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신약에 들어와서 왜 구약에 없던 세례의식을 제정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구약의 속죄제사 의식만으로 충분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세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을까? 구약시대에도 세례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실천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다윗은 왜 황소를 드림보다 상하고 통회한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을까? 오늘은 예수님시대에 왜 회개가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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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올 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히던 해가 1517년이었으니, 딱 500년이 된 것이다. 사실 처음 루터의 종교개혁은 좋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 개혁의 헤게모니(주도권)를 칼빈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가 그 자리를 박차고 들어왔고, 그것 때문에 오늘날까지 죄를 지어도 죄가 무서운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비록 루터가 “오직 믿음”이라는 개혁신앙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보게 되면, 그는 최소한도 11개의 문장에서 회개의 필요성을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1항에서 제4항까지를 살펴보자.

“제1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2항 이 말씀은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제3항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inner repentance)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제4항 죄에 대한 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여도, 즉 참된 내적 회개를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다. 회개가 중요했다. 하지만 칼빈으로 이어졌던 종교개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회개 없이도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가 탄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막1:15). 그래서 바른 구원론을 회복하기 위해 어제 우리는 왜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간의 범죄가 가난죽음불행저주를 가져왔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회개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다(요일1:7,9). 오늘은 예수님 시대에 어떻게 되어 회개가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구약의 속죄제사가 어떻게 세례(洗禮)로 바뀌었을까?

구약시대에 언약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속죄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레4~5장).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속죄 제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죄없는 속죄제물이 자기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주신 법이자,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주어진 임시법이었기 때문이다(갈3:19).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한 채, 죄를 지으면 으레 속죄제물만을 바치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그때 칼로 목을 쳤던 제물이 결국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때가 되었다(갈4:4). 이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속죄양으로서 메시야를 보내실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람 앞에 나타난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었다(사9:6).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속한 땅으로 직접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요1:1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속죄양으로서 메시야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구속을 성취할 것인지를 미리 다 알려주셨다. 율법에서는 모형으로 알려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서는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알려주셨다. 그러니 적어도 350가지 이상의 모형과 예언이 메시야를 알려주었다(요5:39). 그러니 오신 메시야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만세전에 작정하신 일을 이루셔야 한다. 그 일은 무엇인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메시야의 속죄를 믿고 죄사함을 얻은 자들을 천국에 데려가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람들은 형식적인 제사에만 매달려 있을 뿐,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자기들이 바친 속죄양을 대신해 드려질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맞아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한 사람을 먼저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선지자 세례요한이다. 그는 이사야에 예언된 광야의 외치는 소리(사40:3)로서, 말라기서에 예언된 여호와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말3:1). 그런데 세례요한은 당시 행하는 방식과 달리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었다. 사실 그가 물로 세례는 주는 것은 2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메시야와 메시야가 가져올 천국을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일이었고(마3:2), 또 하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메시야를 천거해주고 그분에게 인류의 죄를 넘기는 일이었다(요1:31, 마3:15~16).

그랬다. 구약의 속죄제사의 핵심은 흠없는 속죄제물이 죽어가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아울러 속죄제물로 죽으러 오실 메시야를 경배하고 그분께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러 오신 메시야를 믿도록, 율법에도 없던 세례를 베풀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회개의 중요성과 속죄양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을까?

 

3.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회개와 속죄에 관련하여, 구약의 인물 가운데 두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한 사람은 욥이고 한 사람은 다윗이다. 욥은 비록 무할례자의 대표이기는 하지만 조상들로부터 배운 율례를 따라 속죄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죄를 짓게 되면 속죄제사를 통해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흠없는 제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죄에 애통해하는 마음 곧 회개하는 마음보다는 제사의식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단지 율법규정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그에게 두 차례에 걸친 시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죄용서에 관한 영적 비밀을 모른 채 죽었을른지도 모른다.

그는 비록 1차시험은 통과했지만 2차시험에서 넘어지고 만다.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갈 무렵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욥은 비로소 자신의 무지함과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업을 울타리로 지켜주셨기 때문에 부자로 살았던 것과 하나님의 배려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게 된다. 그는 너무나 죄송스러워 머리 위로 티끌을 날리며, 재를 머리에 부어가면서 깊이 회개를 하였던 것이다(욥42:6).

