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때에 예수님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 자신이 지었던 죄들에 대해 듣는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과 자신을 갈라놓았으며 그것 때문에 죽을 때에는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사함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듣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과거에 지었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문제다. 어떤 이들은 한 번의 믿음으로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았다고 생각하고는 회개생활을 게을리한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고 나중에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도 발생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2천년전 예수께서 골고다엔어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효능이 부족해서인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윗의 삶을 통해서 아무리 속죄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그 제사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2019-07-12(금) 금요기도회
제목: 골고다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시51:1~19)
https://youtu.be/D0CXwu79KNk


1. 들어가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치르신 속죄제사를 자기가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자범죄들이 다 용서되는 줄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자신의 죄들이 다 이미 용서받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이는 그때에 자신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피의 효능은 완전하다는 말씀은 있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의 모든 죄들이 자동적으로 용서함받는다는 말씀은 없다. 그러므로 늘 죄를 범하기 쉬운 우리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씻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믿는 것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범죄들에 대한 용서에는 반드시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눅24:47). 그래서 오늘은 믿음과 속죄의 상관관계 즉 예수님의 피의 효능과 실제적 죄사함을 받는 방법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진정 회개하여 자신의 모든 자범죄들을 다 용서함받는 자들이 되도록 하자.

 

2. 구약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는 대표적인 사람들에는 누가 있을까?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진정하여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동방사람 "욥"과 "다윗"왕이 있다.

  그 중에서 "욥"은 동방의 우스 땅에 거주하는 이방인이지만 그는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원시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자였다. 그래서 그는 무엇인가를 잘못 행했을 때에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욥1:5), 그는 결코 그 어떤 쾌락이나 부정과 간음을 행하지 않았으며, 그는 억압이나 궁핍한 자의 요구를 거절하지도 않았고, 탐욕이나 우상숭배, 복수나 몰인정함도 없었으며, 위선도 행하지 않았다(욥31장). 하지만 그는 철저히 율법주의자였다. 율법에 갇혀 있어서 이런 것들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무척 불안하면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행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므로 그는 제대로 쉬지 못했으며, 평안을 얻지도 못했다. 특히 사탄의 2번의 시험을 통해서 그는 첫째, 모든 소유믈을 잃어버렸다. 거기에는 짐승뿐만 아니라 종들과 10명의 자녀들도 포함되었다. 둘째, 그는 건강을 잃어버렸다. 그의 몸에 종기가 생겼는데, 70인역에 의하면 무려 30년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이 오히려 욥을 정죄하자 그는 죄된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실 때에는 감사했고 기뻐했지만 사탄의 공격이 심해지자 그만 원망과 불평을 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좌절했고 낙망했으며, 불평불만을 하나님께 했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만족하고 기뻐했던 것이 들추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욥은 기도줄을 놓지 않았다. 끝까지 하나님께 자신이 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매달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왜 그가 그러한 고난을 겪고 있는지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자신의 감추어진 죄된 본성이 사탄의 시험으로 밖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입을 다물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해야 했다. 그의 무지와 교만한, 죄성을 이기지 못했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회개함으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이 자기를 힘들게 함으로 인하여 그들을 미워했던 죄를 회개하고 그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자신의 본질적인 죄를 회개하는 이가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누군가를 미워했던 죄를 회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인물로는 통일이스라엘왕국의 2대왕이었던 "다윗"이었다.

 

3. 다윗의 범죄는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다윗은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알려진 자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죽이려 시도했던 자신의 장인이었던 사울왕을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줌으로 원수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이었다. 정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왕위에 올라서 여러 족속들의 영토를 정복하고 나라가 안정을 이룰 때 발생했다. 그는 그때 넘어지고 말았다.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남의 아내를 보았고 그녀가 누군지를 알고도 데려다가 간음죄를 범하는 죄를 저지렀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완전범죄를 노리기 위해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 장군을 전장터에서 불러들여 동침시키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자 그를 적진의 최전방에 보내 죽게 했다. 그의 죄는 간음죄와 고의 살인죄였다. 이러한 죄들을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 전부 다 돌로 쳐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더욱이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는 탐심의 죄에도 걸려있는 심각한 죄에 속해 있었다.

