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26) [아가서강해(16)]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해 잃어버린 주님,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아5:2~16)_2021-10-11(월)

https://youtu.be/8bdlLCTossw  [혹은 https://tv.naver.com/v/22937975 ]

 

1. 솔로몬과 결혼했던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신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아가서 3:6~11의 말씀이 결혼식의 풍경을 묘사해 주고 있다면, 4:1~5:1의 말씀은 피로연 때 신랑이 자기 아내를 자랑하는 말이자(4:1~7), 결혼 당일 날 신부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탄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아4:8~5:1). 왜냐하면 이 시기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나의 신부'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서 5:2의 말씀은 결혼식 때가 조금 지난 싯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부터는 '신부'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랑은 그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했다(아5:2). 그런데 그때에 신랑은 밤 늦게가 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므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자 신랑은 문을 열어 달라고 노크한다. 하지만 신부는 신랑을 외면한다. 핑계는 이러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힐 수 있을까?(아5:3)" 그런데 이러한 신부의 반응은 신랑이 집에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을까?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신랑이 밤늦게까지 이슬을 맞으며 늦게 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건 신부가 싫어서 늦게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부는 그때 즉각적으로 신랑에게 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신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손을 내밀었던 신랑은 그만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왜 신랑은 그 자리에서 급히 떠나야 했는가? 신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랑의 부르심에 신부는 즉각 응답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신랑은 왜 또 갑자기 신부 곁을 떠나야 했는가?

  밤늦게 이슬과 함께 돌아온 신랑은 그만 또다시 신부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그 이유를 두고, 신랑이 삐져서 떠나 버렸다고 주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신랑이 삐져서 신부 곁을 떠나 버린 것일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에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문 성경대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전후 문맥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사회 문화적인 관습까지도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성경에 나오는 비슷한 사례도 찾아보아야 한다. 때로는 어떤 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조명하심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신랑이 왜 새벽녘에 다시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주석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후 되어진 일들을 보면, 그때 신랑은 그녀가 미워서 떠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녀가 남편을 찾아내었을 때에 솔로몬은 자기의 동산에 있었고 그곳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꺾여진 백합화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렇다. 신랑이 밤늦도록 늦게 들어온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치는 양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 문제를 처리하다가 오다보니 그만 집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하고 있을 때에, 또 양떼 혹은 백합화에 급박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급히 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백합화로 묘사되고 있는 신부들에게 중차대한 일이 발생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아침에 신부가 신랑을 보았을 때에는 그가 자기 동산에서 이미 꺾여진 채 있는 백합화(신부)를 주워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지상에 있는 신부 중에 누가 그만 순교하는 상황이 아니었겠나 생각이 든다. 

 

3.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린 신부가 자신의 신랑을 찾기 위해 첫 번째로 한 일은 무엇인가?

  갑자기 떠나가야 했던 신랑, 그러자 신부는 대충 숄을 걸쳐 입고 문밖을 나선다. 신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신랑을 부른다. 그런데 불러도 응답이 없다(아5:6). 자신의 부주의로 인하여 신랑을 놓쳐 버렸다고 생각한 신부는 더욱 애절하게 신랑을 부른다.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혼자서 그것도 아무런 무장도 없이 그 늦은 밤에 성안을 두루 돌아다닌다. 신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그녀는 성안에서 순찰하는 자들에게 얻어맞기도 했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숄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신랑을 찾겠다는 오직 일념으로 성안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가 그녀가 생각한 것은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탁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그녀가 끈질기게 기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녀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예비 신혼집에 있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예비신랑을 보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만나기 위해 성안을 찾아헤맨다. 그때 그녀가 성안의 순찰자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한다. 자기가 찾는 대상이 누군기를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신랑이 그녀에게 불쑥 나타난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그녀는 초신자의 상황이었기에, 주님도 금방 응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솔로몬은 이미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의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교양생활 하듯이 기도해서는 아니 된다. 간절히 찾고 부르짖어야 한다(렘29:12~13). 그것이 이미 신자가 된 자들의 기도의 형태인 것이다. 

