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34) 에서와 야곱이 완전한 화해를 했다는 증거(창33:1~20)_2021-06-28(월)

https://youtu.be/GVCSih8O_o8 [혹은 https://tv.naver.com/v/21025025  ]

 

1. 형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과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간 동생 야곱을 진정 용서해주었나요?

  형 에서는 동생을 만나기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그를 죽이려고 400명의 장정(군사)을 데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동생 야곱을 만났을 때에는 동생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주었습니다. 재회의 장면을 보면 정말 눈물겹습니다. 동생 야곱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던 형 에서가 어떻게 동생을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주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용서해주었다고 나옵니다. 그럼, 진정 용서해주었을까요? 그것은 나중에 에서의 행동을 보면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 증거들은 그가 진정 동생을 용서해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줄 수 있었나요?

  어떤 분은 에서가 동생 야곱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준 이유에 대해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 은혜와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강제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순식간에 다 바꿀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다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에서가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그것은 앞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에서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군대(천사들)에 의해 제압당했기 때문입니다(창33:8).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날부터 와신상담 동생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이 에서에게 더 달라붙어 그를 조종하고 그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그에게 "분노와 혈기의 영"이 달라붙었고, 더불어 그에게 "미움과 살인의 영"도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의 야곱의 회개기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도 그를 위해 하나님의 군대를 파송해주셨고, 그 군대에 의해 에서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사죄를 바라는 야곱의 진정성이 에서의 마음을 뒤바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의 용서를 받기 위해 야곱이 행한 행동은 결코 종일지라도 하기가 어려운 행동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눈에 야곱은 불쌍하게 보였고 가련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결국 에서에게서 악한 영들이 떠나가게 되고 야곱의 진정어린 회개의 행동과 맞물려서 에서의 마음도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완전한 화해를 했다는 것은 이후에 등장하는데 첫째로, 아버지 이삭이 돌아가시자 둘이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잘 치러주었다는 것(창35:29)과 둘째, 아버지의 장례 후에 둘이 오손도손 잘 살다가 둘이 소유가 풍부해져서 함께 살 수 없게 될 무렵, 형이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세일산으로 갔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창36:6~8). 

 

3.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분은 아닌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꿀어놓으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요 주관자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그리고 만물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과 행동은 항상 공평해야 합니다. 억울하게 해서도 아니되지만 반대로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서도 아니 됩니다. 그러면 그 행동이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즉시 사탄마귀가 참소합니다. 왜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행동하냐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장차 마귀를 심판하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불평한 처사를 행했기 때문에 마귀도 심판하실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바꾸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를 하게 되면, 그것을 근거로 그 누군가가 변화하도록 환경으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는 주체는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마구 바꾸어버리면, 사탄의 참소는 더욱 더 심화될 것이고 마침내는 사탄마귀를 심판하지도 못하게 되실 것입니다. 

 

4. 야곱의 기도 때문에 에서에게로 갔던 한 무리의 하나님의 군대는 어떤 천사들이었나요?

  야곱의 기도 때문에 에서에게로 갔던 한 무리는 하나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창33:8). 그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창33:1~2).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마하나임)"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일명 "전투천사"로 불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수종드는 존재로서 천지창조의 첫째날에 천사들을 창조하셨습니다(창1:1,2;1). 그런데 이들이 하는 일을 보면, 총 7가지 방면에서 일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중의 앞의 4가지 일은 그들이 천국에서 하는 활동이고, 나머지 3가지는 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로 야곱이 보았던 꿈에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는 바로 뒤의 3가지 종류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앞의 4가지 천사는 천국에서만 활동하는 천사들입니다. 첫째로, "기록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행위를 행위책에 기록하고 또한 생명책에 기록하는 천사들입니다. 둘째, "경비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천국을 귀신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천사들입니다. 셋째, "건축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보고천사들에 의해 올라온 인간의 행위들이 행위책에 기록되면 그 책에 기록된대로 그 사람의 집을 짓는 천사들입니다. 넷째, "예배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서 음악과 악기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이 네 종류의 천사들은 하늘나라에서만 활동하는 천사들입니다. 하지만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보내시는 천사들도 있으니, 첫째로는 "전투천사들"이 있습니다. 이 천사의 무리의 대장은 미가엘이며, 이들은 악한 영들과 싸워 그들을 제압하고 묶어 무저갱에 넣는 천사들입니다. 둘째로는 "보고천사들"이 있습니다. 보고천사들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께서 보고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에 섰을 때에 거짓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보고천사들의 우두머리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유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병든 몸을 치유하는 천사들인데,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천사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갔던 천사들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전투하는 천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에서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다 제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의 화해장면을 보면 보면 볼수록 많은 영적인 진리들이 숨어있다는 것과, 우리가 주변 사람과 갖게 될 인간관계에 대한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제압하고, 모든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나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먼저, 기도로 악한 영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그후에 진행하는 인간의 모든 희생적인 노력이 모두가 아무런 쓸모가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영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요? 그때에는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통절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귀신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준비하는 절차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가 회개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호해주시고 지켜달라는 기도는 짧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의 감정을 풀어줄 수 있는 진심 어린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던 에서라 할지라도 자기의 동생의 사죄를 받아주고 화해를 했듯이, 우리들의 삶에서도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201년 06월 27일(월)