한편 할례의 대표자인 다윗은 좀 달랐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지켰던 약속의 자손으로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한 다음,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속죄제물을 드리는 의식만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시51:16-17 주께서는 제사(희생제물)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燔祭)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희생제물)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그때 무엇이 과연 실제적으로 죄를 깨끗이 씻겨주며 죄사함을 받게 하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좋아했고,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리앗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선대왕이자 장인이었던 사울왕의 미움 때문에 여러 곳으로 도망다닐 때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만할 뿐 그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찌되었든 하나님과 늘 교제하던 다윗왕은 희생제물로서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죄를 깊이 뉘우치고 산산조각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했다. 그래서 그는 희생제물을 바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진실로 죄를 회개하며 통곡하게 된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지은 죄를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시32:5). 또한 그는 몇날며칠동안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실만큼의 눈물로서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시6:6).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그렇다. 형식적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을 들어보라. “회개하라! 지금 메시야가 너희에게 다가오고 있다. 만약 지금 회개하지 않는다면 도끼로 너를 쳐내버릴 것이다.” 그렇다. 죄를 숨기지 말라. 죄를 토설하라. 죄를 깊이 뉘우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자복하고 회개하라. 회개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결코 죄사함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나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7년 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온전한 회개와 천국복음, 알고 가르치자!”

 

[제목] 왜 회개가 필요한가?

[찬송] 찬246장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말씀] 마가복음 1:1~5(신약 53면)

2017.2.27(월)

1. 들어가며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양적인 감소뿐만이 아니다. 성도들의 도덕성마저 땅에 떨어진지 이미 오래다. 이 사회에 있어서 부정한 행위나 사기행각, 음란과 퇴폐행위는 불신자나 신자나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왜 이렇게 죄를 짓고도 성도들은 매주일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를 출석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떤 이는 교회에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교회가 성령충만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가르친 개혁신앙의 부작용이라고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거기에는 이미 자신은 구원받았으며,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가르친 잘못된 구원론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구원받아버렸는데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지 아니한가? 왜 세월호의 사건이 있었는가? 300여명의 학생들을 침몰하는 배에 남겨둔 채, 자기만 홀로 살겠다고 도망쳐 나온 세월호 선장의 행동은 이 시대의 잘못된 구원론의 전형적인 예이다. 자신은 무슨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구원받았으니, 양심의 가책마저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자의 모습이 곧 악마의 모습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죄를 짓고도 가만히 있는 자는 어떤 자인가? 그는 사탄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제는 신앙을 똑바로 세워야할 때가 되었다. 바른 구원론을 외쳐야 할 때가 되었다.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제2의 종교개혁의 때가 된 것이다. 무엇이 구원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죄짓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영혼과 미래에 악영향을 끼치며,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철저히 깨닫고, 죄를 처리해 나가야 한다.

 

2.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어떤 결과들이 나오게 되는가?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말씀의 순서에 따라 정리해보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불순종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아담의 경우를 보자. 첫째, 풍요를 박탈당했다(3:17~19a). 즉 ‘가난이 찾아온 것이다(신28:17). 땅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더 이상 풍성한 열매를 내어놓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땀흘려 수고해도 토지는 그 소산을 내어놓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의 죄가 심할 때에는 기근마저 몰아닥쳐 가난은 계속해서 대물림 되었다. 둘째, ‘죽음이 찾아왔다. 1차적으로 육체적인 죽음이 찾아왔고, 이어서 2차적으로 영혼의 죽음이 닥쳐왔다(3:19b). 죽음은 고통이다. 특히 2차적으로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죽음은 영원한 불못의 고통 속에 빠지게 한다(눅16:22~24). 그런데 그 시기는 한 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된다. 한 번만 불구덩이에 담금질당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담과 하와가 나은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보자. 가인과 아벨이 둘 다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그에게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인은 괜한 동생 탓을 하고는 동생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다(창4:1~8). 이렇듯 사람이 죄를 마음에 품게 되자 셋째, 사랑이 식어지고 가정이 파괴됨으로 행복이 깨어지고 말았다.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가정과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산실이자 천국의 모형이다. 하지만 가인이 미움의 죄를 품게 되니 그만 형제를 죽이고 말았다. 생육과 번성이 중단된 것이다. 단숨에 아벨의 씨가 마르게 되었다. 그후 가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보호를 받지 못하니 높은 성을 쌓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단절의 고통과 외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후 그의 후손들은 살인기계를 만들었고, 사람들을 대량으로 살상했으니,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신28:25~26).