 

4.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될까?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누군가가 나의 문제를 놓고 중보기도해 준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자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중보 기도의 효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보기도는 아무나 해서 응답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때 남편을 찾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도부탁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그들도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으로 온 자들이다. 하지만 실제 신방 한 번 꾸려본 적이 없는 신부들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딸들은 솔로몬이 자기의 동산에 가 있을지라도 그 장소를 절대 찾아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렇나 장소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할 때에는 나 자신보다 더 영성이 약한 자들에게 부탁하는 일은 삼가할 일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에서는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신부가 보다 더 낮은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했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측면에서 신랑을 찾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5. 잃어버린 신랑을 찾기 위해 신부에게 필요한 2가지 사항은 무엇인가?

  신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잃어버린 신랑을 찾을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비로소 터득하게 된다. 첫째, 그것은 잃어버린 신랑을 찾으려면 신부는 최소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아5:8).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녀는 자기의 신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했었다. 이는 그녀가 깊이 뉘우치고 반성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랑을 찾지 못한 것 때문에 병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회개하기 전에 그녀는 성안에서 어떤 일을 당해야 했는가? 그녀는 성안에서 순찰하는 자들과 성벽을 지키는 파숫꾼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이들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활동하여 괴롭히는 악한 영들과 같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하고 신랑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원수의 영토에도 자신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잃어버린 신랑을 찾으려면 신랑이 누군지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했는가? 그녀는 무려 10가지나 되는 것으로 자기의 신랑을 자랑을 하고 선포를 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자랑했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명의 사람들들 중에 뛰어나답니다(으뜸이랍니다)(아4:10)". 이것은 그녀가 맨 처음에 솔로몬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고벨화 송이로 비유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적갈색의 고벨화는 흰색 바탕에 곧 자신은 죄가 없어 순결한 분이시지만, 바깥 쪽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세마포를 입으신 분을 지칭하는 것처럼, 신랑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랑이 어떤 존재인지 그때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난관 가운데서도 신랑의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자랑하되, 10가지로 나눠서 자랑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러한 간증은 수많은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2021년 10월 11일(월)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어떤 교회를 귀히 보시고 그 교회를 쓰시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사마리아에 임한 재앙이 물러나게 된 것은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또한 네 명의 나병환자의 귀중한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근의 재앙을 떠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임한 기근의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개인과 교회를 쓰시지 않는 것이다. 2021-07-18(주일) 주일낮예배[창립기념감사주일설교] 제목: 주님이 찾고 있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줄 교회와 성도(왕하7:1~10)[창립기념감사주일설교]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NWnvsRv-sw [혹은 https://tv.naver.com/v/21418806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전공하는 신학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를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를 만드는 일인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천국에 들어가서도 거기서 왕노릇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더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과 회개"다. 믿음으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딛지만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만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한 편 강도의 경우를 보라. 그렇다. 회개없이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한 편 강도를 보라. 그는 행한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도 필요하고 회개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는 어떠한 회개가 있는가? 사실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회개(회심)의 방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회개의 방면도 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우리를 저주로부터 탈출하게 도와주는 회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것이 과연 진정한 회개이며,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그리고 회개 후에 나에게 축복이 주어지면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2. 왜 사마리아에 굶주림의 재앙이 찾아왔는가?

