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인생을 성공하기 위한 지침서로서 주신 것일까? 아니면 또 무엇인가? 이제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그것을 편지에 써서 보낸다. 그리고 그가 디모데를 어떻게 지도했는지를 성경지도방법까지도 써보낸다. 그것은 결국에 디모데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과 성경지도방법을 한 번 제대로 배워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1. 들어가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본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성경으로 전하는 설교를 들으며, 시간을 내서 성경공부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 왜 그런가? 어디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구원을 얻는 데에 필요한 것이 성경 말고 다른 것도 있다는 말인가? 오늘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에 필요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성경을 공부하되 어떻게 공부해야 바른 것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그의 죽음의 시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자신의 후임목회자로서 사역하고 있는 에베소교회의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다. 그런데 그때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그래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어 자신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남도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과연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가 사도바울로부터 지도받은 성경교육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2. 디모데가 두 군데서 배웠던 신앙교육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디모데는 바울에게서 과연 무엇을 배웠고 가르침받았는가? 사실 그가 배운 것은 2가지였다. 갓난아기 때부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기초적인 신앙교육을 배웠다. 이어서 사도바울도 바른 신앙교육을 배웠다. 먼저 그가 어려서부터 배웠던 기초적인 신앙교육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디모데는 갓난아기 때부터 2가지 기초적인 신앙교육을 받았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를 배웠고(신6:4~10, 잠1:7), 또 하나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을 배웠다(출20:12,잠1:8). 그런데 그에게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마을에 전도하러 나온 전도단을 만난 것이다. 그때 전도단의 대표는 바로 사도바울이었는데, 사도바울이 1차전도여행 장소로서 루스드라에 온 것이다. 그리고 약 3년이 지난 후에 다시 바울일행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로 몇 년간 신앙교육을 받게 된다. 그것은 디모데에게 놀라운 변화였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새롭게 알고 깨달은 놀라운 영적 지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도바울로부터 들었던 율법교육의 핵심은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실 사도바울도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교육을 받았었다. 아니 그것도 어릴적에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당시의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어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훗날 고백하게 되는데, 사도바울은 그때 자신은 율법으로 볼 때에 흠이 없던 자였다고 말하였다(빌3:5~6). 하지만 그의 삶은 완전히 하나님의 원수로서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있었을 뿐더러 사탄의 앞잡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데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 충격은 무려 3일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가 만난 예수님은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것과 전혀 다른 곳에 잇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엄청나게 빗나간 상태에 있었고 하나님의 목적과도 빗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때부터 왜 자신이 성경을 그렇게 많이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했는지를 다시 찾아보기 시작하였고, 아라비아광야에 들어가 3년동안이나 구약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된다. 그때 사도바울은 성령의 도우심과 계시로 인하여, 이제는 성경을 보되 오직 그리스도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성경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구원의 관점으로 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성경을 보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함이며, 발견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예언이든지 구약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성경을 잘못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 구원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3년 뒤에 바나바의 부름을 받고 안디옥에 가서 사역자가 된 바울은 이제 전도팀을 꾸려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고, 2차전도여행 때에는 그를 불러서 아예 자신의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약성경을 보는 눈을 그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너는 배운 것과 확신했던 것들에 계속해서 머무르라. 왜냐하면 첫째,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갓난아기 때부터 성경을 알아왔기 때문이다(딤후3:14~15a)." 그렇다. 디모데는 어렸을 적에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기본적인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청년이 되어서는 바울을 만나 제대로 된 신앙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보는 눈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주는 이는 사도바울과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훌륭한 영적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3.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 것일까?

  둘째, 사람은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일까? 이어서 사도바둘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는 지혜를 터득하는지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것은 이것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단다(딤후3:16)" 그렇다. 성경 이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할 수는 없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저마다의 수행과 득도의 과정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주지 못한다. 10년을 고행이나 묵상기도를 해보라. 구원얻는 방법을 터득할 수가 있는지 말이다. 구약성경을 달달달 외우는 랍비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어찌 성경을 통화지 않고 구원얻을 방법을 찾는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성경을 봐야 한다. 기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며, 성령운동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오직 구원은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게 되고 그분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특별히 디모데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을 그의 스승인 사도바울로부터 정확히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 점에 있어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그렇다.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 하면서도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는 성경을 잘못 본 것이다. 또한 영적인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고도 그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행8장의 에디오피아 내시를 볼라. 그가 얼마나 성경을 읽었는지 길을 가면서도 성경을 읽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행8:31)"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영적인 스승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바로 사도바울이 있었다.  


