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1)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마3:1~12)_2020-07-23(목)

https://youtu.be/WvEn_GDP1l8  [혹은 https://tv.naver.com/v/14920448  ]

 

 

1.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가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한글성경에서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을 뿐입니다(롬1:17,3:27). 헬라어원문에 보면, "그런데 복음(롬1:17)"이거나 "그러나 복음(롬3:27)"이며, "오직(only) 믿음"이라는 문구는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 문구는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말함으로 인하여 생겨난 신조어입니다. 

 

2.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나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정의하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인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마4:17,행2:38,20:21). 예수께서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칭찬받았던 2개교회(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하고는 다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않으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고 그러면 천국백성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3.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인가요?

  어떤 분들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잘못된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얼마큼 행동해야 구원받게 되는지, 그 행함의 기준을 정하기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생활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칩시다. 어느 정도 해야 할까요? 새벽기도 정도는 해야 할까요? 새벽기도를 한다면 얼마나 해야 할까요? 1시간을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30분만 해도 되는 것인가요? 구제를 한다고 칩시다. 매달마다 구제해야 하나요? 한 번에 10만원짜리를 해야 하나요?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행함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이 정말 구원을 향하여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진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서는 자기가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한 행위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고스란히 상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은 하나님은 주시는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믿음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정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대신 믿어주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기를 바라시며(딤전2:4),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또한 그렇게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우리 인간편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구원을 받고자, 우리가 해야 할 행위는 사실상 없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율법의]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해주는 도구로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잣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나의 행위가 들어가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게 살다보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5. 칭의(의롭다함)가 곧 구원인가요?

  칭의가 구원이라기보다 칭의가 구원을 위한 첫 출발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칭의는 우리는 불의하고 부정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피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라고 칭함받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은 여전히 더럽지만 예수께서 흰 옷을 입혀주셔서 깨끗하게 보여지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구원의 여정을 위한 첫 출발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는 자기가 믿음을 보임으로 칭의를 얻은 것을 가지고, 이미 자신은 구원을 다 받은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을 위하여 자기가 첫걸음을 뗀 것이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죽을 때에 비로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많이 "이신칭의"에 관하여 말을 했지만 그가 죽기 일보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딤후4:18)"이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도 "그러나 끝까지 견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인류가 들어야 할 복음이며 또한 전파해야 할 복음은 "천국복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끗히 씻어내다가, 죽을 때에 가서 다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020년 07월 23일(목)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금그릇인가 은그릇인가? 아니면 나무그릇인가 질그릇인가? 사도바울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깨끗한 그릇만을 사용한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그릇인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나를 깨끗하게 하여,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어 있는가? 왜 죄를 씻는 회개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말인가? 오늘은 회개의 놀라운 비밀과 하나님의 쓰심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2020-07-19(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한 그릇에서 귀한 그릇으로(딤후2:20~21) https://youtu.be/pbxya5ELNm0 [혹은 https://tv.naver.com/v/14861469 ]

 

 

1. 들어가며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것은 성도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벧전1:8).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는데 죽어서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면 그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러니까 교회는 한 영혼이 교회에 출석하는 그 순간부터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그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총집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바와 같이 "오직 믿음"이면 다 되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그동안 동탄명성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사람이 천국가는 길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중에서 회개의 역할이 어떤 것이고, 회개가 어떤 방면이 있으며, 거기에 따라서 어떤 결과를 맺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회개의 두 방면은 무엇인가요?
  회개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하나는 "구원얻게 하는 회개"가 있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죄를 회개해야 하기 때문이다(마4:17). 먼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회개가 필요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떠나 살았던 죄를 또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은 죄들은 낱낱이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원얻게 하는 회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회개가 있다. 이것은 구원얻게 하는 회개가 아니라,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회개"요, "축복의 통로를 여는 회개"가 있다. 이 회개는 과거에 지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믿기 전에 우상숭배하고 살았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이때는 내가 우상숭배한 죄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내 조상들이 우상숭배하여 살았던 죄 곧 후손 3~4대까지 내려가게 했던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저주가 떠나가기 시작한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아픈 사람은 과거에 우상숭배했던 죄를 진정 회개했는지를 살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조상들이 지었던 죄와 내가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3. 죽음을 얼만 남겨놓지 않은 사도바울이 딤후2:20~21에서 디모데에게 당부했던 말은 무엇인가? 

