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럼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십계명과 우리 개신교인들이 알고 있는 십계명은 다르다는데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인가? 당신은 다른 신들과 우상을 똑바로 구별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날에 구원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연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 것일까?


1. 들어가며 - 여호와의 날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약시대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로 등장한 것일까? 그 등장의 시작은 이사야서다. 사2:12에 그 말이 최초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 용어를 즐겨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개념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럼, 그 날이 되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크게 두 부류로 갈리게 될 것이다. 하나는 구원받을 자요 또 하나는 멸망으로 들어갈 자로 분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잘 준비해야 한다. 만약 그날에 멸망으로 치닫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인생을 산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못입고 못먹고 살았던 자라도 만약 그날에 구원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자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날이 되었을 때에 과연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인가? 오늘은 언젠가는 우리 앞에 다가올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을 때에 우리가 구원얻기 위해서는 무엇에 주의하면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께서 가장 무겁게 무를 죄목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여호와의 날에 있어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이며, 신약시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신약시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산상수훈의 말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이 천국백성의 윤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율법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주신 바로 그 말씀이 여호와의 날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그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해본다면 그것은 곧 '십계명'이다. 구약의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날에 구원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십계명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3. 유대인들의 십계명과 개신교인의 십계명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십계명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할 계명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리고 혹여 우리 개신교인들이 놓치고 있는 십계명의 개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살펴보자.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대인들의 십계명의 분류방법과 우리 개신교인들의 분류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십계명의 분류 기준은 장로교의 경우 요리문답에 나와 있다. 그리고 찬송가나 성경책의 겉표지 안쪽면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성경원문(출애굽기20장과 신명기5장)에 없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각각의 계명 앞에 "제일은..., 제이는..., 제삼은...." 이런 식으로 그것이 몇 번째 계명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원문에 보면 그것이 몇번째 계명인지를 밝히는 그런 말은 없다. 다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누군가가 그렇게 붙여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신교에서 알고 있는 제1계명이 진짜 1계명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우리 개신교의 분류기준이 가장 합당하고 믿고 있을 뿐이다(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의 십계명의 분류기준이 우리 개신교의 분류기준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는 출20:2의 말씀 곧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의 말씀을 십계명의 서론의 본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출20:2의 말씀을 제1계명으로 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출20:3의 말씀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와 출20:4~6의 말씀 곧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의 말씀을 제2계명으로 본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엿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신도 용납할 수 없는 유일신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놀랍게도 출20:2의서론말씀을 제1계명으로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우리 개신교의 제2계명과 제3계명을 하나의 제2계명으로 본다. 그들에게 다른 신들과 우상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다른 신들과 우상들을 하나의 개념의 취급하고 있는 것일까?


4. 십계명에 나오는 다른 신들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제1계명(출20:3)과 제2계명(출20:4~6)의 말씀에 나오는 다른 신들과 우상이란 과연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같은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수도없이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외에 다른 신들(엘로힘)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이다(사43:10~12,44:6,8,45:5~6,45:18,21~22,46:9...). 여기서 다른 신들이란 다른 엘로힘을 가리키는데, "엘로힘"이란 신적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엘로힘은 전능하시며 창조주이며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에 속한다. 하지만 고대 근동에 사는 사람들은 신적 존재도 '엘' 혹은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엘'은 단수이고, '엘로힘'은 복수형태다. 그렇다면 왜 고대 근동에 사는 사람들은 신적 존재를 엘이나 엘로힘이라고 불렀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신적 존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하늘의 타락한 천사들을 신(엘) 혹은 신들(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천사들도 하나님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시편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도 신 혹은 신들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엘로힘)은 신들(엘)의 모임 가운데 서미ㅕ, 하나님(그분)은 그들(엘로힘) 가운데서 재판하시느니라(시82:1)",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엘로힘)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82:6)", "주여, 신들(엘로힘)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시86:8)", "무릇 구름 위에서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엘림의 아들들) 중에서도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시89:7)",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엘)이시요, 모든 신들(엘로힘)보다 크신 왕이기 때문이로다(시95:3)". 그렇다. 구약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천사들도 신 혹은 신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은 나로부터 신적 능력의 일부를 부여받아 활동하는 내 종들에 불과하다"고 말이다(시103:20~22). 그러므로 제1계명에 나오는 "다른 신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신들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같은 신은 절대 없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십계명에 나오는 우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제2계명에 나오는 '우상'은 또 무엇인가? 여기서 우상이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닌 것을 정리해 두자. 곧 우상이란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든 어떤 조형물들을 가리킨다. 그 재료는 금이나 은이나 동, 철이나 나무나 돌 등 다양하다(시115:4~8). 하지만 그들의 모양은 대부분 사람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사람의 모양에다가 짐승의 모양을 합친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만들어놓고 거기에다가 제사를 드리고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그 조형물들을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이것들 외에도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과 별들 혹은 커다란 나무나 돌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 사람들이 거기를 향해 무엇을 빌거나 거기에다가 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물건이나 만든 수공품이지만 그것의 공통점은 인간이 섬기기 위한 것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6. 다른 신들과 우상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다른 신들과 우상을 동일시한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만 그렇게 섬기게 될 때에 타락한 천사들(귀신들)이 와서 사람들의 경배를 받기 때문에 우상이 곧 이방신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보이는 어떤 조형물에 자꾸 사람들이 예를 갖추고 절을 하다 보니까, 귀신들이 그곳에 와서 앉아서 경배를 대신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형물인 우상과 귀신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결코 어떤 조형물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카톨릭을 보라. 얼마나 많은 조형물을 만들어 그 앞에 가서 예를 갖추고 섬기는지를 보라. 천주교는 우상숭배로 가득한 비기독교인 것이다.


