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회개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리 상관없는 회개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회개하기를 게을리하고 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곁을 떠난 뒤에 이미 그는 죽은 자였고 잃어버린 자였다. 그때 거기에 있는 그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자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죽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탕자, 어찌 둘째아들뿐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맏아들은 아닌 것인가? 탕자의 회개, 결코 만만히 볼 비유가 아니다.

2020-09-11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53)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14) 탕자의 회개(2)(눅15:11~24)
https://youtu.be/FpJe_MaqEnE  [혹은 https://tv.naver.com/v/15733216  ]

 

 

1. 들어가며

  "잃은 아들의 비유"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들려주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당시 어떤 대상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신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은 "비유"로 들려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눅15:3). 그런데 비유는 항상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깨우침을 받으려 하는 자에게는 깨우침을 받게 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고로, "탕자의 비유"는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할 대상에게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대체 누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었으며, 이 비유는 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들려주신 말씀인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2. "탕자의 비유"는 누구에게 들려주신 말씀인가?

  "탕자의 비유"는 대체 누구에게 들려주신 말씀인가? 우리는 그때 당시 1차 독자가 누구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면 비유에는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3가지 비유들은 성자와 성령과 성부 하나님의 순서로 들려주는 비유들로서,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이며,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다. 그리고 셋째는 잃은 아들의 비유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둘째아들인가 아니면 맏아들인가? 우리는 보통 여기서 탕자는 둘째아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탕자는 둘째아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맏아들도 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3가지 비유를 들려주고 있는 대상이 두 종류이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세리들과 죄인들이며, 두번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눅15:1~2). 고로, 둘째아들과 맏아들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 둘째아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리키고, 맏아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오늘날에 어떤 이는 둘째아들은 이방인들을 지칭하고, 맏아들은 유대인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딱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정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며,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인지을 곰곰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3. 아버지에게 있는 두 아들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들이 있었다. 더 나이많은 아들(맏아들)이 있고, 더 젊은 아들(둘째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더 젊은 아들(헬라어원문상)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갈 분깃(몫)을 달라고 하더니, 그만 며칠이 안 되어 그것을 전부 모아서 먼 나라로 가버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것을 허랑방탕하여 낭비하더니 결국 탕진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나라에 앞친데 덮친격으로 심한 흉년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그 나라의 백성들 중에서 돼지치는 사람에게 붙여살게 되었다. 그런데 돼지를 치면서도 아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어느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주는 자가 없었기에, 그가 자신을 돌이켜보며 회개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대강 줄거리다. 

 

4. 둘째아들(더 젊은 아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그렇다면 둘째아들은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얼핏 보기에 둘째아들에게서 죄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죄란 결국 십계명을 어긴 것을 가리키는데, 그가 십계명의 어느 계명을 어겼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몫을 낭비한 것이 무슨 죄라고 딱히 지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둘째아들이 지은 죄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가 지은 죄는 첫째, 제5번째 계명을 어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아들은 젊었다. 그리고 아직 산전수전을 겪어보지 못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할 수만 있으면 멀리 떠나고자 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모아서(그리고 팔아서) 아버지의 곁을 멀리 멀리 떠나버렸다. 그러면 아버지가 자기를 걱정하시고 염려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둘째아들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고로 그는 불효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둘째, 제10번째 계명을 어겼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께 받은 상속재산을 모아서 외국에 가서 쓰되 그것을 절약해서 쓰지도 않았고, 그것으로 다른 사업을 하는 데에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물쓰듯이 써버린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보고자 한 것에 대한 표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보려고 한 죄가 10번째 계명을 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그가 돈을 하나님이나 아버지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제1계명도 어겼다고 할 수 있다. 

 

5. 둘째아들이 만약 외국에서 돌아오지 않고 거기에 머무렀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둘째아들의 회개한 것에만 촛점을 맞춘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회개하기만 하면 영원히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어버리기에, 자신이 설령 범죄하여 잘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천국백성이 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자기를 회개시켜 천국에 데려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도 태평하다. 그 죄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어도 태평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 천국 가는 데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어찌하든지 회개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다. 

