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은 대부분 자신이 칭의인이라고 믿고 있다. 자신은 회개했으니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또 남들도 그렇게 자신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만희는 자신이 보혜사요 이긴 자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불러주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보혜사이며 이긴 자인가? 오늘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점검해보자.


1. 들어가며

  이 세상에 주님이라 칭함을 받는 존재는 몇이나 될까? 딱 2가지 경우뿐이다.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으며, 또 하나는 사람 중에서 그렇게 불렀다. 특히 사람의 경우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종이 주인더러 그렇게 불렀으며, 또 하나는 신하가 왕을 그렇게 불렀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것은 어떠한가?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주님이라고 우리가 칭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2.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공통적인 공식명칭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에 대한 공식명칭인 주님에 대해 알아보자.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대부분 "주님"이라고 칭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에서는 '아도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신약의 예수님에 대한 공식명칭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불렀던 공식적인 명칭은 3가지였다. 그것은 선생님, 주님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나 "주님"이라고 불렀고(요13:13~14),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일반백성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마20장의 두 소경이 그렇게 불렀고(마20:30), 마15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렇게 불렀으며(마15:22), 백성들이 이제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님더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21:9).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통적인 명칭이 "주님"인 셈이다.


3. 예수께서 정말 주님으로 인정받을 때는 언제였는가?

  그럼, 제자들이나 일반백성들이 예수님더러 "주님"이라고 불렀고,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주님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누군가 자기에게 이러이러하게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정작 자기자신의 호칭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검증해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존재가 아닌데도 남들이 그렇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 이만희가 자기더러 "보혜사" 혹은 "이긴 자"라고 부르라고 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만을 두고 우리 예수님도 주님이 맞구나하고 단정해서는 아니 된다. 검증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롬1장을 통해 복음의 핵심인 예수께서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성경구절을 접하게 된다(롬1:2~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1:4). 그렇다면, 부활하기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가? 아니었다. 그때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눅1:35). 그렇지만 부활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칭의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회개했다고 해서 내 죄가 정말 완전히 씻겨져 없어진 것인가?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인가?  어떤 이는 응당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인정해주어야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확신을 가져도 그날에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면 어떡할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 이들 중에는 주님께 그렇게 인정받는 그 어떠한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응당 자신은 칭의인이니, 응당 자신은 죄사함을 받았다느니, 응당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응당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느니 말한다. 아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예수님도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죄된 본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필요성이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들여다보라. 예수님은 날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말이다. 새벽부터 혼자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루의 일정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12사도들을 뽑을 때에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리고 겟세마네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의 공생애 사역을 마친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그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느냐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행하셨다(히5:7~8).

  뿐만 아니라 공생애 당시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신 분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만물이 복종하고 있었고, 영물인 귀신들도 복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만물의 "주님"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350가지 이상의 예언이 당신자신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메시야)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렇다면,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기 전에는 주님이 아니었고 그리스도가 아니었는가? 아니었다. 그때도 그분은 주님이었고, 그리스도이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도 당신이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으셔야 했다. 드디어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칭하셨다. 그렇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의 칭의인이 되는 것, 죄사함을 받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도 칭의인이 불릴 수 있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죽은 다음에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우리는 긴장의 끝을 놓칠 수가 없다. 그때까서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인정해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이라 인정을 받으셨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2).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얻는 데에 필요한 고백 중의 하나인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신앙고백의 하나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그렇다.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은 검증되어야 한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을 주님으로 믿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예수님이 당신의 주님이라는 것에 대해 인정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선포하심이 어떤 음성으로라도 들린다면, 인정을 받아보았다거나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떤 음성으로 들려오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평가하는 그날에 확증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갔을 때에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해주셔야 한다.


