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셨다는 말씀의 의미는?(마18:21~3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YUOawRAayM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15 ]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전에 지었던 모든 죄는 싹 다 없어지는가? 아니면 없는 것처럼 여겨주시는 것인가?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죄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분의 피로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 짓고 있는 죄를 용서받았다거나 혹은 미래에 지을 죄도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아직 짓지도 아니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데도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늘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며, 동시에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데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동시에 죄를 탕감받았다는 말도 종종 쓰게 된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탕감받았다는 말은 과연 같은 말인가 아니면 다른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의 죄는 과연 어떻게 처리되며, 또한 현재 짓고 있는 자범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한다. 

 

2.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될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안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변화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영의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역시 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살펴보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될 때에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2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는 우리가 지었던 과거의 죄들이 예수님의 피로 덮여진다는 것이다. 이때 과거에 내가 지었던 죄들은 다 행위책에 이미 기록된 채 있는데, 그 행위책에 기록된 채 있는 나의 죄들을 예수님의 피가 그대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죄를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는 있으나 죄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둘째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다. 누가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의 가장 확실한 잣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이다.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계21:27). 그런데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이 된다. 

  둘째,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 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면 이 땅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때 성령은 우리의 존재 중에 영 가운데로 들어오신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타고난 생명에다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나에게 덧대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채 있는 사람이며, 이 땅에서는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3. 회개에는 어떤 종류의 회개가 있는가?

  우리는 보통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한다. 그런데 회개의 종류에도 시간적으로 볼 때에 2가지 종류의 회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처음에 한 번 하는 회개로서, 단회적으로 회개하는 회개 곧 '회심으로서의 회개'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날마다 짓는 죄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반복적인 회개'가 있다. 그럼 이 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첫째, '회심으로서의 회개'는 일생에 한 번 하는 회개로서, 자신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행하는 회개가 바로 이 회개다. 이전에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회개가 바로 '회심으로서의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개는 일평생에 한 번 하는 회개다. 우리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거듭나게 되고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게 된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성령을 받아 그분와 함께 살게 된다. 

  둘째, 그런데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자백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한 사람이 다시 죄를 짓게 될 때,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행하는 회개로서, 죽는 날까지 행하는 회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 이외에 죄짓지 않고 살아갈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라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그냥 놔두어서는 아니된다.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회개치 않은 죄 때문에, 죽을 때에 성령이 떠나가면서 행위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 그리고 성밖으로 쫓겨나거나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죽는 그날까지 회개를 해야 한다. 

 

4.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탕감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마18:27,32). 그렇다면, '탕감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탕감(蕩減)'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로서, 흔들 '탕' 자에, 덜 '감' 자다. 이는 빚이나 요금, 세금 따위의 물어야 할 것을 흔들어서 덜어준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삭쳐준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는 빚을 덜어준다는 의미로 풀이되는 단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탕감한다'는 단어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탕감하다'는 단어는 '아피에미'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피에미'라는 단어는 대체 어떤 뜻인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내버려두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버리다'(고전7:11,12,13), '떠나다'(요4:3, 16:28), '내버려두다'(요14:18), '허락하다'(마3:15), '용서하다(사하다)'(마6:14~15, 약5:15, 롬4:7, 행8:12) 등으로 쓰인다. 그런데 빚이나 죄에 대해서 쓰일 때에는 이 단어의 뜻이 대부분 '사하다', '용서하다'의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탕감받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18:21~35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도 이 단어는 두 번은 '용서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고(마18:21, 35), 두 번은 '탕감하다'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마18:27,32).

