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저마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중에서도 우리가 가져야할 중요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특히 사람이 죽음 앞에서 설 때에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그것을 줄이고 줄이면 3가지다. 오늘은 죽음 앞에 선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중요관심사 세 가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죽음 앞에 선 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하는 일인가?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 후에 자신을 위해 처리해야 할 뒷 일인가?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까? 취미생활인가 아니면 은퇴후 노후보장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인가? 아니면 학생이나 청년들처럼 공부 잘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자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뭔가 한가지 일을 하는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할 인생의 최대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두 강도가 나눈 대화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사로서 살다간 사람들도 더러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극우정당단체인 열심당(열혈당)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입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쟁취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사람이 성경에 나온다.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 좌우에 매달린 두 명의 강도도 있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에 둘 사이에 나눈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문장의 주인공이 예수님에게서 두 명의 강도로 바뀌게 때문이다(눅23:39~43). 그런데 같은 일에 종사하다가 죽음을 눈앞에 둔 두 사람의 대화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 과연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그리고 그 대화의 핵심주제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3. 두 강도의 신분과 직업

  먼저,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보자.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은 행악자였다(눅23:39). 악을 행하되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강도였다(마27:38, 막15:27). 그런데 단순 강도가 아닌 것 같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강도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이 두 강도는 헬라어로 '레스테스'라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로마통치에 대항하여 싸우는 열심당원(열혈당원, 젤롯인)으로서, 이들은 예수님 을 대신하여 풀려났던 바라바와 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에 대항하여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붙잡혀 지금 사형장에 와 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때 누구나 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지는 않는다. 십자가형이 아주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인지라 십자가형은 본보기로 죽일 때에만 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로마에 대항하면 이렇게 죽이겠다고 본보기로 보여주는 사형방법이 바로 십자가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본다면, 이 두 명의 행악자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하다가 붙잡힌 자들로서 아마도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4. 같은 직업을 가졌던 두 강도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말하다.

  이제 두번째로 살펴볼 것은 이 두 명의 강도가 처형장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표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에 대한 것이었다. 먼저 예수님을 조롱했던 한 편 강도(왼편강도라고 치자)부터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죽음이 매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단지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했을 뿐인데,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은 매우 억울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행하신 사람의 구원방식에 대해서는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라면 자기를 구원해보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죄수들인 자기들도 구원해보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을 결코 메시야로 믿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던 방식으로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의 강도(오른편의 강도라고 치자)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기자신의 죽음은 자기가 지은 죄에 따른 당연한 처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던 자라도, 방화를 하고 약탈을 저지르고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엄연한 재산손괴와 인명살상의 죄에 해당하니, 제8계명(도둑질하지 말라)과 6계명(살인하지 말라)을 어긴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 두 강도는 분명 유대인이었다. 그러니 이 둘은 율법과 십계명에 대해 잘 아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른편 강도는 자신이 약탈을 저지르고 살인을 저지른 것은 범법행위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받는 십자가형의 처벌은 마땅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하다. 왼편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지만 오른편 강도는 달랐다. 자기는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사형당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사형당할 아무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단정하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독립투쟁을 하면서도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쭉 지켜보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구원방식이 자기들이 행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은 매우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또한 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진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예수께서 전파하신 말씀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어떠한 죄인이라도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회개하기만 하면 하늘에 준비된 왕국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순간에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믿음을 겸손히 고백했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 것이다. "예수님, 당신의 왕국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좀 기억해주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진리라고 믿고 있었으며, 천국이 있음을 믿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날 오후에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5. 오른편 강도는 어떻게 되어서 죽음의 현장에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까?

  셋째, 그렇다면 오른편 강도는 어떻게 이러한 진리들을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중요관심사가 바로 죄문제의 해결과 예수님과 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열혈당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항상 지은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지, 예수님이라는 분이 대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말한 천국이 대체 어떤 곳인지이었다. 그렇다. 그가 비록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틈나는 대로 예수님이 누군지, 무엇을 전파하는 분인지를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단체가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민족과 백성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오른편 강도는 어떻게 투쟁해 왔는가? 자기들은 살인과 약탈과 방화 등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하셨다. 더욱이 자기들은 분노와 파괴를 통해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 했지만, 예수께서는 사랑과 용서로서 사람을 구원하려 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씨름하는 밤이 많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쭉 지켜본 결과 자신의 일평생 과제였던 나라의 독립투쟁에 있어서 자기의 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눈을 감는 시점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바르게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을 표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무슨 직업을 갖고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요관심사가 죄문제의 해결과 예수님과 천국이 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죽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왼편의 강도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기에 메시야요 구원자이신 분을 옆에 두고도 구원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6. 나오며