  왜 사마리아에 굶주림이 찾아왔던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람나라의 벤하닷2세가 쳐들어왔고 그들이 사마리아 성을 에워쌓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이 외부와 차단되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먹을 식량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굶주림의 기근이 찾아온 것은 그들의 선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출20:5). 왜냐하면 그의 부친 아합왕과 그의 어머니 이세벨이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북이스라엘을 바알신앙의 우상의 나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잡아다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사한 이세벨 때문에 죄없는 나봇이 포도밭에서 돌에 맞아서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죄값은 비참했다. 점차 식량이 떨어지니 식료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부정한 짐승인 나귀가 음식으로 팔렸는데 나귀의 머리 하나가 은80세겔이 나갔다. 이는 노동자가 1년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할 돈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둘기의 똥처럼 생긴 콩의 1/4갑이 무려 은5세겔에 팔리고 있었다. 노동자의 4일치의 품삯이 은1세겔이었으니, 20일동안 일해서 벌어야 할 돈으로 겨우 콩 1/4조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는가? 왕이 들으니 그때 성 안에서 두 여인이 싸우는 소리를 들렸다. 두 여인이 합의하여 그날에 한 여인의 아들을 서로 삶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다른 여인의 아들을 삶아먹기로 했는데, 그 여인이 그만 자기자식을 숨겨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차마 들을 수 없는 참혹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세 번 있었다. B.C.854년에 이때에 한 번 있었고, 남유다가 멸망할 때에 또 한 번 있었으며(B.C.586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멸당당할 때(A.D.68~70)에도 그랬다. 

 

3. 왜 사마리아 성에 임한 굶주림이 하루 아침에 끝날 수 있었는가?

  어떤 이는 말한다. 사마리아 성에 기근이 끝나게 된 것은 "이제 하루가 지나면 고운 밀가루 한 스아가 한 세겔로 팔리게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에 팔리게 될 것(왕하7:1)"이라고 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 뿐이지 자신이 직접 지어내어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야 옳다. "왜 하나님께서 기근의 재앙을 풀어주셨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임한 기근의 재앙을 왜 풀어주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확 마음을 바꾸시면 되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는데 그냥 마음을 바꾸시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곧바로 마귀의 참소가 있을 것이다. 마치 욥처럼 말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행하신다면 이 우주에 있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그때 성문 어귀에 있던 네 명의 나병환자가 이판사판의 상황에서 적에게 항복하기 위하여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자국소리와 그들이 가진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거대한 군대의 소리로 바꾸어주셨고, 전차 바퀴 소리와 말 소리로 바꾸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꾸신 것은 맞다. 그러니까 그 소리를 듣고 아람 군대가 그 밤중에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 아람 군인들은 너무나 급한 나머지, 자기들이 쳐놓은 장막도 그대로 놔두고, 매놓았던 말과 나귀도 그대로 놔두고, 아사작전을 펼치려고 가져다놓은 군량미도 그대로 놔두고, 심지어 어느 전쟁 통에 빼앗았는지 모르지만 금과 은도 그대로 놔두고 그리고 자신들이 입던 옷까지 전부 그대로 놔둔 채 몸만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 그것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성에 임한 굶주림의 기근이 하루 아침에 끝날 수가 있었던 것인가? 요약하면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여호람 왕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백성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고통당하고 있을 때 홀로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하고 있었다. 여호람 왕은 아합 왕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곁에 좋은 모사로서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사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아람 나라 왕의 모든 작전회의를 다 여호람 왕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왕하6:12). 그러므로 그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섬겼다(왕하6:21). 그러니 그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왕하6:30),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에게도 말하기를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내가 여호와께 무엇을 더 바라리요?(왕하6:33)" 하면서 엘리사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재앙을 물러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네 명의 문둥병자가 그 시간에 긍휼을 구하기 위해 아람 진영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은 바뀌었다. 여호람 왕의 회개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아람 군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 순서가 되었다. 하지만 아람 나라를 하나님께서 까닭없이 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람 군대를 쫓아보내 버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네 명의 문둥병자가 그 역할을 대신 해 준 것이다. 그들이 아람 진영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와 쇠붙이 소리를 크게 하여, 아람 군대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람 군인들은 북이스라엘 왕이 헷 족속의 왕들과 애굽의 왕들을 용병으로 기용하여 쳐들어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을 친 것이다. 

