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42) 요셉의 꿈과 천국에서 이기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창37:6~10)_2021-07-06(화)

https://youtu.be/6SvlAfCQpFQ  [혹은 https://tv.naver.com/v/21168034  ]

 

1. 경륜적으로 볼 때 야곱과 요셉은 어떤 관계인가요?

  경륜적으로 볼 때 야곱과 요셉은 성령시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예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마8:11, 22:32).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생애가 곧 성령시대의 삶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벧엘에서 돌(반석)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고 한 것은 곧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성령시대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는 성령시대의 사람인 야곱 이야기로 끝나지 아니하고 요셉 이야기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야곱으로 인하여 세워진 12개의 교회들 중에서 이기는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도 지상의 7개 교회 성도들 가운데에 이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2~3장). 고로 우리는 요셉 이야기야말로 성령시대의 교회성도들 가운데 장차 이기는 자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며 이기는 자가 받을 상급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예표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경륜적으로 볼 때, 요셉의 꿈은 무엇을 말해주는 꿈인가요?

  고로 경륜적으로 볼 때 요셉의 꿈은 단순히 지나가는 하나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창세기 37장에 기록된 요셉의 꿈들은 의미있고 매우 상징적이며 계시적인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 꿈은 요한계시록에 고스란히 그 열매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3:21, 12:1). 왜냐하면 그것은 이기는 자가 어떤 자를 가리키는지를 알려주는 계시적인 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셉의 별명은 "꿈꾸는 자(꿈쟁이)"였습니다. 얼마나 꿈을 많이 꾸었으면 그의 별명이 "꿈쟁이"였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많이 꿈을 꾸었도, 성경에는 딱 2가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꿈이 요셉의 삶 곧 이기는 자의 삶과 아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딱 2가지의 꿈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의 하나는 요셉에 있는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셉의 형들과 아버지가 정확하게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요셉이 늘 자신의 꾼 꿈을 형들과 아버지에게 말을 했고, 또한 그 꿈을 해석해 주었기 때문에 언제부턴가는 요셉의 형들도 아버지도 꿈 해몽을 잘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꿈을 형들과 아버지는 어떻게 해석했던 것일까요? 먼저, 곡식단의 꿈에 대해 요셉의 형들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창37:8)" 그렇습니다. 곡식단이 절하는 꿈은 요셉이 다른 형제들을 위에서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아버지도 해와 달과 별들이 절하는 꿈에 대해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창37:10)" 그렇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절하는 꿈도 역시 요셉이 해와 달과 별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의 꿈을 통하여, 장차 이기는 자가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3. 천국에서 "이기는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나요?

  그렇다면 천국에서 "이기는 자"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나요? 그것은 요셉의 꿈에 대한 형들과 아버지의 해석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천국에서 "이기는 자"는 곧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 천국에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는 다 천국에서 자신의 통치 보좌에 앉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마8:11, 19:28, 눅22:30, 계3:21). 고로 누구든지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가 될 수만 있다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가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4. "이기다"라는 단어는 무슨 뜻인가요?

  그렇다면, "이긴다"는 뜻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가 일종의 감성적인 언어라고 한다면,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는 일종의 논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왕노릇하는 자 곧 "이기는 자"라고 단어("니카오")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크게 2가지 뜻입니다. 첫째, 이기다, 승리하다, 패배시키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win, be victorious, conqure 등입니다. 이는 어떤 대상과 전투하여 승리한 그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이 땅에서 전투할 대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악한 영들(귀신들)이며 또한 자기자신(혼, 내적인 본성)일 것입니다. 둘째, "이긴다"는 말은 우세하다. 능가하다. 더 강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overcome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기는 자라 말은 "더 강한 자", "더 우세한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 중에서 더 강한 부분이라는 이기는 자인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더 강한 자, 더 우세한 자가 바로 "이기는 자"인 것입니다. 

 