  성도들이여,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붙들게 되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어떤 직업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관심사가 죄용서와 예수님과 천국이어야 한다. 그래야 죽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당신도 이런 은혜를 입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이 지은 죄를 토설하고 자신이 죄인됨을 시인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그 메시야이시며, 나의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내 육체만을 위해 일하지 말고, 다음 세상에 들어갈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시간을 투자하기를 바란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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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인가 회개인가? 기본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못 들어갈 성도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회개치 못해서 천국에 못 들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회개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약에 나오는 두 세리의 회개를 통해서 이것을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신구약성경에는 회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등장한다. 그중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대표자는 욥과 다윗이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대표자는 베드로(눅5:1~11), 탕자(눅15:11~24), 세리(눅18:9~14), 세리장 삭개오(눅19:1~10) 그리고 한 편 강도(눅23:32~43)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총 7명의 회개자들을 통해서, 회개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회개해야 하며 또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이들 중에는 두 명의 세리도 들어 있다. 이들은 온전히 죄인취급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세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세리이며(눅18:9~14), 뒤의 세리는 당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로서 실제 있는 이야기였다(눅19:1~10). 오늘은 이 두 명의 세리의 회개를 통해 회개가 무엇이며, 이들은 무엇을 회개했으며, 어떻게 회개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회개란 무엇인가?

  먼저, 두 명의 세리를 통해서 회개란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눅18장에 나오는 세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가운데 나오는 자다(눅18:9~14).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다. 즉 회개란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잠깐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성전에서 따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죄를 속죄해 달라고 고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이제는 눅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삭개오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회개란 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오직 돈(물질)을 위해 달려왔다.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로서 취급했고, 죄인 남자(눅19:7, 원문)라고 불렀다. 여기서 사람들이 그를 죄인 남자라고 칭한 것은 그는 당시 사회로부터 확실히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죄인 남자라 칭하는 한 부류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죄인 여자라 칭하는 한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세리들과 창녀였다(마21:31~32). 그런데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 남자라 칭하는 부류의 제일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리가 되었고 이어서 세리장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산더미처럼 가졌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고 외로웠으며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죄인이라도 기꺼이 맞아주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을 만나보고자 결심한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된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시더니 자기 이름을 부르시면서 자기집에 유하러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내려온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그리고는 회개했다. 이전까지 살아왔던 그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자신을 사람으로 맞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을 움켜쥐는 인생을 놓았다. 그리고 돈을 나눠주는 인생으로 살기로 결정해버렸다. 그랬다. 그는 자신이 그처럼 생명처럼 여겼던 돈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속여서 강탈한 것이 있다면 4배나 갚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까지는 인색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후한 사람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전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율법말씀에 불순종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곧 그는 유턴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 회개란 가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에 더 이상 그 길로 쭉 가지 않고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돈을 위해서 살고, 쾌락과 명예를 위해 살았던 자가 유턴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돈을 나눠주며 그것으로 구제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3.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둘째로, 두 명의 세리들이 과연 무엇을 회개했는가를 살펴보자. 앞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했다. 뒤의 세리는 자신이 돈만을 최고로 추구하던 삶을 회개했다. 그렇다. 사람이 회개하는 데에는 딱 3가지 것을 회개한다. 하나는 낱낱의 범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자신의 죄성을 회개한다. 살아보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눅5장에서 고기잡이의 기적을 체험한 후에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당신은 나로부터 떠나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죄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여(눅5:8)"라고 말했다. 당시 죄인 남자는 세리밖에 없었는데 베드로는 자신이 구제불능의 죄인인 것을 그때 시인한 것이다. 주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제자로 삼으실까? 그리고 어떤 자를 곁에 두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철저히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의 세리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했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회개하는 한다. 이것을 적극적인 회개라고 한다. 이런 자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고 난 뒤 죄성을 회개한 자가 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이제부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 이전에 행하던 범죄행위를 따르지 않고 주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그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번째 회개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적극적인 회개를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세리장 삭개오였다. 그는 마음을 돌이킨 후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회개했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회개의 내용은 구제하는 것이저 배상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칭했다. 그렇다. 우리도 회개한 자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회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자는 처음부터 다시 회개를 시작해야 한다.