7. 여호와의 날을 앞둔 이사야의 경고의 메시지

  그래서 이사야선지자도 우상을 만들어 섬기거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신다고 경고한다. 구약시대를 보라. 이스라엘이 자손이 여호와를 떠나서 다른 신들 곧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다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는지를 말이다(삿2:11~15). 그러므로 이사야선지자는 참된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과 이방신들을 하나님 섬기듯 섬기는 유다백성들을 향해 안타까움을 쏟아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유다를 향하여 강하게 경고하고 또 경고하였다. 특히 오늘 본문말씀인 이사야2장에 보면, 율법말씀을 받은 유다백성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방의 신들을 가져다 섬기고, 이방신들을 불러다가 점을 치고 있는 것을 적나나하게 공개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사2: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상과 이방신들을 섬김으로 인해, 그들에게 은금이 풍성해지고 마필과 병거가 가득하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신이 아니라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가공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사2:8). 그래서 홀로 참된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이 높이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사2:11,17).


8.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어떻게 될까?

  왜 여호와의 날이 필요한지 아는가? 하나님이 분명 자신이 누군지를 알려주고 섬기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기거나 이방신들마저 자기의 신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과 이방신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호와의 날을 제정하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에 이 지구를 흔드실 것이다(사2:21).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감히 있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교만하고 거만한 자는 낮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위용과 생명을 자랑하는 백향목과 상수리나무도 베어지고 없어질 것이며, 우상과 이방신들을 섬기던 언덕과 높은 산들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방비하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과 견곤한 성벽도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된 상인들까지 모조리 하늘의 진노에 불에 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날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홀로 높이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사2:12~17). 뿐만 아니라 그날에 우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이방신 흉내를 내었던 귀신들은 무저갱에 갇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우상과 금우상을 다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릴 것이다(사2:20). 그리고 사람을 의지하던 자들도 그날에는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사2:22).


9. 나오며

  당신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무엇을 신처럼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 아닌 모든 것들은 의지할 대상이 아님을 알라. 그것들은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될 것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떤 위험한 순간이 찾아와도 그들은 도와주지 못할 것이다. 오직 전능하시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다. 그분이 바로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사9:6).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섬겨야 하는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과 이방신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인생도 결코 의지하지 말라 하신다. 하나님이 땅을 흔드시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의 날의 심판의 기준이다. 할렐루야, 오직 하나님만 높이 여김을 받으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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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죄 중에서 아주 끊질긴 죄가 있다. 그것은 음행의 죄다. 이 세상에는 이것을 이겨낼 그 어떤 장사도 없다. 항상 조심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숨쉬는동안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력한 욕구를 지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길 방법은 정녕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겨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거기에는 소극적인 방법도 있고 적극적인 방법도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죄까지도 이길 수 있도록 우리 몸안에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께 찬양드린다.


1. 들어가며

  사람들은 왜 음행의 죄를 범하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왜 유럽이나 미국까지도 동성애까지 허용하는 성의 문란의 시대를 허용하고 말았는가? 성경은 다른 그 어떤 죄보다도 음행의 죄에 대해서는 그 죄값을 무겁게 물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경고하고 또 경고한다. 왜냐하면 음행의 죄를 허용하고 나면 나타나게 될 결과들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왜 음행의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시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음행의 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해결책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음행의 죄가 낳는 무서운 결과들

  먼저, 음행의 죄가 과연 어떤 결과들을 낳는지부터 살펴보자.