  A.D.66~67년경 재차 로마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은 이제 에베소에 목회자로 파송한 디모데를 향해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거기에서 사도바울은 그릇의 이야기를 꺼낸다. 과연 사도바울은 무슨 말을 디모데에게 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만이] [있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역시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다른 것들은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만일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자신]를 깨끗하게 하면 [그는 장차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거룩하[게 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렇다. 큰 집으로 일컬어지는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으며, 나무그릇과 질그릇(흙그릇)도 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떤 그릇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그것은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그릇으로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사실 태어나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당신의 목적과 뜻에 따라 사람의 영을 창조하시어 이 땅에 내려보내신다(렘1:5). 그러나 보내실 때에 태어날 아기의 부모의 조상들의 모든 은사와 달란트를 종합하여 육체 속에 넣어주신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으로 만들어졌다고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을 원망하는 것은 그릇이 자기를 만든 토기장이를 원망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한 그릇으로 나를 만드셨음을 믿으라(갈1:15).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한 번도 성도들에게 "너는 금그릇이 되기 위해 힘쓰라", "너는 은그릇이 되기 위해 힘쓰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되도록 너희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권면하였다. 
 
4.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은 어떤 그릇으로 창조되어 태어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은사와 달란트가 각기 다른 사람들을 지금도 냐려 보내시고 있다. 하지만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창조하시어 보내시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그릇을 사용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그릇이 "금그릇"이라고 더 잘 사용하고, "질그릇"이라고 덜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큰 집의 주인처럼 어떤 음식을 내오시는데, 그릇의 재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그릇을 찾으신다. 그것에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릇에 들어갈 내용을 보시고는, 그 음식을 가장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주고 아름답게 만들어줄 그릇을 가져다가 사용하신다. 예를 들어보자. 들깨가루를 빻아 야채에 버무린 도토리묵을 내온다고 치자. 주인은 어떤 그릇에 도토리묵을 담을까? 무조건 금그릇이 비싸니까 거기에 담아내는 것인가? 아니다. 도토리묵의 색깔과 야채에 가장 어울리는 그릇에 그것을 담아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나무의 숨결이 살아있고 나이테가 은은히 어울어진 그러한 나무그릇에 내올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음식에 어떤 그릇이 적합한가를 보시고 그릇을 사용하시는 것이지, 무조건 비싸다고 그 그릇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싸다고 어떤 그릇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못나게 만드셨나요?"라고 따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미 나는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릇대로 빚어져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5. 사람은 왜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살 때 가장 신경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여 자신을 깨끗하고 성결하게 해야 한다. 왜 그런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그릇은 천한 그릇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사용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금그릇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일평생 불평불만하고 살 것이 아니라, 어떤 그릇이 되었든지 하나님께서 필요하시기에 그렇게 만드셨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이 쓰임받을 날이 올 것임을 기대하고, 주인이 언제라도 쓰시도록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오늘도 여전히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자라면, 그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렇게 3가지로 말했다. 첫째, 그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딤후2:21). 성령은 거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을 더렵혀 죄로 얼룩져 있는 사람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죄를 씻어내어 회개하고 있는 자엑 역사하시는 것이다. 더러운 그릇이지만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한다면 성령께서 사용하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어 거룩하게 된 자만이 주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으며 나중에 죽어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될 것이다(히12:14).
  둘째, 그는 주님이 쓰시기에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딤후2:21). 구약성경 사무엘상1장을 보면, 엘리가문에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더 이상 엘리가문을 끝내시려고 하셨다. 왜냐하면 세습직이었던 대제사장을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맡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불량자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가문을 끝내시고 제사제도를 회복할 새 제사장을 이 땅에 보내고 싶으셨다. 그런데 마침 실로의 성막에서 기도가 올라왔다. "주님, 부디 이 종을 돌아보사, 저에게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으로 주님이 쓰시도록 바치겠나이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께서 찾고 있었던 바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뱃속에 전무후무한 인물 사무엘선지자 겸 제사장을 보내셨다. 그렇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된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쓰실 것이다. 
  셋째, 그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언제든지 준비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딤후2:21).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을 이 땅에 내려보내시고 있다. 그런데 때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자를 보내신다. 그래서 이 땅에 같은 종류의 달란트를 가진 자들이 여섯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같은 달란트를 가진 자들 중에 어떤 사람을 쓰시겠는가? 그것은 준비된 일꾼이다. 주님이 사용하실 것을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쓰시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주인이 언제라도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깨끗한 그릇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그러면 우선 선정대상이 되는 것이다. 
 
