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예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말구유에 뉘여 있었다. 예수께서는 따뜻한 방 한 켠이 아니라 동물들의 우리인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조금은 안 돼 보이는 갓난아기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좀 괜찮은 부모였으면, 아무리 방구하기가 힘든 베들레헴이었다고 하지만  마굿간 한 켠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에 천사가 일러 준 말에 의하면, 그 아기가 표적이라고 한다. 그 갓난아기는 기적 중의 기적인데, 온 인류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아기라는 것이다.  


2. 왜 갓난아기가 인류구원을 위한 표적이 되는 것인가?

  대체 평범해보이는 이 갓난아기의 출생이 어떻게 되어서 인류 구원을 위한 확실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첫째, 갓난아기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기 때문이다(눅2:11). 천사는 그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태어나셨다고 알려주었다(눅2:11). 다시 말해 인류를 구원할 자가 그날 태어났음을 천사가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달려가서 확인해 본 것은 어느 신혼부부가 낳은 맏아들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평범해 보이는 이 아기가 왜 표적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어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바로 구원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구원자는 오직 이스라엘의 왕이시자 홀로 한 분이시며 처음과 마지막이신 만군의 여호와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사43:11, 44:6). 고로 그 아이는 본성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태어난 것이다. 그랬다. 이 아기는 어느 신혼부부의 맏아들에 불과한 아기가 아니었다. 이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이 아이는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아기였기 때문이다(사7:14).

  둘째, 이 갓난아기가 바로 그렇게 많이 예언되어왔던 메시야이기 때문이다(눅2:11). 사실 이 갓난아기는 우연히 태어나서 메시야가 된 것이 아니다. 이미 수천년동안 예언되어왔던 바로 그 메시야로서 태어났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고 아무나 주장하지 못하도록 무려 4천년동안 350가지 이상의 예언들을 말씀해주셨다. 메시야는 이러이러한 자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이자, 유다지파의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처녀가 낳을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는 베들레헴이 될 것이다. 등등. 그런데 정말 4천년이 지난 어느날 이런 메시야의 모든 조건을 갖춘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 자라서 메시야가 걸어가야 할 길을 고스란히 그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메시야로서 감당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 감당했던 것이다. 그렇다. 처녀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우연히 태어난 단순한 아기가 아니라 구약시대 무려 4천년동안 350가지 이상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였던 것이다.

  셋째, 이 갓난아기가 바로 구약시대에 여호와로 나타났던 바로 그 주님(아도나이)이시기 때문이다(눅2:11). 천사 일러준 세번째의 사실은 그 갓난아기는 사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으로 나타났던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주님(아도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구유에 누워있는 그 아기가 바로 그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갓난아기는 구약시대에 주님이라고 불렸던 여호와께서 오신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예수께서 이제 공생애를 거의 마칠 무렵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때에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한다.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요12:12~13)"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구약의 노래를 부른 것일까? 그때 그들이 불렀던 메시야찬송은 시편 118:25~26이었다. 여기에 보면, "지금 구원하소서(호산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되어있다. 그랬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호와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갓난아기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분은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던 바로 그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일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죄로부터 건지려면 흠없는 속죄양이 있어야 하고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흠없는 속죄양이 대신 피흘려 죽어야 한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한 이후 인간들은 죄된 본성아래 있기 때문에 아무도 흠없는 속죄양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흠없는 사람으로 피흘려 죽으시고자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영이시다(요4:24). 그래서 피흘릴 수 없고 죽으실 수도 없다. 그런데 인간이 지은 죄값은 사망이요(롬6:23),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흘려 대신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히9:22).


