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7) 바울의 선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행18: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2Q_5AMJRtDk  [혹은 https://tv.naver.com/v/31443276 ]

1.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합류했던 동역자들은 누구누구였는가?

  바울의 2차 전도여행(A.D.49~52)은 바울과 실라가 함께 시작했다. 그런데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몇몇의 둘도 없는 동역자들을 얻어서 그들과 합류한다. 그러한 동역자들로는 첫째, 남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가 있으며(행16:1~3), 둘째, 무시아의 드로아에서는 의사 누가가 있다(행16:8~11). 그리고 셋째, 아가야의 고린도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다(행18:1~3). 이들은 바울의 선교여행에 매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2.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동역자를 고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로마교회의 성도였는데,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바울이 가장 힘들어 할 때에 그의 평생 동역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 부부가 얼마만큼 바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는 바울이 고린도에 써 보냈던 로마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때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이렇게 칭찬했다. 

롬16:3~5a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아내이다. 그럼, 아굴라는 누구인가? '아굴라'는 본도(본투스) 출신의 디아스포로 유대인인데, 그가 로마서 브리스길라와 결혼을 한다. '브리스길라'는 로마식의 이름인데, 아마도 로마의 명문 가문의 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A.D.52년 제4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재위 A.D.41~54)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리자, 이들 부부는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에 이들 부부는 고린도에서 이미 천막 제조업자로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아덴을 지나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 바울은 혼자였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선교비를 충당하기 위해 취직을 했는데, 아마도 아굴라 부부가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만나게 되는데,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거처하면서 안식일에는 회당에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런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이 범상치 않은 사역자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집을 교회로 내어준다(고전16:19). 그리고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러 복음을 전파할 때에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서 예수님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는 자들이 된다. 얼마나 잘 배웠는지, 3차 전도여행 때에 아굴라 부부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 석학자인 아볼로를 에베소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때 이들 부부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줄 정도였으니 말이다(행18:24~26).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이들 부부는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한다. 그리하여 3차 전도여행을 같이하게 되는데, 3차 전도여행의 핵심 사역지였던 에베소에 머물면서 자기의 집을 교회로 제공한다. 그리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자 이들 부부는 다시 로마로 이주하게 되고, 바울이 로마에 수감되었을 때에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에베소에 머물면서 디모데를 돕는다(딤후4:19). 

 

4. 바울은 언제 이들 부부를 만나게 되었는가?

  바울의 전도사역에 있어서 가장 힘들 때는 2차 전도여행 때였다. 그것도 자신이 몸이 아파서 병원 신세를 져야 할 때 쯤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선교비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은 직접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런데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준 일로 인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옥에서 나오지만 그곳을 떠나 달라는 부탁을 받고 데살로니가로 간다(이때 의사 누가는 빌립보에 남는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유대인들이 아주 많은 곳이어서 복음 전파에 많은 방해를 받았으며, 3주 정도 밖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옮긴 곳이 바로 베뢰아였지만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또 거기에까지 쫓아와 조직적으로 복음 전파를 방해한다. 그러자 홀로 아덴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이어서 고린도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갈 때에는 혈혈단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선교를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물질도 없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때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부부가 있었으니 그 부부가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던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홀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 글라우디오 황제를 움직여 이들 부부를 먼저 고린도에 보내었던 것 같다. 

 

5. 누가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누가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그들은 많은 이들이 아니다. 바로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이다. 누가 아시아와 유럽에 가서 복음을 전해 주었는가? 그 일에 사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헌신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과 바울을 돕는 몇몇 동역자들이 그러한 일을 수행한 것이다. 거기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자기 집에서 함께 일하게 된 바울을 보면서, 바울이 어떤 사람이며 어느 정도 준비된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각오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이내 바울을 돕기로 마음에 결정한다. 브리스길라는 그때 생각했을 것이다. "왜 내가 굳이 남편을 따라 이곳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는가? 왜 나의 남편이 그 많은 직업 가운데 텐트를 만드는 일이었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으며, 왜 자신이 지금 이런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일평생 바울을 돕는 협력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이들 부부는 바울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었으며,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 줄 수 있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들 때문에 전도 사역자는 행복하다. 외롭지 않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기쁘게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2022년 12월 0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6)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죽은 이방인들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행17:22~31)_2022-12-06(화)

https://youtu.be/OrLpBBKwlP8 [혹은 https://tv.naver.com/v/31442110 

 