4. 사도바울이 성경교육할 때 사용했던 4가지 교육방법은 무엇인가?

  셋째, 디모데가 사도바울로부터 받은 성경교육방법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성경을 보아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려면 어떤 교육방법이 요구되는 것일까? 사도바울은 성경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을 보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경을 보는 눈 자체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방법까지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4가지 교육방법이었다.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데, 그렇게 사람을 지도하려면 4가지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함이다. 그중에 첫번째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디다스칼리아'에 해당한다. 이것은 가르침은 가르침이지만 교훈적인 가르침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을 단지 알게 해주는 방법이 아니라 교훈으로서 배울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둘째와 셋째와 넷째는 책망과 바르게함과 교육인데, 이것부터가 오늘날에 성경교육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경교육방법을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책망(헬, 엘레그모스)의 방법이다. 책망은 꾸짖고 나무라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성경공부시간이나 설교시간에 책망이 있는가를 살펴보라. 책망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그러니 회개하는 자도 없고 그러니 천국에 들어가는 자도 없다. 아니 죄를 짓고도 있어도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셋째와 넷째 방법은 더더욱 교회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셋째는 바르게 함 즉 교정(헬, 에프토르시스)의 방법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과정을 가리킨다. 사실 교훈적인 가르침과 책망은 설교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 하지만 교정은 설교를 통해서는 그것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소그룹을 통한 개별확인 작업이 필요한 영역이다. 작은 그룹의 성경공부가 요청되는 것이다. 넷째는 의로 교육함이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의로움으로 징계함(헬, 파이데이아)"이라는 것이다. 잘못 가고 있는 자에게 회초리를 대는 것이다. 징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교회가 가진 권위로서 징계를 선포하고 있는가? 혹시 징계조치가 내리기라도 한다면 "이 교회만 교회냐!"하면서 금방 교회를 떠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징계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교회 말고도 주변에는 교회들이 즐비해 있지 않은가! 큰 일이다. 교회에서 책망과 교정과 징계가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해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방법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듣고 암송하고 지키려도 노력해 보아도 별 소용이 없다. 이제는 사도바울이 가르쳐준 4가지 교육방법이 회복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마다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교육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배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기에 합당한 자로 구비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에 이르는 자들이 나타나야 한다.


5. 나오며

  그렇다. 성도들은 성경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보는 눈을 갖추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영적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배우는 방법도 교훈적인 가르침을 받는 것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책망과 교정과 징계를 받으면서 배워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성도들은 죄악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읽어도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붙잡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 딤후3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나. 겸손하고 진리를 찾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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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구원은 받을 것이지만 천국에서 상은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지금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천국에서 상급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옳은 것인가? 정말 그는 천국에 들어가기나 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예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예상외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한다.


1. 들어가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상급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며, 상급은 행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한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재 버리지 못한 죄들이 있어도 그것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혹시 주님 앞에 충성하지 못하고 죄짓고 살게 되면, 천국에서 상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생각이 바른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주님께 충성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며, 죄를 청산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 자신은 믿음만큼은 굳건히 붙들 테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구원과 상급에 관하여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과 상급,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상급에 대해 좀 더 깊에 살펴보고자 한다. 아마 이 메시지를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뜨끔한 것이 있을 것이다.