6. 성도가 자신을 더럽게 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본문의 앞구절을 살펴 보니 그것은 2가지였다. 첫째,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이다(딤후2:15~17). 후메내오와 빌레도은 자신이 양심이 아니라고 거절하는데도,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인지 분별도 하지 않은채,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서 그냥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왜 그 성도가 깨끗해지지 못하는가? 잘못된 교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말씀은 한 구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늘날 개신교회에서는 거의 교리화되었기에 무턱대로 분별도 하지 않은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회개하지 않아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둘째, 그것은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딤후2:19). 그들은 무엇이 죄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떠나기도 않았다.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것과 단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와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 그는 깨끗해지지 않는다.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해야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인데도,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것이다. 
 
7.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자신을 준비해나가야 하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내가 어떤 그릇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가를 빨리 파악해야 한다. 둘째, 이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은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를 소망하여도,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가 없다. 
 
8.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나와 내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아니한가를 하나님께 따지기 전에, 나 자신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무엇이 있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왜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내가 과연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은사를 주시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자신에게 남아있는 더러움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다보면 어느새 그릇은 깨끗하게 준비될 것이다. 파란물이 담긴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언젠가는 그 물이 투명한 색깔로 바뀌게 되듯이 날마다 회개하다면 어느새 내 죄를 말갛게 씻겨져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회개기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가? 그래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고로 만약 우리에게 지금도 저주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회개할 죄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아직도 축복의 통로가 막혀있다면 그는 조상적부터 지은 죄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 판단된다면, 회개하지 않고 남아있는 죄라도 빨리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무력감이나 우울증이 떠나가고 건강도 회복하고 자신감도 회복되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2020년 07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믿는 이들 중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었지만 예수께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께서는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쉽게 판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용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용인가, 아니면 과거에 지은 죄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대신 담당해주시겠다는 뜻인가? 그런데 오늘날 개인구원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와 맞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더러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2020-05-1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죄용서, 과연 죄를 지을 자유에 대한 선언인가?(요8:1~11)
https://youtu.be/EhaRYWjomnM [혹은 https://tv.naver.com/v/13765139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언제였는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우리는 지난 주일낮예배를 통하여 그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정죄의 하나님에서 해방의 하나님으로, 징계의 하나님에서 용서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들었다. 이는 곧 구약적인 경륜이 신약적인 경륜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에서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께 나아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받게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죄용서가 과연 우리가 미래에 죄를 지어도 좋다는 자유에 대한 선언인지를 살펴보고자한다. 오늘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인지를 적나나하게 들여다볼 것이다.

 

2. 예수님의 죄용서에 대한 선언은 과연 미래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선언인가?

