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2(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상강해(41) 사울 왕의 경우처럼 교만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10가지 특징은?(삼상28:15~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skdXwu_crE [혹은 https://tv.naver.com/v/24416813 ]

 

1. 들어가며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비운의 인물을 한 사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사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40세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국의 초대왕으로 등극하였지만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악한 조짐은 왕이 된지 2년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국이 튼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다시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의 나이가 62세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의 명령에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 왕을 세운 것을 매우 후회하신다고 하셨다(삼상15:11). 그리고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18년동안이나 더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이는 그가 혹시 회개하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말년이 되자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를 떠나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결국 전쟁이 터졌고 그 전쟁의 승패를 알아보려고 신접한 무당을 찾아간 다음날 그는 길보아 전쟁에서 전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울왕이 이렇게 버림당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교만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왜 그는 교만해진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울왕의 교만이 얼마나 발전했으며,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고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2.'교만함'의 죄란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하는 이 용어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겸손하거나 온유함이 없이 자기 생각과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시대에는 '교만'은 죄의 목록에 들어간다(막7:22, 롬1:20, 딤후3;2). 그러나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교만함이 죄라고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만은 모든 죄의 출발이요 씨앗과도 같다. 교만함에서 많은 죄들이 가지를 치고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교만함의 대명사는 역시 '사울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자신을 높이려고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왕의 경우를 보면, 그의 교만함은 이내 더 많은 죄를 산출하였으니, 다윗을 보고는 시기질투심이 터져 나왔고 이내 혈기분노의 죄가 합쳐져서 '미움'의 죄로 싹트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움의 마음은 '살인'의 감정으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이 죄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자신이 교만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사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벗는 죄의 문제가 교만함의 문제요 음란함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못 되었으면 즉시 회개함으로 이러한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구약시대에 율법에는 교만한 마음이 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사울왕으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범죄가 결국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는 우상 숭배의 죄라고 말씀하셨다(삼상15:23). 즉 교만함은 권위를 무시하는 데에서 그 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판단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의 죄는 자기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처럼 우상시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교만함을 드러낸 사울의 예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죄가 곧 점치는 죄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다. 즉 교만함의 죄는 십계명에 나오지는 않아도, 십계명 중에서 1계명과 2계명을 어긴 죄와 동일한 죄라고 평가되는 것이다. 

 

3. 사울왕에게서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울왕에게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만한 자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히 죄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꾸 변명을 한다. 그는 42세 때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으며(삼상13:13), 또한 62세 때에도 역시 아말렉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둘 다 회개하지 않았다(삼상15:13~15). 

  둘째, 교만한 자는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자존심이 매우 강해서 자기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끌고 들어가려 한다. 자기를 지지해주는 자를 위해서는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지만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결단코 가만 두지 않는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도 섬기려고 하였다. 그러므는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였다(삼상15:20). 

  셋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이 저지른 행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사울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사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바라신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삼상15:22). 

  넷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면서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가 위임된 권위자의 말도 무시해버린다. 사울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자기가 왕으로 가진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삼상15:30).

  다섯째, 강포하고 폭력적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만함은 보통 혈기와 분노와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만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혈기와 분노가 장난이 아니다는 것이다. 사울은 처음에는 아주 겸손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출 줄도 알았으며, 자신의 아랫사람의 말도 경청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왕으로 등극하자 그는 안하무인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아들이라도 가만 두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을 돕는다고 장자 요나단도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삼상20:33). 그리고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미명하에 놉 땅에 있는 제사장들을 다 죽이는 파렴치한 일도 자행하였다(삼상21:16~19). 

  여섯째,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도 자기가 잘나서 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가 이러한 사람이라고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잊고 산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일평생 동안 하나님을 높였다는 대목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돌려야 할 그 순간에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했던 것이다(삼상15:12). 