4.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인정하고 살았음을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가 죽어 부활체를 입는 그날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그것은 결코 입술로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 성경은 크게 2가지로 그것을 말씀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정말 우리 인생의 주인인 삶을 살고 있는가로 판정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삶의 주님으로 믿고 사는 자는 자신의 인생의 방향의 열쇠를 주님께 의뢰하고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출 수 있는 자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동장치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성질대로 행하고만다. 이런 자는 구원의 노정 안에는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 아닌 자임을 말해준다. 이제부터라도 날마다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여서 주님이 주인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정했다는 것은 어떻게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까? 사실 인생을 정의하면 시간과 물질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 그리고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내가 쓰는 시간과 내가 쓰는 물질의 용도를 잘 살펴보면, 내 인생의 키가 주님께 있는지 나 자신에게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 중에 하루를 주님께 드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의 키는 주님에 있지 않고 지금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내 소득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릴 수 없다면, 그도 자신의 인생의 키가 자기에게 있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결국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닌 삶을 살고 있다는 알아차려야 한다. 당신의 시간과 물질을 지금 체크해보라.

  두번째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의 의미는 예수님이 내 영혼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사람의 육체는 아담의 타락이후 이미 사탄마귀에게 주어진 바 그 상태에 있다(창3:14). 범죄후 뱀에게 흙을 먹고 살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흙이란 아담의 육체의 재료였기 때문이다(창2:7). 그래서 사실 인간의 육체는 사탄마귀와 귀신의 소유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즉시 그 시체를 귀신이 접수한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 속에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는 영혼이 있을 때에는 귀신이라도 함부로 육체를 건드릴 수 없다. 요일3:8에 의하면,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귀신들이 육체를 건드릴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죄된 본성이 들어있는 우리의 육체는 내 소유가 아니라 마귀의 소유인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세상 임금의 소유인 것이다.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롬7:18)"는 바울의 탄식은 괜한 탄식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육신이 좋아하는 삶에 나를 내주고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비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마귀의 소유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비록 죄된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육체에게 자기 자신을 내주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육체란 본래 쳐복종시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내 육체는 내 영혼에 유익한 것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육체를 쳐 복종시킬 수 있는 자가 되어야 주님이 주인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영혼을 천국에 데려갈 수 있는 분 곧 예수님을 위해 내 자신의 육체를 내어드릴 수 있을 때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내 영혼으로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일에 내 육체를 사용하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인정하는 자의 삶이다.


5. 나오며

  당신은 지금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생의 주인인가?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주인인 삶을 살고 있는가? 만약 그렇게 살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의 시간과 물질을 주님을 위해 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일에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죄된 본성을 쳐 복종시키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입술로만 주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할 뿐, 사실은 주님이 자신의 주인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자다.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자는 결국 육체의 주인인 마귀가 있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 날에 우리 영혼의 주인되신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내 시간과 물질의 우선순위에 주님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을 위한 삶에 내 육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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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박사들, 그들은 유대나라의 왕이 태어났는데 왜 그 머나먼 위험한 길을 달려왔을까? 먼저는 별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별이 가르쳐준 정보만으로는 메시야를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자연계시나 은사를 가지고서 메시야인 구원자를 만나려고 한다. 과연 그렇게해서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까? 결론은 그럴 수 없다이며,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왜 그런가? 오늘 말씀을 보라.


1. 들어가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못하고 진리에 이르지도 못한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그렇게 정해놓은 것 때문일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비정한 분으로서 인간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오늘은 메시야를 경배하러 나섰던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과연 메시야를 만나볼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자.


2. 동방박사들은 누구며 왜 유대땅으로 오게 된 것일까?

  오늘 본문 말씀은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먼나먼 길을 따라 유대나라까지 와서 아기예수를 찾아 경배하고 돌아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자기나라의 왕이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동방박사들은 아기예수를 경배하로 온 것인가? 또한 하루 이틀 걸리는 길이 아니라 수천리 머나먼 길이지 아니한가? 그리고 당시 동방의 박사들이 굳이 유대왕의 탄생을 축하해주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더욱이 장기간의 걸친 위험한 여행 때문에 잘못하면 처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는 아기가 태어난 곳을 직접 찾아낼 수도 없는데 어떻게 예물까지 준비하여 그곳으로 간 것인가? 만약 우리들이 동방박사들의 경우였다면 그 위험하고도 머나먼 길을 다녀올 수 있을까?