 

5. '탕감받는다' 혹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탕감받는다' 혹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 죄를 일시적이지만 없는 것으로 여겨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피에미'라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을 갚아야 할 날짜가 되었을 때에 주인이 그를 불러내었다. 그런데도 그 종은 갚을 것이 없었다. 그러자 주인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서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애원하면서 말했다. "주인이여, 내게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장차 갚을 것입니다."(마18:26).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풀어) 보내면서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의 아주 작은 빚을 진 자신의 동료 종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조르면서 그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동료 종이 엎드린 채 말했다. "나에게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장차 갚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둬버렸다. 그러자 그의 동료 종들이 그것을 보면서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소상하게 주인에게 알렸다. 그러자 주인이 노하였다.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을 다시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악한 종이여, 네가 간청하니 내가 네게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왜 네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면서,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겨주라고 하였다. 여기서 '옥졸들'이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고문을 주는 사람, 형벌을 주는 사람'이란 뜻을 가졌다. 그렇다. 만약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더라면 그도 역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채 계속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아니함으로 그는 오히려 형벌주는 자에게 끌려가서 형벌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탕감받는다'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지은 죄들을 아주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빚문서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을 죄에 적용하면,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기록된 행위책에서 찢어서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빚갚는 것을 일시적으로 유예해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빚문서를 없애버릴지에 대해서는 빚을 탕감받은 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처리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용서를 받은 것은 일시적인 용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서 과거에 지은 죄를 모조리 다 용서받기는 했어도, 우리가 그 뒤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시 그 죄를 소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탕감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6. 탕감받은 죄가 완전히 없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탕감받은 것'이다. 용서를 받기는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유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받은 자답게 살지 않고, 죄 용서를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용서받았던 과거의 죄는 일시에 다시 부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신에게 아주 작은 양의 빚을 진 자를 불쌍히 여겼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상태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 날에는 그 빚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주인이 자신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신도 자신에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겼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과거의 죄가 탕감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로 천국에 있는 행위책에서 내가 지은 죄의 목록들이 완전히 찢겨져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피에 덮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탕감받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자처럼 남들의 죄들도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죄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피가 걷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죄사함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서부터 떠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말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탕감받는 것'이다. 죄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여겨준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하나 모든 죄를 다 고백해야만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한 생각나지도 않은 죄들도 많이 있을텐데, 그 죄를 어찌다 하나도 빠짐없이 회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낱낱의 죄를 다 회개해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행하는 회개 곧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할 때, 그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예수님의 피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들을 다 용서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이후에 방종을 하여 "나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어"라고 하면서 죄짓고 살아간다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 때에 예수님의 피를 그 행위책으로부터 거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셔서 피흘려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 죄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또 다시 죄를 밥먹듯이 짓고, 죄를 지어 놓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에 구원이 취소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것은 일시적인 조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들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죄를 다시 소환하지 않도록 이후에 죄를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삶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내게서 과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내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거나, 열매가 없는데도 자신이 받은 죄사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이후의 삶이 우리의 영원한 용서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래도 실수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 관문은 '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믿고 회개하자. 그리고 순종하고 충성하자. 그러한 자들만이 일시적으로 받은 용서가 영원한 용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9) 왜 사도 바울은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는가?(행16:16~19)_2022-11-16(수)

https://youtu.be/kAEuxx7xkMs  [혹은 https://tv.naver.com/v/30826703 ]

 

1.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기도하러 가다가 만난 여종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만난 여종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퓌돈 영을 가지고 있는 어린 여종'이었다. 여기서 '퓌돈'이라는 말은 '퓌돈 신' 혹은 '점치는 영'을 가리킨다. 그렇다. 이 젊은 여자는 점치는 영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고용된 사람이었다. 즉 어떤 주인들에게 고용되어 점을 쳐주어서 자기의 주인들에게 이익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녀의 외침은 어떤 것이었나?

  그런데 그녀는 바울 일행을 뒤따라가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런 그들은 구원의 길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행16:17). 그녀가 외치는 소리만을 점검한다면 그녀는 정확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날을 외치고 다녔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말이나 거짓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귀신들도 사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녀의 외침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즉시 그녀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다. 

 

3. 바울은 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했는가?

