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람의 의도적으로 범죄했을 때 회개하도록 하나님이 쓰시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눅15:13~17)_2019-02-19(화)

https://youtu.be/KQAu_JhC34A

 

1. 사람이 범죄하는 경우는 보통 3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몰라서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인지를 전혀 모른 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의 법이 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롬2:14~15). 둘째는 타인에 의해서 혹은 사탄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결국 죄를 짓는 최종적인 판단과 결정은 다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인이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알고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첫번째의 경우는 "잃은 양"의 범죄의 유형이고(눅15:3~7), 두번째의 경우는 "잃은 드라크마"의 범죄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눅15:8~10). 그렇다면, 의도적이고도 고의적이며 능동적으로 죄를 범하는 경우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인가요?

 

2. 세번째의 유형은 잃은 아들의 범죄의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눅15:11~24). 왜냐하면 둘째 아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따로 출가해야 할 시기가 되지도 않았는데도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아버지께 요청했습니다. 더욱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 아버지를 매우 근심시켰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제5계명인 부모공경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먼 곳으로 갔을 때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순식간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어떤 은혜를 내리셨습니까?

 

3. 하나님께서는 탕자(둘째 아들)이 빨리 회개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2가지 조치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시련이었습니다. 그것이 재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려서라도 회개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앙이 다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재앙은 범죄하고 멸망을 향해가고 있는 우리들을 살려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긴급조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죄를 범했던 둘째 아들에게는 어떤 재앙이 내리게 되었을까요?

 

4. 자신이 알면서도 죄를 범한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는 재앙에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눅15:14). 하나는 범국가적인 재난(재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개인적인 재난(비참함)입니다. 먼저, 범국가적인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 탕자에게는 그때 심한 기근(흉년)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사람이 잘못했을 때, 특히 지도자가 잘못했을 때에 범국가적인 재난이 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인구조사를 했을 때의 경우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갓 선지자를 보내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말했습니다(대상21:12). 그것은 3년 기근, 3달 전쟁, 3일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3일 전염병이 내려졌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3일이었지만 그때 무려 7만명의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범국가적으로 큰 재앙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칼(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입니다(렘14:12). 그렇다면, 이외에도 의도적으로 범죄한 자에게 개인적으로 내리는 재난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5. 탕자(둘째 아들)에게는 범국가적인 재난 말고도 개인적인 재난이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굶주림이었습니다(눅15:14). 그는 배가 고파가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어보고자 돼지치는 일을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쥐엄열매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최종적인 고백은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눅15:17)(원문: 나는 여기서 멸망당하고 있구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개인적으로도 내리십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재앙에는 크게 4종류가 있습니다(출23:25~26). 첫째는 굶주림(기아,가난)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큰 굶주림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흡니다. 가난해집니다. 빌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질병이 찾아옵니다. 불치병, 희귀병이 찾아오며, 또한 들었던 질병이 오래가게 됩니다. 만약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암병같은 중한 병에 걸려 있다면 그는 2가지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하나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을 가능성입니다. 그것은 살인죄이기 때문에 중한 질병이 찾아옵니다. 또 하나는 우상숭배의 죄의 경우입니다. 예수믿기 전에 우상숭배를 심각하게 했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도 점보러 다녔든지 하여 죄를 범했을 경우 그에게는 대개 중한 질병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빨리 회개하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징조(싸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다 말아먹는 경우입니다. 그러로 만약 손대는 일마다 쪼그라들며 없어져가고 있다면 그에게는 틀림없이 회개치 아니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는 단명하는 것입니다. 일찍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수명을 채우지 못한 채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자에게 빨리 회개할 것을 권고하는 징조들입니다. 그러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개인적인 재앙은 더욱 더 가중될 것이며 또한 지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을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시7:12~13)" 회개합시다. 회개하면 무슨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받게 되고 벌도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9년 2월 19일(화)