2. 구원과 상급은 별개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정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상급은 별개의 것인가? 아니면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둘의 문제를 별개의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구원은 믿음의 문제요, 상급은 행함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느정도 봐 줄 만한 대목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구원은 예정의 문제요, 상급은 충성의 문제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자기자신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만세전의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되어지는 일이며, 상급은 내가 얼마나 충성하느냐에 따라서 받느냐 못받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죄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문제는 이미 끝나버린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가 죽는 날까지 싸워서 이기든지 회개하든지 하여 처리해야 할 문제인가?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교리나 가르침과는 달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과 상급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을 들여다보면 구원얻는 문제와 상급의 문제는 거의 같은 문제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하자, 제자들은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지 걱정을 하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것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중에 주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19:28). 또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도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구원을 얻는 문제는 단순히 믿음만의 문제로 끝내버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구원얻는 문제는 자신의 모든 것 즉 직업과 미래와 성공 등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는 것에 달려 있으며, 주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하여 때로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인 직업과 가족과 물질까지도 버릴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천국이 상속될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구원얻는 문제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의 문제요 충성의 문제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그러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구원 곧 상급을 향해 고군분투한 사도바울의 모습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천국에서 상을 얻는 문제를 구원얻는 문제와 그대로 결부시켜 말을 했다. 다시 말해, 상을 얻는 문제를 곧 구원의 문제로 인식하고 고군분투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가 했던 말을 더듬어보자.

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묜류관)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렇다. 사도바울은 상(보상)의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자신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말했다. 이는 자신이 남에게는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천국가게 도와주기는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림당하지 않을까 항상 조심했다고 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구원관이요 이것이 바른 상급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문제와 상급의 문제를 각각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4.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천국에서 기업을 상속받는 것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과 상급의 문제를,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천국에서 기업을 상속받는 문제와 결부시켜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바울은 세 군대에서 즉 고전6:9~10과 갈5:19~21 그리고 엡5:5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청산하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죄들을 살펴보면, 성적인 죄들(음행,간음,탐색,남색,호색,더러운 것), 영적인 죄들(우상숭배,주술,이단,), 마음과 생각과 성품의 죄들(탐욕, 모욕,원수맺는 것,분쟁,시기,분냄,편가르기,분열함,투기), 쾌락의 죄들(술취함,방탕함), 권력남용의 죄들(속여 빼앗음) 등이 있다. 그런데 이 본문들을 두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비록 성도가 죄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천국에는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상급은 얻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바른 해석인가? 이러한 해석은 과연 누구의 해석인가? 성경 어디에 그러한 해석이 있는가?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려 할 때에는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가장 좋다. 특히 성경 중에서도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가장 좋다. 그리고 다른 성경책들을 참고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목회자들은 위와같은 본문을 볼 때에는 맨 처음 주석부터 뒤적인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과연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참고한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다른 유명한 설교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러한 뜻이라고 자신의 교인들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왜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지 않고 주석부터 참고하는가? 특히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본문을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해석하려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과연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5. 예수믿고도 계속해서 죄를 청산하지 않고 있는 자는 불못행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도 죄를 짓는 자에 대한 우리 주님의 판단은 무엇일까? 그것은 요한계시록 21:8에 나와 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런데 놀라지 말라. 예수께서는 이러한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자들만 유황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도 죄를 짓고 또한 그 죄들을 청산하지는 자들은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가타부타 말을 덧붙히지 말라. 사도바울이 말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말의 뜻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교하면 정리하면 그런 자는 전부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를 청산해야 한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든지, 지은 죄를 회개하든지 해서 죄를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만 않으면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6. 자신은 구원은 받겠지만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변명하지 말라.

