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5) 두란노사역을 더 힘있게 만들어 준 놀라운 사건은 무엇이었나?(행19:13~19)_2022-12-21(수)

https://youtu.be/E3S4R_f9oFM [혹은 https://tv.naver.com/v/31818426]

1.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전파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전파한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였다(행19:8). 즉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왕국인가? 그것은 주 예수께서 왕으로 다스리는 왕국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으로서, 왕국의 왕이신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이 구약성경에는 어떻게 예언되어 있었는지를 전한 것이다. 이때 바울이 전했던 왕국은 두 방면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나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였고 또 하나는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장소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전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사탄의 왕국에 속해 있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자는 사탄의 왕국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요일5:19). 고로 바울은 이 땅에서도 주 예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전했다. 

 

2. 바울이 에베소에서 새롭게 시도한 새로운 전도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새롭게 시도한 새 전도 전략은 선교센타 전략이었다. 이전까지는 바울이 현장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었지만, 에베소에서는 사람들을 학교에 오게 하여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한 뒤 파송하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교육 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두란노 서원(학교)'이었다(행19:9). 바울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성도들을 양육하였고 훈련하였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들이 넘치도록 들어오게 했던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예수 이름 빙자 축사 사건이었다. 

 

3.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에 에베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에 두란노 선교센타 사역을 힘있게 만들어 준 놀라운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예수 빙자 축사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하여 두란노 서원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퇴마사가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다가 도리어 자신이 험한 꼴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귀신을 쫓아주며 돈을 받는 퇴마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을 유대인의 대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스게와'였다. 그런데 그가 진짜 대제사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권위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각인시키고자 그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스게와에게는 같이 데리고 다니는 7명의 자신의 아들 퇴마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는 이미 바울에 의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으니, 바울이 노동할 때 사용하던 손수건과 앞가리개(앞치마)를 가져다가 환자들 위에 놓아두면, 병이 떠나가고 귀신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했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축사할 수 있다는 것은 퇴마사들에게는 획기적인 귀신축사 방법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도 바울을 흉내내보기로 한 것이다. 즉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보내려고 시도한 것이다. 

 

4.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축사사역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이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축사하기 시작했다(행19:13).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은 악한 영을 가진 사람이 그들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악한 영을 가진 사람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 귀신더러 떠나갈 것을 명령하자, 귀신들린 사람이 오히려 그들 위에 솟구쳐 튀어오른 후에 그들에게 힘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만 벌거벗은 채 그리고 몸에 상처를 입고서 도망을 쳤던 것이다. 그때 귀신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내가 예수도 알고 있고 바울과도 아는 사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행19:15)" 그렇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배우고 체험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분은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있었을 때에 자신들의 최고 대장인 사탄 마귀가 예수님에게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사탄 마귀가 십자가에서 불법적으로 사망 권세를 사용하다가 쫓겨나 지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도 역시 귀신을 쫓아내었으므로 바울이 가진 영권과 계급이 어느 정도인지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귀신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누군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디서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이 감히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를 쫓아내려고 시도하느냐면서 오히려 그 귀신이 그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랬다. 이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가 그만 자기들이 험한 꼴을 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이 쫙 퍼진 것이다. 그러자 에베소가 완전히 뒤집혀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자는 와서 자복하며 회개하였고, 마술하던 에베소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마술할 때 사용하던 책들을 가져다가 다 불살라버렸던 것이다. 

 

5. 왜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귀신에게 농락당하게 되었는가?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게 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통회 자복하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즉 부모에게 불효하던 며느리가 회개하면 틱장애가 떠나간다. 틱장애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들에게 역사하는 귀신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라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자기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신 자가 예수 이름을 자꾸 사용하여 귀신을 쫓아내면, 권세와 능력이 있는 높은 계급의 귀신이 그 사람을 알아보고 가만 있지 아니한다. 고로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귀신을 축사할 수 없다. 그리고 높은 계급의 귀신을 축사했다가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처럼 귀신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귀신들이라도 다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는 것이 맞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예수 이름을 사용할 때에는 귀신도 달려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 귀신이 그에게 달려든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그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귀신을 축사하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사탄 마귀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주님의 허락없이는 결코 함부로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건드렸다가는 혼쭐난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21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4)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전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이었나?(행19:8~12)_2022-12-20(화)

https://youtu.be/whGJHhw2fVE [혹은 https://tv.naver.com/v/31818386 ]

 

1.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로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the kingdom of God)'라는 단어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뜻한다.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주격적 소유격으로서,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는'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인이며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총 162회 사용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동일한 개념이다. 즉 하나님의 표현인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한 바 있다(엡5:5). 