정병진목사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할 때에 용서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만 믿고 있으면 그것으로 다 용서되는 것인가? 아니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때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많은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를 죄를 굳이 애써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 이미 예수님의 피로 다 용서받은 것인데 굳이 나서서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1:9).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은 것은 죄에 대해서 탕감받은(없는 것처럼 여겨주는) 상태인 것이지 완전히 죄가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에 비로소 용서되는 것이며, 그것은 심판 날에 이를 때까지 유보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장차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을 일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정말 과거에 지었던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미래의 모든 죄까지 다 사함받는 것일까?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우리는 그것이 성경에 나와있는지를 살펴보기도 전에 그동안 자신이 들어왔던 말씀이나 교리를 진리의 말씀인 것처럼 믿어버린다. 특히 칼빈의 예정론을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해왔던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르침은 정말 그렇다. 그래서 심지어 자신(개인)이 예수님을 믿는 것까지도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다 예정해 놓으셨다고 믿고 있으며, 그러한 예정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니 변함도 없을 것이며, 그러니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이 주장이 사실인지 그 여부를 성경말씀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죄사함의 방법과 시기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나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죄사함에 관한 성경적인 진리들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하여 미리 다 만세전에 정해 놓은 것일까?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죄사함을 받는 것은 정말 단 번의 믿음으로 가능한 것인가? 흔히들 그렇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러한 믿음마저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러나 실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못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처음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아예 막아놓아서 그런 것인가? 만약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폭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놓고는 심판 때에 가서 그 사람을 불러다놓고 "너는 내가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지 않았으니 지옥의 형벌이나 받으라'고 벌을 내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막나가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며 합리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장차 받을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서 맘대로 정해놓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믿어야 하며, 성경에 나와 있는 만큼만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다(딤전2:4).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다(벧후3:9).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거역과 거부로 인하여, 오늘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며, 회개하지 못해 죄용서를 못받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 하지 말라!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긍휼히 많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구원받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령으로 책망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구원과 죄사함의 여부는 그 사람의 책임인 것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구원은 사실 2가지가 이뤄져야 한다. 첫째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가지고 있는 자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부모로부터 사람의 생명만 받은 자는 사람의 자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식이 된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만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낳아져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누가 도와주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은 물로 태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도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물의 씻음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에다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일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생명주는 영(원문)(고전15:45)"이라고 불렀으며, "생명의 성령(롬8:2)"이라고도 말했다. 이처럼 성령이 하시는 주된 사역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여, 그를 회개시켜 죄사함을 받아 거듭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3. 사람은 어떻게 했을 때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되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를 어떻게 해서 용서받는가? 그냥 예수님만 믿고 있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는 것일까? 그렇다고 믿고 있거나 주장하는 자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교리일 뿐 성경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죄악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겔18:30, 요일1:9). 다시 말해, 회개없이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만 믿으면 죄사함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예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것이 곧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은 절반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자동적으로 씻어주고 속죄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게 하기 위해 그분이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2천년전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해버렸고 끝내버렸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은 다 구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이 모든 사람의 죄를 속량할 수 있는 효용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모든 사람의 죄들이 다 속량함을 받았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성경은 죄들을 용서받는 것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요일1:9을 보라.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용서)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직역]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죄들을 자백한다면(시인한다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단번에] 용서하실 것이며, 그리고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단번에]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할 때에 죄를 용서해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고, 깨끗하게 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죄용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나 선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할 때에 비로소 죄용서가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좀 정리해서 살펴보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물을 확보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죄가 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항상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므로(히9:25~26), 그분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히9:12~14). 그분의 피의 효능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고도 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류의 죄가 다 용서받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성도들의 죄가 한번에 다 용서받은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는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동시에 용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지은 낱낱의 죄들을 다 시인하고 고백하여 용서를 받게 된다. 회개하지 않는 죄를 용서해주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들을 놓치지 않도록,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죄를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죄용서를 받아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미래의 죄들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말은 진정 사실이 아니다. 어찌 아직 짓지도 아니한 죄까지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과거에 지은 죄들과 현재에 짓고 있는 죄들이다. 이것들을 우리가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그러한 죄들을 용서받는 것이다.

 

4.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할 때 이미 용서받은 것이지만 실제는 심판날까지 유보된 것이다.

  한편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여 죄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날(혹은 우리가 죽은 날에) 우리가 지었던 죄들을 다시 들추어내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마18:21~35). 어느날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18:22). 그때에 주님게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했을 때, 주인이 그의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쌓이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느냐"하면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어 감옥에 넣게 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가 지은 죄들을 회개할 때 이미 우리가 지은 죄들을 다 용서받는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에 대해 대우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죄용서를 받은 것은 죄를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전부 죄를 용서받아서 완전히 죄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어찌 주인이 다시 그를 불러 일만달란트의 빚을 갚으라고 심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남들이 자기에게 죄지었던 것을 용서할 때에 비로소 마지막날 하나님께서도 그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18:35). 이러한 말씀은 사실 주기도문에서도 나오고, 주기도문과 이어진 말씀에도 나온다(마6:12, 14~15).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6:12-1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렇다. 죄용서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그날까지 주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가 나에게 용서를 구할 때에 그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하지 않는 자는 그날에 그의 죄도 용서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5. 만약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성경은 이에 관하여 단호하다. 한 마디로 그런 사람은 그날 심판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눅13:1~5).