5. 신약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긴 자"는 누구이며,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사탄마귀와 귀신들 그리고 자기자신의 본성과도  싸워 이긴 자는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기 처음이십니다. 왜냐하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을 통해 그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이겼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이 말씀은 예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나오는데, A.D.95년경 예수께서는 이미 이기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공생의 시작에 광야의 시험에서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마지막에 가서는 겟네마네동산에서 자기자신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죄와 사탄마귀와 귀신도 모두 다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는 죽음(사망)까지도 이기셨습니다. 고로 그분은 최초의 이긴 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힘입어 교회마다 더 강한 자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에 바로 천국의 보좌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한 개에서 24개로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이기셨고 그래서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이 땅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 올라오면 앉으신 보좌를 예수님께서 더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기는 성도만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주님처럼 왕노릇하는 보좌를 앉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보좌들의 대표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그 보좌가 바로 24보좌들입니다. 거기에 24장로들이 앉아 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보좌에 앉을 자들 24명의 장로들 뿐일까요? 아닙니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기는 자가 되어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계3:21).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야곱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강한 자요 이긴 자였던 요셉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또 얼마나 되는지는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1년 07월 06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41) 요셉은 성령의 시대에 이기는 자의 예표다(창37:12~24)_2021-07-05(월) 

https://youtu.be/egcbW_NDgaQ  [혹은 https://tv.naver.com/v/21156011  ]

 

1. 창세기에서 요셉이야기는 경륜적으로 볼 때 어떤 이야기인가요?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그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어 50장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어떻께 끝나는지를 살펴보면 요셉 이야기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 같은 장에 야곱의 장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요셉의 장례가 기술되면서 끝납니다(창50:1~3, 22~26). 다시 말해, 우리가 얼핏 예상하기로는 창세기는 요셉 이야기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야곱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창세기는 야곱 이야기가 끝까지 계속되면서 요셉과 함께 마쳐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창세기가 예표론적으로 볼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시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마지막 꽃이 요셉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야곱 이야기 속에 요셉 이야기가 기술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창세기의 전반부(1~11장)가 창조와 타락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면, 창세기의 후반부(12~50장)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가 자신의 탄생과 더불어 장자의 명분을 샀던 팥죽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는 25장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창세기 36장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에 가서야 비로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야말로 성령시대의 사람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표론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이삭은 성자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으며, 야곱 이야기는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성령시대에 교회를 세워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명의 아들들은 바로 성령시대의 열매로서 하늘의 완전숫자인 열 둘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요셉 이야기는 예표론적으로 볼 때 교회(성도) 중에서 이기는 자(성도)를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땅에 있는 일곱 교회를 말하지만 각 교회의 끝부분에 가서는 그 교회에 이기는 자들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란 대체 누구이며,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계2장~3장). 그러므로 성경을 통전적으로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창세기이야기는 창세기만의 이야기로,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요한계시록만의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요셉이 성령시대의 이기는 자의 예표라고 할 때, 그에게 붙은 별명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습니다(창37:19). 이것은 요셉을 성령시대의 이기는 자의 예표라고 가정했을 때에, 성령시대에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요엘 선지자도 말하기를,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텐데 그런 때가 되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젊은이들은 환상(이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엘2:28~29, 행2:17~18). 그러므로 이 예언은 빈 말이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말세를 만날수록 그리고 성령시대에 이기는 자가 원한다면, 꿈꾸는 자 요셉을 주의해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삶이 곧 이기는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부를 때에 "꿈꾸는 자"로 불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참고로, "꿈꾸는 자"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그냥 단순히 "꿈을 꾸는 자(dreamer)"가 아닙니다. "꿈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단어가 "꿈(dream)의 바알(baal)"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알"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바알신의 바로 그 "바알"입니다. 우리에게 바알신은 이방신을 대표하는 신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원래 그 단어는 "주인, 소유주, 남편, 지배자, 왕"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를 원문을 살려 번역해 본다면, "꿈의 전문가", "꿈의 왕", "꿈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정말 꿈을 많이 꾸었던 꿈쟁이였기 때문입니다. 

 

3. 요셉의 꿈과 야곱의 꿈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사실 족장들 중에서 꿈은 야곱이 처음으로 꿉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벧엘에서의 야곱의 사닥다리 꿈입니다(창28:10~15). 그러나 야곱이 꾼 꿈은 '환상'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꾼 꿈은 꿈 속에서 영적인 세계를 직접 본 것이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그때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눈을 뜨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을 그가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그가 꿈 속에서 본 사닥다리나 그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들을 본 것은 실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도 역시 실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은 이것과는 많이 다른 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장래에 되어질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는 환상이었기 때문입니다(창37:7,9). 정말 요엘선지자의 말처럼 늙은이로서 야곱은 꿈을 꾼 것이 맞지만 젊은이로서 요셉은 환상을 본 것이 맞습니다(욜2:28~29). 

 

4. 요셉은 2가지 꿈만 꾼 것일까요?