  먼저, 우리는 둘째아들의 상태를 점검해보자. 그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나 그가 외국으로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을 때나, 그의 신분은 여전히 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며, 또한 당시는 상속자인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둘째아들은 범죄하기 전에도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그가 범죄한 후에도 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가 외국에 나가기 전에 그는 상속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그가 만약 외국에 나가서 허랑방하여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거지가 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었을 때, 그는 계속해서 아버지의 아들이며 상속자라고 할 수 있을까? 명목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이미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이 내 아들은 아직도 죽은 자로 있어 왔는데 다시 살아난 것이며, 이미 잃어버린 자로 있어왔지만 다시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눅15:24)"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집을 떠나는 순간, 그 아들은 이미 죽은 아들이 된 것이며,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이 된 것이다. 아들로서 그리고 상속자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자기가 처한 곳에서 계속 머무른채 아버지께로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자식이자 상속자이지만 이방인의 땅에 있을 때에 그는 종이나 거지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만약 둘째아들이 외국에서 돼지를 치다가 죽었다면 그는 결국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고, 둘째아들은 "원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죄를 지은 성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잃어버린 아들이 외국에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강제로라도 다시 자기 집으로 데려갔느냐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 둘째아들이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회개는 자기의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강제로 코를 꿰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탕자가 해야 할 일인 것이지 아버지가 대신 해주거나, 강제로 회개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는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관대한 분이심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는 자를 그분은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이상하리만큼 느긋하다. 죄를 짓고도 즉시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회개시켜 데려가실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를 속속히 보여주는 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을 보내어 아들을 찾아올 것을 시키고 있는가? 아니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고 자기의 집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되돌아오는 것 자체가 회개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회개할 때에라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어떠한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모든 죄에 대해서 관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짓고 있는 자신은 거기게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아들과 상속자가 아니될 수 있다. 마귀와 귀신들의 종이 되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6. 둘째아들만 죄인인가 아니면 맏아들도 죄인인가?

  사실 "탕자의 비유"는 1부에 2막이 있는 이야기다. 1부 1막의 이야기는 눅15:11~24절까지에 나오는 둘째아들의 비유다. 그런데 1부 2막 이야기는 눅15:25~32절까지 나오는 첫째아들의 비유다. 고로 탕자의 비유는 2개의 비유가 들어있는 것이다. 고로, 둘째아들(더 젊은 아들)은 자신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용서받은 죄인이라면, 맏아들(더 나이많은 아들)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이 죄라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는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맏아들도 회개하지 않은 채 그그대로 있다면 그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맏아들도 엄청 불효자식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있던 날, 맏아들은 들판에 가서 일하고는 늦게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의 아버지의 집에서 나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그는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행동에 격노했기 때문이다. 둘째아들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살진 소까지 잡았는데, 자기는 아버지의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밖에까지 나와서 그렇게 설득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놓고는 집에 들어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맏아들은 집안에 있는 탕자였던 것이다. 

 

7. 이 비유가 가르쳐주는 참된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인가?

  이 비유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2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첫째, 이 비유는 과연 어떤 자가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둘째, 죄용서를 비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또한 알려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누가 죄용서를 받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자신의 죄를 겸손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 뒤, 하나님께서 내리실 어떤 처분일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겠다고 하는 자다. 그러한 자는 지난 날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죄는 예수 믿을 때에 자동적으로 다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할 때에 용서받는 것이다. 또한 둘째로, 죄용서를 비는 자에게 하나님은 한없이 관대하시고 어떤 죄일지라도 다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아버지를 맏아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자기는 동생이 집을 떠난 후에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열심히 일하다가 늦게 온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이 돌아와 회개한 것을 보고 아버지가 그를 다 용서해주신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맏아들이 그날 늦게까지 일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버지의 근심걱정을 덜어드리려고 그렇게 한 것인가? 아니면 남겨진 아버지의 재산을 받으려고 그렇게 한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겸손해져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아버지께서 내리실 어떠한 처우라도 기꺼이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회개하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원칙도 정리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그리고 몇 번이든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요 관대함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하나님께 그것이 불의하다 혹은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모든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직접 피조물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와 죄인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사9:6,딤전3:16). 그렇더라도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회개하면 우리의 죄는 다 용서받을 수가 있다. 이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하지만 회개는 결코 하나님께서 대신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마지막 관문은 역시 "회개"인 것이다. 