3. 나오며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단순한 갓난아기가 아니었다. 어느 신혼부부의 첫아들로 끝내버릴 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했고 예언했던 모든 것을 성취할 메시야가 태어난 것이요, 그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메시야로서 오기 위해 그날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날에 감사드려야 한다. 이날에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지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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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성령의 은사자가 가진 성령의 은사를 나도 가질 수가 있을까? 특히 은사자의 임파테이션을 통해 그 은사를 나에게로 전이시킬 수가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분들은 중요한 대부분의 시간을 그 일에 바친다. 과연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일이 되는 것일까? 성령의 은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일까? 오늘은 성령의 전이, 은사의 전이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한국교회는 지금 중한 병에 들어 있다. 첫째는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구원론병에 들어 있고, 둘째는 귀신이 하는 일인데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가짜성령운동병이 들었으며, 마지막으로 환난전휴거설이나 베리칩과 같은 가짜종말론병에 들어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구원론과 성령론과 종말론에 병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가짜 구원론에 빠져 있으며, 자신이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짜 성령론에 빠져 있고, 자신이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에는 가짜 종말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것들 중에서 두번째에 해당하는 가짜 성령운동의 하나인 성령의 전이, 은사의 전이, 능력의 전이 곧 임파테이션이 과연 성경적인지,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2. 임파테이션이란 무엇인가?

  '임파테이션'이란 내가 가진 성령의 은사를 안수와 같은 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넘겨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능력이 약한 자는 이것을 통해 능력이 강해지고, 예언의 은사가 약한 자는 예언의 은사가 강해지며, 치유은사가 약했던 자는 치유능력을 강하게 받게 된다고 믿는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전이라는 것이 가능한 사역인가? 내게 있는 강한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도 넘겨줄 수가 있는 것인가? 성령의 은사쪽에서 일하는 부분은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현재 체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것이 가짜라면 어찌 이 많은 사람들이 임파테이션을 받으러 오겠느냐면서 자신있게 말한다. 정말로 자신이 받은 은사를 남에게도 넘겨줄 수가 있는 것일까?


3. 성령의 전이, 은사의 전이는 과연 성경적인가?

  우선 성령의 전이 혹은 은사의 전이가 성경적인지부터 살펴보자. 성령을 받지 못하는 자에게 성령받은 자가 안수하면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은사를 받은 이가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가 있는가? 성경에 보면, 안수를 통해 성령 혹은 성령의 은사를 전이해주는 듯한 본문이 두 번 나오기는 한다. 하나는 사마리아교회의 사역에서 나오고(행8:17~18), 또 하나는 에베소교회 사역에서 나온다(행19:6). 하지만 이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면 왠만한 사람은 다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중의 하나의 예로 사마리아교회의 경우를 보자. 사마리아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예루살렘교회의 안수집사였던 빌립이 나가서 개척한 교회다. 빌립집사는 처음부터 그성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표적도 행하고 귀신도 축사하고 중풍병자나 못걷는 사람도 낫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을 주님께로 잘 인도했고 그들에게 물세례까지 주었다.