  일곱째, 자기를 높히려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자기가 높아져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싫어한다. 지는 것을 싫어한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싫어한다. 이 사람에게는 오직 자기의 체면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름이 명예스럽게 된다면 거금도 거뜬히 내는 편이다. 심지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는 하나님도 이용한다. 교만의 특성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기에 교만한 사람은 대개 시기와 질투심도 매우 강하다. 사울은 그랬다. 사울은 모든 백성 앞에 자기가 높아지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다윗이 전쟁에 승리하여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자기에게는 천천을 돌리자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마음 먹는다(삼상18:7~9).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두 딸 메랍과 미갈까지도 이용한다(삼상18:17~27). 

  여덟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특히 자기를 꾸중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니 주의 종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귀가 닫혀져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울은 40세에 왕위에 올라 80세에 죽는다. 그런데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했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62세 때에 치른 아말렉전투 이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오게 된다. 그뒤로 18년동안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살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 블레셋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 엔돌에 신접한 무당을 찾아가서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에게는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음성으로도 계시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삼상28:6). 

  아홉째,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것은 비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언제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함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사울이 그랬다. 사울의 평생에 진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대목이 없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었고 자기가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이다. 교만한 자는 항상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행세만 했을 뿐이다(삼상15:30)

  열째, 늘 남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판단받아야 할 대상이요 연약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다. 내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남은 비판하는 데에 아주 익숙하지만 자기를 판단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자기 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그리고 자기 아들 요나단의 이야기를 귀감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강요할 뿐이었다(삼상20:30~31). 

 

4. 나오며

  베드로도 사실은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혈기와 분노도 있었고 시기와 질투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기가 앞장서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날에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자신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했지만 자기가 위험해 처해지자 그는 그만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만약 주님께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시험에 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남긴 첫 번째 편지 속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매우 강조해서 말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벧전5:5-6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렇다. 어디 교만한 자가 사울뿐이며 베드로 뿐이겠는가?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교만한 마음이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만함의 선봉자이었던 사탄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외식하려고 하고, 생색내려 하고, 자기 이름내기를 기뻐하는 자를 사탄은 가만 두지 않는다. 그 사람 속에서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혈기와 분노를 일으켜서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교만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만의 영들이 역사해서 교만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교만한 가문에서태어난 사람이 교만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늘 자신을 낮추는 것에 더욱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를 즐거워해야 한다. 늘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생활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이 우리를 일생동안 지배하려고 웅크리기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때로 금식도 해야 한다. 그래야 교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주 안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어 주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우리는 다만 묵묵히 우리가 감당할 일을 해야 한다. 남의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음을 알고 남을 판단하기 전에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2022년 01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룻기서강해(03) 타 민족의 사람의 마음까지 감동시켰던 이방여인 룻의 선택(룻1:6~18)_2021-11-11(목)

https://youtu.be/XX8afOr8bgM  [혹은 https://tv.naver.com/v/23470094 ]

 

1. 타 지방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던 나오미에게 찾아온 반가운 소식은 무엇이었는가?

  기근을 피하여 모압 지방에 이주하여 살았던 나오미에게 가혹한 시련이 불어닥쳤다.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고 그리고 그 이후 아들들도 장가들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장남과 차남 둘 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 내려가 산 지 10년 안에 다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오미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자기의 본국과 본토에 기근이 끝났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어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자 나오미는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다. 

 

2. 두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가는 일에 나오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를 데리고 귀향길에 오른 나오미, 그런데 그녀가 길을 가다가 두 며느리에게 이야기를 꺼낸다. "너희는 각기 너희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너희가 죽은 너희 남편들과 나에게 인자를 베푼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인자를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1:8~9)." 그렇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두 며느리까지 데리고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두 며느리에게는 가혹한 일이라는 것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아직 젊으니 너희의 친정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좋은 새 남편을 만나 새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이다(룻1:9). 그러자 두 며느리들은 그럴 수 없다고,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며느리들을 친 딸처럼 생각하고 있는 시어머니의 따뜻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3. 두 번째로 며느리들을 자유롭게 놓아주기 위해 시어머니가 그들에게 한 말은 무엇이었나?