 

8. 나오며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회개와 용서에 관한 말씀 중에 정말 보화같은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회개하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범죄한 자에게 있어서 회개란 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도 적나나하게 나타난다. 그렇다. 아버지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회개하여 용서받고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죄인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는 아니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신 일은 간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일 뿐이었다. 그곳에 기근이 발생할 때에 더 심한 기근이 발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죄인인 처지에 있는 둘째아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여 회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해서가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날마다 강제로 회개시키려 한다면, 사탄마귀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참소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류의 죄값을 없애기 위해, 창조주께서 직접 360가지 이상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값으로 죄인들을 구속하셨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이 지금 죄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아니다. 죽어보면 이 말인 과연 괜찮은 말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알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때 가서 후회하고서 회개하려한들 그곳에서는 회개가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회개해도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고로 회개는 오직 자신의 육신의 목숨이 붙어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일이 있으면 지금  당장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합법적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9월 11일(금)

정병진목사

"내가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혹시 회개하지 않고 있는 죄는 없을까?"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때 이 말씀은 단비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회개에 있어서 중요한 뼈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회개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대충 넘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죄 중에서도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는 죄도 회개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회개하지 않고 있었는지 이 말씀으로 다시 점검해보자.

2020-08-1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나는 아직 무엇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16:8~9)
https://youtu.be/ZO2w74uYAuc [혹은 https://tv.naver.com/v/15294470 ]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마4:17,막1:15). 그리고 사람이 저주에서 벗어나 형통의 축복을 받으려면 그것도 역시 회개해야 한다(요일3:8,1:9).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회개를 해야 한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회개가 있는 것이고,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할 회개가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더러는 회개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는데, 무슨 회개해야 할 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회개는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요 회개는 내 삶의 형통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이제는 왜 회개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과연 내가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러한 죄를 회개해보자. 

 

2. 사람이 회개해야 할 첫 번째 죄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고 하셨다(요16:7~8). 그리고 여기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16:9). 대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그들"이란 대체 누구며, 왜 예수께서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성령께서 오실 때에 맨 처음 하시는 일은 죄를 책망하시는 일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를 책망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왜 그분을 믿지 않았는지를 성령께서 책망하신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인다.

 

3. 제자들이 믿은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이 믿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때 제자들이 믿은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이 믿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 직후에는, 가룟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의 반응이 나온다. 그때 제자들은 분명 예수님을 믿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요16:30~31). 그렇다면, 제자들은 무엇을 대체 믿은 것인가?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다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16:30). 그리고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나왔다는) 줄(것)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밖으로] 나와(나왔고) 세상에(안으로) [들어]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를 향하여) 가노라(요16:27~28)"고 하셨다. 예수께서 구원자로 오셨다고 하는데 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이제는 제자들 말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누군지를 알아보자. 즉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에 등장하는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인칭대명사인 만큼 그들은 이미 앞에서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올라가보면, 그들은 2~3절에 나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행]할 것은 그들이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2~3)" 그렇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있는 자들은 예수믿는 자들을 회당공동체에서 출교시킬 자들을 가리킨다. 곧 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안 있어서 예수믿는 자들을 살해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짓는 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4. 예수께서 왜 아버지로부터 밖으로 나오셔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이 그리도 중요한가?