  그때였다.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두 명의 사도들을 사마리아로 파송한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오는데, 가서보니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리신 일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두 사도가 안수했을 때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말 사마리아성도는 성령도 받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물세례만 받은 성도들이었다는 말인가? 고전12:3에 의하면,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말 성령이 빠진 믿음과 물세례만 받은 사람들이었을까? 하지만 성경은 이 일이 있고난 후의 사건이 기록됨으로써, 그때 사마리아성도들이 사도들로부터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지를 가르쳐준다. 결론은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 사마리아 동네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그가 베드로를 찾아가서 자기도 누구든지 안수할 때에 성령을 받게 해 줄 수 있는 권세를 넘겨달라고 돈을 주며 부탁을 한다. 그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는가?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사마리아성도들이 두 사도의 안수를 통해 받게 된 것은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선물 곧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성도들이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두 사도가 가서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확증은 헬라어원문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 등장하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관사가 붙어있는 성령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는 성령은 사실, 성령 자체라기보다는 성령의 어떤 것 즉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썼던 먼저의 복음 곧 누가복음 11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말했던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성령'도 사실은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믿는 자가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하나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어떤 것 즉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주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고로 행8장에서 사마리아성도들이 받았다는 성령도 겉으로 표현된 문구만 보게 되면, 성령하나님 같아보이지만, 헬라어원문에는 성령의 은사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4. 임파테이션은 누가 행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이슈는 성령이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두 사도가 안수함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령이나 성령의 은사를 나눠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령받은 사도들은 사마리아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들의 안수가 그들이 가진 성령의 은사를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나눠주는 방법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한 성령께서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나눠주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고전12:11). 다시 말해 누구에게 성령의 은사를 줄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성령이시자 은사자가 아니라 성령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을 당사자에게 어떤 성령의 은사를 줄 것인지는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것이지 결코 은사자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인위적으로 나눠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임파테이션을 통해 내가 가진 은사를 상대방에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5. 오늘날의 임파테이션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자가 자신의 은사를 넘겨주어 다른 사람에게서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귀신들이 서로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성령의 은사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은사를 남에게 넘겨줄 권한이 없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은사자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분에게 안수를 통해 임파테이션을 해주어 이제는 그가 치유사역을 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진짜 임파테이션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귀신들끼지 서로 짜고치는 고스톱을 한 것이다. 즉 전이를 해 주는 은사자가 좀 더 큰 권세를 지닌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서 좀 더 작은 역량의 귀신을 잠잠케 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정말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치유를 받았다고 하면 그 다음주에는오지 말아야 하는데, 얼마 있다가 또 와서 안수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럴 때에는 그때에만 병에서 나은 것처럼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진짜 치유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진짜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도 실은 귀신들이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6. 진짜 치유과 축사는 언제 완전히 가능한가?

  그럼, 어떻게 해야 진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누구든지 진실로 자신의 죄를 철저히 자복하고 회개할 때다. 그러면 귀신도 저절로 떠나간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므로 귀신들의 통제를 받게 되지만, 죄를 회개하여 씻어내버리면 더이상 귀신들이 사람 몸 속에 붙어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렬한 회개가 없는 치유집회는 잠시동안 병에서 나을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못가서 도로 그 병에 시달리게 되고 만다. 아니면 다른 병으로 옮아간다. 그리고 임파테이션을 받아서 자신에게도 치유의 은사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얼마 못가서 다시 은사자에게 가서 임파테이션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은사자를 통해 귀신의 능력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그래도 귀신이 힘이 약해지니까 다시 가서 귀신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속지 말라. 다, 귀신들도 짜고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이상 귀신의 장난이나 놀음에 놀아나지 말라. 그냥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라. 그것이 살 길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귀신들은 힘을 잃게 되고 나중에는 떠나게 된다. 그러면 두 번 다시 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정말 귀신축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를 원한다면, 은사자에게 가서 임파테이션을 받으려 하지 말로, 진실로 다른 성도에게 회개를 가르쳐 상대방으로 하여금 회개를 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귀신은 떠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7. 은사자가  받는 유혹들

  문제는 은사능력사역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내가 하려고 할 때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마는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더 큰 능력을 얻어서 나타내 보이려고 더 큰 은사자를 쫓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버렸는지 깨닫게 될 것읻. 그리고 얼마나 돈을 허비하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런 일은 그만 하자.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받지 않아도 그것이 참된 신앙생활을 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


8. 성령의 임파테이션을 하는 자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2가지

  사실 성령의 전이나 은사의 전이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거기에서는 통회자복하는 회개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렇게 많이 임파테이션을 받아보아도 인격(성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절대 귀신이 해 줄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대부분의 임파테이션 사역에 귀신들이 관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귀신들의 역사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어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만 귀신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알고 일평생을 쫓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 성령의 전이, 성령의 기름부음사역을 한다는 분들을 마구잡이로 쫓아다니지 말라. 거의 대부분이 귀신들이 성령과 함께 같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이 나가는 것도 귀신이 실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가는 것처럼 흉내내고 잠잠해지게 하는 것 뿐이다. 조금 있으면 또다시 그 귀신이 역사하여 이전과 똑같아질 뿐이다. 그러한 시간과 돈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섬기는 교회로 나가서 회개기도를 하라. 그러면 더 이상 귀신이 자기의 몸 속에서 역사를 할 수가 없게 될 것이요 더 빨리 온전케 될 것이다.