정병진목사

 

 

에서는 자신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아간 야곱을 어떻게 되어서 용서해주었을까? 야곱의 철야기도가 쎘기 때문이었을까? 야곱이 보낸 예물 때문에 그의 마음이 녹았던 것인가? 그런데 이것만으로 에서의 용서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에서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던 그것,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여기에 화해와 용서의 비밀이 들어있다. 2021-06-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창세기강해(133)형 에서는 어떻게 되어 동생 야곱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었나(창33:1~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4MoqP73t9qU [혹은 https://tv.naver.com/v/21018927 ]

 

 

1. 들어가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아닐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그냥 다 바꿀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따르면, 도무지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이 바꾸어지는 놀라운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있어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오고 있는 쌍둥이 형 에서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말 하루 아침에 형이었던 에서가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대체 에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야곱은 대체 어떻게 되어서 형의 분노와 살인의 마음을 내려놓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에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들어있다. 아무쪼록 이 말씀에 감추인 영적인 비밀을 모두가 다 깨닫고 실천함으로, 우리 가운데에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인간관계의 실타래들이 다 풀리게 되는 놀라운 일이 있기를 바란다. 

 

2. 성경은 대체 누가 쓴 것인가?

  성경은 누가 쓴 것인가? 아직까지 어떤 성경책은 그 저자가 분명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성경 66권의 저자들을 살펴보면 대략 42명 정도가 된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 가운데 어떤 내용은 누군가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쓴 것이 아닌 것들도 있다. 특히 창세기 이야기가 그렇다. 창세기는 B.C.1,500년경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쓴 성경책인데,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족장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도 썼다. 대체 어떻게 알고 쓴 것인가? 그리고 모세는 과연 자신이 쓰고 있는 성경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쓴 것일까?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쓴 것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에 와서야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지는 것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창33:8의 말씀이 그렇다. 

  창33:8의 말씀은 이렇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창33:8)" 이 말씀은 에서가 자신의 동생 야곱과 재회하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이 있어서 야곱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가 오면서 어떤 떼(무리)를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통은 표준새번역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창33:8)" 그렇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기 위해 오고 있는데 그를 향해 오고 있던 가축떼를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것은 야곱이 보낸 예물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왜 나에게 보냈느냐? 나하고 화해하기 위해 그 예물로 보낸 것이냐" 하고 묻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영어성경 번역본과 한글성경 전부가 그렇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더 많은 영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에서가 전날밤 만났던 것은 가축 떼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리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 창33:8을 직역해보자.  "그리고 그(에서)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만났던(마주쳤던) 바 이 모든 군대(‘마하네’=army)는 너에게 누구냐?(‘미=who’)” 그(야곱)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 주의 두 눈에 호의를 입기를 원합니다.”(창33:8)" 