 

4. 하나님께서 네 명의 나병환자를 굶주신 사마리아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네 명의 나병환자를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네 명의 나병환자가 아람 나라로 걸어들어갔기에 그것을 쓰신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의 내면에는 과거 북이스라엘 왕이 과거 아람 군대를 포로로 잡았지만 도리어 떡과 물을 먹여 보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왕하6:22~23).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한 마음 때문이다. 자기들이 체험한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쓰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람 진영에서 자기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들은 그 밤에 아람 진영으로 갔었다. 그러자 아람 군대들은 모든 것을 놔둔 채 도망쳤다. 그러니 네 명의 나병환자는 장막에 들어가 허겁지겁 먹고 마셨다. 그리고 배가 불러서 보니 의복도 보였고, 은금패물도 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장막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감추었다. 하지만 그중의 한 명이 말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않도다. 오늘은 이렇게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이 소식을 성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밝은 아침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왕하7:9)" 그래서 그들은 밤중에 사마리아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성의 문지기에게 고했다. "여보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전하겠소. 지금 아람 진영이 텅텅 비어있소. 그리고 그들이 급히 도망치느라 모든 것을 놔두고 갔으니 어서 가서 그 물품들을 취하라고 왕에게 말해주시오" 결국 문지기는 왕궁 담당자에게 전달하였고 그 소식에 왕의 귓가에도 들어갔다. 그러자 처음에 왕은 의심하였다. 저들의 작전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탐꾼을 보내고 보고를 받은 왕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 다음날 백성들이 왕의 말을 듣고 적진으로 들어갔고 적진에 쌓아둔 수많은 군량미를 취하여 가져올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날 저녁 성문어귀에게 거래되는 밀가루와 보리값이 거의 평상수준을 회복하게 되었다. 

 

5.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렇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그것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당시에 누군가가 나서서 아람 군대를 물리쳐야 했야. 그런데 그때 그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을 하나님이 들어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네 명의 나병환자가 믿음이 있어서 그들을 쓰신 것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룰 사람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쓰임받은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어떤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거기에 그 뜻을 이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복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좋은 소식을 나누기를 기뻐하는 사람을 쓰신다. 그들이 그때 아람 나라의 진영에 있는 음식들과 물품들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아람 군대와 싸우러 간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항복하여 혹시 살려주면 살아보려고 그리 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만이 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들도 그곳을 얻기 위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사마리아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꺼이 그 밤 중에서 다시 사마리아 성을 찾아나선 것이다.

 

7.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

  이제 동탄명성교회는 2가지 사실을 실천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삶에 어려움이 닥치고 고통이 찾아오고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에 있었는지를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는 회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아서라였다(출20:5). 그런데 우리 교회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우리 동탄명성교회는 이전에도 7년동안 오직 "회개"를 외쳐왔다. 왜냐하면 오직 회개만이 구원의 최종관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6월부터는, 회개가 우리자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최종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저주마저도 끝내는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조금 지났다. 성도들의 경우는 약 9~10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회개소식을 듣고 실천한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건강은 나아지기 시작했고 재정은 회복되고 있으며 자녀의 문제마저도 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삶의 모든 저주의 문제가 회개를 통하여 풀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열심이 사는 것도 중요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일이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손대는 모든 일마다 잘 되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가문의 저주를 끊어냈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끊어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후손들에게 형통함의 축복이 뒤따라온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 교회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을 꼭 붙잡았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는 성실함으로 그리고 충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주를 끝내야 가능한 일이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있어서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저주를 끝냈기 때문에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17세부터 30세까지 엄청난 어려움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형들의 시기질투로 인해 노예로 팔려야 했고, 애굽에서는 자기 주인의 처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흔들리지 않고 순결과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살았던 것은 그가 17세에 꾸었던 계시적인 꿈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고 그의 사명이었다. 그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집안 모든 식구들을 굶주림에 건질 수 있었고, 애굽의 고센 땅을 이스라엘 민족의 거주지로 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그가 꿈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동탄명성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 곧 세례요한의 사명, 즉 이 땅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을 붙들고 있다. 이 기쁜 소식을 내 교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전파하는 것이 사명인 것이다. 

