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1) 요한의 세례 주 예수 이름의 세례 그리고 성령세례의 차이(행19:1~7)_2022-12-14(수)

https://youtu.be/wNuEujrs1bY  [혹은 https://tv.naver.com/v/31818142 ]

 

1. 에베소교회에서는 어떤 세례가 베풀어졌는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만났던 에베소교회에서는 3가지 세례가 베풀어졌다. 먼저는 아볼로에 의해서 '요한의 세례'가 베풀어졌고, 이어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주 예수 이름의 세례'와 '성령세례'가 베풀어졌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으며,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세례를 강조하고 있지만, 당시 에베소교회에서는 3가지 세례가 전부다 베풀어진 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요한의 세례'라 함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를 가리키는데, 세례 요한이 죽게 되자 그를 믿고 따르는 후계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를 가리킨다. 특히 요한의 세례는 세례 중에서도 '회개의 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서(행19:4, 막1:4),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죄사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자 점차적으로 요한의 세례는 교회 가운데서 사라졌다. 

 

3.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베풀었던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는 어떤 세례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는 세례를 가리키는데,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거나 혹은 육체 내지는 사탄 마귀가 주인이었던 자가 이제는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자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 예수 이름의 세례'는 이전의 자기 자신 곧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으로 다시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받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롬6:3~4). 고로 사람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게 되며, 새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은 뒤에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28:18~20).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4. '성령세례'란 어떤 세례인가?

  성령세례는 사람이 주는 세례는 아니다. 성령세례는 주 예수께서 주시는 세례이기 때문이다(마3:1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다(마3:11~12). 여기서 자기보다 능력이 크신 분은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고로 '성령세례'는 주 예수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런데 '성령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견해로서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세례를 의미하기도 한다(고전12:13). 다시 말해,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어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세례'와는 조금 다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말씀을 듣고 있는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는 성령께서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위에 부어지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이 방언을 말했고, 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아마도 방언으로 찬양했던 것 같다)(행10:44~46). 그러자 베드로는 자기와 함께 온 신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한다.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이들은 이미 성령을 받은 상태이고 또한 성령의 은사까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베드로는 '성령세례'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교회에 돌아가서 보고할 때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행11:15~18). 

행11:15~18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렇다.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는 이것이야말로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은사)이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왜 주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가? 그것은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내려오심으로 능력을 받고 또한 은사를 받아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행1:8). 성령의 강력한 체험과 은사가 나타나야 비로소 성도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요한의 세례, 주 예수 이름의 세례, 성령세례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구원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렇다. '요한의 세례'는 한 마디로 "나는 죄인입니다"를 인정하는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요,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는 "나는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령세례'는 "나는 이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아서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라고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2가지의 세례를 받고 있다. 하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마28:19). 이때 성도는 물로 세례를 받으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 주 예수님만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섬기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믿는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믿을 때에 혹은 믿고 난 후에 성령세례도 받게 된다. 이것은 성령이 그에게 쇄도하여 그 사람의 위에 머물러 있음으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주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것들은 일종의 의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주 예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형식이 구원의 문제를 결정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신은 할례를 받았으니 언약 백성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언약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성스러운 주님의 명령이므로, 이것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만방에 공포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무시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신랑 신부가 새롭게 한 가정을 시작하려 할 때에 결혼식을 올리고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혼인 신고를 하고 살게 된다면 그들이 부부인 것은 맞지만, 기왕이면 혼인 예식을 통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부부가 된 것을 알리고 살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14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0) 에베소 성도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 성령의 세례(은사)를 받지 못한 것인가?(행19:1~7)_2022-12-13(화)

https://youtu.be/U1aIVXorgLw [혹은 https://tv.naver.com/v/31818092 ]

 

1. 에베소의 성도들은 무엇을 못 받은 것인가?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지나서 드디어 에베소에 도착한다. 그런데 에베소에는 이미 '아볼로'라는 사역자가 다녀간 뒤였다. 그런데 아볼로는 사람들에게 요한의 세례까지 전파했고 요한이 외쳤던 그리스도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언한 뒤 고린도에 가고 없을 때였다(행18:25,28). 그 결과 에베소에는 아볼로로 인하여 12명쯤 되는 성도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바울이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눈에 보기에 그들에게는 뭔가 부족한 듯이 보였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들은 믿을 때에(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행19:2). 그렇다면 에베소의 성도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어떤 세례를 받았는지를 물어본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할 때에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오신다. 그러자 그들이 방언들을 발언하게 되었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12명의 에베소의 성도들은 요한의 세례까지 받은 상태에 있었으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2.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은 것인가 성령세례(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인가?