눅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어 보좌위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만일 성령이 죄에 대해 깨우쳐 주었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구원의 촛대를 그에게서 옮겨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2:5). 또한 죄를 책망받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속히 재림하시어 주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칼로 그와 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칼로 그를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계2:16).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칼을 가신다고 증거하였으며, 그가 활을 당기어 이미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말했다(시7:12). 뿐만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도 만약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자신의 죄로부터  떠나지 아니한다면 그 죄는 그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겔18:30).

시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겔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또한 신약의 베드로 사도도 죄사함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자신이 지은 죄들로부터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단호하게 회개해야 하고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고 증거했다. 그같이 할 때에 비로소 주님의 얼굴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시간들이 오게 될 것이라고 증거한 것이다(행3:19)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3:19[직역] 그러므로 죄들이 [단번에] 씻겨지기 위하여, 너희는 [단호하게]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는 [단호하게] 돌이켜라. 이같이 하면 유쾌함의 시간들이 주의 얼굴로부터 [단번에] 이를 것이요.

 

6. 나오며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하지 않는데, 죄용서받을 방법은 결코 없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를 시인하기만 한다면, 무슨 죄라고 할지라도 다 용서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일1:9). 그리고 몇 번이라도 다 용서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18:21~35). 문제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더 큰 문제는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들과 지을 죄들까지 다 한번에 용서받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경말씀이 아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오히려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무슨 죄를 짓었다고 할지라도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속죄제물을 확보해놓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의 죄가 자동적으로 용서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 비로소 이미 확보해놓은 속죄제물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예수님이 회개할 때에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주 예수님은 언제라도, 몇 번이라도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용서해줄 수 있다. 그러한 속죄의 능력을 그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속죄제물로 주시는 일에도 그분은 한 푼도 받지 아니하시고 그냥 거져주신다. 그러므로 속죄의 권한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아야 한다. 다만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속죄의 은총은 즉시 내게 임하게 된다. 그리고 즉시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결론적으로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이 말씀을 마무리해 보자. 둘째아들이 불효를 저지르고 아버지의 재산을 밭아 아버지의 곁을 떠났다고 할지라도, 아버지께서는 이미 둘째 아들의 죄를 다 용서해줄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둘째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용서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는 바로 둘째아들이 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용서하실 준비는 다 해놓으셨지만 회개하는 일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죄를 지은 자는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할 대상은 둘째아들인 것이지 결코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죄를 시인할 대상도 우리이며,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사람도 우리 자신이다. 그때에는 우리도 지은 죄를 자백하면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라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아버지께 돌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도 비로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용서의 효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0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사데교회,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어있는 교회라고 책망받은 교회다. 그런데 한때 사람들은 이 교회의 유형이 중세시대의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데교회는 지금 우리 개신교회(개신교회)의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왜 사데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자기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주님으로부터 엄하게 책망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그것도 주님이 도둑처럼 갑자기 임하여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겠다고 엄히 책망하신 것인가? 이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한 편으로 이러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 희게 하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살아있다고 명성을 자자하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교회, 만약 그대로 쭉 진행된다면 결국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는 교회에 관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교회가 교회되게 하려면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고 가신 일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하든지 교회를 잘 세워야 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운 목적대로 교회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시고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 반대로 어떤 교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버리시는 교회가 되는 것일까? 한국교회는 1885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와서 세운 교회들이다. 1885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리고 133년이 흘러갔다. 과연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7가지의 교회유형 가운데 한 가지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의 상태는 어떤 교회의 유형 안에 속해 있으며, 계속 이대로 있으면 어떤 교회가 될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상황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A.D.95년경 소아시아 지역에는 어떤 유형의 교회들이 있었는가?