  예수께서 오심으로 사실 엄청난 변화가 생겨난다율법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이요, 정죄의 시대에서 용서의 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율법은 크게 2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통하여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도덕법인 "십계명"법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율법의 근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이라고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율법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장차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표하고 있는 또 다른 법도 역시 율법의 하나인 것이다. 특히 이것들은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들로서 곧 안식일법을 포함한 절기법, 정결법과 음식법과 제사법들이다. 이러한 의식법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가 어떤 존재이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안식일"은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법이다(마10:28~30). 그리고 유월절에 희생당하는 "어린양"은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실 속죄양이 누구며 어떻께 죽을 것인지를 알려주는 법이다(고전5:7). 그런데 바로 그분 곧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로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구약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성취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다 이루셨다"(요19:30)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받게 될 온갖 종류의 저주와 형벌을 다 받으셨다. 다시 말해, 신22:22~23에 의거하여 예수께서는 저주의 나무(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셨고 거기서 숨을 거두셨다(갈3:13). 그리하여 그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있으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혜택을 다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바로 그 목적을 드러내셔야 했다. 그중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사건이다. 그 여인은 이른 아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손에 질질 끌려왔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녀를 예수님 앞에 세워놓고, 율법에는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레20:10, 신22:22),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참 난감한 질문임에 틀림없다. 만약 그녀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준수자가 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과는 상충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그녀를 살려주라고 명령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매도되어, 그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허리를 굽혀 땅을 글자를 쓰시더니 일어나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씩 뒷걸음치더니 다 도망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죄를 짓기 마련인데,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이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했다. "여인아, 너를 정죄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리고 그 여인 대답하였다.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나도 너를 유죄판결하지 않는다. 너는 가서 지금으로부터 더이상 죄를 짓지 말라(요8:11)"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날, 예수께서 그녀를 유죄판결하지 아니하고 죄를 용서해준 것은 과연 앞으로도 어떤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용의 말씀인가? 아니면 과거의 죄값은 예수께서 담당할 것이니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도록 하라는 당부인가? 그렇다. 예수께서 그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그녀가 지었던 과거의 죄들에 대한 용서인 것이었지, 앞으로 마음껏 죄를 지으라는 허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과거에 지었던 죄들에 대한 값을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용서해시겠다는 말씀인 것이지, 앞으로 죄를 얼마든지 지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여인에 과거에 지었던 죄 때문에 그순간에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녀는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품으신 계획들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고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곧 대신 죄값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죄용서를 구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제 자신은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죄를 지어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미래에 죄를 지을 죄들에 대한 용서까지 더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2가지 교리는 무엇인가?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위와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자에게 교회가 너무나 쉽게 사죄권을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와 현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지은 자범죄들을 회개할 때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지, 한 번 믿은 것으로 인하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함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계속해서 갖도록 만들어주는 잘못된 교리가 2가지가 있으니, 그것의 하나는 개인구원예정론이요, 또 하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먼저, 개인구원예정론부터 살펴보자. 사실 개인구원예정론은 중세를 열었던 신학자 어거스틴이 최초로 만들었고, 종교개혁자 칼빈이 완성한 바 있는 교리다. 그러나 성경에는 개인에 대한 구원을 만세전에 예정해놓았다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다. 다만, 어떤 개인이나 국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겠다고 정해놓은는 사역적인 예정은 더러 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개인에 대한 만세전 구원예정은 결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불특정다수를 예정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개인구원예정론을 완성함에 따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칼빈의 교리는 세뇌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죄를 지어도 자신을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두번째로, "성도의 견인교리"가 성도들의 구원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예수님을 믿은 자는 결코 구원에서 탈락되지 않으며 어떠한 시험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교리를 맹신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사람의 구원은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은 죽는 그날에 완성된다는 것을 잘 모른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다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죽는 그날에,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감으로(요14:16), 그가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고전9:27). 그날에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한다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일지라도 그날 지워질 수도 있는데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계3:5). 다시 말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중생한 자는 결코 죽는 그날까지 성령께서 떠나가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그날에 용서받지 못한 채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히10:26~29).

 