그리고 이어서 노아의 증손자 니므롯이 죽었을 때,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이전에 없던 놀라운 시도를 하였다. 그녀가 낳은 사생자를 두고, 니므롯은 죽어 태양신이 되었으며, 그가 환상하여 아들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 그의 이름을 ‘담무스’라고 칭했다. 그리하여 하나님 이외의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가 탄생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아들을 신으로 섬기는 바벨론종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상숭배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는지 아는가? 놀랍게도 그때부터 자손에게 대물림되는 저주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저주는 3~4대까지 이어졌으니(출20:5), 이것이 바로 인간의 범죄에 대한 넷째 결과에 해당한다(계2:22~23). 그렇다면, 우상숭배의 저주란 무엇인가? 첫째로, 자신이 질병의 침상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때에는 단순한 질병에 던져질 뿐만 아니라 중한 질병에 던져지게 되고, 때로는 질병이 오래가기도 한다(신28:22,27). 그리고 자식 중에 불구자로 태어나는 일이 발생하며, 정신 이상자가 나오기도 하고, 사람 속에 귀신이 들어가 몸을 장악할 때면, 미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울증에서 시달려 자살하는 사태까지 생긴다(신28:28). 둘째로, 나와 관계된 사람이 이유없이 우환에 시달리게 되며, 그리고 셋째로, 내 자식이 수명을 채우지도 못한 채 일찍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한 마디로 여러 질병과 사건사고를 당하며, 단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범죄한 인간은 지금도 자신의 영혼육을 파괴하고 있으며, 쉬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3.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모든 고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 기원은 인간의 범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첫째, 하늘의 행위책에 죄목이 낱낱이 기록된다. 그리고 둘째로, 그때부터 사람의 육체는 귀신의 소유가 된다(삼하12:14).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기 때문이요(요일3:8), 아담의 범죄 직후 하나님께서 뱀에게 “너는 네 생명의 모든 날들에 흙(티끌)을 먹을지니라(창3:14)”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하게 되면 사람은 그때부터 마귀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죽는 그날까지 온갖 저주와 가난과 질병 가운데서 시달리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죄용서를 받는 것이다. 죄용서를 받게 되면, 우선적으로 하늘의 행위책에서 내 죄목이 지워지게 된다. 그리고 둘째, 사탄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죄용서를 받게 되면 능력 있는 마귀나 귀신이라도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근거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셋째, 죽은 후에는 자신의 영혼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씻어 지워버리는 길뿐이다(요일1:7,9). 이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바로 회개인 것이다. 회개만이 우리의 살 길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진원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 밖에 없다. 그러니 회개가 복된 소식 곧 복음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죄사함을 받게 하게 하는 회개”를 증거하고 있다(막1:4).

그런데 이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지 아는가? 하나님이라도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는 없으시다.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에게 이러한 공의가 없다면, 우리의 대적 마귀를 공식적으로 벌할 방법이 없게 된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범죄가 가져다 준 결과 곧 위의 네 가지의 참혹한 결과를 누군가가 대신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인간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려고 전능자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랬다. 주님의 사람되심은 바로 우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태어나셔야 했고 자라나셔야 했고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세례요한을 찾아가서 인류의 모든 죄를 전가받으셨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로 가시어 모진 죄의 댓가를 다 치르셨다. 그리고 죽음을 받으신 후에 음부까지 내려가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다 받으신 것이다.