  그렇다면 요셉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2가지 꿈들 곧 곡식단이 절하는 꿈(창37:7)과 해와 달과 별들이 절하는 꿈(창37:9)만 꾸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요셉이 꾼 꿈은 딱 2가지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이 꾸었던 꿈을 해석해주었다는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형들이 요셉을 부르는 별명이 나옵니다. 그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꿈쟁이)"라고 불렀습니다(창37:19). 그들이 요셉을 가리켜 "꿈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그동안 수많은 꿈을 꾸었고 또한 그것을 자기들에게 말해왔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이는 요셉이 그동안 자신이 꾸었던 꿈을 얼마나 많이 말했을까를 짐작케 해 줍니다. 그때자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셉이 말했던 곡식단 꿈과 해와 달과 별들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우리가 한 번 지켜보자(창37:20)" 그리고 그를 죽여 구덩이를 던져넣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이 죽게 되어 요셉의 꿈은 안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요셉의 형들은 그동안 요셉의 꿈을 많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대로 많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큰 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요셉은 죽지 않았지만 그의 옷은 벗겨졌고 구덩이에 던져졌던 것입니다. 

 

5.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요셉이야기를 무엇을 말해주나요?

  고로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요셉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교훈을 들려줍니다. 특히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꿈이나 환상,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성령의 신령한 은사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성도들로 하여금 귀신의 장난에 속아넘어가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7~50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성령시대의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으로서 그 핵심은 꿈과 환상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꿈과 환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 인하여 그의 신분이 수직상승하게 되며, 요셉의 원가족들도 기근 중에도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요셉을 국무총리로 둔 애굽도 세상의 모든 나라 위에 높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꿈과 환상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나 사도 베드로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라면 우리는 환상이나 꿈을 터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를 잘 대비할 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세계적인 기근이 우리에게 불어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세계적인 재앙과 환난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도 함께 찾아올텐데, 우리도 역시 그날을 잘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도 계시적인 환상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려면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도 요셉처럼 계시적인 환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도 역시 영이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배를 따라 이 땅에서 보냄받은 자로서 계시적인 환상을 보는 자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열심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짜 꿈과 환상을 보게 되고, 혼란은 더 가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에 속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7월 05일(월)

정병진목사

 

 

우리가 꾸는 꿈에는 의미없는 꿈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꾸는 꿈들 중에 계시적인 꿈이 들어있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꿈은 대체 어떤 꿈인가? 아니 우리가 그러한 꿈을 꾸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꿈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며, 성경이 말하는 꿈의 2가지 종류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꿈인지를 분별하는 6가지 가지 기준이 있다. 우리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놀라은 꿈과 환상의 세계로 한 번 들어가보자.

2021-07-04(주일)
제목: 창세기강해(140)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의미있는(계시적인) 꿈을 꾼 이유는 무엇인가?(창37:1~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OcEO0h18zs  [혹은 https://tv.naver.com/v/21155802  ]

 

1. 들어가며

  모든 사람은 꿈을 꾼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꾼 꿈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아니면 별로 의미없는 꿈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꿈"하면 떠오르는 인물들 중에 우리는 요셉은 손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별명이 "꿈꾸는 자(꿈쟁이)"였기 때문이다. 꿈 중에는 하나님께서 꾸게하시는 의미있는 꿈들이 있다. 그러한 꿈에는 개인의 장래와 미래를 알려주는 꿈도 있으며,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려주는 꿈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이 하나님이 꿈인이 혹은 사탄이 주는 꿈인지를 구별할 수도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셉이 왜 계시적인 꿈을 꾸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오늘 우리도 의미있는 꿈을 꿀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꿈을 통해 자신의 가문과 교회와 이 시대까지 섬길 수 있을 것이다.

 

2. 꿈이란 대체 무엇인가?