 

4. 다윗이 비록 엄청난 죄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지만 다윗은 이러한 파렴치한 죄를 범하고도 용서받을 수가 있었다(시32:5). 대체 그는 범죄이후 어떻게 했길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즉시 인정하고(시인하고), 그 죄를 자신이 지었다는 것을 두고 마음속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며 눈물로 회개했다는 것이다(시51:16~17, 6:6). 그는 자신의 범죄를 용서받기 위해 희생제사와 번제를 드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회개없는 희생제사나 번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파렴치한 커다란 죄들마저 다 용서받을 수가 있었다. 지은 죄들에 대해 시인하고 자복하고 통회했기 때문이다.

 

5.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는 것과 직접 회개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순간에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용서함받았다고 말 수 있는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드린 희생제사의 은덕을 자신도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통로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속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죄인이 자신이 지었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혹이라도 그러한 죄들을 처리하지 못한 채,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회개하지 않았던 죄들로 인하여 심판받고 불못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그가 만일 예수님을 믿었어도, 그때이후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이 지었던 죄들을 자백하고 그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았던 그러한 죄는 아직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자백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지었다고 자복하는 일이야말로 죄된 본성을 이겨나가는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라.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사영리를 통해서 복음을 접해들었던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죄는 다 해결되었고 청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교리다. 왜냐하면 자백하지 아니한 죄는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생략한 채 모든 사람의 자범죄들을 예수님께서 직접 용서해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만사가 다 허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기도도 들어주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회개하자. 회개가 지금 이 교회에서부터 일어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병치레로부터 점점 더 강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에스겔(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을 때에 만약 우리가 회개하고 죽는다면, 그는 죽자마자 영혼이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다가 주님의 재림시에 동참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2019년 7월 12일(금)

정병진목사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 뒤로 짓는 자범죄들에 대해서 굳이 회개를 하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생활과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미 믿을 때에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것인가? 어떤 자는 믿은 후에 자신이 지은 자범죄를 회개해야 할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일 뿐 그것이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그런데 그게 사실인가? 만약 그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왜 주께서는 우리더러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그토록 당부하고 권고하고 경고하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구원에 있어서 회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019-07-0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믿음만 있으면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까?(계2:5)
https://youtu.be/czDd-nQVaug


1. 들어가며

  오늘날 예수믿는 사람들 중에는 귀신들려 고생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중한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이들도 참으로 많다.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온갖 질병과 저주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병원에 가보면 예수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녀 중에 귀신들려 고통받는 이들의 상당수가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분들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분들은 기도를 안 해 보았겠으며, 그분들은 그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우리 인생에 어려움을 주는 원인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것이다. 그것은 믿음만 있으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칠 수 있다고 한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고 하는 신앙에 관한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중간에 무엇인가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되찾아 거기에 끼워넣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2. 예수님을 믿었으면 정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은 것일까?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믿는 순간에 이미 자신의 모든 죄들 곧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들까지 다 용서받은 것인가? 성도들 중에는 대부분이 그렇게들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믿음은 상당히 견고히 자리잡혀 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가르침은 누군가의 입에서 입을 통해서 전달되어진 것일 뿐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자기가 익히 들어왔던 말씀이 그러한 말씀이었다고 기억하고 있고, 또한 설교자를 통해서 그렇게 말씀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들은 것일까? 여기 일례를 들어보겠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자범죄들을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근거로서 약간의 실력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골로새서1:14의 말씀을 떠올릴 것이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골1:13부터 14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자.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렇다. 만약 누군가가 한글로 된 성경만을 보았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죄사함을 이미 받은 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번역상의 실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개역개정성경만이 이처럼 번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글성경이 다 그렇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이 번역문이 잘못 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헬라어원문에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골1:13~14[직역] 그분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밖으로] 건져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왕국 안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그의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가진다(in whom We have redemption, the forgiveness of sins).

  그렇다. 헬라어원문에는 죄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본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는 이들에 의해 이 본문이 번역되면서, 이 본문은 왜곡되이 번역되고 말았다. 그리고 개역성경을 보고 또 번역한 다른 본문들은 더욱 더 이 본문을 왜곡시켜 번역하였다. 먼저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을 보자.

골1:14[공동번역]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 났습니다.
골1:14[표준새번역]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번역본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성경본문에 없는 말을 추가하여 번역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골1:14[한글KJV]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골1:14[현대인의성경] 우리는 이 아들이 “피흘린 댓가로” 자유를 얻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골1:14[쉬운성경]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 “아들의 피로 대신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헬라어원문을 통해서 골1:14의 말씀이 어떻게 잘못 왜곡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만 [사람들이 지은] [자범]죄들의 용서를 받을 수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로, 이 말씀은 예수 안에서 있는 자들은 이미 구속 곧 죄들의 사함을 받아버렸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구속 곧 죄들사함을 받는다는 원칙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문장은 현재완료의 문장이 아니라 현재 직설법 능동태의 문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들어왔던 말씀 혹은 오해되게금 번역된 말씀을 그냥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교리를 만들거나 성경지식으로 알아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감동된 진짜 성경말씀(원문성경)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각이나 이미 들어왔던 말씀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여 적용해버린다. 그렇다면 성경(원문성경)은 우리의 죄사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3.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는가?