  첫 번째로 며느리에게 각기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새 남편을 만나 살 것을 권유했지만 두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들에게 자기를 붙잡아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계대 결혼 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두 며느리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의 남편들이 죽고 없는 상황이기에, 다음 방법으로는 남편들의 다른 형제가 있어야 그 형제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고 또한 가문과 재산을 물려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시어머니가 다른 아들을 두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제라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너무 늙었으니 자식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어떻게 시어머니를 따라와서 고생만 하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혼자 남게 된 것은 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로 인하여 두 며느리들에게까지 큰 시련을 안겨 주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두 며느리는 길에서 오열을 하면서 운다. 두 며느리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시어머니의 마음과 응당 시어머니를 따라가야 하지만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를 두고 떠나가야 하는 마음이 교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춘 후에 떠나간다. 그렇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에게 달라붙어서 떠나가지 않는다. 

 

4.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남유다의 멸망을 앞둔 바로 코앞 시점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도로 아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남유다 백성에게 전달하는데 그것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나 혹은 룻과 오르바를 일부러 고생시키고자 안달이 나신 분이 아니시다. 다만, 일찌감치 찾아온 징계를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피해 버렸던 엘리멜렉의 집안에 징계를 허락하셨던 것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회개를 하기만 하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인간사이다. 

 

5. 세 번째의 권면을 거절하기까지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나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자 시어머니 룻은 그녀의 동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 길로 가는 것은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룻이 이번에는 아주 단호하게 말하기를, 만약 죽음이 시어머니와 자신을 갈라놓지 않는 한 자신을 절대 시어머니 곁을 떠나가지 않겠노라고 말한다(룻1:17). 왜냐하면 룻에게는 시어머니가 전해 준 여호와 하나님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친정집으로 돌아간 후에 어쩌다가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지만, 거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한 룻이다. 

  얼핏 보기에 룻이 시어머니를 계속해서 따라가겠다고 한 것은 그녀가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녀가 긍휼이 많은 사람이어서 늙으신 시어머니를 홀로 사시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도덕적인 책임감이 있어서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것은 그녀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한 이유는 바로 나오미가 룻에게 전해 준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룻1:16). 룻은 자기에게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해 주었고 그러한 참된 신앙을 갖게 해 준 시어머니를 결코 홀로 떠나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이지만 영적인 어머니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룻은 결코 시어머니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었으며, 시어머니가 소개해 준 하나님 곧 여호와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룻은 자신의 미래에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까지 시어머니를 좇아간 것이다. 

 

2021년 11월 11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룻기서강해(02) 나오미에게 불어닥친 불행,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룻1:1~5)_2021-11-10(수)

https://youtu.be/oHni65hCbKY  [혹은  https://tv.naver.com/v/23469253  ]

 

1. 룻기서에 나오는 난제들은 무엇인가?

  룻기서는 4장 밖에 되지 않지만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조금 있다.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는 룻이 낳았던 아들 오벳이 족보에서 왜 룻의 전 남편인 말론의 아들로 기재되지 않고, 보아스의 아들로 기재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룻4:21). 보아스가 '고엘(기업 무를 친족)'로서 룻에게서 말론의 기업을 이을 자인 오벳을 낳아 주었다면 오벳은 응당 말론의 아들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보아스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어려운 문제는 엘리멜렉과 말론의 기업 무를 자의 1순위였던 사람이 왜 나오미가 내놓은 밭을 사게 되면 자기의 기업에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룻4:5~6). 나오미가 내놓은 밭을 자기가 사서 나오미에게 돌려준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어차피 그 기업은 자기의 것이 되는데 말이다. 셋째로 어려운 난제는 과연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은 것이 이들이 지은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이다. 엘리멜렉은 약속의 땅을 등지고 떠나 모압 땅으로 간 것이 죄이며, 두 아들들이 모압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과연 죄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압 땅에 갔던 사람 중에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들이 거기서 죽었기 때문이다. 