  먼저, 동방박사들의 정체부터 살펴보자. 동방박사들은 동쪽에서 온 마고스들이다. 오늘날의 의사가 아니다. 이들은 별을 가지고 국가와 개인의 길흉을 점치는 전문 천문학자들이요 왕궁자문위원들이다. 당시 동방에서는 약 500년간 융성했던 대제국이 있었다. 이름하여 파르티아제국(B.C.246~A.D.224)이 그것이다. 이 제국은 주전250년경에 생겨났다가 주후250년경에 사라진 제국으로서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왕국이다. 이들은 고대 이란을 다스렸던 페르시아제국의 후예들로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온 것이다. 그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위험한 길을 찾아 떠난 것인가?


3. 동방박사들이 메시야를 경배할 수 있었던 2가지 이유

  첫째,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되어서 탄생하신 메시야를 만나뵙고 경배할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자. 요약해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예수를 찾아가서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은 2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별의 도움을 받은 것 때문이요, 또 하나는 기록되어있는 구약성경의 도움을 받은 것 때문이다. 먼저 그들은 별의 도움을 받았다. 그 별에 따라, 그들은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칠 인물이 탄생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포로민이었다가 자유민이 되었던 유대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유대나라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파르티아 천문학자들은 자기들이 발견했던 그 별이 혹 유대인의 왕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메시야를 만나뵙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들은 800km나 되는 먼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정보만으로 그들은 메시야를 만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위대한 인물의 탄생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분이 어디에서 태어날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정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서로 예루살렘까지 갔고 그리하여 왕궁에까지 들어갔다. 그때 70살이 된 헤롯대왕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자가 탄생했다는 소리에 그만 흥분하였다. 하지만 속내를 감추고 우선 산헤드린공회를 모아서 구약성경을 찾아보게 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즉각적으로 그 장소가 어딘지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헤롯대왕은 동방박사들을 그곳에 보내면서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예수님을 만나 그에게 경배할 수 있었다. 결국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발견하고 그분께 경배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기록된 성경의 도움 때문이었던 것이다.


4. 오늘날에는 과연 누가 구원자를 만나 경배드릴 수가 있을까?

  둘째,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누가 과연 메시야 곧 구원자를 만나서 경배드릴 수가 있을까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도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자연계시나 초자연계시의 도움을 받는 것이고, 이어서 나머지 하나는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 곧 자연적인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나라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동방박사들이 그 정도의 정보만을 헤롯대왕에게 제공했을 때, 헤롯대왕은 태어난 왕을 죽이기 위해, 사람들을 베들레헴에 보내 2살 아래의 어린아기를 다 죽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연계시나 은사와 같은 초자연적인 계시는 메시야가 누군지에 대한 대략적인 도움만 줄 뿐이다. 그것이 온전히 주님을 발견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정확한 것은 기록된 성경말씀인 것이다. 성경말씀이 아닌 것들 이를테면, 어떤 음성이나 보여지는 환상, 치유나 능력과 같은 성령의 은사들은 하나님의 존재나 영적 실체에 대해 조금은 정보를 주지만, 예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록된 성경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렇다. 성경이 완전한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계시와 은사에 목숨을 걸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자연계시는 사탄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고, 초자연적인 계시는 사탄마귀와 귀신들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서 무엇을 들었다느니, 보았다느니 하는 것들은 거의가 귀신들이 장난치는 것들임을 알라. 은사는 은사인 것이지 그것이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찾아봐야 한다. 말씀이 정확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말씀 하지만 정작 말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자들이 있기도 하다. 마치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메시야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미5:2). 그래서 헤롯대왕에 대한 질문에도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과연 누가 베들레헴까지 가 보았는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해서 가지 않았는가? 아니다. 아니면 가는 길이 자기들의 목숨을 담보할 만한 위험성이 있어서였는가? 아니다. 단지 그곳은 성인 걸음으로 2시간(8km)이면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렇다.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어떤 소식을 들어도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만으로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메시야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얻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더 주님을 만나보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찾게도 해주시고 문을 열어주시기도 하신다(마7:7~8). 주님은 간절히 찾는 자에게 발견되어지기 때문이다(잠8:17).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메시야에 관한 성경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지 않았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단 한 사람도 메시야를 만나볼 수가 없었다.