  이 땅에는 수많은 종류의 교회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교회의 유형에는 어떤 교회의 유형이 있을까? 교회를 나누는 기준과 방식에 따라 여러가지 유형들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어떤 유형으로 보시고 있을까? 그것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A.D.95년경 사도요한에게 써보내라고 했던 편지들을 살펴보면, 이 세상에는 어떤 유형의 교회들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사도요한의 편지에는 7가지 교회가 쭈욱 등장한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 교회들이다. 그런데 A.D.95년 당시 소아시아에는 방금 언급한 7가지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골로새교회, 히에라볼리교회 등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들 중에서 7개의 교회들을 말씀하셨고, 그중에 한 교회가 바로 오늘 다루게 될 사데교회라는 교회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데교회를 향하여 엄한 꾸중과 책망을 하신다. 그것도 단순한 꾸중과 책망 정도가 아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한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을 만큼의 그 교회에 중한 상태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대체 사데교회는 무슨 잘못을 범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교회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을까?

 

3.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데교회는 두아디라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사이에 있는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명성)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죽은 교회라고 하셨다. 왜 이런 책망을 받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그 교회에서 온전한 행위들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 교회가 더럽혀진 옷을 입은 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던 자들이다(계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도둑처럼 가시어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경고 가운데서도 우리들에게서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는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들이 지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는 더렵혀진 옷을 입은 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사데교회는 왜 엄중한 책망을 받았으며, 오늘 우리 교회는 사데교회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믿는 이들 중에 자신이 사데교회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은 절대 그러한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사데교회를 책망하실 때에 들려주신 2가지의 조건들을 다시 보라. 과연 우리에게 믿음에 따른 행함의 열매들이 발견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날마다 지은 죄들을 회개하여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겉옷들을 씻어 희게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언제부턴가 예수믿는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예정)과 믿음으로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구원론이 제대로 된 구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이러한 구원론이 제대로 된 구원론이라고 한다면, 사데교회는 결코 책망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 하늘의 생명책에 이미 자기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성령을 통해서 교회의 사정을 깊이 감찰하고 계시고, 오른손으로 주의 종들을 붙들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도둑처럼 임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벼르고 계셨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어떠한 믿음의 행위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실 상당히 심각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과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 들어와서 어떤 교회가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외치고  있는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상숭배하고 음행하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말하는 교회를 들어보았는가? 또한 "예수님을 믿어도 믿음에 따른 행함이 열매가 없으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일지라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회를 보았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자신의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외치는 교회를 보았는가? 그런데, 사데교회가 그렇게 되기에 충분한 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한 책망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어떤 유형의 교회요, 어떤 시대에 속한 교회를 가리키는가? 신학자들 중에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들의 모습은 초기사도시대의 모습부터 말세시대의 교회의 유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에베소교회 : 기독교초기 사도시대의 교회(A.D.31~54/81)  *54년은 네로황제의 통치 시작년도, *81년은 도미시안황제의 통치 시작년도

2)서머나교회 : 로마박해시대의 교회(A.D.54/81~313)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연도

3)버가모교회 : 로마국교시대의 교회(A.D.313~590) *590년은 제1대 로마교황 그레고리1세가 즉위한 연도

4)두아디라교회 : 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A.D.590~1517) *1517년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연도

5)사데교회 : 종교개혁시대의 교회(A.D.1517~현재)

6)빌라델비아교회: 회복 및 선교시대의 교회(A.D.1700~1900) *1700년은 영국에서 자유의지와 회개를 강조한 연도(존 웨슬리는 1703~1791년 사람임)

7)라오디게아교회: 말세시대의 교회(A.D.1900~재림전) *1900년은 기독교교단이 사라지고, 성령운동과 같은 은사운동이 시작된 연도.

 

  이상의 교회사적인 증거들을 살펴보면, 결국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이후(A.D.1517~현재)의  교회상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루터(A.D.1483~1546)가 종교개혁을 했을 때에는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강조했었다. 그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붙힌 95개 반박문 가운데, 적어도 11개조항이 회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개혁을 바톤을 이어받은 칼빈(A.D.1509~1564)은 다시 중세시대의 구원론을 다시 가져왔으니 그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행함이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이미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이니) 구원얻는다는 생각이 팽대해지기 시작하였고, 회개없이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생각(하나님이 작정한 것은 틀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영락없이 사데교회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5. 사데들 안에 있는 자신의 겉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누군가?