 꿈이란 무엇인가? 꿈은 그것이 의미가 있는 꿈일 경우 그가 불신자이든지 신자이든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통로의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의미있는 꿈 곧 계시적인 꿈을 꾼 자들이 다 계시를 보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신앙적인 인물로서 요셉이나 다니엘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같이 활동했던 애굽왕 바로나 바벨론왕 느부갓네살도 다 의미있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 중에는 의미없는 꿈들도 많이 있다. 그러한 꿈은 대체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앞 뒤가 잘 맞지 않을 뿐더러 연결도 되지 않는다. 터무니 없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서운 영화를 보고 꿈을 꾸게 되면 악몽을 꾸듯이 또한 우리가 걱정 근심이 많은 상태에서 장믈 자면 복잡하고 잡다한 꿈을 꾸듯이, 우리는 의미없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꾸는 꿈들 중에는 의미가 있는 즉 계시적인 꿈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3. 성경이 말하는 꿈의 종류 2가지는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꿈을 꾸었다는 사람이 종종 등장한다. 물론 성경게 기록된 꿈들은 그것이 다 의미있는 것이었기에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꾸었던 꿈들이 어떤 유형인가 살펴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꿈들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첫번째, 하나님께서 꿈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서 뭔가를 가르쳐주고 지시하는 꿈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꿈 속에서 직접 어떤 것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꿈의 내용을 보면 상징들이 없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창28장에서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이 바로 그러한 종류의 꿈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꿈 속에서 영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여주셨다. 이때 야곱은 지상에서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고 그 사닥다리 위아래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다리 꼭대기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 음성은 이러했다.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게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8:13)" 그렇다. 야곱이 꿈에서 본 것은 실제 있는 영계의 모습이었으며, 실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이때 야곱은 실재하지 않는 어떤 현상을 본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의 영안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서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꿈 속에서 그것을 본 것이다. 그랬다. 야곱은 그날 꿈속에서 영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직 영안이 활짝 열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 그가 다시 벧엘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을 때에는 꿈 속에서가 아니라 직접 현실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창35:9~13). 그런데 이러한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예수님의 족보상의 부친이었던 요셉도 그러한 꿈을 꾸었으며, 꿈 속에서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때 천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0~21)"고 했다. 그렇다. 이것은 실제 천사가 하는 말이었다. 단지 요셉은 그것을 꿈 속에서 들은 것 뿐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꿈이 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실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차 미래에 되어질 일을 상징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래서 "환상"이란 꿈의 일종이나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환상은 장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상을 보는 자가 우리들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장래를 잘 대비할 수가 있다. 오늘 창세기 37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 같은 것이 바로 이러한 환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요셉이 본 것은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서 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 한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곡식단이 절할 수 없으며, 해와 달과 별들도 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상의 꿈이었다. 그것은 장래에 형들이 요셉을 찾아와서 절하게 될 것 그리고 요셉의 부모와 형제들이 자신의 다스림 안에 들어올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꿈은 우리는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셉이 꾸었던 2개의 꿈들이나(창37:7,9) 애굽왕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이 꾸었던 꿈(창40:9~20) 그리고 바로왕이 꾸었던 꿈들(창41:1~7)은 바로 환상의 꿈이었다. 그리고 요셉 후 약 450년이 지난 후에 다니엘이 꾸었던 꿈들과 느부갓네살이 꾸었던 꿈들도 다 환상의 꿈들이었다. 

 

4.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6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꾸는 꿈들 중에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다. 그런데 사탄이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가듯, 귀신들이 주는 꿈들도 있고 별 의미없는 꿈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꾼 꿈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꾼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금부터 제시되는 6가지를 따라서 비교해보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아닌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만약 그 꿈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다. 즉 꾼 꿈을 해석할 때에 거기에 어떤 일정한 스토리나 메시지가 담겨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꿈에는 보통 숫자들과 상징들이 나오는데 해석해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것들이다. 오늘 요셉의 꿈 또한 그러한 꿈의 하나다. 두 개의 꿈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다 다 요셉에게 절한다는 꿈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셉의 다스림 안에 다 들어간다는 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꿈은 계시적인 환상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창41장에 보면 바로가 꾼 꿈이 나오는데 그때 바로는 먼저 일곱암소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거기에는 먼저 풀을 뜯고 있던 일곱암소가 나오고, 나중에 파리한 암소가 나오는데 뒤에 나온 암소가 앞에 나오는 암소를 잡아먹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어서 꿈을 또 꾸는데, 이번에도 역시 충실한 일곱 이삭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파리한 일곱 이삭이 나온다. 그런데 나중 나온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도 환상의 꿈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소가 소를 잡아먹지는 않기 때문이요 이삭이 이삭을 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꿈은 환상의 꿈이다. 일정한 패턴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꿈들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등장하고, 뒤의 것이 흉한 것이며, 뒤의 것이 앞의 것을 삼킨다는 것이 공통이다. 그래서 요셉은 일곱이라는 숫자를 7년으로 해석하였고, 앞의 것은 풍년, 뒤의 것은 흉년이라고 해석을 했다. 왜냐하면 흉년과 풍년을 가르는 기준은 목축이나 농업이나 같기 때문이다. 

