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구원받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인간의 책임인가?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중에서도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 인가? 과연 그것으로 스스로 구원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뜻이었으며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1. 들어가며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믿어서 구원받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인가 아니면 하나님 책임인 것인가? 가령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의 12제자의 하나였던 가룟유다가 죄짓고 이후에 멸망에 떨어진 것은 자신의 책임인가 아니면 하나님 책임인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란 대체 어떤 것이며, 그것의 한계와 책임이 누구에게 있으며,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나살펴보고자 한다.


2.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첫째, 인간에게 부여진 자유의지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자유의지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한 종류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하나님의 속성들과 양심 그리고 자유의지 등이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을 특징지우는 매우 독특한 성질인 것이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영향이나 그 누구의 도움없이도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맨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때에 인간은 선을 택할 권한과 악을 택할 균등한 권한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그 권한을 결코 침범하지 않으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권한을 100% 위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려 할 때 천둥 번개를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조종하거나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선택권한을 침범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자유의지를 사용해 죄를 범하게 된 이후에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3. 타락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3가지 견해

  둘째, 그렇다면 타락 후에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신학사조가 있었다. 하나는 어거스틴의 신학사조이며, 또한 펠라기우스 신학사조다. 이 중에서 어거스틴(Augustinus, A.D.354~430)은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의 대변자였다. 그는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죄지을 자유의지만 남아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악을 행할 자유를 가졌을 뿐 영적인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 다시 말해 저급한 수준의 칭찬받을 자유의지만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어거스틴 당시에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펠라기우스(Pelagius, A.D.360?~420)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의지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입장의 소유자였다. 그는 비록 아담이 범죄했어도 그에게는 여전히 죄짓지 아니할 자유의지가 남아있었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비록 아담이 범죄했어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손상되지 않았으며, 마귀에 의해 파괴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는 완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지고 있다고 했다. 마귀의 힘이 강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며, 죄된 육체가 영혼을 지배할 만큼 죄성이 강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자유의지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남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구원에도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죄를 이기고 하나님을 선택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그가 죽고 난 10년 뒤, A.D.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로 부활했다. 이들은 펠라기우스주장도 틀린 데가 있고 어거스틴의 주장도 틀린 데가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자유의지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구원에 이를 수 없을만큼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반대로 오직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진다는 어거스틴의 주장도 틀린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이들은 어거스틴의 절대예정론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절대예정론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가 필요없게 만들고 전도의 열을 약화시킬 뿐더러, 반대로 사람을 숙명론적으로 자포자기와 슬픔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며, 비록 약화되었기에 그 자체만으로는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로 구원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의견도 주장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남아있는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구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4. 자유의지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과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어거스틴의 신학사조를 다시 계승발전시킨 종교개혁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이후에는 대부분 어거스틴의 신학사조를 이어받은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따라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다시 어거스틴의 신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것인가? 이제 그것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창조된 인간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자유의지에 상당한 타격을 받기는 했으나 자유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아담이 타락했어도 죄된 본성이 끄는데로만 100%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작지만 선택의 자유의지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첫번째로 낳았던 가인과 둘째아들의 제사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느날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다. 그때 가인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앞에 죄가 엎드려 있지만 나는 네가 죄를 다스리기를 원한다(창4:7)" 하지만 가인은 분노를 참지 못했고 결국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다. 죄된 본성이 착한 본성을 이겨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죄가 올라왔을 때에 무조건 죄에 순복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대항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락 이후에도 어느정도 선택의 자유의지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후에도 출애굽한 2세대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놔두었으니 살기 위해서 생명과 복을 택하라(신30:19~20)" 만약 인간이 생명과 복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선지자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지 아니한다. 돌이켜 살기를 원한다. 그러니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로부터 떠나거라. 그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거라(겔18:23,30~32)". 그렇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로 죄된 본성을 자기 안에 가지고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가 있고, 죄된 본성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향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없이 스스로 죄된 본성을 이기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기는 하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기가 어려우며, 죄를 거역하여 이길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면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있는 또다른 강력한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가책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죄를 좋아해서 죄를 선택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롬7장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내게 있지만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고 만다(롬7:17~20)"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선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로, 아담의 타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구원으로 이끄시는 선행적인 은총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스스로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부어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도 훗날 인간을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중에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 그러면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거라. 그러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갈 것이고 나는 그와 더불어 먹을 것이며,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계3:20)"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러나 강제로 여시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로서 주님을 자기 안으로 모셔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의 능력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의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강제하시는 않으신다. 부족하지만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오직 주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그렇다. 아담의 타락이후라도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에 그것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그것을 사용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죄지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단연코 우리는 그분을 붙잡아야 한느 것이다. 그리고 그분 앞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온다해도 그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의 노력과 의지가 들어가야 우리도 구원의 노정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5. 가룟유다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그렇다면 가룟유다가 자살해서 지옥에 떨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주장대로하면,ㅡ 가룟유다는 만세전부터 예수님을 팔 자로 예정된 자요,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예정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틀린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지, 가룟유다가 그 사람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가 잘못하여 자신의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팔았다 하더라도, 그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돈욕심에 끌려 예수님을 넘겨주었으며,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여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지었던 죄를 들고 예수님 앞으로 가서 용서를 구해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범죄는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6. 나오며