  그렇다. 에서가 오면서 만났던(meet) 아니면 마주쳤던(encounter) 것은 가축 떼만이 아니었다. 군대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축 떼만을 의미했다고 한다면 그 단어는 "에데르"라는 히브리어를 썼어야 한다. 하지만 모세는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 '군대' 혹은 좀 더 나아가서는 '진영'이라는 뜻의 '마하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하마네"라는 단어는 창32:1~2에 나오는 것으로서, 야곱이 라반과 헤어지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가나안 땅의 브엘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날 때에, 야곱이 만났던 두 무리의 하나님의 군대('마하네')를 가리킨다. 그래서 야곱은 천사들을 본 후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마하네"라는 단어는 단수집합명사로서 "군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마하나임"은 단수 "마하네"에다가 복수접시마 "임"을 합쳐져서 만들어진 "두 군대, 두 진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에서가 만났던 것은 야곱이 에서의 분노의 마음을 삭이기 위해 보낸 예물 뿐만이 아니라, 어떤 군대,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천사의 무리를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번역본에서는 거의 생략된 "너에게"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원문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더군다나 "누구냐?"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미(who)"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도 그것은 천사의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가축 떼를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누구냐?(미=who)"가 아니라 "무엇이냐?(마=what)"가 사용되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로 에서가 간밤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천사의 무리와 마주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의 기록이기 때문에 인간의 3차원적인 이해를 가지고서는 이해하지 못할 본문도 더러 있는 것이다. 

 

3. 꼬인 인간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완전히 꼬여 있었다. 왜냐하면 동생으로 태어났던 야곱이 형의 장자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았고, 장자의 축복도 대신 받아서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창27:41). 아버지를 곡할 때가 왔으니 그때 가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간파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한다. 그리고 야곱도 그곳에 가 있다가 처자식과 가축을 데리고 20년만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제 야곱은 꼬인 형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때 야곱이 형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에서의 감정을 풀기 위하여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의 노여움을 달래보기 위해 그는 먼저 형에게 줄 화해예물로서 가축들을 무려 550마리나 보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창세기 32장의 이야기다. 그러면 형 에서는 동생이 보내준 예물을 받고 자신의 마음을 뒤바꾸게 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보라. 20년동안 동생을 죽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에서가, 과연 동생이 보내준 예물 좀 받았다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사생결단의 기도가 에서의 마음을 바꾸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서 야곱의 기도가 에서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하는 사람이 없다. 그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이야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만졌기에 에서가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한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에서가 마음을 바꾼 것인가?

 

4. 형 에서는 왜 동생 야곱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었는가?

  결론적으로 형 에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2가지 차원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두번째 차원은 첫번째 차원을 결코 앞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째 차원이 해결되지 않는 한 두번째 차원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의 것은 야곱의 기도에 다른 어떤 것이고 두번째의 것은 야곱의 진심어린 회개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에서와 야곱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창33:8과 창32:11에 나와있다. 먼저, 창세기 33:8에 보면, 에서가 경험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간밤에 에서가 한 무리의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야곱도 창32:11을 보면,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에서와 야곱이 간밤에 각각 다른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에서가 만났던 것은 "가축 떼"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이 만났던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 애매하게 표현된 "무리"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둘이 만난 것은 둘 다 또깥이 "군대"("마하네")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즉 에서와 야곱은 둘 다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야곱은 두 무리의 군대(하나님의 천사들)를 만났다. 야곱은 그들을 보았다. 그런데 한 무리의 군대는 야곱과 함께 머물렀고(창32:11) 다른 한 무리의 군대는 에서에게로 간 것이다(창33:8). 먼저 야곱과 함께 하였던 군대는 야곱의 일행과 같이 있었는데, 야곱이 그날 밤에 자신의 두 아내과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가축 떼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한다. 그리고 그만 홀로 남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무리의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오 함께 야곱은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고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였다. 여기서 씨름을 하였다는 것은 그 사람과 힘겨루기를 하였다는 뜻이다. 사실 그때 나타난 사람은 한 무리의 군대에 속해 있던 천사였다. 야곱은 그가 천사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천사를 하나님을 대신하는 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를 꽉 붙잡았고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면서 야곱을 축복해주고 떠나간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다시 한 번 확답받은 것이다. 