  둘째, 꿈을 꾸고 나더라도 곧장 깨어나서 그 꿈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야 그 꿈을 기억하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꿈을 잘 해석했을 때에 곧 그것은 예언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꾼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 꿈을 꾸되 겹쳐서 꾸거나 반복적으로 꾼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꿈이 된다. 요셉도 꿈을 겹쳐꾸었다. 그는 자신의 형들과 아버지가 자신에게 절하게 될 것과 자신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을 겹쳐 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가 꾼 꿈도 마찬가지로 겹쳐 꾼 꿈이다. 일곱암소와 일곱이삭의 꿈은 같은 패턴의 꿈을 겹쳐서 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요셉이 바로의 꿈을 설명할 때에도 이렇게 말했다. "바로의 꿈은 하나라. 바로께서 꿈을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창41:25,32)" 그렇다. 겹쳐 꾸었다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며, 그 꿈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니 유의하라는 뜻이다. 

  넷째, 꿈의 내용을 살펴볼 때에 그것이 장래에 일어날 일이자 예언적인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꿈일 확률이 높다. 요셉의 꿈은 장차 요셉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과 부모가 어떻게 요셉에게 와서 절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으로서의 계시적인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꿈의 내용을 해석해보았을 때에 지금 당장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 때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 꿈과 환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한 번도 자신의 형들이 자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어떻게 하늘과 같은 아버지가 자신의 다스림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이라도 해 보았겠는가? 하지만 꿈의 내용은 그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환상으로서 꿈은 장래에 있어질 일을 하나님께서 계시적으로 미리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들인 것이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요셉은 꿈을 꾸었으면서도 처음에는 자기의 생애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를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23년이 지난 뒤에 그 꿈은 실제로 성취되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요셉은 형들의 시기질투에 따라 애굽에 종으로 팔려나갔다. 또한 애굽에 가서도 주인의 처의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쳐넣어지기도 했다. 감옥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꿈해석의 도움을 받은 술맡은 관원장도 요셉의 은덕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하지만 애굽생활 13년만에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다. 그리고 7년 풍년 뒤에 7년 흉년이 찾아왔고, 흉년 2년차가 지나갈 때에 꿈이 현실이 된다. 식량이 떨어지자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사러 애굽에 와서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꿈대로 형님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야곱의 모든 70명의 가족이 애굽에 와서 요셉의 다스림 안에서 살게 된다.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특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5.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의미있는(계시적인)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의미있는 계시적인 꿈을 요셉이 꾸게 된 것일까? 당시 야곱에게서는 다른 11명의 형제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요셉이 계시적인 꿈을 왜 꾸게 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의미있는 계시적인 환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적인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요셉의 영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마음과 영의 상태가 깨끗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다른 형들에 비해 도덕관념이 뛰어났다. 그는 거짓말을 한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간음을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창39:9~10). 왜냐하면 29년간 할아버지 이삭과 함께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을 잘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 바치곤 했다.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조상으로 내려오는 우상숭배의 영과 이미 단절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의 고조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그 윗대에서부터 섬기고 있던 우상숭배를 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저주를 곧 일찍 죽거나 불임의 저주를 이미 끝냈던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부친의 도움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부친이 20년 처가살이를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에 여러 명의 부인들과 종들과 목자들이 가지고 온 이방신상들을 제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에게는 그 어떠한 우상숭배의 저주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영은 매우 깨끗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꿀 수 있었다. 

  둘째, 요셉의 마음에 상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환상이 잘 안 보인다. 환상은 가슴에 상처가 없이 평안함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30세가 되기까지 상처가 없었다. 아니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아버지 밑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그러했겠지만 애굽의 종의 팔려가서도 그는 13년동안 고난을 겪는 중에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여기고 살았기 때문이다(창45:5~8). 그가 애굽에 팔린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님들의 식구들을 기근의 때에 먹여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요셉처럼 어릴 적부터에 마음에 상처를 갖고 있는 자는 그 상처를 해결받을 때까지 환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투명하고 깨끗하고 상처가 없는 자에게 환상이 잘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자신의 생애에 계시적인 꿈을 꾸기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꼭 치유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자신에게 상처준 자들에게 앙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럴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해서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려 죽으신 은혜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이루실 특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안배"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지를 하늘에서 이미 결정하시고 그의 영을 이 땅에 내려보내시는데, 요셉은 이러한 안배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니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사명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야곱의 온 식구를 기근의 재앙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하여 작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라고 댓구할 수는 없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되, 어떤 것은 천히 쓸 그릇으로 어떤 것은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온 가족을 구원할 목적으로 쓰시기 위해 이 땅에 그렇게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17세 되던 해에 이미 꿈을 꾸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야곱의 온 식구를 살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불어나게 하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만약 우리 가운데 요셉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복받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가 있는 사람, 자신의 영이 깨끗하고 마음에 상처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적인 환상도 듬뿍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미리 보여주심으로 환난의 때를 준비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어려운 때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이 가는 곳에는 항상 복이 찾아왔다. 그가 애굽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자 그의 집이 복을 받았다. 그래서 보디발은 그를 가정총무로 삼았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 감옥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므로 간수도 그에게 모든 사무를 맡기게 된다. 그리고 애굽왕 바로가 그를 만났을 때 바로 또한 그를 알아보고 라의 모든 살림살이를 그에게 맡겨버린다. 그가 나라의 장래의 잘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의 예상했던 바와 같이 총리가 된 요셉은 극심한 애굽의 7년기근을 잘 대비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근 중에서도 애굽 만큼은 잘 사는 나라가 되게하고 그리고 더욱 더 강대국이 되게 한다. 그 가운데에 야곱의 식구도 애굽에 들어가게 되니, 애굽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식구들이 많아지게 된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셉이 꾼 꿈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미있는 꿈이자 계시적인 꿈이 있다. 아니 그러한 꿈을 꾸는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 