1.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는가?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을까? 있다. 그런데 개인적인 순서는 없어도 민족적으로는 그 순서가 있다. 그것은 먼저는 유대인이요 이방인이 나중이라는 것이다(롬1:16~1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한 아담이 범죄한 후에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자의 씨(후손)에서 구원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3:15). 그런데 이러한 여자의 씨(남자)는 반드시 남자의 혈통과 여자의 태를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다. 여자의 태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주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한 혈통만큼은 보존해 주셨다. 그 혈통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셋으로 이어졌고, 10대에 가서는 노아에게 그리고 20대에 가서는 아브라함으로 이어졌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다시 야곱을, 야곱은 12아들을 낳았는데, 메시야 혈통은 넷째 아들 유다로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윗왕이 태어났다. 다윗왕은 아브라함의 13대손이다. 그런데 다윗왕의 손자 대에 가서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이에 남유다(2개 지파)와 북이스라엘(10개 지파)로 나눠진 것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여 혼혈족이 되어 버렸지만, 남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했어도 혈통적인 순수성을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였다. 그리고 이어 다윗왕의 20대 후손까지는 왕 노릇을 했지만 이후 끊겼고 드디어 다윗왕의 29대 후손으로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마1: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들을 먼저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오셔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실 때에 맨 처음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고 하셨다(마10:5~6). 그리고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은 먼저는 유대인에게 주어질 것이며 이어서 나중에 이방인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롬1:16~17). 그러므로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는 대부분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주어진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2.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방인들은 전부 구원받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방인들은 하나도 구원받지 못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혹은 저렇다고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나 복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데, 이들이 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못 들어서 못 믿었던 것을 두고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한 경우라면 그는 응당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류는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듣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지옥에 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따로 있지 않을까 한다.

 

3.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다른 심판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을 거부한 자들은 응당 심판받고 불못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자들에 대해서까지 "당신은 복음을 믿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자들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있는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몇 가지 말씀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적어도 두 번 이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것은 행14:16~17에 나온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행14:16~17)"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길들을 가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셨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누군지를 그들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나오는데, 둘째는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때였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관대하게 보아주었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 그렇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관대하게 보아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우상을 숭배하고 살았던 죄를 회개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과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자연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그가 믿었는가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기록된 도덕법들을 준수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은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하셨다고 언급하였다(롬1:19~20).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비록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무엇을 행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느 정도 도덕적 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롬2:14~15).

롬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러므로 자연만물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양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누구든지 어느 정도 만물의 창조주이며 그것들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양심을 통해서 도덕률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믿고 지킨 자들은 그들에 대한 다른 심판 기준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5.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인 중에서도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인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살았지만, 자연만물의 계시와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어느 정도 도덕을 지키며 살아왔던 자들 중에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러한 자들 중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천지창조 이후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성경이 단정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세상의 기초)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렇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로 치자면, 한 분 하나님과 오실 메시야를 믿었던 유대인들 그리고 신약시대로 치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서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만물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고 도덕을 지키며 살았던 자들 중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이순신 장군(A.D.1545~1598)이나 세종대왕(A.D.1387~1450) 그리고 서양 사람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나 플라톤(B.C.427~347) 그리고 소크라테스(A.D.470~399) 같은 분들은 분명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다 지옥에 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불신자들이 이들의 구원 문제를 물어오면, 그러한 시대에 살았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라.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이제 예수님을 믿어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사람이 꼭 되자고 전도하자. 

 

2022년 12월 06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5) 아덴 사람들은 트인 자들이었지만 왜 소수만 믿었을까?(행17:16~34)_2022-11-25(금)

https://youtu.be/OSrpjgk2s9I  [또는] https://tv.naver.com/v/31249902

 

1. 바울이 베뢰아 다음으로 전도하러 간 도시는 어디였는가?

  바울이 베뢰아 다음으로 전도하러 간 도시는 '아덴(아테네)'이었다. 아덴은 고대 그리스의 수도이자 아가야 주에 속한 아주 큰 도시로서, 거기에는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고,아고라(저자) 광장도 있었으며, 아레오바고(시민 공개법정)도 있었다. 바울은 당시의 최고의 학문과 철학의 도시였던 아테네에 전도하러 간 것이다. 

 

2. 바울이 아덴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바울이 아덴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은 갖가지 우상들이었다. 사실 당시 아덴에는 300개의 공식화된 우상이 있었고, 3만 개의 신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우선 회당부터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울은 유대인들과 경건한 개종 이방인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저잣거리(장터)에도 나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바울은 거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그때 복음을 들었던 자들 중에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도 있었다. 바울은 이들에게도 예수님과 부활 복음을 전한 것이다. 

 

3.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바울은 어떤 사람으로 보였는가?

  그리스의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이 새로운 신을 전하는 사람 쯤으로 알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바울이 전하는 말에 매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을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법정)에 세웠다. 그리고 그의 말을 차근차근 들어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4. 아레오바고의 연설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바울이 그날 아레오바고에서 했던 연설은 너무나 잘한 연설이다. 한 마디로 명설교였다.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분석해 보더라도 바울의 설교는 탁월한 설교였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가 아레오바고에 모였던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은 바울이 하는 말을 듣고 그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단지 몇몇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예수님을 믿었다.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가 있었고, '다마리'라고 이름하는 어떤 여인이 있었으며, 다른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5. 바울의 위대한 설교에 비해 왜 회심자는 적었는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바울의 설교는 사실 명설교였다. 하지만 바울의 설교가 명설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왜 바울의 명설교를 듣고도 아덴에서는 회심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첫째, 아덴 사람들의 지적인 우월감과 교만 때문이다. 아덴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학문을 다 섭렵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적어도 300~400년 동안 철학을 비롯한 학문만을 연구해 왔기에,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학문을 다 통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참된 복음을 들으면서도 바울이 전하는 말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둘째, 아덴 사람들이 다신론적 신관을 지녔기 때문이다. 당시 아덴 사람들은 무수한 종류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으며, 또한 아덴의 도시 안에는 수많은 신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한 신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 아래에 여러 신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들은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또 새로운 어떤 신을 찾아냈구나 하는 정도로 이야기가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모든 것을 섭리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보내 주신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다신론적인 신관을 가진 그들에게 홀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확실한 복음을 들려주었지만 그들 중에 믿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와 그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와 종교관도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상자의 마음이 지적인 우월 의식과 더불어 교만으로 가득차 있다면 복음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신론적인 종교관을 가진 자에게는 강력한 능력의 복음이라도 그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을 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2022년 11월 25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4) 복음전도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행17:10~15)_2022-11-24(목)