4.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이제 셋째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앞에 나오는 눅18장의 세리는 마음을 찢어가며 회개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자의 바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심정이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도 없었기에 그는 성전 뒤편에서 멀찍이 떨어져 기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바른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를 하는 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가? 그런 모습은 회개자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나도 이렇게 회개했으니 이제 복을 달라고 하는 자도 바람직한 회개의 모습이 아니다. 회개한 후라도 주님이 어떠한 처우를 내린다고 해도 달게 받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렇게 부족하고 잘못된 존재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오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회개가 바로 탕자의 회개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의 세리 곧 눅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자면, 그는 인천세관의 세무서장이나 부산세관의 세무서장에 해당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신 그는 차마 앉아있지도 못했다. 종처럼 서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눅19:8을 보라. 그는 종처럼 서서 예수님께 시중들고 있다. 종의 신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바른 모습이다. 그는 꼭 종처럼 예수님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가 여리고의 세리장의 직책까지 올라갔으니 아마 나이도 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 앞에 종처럼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인 것이다.


5. 나오며

  자, 이제는 우리를 돌아볼 차례다. 과연 우리는 회개하고 있는 사람인가? 자신이 정말 못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시인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세리장 삭개오처럼 잘못 가고 있던 삶에서 유턴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자인가? 만약 우리에게서 이러한 회개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천국에서 멀리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자는 결코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으며, 주님께서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아니 그러다가 영원히 주님곁을 떠나 살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낮은 자세로 주님 앞에 지은 죄를 자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죄성을 가진 자를 시인하고 눈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추구하던 삶에서 유턴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이 조금이라도 열리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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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사탄을 왜 '루시퍼'라고 칭하는 걸까?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보좌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하다가 하늘에서 추방되었다고 알려진 것일까? 대체 성경 어디에 이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실제 이러한 일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말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천사장 루시엘의 타락과 그 원인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오늘부터는 이사야강해 중 열방의 심판에 관한 부분을 좀 살펴볼 것이다. 그중에서 메시야의 재림과 관련하여 악의 세력의 상징인 사탄의 타락과 심판에 대해 바벨론왕에 대한 심판에 견주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사야 24~27장의 말씀은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여호와의 재림에 관한 예정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를 보면, 악의 무리들에 대한 심판과 성도들의 보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악의 무리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그것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있고, 이들을 추종하고 따르는 세상의 악한 왕들이 있으며, 그 밑에서 살고 있는 악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이 셋을 다 심판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에서는 악의 무리들의 원류인 사탄과 그의 졸개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

사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렇다. 여호와께서 오시는 그날에는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과 바다에 있는 용(탄닌)을 반드시 멸하실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뱀 리워야단과 용(탄닌) 즉 두 마리의 특별한 피조물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용(탄닌)은 뱀들의 우두머리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뱀인 리워야단은 사탄을 따라 타락한 천사들 중에서 계급이 높은 어떤 천사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의 용은 당연히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다(계12:9). 혹시 이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면, 뱀 리워야단은 육지의 임금을 상징하고, 용은 바다의 왕을 상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리워야단과 용은 사탄에 대한 두가지 묘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육지와 바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며, 예수께서도 그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표현하셨기 때문이다(요12:31).


2. 이사야14장과 에스겔 28장의 위치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이 악의 무리의 원형이 된 것일까? 원래 그들은 어떤 존재로 지어졌을까? 그들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수종들기 위해서 창조된 하나님의 천사들이었다(시103:20~22). 하지만 그들 중의 일부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말았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악의 무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일어났던 천사들의 타락의 과정이 성경에 고스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딱 두 군데에서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타락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이다. 그중 이사야 14장에서는 바벨론왕에 대한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할 때에 나오고, 에스겔 28장에서는 두로왕에 대한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할 때에 나온다. 만약 리워야단과 용이 육지와 바다를 지배하는 이 세상 임금 사탄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면, 바벨론왕과 두로왕도 이와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즉 바벨론왕은 육지의 임금인 셈이고, 두로왕은 바다의 임금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임금은 육지와 바다를 지배하는 이 곧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임금인 것이다. 