  음행의 죄는 첫째,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게 한다(히12:6). 그것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음행에 잘 나타나 있다. 음행의 죄는 르우벤으로 하여금 장자권을 잃어버리게 했다. 사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장자는 3가지 축복이 있었다. 첫째는 가문을 대표하는 권한이다. 둘째는 자식을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다. 셋째는 부모로부터 기업을 2배로 물려받을 수 있는 권한이다. 하지만 르우벤은 음행의 죄를 범함으로 이 3가지 축복을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던 에서도 이 3가지 축복을 잃어버렸다. 둘째, 음행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한다(히13:4). 대표적인 예를 보자. 출애굽2세대들이 모압싯딤에서 모압여인들과 음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전10:8, 민25:1). 그것은 전염병으로 불어닥쳤다. 순식간에 2만4천명이 죽어나갔다. 음행의 죄는 자기와 자기의 가족들을 거친 죽음으로 몰고간다. 셋째, 음행의 죄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든다(계21:8,22:15, 엡5:5, 고전6:9~10).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많이 누려보지 못한 것도 아니며,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가본 것도 아니다. 죽어서 그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음행의 죄를 결국에 그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린다.


3. 음행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음행의 죄를 철저히 금하셨다(출20:14). 그것은 십계명 중에서 일곱번째의 금지명령이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음행의 죄를 범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실 만큼 중요하게 처리하라고 당부하셨다(신22:22~24, 레20:14, 21:9). 아마도 공동체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에 조기에 수습하시고자 그렇게 명령하신 것 같다. 특별히 이방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이 음행의 죄를 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종교에서는 음행이 자기 신들을 섬기는 순서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을 대부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교회도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이 꼭 하지 말아야 할 죄들 4가지 중에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를 집어 넣었던 것이다(행15:20).


4. 음행의 죄가 왜 더 무겁고 위험한가?

  그렇다면, 음행의 죄가 왜 더 무겁고 위험한 것인지를 알아보자. 여기에는 5가지 항목이 있다.

  첫째, 다른 죄들은 몸밖에 죄를 짓지만 음행의 죄는 자기의 몸 안에 죄를 범함으로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성령과 충돌하기 때문이다(고전6:18~19). 결국 음행의 죄를 끊지 못하게 되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나올 수가 없다. 교회를 뜨문뜨문 나오다가 그만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둘째,  음행의 죄가 성도들의 회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요16:8).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음행의 죄를 짓게 되면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아버리기 일쑤다. 결국 음행의 죄가 깊어지면 그는 회개할 수 없게 된다. 셋째, 음행의 죄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욕구이므로 한번 거기에 빠져버리면 벗어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고전7:1~3, 5, 9). 사람의 욕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2가지다. 하나는 식욕이며 또 하나는 성욕이다. 사람은 영물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생명체이므로 먹어야 한다. 재미 중에서도 먹는 재미가 기본적으로 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욕구이기 때문이다. 두번째의 욕구는 성욕이다. 성욕은 종족번성을 위한 욕구다. 성욕을 통해서 자신의 씨를 퍼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모든 동물은 짝짓기의 철에만 성욕을 사용하는데, 인간만큼은 시도 때도 없이 성욕을 사용할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축복이 제일번의 축복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렇게 강한 성적인 욕구를 제한없이 사용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인간은 성을 즐기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성욕은 제한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음행의 죄를 더 무겁게 처리하신다. 넷째, 음행의 죄는 우상숭배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민25:1~9, 삿2:17, 8:33). 이방신들의 제사에는 2부순서로 음행의 포함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가나안종교가 그랬다.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곳에는 항상 성창이 있었다. 이방신을 섬기는 제의에는 1부순서와 2부순서가 있었다. 1부순서는 간단하고 단순했다. 음식을 만들어 놓고 향을 피우며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2부순서는 향응을 즐겼다. 제삿상에 올려진 음식을 나눠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후에는 음행을 즐겼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음행을 항상 같이 따라다닌다. 왜 로마가 멸망당한 줄 아는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성욕의 과도한 추구 때문이었다. 이처럼 영적인 순결과 육적인 순결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음행의 죄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마19:9).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라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음행을 저질렀을 경우에만 허락하셨다(마5:32). 하나님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남편의 무능함 때문에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 음행으로 부부의 하나됨을 깨뜨릴 때에만 이혼을 허락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실 때에 오직 한 남편에 한 아내라고 하셨다(창2:24). 또한 둘이 모여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한 사람이 없으면 불구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하나님의 창조의 가장 큰 선물이요 행복이다. 그런데 음행의 죄는 결국 가정을 파괴시키고 만다. 가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녀들은 또 어떻게 되는가? 그러므로 절대 음행의 죄를 범하지 말라.