  둘째, 얍복강을 건너 저 멀리서 오고 있던 에서에게도 한 무리의 군대가 갔다(창33:8).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서의 눈을 열어 그 천사들을 보게 하셨다. 그러므로 에서도 아침에 야곱을 만나자 그 군대가 야곱이 보낸 것이냐로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서에게 나타났던 천사들은 대체 무엇때문에 에서에게 간 것인가? 그것에 대해 구약성경의 설명해주는 야사와 같은 기록 곧 "야살의 책"을 살펴보면, 에서의 살인의지를 꺾기위해 보내어진 천사들이라고 나와 있다. 이때 천사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위엄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야곱의 종"이라고 소개하였고, 만약 에서가 야곱의 형제만 아니었어도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에서가 잔뜩 겁을 먹고는 동생 야곱을 죽이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20년만에 동생이 온다고 하기에 그냥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고 나온다. 그럼, 진짜 그러한 일이 그날 밤에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성경의 기록이 아니므로 참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라도 본다. 왜냐하면 중무장한 군대의 위협이 일시적으로는 에서의 마음을 두려워하게 하여 야곱과 화해하도록 할 수는 있었겠지만, 영구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창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에서와 야곱은 완전한 화해를 이루었고, 이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둘이 함께 와서 엄숙히 장례를 잘 치러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날 천사들이 에서를 만나 엄포를 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힌트가 있다. 그것은 한 무리의 천사들이 에서에게 갔는데, 그들이 "군대(마하네)"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대는 싸움을 하러가는 천사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천사들은 에서와 싸우러 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서 안에서 혹은 에서 밖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은 제압하러 간 것이라고 보여진다. 당시 에서는 분노와 혈기의 영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20년동안 악한 감정을 풀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왔으니 아마 미움의 영과 살인의 영도 거기에 붙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에서의 분노와 살인의지를 잠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얍복강에서 야곱이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 기도의 핵심은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야곱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다음날 아침 에서를 만나면서 야곱이 했던 놀라운 행동들은 그가 전날밤에 얼마나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안 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야곱은 과거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형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살인의지를 불타게 했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천사들이 에서에게로 가서, 에서 안과 에서 밖에 있던 영들은 모조리 결박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을 결박하여 내쫓아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야 에서의 마음이 하루 아침에 바뀔 리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이제 에서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전날밤 야곱이 드린 회개기도에 따라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있던 에서의 마음이 쑥 가라 앉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 무리의 군대 천사들에 의해 악한 영들이 쫓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었다. 에서가 보니 야곱이 자기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야곱의 모습은 초췌했다. 그러면서 그는 절뚝 절뚝하면서 절고 있었다. 왜냐하면 밤 사이에 환도뼈가 위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형의 용서를 받고자 하는 모습은 가련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그의 몸을 땅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것 같다. "형님, 과거 제가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해주소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걸음을 떼고는 또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떼더니 또 그렇게 하기를 7번이나 반복하였다. 아무리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크기로, 그처럼 자신을 낮추면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는 야곱을 보면서, 에서의 마음은 연민의 정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은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로서 장자 엘리바스가 벌써 나이가 55세가 되었는데, 야곱은 데리고 온 것은 이제 막내는 5살 정도였고 장자는 이제 고작 13살정도니, 저렇게 어린 자식들을 내가 죽여서 무엇하랴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자 예물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 예물이 무려 살아있는 가축으로서 무려 550마리나 되었다. 그러니 에서의 마음이 동생을 불쌍히 여기게 된 것이다. 동생이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자기를 낮추어 용서를 구하는데 어떻게 그를 외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콧물이 뒤범벅이 된 동생을 일으키는 형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렇게 착한 동생을 내가 죽이겠다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니고 오다니..." 에서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에 울었다. 그리고 동생은 형이 자신을 죽일 줄 알았는데 아무런 조건없이 자신을 받아준 것에 감사해서 울었다. 그래서 둘은 한 동안을 흐느껴 울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는 싸우지도 않고 다투지 않고 서로를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형제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5. 나오며