  A.D.95~96년경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셨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 그것이 바로 소아시아에 있는 7교회에게 주신 편지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번째 교회로 소개된 에베소교회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다.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에게 편지하기를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계2:4). 그것은 에베소교회가 자기 교회를 방문하는 사도들을 주의 종으로서 귀히 여기고 아주 많은 사랑을 베풀었던 것에서 이제는 그들이 가짜가 아닌가 늘 판단하고 분석하다보니 그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말씀이 그들에게 말씀으로 다가가겠으며 설교가 설교가 되겠는가? 그러니 빨리 주의 종들에게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만약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의 교회를 일곱촛대들 가운데 제거해 버리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럼, 이때 주님께서 촛대를 그 자리 곧 일곱교회의 자리에서 옮겨버리겠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성경말씀에 따르면 지는(이기지 못하는) 자에 대한 처벌과 같은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지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겠다는 뜻이다. 즉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림당한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들을 빨리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주님이 오시게 되면(재림하시면) 우리는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고는 에베소교회만이 아니었다. 버가모교회에게는 만약 그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그들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계2:16). 이것은 계19장에 나오는 심판자의 모습으로서, 그들을 죽이겠다는 뜻이다. 그들을 파멸시켜버리겠다는 뜻이다. 또한 사데교회에게 주신 말씀에 의하면, 지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말씀하고 있다(계3:5). 만약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고로, 우리는 회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멸망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요소라는 것을 빨리 감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 믿음과 회개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4. 한 번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는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의롭다함을 입게 될 것이고 거룩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롬8:30). 그러니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볼 때,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롬8:30과 같은 말씀은 사람이 부르심을 받아 구원얻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 뿐이지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들어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과 2대왕이었던 다윗왕의 경우를 보자. 둘 다 죄를 지었다. 죄만 치자면 다윗이 더 큰 죄를 지은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사울왕은 버림받아 멸망당했고, 다윗은 죄용서를 받아 위대한 성군으로 쓰임받고 천국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그것은 사울왕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다윗왕은 죄를 짓고 난 뒤 회개했다는 것이다. 회개의 유무가 이들의 멸망과 구원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체가 구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구원을 받도록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것일 뿐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 사실 회개의 중요성은 신약시대에도 나온다. 예수님의 12사도들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자. 12사도들 중에서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도가 있었는가? 없었다(요6:70). 하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판 후에 자살하여 죽음으로 멸망으로 치달았고,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되 한 번은 저주하면서 부인했느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나중에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게 된다. 그런데 이 사례의 경우도 또한 죄를 범한 후에 그가 회개를 했으나 하지 않았느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어찌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제사장 나라로 선택받았고 제사장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랬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결국에는 버림을 받았고 멸망을 받았다. 그런데 이방인교회 가운데 에베소교회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경고를 들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들의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에 정막 그들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도 소아시아를 주도했던 교회였지만 한순간에 뽑혀서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5. 만약 우리가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우리가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신약성경에는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주는 경고가 여럿 나오는데, 그중에서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문구로서 경고한 것들이 다섯 차례나 나온다. 그중에는 현재에 받을 징계가 한 번 나오고, 장차 심판 때에 맞이한 멸망에 관한 경고가 네 번 나온다. 그럼,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그들이 맞이할 징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계2:22~23에 나오는데, 첫째로, 본인은 질병의 침상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같은 동조하는 자들에게는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 셋째로, 그의 자녀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심판 때에 받을 멸망에 대한 경고를 4번 하셨다. 곧 눅13장에서 두 번, 계23장에서 두 번, 도합 4번이 나온다. 특히 눅13장에서는 반드시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눅13:2~3,4~!5). 그리고 계2장에서도 멸망을 예고하셨는데, 특히 에베소교회에서는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버리실 것이라고 했고(계2:5), 버가모교회에서는 가서 당신의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했다(계2:16). 이는 결국 그들을 멸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오직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 어찌하든지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한다면 그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가?

