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7) 바울은 왜 로마시민권을 사용했을까?(행22:17~30)_2023-01-18(수)

https://youtu.be/x16p4r_6aiY [또는 https://tv.naver.com/v/32508657]

 

1. 바울은 언제 로마 시민권을 사용했는가?

  바울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일생에 두 번 로마 시민권을 사용했다. 한 번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가 출옥될 때에 사용하였고(행16:37), 또 한 번은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군중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천부장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기 직전에 한 번 더 사용하였다(행22:25). 

 

2.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왜 로마 시민권을 사용했는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사용한 이유는 그가 부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천부장이 흥분한 유대인들로 인해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한 나머지 부당한 형벌을 가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선, 자신은 로마 시민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자신을 쇠사슬로 결박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행21:33~34), 흥분한 유대 군중들의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백부장더러 바울을 채찍질하여 심문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행22:24). 

 

3.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어떤 특권이 있는가?

  로마에서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거나 혹은 정부의 고위층 사람들 혹은 로마를 위해 특별히 공헌했던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그러나 편법으로 로마 제국의 지방 행정관에게 뇌물을 주고 시민권을 사기도 하였다.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는 그의 아내였던 메살리니와 장관들도 로마 시민권을 팔아서 돈을 모았고 그것을 사사로이 썼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 시민권은 로마의 35개 종족(가문)의 명단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자신이 거주하는 지방 자체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념상 돈으로 산 시민권은 출생 시민권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이미 자신이 시민인 것을 증명하는 문서가 호적 공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로마 시민인 자는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말하면 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로 자신을 로마 시민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사형이었다. 그러므로 함부로 로마 시민인 체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로마 시민인 자를 재판도 하지 않고서 결박하거나 채찍질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은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그렇게 불법을 저지른 자는 자신이 대신 그 형벌을 받거나 그것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지방에서 판결한 내용이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다(행22:28). 아마도 바울의 조상들 중에 누군가가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였을 것이며, 그래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로마 시민으로 태어난 채 있었던 것이다. 

 

4. 이때 왜 천부장은 바울을 도와주려고 했는가?

  이때 로마의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고 말하자, 그것도 태어나면서도부터 시민권을 가진 자 곧 출생 로마 시민권자라고 말하자, 그는 기겁을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그것을 어렵게 얻었는데, 바울은 조상적부터 로마 시민이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로마 시민인 바울을 죄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쇠사슬로 결박을 하였고, 또한 매질을 하라고 시켰으니, 큰일 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의 결박을 속히 풀어 주게 했다. 그리고 그가 정식으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되었다(행22:30). 

 

5.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사용한 것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복음 전파자는 세상 법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복음을 전파하는데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에 억울하게 당하고만 있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더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가진 로마 시민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조상들부터 갖게 하신 일종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 베드로는 로마 시민권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많이 숨어 다녔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에 복음을 전파할 때에 결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 잇점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교회와 복음 전파자들도 마찬가지다. 법을 잘 모르는 성도들에게 법을 남용하여 집행하려는 악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는 자는 세상 법에도 익숙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 법이 정하는 합법적인 울타리 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숨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2023년 01월 1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6)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행22:1~23)_2023-01-17(화)

https://youtu.be/N7QhkUad_mM [또는 https://tv.naver.com/v/32508627]

 

1. A.D.58년경 유대인들은 왜 바울을 죽이려 했는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3가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3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으로서 유대인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이었다.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전도사역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 바울을 보고서 그렇게 고소한 것이다. 

행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유대인)과 율법과 이 곳(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3가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3가지 것을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긴다. 그것은 자신들(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에 관한 그들의 믿음이다. 첫째, 그들은 선민사상이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언약백성이 된 것은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믿고는, 할례를 받으면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요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만이 선민이라고 하는 자긍심이 아주 대단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세상 어떤 민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자기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성전도 그들 나름대로 구획을 정해놓고는 그것을 철저히 지켰다. 그들은 성전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이 들어가는 영역(이스라엘의 뜰)과 여인들이 들어가는 영역(여인의 뜰)으로 나눠 놓았다. 그리고 그 너머 바깥쪽을 '바깥 마당'이라고 하였다. 바깥 마당에는 이방인들도 허용해 주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 들어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아주 더 선명해진다. 

 

3. 바울이 나중에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자기도 처음에는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목숨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목표에 따른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그럼, 그때가 언제였는가? 그것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다. 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목숨처럼 생각하고는 그것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씨로서 오신 분으로서, 율법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결국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천국에도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주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상의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세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낳아 줄 민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메시야를 통해 자기 민족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실 아브라함의 42대손으로 예수님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별하여 세운 목적도 상실했다. 결국은 세상 모든 민족(만민)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도록 도와주고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민족만 선민으로 여기고 자기 민족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고서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다. 즉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그러면 어찌할꼬?'라는 생각을 갖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야를 붙잡고 그분을 믿어서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으라고 주신 법이 율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초등교사였던 것이다. 