5. 음행의 죄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음행의 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사실 음행의 죄를 한 번으로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 숨쉬는 그날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육체의 정욕 가운데 사탄의 속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음행의 죄를 어떻게 제한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에는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환경적인 해결방법이 있다. 음행을 저지르기 쉬운 환경을 제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가 홀로 방에 함께 있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스킨십이라도 가족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 음행을 저지르기 쉬운 장소가 있다면 그곳을 떠나야 한다. 유흥가나 술먹는 곳에 되도록이면 가지 말라. 야한 옷차림도 하지 말라. 음란한 인터넷 접속도 차단하라.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요셉의 경우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그 장소를 벗어났다(창39:10~12). 음행하기 좋은 환경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제도적인 해결방법이 있다. 그것은 결혼하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의 아내를 두고, 여자만 자기의 남편을 두라고 했다(고전7:2). 그것도 단 한 명만 말이다. 그것도 부부의 성생활을 의무라고 명했다. 자기의 몸은 부부가 자기가 주장해서도 아니된다고 했다(고전7:3~5). 왜냐하면 절제하지 못함을 인하여 음행하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절제하지 못하는 자가 혼자 살아서는 아니 된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고전7:9). 사실 결혼은 음행의 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합법적이고도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마지막으로 영적인(신앙적인) 해결방법이 있다. 자기의 몸을 음행이 차지하도록 용납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날마다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위해 말씀충만받고 기도생활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욕구가 있지만 이것보다더 더 강력한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소욕이라고 했다(갈5:16~17).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아직도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회개부터 시작하라. 음욕의 죄는 끈질긴 죄이므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육체의 정욕보다 하나님의 성령의 소욕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라. 다시오실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알고 그분만을 믿으라. 그러면 어느순간에 우리도 모르게 음행을 잊고 살게 될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인간에게는 식욕 외에도 성욕이 있다. 이 둘은 사실상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강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소욕이다(갈5:16~17). 그러므로 음행의 죄를 자신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즈레 자포자기하지 말라. 말씀충만, 성령충만을 받으라. 그리고 기도하라.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일에 집중하라. 그리고 보조적인 수단으로써, 음행하기 쉬운 환경적인 곳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활용하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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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회심한 사람일까? 회개와 회심은 사실 다르다. 둘은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요소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회심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첫번째 편지를 통해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회심없이 회개만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가짜일 수 있다. 만약 회심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주님 곁을 떠나갈 수 있음을 알라. 이제 내 신앙을 한 번 점검해볼 차례다.


1. 들어가며

  성경에는 '회개'라는 단어와 아울러 '회심'이라는 단어도 있다. 회개와 회심은 어떻게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로서 '뒤에 먹은 마음'을 가리킨다. 곧 회개란 뒤에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죄를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뜻의 단어인 '회심'이라는 단어도 있다. '회심'은 헬라어로 '에프스트로페'라는 단어로서, '회심, 개종, 전환, 개혁'을 뜻한다. 예를 들어, 행15:3에 보면 '회심'이라는 단어는 '돌아온 일'(개역) 혹은 '개종한 이야기(공동번역)' 내지는 '개종(한글킹제임스,바른성경)'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회개와 회심의 차이를 좀 더 알아보자.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설명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눅15장에 나오는 둘째아들의 이야기는 탕자가 회개한 이야기다. 그러나 행9장에 나오는 다메섹도상의 사울이야기는 사울이 회심한 이야기다. 뭔가 차이가 있지 않은가? 오늘 이 시간에는 데살로니가교인들의 회심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과연 자신은 회심한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회심의 중요요소는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심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데살로니가는 어떤 도시였는가?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바울이 마케도냐의 수도이자 항구도시였던 데살로니가에 개척한 교회다. 사도바울은 A.D.51년경 2차전도여행 중에 빌립보 다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운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수도다. 그런데 우리가 데살로니가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의 종교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원래 마케도냐지역을 할당받은 알렉산더대제의 부하 카산더에 의해 B.C.315년 세워진 도시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의 공격을 받아 B.C.168년 로마에게 패한 후에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그리고 A.D.42년경 로마가 내란에 휩싸일 때에 데살로니가인들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한다. 그러자 훗날 황제에 옥타비아누스가 오른다. 그 일을 계기로 데살로니가는 자유도시가 되었다. 동시에 많은 자치권과 특권이 허락되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게 되었는데, 이 도시는 이전부터 토착신들도 같이 숭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와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를 신과 신의 아들로서 섬겼다. 또한그들은 이전부터 토착신으로서, 남근을 받드는 디오니소스 신을 숭배하고 있었고, 카비루스라는 신도 숭배하고 있었다. 카비루스는 데살로니가성이 위험에 처하면 부활해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성과 그의 시민들을 구원해준다는 일종의 메시야신이었다. 그들에게는 참된 복음을 접하기도 전에 이미 우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 대한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데살로니가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나?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는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당시 인구가 6~7만명이었는데, 유대인의 인구가 약 2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믿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팀을 가만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왕으로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행17:3,7). 그러니 유대인들의 즉각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묵고 있는 장소를 급습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바울은 이내 데살로니가를 떠나 아가야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덴을 지나 고린도에 도착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한 생각은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라. 그래서 바울은 갓 신생된 데살로니가교회의 소식을 알고 싶어, 자신의 제자였던 디모데를 그곳에 보내게 된다. 얼마후 도착한 디모데로부터 바울은 예상 외의 결과들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신앙상의 어려움과 역경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핵심은 동족과 가족으로부터의 핍박당함과과 내버림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모든 시련들을 잘 견디면서 다시오시어 신원해주시고 보상해주실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들을 칭찬하고 몇몇 문제들을 조정해주고자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인 것이다(A.D.51).