https://youtu.be/UFYJ3vm6Eig  [또는] https://tv.naver.com/v/31043081

 

1. 복음이 전파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2가지 반응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2가지 반응은 첫째로, '아멘'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준비된 영혼들이며, 기도가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둘째로,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복음 전도자를 핍박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으로 사탄의 방해이며, 기도가 부족할 때 더욱 많이 나타난다. 

 

2. 복음이 막히는 2가지 경우는 무엇인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복음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두고 무조건 사탄의 방해만을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복음이 막히는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경우다. 예를 들어, 바울이 무시아의 드로아에서 복음을 비두니아로 전파하고자 하나 계속해서 막혔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서였다(행16:7). 그러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주님이 원하는 방향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기도로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 하나는 사탄이 막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다시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였지만 사탄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8)" 이런 경우도 있는 것이다. 복음 전파 방해의 영이 유난히도 많이 역사하는 지역이 있는 것이다. 이때도 역시 주님께 기도하되 복음 전파의 방해의 영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복음 전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3.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나야 했는가?

  데살로니가는 유난히도 유대인의 방해가 많은 지역이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는 전도비를 충당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때 바울은 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의 설득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저잣거리의 불량배를 동원하여 바울을 체포하려고 시도하였다. 다행히도 바울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 바울이 없을 때에 들이닥쳐, 바울과 실라는 그들의 손에 붙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자 화가 난 유대인들이 바울이 기거하고 있는 집의 주인인 야손을 붙들어가고 말았다. 보석금을 받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들의 위협은 대단했다. 그러자 밤을 이용하여 믿는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몰래 보내야 했다. 결국 신상의 위협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베뢰아'였다. 

 

4.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바울이 도착한 다음 도시는 '베뢰아'였다. 그런데 베뢰아에도 역시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좋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 복음이 정말 성경 기록에 나와있는지 없는지를 날마다 성경을 열어서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확실히 믿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믿음은 처음부터 견고했다.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복음을 베뢰아에 전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곳까지 와서 선동하려 했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그리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또한 헬라의 귀부인들과 적지 않은 남자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복음 전파를 방해하려 했을 때에 바울은 베뢰아 형제들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의 배웅을 받고 아덴으로 떠났다. 이때 바울은 먼저 베뢰아에서 가까운 바다까지 갔지만 실라와 디모데를 거기에 남겼다. 그리고 혼자 '아덴'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아덴까지 배웅했다는 것이다. 사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약 320Km나 떨어진 먼 곳인데, 그들의 배려는 남달랐던 것이다. 그들은 말씀도 열심히 받고 상고한 뒤에 한번 믿었으면 확실히 믿는 족속이었지만 또한 한번 자신과 관계되는 일에 대하여서는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5. 복음 전파자는 어떤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의 바울의 복음 전파 상황을 지켜보면서 복음 전파자는 어떠한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 전파의 방법을 어떤 한 가지 것만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에서는 본인이 직접 핍박을 당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의사 누가를 그곳에 남겨서 그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렇지만 데살로니가에서는 좀 다르게 대처했다. 거기에 워낙 전도 방해의 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곳을 먼저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에 디모데를 보내 그곳 형편을 파악하게 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적합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인 것이다. 그리고 베뢰아에서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해 그곳을 급히 빠져나왔지만 바울은 그곳에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서 그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렇다. 복음 전파의 방법은 이처럼 다양한 것이다. 자신이 그곳에 끝까지 남아서 핍박을 받아가면서 복음을 전파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사람을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 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복음 전파가 막힐 때에는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아니면 사람의 역사인지를 구분하여 거기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복음 전파의 길이 막힐 때에는 다른 방법과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로 복음 전파가 막힐 때에는 우선 그곳을 빠져나와야 하겠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형제들에게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각 지역과 사람들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상당히 감정적이고 선동적이었다. 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침착하고 양반같아서 복음이 성경에 나와있는지를 꼭 확인해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번 믿었으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그렇다. 복음을 전파할 대상이나 지역이 이처럼 사람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거기에 맞는 대처법을 통하여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 

 

 

2022년 11월 24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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