  그렇다. 그때 제자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구주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때 믿었던 것은 예수께서 드린 대제사장적 기도에도 나온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들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나는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레마의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았]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나왔다는) 줄(것)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보내셨다는) 줄(것)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7~8)". 그렇다. 제자들이 믿은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으며, 아버지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제자들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로 오셨음을 알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도 회개해야 한다. 우리도 현재 잘못 알고 있는 그것을 성령께서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신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또 한 번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나오는데,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만일]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였으면 너희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저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결국 이 말은 예수께서 이 땅에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려 오셨는데, 예수께서 스스로 이미 아들로 존재하고 있다가 오신 것인가 아니라, 그때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셔서 오셨다는 것이다. 만약 이미 스스로 아들로 존재하고 있던 분이 오셨다면 아들이 성육신하신 것이겠지만, 그때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 오셨다면,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몇 번이고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안에서 밖으로](에크) 나오셔서 이 세상 안으로(에이스) 들어오셨으며, 스스로(자기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저분(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당시 애써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심을 받아서 오셨으며, 그분은 이미 있던 분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그분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알았다고 하셨다. 만약 이미 천국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면, 그것은 이미 구약시대에 있던 아들이 오신 것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실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으로부터 아들을 보내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므로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다고 믿고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분들이 회의를 해서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네가 인간을 구원하러 내려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까, 아들이 "아버지, 어떻게 감히 아버지께서 내려가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소자가 내려가겠나이다"하고서 성자가 육신을 입고 내려왔다고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실 때에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신다 하셨다. 유대인들은 진즉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았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미 창세기 18~19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로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천사들을 데리고 아브라함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러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자 마지막으로 있는 일이었다. 조금 후에 두 명의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성을 파괴하도록 보내셨다. 여호와와 두 명의 천사의 등장은 사실 창1:26~27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에 나오는 "우리"에 대한 실체다. 그런데 세 명의 사람으로 나타난 이들을 본 아브라함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자 그것을 잡수시고 난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그래서 그 이듬해에 정말 아들을 낳았다. 그렇다면, 사래가 이삭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되어서 기뻐했던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셨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것일까? 예수께서는 그때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이것은 2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예수께서는 그때 아브라함에 나타나셨던 분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아들의 출생을 통해서 알고 기뻐 뛰놀았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셨던 그분)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곧 성령의 첫 번째 회개사역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을 보라. 과연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일하셨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요8:24,28,58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나는 스스로 있는 자, 나는 ~이라고 하는 자)(출3:14)"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밖으로 나오셔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지만, 그분은 아버지에게 종속된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것을 공부하지도 않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얼마나 탄식하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탄식하지 않게 하려면, 예수님은 스스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더 공부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5. 사람이 회개해야 할 두 번째 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사람이 회개해야 할 두 번째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십계명을 어긴 죄들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와 자범죄들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과거에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부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어디선가 누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없다. 속죄가 영원하는 말은 있어도 우리의 죄가 영원히 속죄되었으니, 우리가 더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즉 "영원한 속죄"는 있어도 "영원히 속죄되었다"는 말은 없는 것이다(히9:12).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치르신 영원한 속죄를 자신이 영원히 속죄받은 것으로 착각한다(영원한 속죄의 속성을 시간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아니다. 그분이 흘리는 속죄의 피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인류의 죄를 속죄할 만한 충분한 효능을 갖추었다는 뜻인 것이지, 한 번 믿었다고 이제는 두 번 다시 속죄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에 성도들 중에는 왜 예수님을 믿고도 온갖 질병과 가난과 사건사고에 시달리며, 자식들이 힘들어하고 자살해서 죽는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자기와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귀신들이 자기와 자기의 자손들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도 자기와 자기의 선조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용서된 줄로 알고 무심코 넘겨버린 것이다. 아니다. 자기와 자기의 조상들이 우상을 숭배했던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죄값을 자손 3~4대까지 묻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영향을 후손이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출20:5). 그러므로 예수믿고도 저주가 떠나지 않고 가난이 대물림되고 각종 질병과 불치병에 시달리고 자살해서 죽고 자녀와 손자들이 하는 일마다 말아먹고 있다면 지금 즉시 엎드려 자기와 자기 자손들이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첫째로는 조상을 신으로 섬겨 제사드린 죄를 회개하고, 둘째는 부처와 석가를 신으로 섬긴 죄를 회개하며, 셋째는 무당과 점쟁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한 죄를 회개하고, 넷째는 미신과 잡신을 섬긴 죄를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구체적으로 회개기도제목은 "회개기도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렇게 될 때 저주의 늪에서 벗어나 형통의 축복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6. 우리가 우상숭배죄의 죄를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상숭배의 죄를 과연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두 번 회개했다고 해서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와 내 조상들이 섬겼던 우상숭배로 인하여 나와 내 자손들 속에 들어있는 귀신들이 다 떠나갈 때까지 회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가 좀 작고 철저히 회개했다고 하면 경험상 두 달 정도는 회개해야 하는 것 같고, 좀 더 많이 우상숭배를 했다면 1년에서 10년도 걸릴 수가 있다. 그래도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회개가 단지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한 형통케 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면 귀신들의 세력이 약화되어서 나중에는 내 몸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몸은 귀신의 집이라고 말씀하셨다(마12:43~45).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뱀에게 종신토록 흙(아파르)를 먹고 살라 하셨는데, 그 흙(아파르)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빚으셨기 때문이다(창2:7). 고로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를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할 이유는 우선은 우리 속에 기생하고 있는 귀신들을 다 내어쫓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쫓겨나가지 않고 우리 몸에 들어있으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우리가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어있어야 그 공간만큼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거듭난 영혼)이 강건해지려면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으나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늘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성장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장하려면 귀신들이 떠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사도요한은 우리의 속사람의 상태를 아이들과 청년들과 아비들로서 비유한 바가 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2-13)" 여기에 등장하는 "자녀들(아이들)은 영적으로 속사람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청년들은 악한 자인 사탄마귀와 귀신들과 싸워서 이기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며, 어른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요일1:1에 보면, 그분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첫 걸음마는 죄를 회개하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는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할렐루야!