  바울이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그녀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적어도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녀가 계속 말하고 다니는 것을 그냥 놔두면 그녀와 바울은 한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취급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녀에게 들어 있는 영은 귀신이요, 바울에게 들어 있는 영은 성령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냥 놔둔다면 사람들은 같은 영에 속한 자들이라고 취급할 수 있다. 그러면 복음 전파에 많은 방해가 될 것이다. 둘째, 그녀 속에 있는 영(귀신)보다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영(성령)이 훨씬 더 쎄다는 것을 분명히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 속에 있는 영은 귀신으로서 피조물이며, 바울 속에 있는 영은 성령으로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귀신에 매여 있어서 귀신에게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그녀를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놓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난 후 그녀는 빌립보교회의 성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4. 성도 속에서 역사하는 영이 귀신의 영인지 성령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날에 교회 안에서도 무엇을 보았다 혹은 무엇을 들었다고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심지어 교회에서 직분(이를테면 '권사')을 가진 분이 예언을 해 준다고 하는데 잘 맞춘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몰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성도들 가운데 무엇을 보거나 들었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예언을 해 준다고 할 때, 그것이 귀신이 역사하는 것인지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 만약 자기가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면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영이 어떤 종류의 영인지를 영안으로 보아서 금방 판단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간 분별하기 힘들다. 그때에는 2가지 방법을 써 보라. 첫째, "권사님, 혹시 천사가 보입니까?"라고 질문해 보라. 만약 그 권사님이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분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성도가 영 분별의 은사를 지녔다면 천사도 보고 귀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천사는 볼 수 없고, 귀신만 보인다면 귀신이 역사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라. 이런 분들은 보통 양신(성령과 악령)이 동시에 역사하고 있다. 둘째, "권사님의 조상들 중에서 1~4대 안에 무당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라. 만약 무당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을 멀리해야 한다. 양신이 역사하고 있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특히 회개를 모르는 사역자라면 더 더 위험하다. 

 

5.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귀신을 잘 쫓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계급이 매우 높았기에, 단번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으며, 또한 귀신도 그녀에게서 즉시 떠나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 귀신을 잘 쫓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영권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영권이 높아야, 어떤 귀신이라도 복종하고 떠나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의 영적인 계급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 계급이 낮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계는 일종의 조폭 세계와 비슷하여, 철저히 계급 조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계급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기도하되, 회개하는 기도를 많이 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귀신이 자신의 몸에 많이 남아 있어서 귀신들끼리 서로 알고 장난쳐 버린다. 그러므로 귀신을 잘 내쫓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둘째, 기도하되 귀신을 쫓을 수 있는 은사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능력 행함'의 은사와 '영 분별'의 은사를 구하라. 여기서 '능력 행함'의 은사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이면서 또한 귀신을 내쫓는 은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귀신을 잘 쫓아내려면 '능력 행함'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 더 구체적으로 구하려면, 귀신을 내쫓는 은사, 귀신을 짓밟는 은사, 귀신을 태워버리는 은사, 귀신을 잘라버리는 은사, 귀신을 느끼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사역자가 되어 사역하려면 여기에다가 '영 분별'의 은사를 구하는 것이 좋다. '영 분별'이란 그 영이 선한 영인지 악한 영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은사를 가리킨다. 셋째, 회개를 하고 은사를 구했으면 직접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 귀신을 쫓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영적 계급보다 더 높은 계급을 가진 귀신은 명령해도 잘 안 나갈 것이다. 때로는 그놈들이 나에게 덤벼들 수도 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명령해야 한다. 그러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나의 영적 계급을 높여 주신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높은 계급을 가진 자는 없다. 다 '소위'라는 계급부터 시작하여 소령이 되고 소장이 되고 대장이 되는 것이다. 해 보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2022년 11월 16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3) 할례의 멍에에서 회개와 예수의 흔적으로(행15:10~11, 갈6:11~18)_2022-11-04(금)

https://youtu.be/V6nfCmPuFIw  [혹은  https://tv.naver.com/v/30583230 ]

 

1.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에서 인정받은 구원관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A.D.49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총회에 가서 인준을 받았던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람이 구약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는(칭의를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러 오시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으며,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2. 할례파 믿는 이들이 주장한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어떤 성도들이 새로운 구원관을 주장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만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킨 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행15:5).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이 불가능하고, 먼저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또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유대인이 된 후에야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서 잘못된 주장이라고 결론이 난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행15:10~11). 다시 말해, 예수님도 믿고 다른 어떤 행위들이 추가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3. 사도 바울은 훗날 이러한 구원 문제에 대해 갈라디아서에서 어떻게 말했는가?

