조상들을 둔 경우에는 그 벌의 세기가 약간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훨씬 심판의 강도가 약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그 죄가 가득찬 시점에 살고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가 범죄하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 그 시간과 장소와 사람까지 이미 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 벌의 강도는 회개하는 자가 있다면 놀랍게도 그 벌이 감해지거나 약해지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나와 내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그 진노의 잔이 내게 쏟아지는 중에도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기를 원한다면, 첫째는 자기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선을 쌓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오늘날 우리 개인과 나라의 복과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만세 전부터 예정된(이미 정해진 채 있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가 쌓여서 그 죄를 벌할 때가 되어서 벌을 받는 것이다. 반대로, 지금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2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그 사람을 쓰시기 위해 준비해 두신 그릇이어서 그 사명에 충실하고 있어서일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는 그동안 나와 내 조상들이 후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은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복을 받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을 받아야 할 그릇에 복이 가득 찬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해도 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는 없고 다만 징계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징계(훈련을 위한 댓가 지불)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쌓은 죄에 대한 댓가 지불)이든 상관없이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죽음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그렇다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노는 모든 사람이 다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회개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이라 할지라도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자. 회개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중에서 긍휼을 입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2023년 03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25) 영원한 기업도 영원한 폐허도 실상은 어떠한 의미인가?(렘25:1~11)_2023-03-08(수)

https://youtu.be/pkDGnKkg_Hc [또는 https://tv.naver.com/v/34139609]

 

1. 예레미야서의 12가지 단편 예언들 가운데 12번째 예언은 어떤 예언인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12가지 단편 예언들 가운데 12번째로 나오는 예언은 예레미야 25장(렘25:1~38)으로서, 유다의 멸망과 베벨론을 포함한 이방의 열방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우리는 이 예언을 통해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뒤에 얼마 동안 벌을 받게 될 것인지를 확인할 수가 있는데, 남유다는 바벨론에 끌려가 무려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보게 된다. 

 

2. 예레미야는 12번째 예언을 언제 들었는가?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70년 동안 바벨론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을 언제 들었는가? 그 때는 남유다 제18대 여호야김왕 제4년이었다. 이때는 역사적으로 볼 때 B.C.605년으로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등극하던 해였다 이 예언이 있고 난 후 정말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B.C.602년에 2차 침공이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다니엘을 비롯한 남유다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B.C.697년 여호야긴왕이 등극하던 해에 다시 바벨론의 3차 침공이 있었고 이때 역시 에스겔 선지자를 비롯하여 여호야긴왕 등이 2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B.C.588년 남유다 20대 시드기야왕 때에 4차 침공이 있었고, B.C.586년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간다. 죄를 저지른 남유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예고없이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 남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왜냐하면 그때라도 전 국민이 회개하여 돌이킨다면 남유다에 대한 징계를 약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남유다를 그들의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시겠다고 하셨는데도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시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주리라고 약속한 영원한 기업이었다(창17:8). 하지만 그 땅을 차지한 지 820년 만에(B.C.1406~586) 이스라엘은 그 땅을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렇다면 그 땅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렘25:5). 우리는 여기서 '영원하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하다'는 의미가 영원 무궁토록 지속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원하다는 말의 뜻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라야 그 기간이 계속해서 연장된다는 뜻이다. 거꾸로 만약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게 된다면 그 기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 그들을 촉구하신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당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운 선지자인데, 그가 남유다 요시야왕 13년에 세움을 받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으니, 여호야김 4년이 되는 해는 벌써 2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려면 2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는 처음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요 또 하나는 만약 그것을 어겼다면 즉시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언약으로서(출19:5~6, 23:2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언약이다(렘25:3~8).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영원히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호야김 4년이 되던 해의 남유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당시 남유다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의 숫자는 유다의 성읍 수만큼 많았으며, 성전 안에서도 동방 태양에게 경배하는 이들이 있었고, 곤충을 섬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역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시면서 그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뽑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멸망 후 남유다는 영원한 폐허가 남아 있었는가?

  이윽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약속의 땅이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남유다 백성을 뽑아 바벨론으로 옮겨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렘25:9). 그렇게 행함으로 그들을 모든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할 것이며, 그 땅을 영원한 폐허로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렘25:9). 그렇다면 B.C.605년 이후 예루살렘은 영원한 폐허로 남아 있었는가?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70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무궁토록 그래서 지속적으로 그 땅을 폐허로 있게 하시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70년 동안 죄값을 치르게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도 '영원한'이라는 의미는 '영원무궁히 지속되는 시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값을 치르는 기간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기업'도 '영원한 폐허'도 사실은 영원무궁토록 지속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날은 어떠한가? 사실 남유다 백성이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게 된 것은 그들이 지은 죄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 이후에는 약간 달라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심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는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계2:11). 그렇다 하더라도 믿는 자가 예수님을 부인한다거나, 혹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영적인 간음 곧 우상(돈, 명예, 인기, 쾌락 등등)숭배를 계속 저지른다면 그는 자신이 이미 얻어 놓은 영원한 구원일지라도 그가 죽을 때에 반납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온갖 저주를 다 담당하셨을지라도, 우리가 진정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육신은 그 죄값을 죽는 날까지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어도 과거의 죄를 낱낱이 회개해 본 일이 없는 자는 물질에 허덕이게 되고, 질병에 시달리며, 자녀들의 형통함이 막히고, 일찍 죽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이다(출23:25~26).