  그런데 사데들 안에 자신의 더러운 겉옷을 씻어 흰 옷을 입고 다니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더럽혀진 옷을 깨끗하게 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아, 사데교회가 주의 종들과 성도들 모두가 잘못된 구원론에 빠져 있었지만, 그 교회 안에는 참된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몇 몇의 성도들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데교회 안에 그러한 성도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더라도 "사데에"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라(계3:4). "사데 안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계3:4)" 하지만 이것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자신의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나온다. "사데들 안에 자기들의 겉옷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던 몇 명이 있어...(계3:4)" 그렇다. 사데교회 안에 겉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데라는 도시 안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데와 같은 도시들 안에 그러한 몇 명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데교회와 같은 가르침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자기들의 죄로 더럽혀진 겉옷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 희게한 자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다만, 사데들 곧 사데와 같은 다른 지역들 안에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데교회 바로 앞에 소개되고 있는 두아디라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두아디라교회는 중세 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에도 "두아디라들 안에 남아 있어, 그 교훈(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한...(계2:24)"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두아디라는 이미 주의 종들마저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있기만하면 우상숭배해도 천국가고, 음행을 저질러도 천국간다고 가르치던 시기였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평신도들은 주의 종들(신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마리아도 숭배하고, 성인들도 숭배하고 그리고 죽은 자들도 숭배하고, 성물을 숭배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지옥에 떨어질 우상숭배의 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성경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는 두아디라교회 안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자는 다만 두아디라들 안에 있었던 것이다. 즉 두아디라와 같은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 두아디라교회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6. 사데교회같은 유형의 교회, 과연 무엇이 무엇인가?

  바른 구원론이 아니라 거짓된 구원론이 가르쳐지고 있는 시기에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회가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데, 거기서 아니라고 외친다고 한들 그것이 교회(교회의 지도자들)를 바꿀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취급받아 퇴출당하거나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는 두아디라교회 안에 있지 아니하였고, 사데교회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아디라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사데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나 사데교회나 똑같이 다 지도자들도 타락하고, 성도들도 타락한 동일한 유형의 교회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나 음행을 저질러도 다시말해, 십계명을 어겨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 시기의 교회라고 한다면, 사데교회는 살아있다는 그 명성이 알려주듯이, 겉으로는 정통신앙이라고 하는 구원론을 따르고 있다고 믿기에, 자신이 이단적인 가르침(이세벨의 교훈)안에 있지 않으며, 정통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니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기의 교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스로가 깨어있다고 하는 개신교회(개혁교회) 성도들은 두아디라교회에 있는 성도들(로마카톨릭교회의 성도들)을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는 이름의 교회 안에 있으니까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한다. 사데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라. 믿음이 있어 자신의 이름이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뒤따르지 아니한 자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결국 자신의 더럽혀진 행실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날까지 두아디라교회(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나 사데교회(종교개혁이후시대의 교회) 안에 남아 있어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의 구원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사데교회가 어떤 유형의 교회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명성을 가진 교회 즉 정통이라는 이름 하에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가진 이들의 교회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무섭게 들린다. 속히 도둑같이 임하여서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버리시겠다고 경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계3:5b).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시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계3:5c). 더럽혀진 채 있는 그들의 행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는 천국의 흰 옷을 입혀주지 않으시겠다고 경고하지 계시기 때문이다(계3:5a).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남들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날마다 더렵혀진 자신의 행실을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어 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름만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론에 따라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날마다 지은 죄들을 회개함으로 자신의 더럽혀진 행실을 깨끗케 해야 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7월 8일(주일)
정병진목사

 

 

하나님이 계시는 저 셋째하늘에 가면 우리는 2가지 종류의 책들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낱낱의 행위를 기록해둔 행위책이요 또 하나는 구원받은 자의 이름을 기록한 생명책이다. 행위책은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가 행했던 일들을 빼곡히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생명책이라는 것도 있다. 그 책은 그가 진정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에 이름이 기록되는 책이다. 사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생명책 안에 자신의 기록된 자들뿐이다. 그런데 생명책 안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라도 그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미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무슨 일 때문에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고마는 것일까? 그리고 언제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가?