9. 성령께서 하시는 4가지 일들과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

  그렇다면, 이제는 나에게서 성령이 역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고 성령이 기뻐하는 일을 나도 행하면 된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첫째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성령께서 회개시키는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요16:8).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주신다는 것이다(요15:26). 셋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것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이다(요14:26). 그리고 넷째는 나의 인격(성품)을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네번째의 성품의 열매들은 갈5장에 보면 잘 나온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복음전파를 위해 은사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5가지 경우 중에 앞의 4가지는 성령만이 하실 수가 있는 경우다. 그렇지만 마지막 다섯번째 은사의 경우는 귀신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능력이나 은사는 귀신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령사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의 4가지 사역을 중점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섯번째의 은사사역은 자신이 나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대로 실행하면 된다. 그러나 은사들을 추구하거나 이것을 얻기 위해 쉽게 뛰어들지 말라. 귀신에게 압도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귀신도 이런 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잊지 말라. 귀신은 절대 사람의 회개를 돕지 아니한다는 것과, 귀신은 절대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해주지 않으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지도 아니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귀신들도 은사를 통해서는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10. 나오며

  그러므로 은사를 사용하는 자는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은사를 사용하는 자는 적어도 회개생활을 철저히 하여 정결한 사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말씀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간중간마다 치고 들어오는 귀신의 역사를 분별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귀신은 지금도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지 않게만 막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한다. 심지어 능력까지도 준다. 명예와 인기와 권세까지도 그냥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 회개를 하는 것과 같은 성령의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라. 귀신의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은사자를 통해 은사사역을 하다보면, 잘못하다가는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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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는 이사야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있다. 그것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것을 말씀하시는 이가 주 하나님이요, 보좌에 앉으신 이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이사야서에서 창조주요 구원자로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신가를 집중조명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신구약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진술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이사야서에 나온다(사9:6). 더불어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진술도 이사야서에서 나온다. 그렇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과 메시야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진술을 담고 있는 책이다. 더욱이 그 분량에 있어서 이사야서를 따라올 다른 성경책이 없다그렇다면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부활후 승천하신 예수님의 자기선언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구약의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장차 보내주실 것이라고 4천년동안 약속한 메시야이신 예수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를 찾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곧 예수님의 자기선언과 같기 때문이다. 동시에 구약시대의 여호와의 자기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께서 신약시대에 어떻게 오셨으며 그리고 사역을 마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후에 자기선언을 하시는데 그것이 얼마나 여호와의 자기선언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인지 세 분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컬어 "나는...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이사야서를 통해서 구약성경 가운데 이사야서에서만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는...이다"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선언은 누가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라고 증거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약의 예수께서도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하는 것과 차이가 나는 것과 같다. 사실 타인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일컬어 "당신은...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곧 그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이나 믿음을 고백한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는...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자기선언으로서 절대 변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기선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이사야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선언

  그렇다면 이사야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은 무엇일까? 우선 간단히 정리하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여호와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창조주다.", "나는 구원자다." 그런데 구약성경 중에서 이사야서에서만 등장하는 독특한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있다. 그것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선언이다(사41:4, 44:6, 48:12).