 

7. 나오며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는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며 아들이신데, 그분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가? 그러면 그것을 알지 못했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아니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아들의 피로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할 때 용서를 받게 되며, 한 분 하나님께서 나같이 못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아들의 신분으로 직접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피흘리셨음을 알고 진정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이라고 내놓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하고 자백해야 한다. 그래서 저주의 늪에서 속히 벗어나 형통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 속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귀신들과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 귀신들을 내쫓아야 한다. 그러면 그동안에 꿈쩍하지 않던 자신의 믿음도 성장할 것이고, 인격도 성숙해지며, 영적으로 강건해져서 병도 이기게 되고, 귀신도 물리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제 이를 알고 실천하는 자는 복이 될 것이고 들었지만 실천하지 않는 자는 그저 그러한 삶이 지속될 뿐일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8월 1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개와 천국복음(09) 믿음과 회개는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가?(눅15:11~20)_2020-07-30(목)

https://youtu.be/x4EEOPmWaIM  [혹은  https://tv.naver.com/v/15037389 ]

 

 

1. 믿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가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어 구원받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요? 오늘날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거저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처럼 거저 주시는 것이라다면 사람들더러 "믿으라"고 결코 명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시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에게 보인 반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는 등의 칭찬을 하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으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감탄하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도 하나님께서 회개시켜야 하는 것인가요?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도 하나님께서 거저 주셔서 회개시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것도 믿음과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도 믿음처럼 인간편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다 해 주신다거나 대신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벧후3:9), 어떤 사람은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이것을 보더라도, 아버지가 둘째아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강제로 회개시키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여야 합니다. 둘째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편에서 자기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행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믿음을 갖는 것이나 회개하는 일도 사실은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다 관여하고 계시고 있지만 말이죠.

 

3.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되, 전적으로 거저주시는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사실 "믿음"과 "회개"는 인간편에서 하는 우리들의 반응이라고 한다면, "은혜"는 하나님편에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은혜"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나요?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인 사람에게 그냥 공짜로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거저주시는 것인가요?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 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의 축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고후13:13)"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의 은혜로(은혜를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언급했습니다(행15:11). 그리고 사도요한도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요1:17)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이길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와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저주시는 바 선물과 같은 것인데, 그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주어지는 속량 곧 죄사함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데, 그것은 사람이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속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요, 또한 하나님이 거저주시지 않고는 우리가 누릴 수 없는 혜택이기 때문입니다. 