  셋째, 성전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성전이란 원래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목숨처럼 여기는 성전은 원래는 성막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음으로 건물로서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전 건물 자체를 신성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물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넘겨버린다. 그리고 그때에 성전도 함께 파괴된다. 다시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짓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법궤가 제 2성전 안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죽고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을 믿는 이들 속에 보내 주셨으니, 성령이 오신 다음부터 하나님이 계신 장소는 이제 믿는 이들 곧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한 성전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다. 

 

5.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바울의 호소는 간단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존재 목적을 제대로 알고, 이제는 율법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바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그토록 목숨처럼 여겨온 것들을 하루 아침에 포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사용한 민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민족 자체를 우상시하였다. 그리고 율법이나 성전은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실체인 것처럼 붙들었다(히10:1, 골2:16~17). 그래도 그것을 통해 자기들이 얻고 누리고 있는 특권이 매우 컸기에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이후의 세대인 우리들에게 '오직 믿음'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은 어느새 값싼 구원론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쉽게 구원받고 쉽게 천국가는 티켓 정도로 여기게 되어 버렸다. 아니다. 바울이 '오직 믿음'을 말한 것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안식일 준수, 할례, 정결법 등)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얻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와전된 믿음 지상주의는 이제는 믿고 회개하는 것조차 행위 구원론을 따라가는 것이라면서 매도하고 있으며,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 율법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정죄하기까지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 지상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고 회개함으로 얻는 것이요, 우리의 충성과 헌신을 통해서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지위(신분)와 상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17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5) 자신을 죽이려한 예루살렘 시민들 앞에서 바울은 어떻게 자신을 변호했는가?(행21:37~22:21)_2023-01-06(금)

https://youtu.be/P21_asblAXw  [혹은 https://tv.naver.com/v/32238524]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붙들렸을 때에 어떻게 했는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방문을 시도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 그는 2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첫째, 믿는 유대인들의 불신과 오해에 부딪힌다. 하지만 그 문제는 야고보 장로의 주선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다. 문제는 두 번째 난관이었다. 둘째, 오리지널 유대인들의 불신과 오해와 더불어 잘못된 추측으로 인한 살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바울을 보고 가만 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과 예루살렘을 멸시하는 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 성안에서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에, 바울이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더 이상 바울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바울을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2.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을 때 누가 바울을 보호해 주었는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그를 붙들었을 때, 성전 문이 닫히면서 거기에서 엄청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은 즉각 로마 군대의 천부장의 귀에 들어갔고 천부장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바울을 붙잡아 쇠사슬로 결박한다. 그리고 우선 로마 군대 주둔지인 진영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사실 바울에게는 전혀 예상치 않은 보호 조치였다. 그때 진짜로 바울을 구할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그들은 수만 명이나 되는 믿는 유대인들(행21:20)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바울을 살려내기 위해 쫓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로마 군대의 천부장을 통해 바울이 죽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이다. 

 

3. 바울은 어떻게 천부장을 설득하여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었는가?

  그때였다. 바울이 진영으로 붙들려 가고 있었을 때, 바울은 천부장에게 청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천부장이 그의 청원을 들어주게 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천부장에게 무엇을 청원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를 죽이려고 몰려온 군중들(유대인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바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또한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같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 천부장이 바울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 그럼 그때 천부장은 왜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준 것일까? 그것은 첫째, 바울이 천부장에게 유창한 헬라어로 부탁을 하였기 때문이다(37절). 그때였다. 천부장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가 유식한 사람들이 쓰는 헬라말로 자신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헬라말을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에 붙잡혔는지도 궁금하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천부장은 예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4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에 잠적한 애굽인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울은 점잖은 사람이었고 정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둘째,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작은 마을이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39절). 이는 바울이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배운 사람으로서,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소 시민은 대부분 잘 살았기 때문에, 바울이 돈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천부장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해 준다. 

 

4.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변호했으며 설득했는가?

  그러자 바울은 로마 군대의 진영에서 성전쪽으로 내려오는 층대(계단)에 멈춰 선 후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사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도 바울에게 어떤 죄목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할른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자 정말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바울은 곧바로 말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군중들의 외치는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많은 침묵이 흐르자 그때에 바울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그때 바울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말부터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거기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히브리어 곧 아람어로 말을 시작했다. "남자들인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라고 말이다(행22:1). 사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 군중들을 선동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바울이 유대인과 성전과 예루살렘을 무시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변명은 유대인들을 존중하는 말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군중들은 더 조용해졌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서 살았다는데 그가 오리지널 아람어를 유창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바울은 그때 그들에게 무엇을 말했을까?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 진영의 층계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과연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부터 변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많이 억울했을텐데 바울은 그런 말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때 그가 말한 것은 첫째, 자신도 저들과 같이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의 하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행22:3). 그리고 둘째, 자신이 유대인이지만 왜 이방인 지역에 가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말했다. 그것은 그가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으며, 또한 그분으로부터 어떻게 이방인 지역으로 파송을 받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25년 전에 자신들이 죽였던 예수님을 아직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몇 년 뒤에 바울을 찾아오셨고 바울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들을 예수믿는 자가 되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저런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해 달라고 천부장에게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자는 누가 그들에게 무슨 간증을 하고 또한 그들에게 그 무슨 말을 들려준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려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선입관을 버리고 냉정하게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를 귀담아 들으려는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2023년 01월 06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4) 사명자의 길 곧 결박과 환난 그리고 하나님의 지키심(행21:27~36)_2023-01-05(목)