  그러므로 이미 회개와 믿음을 사용해 구원으로 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남들에게 주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죄를 지어 지옥형벌뿐이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멸망받을 수밖에 없던 자라도 누군가의 중보기도 때문에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구원은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자애게 주어지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재기 때문이다. 만세전부터 어떤 개인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라. 다만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듣거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결코 만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된 개인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복음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자신이 얻은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라.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건투를 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는 과연 무엇일까? 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감없이 선포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죄들이 들어 있다. 우상숭배의 죄말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는 무엇일까? 오늘날에도 이러한 죄는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닐 것이다.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는 죄, 이사야가 언급한 3가지 죄는 과연 무엇일까?


1. 들어가며

  성경은 우리에게 2가지를 알려준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행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 관한 문제이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것은 죄를 어떻게 깨닫고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는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본문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메시야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내가 과연 무슨 죄를 지었으며 그 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성경을 보고 있는데도 이것 외에 다른 것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못 보게 된다. 성경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 것이다.


2. 이사야서에 대한 2개의 큰 구분

  우리는 지난 29번의 이사야강해를 통해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집중해왔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에서 말하고 있는 메시야는 어떤 존재이며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살펴본 것이다. 하지만 이제 30번째 시간부터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후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해내고 처리하는 데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해 2가지 측면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인데, 하나는 이 본문은 과연 무슨 죄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러한 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각한 3가지의 죄들

  이러한 차원에서 이사야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해본다면, 1장~39장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40장~66장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1장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서론이자 핵심주제를 말하는 시간이다. 특히 사람이 지은 죄들 중에 어떤 죄가 제일 하나님 앞에 심각한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이 어떤 죄를 짓고 있을 때, 자신이 지은 죄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사야 1장에서는 3가지 죄를 언급한다. 그것은 배은망덕의 죄요(2~9절),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하는 죄요(10절~15절), 마지막으로는 우상숭배의 죄이다(21~31잘). 그리고 중간중간에 지은 죄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사1:24~26) 회개를 촉구하는 부분(사1:16~20)이 들어 있다. 우리가 비록 아무리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사야가 언급한 이 세가지 죄에 대해서는매우 높은 경각심으로 대하고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는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상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짓고 있는 죄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4.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첫번째의 죄

  첫째, 배은망덕의 죄를 알고 처리해야 한다(사1:2~9). 세상의 하찮은 미물인 소나 나귀라도 자신의 임자와 주인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을 자식처럼 양육했던 하나님을 버린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얼마나 더 매를 맞으리고 반역을 거듭하느냐고 말이다(사1:5). 이미 맞은 곳이 많아 성한 곳이 없는데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신다. 이 세상에 가장 나쁜 것은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를 저버리지 말자.