  많은 사람은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한다. 야곱이 철야기도 하며 사생결단의 기도를 했던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주셨을 것이라고 말이다. 말은 맞다. 하지만 간밤에 에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에서가 마음을 바꾸었겠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라. 아니다. 분명 간밤에 에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하늘의 군대 곧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만났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창33:8). 고로 그 군대는 악한 영들을 제압하기 위해 파송된 천사였다. 그러므로 혈기등등한 에서의 마음이 서서히 바뀌게 된 것이다. 그에게서 악한 영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그제야 평점심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동생이 보낸 예물로서 550마리의 가축 떼를 보았고, 그리고 동생이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가련한 모습을 그가 지켜 본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이제 삐약삐약하는 어린이들이도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에서의 분노의 마음도 가라앉게 되었을 것이고, 연민의 정이 그 속에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에서의 마음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악한 영을 먼저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을 제압하기 전에는 사람이 결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려면 먼저 악한 영을 제압하기를 바란다. 둘째로, 그리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아뢰는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회개할 때 악한 영은 사람에게 붙어있을 근거를 상실하고 떠나가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회개기도문으로 직접 수 백 번을 회개해보니 이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회개기도하자. 그런 다음에 상대방의 용서를 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보자. 그래서 정말 진심어린 사과의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보자. 만약 야곱이 회개기도를 잘 했다고 치자. 그후에 야곱이 형의 용서를 받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에서는 과연 과연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었을까? 아니다. 두 가지는 같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영의 문제를 해결하자. 영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영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지라도 용서받기 위해 내갈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사과를 하자. 그럴 때 야곱처럼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6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싯점은 사닥다리 꿈을 꾸었던 벧엘에서의 체험과 얍복강가에서 홀로 남아 기도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벧엘의 체험이 그의 첫번째 과제에 상관이 있었다면 얍복강가는 그의 두번째 과제에 상관이 있다.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과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이제 남은 인생에서 처리해야 할 2가지 과제는 대체 무엇이었고, 얍복강의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두 가지 비밀을 알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2021-06-25(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132) 사람을 이긴 자 야곱에서 하나님을 이긴 자 이스라엘로(창32:1~3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WOEq6s7tmc [혹은 https://tv.naver.com/v/21004798 ]

 

1. 들어가며

  야곱의 인생 가운데 2개의 과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자신의 친족에게 가서 아내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형에서와 앙금을 제거하는 것이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면서 첫번째 문제는 해결했다. 하지만 진짜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형 에서와의 재회인 것인데, 야곱은 과연 형의 감정을 누끄러뜨리고 자신의 형과 재회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야곱은 그것을 결국 해냈다. 형 에서와 재회하고 화목한 형제가 것이다. 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을 일어났길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와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 여기 그 2가지 방법이 있다. 

 

2. 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러 오고 있었는가?

  야곱의 평생 과제의 한 가지는 외삼촌 라반에게 갔을 때 그토록 고생해가면서 결국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한 가지 과제가 남았다. 그것은 분노로 가득찬 형 에서와 재회하는 것이었다. 왜 형은 20년이 지나도록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을까? 그것은 야곱이 쌍둥이 형의 장자권과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이다. 출생을 기준으로 한다면 장자권은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에게 있었지만 결국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왜냐하면 야곱이 16살 때에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사들여였기 때문이고, 또한 60년이 지난 76세 때에는 형이 받을 장자의 축복마저 형으로 위장하여 받아 가로챘기 때문이다. 고로 형의 입장에서 보면 동생은 자시의 복을 가로챈 나쁜 인물인 셈이다. 장자의 명분이야 팔았다고 칠 수 있겠지만,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의 어머니 리브가와 지시에 따라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러자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작정하였다. 그러자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에는 거기에서 아내를 얻어오라는 명을 받는다. 왜냐하면 에서는 가나안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함으로 이미 언약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정처없이 길을 떠났고, 한 달 여만에 밧단아담의 라반의 집에 도착하게 되고, 우물가에서 만난 라헬을 사랑하여,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간을 종처럼 처가살이를 해야 했으며, 또한 자신의 재산을 얻기 위해 6년을 일한 끝에, 4명의 아내들과 13명의 자녀들과 막대한 재산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형 에서는 자신이 빼앗겨버린 장자의 명분과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린 탓에 동생을 죽이라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야곱이 도망쳐버림으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사람을 보내와서 고향 아버지의 집으로 온다고 친절히 기별한 것이다. 그러자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려고 오고 있었다. 

 

3. 야곱은 어떻게 되어서 형 에서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었는가?

  이제 야곱은 형하고 정면승부를 벌여야 했다. 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형하고 화해하여 풀든지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해야 했다. 만약 가만히 있게 된다면 형 에서는 틀림없이 자기와 이제 자기가 20년동안 수고하여 얻은 처자식들과 재산을 다 쓸모없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 에서와 화해할 것인가? 야곱은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자기와 함께 할 것이며 야곱을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야곱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창28:15)을 상기해냈다. 그리고 또한 "이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31:3)"는 말씀에 상기해내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2가지 작전이었다. 