 

5. 믿음과 회개로 구원받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은혜에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일입니다. 우선은 하나님께 인류의 죄용서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엡2:8~9). 그리고 나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요일1:9).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회개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가 용서될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거저받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회개시키신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좀 전에도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는 집나간 둘째아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이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둘째아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한 일은 사실상 없습니다. 아버지는 회개하여 집에 돌아오는 아들을 받아들여서 예전에 아들이 갖고 있던 권리를 회복시켜주셨을 뿐 강제로 아들을 회개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고로 할 수 있으면 예수님의 죄로 자신의 죄가 용서됨을 믿는 가운데 지은 죄들을 날마다 회개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2020년 07월 30일(목)

정병진목사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눈에 띠는 것은 회개에 대한 강력한 요구다. 세례요한부터 시작된 회개의 촉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가서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개인구원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출애굽세대들에게는 회개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왜 출애굽세대들에게는 회개하라고 책망하지 아니하셨을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회개촉구방식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 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020-07-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4) 사람이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시7:12~13)
https://youtu.be/K5pH9bDOB3o [혹은 https://tv.naver.com/v/14977232 ]

 

1. 들어가며

  B.C.1446년경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한 곳은 풀 한 포기 없고 물도 찾을 수 없는 척박하고 메마른 광야였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로 인도하셨을까?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그곳에서 무려 40년간동안이나 살아야 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동안을 광야에게 생활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생활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광야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혹 이 광야에 머물러 있을 때,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는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광야에 있는 도들을 어떻게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에는 또한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람이 진정 회개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의 시편의 노래를 통하여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 회개한 사람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출애굽세대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지 않으셨는가?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출발이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왔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도 역시 "회개"할 것을 외치심으로 복음전파사역을 시작하셨다(마4:17). 그리고 부활승천직전에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했는데 회개를 전파하였고(행2:38),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방인으로 사도가 된 사도바울도 역시 회개하고 믿을 것을 외쳤다(행20:21).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들려준 소아시아에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도 역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었다(계2~3장). 이처럼 회개는 신약성경의 핵심메시지였고, 그것은 결국 믿음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2가지 핵심요소였다. 