5. 나오며

  그렇다면, 목숨을 무릎쓰고 믿음으로 메시야경배 여정길에 올랐던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길을 가다가 죽었는가? 위험한 상황을 만나 고국으로 못 돌아갔는가?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정확하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고 결국에는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인류 최초로 창조주이자 하나님이며 메시야였던 예수님을 경배한 첫번째 장본인이 될 수 있었다. 주님을 만나는 데에는 별과 같은 자연계시의 도움이나 은사들과 같은 초자연적인 계시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도움만으로 우리는 메시야를 만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계시들을 통해 뭔가를 깨달았다면 즉시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 불신자들에게는 그 별은 다름 아니라 인터넷망이나 휴대폰일 것이다. 이들도 조금만 노력을 하게 되면,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들어오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널린 것이 인터넷정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직접 노력하는 수고가 없다면 찾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연계시나 초자연적인 계시로 인하여 뭔가를 깨달았다면 즉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진짜 메시야를 만날 수 있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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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둘 다 맞는 것이다. 육체를 입으셨을 때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인자)이셨다. 하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그분은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셨다. 물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기 전에도 하나님으로 계셨다.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인성의 신분과 신성의 신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예수님에게는 이 땅에서 주어진 신분이 있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있었다. 예수께서 비록 짧은 33년반의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목적을 그대로 성취하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에 운명하셨다. 그것은 곧 인류의 죄값을 대속하는 일이었다(마20:28).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셨기에 약속대로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요11:25~26).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제자들도 대하는 자세가 사뭇 달라졌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나 형님같게 생각하고 따랐지만, 이제는 그분을 그렇게 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부분이 그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 내지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요20:28). 그분의 위엄이 달라졌음을 직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들 앞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소부재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지 약 65년이 지난 시점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신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 그분이 진정 어떤 분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의 출생과 우리들의 출생은 같은가 다른가?

  예수님은 우리의 출생과 다른 점이 있다. 그분도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우리와 좀 다른 출생을 하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될 때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면서 우리는 창조되는 것이다. 물론 그때 어머니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중에서 창조의 역사를 통해 나를 빚으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기는 하셨지만, 그분은 그때 처음으로 창조되신 분이 아니다. 단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그곳에 잉태되신 것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래 한 분이셨던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사9:6).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다(요1:14).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작은 마리아의 태중이 아닌 것이다. 그분의 시작은 영원 전이시다(미5:2). 그분의 잉태되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것이다. 그리고 10달만에 우리들처럼 출생의 과정을 거치셨다. 


3. 예수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그리고 출생하신 예수님은 30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받들어 섬기고 일찍 돌아가신 요셉의 뒤를 이어 가장으로서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셨다. 하지만 제사장으로 쓰임받을 나이에 이르자, 그분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던 바로 그 이유를 성실히 수행하시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인류의 대속제물로서 피흘려서 죽는 것이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을 없으며(히9:22), 인간의 죄값은 곧 사망이었기 때문이다(롬6:23).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4:24), 피흘릴 수도 없고 죽으실 수도 없기 때문이다(딤전6:16). 더불어 인류의 죄값을 대속할만한 흠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고 죄를 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몸을 취하셨고, 결국에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자신을 내주어 피흘려 죽으셨다. 그렇다.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오직 죄지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인류를 위한 속죄사역을 마치고 지금은 천국에 올라가 계신다. 그렇다면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은 현재 대체 어떤 분으로 계시는 것일까? 천상에서 예수님이 누군지 이제 A.D.95년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4.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인성을 취하셨던 예수님의 신분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이미 원래의 존재로 돌아가신지 벌써 65년정도 지난 시점에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과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있다먼저, 인성을 취하신 적이 있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사실 33년반의 인생을 통해 경험하신 속성을 가지고 승천하셨다. 그래서 천상에 계신 예수님이라도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경험하신 것이 고스란히 그의 성분으로 남아 있으시다. 그러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음을 맛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대신하는 용어로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5:6,12,7:10,14,14:1)"이 등장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직접 자신을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7)"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정말 한때 죽음을 경험하셨다. 하지만 그때이후로 세세토록 살아계신다. 그분이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사실 그분의 신성한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죽음을 경험한 존재로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는 그분은 인성을 취하신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 죽으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아니 그것은 인류를 위한 영원한 간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인성의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자손(계22:16)"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한편 신성으로서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계5:5,22:16)"이기도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의 창조주로서 다윗을 만드신 장본인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성을 취하셨던 예수님은 인자(사람의 아들)같은 이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계1:13, 3:18). 하지만 단어만 "인자같은 이"라고 표현되어 있을 뿐, 그분에 대한 묘사는 전부 신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계1:13~15). 그렇다. 그분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고, 그의 머리와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았고 눈송이 같았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으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계1:13~15).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단7장에서 다니엘이 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거의 똑같다(단7:9). 그렇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인자처럼 나타내 보이셨다. 또한 자신이 죽은 적이 있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그분은 원래부터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출3:14~15).