 

2. 모압으로 이주한 나오미에게 불어닥친 불행은 무엇이었는가?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기에 유다 베들레헴에도 기근이 찾아왔다. 그러자 엘리멜렉은 자신의 아내 나오미와 자신의 두 아들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잠시 모압 땅을 이주하여 살려고 떠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리멜렉이 죽고 만다. 좀 일찍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들 한 명도 장가보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후 그의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은 모압 사람을 자기의 아내로 각각 취하여 들인다. 그때 말론은 룻을, 기룐은 오르바를 아내로 취한 것이다. 그런데 1년 2년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 그러다가 그만 말론과 기룐 둘 다 죽고 말았다. 그러자 엘리멜렉의 집안에는 과부만 셋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 죽고 자식들마저 죽었으니, 이는 가문의 대가 끊긴 것이요 과부들만 남게 되었으니 끼니 걱정마저 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3. 남자들은 다 죽어 나가고 세 과부들만 남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오미에게 있어서 모압 땅으로의 이주는 정말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 기근이 심하여 잠시 모압 땅에 가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 땅에 가서 살면서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말론과 기룐도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은 약속의 자손들은 아니지만 일종의 먼 친척뻘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형의 아들이 곧 롯이었고, 모압과 암몬은 그러한 롯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죄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을 죄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큰 죄가 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두 아들들인 말론과 기룐도 역시 죽고 말았다. 우선 결과론적으로 보면, 사람이 기본적인 수한을 채우지 못한 채 죽는 것은 분명 불행이다. 특히 엘리멜렉의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없이 다 죽어 버렸다는 것은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세 남자가 죽은 것이 약속의 땅을 떠난 것 때문이요, 이방인인 모압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남겨진 자인 나오미 자신의 평가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에게 일어난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녀가 다시 고향인 유다 땅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에 그곳 여인들의 말에 대답하며 들려준 말은 그때까지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그녀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룻1:20-21 나오미가 그들(베들레헴 여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4. 나오미에게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한 것이나 두 아들들이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취한 것은 굳이 죄라고 하면 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니라면 아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멜렉이 영원히 살려고 모압 땅으로 이주해 간 것이 아니라 잠시 기근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우거하려고 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은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었고, 야곱의 70명의 식구도 그렇게 한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압이나 암몬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는 율법 말씀은 없다. 다만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만 있을 뿐이다(신7:3).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은 조금 먼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나오미에게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그의 아들들의 이름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말론의 이름의 뜻이 '병약한'이요, 기룐의 이름의 뜻이 '쇠약한'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자기의 두 아들들이 그렇게 태어나게 된 것을 보았을 때, 진즉 자기들의 지은 죄든지 혹은 자기 조상들의 죄를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면 기근이 없어졌을 것이고 두 아들들도 건강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부한 채 모압 땅으로 떠나 버린 것이다. 그러니 엘리멜렉의 죽음과 두 아들들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게 되자 나오미는 그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로 풀어야 할 숙제를 도망으로 풀었던 것이 그녀와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의 죄라고 하면 죄였던 것이다. 

 

5.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주한 것이 죄였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오미가 자기의 남편과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해 간 것이 죄였다는 것을 나오미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두 아들들이 죽은 다음에 깨달은 것이었지 결코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나오미가 자신에게 불어닥친 불행의 원인을 자기의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로 돌렸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전능자께서 다 보고 계시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이 자기를 징계하신 것이며 자기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하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영원히 답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을 자기의 죄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고향에 돌아가면 고향 사람들로부터 따돌림과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그녀의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회개하면 다시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회개는 결국 다시 그녀에게 기쁨을 안겨 주고 자신을 행복자로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되었다. 