  그런데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생활을 한 후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미리 보여주고 있는 샘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1세대들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1세대들에게는 한 번도 회개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는가? 참고로 이들의 여정이 기록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짧은 생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들통난다. 왜냐하면 회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출애굽1세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회개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서 "회개하다"라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슈브"라는 동사이며, 신약성경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에오"라는 동사다. 특히 히브리어의 "슈브"라는 동사는 보통 "돌아오다, 돌이키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는 "이방신을 버리고 참된 신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출애굽1세대들에게 회개할 것을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신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참된 신인지를 보여주심으로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인들이나 하나 같이 애굽신들을 섬기며 살았다. 다신론적 신관을 가졌던 그들은 강과 동물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고 살았다. 그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숭배했던 신은 농사에 꼭 등장하는 "송아지"신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결코 신이 아니며, 오직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심으로 회개하기를 바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약간 달랐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쓰신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롤 사용하신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식으로 사용하신 것은 "회개촉구명령"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북분열왕국이후에 쓰신 방식이다. 출애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부터 여호와께서 누군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동영상으로 그들을 가르쳐주신다. 그래서 애굽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거대한 나일강이 피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개구리들이 떼로 기어나와서 집떡반죽 그릇에 이르기까지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이가 올라와 사람과 가축에게 기어 오르는 것도 함께 보고 경험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파리떼가 불어닥쳐 집집에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파리떼가 오지 않은 것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그때 이후부터 그들은 재앙이 히브리인들에게는 내리지 않고 오직 애굽인과 그들이 사는 지역 및 그곳에 있는 가축과 동물에만 내리는 것을 본다. 이후 그들은 애굽인의 가축들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 돌림병이 발생하여 죽는 것을 보았지만,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는 것을 본다. 또한 우박과 불덩이가 내려 밭에 있는 채소와 들의 모든 나무를 후려치는 것도 보았으며, 메뚜기떼가 일어나 우박으로 인하여 면하고 남은 것을 다 먹어치우는 장면도 본다. 그리고 애굽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섬기는 신이 태양신인데 그것이 힘을 잃어 어둠이 가득찬 애굽인 지역을 본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 재앙으로서 각 집에 있는 장자와 가축의 첫 것이 죽어나가는 재앙도 지켜보게 된다. 그날밤 아직 발효되지도 아니한 반죽을 등에 들쳐메고 출애굽은 시작되었고, 그들 앞에 거대한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애굽땅을 빠져나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여러가지 재앙을 내리되, 애굽인들이 신처럼 여기고 있는 나일강과 동물들과 태양을 내려치는 재앙을 내렸던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5. B.C.1446년경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히브리인들은 과연 회개를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때 무려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에 있는 신들을 심판하신다(출12:12). 그때 히브리인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상천하지에 참된 신이요 가장 최고의 신임을 믿었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방신들을 모조리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했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회개였던 것이다. 하지만 애굽군대로 인해 홍해에 갇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죽이려고 이곳에 데려왔느냐? 우리가 애굽사람에게 죽는 것보다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겠노라(출14:11~12)"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에게 대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홍해를 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아라비아 땅에 도착했지만 가져온 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고, 애굽에서 가져온 먹을 것이 떨어지자 새벽마다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게 하셔서 40년동안 굶주리지도 않게 해 주심으로 인간의 의식주를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후에는 반석을 쪼개 생수를 공급해 주심으로 그분만 있으면 흡족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끝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시내산에서였다. 출애굽한지 약 50일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을 불러내셨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면서,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섬기던 송아지우상을 만들어놓고는 광란의 춤을 추면서 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대노하셨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적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셨는가? 오직 한 가지. 가짜인 이방신을 버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은 그저 본 것일 뿐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온토 이방인 숭배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였다. 만약 그때 모세의 슬기있는 답변과 목숨을 건 기도가 아니었다면 그날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짜 멸하시겠다고 결정한 일이 발생하고 만다. 정탐꾼을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서슴없이 토해냈기 때문이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땅(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40년에 걸쳐 광야에서 죽어나간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1세대들의 불신앙의 역사의 기록이다. 

 

6.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기적과 기사와 표적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쓰시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와 같이 신약에서도 기적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있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곧 예수께서 설교후 베드로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말로 안 되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했다는 것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무능한 자이며, 쓸모없는 죄많은 인간인 것을 자백하고 용서를 빈 것이다. 그에게 기적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는 방식은 선지자의 외침이나 기적과 같은 방법만이 아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시고, '천사'를 보내시기도 한다. 때로는 고칠 수 없는 중한 '질병'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시고, '자녀'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시기도 하신다. 다만 그때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어 회개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7. 회개를 촉구한다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회개를 촉구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 오늘 다윗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려 하시는지를 부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본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기 위해서 막 무기들을 쳐들고 조준하고 있는 군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날마다 격분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만일 사람이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칼을 갈고 계시며, 자신의 활을 당기어 겨누신다. 또한 그분은 죽음의 무기들을 예비하신다. 그분이 만든 화살은 불화살이로다(시7:11~13)" 그렇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용서해주시지 아니하신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상태로서 긴장이 증가될 뿐이다. 고로 누구든지 어서 빨리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출애굽세대들은 그렇게 많은 기적을 맛보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죽임당하고 말았다. 

 

8.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한 자들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눅18장에 보면, 세리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갔다. 눅19장에 보면, 삭개오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선언과 함께 떳떳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그리고 눅23장에 보면, 한편 강도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비록 그날에 죽었지만 죽은 이후 예수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요9장에 보면,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나온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조상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눅5장의 베드로를 보면, 그는 사명을 발견하고 가치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 회개는 용서도 받게 해주고, 구원도 받게 해주며, 천국에도 들어가게 해주고, 병고 고침받게 해주고, 저주가 떠나가게도 한다. 그리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게금 만들어준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할 때에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는 것이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회개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벧후3:9). 주님은 시7:12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약하나 누구나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지은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용서와 축복이 따라올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수많은 싸인을 주셨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심판과 파멸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회개해야 한다.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회개할 때 저주도 떠나가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우리는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7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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