3. 바벨론과 바벨론왕의 역사와 멸망

  그렇다면, 이사야서에서는 사탄의 타락의 원인과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일까? 우선 알 것은 하나님께서 사14장을 쓰게 하실 때에는 사탄의 타락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쓰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벨론왕의 타락의 그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마 바벨론왕의 타락의 원인과 결과가 사탄마귀의 타락의 원인과 결과를 그대로 쏙 빼닮은 것이기에, 바벨론왕의 타락의 과정을 사탄마귀의 타락을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바벨론과 바벨론왕. 이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이며,  이 나라의 왕은 대체 어떤 왕인가? 결론적으로 이 나라와 이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나라이자 그 왕을 지칭한다. 좀 더 살펴보면, 이 나라와 왕은 사탄의 나라와 t사탄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당시 바벨론(신바빌로니아)이라는 나라는 약 86년간 융성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남유다를 멸망시킨 왕이 바로 바벨론의 제2대왕 느부갓네살(재위B.C.605~562)이었다. 이 나라는 소국이었다가 느부갓네살 왕의 아버지였던 나보폴랏사르(재위 B.C.625~605)에 의해 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위치는 곳은 갈대아 우르 지역이었고, 이 제국은 제7대 벨사살왕(재위B.C.550~539)을 끝으로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제국이 얼마나 강포가 심했는가 하면, 주변의 모든 나라와 왕들이 바벨론과 바벨론왕의 잔인성에 그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가 쳐들어간 나라는 초토화 되어버렸다. 그리고 죽임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지역에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는 포로민들에게 어떤 종교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보자. 남유다의 마지막왕이었던 시드기야(재위B.C.597~586)는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식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고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두 눈마저 뽑혀야 했다. 그리고서 바벨론으로 노예처럼 끌려가서 살아야 했다.

  또한 이 나라가 사탄을 닮았다는 것은 이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범하는 과정 속에도 나온다. 그것은 이 나라가 전 세계를 제패하기 전까지는 결코 자신이 가진 이리의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음에 작은 나라였던 바벨론은 남유다의 히스기야왕(재위 B.C.729~687) 때에는 평화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평화의 나라인 척 했다. 하지만 속내는 다른 나라를 정탐하고자 함이었으니, 돌아와서는 남유다의 성전의 화려함과 보물을 빼앗기 위해 칼을 갈았던 것이다. 결국 남유다는 바벨론의 제2대왕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3차례의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살아남은 자는 전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4. 바벨론과 바벨론왕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 13~14장

  그런데 이사야 13~14장은 이러한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그 이후에 대해 말해준다. 먼저 사14:3~8을 보면, 바벨론의 압제에서 놓여난 사람들이 바벨론이 어찌 망할 수 있느냐면서 놀라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변나라들의 노래와 환호성이 들린다. 심지어 향나무와 백향목도 이제는 벌목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리고 사14:9~15에서는 일찍이 잔인한 바벨론왕에 의해 죽임당해 음부에 들어간 열국의 왕들이 바벨론왕을 맞이하면서 그를 놀리는 말들이 나온다. 그때 주변국의 왕들은 그가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땅에 쳐박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음부 구덩이의 맨 밑에 빠지게 될 것인지를 노래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바로 이 부분이 옛날 루시퍼의 타락과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루시퍼의 타락 원인은 13~14절에 나오며, 그 결과는 12절과 15절에 나온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전을 보면서 살펴보자.

사14:12-15 새벽의 아들 계명성(금성)아, 네가 어떻게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쳐부수는 자야, 너는 땅에서 절단되었다. 13 그리고 너는 네 마음 속에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별들보다 위로 나의 보좌를 높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북쪽 끝 부분들 중에 집회의 산에 앉을 것이다. 14 내가 구름의 높은 곳들 위에 올라갈 것이다. 내가 가장 높은 자와 같게 될 것이다. 15 그러나 너는 음부로, 구덩이의 가장 깊은 곳들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침(새벽)의 아들 계명성(금성, 샛별, 새벽별)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왕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왕의 타락의 원인과 그 결과는 놀랍도록 하나님의 천사장이었던 루시퍼의 경우와 일치하고 있다. 바벨론왕은 교만했다. 또한 루시퍼도 그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좀 더 다루어 보기로 하자.