  이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고 하는 가르침은 틀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 자신이 비록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차지하는 자가 곧 구원받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천국을 얻는 자가 천국을 기업으로 물려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과연 어디에 이러한 말씀이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어떤 부자청년과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나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부차 청년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물어본다(마19:16). 하지만 동일한 본문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지(헬, 클레로노메오=inherit)를 예수님께 물어본다(막10:17, 눅18:18). 그런데 안타깝게도 개역개정한글성경에 의하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도 그 부자청년이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헬, 에코=have)를 물어본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다르다. 마태복음은 얻는가의 문제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상속받는가의 문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둘을 합쳐보면, 영생을 얻는 문제과 곧 영생을 상속받는 문제인 것이다. 이어지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본문이 나오므로, 영생의 문제는 곧 구원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 구원은 받으나 상급은 안 받는 성도가 있다는 가정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정일 뿐이지,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영생을 얻는 문제가 곧 영생을 상속받는 문제요, 이것이 곧 구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믿음만 있으면 영생을 얻거나 영생을 상속받거나 구원을 받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7.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곧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곧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풀어써보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치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천국에서 상급을 많이 받고 덜 받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믿고도 죄를 짓고 살면 결국 그 사람은 불못에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하든지 죄를 청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든지 아니면 날마다 회개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죄를 청산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고 살다가 죽으면 지옥이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1:8). 그리스도 사도바울도 세번씩이나 경고했기 때문이다(고전6:9~10, 갈5:19~21, 엡5:5). 그리고 하나더 구약의 성도들이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자. 이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엎드려저 죽었다. 왜 그랬는가? 비록 그들이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피해서 나왔고 홍해를 건너왔어도 광야에 나와서 계속해서 불평했고, 우상숭배했으며, 간음을 저질렀고,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적과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 광야까지 나왔지만  죄된 본성을 결국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 데리고 나온 목적을 상실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천국을 기업으로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다. 하지만 여호수와와 갈렙 그리고 출애굽 2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게 된다. 자, 가나안땅에 들어간 자들 중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한 자들이 있었는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땅의 호불호가 있었고, 크고 작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을 기업으로 물려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치고 천국의 땅을 상속받지 못할 자는 없는 것이다. 다만 천국의 땅을 적게 물려받거나 많이 물려받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마5:19).


8. 나오며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곧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다만 천국에서 얻을 상급의 크기가 적고 크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천국에서 받을 상급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변명하지 말라. 예수믿고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는 결국 불못에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계21:8).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살아야 한다. 천국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구원얻기 위한 경주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천국은 이미 따논 당상인데, 다만 천국의 상을 얻기 위해 더 열심히 수고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천국에서 얻을 상을 위해 달려가는 것 자체가 곧 구원얻는 과정인 것을 알고 오늘도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한다.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순교를 각오하면서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회개해야 한다. 그런 자들 중에 일부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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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무엇이었을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크게 배은망덕의 죄라고 규정하고, 그 구체적인 사실을 2가지로 요약해서 말한다. 하나는 자신의 구원자인 하나님을 버린 죄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이다. 이 두 가지 죄악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오늘도 우리가 이 둘 중의 하나의 죄를 짓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재조명해보아야 할 시간인 된 것 같다.


1. 들어가며

  이사야서는 구약성경(모세오경, 선지서, 시가서) 중에서 선지서(예언서)에 속한다. 또한 선지서(예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요 또 하나는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선언이다. 다시 말해 선지서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아울러, 죄짓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심판을 선고함으로 책망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사야선지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사야서도 이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이 두 부분은 각각 따로 따로 구별되어 씌여진 것은 아니다. 둘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야의 예언은 대체로 이사야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40~66장에서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회개를 촉구하는 책망은 이사야 전반부에 해당하는 1~39장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것들 중에서 남유다백성의 죄를 책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부분인 이사야 1장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2.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의 위치

  선지서들은 또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것은 역사서와 선지서로 구분된다. 참고로, 우리 개신교의 경우 구약성경을 크게 4가지 분류한다. 율법서(모세오경),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 시가서(욥기~아가), 예언서(이사야~말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선지서와 역사서를 하나로 합쳐서 선지서(느비임)라고 명명해놓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역사서를 선지서에 포함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서에 선지자들의 선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역사서와 선지서를 각각 따로따로 구분한다. 우선 이 둘의 차이를 조금 이해하려면, 역사서에는 역사적 사실에 선지자들(엘리야, 엘리사 등)의 메시지가 간간히 끼어 들어가 있다고 한다면, 선지서에는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 등)의 예언과 책망 사이에 간혹 이스라엘의 역사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류법에 따르면, 이사야서는 예언서의 시작인 책인 셈이다. 특히 이사야서를 비롯한 말라기까지는 다 자기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과 선포한 것을 책으로 남기고 있다. 그래서 선지서의 첫번째 책인 이사야는 선지자의 이름임과 동시에 선지서(예언서)의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3. 이사야서의 저자와 활동무대