4.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에만 나오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이라는 하나님의 자기선언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자기선언이 똑같이 신약성경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도 그러한 선언을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분 혹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기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일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의미심장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의도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선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사용하셨던 표현으로서, 이사야 선지자만이 사용했던 독특한 하나님의 자기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이 표현을 자기에게 사용하셨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아들의 월권행위가 된다. 과연 예수께서 사용하신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22:13)"라는 자기선언은 신성모독인가 아니면 정당한 자기선언인가? 이제는 예수께서 언제 어디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왜 예수께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5. 예수님의 자기선언의 두 방면

  먼저, 예수님의 자기선언에는 2가지 방면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자. 그것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공생애를 사실 때 하셨던 자기선언과 부활승천하신 후에 하셨던 자기선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살아계셨을 때에도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활승천후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도 행하신 자기선언도 성경에 나온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육체를 입고 계실 때의 예수님의 자기선언이 7가지인데, 부활승천후 하늘에 계실 때의 자기선언도 7가지라는 사실이다. 앞의 자기선언은 요한복음서에 등장하고 있으며, 뒤의 자기선언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다.


6. 이 땅에 계셨을 때의 예수님의 자기선언 7가지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나는...이다"라고 7번이나 말씀하셨으며, 부활승천후 하늘에서도 "나는...이다"라고 7번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말씀하신 "나는...이다"라는 자기선언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있을 때 자신이 누구라고 7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둘째,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셋째,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9). 넷째,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4), 다섯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여섯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일곱째, "나는 참포도나무다"(요15:1)" 그런데 이와같은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사도요한에게 쓰게 한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에 보면, 부활승천하신 후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도 자기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선언하신 것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살펴보면 알겠지만,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곧 하나님의 자기선언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 자기선언은 곧 예수님의 자기선언이신 것이다.


7. 천상에 오르신 예수님의 자기선언 7가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선언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부활승천후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자기선언도 딱 7가지가 나온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선언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자기선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그분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계1:8). 혹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1:17)" 혹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계21:6).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자기선언을 누가  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계1:8에 나오는 자기선언은 주 하나님이 하셨고, 계1:17에서는 예수님이 하셨으며, 계21:6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하셨고, 계22:13은 예수님이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를 "하나님"이라고도 하고(계19:4), "어린양"이라고도 한다(계7:17). 그렇다.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사야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하나님 자기선언이었던 것 곧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이라고 하는 선언을 자기에게 적용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보좌에 계신 이가 예수님 자신이시며, 그분이 곧 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지만 그분은 원래부터 계신 한 분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이것까지 깨닫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그동안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나눠놓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심지어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은 손대지 말라고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아니다. 사도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1:3)"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는 신약의 결론의 책이요, 신구약의 결론의 책이요, 온 우주의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오, 할렐루야!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께서 바로 전능자이신 한 분 하나님이요, 신약에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 예수께도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을 뿐 그분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분은 사람으로 낮추어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에 한사코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혹은 사람의 아들(인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자기선언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둘째로 그분은 "나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계1:8)"이며, 셋째로, 그분은 "나는 전능한 자(계1:8)"이시다. 그리고, 넷째로 그분은 "나는 살아있는 자(계1:18)"이며, 다섯째로, 그분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계2:23)"이다. 그리고 여섯째로, 그분은 "나는 다윗의 뿌리와 자손이며(계22:16)", 마지막 일곱째로, 그분은 "나는 광명한 새벽별(빛나는 아침의 별)(계22:16)"이시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과 신약의 증언에 의하면 장차 재림하실 분은 분명 예수님이시다(살전3:13, 살전5:23, 계22:12, 계22:20). 그렇지만 요한계시록과 구약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장차 오실 분은 주 하나님이요 여호와이시다(계1:8, 4:8,).


8. 천상에 계신 예수님의 자기선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

  그렇다.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그분이 바로 전능자였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시다. 그리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에 모든 비밀을 말해주는 눌라운 성경구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9:6의 말씀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경이로운 보혜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9. 나오며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사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자기선언 곧 여호와께서 "나는 여호와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는 창주주요, 나는 구원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주 이 시간에는 신약성경에서 구원자는 분명히 예수님이신데, 왜 구약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구원자라고 하셨는지와 예수께서 과연 창조주이신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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