5.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왜 사람들은 '루시퍼'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우선 여기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은 오늘날까지 기독교계에서 왜 새벽의 아들 '계명성'을 '루시퍼(Lucifer)'로 호칭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보면, '새벽의 아들 계명성'은 '헬렐 벤 솨하르(O morning star, son of the dawn)'로 나와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계명성'은 '헬렐'이란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이 '헬렐'이라는 단어는 '빛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헬렐"이 '루시퍼'라는 단어가 된 것일까? 어떤 사람은 가장 완벽히 보존된 KJV성경이 '계명성'을 '루시퍼'로 번역하고 있다고 하면서, KJV성경을 가장 영감있는 성경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KJV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국왕이 편찬한 성경으로서 1,611년에 나온 영어성경본이다(나중에 공부하면 알겠지만, KJV성경은 보다 뒤에 나오는 후대소문자 헬라어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성경이다). 그런데 원래 성경은 영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였고, 신약은 헬라어로 쓰였다. 그러므로 KJV가 가장 영감있는 성경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특히 KJV성경은 후대에 나온 소문자사본을 가지고 번역했기에 원본에 가깝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KJV성경번역자는 어떻게 되어서 '계명성'을 '루시퍼(Lucifer)'로 번역한 것일까? 그것은 KJV성경본역자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A.D.405년에 중세교부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성경(Vulgata, Vulgate)으로부터 가져왔기 때문이다. 제롬이 헬라어로 된구약성경(70인역)을 라틴어성경으로 번역할 때, '루시퍼'라는 라틴어 단어를 '헬렐' 대신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제롬은 어디에서 '루시퍼'라는 단어를 가져온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지만 제롬이 어디서 그 단어를 가져왔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 전에 나와있는 그 어떤 성경에도 '루시퍼'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롬이 최초로 불가타역에 사용한 단어가 '루시퍼'인 것이다. 그럼, 제롬은 무엇을 보고 라틴어성경을 편한 것일까? 그것은 구약성경은 LXX(70인역)(헬라어 구약성경, 주전3세기경)를 참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LXX(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헬렐'은 어떤 단어로 번역했을까? 그것은 "헤오스포로스(혹은 에오스포로스)"다. 이 단어는 '새벽'을 뜻하는 '헤오스'와 '~에서 비롯한, ~을 가져오는'이라는 '포로스'가 합쳐진 단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빛을 가져오는, 빛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뜻으로 "헤오스포로스(샛별, 새벽별, 계명성)"라는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랬다. '루시퍼'라는 단어는 A.D.405년에 편찬되어 나온 라틴어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였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헬렐"이라는 단어나, 헬라어로 "헤오스포로스"라는 단어 그리고 라틴어로 "루시퍼"라는 단어가 다 뜻이 같다는 점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지금까지 천국과 지옥에서 사탄을 지칭하는 공식 명칭이 '루시퍼'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생각해보았는가? 천국에 올라갔을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지 말이다. 천국에 다녀온 분들에 의하면, 그들은 전부 한국어를 사용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인 성도는 천국에서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그들은 영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 미국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들이 말하는 말은 다 한국어로 바뀌어서 들린다고 한다. 그들도 이내 우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 천국은 언어가 달라도 서로 소통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각기 자기나라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알아듣는 곳이 천국이다.


5. 사탄마귀의 이름을 '루시퍼'라고 불러도 되는 이유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의 호칭에 대해 한 가지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사탄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든지 그 이름을 오늘날 '루시퍼'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천국백성 중 그 누구도 '루시퍼'를 다른 존재로 착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다 통역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시퍼'라는 말이 라틴어성경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사탄의 호칭이 될 수 있느냐고 묻지 말라. 천국의 언어는 각국 나라의 말로 말이라고 해도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라틴어에서 '루시퍼'라는 호칭이 나왔다손치더라도 이것이 사탄마귀를 호칭하는 데에는 아무 무리가 없는 것이다. 뜻은 다 같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을 거꾸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제롬이 헬라어 '헤오스포로스'를 번역할 때, 하나님이 주신 영감에 따라 라틴어 중에서 '루시퍼'라는 단어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루시퍼는 사탄마귀의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바로 교만의 왕관을 쓴 바벨론으로 빗대어진 타락한 천사장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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