그러니 단지 입술의 딸싹거림으로 회개하지 말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드리라.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없게 하시려고 이처럼 엄청난 희생을 대신 치르신 것이다. 오직 이 새벽 이 고요한 시간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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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리고 그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왜 또 사탄에게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일까요? 훗날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죄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주셨는데, 대체 욥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회개했던 것일까요? 숨겨 두었던 죄라도 발각된 것일까요? 욥기서를 읽어보게 되면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를 깊이 들어가볼 것입니다. 그리고 욥이 뒤에 가서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욥, 그는 동방사람들 중에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히브리인이 아니라 에돔지역에 살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던 히브리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에 결코 고아와 객과 과부를 홀대하지 않았으며, 함부로 처녀나 여인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고, 돈이나 재물에 마음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종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는 율법적으로 볼 때에도 거의 모든 것을 다 지키며 살았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아직 제사법이 확실히 공개되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벌써 하나님께 번제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사실과 그분이 '전능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이내 그는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에게 사탄의 시험이 불어닥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탄의 시험은 1차시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은 1차시험도  꽤나 버거운 시험이었습니다. 욥은 이때 1차시험을 통해 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많던 재산을 모조리 잃게 되었고, 종들까지 다 잃어버렸습니다. 더욱이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7남 3녀의 자식까지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잔치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다 지붕에 깔려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 때문에 욥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빈 몸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빈 몸이 가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2차의 시험에 욥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욥은 자신의 건강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세 명의 친구들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티끌을 날리면서 일주일 내내 욥과 함께 울었습니다. 그후로 욥은 변했습니다. 그의 입술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놓고 하나님을 욕할 수는 없으니, 자신이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그날 죽었더라면 이러한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재산과 종들과 자녀들을 치도록 놔두셨고, 마지막에 가서는 욥의 건강까지 치게 하셨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욥이 비록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기는 했지만 욥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놔두면 그의 그 신앙만으로는 심판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욥은 무엇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정리해보면 대략 3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째, 욥은 인간이 복을 받고 사는 것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업을 울타리를 쳐서 지켜주신 결과라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욥이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욥의 의로운 행실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이 참소한 바 대로, 하나님께서 욥과 욥의 집안과 욥의 재산을 울타리로 둘러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욥1:9~10). 하지만 나중에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욥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자신 안에 잠재되어있는 죄된 본성이 여타의 사람들처럼 똑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고 죄된 본성을 해결하지 못하면 죽은 다음에 지옥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탄으로부터 2차시험을 당하자 그의 속에 숨어있었던 죄된 본성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탄의 시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자기속에 잠재되어있는 죄된 본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지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셋째, 욥은 자신이 행했던 율법의 선한 행위와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제사만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죄를 해결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회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잘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욥이 뒤늦게 하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무엇입니까? 첫째, 욥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으며 얼마나 무지한 사람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정말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대하신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뭘 모르고서 자신에게 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보십시오.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기도줄을 놓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는 내가 천지를 창조할 때 그곳에 있었느냐?"를 필두로 하나님께서는 욥이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하나님은 물었습니다. "왜 바닷물이 한계가 있어 넘치지 않는지 아느냐? 너는 바닷물이 솟아나는 샘에까지 들어가 본 적은 있느냐? 사망의 문을 본 적이 있느냐? 눈 곳간과 우박곡간에는 들어가 보았느냐? 누가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운행을 주관하고 있는지 너는 아느냐?" 등등의 질문에 욥은 입술을 가리울 뿐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질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가 없는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하나님 잘못이라고 했던 자신의 무지함과 교만함을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둘째, 욥은 사탄의 시험을 받지 않았더라면 잠재되어 있어 몰랐을 죄된 본성을 지옥에서야 깨달을 뻔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1차시험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 하지만 2차시험을 당하고 고통의 세월이 지속되자, 욥은 하나님께 원망섞인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즉 좋은 환경에 있을 때에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던 죄된 본성이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속에서부터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참소의 기능을 이용하여 욥이 얼마나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인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셋째, 욥은 사람은 누구나 죄성이 있어 죄를 짓게 되는데, 비록 어떠한 죄를 짓는다 하더라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산업의 울타리를 지켜 줄 때만 해도 그는 율법의 행위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있는 죄성은 어찌할 수 없었기에 그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러다가 내 재산을 다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내 건강은 잃어버리는 않을까?"하면서 두려워했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사람의 내면에 숨겨져있는 죄성이라는 것을 그는 잘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의 2차시험을 통해 그것이 올라오게 되자, 욥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안과 밖의 모든 죄들을 다 깨끗히 씻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비록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흠잡을데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회개의 중요성을 전혀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즉 형식적으로 율법의 선한 행위를 지속하고 있었고, 혹 잘못한 일이 발생하면 제사만 드리면 용서받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율법의 선한 행위나 형식적인 제사행위가 아니라, 자신은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욥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잠재된 죄성 때문에 죄를 짓다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사탄을 이용해 욥이 회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일부러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여, 사탄으로 하여금 욥의 죄된 본성을 들추어내게 하신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욥에게는 한 가지가 부족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면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혹 여러분도 이와 같습니까? 그러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을 믿고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말로 두 다리 쭉 펴고 사시다가 천국에 들어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6-07-03 욥이 뒤늦게 알게 된 사실(욥3;1~13).ts_000005640.jpg