5.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두번째의 죄

  둘째,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위험성을 알고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사1:10~15).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상적인 왕국은 다윗왕국이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벌써 260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제사제도와 안식일준수과 절기준수같은 것들은 완숙한 경지에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그들에게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분향이나 월삭이나 절기나 대회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성전마당만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은 완전히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인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죄를 지으면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죄를 지으면 양과 소를 바치면 된다는 식으로 이미 마음이 형식화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죄없는 동물이 죽는다는 것을 보고도, 죄를 미워하거나,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자기에게 희생제물이나 기름이나 향을 가져오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왔어도 자신을 보이려고만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형식주의, 그것이 그들에게 배여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이러한 죄에 한 번 빠지게 되면 사람은 무력한 신앙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미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죄를 짓게되면, 죄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은 가지지 않은채 "그래, 오늘은 양 한 마리 잡지 뭐."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형식적인 제사에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사1:14).

  이러한 삶은 그때로부터 700년이 지난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사장들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제사에 사용될 희생제물로 돈 벌 욕심만 있었지 다른 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장로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을 정죄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는 내버려둔 채 오로지 남들을 정죄하는 데에 빨랐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과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고 책망하셨다. 형식적인 것으로 볼 때에는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었다.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돈벌 욕심에만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명예와 인기를 얻는 데에세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도 아낌없이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구별하여 드렸다. 심지어 회향의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좁쌀같은 알맹이마저일일이 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높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6.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세번째의 죄

  셋째, 그들이처리해야할 세번째의 죄는 우상숭배의 죄였다(사1:21~31).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숭배의 죄를 같이 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신실한 성읍이었던 예루살렘을 창기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사1:21). 특히 이샤야가 활동하던 당시 아하스왕 때에는 우상숭배의 죄가 아주 심각했다. 왕도 하나님을 등진채 보라는 듯이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자녀들을 몰렉신에서 불태워 바치는 죄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어떠했을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산에 있는 푸른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 우상을 세워놓고 그것들에게 분향하며 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1:29, 57:5, 겔6:13, 호4:13, 왕상14:23, 왕하16:4, 대하28:4, 렘2:20). 하나님의 백성에 있어서 제일 싫어하는 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의 죄일 것이다. 혹시 앞에서 언급한 첫번째 배은망덕의 죄와 두번째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죄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봐주실만하다. 하지만 당신을 섬기도록 선택받았던 백성이 당신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때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도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셨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잘 몰랐기에 우상을 숭배할 수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상태에서도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기근을 보내고, 상수리나무가 말라죽게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 백성들은 칼에 쓰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들을 정결케 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의 요소는 없을까? 아니다. 우리들에게도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다. 우리도 사두개인처럼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마6:24), 물질에 대한 탐심을 끝없이 펼치고 있다(골3:5). 또한 죽은 자를 놓고 예배드리는 우상숭배(추도예배, 장례예배)의 죄를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자행하고 있다. 이러한 우상숭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질병과 저주와 가난에 3~4대가 고생하고 있다. 아니다. 그러면 아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명예와 물질과 쾌락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끝없는 탐심을 지금이라도 당장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칼을 가시다가 그것을 내리칠 것이기 때문이다(시7:11~12).


7. 나오며

  그렇다. 이사야가 살던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3가지 죄는 계속되고 있다. 배은망덕의 죄,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죄, 우상숭배의 죄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럴려면 먼저는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꼭 감사하도록 하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항상 기대를 가지고 나오도록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 우리의 태도와 생각을 과감히 버리도록 하자. 그것이 회개요. 그것이 살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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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신앙의 지도를 받았으나 신앙의 진보가 없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이것은 내 쪽에서 해결해야하는 문제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회피해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진일보할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말세가 되면 교회가운데 불어닥치게 될 어려운 난제들 3가지를 고스란히 디모데에게 들려주었다.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사람이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충성봉사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후임인 에베소교회의 디모데에게 말세에 성도들에게 불어닥칠 어려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것을 또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준다. 


2. 신앙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 3가지 이유

  먼저, 사도바울은 사람이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충성봉사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진보가 없는 이유가 3가지 있음을 말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자기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딤후3:1~4). 바울은 말세가 되면 교회 가운데에도 엄청난 어려움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도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말세에 저지르게 될 죄악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총 18가지나 된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한다. 돈을 사랑한다. 허풍을 떤다. 거만하다. 훼방한다. 부모를 거스른다. 은혜를 모른다. 불경건하다. 애정이 없다. 화해하지 않는다. 중상모함한다. 절제하지 못한다. 사납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반한다. 조급하다. 자만한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다." 등이다. 그런데 이것들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사랑하던 것을 예수님을 믿고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들의 신앙의 진보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과연 무엇을 귀하게 여기며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혹시 이들처럼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지 않는가?