  그러나 우리가 회개의 경고를 받고난 뒤 즉시 회개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그러한 축복은 총 4가지다. 즉 회개하는 자는 4가지 은혜와 자비와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첫째로, 죄사함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눅3:3,24,24:27,행5:31). 둘째, 온갖 저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계2:22~23). 셋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행11:18). 넷째,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후7:10).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지은 죄들을 빨리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거나 회개를 계속해서 미룬다면, 이것들로 인하여, 환난이나 사건사고가 집안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식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며, 본인도 죽어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피우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위와 같이 여러가지 경고의 말씀에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자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심판날에 임할 진노를 더욱 더 쌓아나갈 뿐이다(롬2:4~5). 둘째, 지은 자범죄들의 용서를 끝내 받지 못할 것이다(행3:19).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다(고전6:9~10). 넷째, 천국에 못들어가며 그곳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지 못할 것이다(계22:14). 넷째, 필연코 멸망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벧후3:9). 그러므로 우리는 지은 죄들을 숨김없이 낱낱이 꺼내어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구원의 발목을 잡도록 놔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8. 죄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과 직접 회개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상태에 있으니, 혹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예수님의 피가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한 번 묻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사함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자신의 죄를 없애주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분의 피로 인하여 자기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은 믿음의 차원에 속한 것일 뿐 회개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회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내 죄를 씻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을 두고서 회개했다고 착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소득분위가 낮은 계층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게 될 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국가장학금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돈이 없어 대학등록금을 낼 수 없는 자녀라면, 국가를 상대로 국가장학금을 신청하게 되면 국가에서 장학금을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기간에 한국장학재단 사이트에 들어가 국가장학금을 신청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도 장학금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 이러한 좋은 장학금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장학금을 내게서 가져다 주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씻음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서 죄용서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회개할 때 죄용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의 피의 효능은 사실 무한대다. 그분의 피공로로 인하여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피의 효력은 온 인류를 사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기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를 지었지만 자신의 죄를 자백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직접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우리의 죄를 자동적으로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것일 뿐 그것이 자동적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벧후3:9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모두가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회개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우리 당사자가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앨애려고 그의 유일한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는 자신이 징계를 받다가 심판날에 멸망을 당하는 것을 두고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해주신다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같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책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자녀가 귀신에게 시달리도록 허락하실까? 왜 권사,목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병에 걸리고 불치병에 시달리는가? 그것은 계2:22~23에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지었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죽었다가는 멸망에 이를까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금 징계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아주 많다. 그러다가 지옥 떨어지게 되는 것도 모른 채 병원을 찾아가 병을 치료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아니다. 당장 무릎꿇고 회개부터 시작해야지, 무슨 병원행이라는 말인가? 회개하고 병원엘 가야지 병원부터 찾는 것은 어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회개해야 한다. 아니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러다가 죽을 때에 가서 다시 회개하고 죽어서 천국들어가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7일(주일)

정병진목사 


믿는 자는 혹시 징계를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아니하는가?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칭의도 믿음으로 얻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도 그러한지 살펴보았는가? 우리가 들었던 것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성경말씀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성경을 원문으로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의외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칭의가 단회적인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 개의 반복적인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없이는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대체 칭의의 완성을 위해 정말 필요한 그것은 무엇인가? 마지막 날에 심판을 이기고 하나님의 진노를 이기게 해 주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제 칭의의 다른 측면을 성경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자.

2019-06-23 주일낮예배
제목: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났는가?(롬5:9)
https://youtu.be/2idzvoE_nPI


1. 들어가며

  성도가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성도가 신앙생활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있다. 그러나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얻는 과정이 단 번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도 한꺼번에 싹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칭의의 과정도 정확히 살펴보면, 그것을 단번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의를 단번에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칭의를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더욱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도가 혹시 잘못하여 범죄하게 되면 혹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징계를 받을 수 있을른지는 몰라도 심판 때에 주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게 정말일까? 그래서 오늘은 성도들은 과연 장래 주님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심판 때에 과연 성도들이 진노를 받는지 안 받는지를 살펴보고, 만약 진노를 받는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받게 되며, 그때 진노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징계만 받고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아니하는가?

  오늘날 성도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은 범죄한다고 할지라도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지언정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 성도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위대한 신학자가, 어떤 주석책이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꼼꼼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구원의 문제가 잘못 되면 신앙생활이 허송세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존에 들어왔던 말씀이나 전통 그리고 교리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말씀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3. 칭의에 관해 들려주고 있는 로마서 5장 9절의 말씀은 대체 어떤 뜻인가?