  사도 바울은 훗날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한 경험을 갈라디아서에 기록해 놓았는데(갈2:1~5), 그는 여기에서 사람이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부터 받는다고 하였다(갈3:2,5). 즉 사람이 의롭게 되고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듣고 그분을 믿을 때에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는 '칭의'도 얻고 성령을 받아 '영생'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성도들에 의해서 율법 무용론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으니, 이제 이방인으로서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령 내가 살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결코 죄가 되지는 아니하며, 그것이 또한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한 번 구원을 받았으니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생각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4.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지적한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필요없다'라고 하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율법의 행위'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의 2가지 기능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갈3:24). 다시 말해, 누구든지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배우게 되고 그분을 믿고 따라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율법 중에서도 의식법들에 해당한다. 즉 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 등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율법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롬3:20). 이것은 율법 중에서 도덕법(십계명법)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십계명의 조항들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것들의 실체가 되심으로 결국 이것들은 다 폐지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은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 중에서 도덕법(십계명법)은 다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십계명을 어기면 여전히 그것은 죄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누군지가 나오는데, 그들은 바로 주님을 부인하였던 비겁한 자나 믿지 않는 자 외에는 전부 다 십계명을 어겨서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했다(계21:8).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십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중에서 폐지된 것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만 해당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유효한 것은 도덕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언급하였던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또한 절기를 지키고 음식을 가려 먹는 등의 의식법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왜 율법의 행위는 성도들의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 되는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으니, 자신은 구약의 율법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설령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구원받는 데에 그것이 자신에게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후, 혹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자신이 우상숭배하는 죄까지 다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으니 자신의 죄가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어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여전히 그것은 죄가 되며,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결국 그는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가 죽는 날 생명의 성령이 그만 그를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최소 새 예루살렘 성 밖에 거주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까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에 들어온 자라도 십계명을 어긴 죄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회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마음으로 지은 죄라도 회개해야 한다. 살인은 안 했어도 미워했으면 살인한 것이 되기 때문이요, 실제 간음을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고 하면 그것이 간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어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즉 물질 같은 것을 탐냈다면 그것도 역시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다(골3:5). 그러므로 성도들이 정말 진실로 힘써야 할 것은 '회개'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불못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어도 회개하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서 면류관 얻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그는 주 예수님과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았던 상처를 가리켜 '예수의 흔적'(갈6:17)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영광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과연 주와 복음을 위해 힘쓴 흔적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는 천국에서 해와 달과 별처럼 빛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2022년 11월 04일(금)

정병진목사

 

2022-10-14(금) 금요기도회

제목: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은?(딤후2:20~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n5jSjP6de0  [혹은 https://tv.naver.com/v/30215415 ]

 