 

8.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쓰실 수가 있다. 그렇다고해서 아무나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어떤 재앙을 거두실 수가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냥 재앙을 거둬가시지는 아니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서 그리고 충성되이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 일이 다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주 가운데에 놓여있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는 자기에게 임한 저주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한 마디로 회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지은 죄와 내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낱낱이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한 번의 회개만으로 자신과 조상이 지었던 과거의 죄가 한거뻔에 씻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과거에 귀신들이 우리 몸에 들어올 때 각각의 죄 때문에 합법적으로 우리 몸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한 번 회개했다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다 나가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분량은 아주 많다. 적에도 몇  개월에서 많으면 10년까지도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상들이 지은 죄가 많으면 더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을 끝내지 아니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저주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람 왕에게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도 보아주거나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골방에서 홀로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병환자의 경우를 마음에 새기고 싶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할 때 그곳에 나병환자들이 있었던 것을 말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바로 그곳에 내가 있어야 나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경험한 기쁜 소식을 자기만 누릴 것이 아니라 전해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먼저 아름다운 소식을 받게 된 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7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46) 영적인 은혜가 없거나 약하면 가문의 죄를 회개하라(엡6:10~13)_2021-01-19(화)

https://youtu.be/QEPSBA9NttE  [혹은 https://tv.naver.com/v/18004654  ]

 

1. 가문의 죄란 무엇을 가리키나요?

  가문의 죄란 자기의 문중 곧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가리키는데, 특히 자기의 조상들 중에서 자기에게서 5대 조상부터 시작하여 시조까지 지은 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분류는 아니며, 출20:5과 신5:9의 말씀에 따라 조상들이 지은 죄 중에서 3~4대까지의 죄값을 그의 후손에게 묻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조상들에게서 자기로부터 1대에서 4대까지를 "세대"라 부르기로 한 것이고, 5대부터 시조까지를 "가문"이라고 부르기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문의 죄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많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성씨)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최치원가문이요 설총가문이라고 하는데, 그의 후손이 약 70대정도 된다고 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성씨가 만들어졌기에, 30대에서 40대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본 설교자의 가문은 "하남 정씨(河南 程氏)"로서, 고려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따라 청나라에서 이 나라에 정착한 "정사조"라는 분을 시조로 둔 가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현재 7,766명 정도 살고 있으니, 희귀 성씨이기는 하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가문으로서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조선시대에는 무과에도 급제한 사람과 장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2. 가문의 영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요?