4.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겨내고 또 포기해야 했던 2가지 사항은 무엇이었나?

  그렇다면, 이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견뎌야 했던 시련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하나님 신앙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권리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첫째로, 그들이 견뎌내야 했던 시련이 무엇이었을까? 사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소수의 유대인들과 대부분의 헬라인으로 구성된 교회였다. 교인들 중 유대인으로는 야손, 아리스다고, 세군도 등이 있었으며(행20:4), 나머지는 다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었다(행17:4). 그러므로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은 종교전환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이전에 자신들이 갖고 있던 신을 버리고 바울이 전해준 하나님을 받아들임에 따라 그들은 동족과 가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고 때로는 버림까지 받아야 했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으나 포기해야 했던 권리도 있었다. 그것은 음행을 즐기는 삶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디오니소스 신을 섬김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만나자 그들의 음란한 삶은 병행할 수가 없었다. 이방신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에 받게 된 성령은 거룩한 속성을 지녔지만, 이방신들은 음란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던 데살로니가인들은 기꺼이 핍박과 시련을 견디기로 결정했고, 음행의 권리를 포기했던 것이다


5. 회개의 핵심요소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회심의 핵심요소가 무엇인지 정리해도록 하자. 첫째, 회심의 첫번째 핵심요소는 자신이 과거에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신을 확실히 버리고 돌아서서 오직 예수님만을 섬기는 것이다(살전1:9). 또한 이러한 행동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자기 동족이나 가족으로부터 핍박과 고난받을 각오를 하는 것이며, 정당하게 주어진 음행의 권리라도 기꺼이 포기하고 음행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둘째, 회심의 두번째 핵심요소는 비록 이 땅에서 핍박과 서러움을 받고 고통을 받는다해도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신원해주시고 보상해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살전1:10, 살후1:6~9).


6. 나는 과연 회심한 자인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과연 회심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사도바울이 제시한 기준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첫번째는 섬기던 우상을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 자기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핍박과 환난을 기꺼이 감당할 각오가 되어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전에는 허락되어진 음행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금하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현재에 받는 고난속에서도 미래에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상급을 소망하가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전에 우상 혹은 이방신을 섬기던 자가 정말 기독교신앙으로 회심했는지를 알아보려면 3가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하나는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받는 환난과 핍박을 기꺼이 받으려 하는가?(인내신앙) 그리고 둘째로, 음행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는가?(거룩신앙) 셋째로,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상급을 기다리고 있는가?(재림신앙)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세 가지 기준을 통과할만한 신앙을 지녔는지 살펴보라. 만약 이 세 가지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부족하다면 오늘부터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란다.


7. 나오며

  우리 민족도 과거에는 토속신앙에다가 조상신을 섬기는 유교신앙에 매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0년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사들로 인해, 토속신과 조상신을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신앙으로 많이 옮겨왔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신이 회심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닥친 어려움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만약 그러한 일 때문에 불평하고 있거나 뒤로 물러나기라도 한다면 그는 아직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아직까지 음행을 멀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도 아직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만 먹고 마시고 누릴 것들을 좋아한다면 그도 아직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성도들이여, 이제는 우리도 돌아서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례를 보라. 그리고 우리 안에 부족한 것이 있거나 버리지 못한 것이 있다면 당장 오늘부터라도 주님께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만 붙들기를 바란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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