  둘째,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딤후3:5~9).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무리 세상이 악한 채 있으며, 자신 안에 죄된 본성이 있고, 사탄마귀가 시험한다고 하더라도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령을 의지하고 살게 되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아버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바른 지침서인 성경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딤후3:10~17).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면 인생의 목적이 사실 분명해진다. 그것은 곧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붙들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다시 말해 인생의 성공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천국가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의 기준을 잘못 정하고 추구하지 말라. 자기가 부자가 되니고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사장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 아니다. 인생의 성공은 어찌 살든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붙들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높은 관직에 오른다 하더라도 천국에 못들어가면 그 인생은 사실 실패한 것이다. 육신의 기간은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기간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아도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다.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지만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신앙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3가지 도구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진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이전에 세상에서 즐기던 것들을 내려놓고 영적인 것과 천국과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한 마디로 회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던 삶을 내려놓고 천국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세상것을 추구하게 된다면 우리는 지옥의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을 무의미한 일이다. 만약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렘11:10~14, 7:16~20). 또한 시편기자는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칼을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시7:12). 그렇다. 우리의 인생이 꼬이게 되고 힘들게 되고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도 죄를 처리하지 않는 것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지은 죄들을 낱낱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요일1:9). 그리고 둘째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히12:4). 한 마디로 어찌하든지 죄를 처리하는 것이다. 죄를 처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 기도응답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다시 원상복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를 처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충성봉사하면 대체 뭐할 것인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면 충성봉사가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맨 처음에는 회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가? 그럼, 회개부터 하라. 그리고 나중에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라. 그것이 순번이다. 그 순서를 거꾸로 바꾸면 안 된다. 그러면 병에서 낫는다해도 도로 아프게 된다.

  둘째, 우리는 약해도 주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경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것은 경건의 능력이 우리의 죄악된 삶을 이길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사실 죄된 본성만으로 따진다면 우리 스스로는 내 안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이길 수가 없다. 아주 쎈 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혜사(돕는 자)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분을 의지하면 그분이 나로 하여금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다.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죄악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분이 역사하시면 우리가 경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죄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도바울 당시에도 교회 안에 이와같은 사상이 들어와 있음을 말했다(딤후3:6~9). 그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이상한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것은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라는 사상과, 그럼에도 육체는 결코 영혼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니 자신이 죄를 짓는다해도 그것은 육체가 죄를 짓는 것이니만큼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쾌락의 욕구가 일어나면 그것을 추구해도 괜찮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사람은 결코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으니, 그렇다면 이제는 그것을 즐기며 살라고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육체를 죄를 지어도 그 죄값으로 영혼이 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세상의 유혹과 욕망,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우리는 경건하게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함을 믿어야 한다. 처녀잉태고지를 들었던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오늘도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순수하게 그대로 믿어야 한다(눅1:37~38).

  셋째, 성경을 제대로 배우고 또한 배운대로 확신한 것들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 성경은 사실 사람으로 하여금 부자되게 하고 승진하게 하고 잘 살게 도와주는 지침서가 아니다. 성경은 자신의 영혼이 복을 받게 해 주는 유일한 책인 것이다. 성경은 내 영혼이 복을 위한 지침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교육을 받아본 일이 없는 성도는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신의 육체가 복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래서 승진하고 합격하고 지위를 얻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돈을 잘 벌어서 팡팡 쓰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잠시 잠깐 안개와 같은 육신의 삶이 진짜 복인 줄로 안다. 하지만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 않다. 만약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독교를 종교생활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해서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가르쳐주는 지침서요, 지도임을 알라. 그것은 오직 우리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아 천국에 들어오라고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천국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생활하면 참으로 편하다. 행복하다. 그리고 돈과 권력 때문에 남들하고 싸우지도 않는다. 남을 헐뜯거나 내가 올라가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남을 배신하지도 않는다. 조급해 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보한다. 이해해준다. 기다려준다. 배려해준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이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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