 

1. 들어가며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천국가기 위함이다. 천국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다. 성경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1:27). 그러므로 만약에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는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계20:15).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일까? 그리고 한 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면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인가? 혹시 그 이름이 지워진다면 언제 그 이름이 지워지게 되는가? 그리고 한 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어떤 경우에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인가? 그 반대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은 생명책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생명책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늘에 있는 생명책의 존재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약 여섯 명 정도가 된다. 그들 중에서 구약의 인물로는 모세와 다윗이 있고, 이사야와 다니엘선지자가 있다. 그리고 신약의 인물로는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증언하고 있는 생명책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먼저, 모세는 분명히 그 생명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과, 자신의 이름이 이미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출32:32~33). 그리고 그 생명책에서 한 번 이름이 지워지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편 다윗도 하늘에 있는 생명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그는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려야 할 사람이 있다고 언급하였다(시69:23).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마다 거룩하다고 칭함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였고(사4:3), 다니엘 선지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단12:1). 그리고 신약의 성도중에서 사도바울도 생명책의 존재여부를 알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하늘의 생명책에 빌립보교회의 여성도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요한은 계시를 받아 하늘에 있는 생명책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사실과(계13:8,21:27), 이 생명책에 창세이후로 구원받을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왔다는 것을 언급하였고(계13:8, 17:8),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결국 불못에 던져지게 되며(계20:15), 천국에 들어갈 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만 한다고 증언하였다(계21:27).

 

3. 언제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가?

  그렇다면, 언제 생명책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 과정이 정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책 안에 이미 어떤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곻고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장 3절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거기에 해당한다. 그 여인들의 이름이 생명책 안에 들어있다고 사도바울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대체 이 여인들은 어떤 여인이었길래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을까? 먼저, 이 여인들은 어떤 여인이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바울은 이 여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복음 함께 싸우던(고군분투하던) 자들"이라고 말이다(빌4:3). 그렇다. 그들은 바울선교팀이 빌립보성에 들어온 이후 자주장사 루디어와 간수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진 이후 복음사역을 위해 애썼던 인물이었다. 아마도 빌립보교회의 핵심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바울은 이 여인들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나오는 성경말씀에 보면, 사람은 언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고 언급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으며 그분만이 자신의 구원자임을 믿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 같다. 요일5:12에 의하면, 아들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미 그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이다.

 

4. 사람은 어떻게 될 때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어도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온다. 첫번째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범죄하는 경우다(출32:32~33). 사람이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직접 말씀하셨다(출32:33). 두번째의 경우는 죄를 지었는데 회개하지 않아서 계속해서 더럽혀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경우다(계3:3~5). 이런 경우도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다. 그런데 사람치고 죄짓지 않고 살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게 되는 유일한 경우는 자신이 범죄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지냈을 때다. 이때는 죄가 죄인지도 몰라서 회개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죄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둘 다 죄를 회개하지 못했으니 이들의 이름은 결국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말 것이다.

 

5.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가?

  그렇다면, 시점으로 볼 때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언제 지워지는 것일까?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주님을 믿는 자였어도 핍박의 상황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번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죽어 심판받는 그 날, 예수님께서 그를 모른다고 하실 때에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이다(계20:12, 마10:32~33). 그렇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시인해야 할 자리인데도 죽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계속해서 범죄한다면 그 이름은 그가 죽는 그날에 지워질 것이다. 한 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그가 죽는 날까지 이름이 지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회개하지 않고 죽게 되나면,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판받는 그 순간에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회개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6. 빌립보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어떤 이유로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런데 어느날 바울에게도 문제가 발생했다. 로마감옥에 있던 바울에게 빌립보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이 두 여인이 서로 싸우면서 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근심이 가득해진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화해하지 못한다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그 여인들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 여인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한다. 회개하여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지체를 아껴주고 사랑하라고 말이다(빌2:1~5, 4:1~4). 그렇다. 믿는 자라고 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이름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기록되었다 지워졌다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본인이 죽는 날에 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는 그날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그를 깨우쳐주려 하시고 환경을 통해서라도 그를 회개하도록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가회개할 때에 비로소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사람치고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이 있고, 밖에서는 귀신들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데,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살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즉시 지워지게 되는가? 그것은 아니다. 한 번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비록 그가 죄를 지어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저지를 뿐만 아니라,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죽는 날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말 것이다(출32:33, 계3:5).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범죄하는 않는 경우다. 그리고 혹시 범죄했다고 하면, 즉시 엎드려 회개하는 것이다. 그렇다. 회개가 구원의 최종관문에 해당한다. 회개하자.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 즉시 엎드려 회개하자. 누군가가 회개하라고 촉구하면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자. 회개만이 살 길이다. 회개만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월 14일(주일)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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