  그러면, 이제는 이사야가 누군지부터 살펴보자. 즉 이사야는 언제 어디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인가? 그것은 사1:1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남유다의 10대왕이었던 웃시야를 시작으로 하여, 그의 아들 요담 그리고 요담의 아들 아하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까지 남유다에서 활동한 왕궁선지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사야는 B.C.739~680년까지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선포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신분이 왕족이었든지 아니면 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왕궁출입이 아주 자유로웠고 빈번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이름은 이사야였다. 당시에 이사야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많아서였던지, 이사야는 자신의 이름을 아모스(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금방 알아 들을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누군지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여호수아', '호세아'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이름 끝에 붙어있는 '야'라는 접미사는 히브리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며, 앞의 '이사'라는 단어는 '구원'을 뜻하는 단어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과 뜻이 같은 이름을 사용했던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지자 이사야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기록으로 담고 있다.


4.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

  렇다면, 이사야선지자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엇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던 것일까? 이사야 1장은 그의 이러한 회개촉구와 회복에 대한 선언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1장은 일종의 총체적인 회개촉구선언 및 회복의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1장은 회개촉구선언(2~23절)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유대의 배역(배은망덕)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는 여호와를 거역한 이스라엘에 처한 참담한 현실에 대한 애가(2~9절)요, 둘째로는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지탄이며(10~17절), 셋째로는 예루살렘의 부패와 회개에 대한 요청(18~23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사야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24~31절)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종(노예)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당신의 백성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식으로 생각했을까?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백성임이 분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했다(사1:2). 그래서 그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만 어떤 특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들이 먼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 즉 제사장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출19: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은망덕한 백성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크게 2가지를 범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린 행위요, 또 하나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2가지 죄들

  그럼,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우상숭배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사1:21). 영적인 간음이 그들에게 가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다(사1:4). 그 증거로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을 순수하게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외관상으로 철두철미하게 언약을 지킨 것 같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이중성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으로 판단되어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을 심판하신다(사1:4).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것 한 가지만 걸려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천국에 들어갈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불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들은 치명적인 죄로서 배은망덕한 행위 그 자체였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신음한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자연적인 은혜로 이끌어내어 홍해를 건너 광야에 갖다 두었다. 사실 여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 바로를 대항하여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다. 즉 애굽 땅에 사는 자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린 것도 하나님이었고,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한 다음, 그곳에는 오히려 바로와 애굽군대를 수장시켜 버리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그후 그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했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금새 돌아서서 광야에서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으며, 음행을 저질렀으며,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계신지를 시험했고, 원망불평했다(고전10:1~11).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합당하지 않는 자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 중에서 애굽생활을 동경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 곧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자들은 다 광야에서 엎드려뜨리셨다. 결국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어나가야했다. 그렇다. 죄를 좋아하는 자가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오고 애굽의 군대로부터 벗어나기까지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 해 주시는 일이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자기들의 행동여하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험을 거의 대부분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다(히3:18~4:1).


6. 예나 지금이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상황과도 매우 밀접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칭의인이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는지 적합한지를 시험하는 장소가 바로 광야로서 교회생활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이 교회생활을 통하여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지 아닌지를 지금 훈련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짓던 애굽생활을 동경하면서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그가 비록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온 성도라 할지라도 가나안 땅에는 결코 못 들어간다. 죄와 싸우지 않는 자, 천국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결국 낙오되고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애굽에서 10가지 대재앙을 보았고, 깊은 홍해가 갈라진 후 마른 땅을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생활을 동경하다가 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만나를 버리고 애굽의 음식들을 달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시려는 땅, 가나안을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그들이 원하고 말하는대로 되었다. 광야에 엎드려서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2세대들이 어떠했는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들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또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그리고 온갖 포악한 일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바른 행동을 하는 척하면서 외식적인 삶을 줄곧 살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베풀어주신 놀라운 기적과 은혜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러면 큰 일이다. 배은망덕한 삶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신앙생활은 결코 그리 간단하고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칭의를 받았어도 교회생활을 잘못 행한 자는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날마다 죄를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한다. 죄된 본성을 이겨야 한다. 피흘리기까지 사탄마귀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소망의 땅, 천국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핍박을 인내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가?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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