4.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경고하시는 2가지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믿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남겨두신 2가지 경고장치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징계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 자들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나, 십계명법을 그대로 남겨두시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징계에는 질병과 가난, 저주와 고통, 귀신들림 등의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음행을 저지르게 되고 예수 믿으니까 괜찮고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 우상숭배행위를 자행하자, 주님은 그 교회를 엄히 책망하신다. 만약 그녀가 만약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라고 경고하셨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자도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녀의 자식들을 살해할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셨다(계2:20~23). 사실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죄를 짓는다고 해서 즉시즉시 징계를 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을 징계들을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감당해 버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죄를 지어놓고도 그것이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죄인 줄로 모르고 죄를 짓는 성도들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해서도 죄인들이 돌이켜 회개하여 구원받으라고 하시는 안타까움의 마지막 표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징계가 쏟아지면 기뻐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철저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된 중풍병자가 나은 후 그를 만나 주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 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내가 너를 치료해준다마는 다시 네가 죄를 짓게 된다면 더 심한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치료불가능한 38년이나 된 중풍병자를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해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병에서 낫게 되었으니 앞으로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더이상 죄짓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더 심한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고로, 신약의 징계는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있거나 회개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자를 위한 최후의 경고장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구원받은 자도 탈락할 수 있다는 여러가지의 경고의 말씀들이다. 다시 말해, 믿는 자라도 계속 죄짓고 회개하지 않을 시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영영 안 주시겠다고 예고하심으로 분명하게 그들이 회개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구원탈락가능성에 대한 경고는 히브리서, 야보고서, 유다서와 공관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예수께서도 무리들에게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져져 살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7:19), 주의 이름으로 귀신축사를 하고, 예언하고, 능력을 행했어도 그날에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7:22~23).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도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못보고도 떨어져나간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히6:4~6). 그런 자는 버림을 당하여 불살라질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접했더라도 고의로 계속해서 죄를 범했을 때에는 그를 위하는 속죄제사가 없을 것이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남아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히10:26~27).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촛대를 옮겨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고(계2:5), 생명책에서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계3:5). 고로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이지만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은지 어떤 죄든지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오늘날의 성도들은 이미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여 인류의 모든 저주와 질병과 고통까지도 다 담당해버린 이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도 징계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나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다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 나를 떠나가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는 날에 버림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죄했을 때에 내게서 징계가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사람이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사생자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약성경이 얼마나 경고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죄에 더럽혀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혹시 실수해서 넘어졌다고 하면 즉시즉시 일어나 회개를 통해 그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죽는 날에 그만 멸망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중생을 얻어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 끝날까지 성령은 떠나가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다(요14:16). 그러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는 날 버림받는다는 것을 명심하고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앞으로 자유롭게 죄를 지으라고 허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 행하다가 큰 코다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20년 05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이 사람을 회개하도록 쓰시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삼하12:1~6)_2019-12-13(금)

https://youtu.be/wfLNkaLLBc0

 

1.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요?

  오늘날 사람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듣는 것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세계 민족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더라도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을 우리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보내셔서, 지금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물론 거의가 다 귀에 들려오는 음성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여러 가지를 방법을 통해서 받게 되는데, 그럴 때에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강한 내면의 확신을 얻게 되기도 하며,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즉시 깨달아지기도 하며, 주의 종들의 설교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나 혹은 환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직접 귀에 들려오는 음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분은 위험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음성을 귀신일 음성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귀에 울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실 수 있지만 그것은 거의 없는 일입니다.

 

2.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 그 사람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행하시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범죄하게 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지은 죄값을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불신자는 물론이거니와 신자들 중에서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신자)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어서라기보다는 실은 회개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물론 그가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개 2가지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책망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징계를 통해서입니다.

 

3. 하나님에게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로서 주시는 책망과 징계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신자에게는 회개하여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2가지 방법으로 그를 깨우치십니다. 하나는 책망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통한 것이든지, 성경을 읽을 때에 강하게 부딪히게 한다든지,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책망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를 통해서 책망하실 때에는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잘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모르거나 자신이 죄지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고 않은 채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 그 사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읽었던 사무엘하12:1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입니다. 다윗이 분명 범죄했는데도 그가 전혀 의식하고 않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단선지자를 보내서 그를 강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징계를 내리는 것입니다. 징계는 자신이 분명 양심의 가책이나 성령의 책망을 의식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긴가민가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회개의 두번째 방편입니다. 징계는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내려지는 것이 바로 징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망과 징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개시키는 2가지 방편이지만 약간 다릅니다.

 

4. 책망과 징계를 받는 자가 본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책망을 징계를 받고 있는 자가 정작 자신(본인)이라고 하면 우선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해서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너무나 현저하게 죄를 지어서 회개할 기회가 그에게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지도 않으며 징계를 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버려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게 책망이 주어지고, 내게 징계가 내려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나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에는 즉시 깨닫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는데도 미처 그것을 회개를 실행하지 않다가는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다윗을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다윗이 회개할 수 있도록, 당신의 종인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는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기 전에 비유를 통해서 먼저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했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자가 어떠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 당사자가 "바로 다윗 당신"이라고 직접적으로 지목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만약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다러면, 그에게 회개를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더러면 갑자기 죽는 것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가 책망을 들었을 때 진정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보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선왕과 같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더니, 즉시 자복하며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통곡하며 눈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시6:6).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끝내는 메시야의 조상의 족보에도 오를 수 있게 되었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가장 존귀한 자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9년 12월 13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