 

2021년 07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에서는 과연 저주받은 인물이요, 버림받은 사람의 대명사인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렇게 에서를 생각해왔다. 그러나 창세기 36장은 에서가 그러한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 에서는 어떤 인물로 살다갔는가? 그가 받은 부스러기의 은혜는 대체 어떻게 그에게 주어진 것인가? 오늘 다시 에서를 성경에 기록된대로 들여다보자. 그리고 우리의 일생 가운데 나에게 복을 받게 해주는 또 하나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2021-07-02(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139) 창세기는 왜 에서의 족보를 한 장이나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가(창36:1~4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0uk2_RSGT8 [혹은 https://tv.naver.com/v/21118787 ]

 

1. 들어가며

  한 번 각인된 생각은 좀처럼 바꾸기가 어려운 것일까? "에서"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말1:2~3의 말씀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는 말씀에 따라 예정론자들에 의해, 야곱은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의 예표이고, 에서는 버림받아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예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야곱의 구원과 에서의 멸망을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없다. 그래서 오늘은 에서에 대하여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정확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언약계승자의 명단에서 떨어져나간 에서, 그러나 그의 족보를 창세기 기자가 무려 한 장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다는것은 무엇인가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불신앙자요, 버림받은 자요,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에서는 진정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봄으로서, 사람이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재생의 놀라운 회복의 시간이 다시 주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서는 정말 믿음이 없는, 불신앙의 사람이었는가?

  보통 신앙인이라면 에서는 불신앙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선택받았고 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서가 버림받은 영역은 언약계승자로서의 자격일 뿐 다른 그 어떤 것에서도 에서는 버림받은 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창세기를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 안 좋은 시각으로 계속 에서를 들여다보니 에서가 나쁘게만 보이는 것이다. 이는 에서를 두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를 통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공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세기에서 에서의 족보이야기를 무려 한 장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서는 상당히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삭이 60세에 태어났다. 그리고 40세에 결혼했다. 그런데 그가 결혼했던 아내는 가나안일 중에서 헷사람이 2명이었고, 이스마엘의 딸들 중의 1명이 있었다. 고로 그의 아내는 3명이다. 에서는 3명의 아내들을 얻어서 5명의 아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가 낳은 5명의 아들들을 보면, 상당히 에서가 신앙적인 인물이었을 직감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에서의 첫째아들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아다가 낳은 것으로서, 그의 이름이 "엘리바스"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엘리바스"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힘"이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아들의 힘이 될 것임을 고백하면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둘째부인인 오홀리바마를 통해 태어난 둘째아들의 이름도 역시 "르우엘"이라는 이름으로서, 그  뜻이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서가 자신의 둘째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둘째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의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여 붙혀준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에서는 상당히 신앙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은 아들들과 손자들의 이름 속에서 그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셋째부인이었던 바스맛(마할랏)의 아들들의 이름은 또 어떻게 불린 것일까? 그것은 세 아들들로서 "여우스"와 "알람"과 "고라"가 그들이다. 참고로 오홀리바마로부터 태어난 장자 "여우스"는 "수집가"라는 뜻이고, 오홀리바마로부터 태어난 셋째 아들의 이름은 "고라"였다. 이는 "대머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차자 "얄람"은 "하나님이 숨기는 자" 즉 하나님께서 숨겨두고 싶은 사랑스런 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시대에는 부모나 조부모가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그들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건이후로 각자가 자기의 후손을 위해 이름을 짓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부족의 태어난 자식의 이름은 보통 자기의 가족들이 지어서 부르는 것이 훨씬 낫다. 