 

 

2021년 11월 10일(수)

정병진목사

 

신부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표현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 최종적으로 입성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다 입성할 수 있는가?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천국에 입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믿음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 자는 장차 천국에 신부로서 입성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은 신약의  주의 종들 곧 세례요한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 예수님께서 직접 그것을 말씀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신부상과 신약의 신부상의 중대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021-11-05(금) 금요기도회

제목: 신부(51) 구약의 신부상과 신약의 신부상의 중대한 변화는 무엇인가?(요한계시록3:3~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M6YHiYGkmxk  [혹은  https://tv.naver.com/v/23427862  ]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몇 시간에 걸쳐서 구약의 신부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구약시대의 완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예표는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다. 그녀는 고된 노역의 생활을 하다가 솔로몬을 만나 왕의 아내가 됨으로 고된 노역에서 벗어나게 된 여인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남편을 찾는 과정에서 기도와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왕이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정작 자신도 그 일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 많은 신부들을 산출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완전한 신부의 모습이다('아가서 강해 30강'을 들어보시기를 바란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술람미 여인 말고 그리스도의 신부의 예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신부들은 주로 창세기에 나온다. 그러한 여인들로는 하와, 사라, 리브가, 야곱의 4명의 부인들과 12아들들 그리고 이방 여인 룻이 있다. 그리고 드디어 여자의 후손이자 고엘(구속자)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다. 그러자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신부의 예표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신약에 등장하는 신부들로의 변화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신약시대에 출현한 신부상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신부상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구약시대의 신부상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비밀을 아는 자들 중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2. 구약시대의 신부의 특징은 무엇인가?

  구약시대의 신부상의 전형적인 모습은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부상의 예표는 구약성경의 술람미 여인말고 있는가? 있다. 그들은 주로 창세기에 집중하여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신부상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창세기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다섯 종류의 신부의 예표들이 등장한다.

  첫째는 아담의 아내였던 하와이다. 그녀는 아담의 짝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자신의 남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뱀의 말을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를 지은 여인이었다. 그리하여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징계를 보면, 하와는 임신과 해산의 고통이 더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남편이 그녀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도 둘째, 셋째, 넷째 신부의 예표는 다 족장들의 아내들인데, 그들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들이었던 레아와 라헬, 실바와 빌하이다. 우리는 '사라'의 예를 통하여,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했다는 것과 남편을 주인으로 섬김으로 신부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리브가의 경우를 통해서 신부는 기도를 통해서 찾아낼 수 있다는 것과 신부는 남편을 머리로 아는 존재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의 네 명의 아내를 통하여서는, 아내라 할지라도 신분이 다 똑같지 않고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아내들을 통해 난 자식들 12명의 사례를 통하여,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신부가 가려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거룩한 신부의 대열에 동참했던 자가 있다는 것도 배웠으니, 그녀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었다. 그녀는 과부였지만 자신의 남편이 되어 준 보아스를 만나 신부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상으로 우리는 구약시대의 신부의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구약시대의 신부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자신의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신부가 되려면 죄를 지으면 안 되는가? 그러한 사례에는 장자의 축복을 경홀히 여겼던 에서의 사례가 있고,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간통죄를 저지름으로 왕권과 제사장권과 땅의 축복을 잃어버린 르우벤의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야곱의 둘째부인이었던 라헬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는 그녀가 남편을 따라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그만 아버지의 가신(우상)인 드라빔을 훔쳐서 나오는 바람에 결국 노중에서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약속의 땅인 막벨라 굴에 묻히지 못했다. 그렇다. 신부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신부의 대열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과 천국에서 누리게 될 신분이 강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맡은 일에 충성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기는 자가 되게 해 주시고, 천국에서 누릴 신부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는 사례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기는 자의 예표를 보자. 그는 바로 '야곱'의 경우다.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얍복강에서의 기도도 혼신을 다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부러 져 주셨다. 그리고 그를 이기는 자라 불러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거룩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기도의 훈련을 잘 쌓고 기도로 어둠의 세력을 뚫는 신부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맡겨진 일이나 모든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여 계급이 올라간 경우도 있으니, 그들의 예로는 바로 레아의 아들 '유다'와 라헬의 아들' 요셉'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유다는 타고난 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왕중의 왕이신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형제가 위기의 순간에 몰렸을 때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음으로 그는 왕권신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똑같은 왕권신부가 된 자이지만 조금 다른 자가 있으니 그는 '요셉'이다. 왜냐하면 요셉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에서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의 사명에 충실했다. 그래서 그는 꿈의 계시대로 절을 받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룻이라는 여인은 이방 여인이어서 결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규정을 뛰어넘어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의 계명에 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신이라는 알고 그분을 붙듦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신부들의 전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3. 신약시대에 신부상은 구약시대와는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구약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은 아마도 신부의 대열에 참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경우, 신부가 되기에 합당한 조건들을 총족시키기에는 우리의 삶과 신앙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에 태어난 자들로서, 너무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나를 24시간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라고 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입과 생각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어야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지금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신부가 될 수 있는 경륜상 더욱더 복받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약시대에는 우리 성도들이 받아야 할 복이 이 땅에 있는 복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된 신령한 복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한 마디로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4. 신약시대에 이기는 신부가 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신약시대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신부를 일컬어 '이기는 자(우세하는 자)'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신약의 이기는 신부가 되기 위해 제일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이기는 자들은 대체 누구이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선포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의 경우 그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회개(메타노이아)'였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고 외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자만이 천국을 가져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회개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최종적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막1:4).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막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둘째, 이제 공생애를 첫 시작하는 예수님께서도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역시 '회개'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 제일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생애를 다 마치고 승천하기 직전에도 주님께서는 회개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다(눅24:47~48)