  성경 중에서 중요하지 않는 성경이 있을까? 그렇지만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면 우리는 로마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롬1:1,16~17). 그래서 모든 사람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가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모든 과정을 총망라한 서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로마서의 소주제인 이신칭의를 구원과 거의 동일시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특히 이신칭의로 말미암아 한 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거나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은 맞는 것이며 성경적인 것일까? 오늘은 로마서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써,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보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어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무엇이며,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로마서를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로마서는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유익한 서신서다. 죄인이 어떻게 이신칭의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칭의자가 어떤 성화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로마서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단계로 이어지는 구원의 여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러한 구원의 여정은 구원에 관한 모든 절차를 다 포함하고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구원이란 죄사함을 받는 것 혹은 중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죄사함과 중생은 구원의 모든 개념을 다 포함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결국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죄사함을 받았던 자라도, 중생을 얻었던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음을 말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은 결국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죽기 전까지는 한 개인의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로마서를 통해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이 구원받아 영화롭게 되기까지는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의 여정의 끝마치기 위해서는 칭의의 단계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칭의를 강조하다가 그만 성화의 과정을 소홀히 여기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열매가 없을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아주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가 구원의 여정을 말하고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구원에 관한 완벽한 책이라고 단정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만약 구원의 여정에서 성화를 빼버린다면 그것은 곧 구원을 헐값에 팔아 넘기는 것이 되어 나중에는 죄를 회개치 못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일까지 발생할 수가 있다. 사실 구원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회개와 성화의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러한 성화의 과정이 없는 이신칭의는 결국 성도를 천국으로 보낼 수가 없다.