  첫째, 야곱은 자신의 형의 노한 감정을 풀기 위해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먼저 형에게 보내는 것이었다(창32:13). 그것은 형의 감정을 풀기 위한 화목제물로서 예물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가 보냈던 것을 살펴보니, 무려 가축들이 최소 550마리나 되었다(창32:14). 암염소가 200마리, 숫염소가 20마리, 암양이 200마리, 숫양이 20마리, 젖나는 낙타가 30마리,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가 20마리, 나귀새끼가 10마리였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것을 세 떼로 나누어 각각 형에게 보내었고, 그래서 그들이 가다가 에서를 만났을 때에 그가 물어보면 "이것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의 주에게 보내는 예물이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앙금을 풀어내기 위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물을 준비하여 에서에게 보낸 것이다. 어떻게 해서 얻었던 가축들이었는가? 그렇지만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을 풀기 위하여 기꺼이 그많은 예물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어쩌면 감동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과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에 과연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심으로 문제만 해결했다고만 할 뿐, 진짜 인간적인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혹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의 해결일 뿐 그 사람과는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주님을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릴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와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둘째, 야곱은 모든 문제해결의 결정적인 열쇠는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기에 혼자 남아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렸다(창32:24). 그의 각오를 보면 참으로 눈물겹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얍복강가에서 가족들과 가축들을 다 보낸 후에, 자기만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홀로 짊어져야할 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남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오직 기도를 붙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엇다. 그러니 그의 앞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나타났다(호12:3~4). 그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천사였다. 그가 그날 야곱의 곁에 있었던 것은 야곱의 기도를 받아서 하늘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땅으로 출발하면서 만났던 두 무리의 하나님의 천사들 중에 한 명의 우두머리가 아닌가도 싶다(창32:1~2).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야곱은 그날에 응답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 천사를 놓아주지 아니한 것이다(사실은 놓아주어야 하나님께로 갈 것인데...). 그때 그 천사는 야곱의 기도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온 천삳. 그런데 야곱이 자신을 도무지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때였다. 야곱이 천사에게 요청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창32:26)" 그날 야곱은 그 사람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 천사를 통해 말했다. "네 이름이 이제까지는 야곱이었지만 지금 이 시간부터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서도 이겼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야곱의 기도가 긴박하고 간절했으며,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아니하면 안 될 정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는 지금 어떠한가?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가? 되면 감사하고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런데 그날 야곱의 기도는 달랐다. 사실 이전까지 야곱은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로 살았었다. 그의 이름처럼 말이다.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은 "뒷발굼치를 잡았다"는 뜻이었다. 이는 인간으로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주었다. "너의 그 간절한 열망은 하나님인 나의 마음도 바꾸어놓는구나. 네가 이겼다. 네가 지금까지는 사람과 겨루어서도 이긴 인생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겨루어서도 이긴 인생이 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나오며

  오늘날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2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주님께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그것에 지나쳐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야곱은 성령시대의 사람을 대표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했던 일을 보라. 그는 인간으로서 형님의 사죄를 받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아니 형님의 분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우리는 야곱의 이러한 행동을 볼 때 그에게 결코 손가락질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인간적인 노력은 아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인간적인 노력은 그렇지 많이 하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해야 할 모든 노력은 다 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은 그만이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가족들 중 그 누구에게도 기도부탁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을 뿐더러,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헬을 보라. 드라빔을 훔쳐가지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야곱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일은 그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홀로 남았다. 어떤 이는 그가 야차하면 도망치려고 홀로 남았다고 해석하는데, 야곱을 왜 그렇게도 모르는지 모르겠다. 야곱은 장자계승에 관한 영적인 열망이 너무나도 커서 천사로 나타난 하나님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야차하면 도망치려고 남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럴려면 왜 에서에게 간다고 먼저 기별을 했다는 말인가? 조용히 가면 될 것이거늘. 형 에서는 세일산에 살고 있으니, 자기 아버지의 집은 그 앞에 가나안 땅에 있으니 형도 모르게 얼마든지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었을 수 있고, 또한 그때에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좀 더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형 에서와 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야곱은 풀어냈다. 

 

2021년 06월 25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31) 의로운 자 야곱의 반격과 불의한 자 라반의 퇴각(창31:30~55)_2021-06-25(금)

https://youtu.be/URRy_LsvpKU  [혹은  https://tv.naver.com/v/20995372 ]

 

1. 야곱과 그의 외삼촌 라반은 영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요?

  야곱은 세상 사람을 구원하여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사람을 상징하고, 라반은 어찌하든지 성령의 사람을 옭아매여 종노릇시키려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2. 라반이 야곱을 20년간 종으로 부려먹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사람을 어떻게 지켜주셨나요?