눅24:47-48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셋째,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이후, 방언을 듣고 물려준 자들에게 맨 처음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가 외친 말씀의 핵심은 회개해야 성령받고 구원받는다는 말이었다(행2:38). 그리고 그가 순교하기 전에 남긴 말씀도 역시 주님은 회개를 원하신다는 것이었다(벧후3:9).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넷째, 사도 바울의 바톤을 이어받아 이방인의 복음 전파에 힘썼던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선포의 주제는 회개였다. 그가 각 성에 가서 외쳤던 말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행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다섯째, 사도 요한 역시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지만 그것이 효력있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지은 죄를 그냥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의 입술로 자백해서 용서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요일1:9). 회개없이는 지은 죄가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섯째, 무엇보다도 승천하신 주 예수께서 A.D.95년경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사도 요한을 불러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 역시 그 중심 주제가 회개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때 요한에게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셨는데,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회개해야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계2:5[에베소교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16[버가모교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2:21-22[두아디라교회]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계3:3-4[사데교회]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3:18-19[라오디게아교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끝에 가서도 예수님께서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자기의 더럽혀진 겉옷(두루마기)을 빨아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들어올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4).

계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우리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회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죄를 회개했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회개하면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는 자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고  하셨으니(계21:2,9), 신약시대에 최대의 신부의 관건은 회개에 있었던 것이다. 

 

5. 어떻게 하면 더럽혀진 자신의 옷을 희게 할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결국 흰옷을 입은 자가 이기는 자인 것을 알 수 있고, 이기는 자가 될 때에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계3:4~5, 4:4, 6:11, 7:13~14, 19:8, 19:14, 22:14). 그러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입혀진 흰옷은 어떻게 더럽혀지는가? 그것은 죄를 지을 때다(계22:15). 십계명을 어기면 옷이 더럽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옷을 씻어서 희게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더럽혀진 옷을 희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를 위해 친히 고엘(구속자)로 오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피뿐이다.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만이 사람이 지은 죄를 깨끗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가 나의 더럽혀진 옷을 씻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요일1:9). 그때에 어린 양의 피가 우리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계7:13~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것은 수천 번을 강조해도 과하지가 않는 것이다. 

 

6. 나오며

  회개는 백 번 천 번을 외쳐도 부족함이 없는 말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결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결국 그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정말 달라지고 확연히 드러난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하면 지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인 것이다.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부지런하며 하나님의 왕국 건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의 상급과 신분을 결정하는 요소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해결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지은 죄로 인하여 자신의 옷이 더럽혀져 있는 자는 결국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하늘에 있는 24장로의 음성을 통하여 말한다. 오직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려면 예수의 피에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빨아 희게 하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그리고 예수 믿을 때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사함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음을 본다. 죽어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누구의 말을 따라가야 하는지 그때 가 보면 다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영이 겸손한 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서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날마다 희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그 날에 반드시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1년 11월 05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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