https://youtu.be/41UKahTn9eM  [혹은 https://tv.naver.com/v/32156100 ]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부딪혔던 두 가지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면서 부딛혔던 문제는 2가지였다. 하나는 예루살렘교회의 구성원들인 믿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이었다. 이들은 당시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고 불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를 폐지하며 관습들을 지키는 일에 반대하는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행21:21). 그러나 실은 바울이 이것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것들은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식법들이 말하고 있는 실체를 붙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의 제안을 따라, 정결의식을 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 바울이 정결의식을 행했던 것은 바울이 그것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거나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어 그들 중의 얼마를 구원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오리지널 유대인들과의 충돌이었다. 

 

2. 바울과 유대교인들과의 충돌은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유대교인들과의 충돌이었다. 야고보의 중재로 믿는 유대인들과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유대교인들과의 충돌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누가 과연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이 가장 왕성하게 사역했던 에베소에 있던 바로 그 유대교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데, 그때 자신들이 에베소에서 보았던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 옆에는 에베소 사람이자 헬라인인 드로비모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의 바울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로 치솟았다. 그래서 그들은 2가지로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교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이 이방인들이 사는 각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것이다(행21:28). 그리고 또 하나는 바울이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바울은 성전 안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다만 예루살렘에 헬라인인 드로비모와 함께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베소 거주 유대인들이 잘못 추측하여 바울을 가만 두지 않으려고 거짓 선동을 한 것이다. 그러자 온 성이 소동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붙잡았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다. 

 

3.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동은 어떻게 진정될 수 있었는가?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에서 치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그때였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 루시아가 즉시 개입을 하였다. 적어도 2명의 백부장과 200명 이상의 군인들을 끌고 항오를 짜고 대열에 맞춰 성전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자 성난 군중들이 바울 치기를 그쳤다. 그러자 천부장은 즉시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게 한 다음 성난 군중들에게 바울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소란을 일으켰느냐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저마다 대답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결코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실체도 없이 바울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그들의 계획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은 루시아 천부장에게 계속해서 그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고 따라갔다. 이때 바울을 죽지 않게 건져낸 사람은 누구였는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수만 명이나 되는 믿는 유대인들이었는가? 아니었다. 단 한 명도 바울의 일에 나서는 자가 없었다. 다만, 로마의 천부장이 그 일에 개입하여 바울을 죽지 않도록 살려낸 것이다. 

 

4. 사명자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대부분의 사명자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아니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지금까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사명자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간 사람은 거의 없다. 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왜 사명자는 그러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사명자란 본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실행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건져내어서 하늘나라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종류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 사탄 마귀가 하나님이 보낸 사명자들을 그냥 가만 둘 리가 없는 것이다. 고로 사명자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뒤따른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자신이 사명자라고 주장하는데도 자신에게 아직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는 진짜 사명자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였다. 그래서 이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자 아니나다를까 유대인들은 벌떼처럼 바울에게 달려들어 바울을 없이 하려고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5. 사명자는 과연 누가 지켜 주는가?

  그렇다면 위험에 처한 사명자를 누가 건져내고 누가 지켜 주는가? 그들은 수만 명이나 되는 믿는 유대인들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그랬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갔고 큰 고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에베소 거주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발견한 후에 그를 거짓 고소하여 죽이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즉시 로마 군대의 천부장인 루시아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바울을 보호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유대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로마인들이 와서 결국 위기에 처한 바울을 건져낸 것이다. 그렇다. 사명자가 죽는 것은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다. 즉 사명이 끝나서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사명자는 죽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사명자는 결코 함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을 때가 되어야 죽게 되는 것이지, 여전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면 그는 절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아플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명자의 길이다. 사명자는 그를 꼭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이 있어 그가 사명자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다. 사명자는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예비한 사람에 의해 보호되고 죽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들은 위험한 일을 만나도 겁먹지 말아야 한다. 그때 죽으면 자신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니 할렐루야하고 찬송하면서 천국가면 되는 것이요,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다면, 아직도 자기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담대히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2023년 01월 05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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