  롬5:9의 말씀은 믿는 자들의 칭의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 말씀은 칭의에 "믿음"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무엇이 있다고 증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것이 한 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판받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롬5:9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먼저, 우리말 개역성경부터 살펴보자.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어쩌면 이 말씀은 칭의에 관한 평범한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의 피공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술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말씀은 칭의에 관하여 두번째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2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첫번째 단계는 롬5:1에 기록되어 있고, 두번째 단계는 롬5:9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롬5:1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렇다. 이 말씀은 사람이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롬3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사실을 믿을때에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칭의의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롬5:9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은 우리말 개역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이제, 롬5:9을 헬라어원문에 따라 그대로 직역해보자.

롬5:9[직역]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피 안에서 더욱 더 많이(많은 것에서) 의롭게 된 후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 진노로부터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혹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 롬5:9의 말씀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 어떤 과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 후에 장차 그분을 통하여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과정인가? 그것은 그분의 피 안에서(피로) 더욱 더 많이 의롭게 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어 칭의 안에 들어왔어도 그분의 피로 더욱 더 많이 죄를 회개함으로 의롭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욱더 많이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면 적용할수록 우리가 더욱 더 많이 의롭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 칭의 안으로 들어온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회개하고 있는가? 얼마나 더 예수님의 피 안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믿었던 그 믿음"으로 영 단번에 의로움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천국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사도바울은 칭의를 2단계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첫 단계이며,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여 회개함으로 더욱더 많이 거룩케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개역성경은 롬5:9에서 과연 무엇을 빠뜨렸고 어떤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놓았는가?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개역성경에 나와있는 롬5:9의 말씀은 헬라어 원문과 비교해 볼 때, 2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 첫째, 개역성경은 헬라어원문에 있는 어떤 단어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것이다. 둘째, 개역성경은 어떤 단어를 헬라어원문의 순서와 다르게 배치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이 그리 큰 문제인가 하고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에 관한 놀라운 진술에 해당하는 문구다. 우리의 구원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를 적당히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개역성경은 대체 어떤 단어가 빠져 있고 또 어떤 단어를 다른 곳에 배치시킨 것인가?

  첫째, 개역성경은 "많이(폴로, 원형은 "폴뤼스")"라는 단어를 삭제시켰음을 알 수 있다. 아니 헬라어원문에는 들어있지만 그것을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much에 해당하는 단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격으로 쓰였으니, "많은 것에서" 혹은 "많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롬5:8의 앞문장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그분의 피 안에서(피로) 더욱더 많이(많은 것에서) 의롭게 된 후에"로 번역해야 옳다. 하지만 "많이"를 생략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피로 단순하게 거룩함을 받아버린 것처럼 번역해놓았다. 아니다. 사람이 거룩하게 되려면 어떤 면에서 더욱 더 많은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그분의 피 안에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그것은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을 더 거룩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많이"라는 단어를 생략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데에 더욱 더 많은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둘째, 개역성경은 "더욱(말론)"이라는 단어를 앞문장이 아니라 뒷문장에 붙여서 번역했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뜻이 전혀 달라진다. "더욱"이라는 단어를 뒷문장에 붙여서 해석하면, 더욱 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되고 만다. 그분의 피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더욱 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번역하면, 칭의를 받은 사람은 확실하게 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니다. 개악이다. 왜냐하면 "더욱"이라는 말은 앞문장에 붙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더 많이 그분의 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고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단어의 순서를 앞에서 뒤로 바꾸어버렸다. 자, 개역성경을 다시 보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

 

5.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누가 받게 되는가? 그리고 진노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누가 받게 되는가? 그리고 진노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롬2:5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그렇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날 것인데 그날이 진노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진노를 받는 대상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리고 그날은 종말의 때로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진노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사도바울의 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진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그날에 심판을 맞아서 "불못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만약 누구든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마3:7~10). 그리고 사도바울도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경고했다. 만약 그것을 가지고 음란과 더러움과 욕정과 탐심의 죄 곧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했다(골3:5~6).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다(엡5:5). 그리고 사도요한은 짐승과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고, 음녀(타락에 빠진 그리스도의 신부들)를 따라가는 자들은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16:19, 18:3~5). 그러므로 누군가가 심판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 그는 지옥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6. 심판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심판날에 진노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다(롬2:5). 왜냐하면 회개하지 못해서 남은 죄가 결국 우리를 불못으로 끌고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나 예수께서도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3:2,4:17)"고 말씀하심으로써, 심판날에 바깥 어두운데 곧 불못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심판날에 불못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날마다 자신의 겉옷(스톨레)를  빨아야 한다(계22:14). 예수님의 피로 말이다(계7;14). 만약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자기의 옷을 씻어 희게하지 못한 자는 그날에 흰옷을 입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겉옷을 계속해서 빠는 자들이 되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계22:14).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7. 나오며