  에서가 사실 상당히 믿음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보자. 둘째로,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동생 야곱과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막벨라굴에 조심스럽게 장사하였기 때문이다(창34:28~219). 그에게 아버지는 원망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철석같이 아버지를 믿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장자의 축복을 자기에게 해준다고했지만 실제는 그 복을 동생에게 주었고 자신에게는 척박한 땅에서 살게 될 것과 칼을 믿고 살게 될 것 그리고 동생을 섬기고 살 것이라고 축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에서가 브니엘에서 야곱과 진정 화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아버지를 장사하는데 그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하고 화해를 했던 에서는 기꺼이 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는 그가 아버지를 용서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부친 사후에 에서와 야곱은 둘이 다 가나안 땅에서 함께 살았지만, 서로의 목자들이 다투게 되었을 때에  에서는 스스는 가나안 땅을 동생 야곱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세일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제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기꺼이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된다. 그는 통 큰 양보심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3. 에서는 언제 어떻게 달라진 것인가?

  에서는 들사람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붉었고 전신에 털옷을 입은 것 같이 털이 많았다(창25:25). 그래서 그는 들사람이 되어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다(창25:27). 그만큼 활을 잘 쏘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야생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쌍둥이였던 동생은 달랐다. 동생 야곱은 착실한 사람이어서 늘 장막에 거주했다(창25:27). 그러면서 약 15년동안 할아버지에게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고, 어머니로부터도 하나님이 누군지를 배웠을 것이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사랑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은 태어날 때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늘 형의 장자권에 탐을 냈다. 그의 나이 약 16살 정도가 되었을 때에 그는 팥죽으로 사냥하고 돌아오는 배고픈 형에게 장자권과 맞바꾸었다(창25:33). 에서는 아마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50년이 흘러갔고 에서와 야곱의 나이가 76세가 되었을 때에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동생이 장자의 축복마저 가로채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에서는 울부짖었다. 장자의 명분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장자의 복만 빼앗기도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동생을 죽여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 리브가가 하루 아침에 어찌 자식을 둘 다 잃겠느냐면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시켰다. 겉으로는 거기에서 신부감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야곱은 떠나갔고 다시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야곱은 거기에서 4명의 부인들과 12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리고 거부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으니 형에게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기별을 했다. 그런데 아뿔사, 형이 그만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모든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린다. 그래서 얍복강에서의 그의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이어진 그의 기도는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고 축복하고 떠남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형을 마중나갔다. 하지만 그가 인간적으로 형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550마리의 가축을 예물로 먼저 보냈고, 철저히 낮아져서 형을 맞이했으니 한 걸음을 뗄마다 자신의 몸을 땅에 대고 일곱번 절을 하면서 형으로부터 용서를 빌게 된다. 

  그런데 사실 형 에서는 밤사이 하나님의 군대인 천사의 무리를 만났다. 그때 아마도 천사들은 에서로부터 악한 영들을 제거해주었을 것이다. 그때 혈기와 분노의 영들 그리고 살인의 영들이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진심어린 사과를 해오는 것을 보게 된다. 형으로서 동생을 죽이겠다고 벼뤄온 20년의 세월이 있기는 있었지만, 형에게서 용서를 받기 위해 처절히 자신을 낮추며, 최선을 다하는 야곱을 보면서 형 에서는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형 에서는 동생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는다. 통 큰 결정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은 하나님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에서에게도 놀라운 축복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에서가 달라지게 되었고 에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축복을 받게 되는 데에는 동생의 사과를 받아준 데에 기인하는 것임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해 올 경우,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마18:21~22). 에서는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4. 달라진 에서가 뒤에 가서 비로소 받은 축복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철천지 원수와 같은 동생의 사과를 받아준 에서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 우리는 보통 야곱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에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찌어찌하다가 교리를 먼저 접하다보니, 에서는 버림받은 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생의 사과를 받아주었던 에서는 그 뒤 하나님으로부터 적어도 2~3가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된다. 진심어린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복이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첫째, 먼저 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손에 관한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적어도 14명의 족장들을 거느린 족장의 우두머리가 되었음을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36:15~19). 놀랍게도 창세기는 에서가 받은 복을 창세기에서 무려 한 장이나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36장은 43절이나 되는데 온통 에서의 이야기요 에서가 받은 축복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만 그런 줄 알았더니 역대상을 살펴보니 역대상에서도 역시 에서의 족보(대상1:34~42)와 에서의 후손들의 왕의 계보(대상1:43~51a)와 에서의 족장들(대상1:51b~54)을 똑같이 기록해놓고 있었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그 척박한 땅에 살게 되었지만 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이룬 것이다. 적어도 아주 강한 민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 