  자기로부터 5대조 위로부터 시조까지 지은 죄들로 인하여 달라붙은 악한 영들은 지금 하늘(공중)에 뭉쳐 있습니다. 엡6:12에도 하늘에 각종 높은 계급의 영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들 안에 있는 악의 영들이 있다고 했는데, 이 영들이 바로 "가문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보면 각 가문마다 거대한 영이 있습니다. 가문의 영은 수많은 조상들의 영들(숫자로 치자면 조나 경)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거대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하늘에 어마어마하게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영안으로 보면, 상공의 500m에서 2km정도의 높이에 그 놈들이 있으며 그 크기가 좌우로도 2km정도로 매우 거대합니다. 그런데 이 용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후손이 어디에 살든지 다 실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용)은 여러 영들(귀신들, 악령들)이 결합된 것이므로, 조상들이 지은 죄들의 숫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은 보통 3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 바, 하나는 사람에게 성품처럼 나타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문에는 혈기분노가 가득합니다. 또 어떤 가문은 게으름이나 음란, 음주와 다툼(싸움), 불안초조 등으로 많습니다. 이는 다 가문의 영의 영향을 받아 혈통에 녹아서 내려오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안 좋은 가문의 영들로 인해 가문이 기를 펴지 못하고 길이 막히고 속임당하며, 실패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자살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문의 영들 중에 실패하게 하는 영, 거짓과 속임의 영, 깨어지게 하는 영, 술을 먹게 하는 영, 남을 모함하고 억울하게 하는 영 등이 많이 있을 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각종 우상숭배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설총의 후손(순창 설씨)들 중에는 부처의 영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불교를 융성하게 만들었던 신라시대의 원효대사(A.D.617∼686)가 설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가문은 조상제사를 지극 정성으로 드리고 있는 가문이 있고, 어떤 가문은 무당을 많이 배출하기도 합니다. 또한 미신과 잡신을 많이 섬기는 가문도 있는데, 그러면 그것에에서 파생된 죄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무당이 많이 배출된 가문일수록 혈기분노의 죄, 음란과 거짓의 죄, 우울과 분리의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가문의 죄가 크고 많을수록 하늘을 덮고 있는 영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자기와 후손이 영적인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가문의 영이 나와 하나님의 보좌 사이에 통로를 막고 있어서, 웬만해서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동시에 하늘로부터 기도응답이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나님께 올라가고 기도응답을 내려오는 것은 다 천사들이 하는 일들인데, 이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로 인하여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려는 것들을 우리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은사나 은혜는 빛으로서 우리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공중에 있는 영들이 그것을 막아버리면 영적은 은혜가 내려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3. 가문의 죄를 회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가문의 죄를 회개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의 보좌 사이에 영적인 통로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약하면 열려지는 하늘통로가 아주 작으며(1~5mm정도, 그러나 3cm정도가 되는 분도 있음)) 또한 곧바로 올라가지 못해 수직으로 올라가다가도 옆으로 비껴가서 헤매는 분들도 있습니다(아니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혼자만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해야 합니다. 부부가 같이 해야 자녀가 형통하게 됩니다. 기왕이면 자녀와 손자까지 함께 기도할수록 하늘로 가는 통로가 좀 더 크게 열리며 빨리 열리게 됩니다. 이 통로가 열리게 되면 놀랍게도 자손들에게 영적인 은사가 임하기 시작하며, 인생에 장애도 없어집니다. 둘째로, 사람의 성품이 바뀝니다. 혈기와 분노로 가득했던 사람이 침착하고 온유해지며, 다툼과 분쟁을 일삼았던 자가 화해와 화목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셋째로, 더이상 자신이나 자녀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고 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열린 통로로 벧엘의 야곱처럼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넷째로, 비록 자식이 죄를 짓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게 되고, 영적 침체에 빠졌다가도 이내 회복하게 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거나 못하는 데에는 가문의 영의 영향이 있는 것임을 알고 기도에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문의 영들이 하는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하늘길이 열려지는 것이니 그놈들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하여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4. 가문의 죄는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가문의 죄를 회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속에 영들(귀신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방해하면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첫째로, 회개를 하되 다음과 같은 순서로 회개를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자신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4가지 종류), 자범죄(19가지 종류)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회개기도문"에 나옴). 그리고 기왕 회개할 때에는 부부랑 같이 그리고 자녀랑 함께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대 위에 있는 죄들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대(자기로부터 1대에서 4대까지 조상)의 조상들이 지은 죄는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자기가 본 것이 있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들을 이제 낱낱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가문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데, 자기로부터 5대부터 30대 조상까지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합니다. "친가 5대가 조상제사를 드린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옵소서. 친가 6대가 조상제사 드린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옵소서...", "외가 5대가 혈기분노를 냈던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외가 6대가 혈기분노를 냈던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하면서 계속 위로 올라가면서 죄를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고 둘째로, 회개한 후에는 십자가 세우기를 합니다. "친가 5대와 십자가 세운다. 친가 6대와 십자가 세운다...친가 30대와 십자가와 세운다."는 식으로 말이죠. 십자가를 세우면, 죄를 회개할 때에 악한 영들이 공격하지 못하므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셋째로, 혹 자기가 심각한 질병(암병, 희귀병, 불치병)에 걸려 있거나, 사업이 망해 가문이 기울어져가고 있을 경우 그리고 신내림을 하여 무당의 영이 자신에게 있는 경우에는 전문적인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는 사역자로부터 축사를 받고, 금식도 해 가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상들이 우상에게 제물과 예물을 많이 바친 경우라면 속죄예물도 바쳐야 합니다. 

 

5. 가문의 죄는 얼마만큼 회개해야 하나요?