  잠깐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조금 요약해보자. 로마서는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잘못된 구원론사상으로 인하여 요즘 현대의 개신교인들은 로마서에 나오는 이신칭의를 마치 구원인량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은 구원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성화의 과정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개신교회는 구원의 여정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끝까지 구원의 경주를 마치지 못하고 그만 구원을 놓쳐버리는 성도들도 있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이 없는 구원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칭의만으로 결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믿어야 그것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구원의 첫 출발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통과하여야 죽은 다음에 영화의 단계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는 성도들은 칭의에서 곧바로 영화의 단계로 넘겨버린다.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칭의는 얻었으나 성화되지 아니한 자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화의 과정은 성도들의 구원에 있어서 매주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사실 칭의는 구원의 첫 시작점에 불과하지만 성화는 구원의 거의 모든 전노정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리고 칭의가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만, 성화는 일평생 일어나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확대해석하여 성화없이도 구원에 이를 것처럼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구원론에 대한 반격 때문이다. 당시 카톨릭이 주장하는 구원의 방편은 3가지였다. '세례'와 '선행'과 '물질적 기부'다. 누구든지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선행을 하며 돈을 기부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공덕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하든지 세례만 받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행위구원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과정의 일부분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첫 발을 내딛는 시작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다 해 주신 것을 그저 믿는 것 뿐이다. 칭의를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행위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 사실 인간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취해야 할 어떤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속죄제물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의 후손치고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인간은 단 한 명도 자격을 갖춘 자가 없었기에, 죄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셨다. 이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는 완료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에게 효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 우리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의 기본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말고 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하는 일이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이었던 것을 시인하고, 지었던 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이러한 회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회개까지 하나님께서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는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눅15:11~24).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돌아갈 분깃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것은 그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지은 인간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땡전한푼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아들이 스스로 뉘우친다(눅15:17). 회개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 그렇다. 아버지가 대신 회개할 수는 없다. 회개는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아들이 회개하도록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그의 회개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회개까지 하나님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만세전에 구원받기에 택정함을 입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겠지 하면서,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라. 그러다가 회개하지도 못한 채 죽으면 큰 일나기 때문이다. 회개까지 하나님이 대신하도록 밀쳐내지 말라. 회개는 죄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외치셨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의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은사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구원얻기 위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때 행하는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회개다. 그리고 이때는 동시에 자신이 지었던 생각나는 죄까지 같이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신칭의를 받아 구원의 노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그후에 신자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성화의 과정을 크게 2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믿는 자 속에 들어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성도들은 과연 자신의 옛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가? 아니다. 이 질문에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대문에 이미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신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고 오히려 옛사람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구약의 성도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 들어갔고(마8:11~12), 모세와 엘리야도 천국에 들어가 있다(마17:15). 구약의 성도들은 오직 여호와님 한 분만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그분이 메시야를 보내주어 인류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믿었다. 또한 그들 자신이 율법에 따라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했던 것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가 없이도 구원받았던 것이다. 그들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오실 메시야를 믿으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라도 혹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편 강도의 경우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도 큰 죄를 지어 십자가의 한 편에 못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는 3가지를 말했다. 자신은 죄를 지었으니 마땅이 죽임당할 일을 한 것이라고 자백했으며, 자기들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자신을 불쌍히 여기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인으로 받아들였고 죄인이라도 천국에 데려가실 수 있는 메시야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선행이나 물질적인 기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낙원(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지도 않았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도 나가서 전파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막6:12). 예수께서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파했던 베드로도 군중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으며(행2:38, 3:19, 8:12),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활동했던 사도바울도 회개할 것을 명했던 것이다(행17:30).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60년이 지난 시점에 사도요한에게 일곱교회에 써 보내라고 했던 편지의 핵심내용은 곧 회개였던 것이다(계2:5,16,21~22,3:3,19). 그렇게 회개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하라는 명령은 자범죄를 회개하라는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일곱교회에게 명한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미 이신칭의를 통해 구원 안으로 들어온 신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자범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자가 있다면 그는 2가지 회개가 다 필요하다. 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는 단회적인 회개와 지었던 자범죄를 회개하는 반복적인 회개를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이신칭의를 통해 단회적인 회개와 구원얻기 위한 믿음을 가진 자는 자범죄에 대한 회개를 하면 된다. 당신은 지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가? 아니면 교회밖에 있는가? 어찌되었든 당신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날마다 회개를 지속하라. 그래야 죽을 때에 깨끗히 죄를 떨쳐버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두번째로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의 실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복음이란 무엇일까? 사실 인간이 해야 할 두 가지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이다. 복음을 믿되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믿어야 한다(막1:14, 롬1:1). 그 복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그렇다. 복음의 요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을 가리킨다. 그 아들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어져왔다. 그 예언에 따르면, 예수그리스도는 인성에 있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실 것기고, 거룩의 영 곧 신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로 인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난 다윗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시작은 이렇게 선포한다. "아브라함의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1:1)" 예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후손이었고, 예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인 나단의 후손이었다. 이렇듯 다윗의 가문의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만나 약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해산할 무렵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로마황제에 의한 호적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요셉은 혹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여 배가 불러온 약손녀인 마리아를 데리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간다. 사실 당시 여자는 호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천사의 고지를 받은 요셉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그리하여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된다. 이것이 메시야에 관한 약 300가지의 예언 중에서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예언의 성취의 시작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오셨고 그리고 공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진 바로 그 메시야인 것을 안다. 만약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아니한 채, 혹시 하나라도 죄를 지어버렸다면 그분은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했다. 그분이 부활했다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로서 해야 할 사명을 다 성취했다는 것이며, 정작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분은 누구의 죄로 죽은 것인가? 예수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해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죄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제 모든 만물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확정되기에 이르셨다. 그분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심으로 인류구원의 새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 이외에 결코 메시야는 존재하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온 재림예수 내지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신천지의 이만희도 결코 메시야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도 아니며, 통일교의 문선명이도 아니고, 신앙촌의 박태선이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 단 하나도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이만희를 제외한 모든 교주들을 다 죽었지만 결코 살아나지 못했다. 그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이만희와 안상홍과 문선명과 박태선을 메시야나 재림예수나 보혜사로 믿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믿고 아무리 회개한들 그 회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이 분을 믿으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 이외에 구원자가 없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든든한 반석 위에 있는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5-10-14 로마서강해(02) 로마에 전해야 할 복음과 바울사도의 사명(롬1;1~7).ts_00021649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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