 

5.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혹은 '영원히'의 기간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이라는 시간 개념은 사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원'이라는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의 성도들은 한 번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영원무궁토록 그분이 계시겠다고 했으니 자신은 구원에서 절대 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성령받으면 절대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실제로 새 예루살렘 성밖으로 쫓겨나거나 지옥에 던져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한 번 구원을 영원히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원히(영원토록)'라는 말은 '그 시대까지(그 세대까지)'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헬라어로 보면, '에이스 톤 아이오나'이다. 이 말은 영어로 "for the generation(for the period, for the age)"이라는 뜻으로서, "그 시대까지, 그 세대까지, 그 기간까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영원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 시기까지" 그 땅을 주시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다면 그 다음 시대에는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영원히 폐허로 남아 있게 하시겠다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이 지은 죄값을 받게 되면 그 땅을 다시 맞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계속해서 머무르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 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그 언약을 어겼다면 즉시 회개하여 그 언약이 파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로 육신이 연약한 우리들은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주실 약속의 땅 곧 천국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2023년 03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24) 끝났다고 해서 다 끝난 것으로 알 것인가?(렘24:1~10)_2023-03-07(화)

https://youtu.be/W46-N0DXnlQ [또는 https://tv.naver.com/v/34139594]

 

1. 남유다의 여호야긴왕이 바벨론 왕에게 포로로 잡혀간 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 주신 환상은 무엇인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고냐(여호야긴)와 유다의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어떤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의 두 광주리' 환상이었다(렘24:1). 그런데 한 광주리 안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들어 있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가과 들어 있었다. 여기서 무화과가 성전 앞에 놓였다는 것은 이것들이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진 무화과라는 것을 말해 준다.

 

2. 하나님의 성전 앞에 드려진 무화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 두 광주리 환상을 보여 주면서, 이 무화과의 두 광주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레미야에게 설명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두 광주리 안에 들어 있는 그 무화과들은 남유다의 백성의 두 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를 가리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말씀하셨던 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싹을 내는 것'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무화과는 처음 익은 듯한 것이었다. 고로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께 첫 열매로 드려진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윽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좋은 무화과를 가리키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쁜 무화과를 가리키는지를 알려 주셨다. 일반적으로 '나쁜 무화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의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고, '좋은 무화과'는 붙잡혀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남유다의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로서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정반대로 말씀하셨다. '좋은 무화과'는 오히려 '갈대아인의 땅에 붙들려 간 자들'이라는 것이다(렘24:5~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에서 잘 돌봐주셨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들이셔서 그들을 세우고는 헐지 않으실 것이며, 심고는 뽑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렘24:5~6). 그래서 그들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될 때에, 그들은 자신에게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전심으로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나쁜 무화과'가 누군지도 말씀해 주셨다.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들과 바벨론의 침략을 피해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렘24:8). 왜 그러한가? 하나님께서 진정 버린 자는 그때 붙잡혀 간 유다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남겨진 유다 백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남겨진 유다 백성들은 장차 여러 나라들 가운데 흩트려뜨림을 받아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사는 곳에서 수치와 웃음거리와 저주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치시되,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끝장날 때까지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렘24:9~10). 

 

4. 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를 반대로 말씀하신 것인가?

  사실 여호야긴왕 때 바벨론에 붙들려 간 자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이야기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에 끌려간 자들이야말로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달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며, 그곳에서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거기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렘29:5~6). 그러면 그들은 심판 중일지라도 살아남게 될 것이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는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죄지은 자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은 자기와 자기 선조들이 지은 죄를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값을 치르겠다는 자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심판 중일지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그들은 바벨론에게 끌려갔으나 거기에서 죽지 않고 번성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회복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좋은 무화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리고 그중에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애굽으로 떠나간 자들이 있었다. 주님은 이들을 '나쁜 무화과'라고 하셨다. 그들은 자신의 죄값을 자신이 치르지 않겠다고 대항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무화과는 반드시 버리실 것이고 땅에서 뽑아 버리시고 파괴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이들은 거듭난 자들로서 가나안 땅인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도 계속해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남유다의 경우와 같게 하실 것이다. 즉 그들의 죄악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그 죄가 차는 순간 그 땅에서 뽑아 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들도 역시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진 첫 열매들에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결국 썩은 무화과로 분리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천국에서 뽑혀져 성밖으로 내던져지게 될 것이다. 

 

5. 오늘날 죄를 지은 자라도 그 벌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 예수믿는 자들은 참으로 복된 시기에 태어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남유다가 멸망당할 때만 해도 그들은 자기와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자기들이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예수께서 오셔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처리해 주셨기에, 예수믿는 지금의 성도들은 객관적으로는 그 죄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믿는 자들이 그 죄값을 전혀 치르지 않고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믿는 자들이라도 가난에 허덕이며, 병들고, 자녀들의 앞길이 막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값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를 무시함으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데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벧후3:9). 곧 예수믿는 자라도 누구든지 회개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실제적으로 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 벌은 육체적으로는 가난과 질병과 저주가 임하는 것이요, 영적으로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회개한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벌을 우리도 실제적으로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가져다 주는 귀신들이 떠나가기 때문이요, 행위책의 죄의 기록이 사라져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고로 열심히 회개하자. 회개가 진정 우리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벌을 면제시켜 주는 가장 귀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2023년 03월 07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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