  누가 과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대속의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빠져나오게 하지는 않는다. 그와같은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믿은 후에는 날마다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이 의롭게 되어야 한다(롬5:9). 그런 자들 중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기고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자가 나올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회개를 어느 정도 하고 있는가? 회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아니다. 회개없이 그날 흰옷입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음을 알라.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도 롬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그것을 설명해놓았다. 그가 비록 84세 때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99세 때에 가서 자신의 자범죄를 회개함으로써 비로소 무할례시에 받았던 의를 인침받았다고 말이다(롬4:11). 또한 예수께서도 믿음만이 아니라 회개가 있어야 칭의를 얻는다고, 눅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오는 세리의 회개를 확인시켜 주셨다(눅18:10~14). 그렇다. 믿음만으로 칭의가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칭의의 시작일 뿐이며, 회개를 통해서 칭의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믿고 그대로 실천해보라. 그런 자에게 긍휼이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6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믿는 자 속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겔36:26~27)_2019-03-07(목)

https://youtu.be/uw36WMyQGWQ

 


1. 구약시대와는 달리 오순절이후 믿는 자들 속에는 성령이 들어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은 첫째, 사람이 거듭 태어납니다. 둘째, 성령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증언해주시고 보증해주시고 인쳐주십니다. 셋째, 성령께서 죄로부터 그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넷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 다섯째,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맨처음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까?(렘31:31~34)

 

2. 하나님께서는 장차 믿는 자들 속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꾸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렘31:32).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출24:3,7), 늘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리며 범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죄가 무엇인지 몰라서 죄를 지었다면서 그들이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인 성령의 법을 집어넣어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사람들 마음 가운데에 들어가시게 되면, 굳이 하나님이 누군지를 배우지 않았어도 성령께서 그것을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깨닫게 하심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게 된다면, 심판날에 자기는 잘 몰라서 그랬다고 더이상 핑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영을 사람들 속에 넣어주시어 그 속에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겔36:27). 그렇게 되면 성령을 받게 되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3. 보혜사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 들어오시면 성령은 구약의 약속처럼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여호와와 예수님이 누군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슬퍼하시는지를 그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점차 죄악을 멀리하여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들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겔36:27). 사실 신약시대에 이후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달려죽으심으로 율법 중에서 의식법(제사법, 정결법, 음식법, 절기법)은 다 폐지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자는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합당한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믿는 이들 마음 속에 보내주신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전세계 교회는 아직도 거룩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타락상과 부패는 더 심해가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성령을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엇 때문에 전세계 교회는 이처럼 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인가요?

 

4. 믿는 자들이 비록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할지라도 부패와 타락이 더 심해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중세처럼 면죄부를 남발해왔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가 분명 잘못된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결코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면죄부를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이 지었던 자범죄들을 다 용서해주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사람들이 교리화된 잘못된 가르침에 따라가서 결국 구원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교권이었지만, 거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믿는 이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자고 결단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죄악은 더 심해지고 부패한 타락상을 더 커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 번 믿으면 모든 죄(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를 용서받으며,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 것이라고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면죄부 남발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때문에 죽을 때에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지 아니한 죄입니다. 그때에가서 기록된 생명책에서 자기의 이름이 지워지고, 그 사람 안에 내주하고 있는 성령께서 떠나신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그것이 진짜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가 구원받아 성령을 마음 속에 모시게 되고,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령을 거역하거나 훼방해서는 아니 되며, 성령을 소멸시켜서도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살전5:19). 한 번 빛을 받고 성령에 참여하게 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어도 또다시 타락하여 현저히 죄를 짓게 되면 결국 회개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히6:4~6). 그러면 영원히 멸망당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고전9:27). 그러니 죄를 짓고도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회개치 못해 결국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수두룩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5. 다시 회개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냥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게 될 때에는 죽을 때에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계3:5). 예수님을 믿고도 자기 안에 들어온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죄를 계속 범하게 되고,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게 되면 결국 죽을 때에 성령께서 그를 버리신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히10:26~29).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죄는 회개하고 죄를 멀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부터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그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도 구원받고 그도 구원받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9년 3월 7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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