 

2.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떠한 나라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2가지 측면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는 지금 이 세상에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사탄 마귀가 임금이다(요12:31, 14:30, 16:11). 사도 요한도 요일5:19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주셨으나 아담이 사탄의 말에 순종함으로 사탄의 종이 됨에 따라 이 세상의 통치권마저 사탄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래서 천하만국의 영광이 사탄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예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이다(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그러므로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떠나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위에) 임하였느니라(도달하였느니라, 먼저 왔느니라)(마12:28)" 

  그리고 또 하나는 장차 들어가게 될 셋째 하늘에 준비된 장소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말씀하셨다(마4:17).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이곳은 셋째 하늘 곧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에 준비된 하나님의 나라다. 사도 요한도 역시 만약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고로 사람은 죽어서 반드시 이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3.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전했던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는 한 가지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작게는 2가지다. 곧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의 하나는 '예수님'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거기에 '회개'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행20:21). 즉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전했으며,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며, 그 나라를 얻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전한 것이다(행28:23,31).

행28: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고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구약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에 약속된 메시야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시며,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특히 에베소에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며 가르쳤는지는, 행19:8과 20:25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행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4. 사도 바울이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했는가?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했다(행14:22, 딤후4:18).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그곳에서 받게 될 기업에 대해 아주 강조했다.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성도들이 받아서 영원히 누리게 될 기업 곧 유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어도 계속해서 음행하거나, 더럽거나, 탐하거나 우상숭배하는 자가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엡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며, 그 나라에서 상속받을 기업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이 땅에서부터 잘 준비해야 한다. 

 

5.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죽은 뒤에 그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가장 중요시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성령을 힘입어 그분의 이름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마12:28). 이것은 다음 시간에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렇다면, 장차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기업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기업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엡1:17~18, 3: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려고 미리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엡3:11). 이때 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의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며 희생해야 할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많은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별과 달과 해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2022년 12월 20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3) 에베소에서 처음 시도된 획기적인 선교전략은 무엇인가?(행19:8~12)_2022-12-16(금)

https://youtu.be/HszzehqFgM0 [혹은 https://tv.naver.com/v/31818261 ]

 

1. 바울의 획기적인 선교전략이 실행된 에베소는 어떤 지역인가?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이며 항구도시로서, 아시아에서는 가장 컸던 통상도시였다. 여기에는 당시 세계 제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도 있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잠깐 멈춘 곳이 바로 이곳인데, 전략적인 면에서 이 도시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수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점도시가 바로 이 도시였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바울이 1~3차 선교여행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도시인데, 이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이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자신을 따라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이 도시에 머물게 했다. 그때에 이 도시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석학 아볼로가 와서 복음을 전해 주었고 요한의 세례를 준 후에 고린도로 떠났다. 그런데 뒤이어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아볼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이들은 성령이 있다는 사실조차 들어보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안수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게 하였다. 이때 안수를 받고 성령의 은사들로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발언했던 자들은 약 12명쯤 되었다. 

 

2. 바울이 처음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12명에게 성령세례를 받게 한 후 바울은 회당으로 가서 전도했다. 바울은 이때부터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그들에게 강론하였으며 그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그것을 무려 3개월 동안이나 지속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바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수록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고 순종하지 않으며, 오히려 바울의 복음 전파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3. 바울은 에베소에서 어떤 선교전략을 처음으로 시도했는가?

  이때 바울은 에베소에서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자들과 계속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울은 우선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그들로부터 따로 분리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칠 새로운 장소를 찾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학교였다. 이 학교는 아마도 '두란노'라는 의사가,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후보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였는데, 그들을 가르치지 않는 시간에 바울이 그 학교를 빌려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오전11시부터 오후4시까지의 낮잠 자는 시간과 저녁 시간에 바울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2년 넘게 그렇게 하였다. 그러자 온 아시아에 거주하는 자들 모두가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할 것 없이 다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4. 바울이 세운 두란노 학교는 어떤 학교였는가?