  가문의 죄는 한 두번, 1년 혹은 2년정도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가문의 영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해체시키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면서 기도하면 하늘길은 얼마든지 뚫을 수 있습니다. 1mm라도 뚫으면 벌써 삶이 달라집니다. 집안에 실패와 어두운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이 기도하면 좀 더 빨리 하늘길을 뚫을 수 있습니다. 혼자 하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도 한 5년에서 10년쯤 기도하면 그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나의 죄부터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번 회개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은 회개기도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1월 19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35) 회개할 자범죄는 무엇인가?(16) 욕심(탐욕)의 죄(마19:167~22)

https://youtu.be/KcHxBrOaRZs [혹은 https://tv.naver.com/v/17729497  ]

 

1. 욕심의 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욕심이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갖고자 하거나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죄로 치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욕심 그 자체가 다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욕심"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뒤미아"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긍정적으로 쓰일 때에는 "갈망, 소욕"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쓰일 때에는 "정욕, 욕심, 욕망, 탐욕"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다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자기의 육신을 위하여 추구하는 것이 되면 결국에 가서 죄가 되는 것이며, 자신의 영을 위하여 추구하는 것이 되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2. 육신을 위한 사람의 욕망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사람이 자신의 육신을 위해 품는 욕심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육신을 위한 것 곧 이 땅의 것이요 죽으며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중, 첫째는, 더 가지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자기나치게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데 더 가지려하는 끝없는 소유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에는 물질욕, 권세욕, 자리욕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상적으로 얻기가 어려우니까, 권모술수의 죄를 짓기도 하고, 거짓의 죄를 짓고, 폭력의 죄를 짓고, 모함의 죄를 지으며, 더 나아가서는 살인의 죄를 짓기도 합니다. 둘째, 더 높아지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좀 잘 포장되면 "세상적인 성공"이라는 말로 포장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의 실체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인간의 첫타락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뱀의 말을 듣고는 자신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그만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자 선악과의 열매는 그녀의 눈에 보기에 더이상 금단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보기에 좋아보였고, 먹음직스럽게도 보였으며,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뱀(사탄마귀)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해서 지은 죄를 인간에게 그대로 주입한 것입니다. 이처럼 분수에 지나치게 되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더 즐기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나치면 쾌락과 음란의 죄로 이어지게 되며, 유흥의 죄로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세상에 대한 욕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3.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욕심은 무엇이었나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청년은 세상의 물질에 욕망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르나 그는 부자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영생도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물질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지만 영생도 가졌으면 하는 생각에서 주님께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고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은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가 당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다음의 한 가지를 권면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인생목적은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 땅의 것을 내려놓기가 이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려놓을 수가 있다면 그는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 위치나 직분에 대해서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갖는 것도 죄인가요?

  그렇습니다. 위치나 직분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정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때가 되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데도 시기와 질투심 혹은 자리에 대한 강한 욕망으로 인해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까지 탐하게 될 때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당의 탐욕이 등장합니다. 레위지파 중에서 고핫자손이었던 고라가 육체적으로는 장자였던 르우벤 자손의 몇몇 사람들과 족장 250명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에게 제사장 직분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지도자와 제사장 된 것은 그들 스스로 구하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 사람에 대한 안배를 통해서 이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능력과 지식이 다르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품었던 고라일당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그들의 가족은 산 채로 음부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족장 250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 그만 타죽고 말았습니다. 

 

5. 어떻게 하면 욕심을 죄를 이길 수 있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욕심의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품어 "욕심의 영"을 불러들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의 영이 들어와서 또다른 온갖 종류의 죄를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딤전6:7~8). 왜냐하면 육신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되면 그것이 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셋째, 하늘의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소욕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만약 보이는 것이요 물질적인 것이요 이 세상의 것이라면, 다 하나님으로부터 좇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소욕(갈망)은 성령의 열매들을 가져오는데, 이러한 것에는 오래참음이요 온유함이요 절제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은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쟁과 음란, 술취함, 방탕함 같은 것들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의 소욕을 좇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하며, 성령의 갈망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01월 05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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