  라반은 자신의 조카 야곱이 복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딸을 준다는 명목으로 14년간을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야곱도 어차피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온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친족에게서 아내를 구해오라는 부모의 명령이 있었기에, 처가살이 14년을 기쁨으로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가살이 7년이 지나고 결혼하여 약 13년의 기간동안 야곱은 거기에서 12명의 자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장자 르우벤도 벌써 13살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도 자신의 가문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과 재계약을 맺고 6년간을 더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 라반은 13년동안 야곱에게 품삯을 주는 방식을 무려 10번이나 일방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야곱과 함께 하셔서 야곱의 품삯이 풍성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즉 아무리 라반이 야곱의 몫을 빼앗아가려고 시도해보아도, 번번히 안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실망하지 않도록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꿈이나 환상이나 천사를 통해 미리 알려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불투명한 자신의 앞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외삼촌 라반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알게된 야곱이 이제 자신의 아내들을 들로 불러들여 자신이 외삼촌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가겠다고 하는 구상을 알려주며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야곱의 결정을 100% 지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준행하세요(창31:16)"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외삼촌이 양털 깎으러 간 틈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내들과 자식들과 가축들과 거기에서 모은 재산을 다 가지고 외삼촌의 집을 탈출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뒤늦게 안 라반은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야곱을 추격해왔습니다. 

 

3. 외삼촌의 추격의 이유는 무엇이었고, 야곱은 그것을 어떻게 반격할 수 있었나요?

  외삼촌이 야곱을 추격한 이유는 인사도 없이 자신의 딸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떠나갔으니 그들을 찾으러왔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신인 '드라빔'을 가지고 갔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실제로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가지고 왔는데 야곱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전날밤 라반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라반의 딸들과 손자들을 데려간 것에 대해 따지지 말라고 하셨기에 외삼촌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의 신이었던 드라빔을 훔쳐간 것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검사해보라고 했는데 찾을 수 없자 그때부터 야곱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때 라헬이 자신의 낙타 안장 아래에 드라빔을 넣고 경수가 났다고 함으로써 그것이 발견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라반의 딸들도 다 야곱이 14년간 외삼촌에게 봉사하여 산 것이었기에 라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장막에서 드라빔도 나오지 않았기에 야곱은 왜 외삼촌이 자신을 추격했는지를 되물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외삼촌에게 잘못한 일이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외삼촌을 위해 얼마나 눈코뜰새없이 일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러자 외삼촌은 야곱의 책망을 듣고 있어야 했습니다. 전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이제는 라반이 피고인이 되고 야곱이 고소고발인이 된 것입니다. 

 

4. 전세가 역전되자 외삼촌이 제안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야곱을 열심히 추격해왔지만 야곱을 어찌할 수 있는 아무런 빌미가 없자, 라반은 이제 장차 될 일이 두려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돌아가서 힘을 길러서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던 바를 시정하겠다고 쳐들어온다면 큰 일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그는 야곱과 언약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돌무기를 쌓고는 서로 간에 돌무더기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기로 제안한 것입니다. 워낙 어른들을 공경하였고 성실한 야곱이었기에 외삼촌을 제안을 받아들인 야곱도 그곳에 있는 돌을 가져가다 가둥을 세우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증거의 무더기)"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불렀는데, 또 "미스바"라고 불렀으니 그것은 "파수대, 망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보시고 둘 사이를 판단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그 돌무더기를 넘어서 해아려 오지 않기게 맹세했습니다. 

 

5. 의로운 자 야곱의 반격과 불의한 자 라반의 퇴각은 영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여기서 우리는 의로운 야곱과 불의한 라반의 삶을 영적으로 평가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성령의 사람을 상징하고, 외삼촌은 그를 종살이시키고 괴롭히는 사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웠던 야곱은 그의 조부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함으로 저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발적으로 번제물로 바친 아버지 이삭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언약계승자인 야곱에게는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가는 것은 야반도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제 아내와 재산을 가지고 새로운 가문의 가장으로서의 새출발을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라반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반에게 죄를 지은 것이 없었던 야곱은 라반에게 아무런 해를 입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는 야곱이 더 커질 것이니까 그것이 두려워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라반은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과도 흡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인 야곱과 같이 귀신들이 공격해도 해를 입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나타나면 귀신들이 오히려 두려워하고 떠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6월 25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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