5.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신성하신 예수님의 신분

  이제는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예수님의 신성한 신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는 좀전에 말씀드렸지만 첫째, 그분의 모습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그분이 곧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분은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며, 시작과 나중이라고 하셨다(계1:17, 2:8, 22:13).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자기선언과 똑같다.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사41:4, 44:6, 48:12).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주 하나님께서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21:6). 고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시다(계1:17).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다른 군데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라고 나온다(계4:10, 10:6).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계신 분이시다(계7:17, 19:11).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하늘에 단 한 개의 보좌만 있는데, 거기에 어린 양이 앉아계신다(계7:17, 19:11). 한편 구약시대에 여러 선지자들도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았던 보좌에는 다 여호와께서 좌정해 계셨다(사6:1~6).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거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보좌에는 하나님이 앉아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계19:4, 4:2,9, 5:1,7,134, 6:16,7:10,15,21:5). 다시 말해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 곧 어린양이신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계22:1~3에 의하면, 그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단수)라고 결론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분이시다(계11:15).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부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계11:7, 19:6). 고로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여섯째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불리신다(계17:14, 19:16).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으며(계15:3), 딤전6:15에서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기록하고 있다(딤전6:15).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슥14:9). 그렇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로, 예수님은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계5:12). 그런데 또한 이러한 찬송과 영광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주 하나님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증거한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다(계4:11, 5:13). 마지막으로 여덟째, 예수님은 장차 구름타고 오실 이 곧 재림하실 분이시다(계22:7, 20, 1:7).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장차 재림하실 분은 주 하나님이라고도 증거한다(계1:8). 다시 말해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특별히 구약성경 중에서 슥14장을 읽어보면, 장차 재림하실 분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고 기록하고 있다(슥14:3~4,5). 구약에 나타났던 여호와께서 육체를 입고 아들로 오셨던 것이다. 이 외에도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묘사들이 많이 있다.


6. 나오며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들을 종합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인성을 취하셨던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단 3가지정도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엄청 많다는 것이다. 사실 신성하신 예수님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대부분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분이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이스라엘백성에게 계시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아들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언급하셨지만, 사람의 아들(인자)라는 표현을 즐겨사용하셨다. 당신이 사람이 되어오신 이유를 우리더러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육체를 입고 오셔서 대속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그분은 이제 하나님으로서 모습을 갖추시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만세전부터 존재하셨던 한 분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원래부터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직접 눈으로 뵈올 수 있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그분이 보좌에 앉아계시면 빛으로 둘러쌓여 있는 그분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2개 혹은 3개가 아니다. 단 한 개의 보좌뿐이며, 그 보좌에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앉아계신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들도 육체의 장막을 벗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천국에서 직접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눈으로 뵈올 수 있는 분은 누구실까?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기도 하다. 그분이 하나님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이야말로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시며, 전능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어오신 하나님을 찬양드린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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