1. 들어가며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물처럼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살고 있는 것이고 때가 되면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천국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육체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함께 가진 존재로서 다음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사람은 영원히 살 곳을 이 땅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모른 채 살고 있는 이들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갖고 누리게 될 지위와 신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찌하든지 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날마다 준비하되 그곳에서 누릴 우리의 지위와 신분을 잘 준비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잘 쓰임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이 뜻한 바대로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에 우리는 저 나라에서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는 3가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저 천국에서 영원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2.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3가지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을 잘 갖춰야 한다. 첫째,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조건으로서,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회개'를 통해 가능하다. 둘째, 내가 가진 능력만으로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으므로 주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주권적인 안배로 사명을 주셨는데,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조건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사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3.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소극적인 조건으로서,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준비를 잘 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주실 것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을 수 없는 조건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우리가 받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이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그 결과를 내가 누릴 수 없다거나 그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그 세력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악한 영들로서 귀신과 뱀들을 가리킨다. 특히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의 몸은 뱀의 차지가 되었다(창3:14). 그러므로 뱀은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우리 몸 속을 치고 들어온다. 특히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되면 우리 몸 속에 치고 들어온 뱀들이 3~4대까지 내려간다(출20:5).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악한 영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악한 영들은 우리의 몸 안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주로 3가지 일들로 역사한다. 첫째는 그 영들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물질이 들어온다고 해도 새어 나가게 만들고, 물질을 쌓지 못하게 한사코 방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들은 주로 우리의 '손'에 붙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들은 주로 제사를 여러 번 그것도 정성다해 음식을 융숭하게 준비하여 바칠 때에, 부처에게 많은 물질을 바칠 때에 그리고 미신과 잡신을 섬겨 무엇인가를 많이 바칠 때에 쑥 들어온다. 둘째는 그 영들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들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우리 몸의 각 부분을 붙잡는다. 예를 들어, 제사드릴 때에 절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리에 들어온다. 그래서 두통, 공황 장애, 치매 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제사 음식을 먹게 되면 위장에 그것들이 들어와 병에 걸리게 한다. 그러면 위경련이 자주 발생하고, 위암 등이 생긴다. 그리고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면 무당과 점쟁이에 붙어 있는 시기와 질투의 영, 혈기와 분노의 영, 억압과 착취의 영, 살인의 영 등이 들어와 정신적인 영역에 병이 걸린다. 그리고 이때 자신의 감정을 분노로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게 하고 자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굿할 때에 끈으로 허리를 묶게 되면 척추 질환에 걸리는 자들도 있다. 셋째는 그 영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이때 그 영들은 주로 우리의 다리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부처 불교를 섬기면 이러한 영들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미신 잡신을 많이 섬기게 되면 늘 손해를 입게 하고, 환경은 막히게 되며, 도움받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우선 이러한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이 시급하다. 그런데 이 일은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나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내가 예수님을 믿었어도 나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살아도 넉넉하게 살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늘 병원 신세를 져야 하며, 하는 일마다 어려움과 역경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맨 처음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본 교회에서 '회개기도문'을 구하여 기도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여러 은사들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여러 은사들이 필요하다. 은사에는 일반적인 은사도 있고 초자연적인 은사도 있다. 목회자의 경우는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일반 은사가 필요하며, 성도들을 잘 돌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환상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등이 필요하다. 거기에다가 치유의 은사와 더불어 영분별과 영판단의 은사, 세력을 느끼고 짓밟으며 세력을 쫓아내는 은사도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구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더욱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하였고(고전12:31), "사랑을 추구하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전14:1)"고 했다. 그렇다. 이런 것들은 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지 않으셨던가?(마7:7)

 

5.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조건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고 우리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그릇으로 빚으실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렇다. 큰 집에는 주인이 쓰려고 여러 가지 용도에 합당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금그릇, 또 하나는 은그릇, 그리고 나무그릇과 질그릇 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금그릇이라고 해서 귀한 용도로 쓰이고, 나무그릇이라고 해서 천한 용도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물을 무쳐낼 때에는 나무그릇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시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그릇으로 우리를 만드신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러한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저러한 그릇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사용할 사람으로 그리고 할례자의 사도로 만드셨다(마16:19, 갈2:8). 그리고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 만드셨다(갈2:8, 행9:15). 그리고 바나바는 위로자와 권면하는 자로 쓰시기 위해 만드셨다(행4:36). 그러므로 저마다 자신의 빚어진 그릇의 용도에 따라 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그릇의 용도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빚어진 그릇이 작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로운 용도로 그를 쓰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으면, 영적인 분들에게 물어보아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뚜렷한 사명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도에 얼마든지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했다.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면 어떤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주인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는 더욱 더 거룩해질 것이며,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가 어떤 그릇으로 빚어졌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어떤 그릇으로 빚어졌든지 자신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하다. 

 

6. 나오며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더러운 그릇이라면 아무리 그것에 귀한 것을 담는다 할지라도 결국 그 안에 담긴 것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우리를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악한 영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죄들이나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여 악한 영들을 내보내고, 우리가 하나님께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되면, 온갖 더러움과 부정들이 함께 묻어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때로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기에 우리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감당할 일에 합당한 은사들을 구해야 한다. 은사에는 일반 은사와 영적인 은사 둘 다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1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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