  그렇다면 바울이 세운 두란노 학교는 어떤 학교였는가? 그것은 바울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학교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바울은 새로운 전도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바울이 현지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뒤에 믿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고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교회를 세우고 떠난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도전략이 새롭게 바뀌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에 아예 학교를 세워 놓고, 사람들을 그곳에 불러서 공부하게끔 하고,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훈련이 마쳐지면 그들을 자기가 살던 각 지역에 파송하여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한 마디로 이것은 선교훈련소 혹은 선교센타  전략이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 같은 것을 운영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났을 때에, 에베소를 중심으로 최소 7개 이상의 교회가 개척되었고, 그 교회는 잘 성장하였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의 경우다. 사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사역할 때에는 A.D.55~57년경이었는데, 이후에 바울은 로마에 가서 A.D.67년경 순교하게 된다. 이후 에베소는 디모데가 가서 목회를 하다가 그도 역시 순교를 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도 요한이 그곳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되는데, 그때 목회하면서 쓴 책들이 바로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요,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에베소 앞에 있는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그가 환상을 보고 기록한 책이다. 이처럼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선교센타를 운영하자, 약 40년이 지났을 때에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엄청난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고 성장한 것이다. 

 

5. 바울은 두란노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렇다면 이때 두란노 학교에서 바울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왕국)'였다(행19:8). 하나님의 왕국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 이러한 천국을 소유하게 될 수 있었고 천국의 실제를 경험하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란노 학교는 이론만 배우고 훈련하는 학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 학교에서는 이론과 더불어 천국의 실제를 경험하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도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왕국)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사람 위에 덮어놓게 되면 그 사람에게서 질병이 떠나가고 귀신이 떠나가는 등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두란노 학교는 말씀(이론)과 실제가 함께하는 학교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들었을 때에 그 복음을 기뻐하고 그 복음 전하기를 사모하는 자들을 들어서 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음을 듣기는 들어도 마음을 닫고 복음듣기를 거부하며 비방하는 자들을 더 이상 쓰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22년 12월 16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2) 왜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행19:4~5)_2022-12-15(목)

https://youtu.be/9gaQT-a2zD8 [혹은 https://tv.naver.com/v/31818228 ]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성도들이 12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아볼로에 의해 전도된 자들이며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를 믿기로 했으니 그분이 바로 주 예수님이신 것을 알려 준 뒤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19:5).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2. 사도 바울은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오늘날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곳은 거의 없다. 왜 오늘날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그런데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마28:18~20).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의미야 같은 것이겠지만 글자로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사도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처음 초기 교회에서는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행전에는 초기 교회가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는지가 나온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세례를 베푼 경우는 총 4번 나오는데, 두 번은 베드로에 의해서 세례가 베풀어진 것이요, 한 번은 빌립 집사가 세례를 베푼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세례를 베푼 것이다. 첫 번째는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3천 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때 11사도들과 함께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다(행2:38). 그리고 두 번째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8:16). 그리고 세 번째는 다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도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다(행10:48).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준 것인데, 이때는 빌립 집사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결국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대부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마28:19). 그런데 A.D.100년경 거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교회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다케'라는 책이다. 이 책은 '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불려지는데, 여기에 보면 세례를 어떻게 주는지가 나와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로 침례를 주어야 하지만, 만일 그러한 물이 없다면 다른 물로 침례를 주되, 찬물로 세례를 줄 수 있고, 그것이 없다면 더운물로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찬물이나 더운물도 풍성하지 않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하였다. 그렇다. A.D.100년경에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둘 다 의미는 같은 것이지만, 뉘앙스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한 것이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반영하는 표현이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한 것은 한 분 하나님의 신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10:30에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도 말씀하셨고,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성부와 성자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도 역시 '성모'라는 표현을 동일한 위치에 가져다 놓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천주교에서는 A.D.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 성모 마리아를 성부와 성자의 신격의 동일한 위치에 놓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를 '데오토코스' 즉 하나님을 낳으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4년 제2바티칸 회의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출산하였다'고 공식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낳은 것이다. 고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인 것이지(행1:14, 요2:1,3, 막3:31),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쓴 것이다. 

 

5. 초기 교회는 세례를 줄 때에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대신하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인가?

  우리는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아들의 이름인 '예수' 속에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예호수아, 예수아,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고로 굳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5:43).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요17:6). 그리고 둘째, 성령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데, 성령님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님을 가리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4:26). 그렇다. 성령님은 아들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고로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이고, 성령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도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초기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특히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 곧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수가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2월 15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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