  둘째, 에서는 기업의 축복도 받았다. 그때 에서가 가나안 땅을 떠나 찾아간 곳은 가나안땅의 남동부에 위치한 세일산 근처였다. 세일산 근처의 땅은 당시 호리족이 거주하고 있었다(창36:20). 그때 호리족의 족장이었던 "세일"은 7명의 아들들을 두고 있었고, 그 아들 중에서 넷째 아들이 '아나'인데, 아나에게는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이 바로 "오홀리바마"인데, 이 여인이 에서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호리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에서가 들어가서 에서가 낳은 자식들에 의해 호리족이 에돔족속에게 흡수통합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에서가 세일산을 땅의 기업으로 받았다는 사실은 훗날 500년 뒤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으로 드러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아라비아의 미디안광야를 출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찾아갈 때에, 필연코 에서의 땅 한 복판에 있는 왕의 대로를 따라 이동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에돔족속이 그것을 거부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에돔족속의 말을 들어주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4-5)" 그렇다. 세일산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에돔족속에게 준 것이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민족은 에돔족속의 땅을 우회하여 이동해야 했다. 그렇다. 가나안 땅을 기꺼이 동생에게 내어주고 세일산으로 이동했던 에서를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서가 하나님의 뜻이 더이에 있는지를 받아들이고 가나안 땅을 기꺼이 양보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가 선택한 세일산을 기꺼이 그와 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셋째, 에서의 후손 가운데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 같은 믿음 좋은 사람들도 나왔기 때문이다. 욥은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언약의 계승자의 핏줄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동방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방의 우스에서 살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땅을 보면 그곳이 바로 에서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셋이 있었다. 그중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나온다(욥2:11). 그런데 엘리바스는 에서의 장남의 이름과 같다. 그리고 데만은 또한 엘리바스의 장남의 이름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엘리바스가 에서의 장남인지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관련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욥과 엘리바스가 대단히 믿음 좋은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욥기서를 보면 구구절절히 나온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의인의 한 사람이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에서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신앙적인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대변해준다. 그렇다. 에서의 후손들 중에는 믿음좋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에서를 저주의 대명사, 버림받은 자의 대명사로 쓰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5. 창세기 36장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창세기 36장이 가르쳐주는 영적인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창세기 36장은 에서가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 36장은 에서를 버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서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민족을 이루었고 심지어 왕들이 다스리는 국가적 형태까지 가장 먼저 띠었다고 말하고 있다(창36:31~43). 그렇다.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아주 강한 민족의 우두머리가 된 자다.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았고, 무엇보다도 호리족속에게 들어가 호리족속을 흡수통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세일산을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 만들었던 인물이다. 심지어 에서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그이 후손들 중에는 신앙적인 인물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에서는 저주받은 인물도 아니었고, 버림받은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언약의 계승자가 되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서 영영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민족 외의 민족 중에서 어떤 땅에 대해서 그 족속의 땅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에서는 달랐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만큼은 세일산을 그의 기업으로 주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만한 어떤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가 동생을 용서해주고 동생을 언약의 계승자로 인정해준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스러기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비록 정통의 신앙노선을 걸어간 것은 아니었으나 에돔족속이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다. 설령 그의 후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겼을른지는 모르지만 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던 것이다. 

 

6. 나오며

  사람이 한 번 가진 선입관을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교리나 자료를 바탕으로 된 것이라면 이제라도 버려야 한다. 에서같은 사람이야말로 그러한 예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그동안 에서를 너무나 평가절하해 왔다. 그는 버림받은 자요 구원에서 제외된 자라고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을 살펴보니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의외로 신앙적인 인물이었고, 평생 하나님을 잘 섬기었던 인물이었으며, 용서할 수 없는 동생을 용서해준 인물이었다. 더욱이 약속의 땅을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척박한 땅으로 나아갔고 그곳을 개척하여 결국 자신의 후손의 기업의 땅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지금까지도 "세일산"이라고 하면 일곱명의 아들들을 둔 호리족속의 족장 "세일"이 떠오르지 않고, 에서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에서가 그 땅의 온전한 지배자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진실한 사과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여 용서해주는 에서도 역시 복된 자가 된다는 것을 창세기 36장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정통에 서 있어서 정중앙의 은혜는 아니더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후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1년 07월 02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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