  바울이 12명의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성령이 그들 위에(upon) 오셨다"(행19:6). 그리고 그들이 방언들을 발언하고 있었고 그리고 예언도 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다. 바울의 안수는 성령의 은사의 전이가 일어나게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에베소 성도들이 그날 안수를 받음으로 취하게 되었던 것은 성령 그 자체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 곧 은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들 위에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영안을 열어서 보면, 확실히 은사들은 사람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령의 은사들은 믿는 자들의 머리에 붙어 있기도 하고 가슴에 붙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손과 발에 붙어 있기도 한다. 이는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몸 위에 내려와서 달라붙기 때문이다. 

 

3.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에베소 성도들은 과연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기 전에 과연 에베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개역성경만을 가지고 보면, 그들은 요한의 세례까지 받았고 더불어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아서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소개했던 분은 예수님이니 그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성경 원문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며, 요한이 소개했던 예수님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데, 다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헬라어 원문으로 잠시 말씀을 살펴보자. 

행19:3~5 또 그가 말하였다. “그런즉 여러분들은 어떤 것 안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말하였다. “요한의 세례 안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4 그런데 바울이 말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베풀었습니다). 그가 그 백성에게 말하면서, 그들이 자기 뒤에 오고 있는 분 안으로 믿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은 예수 안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5 그런데 그들이 들은 후에, 주 예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 곧 회개의 세례를 받았고 주 예수님도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베푼 것일까? 그것은 요한의 세례는 자신의 죄를 씻는 세례라고 한다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자신의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예수님을 믿어서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의 세례였기 때문이다. 

 

4. 왜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이 오기 전에 성령의 세례(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에베소 성도들은 회개도 했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당도하기 전까지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으며, 더불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 곧 성령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선물로서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복음을 들어도 어떠한 복음을 듣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왕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에는 제대로 된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5.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그리고 성령세례(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에 성령을 받는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라면 아무도 예수님을 주시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12:3).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그때에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신다. 그러면 그는 그때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의 생명책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주 예수님을 고백하는 순간에 일어나기도 하고, 조금 있다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에도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령이 위에 부어져 증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언제 믿는 자들에게 은사를 주시는가? 그것은 믿을 때에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나중에 일어날 수도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성도들과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가정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하지만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 성도들에게는 이것들이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에베소 성도들은 먼저 예수님을 믿었고 자기 안에 성령의 내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령의 세례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은 그저 믿음만 갖고 있었을 뿐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 곧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준 뒤, 성령의 은사를 전이 시켜 주는 안수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받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령의 은사의 하나인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2월 13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9) 평신도 선교사 부부와 성경학자 아볼로의 아름다운 만남(행18:18~28)_2022-12-09(금)

https://youtu.be/XnM7gpT8zNM

 

 

1.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어떻게 마무리했는가?

바울의 전도여행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마도 2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고린도 전도 사역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하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으며, 또한 주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며칠 혹은 몇 주간에 걸쳐서 머물렀지만 고린도에서는 무려 1년 6개월 동안이나 머물렀다. 왜냐하면 거기에 주님의 백성이 많다고 주 예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복귀할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잠깐 들른 곳이 바로 에베소다. 그런데 바울의 눈에 에베소는 놀라운 선교의 거점 도시로 보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수리아의 안디옥을 향하여 떠난다. 그래서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선교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이어 수리아의 안디옥에 가서도 선교 상황을 보고함으로써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한다.

 

2.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2차 전도여행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바울팀은 이제 얼마 안 있어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한다. 먼저는 1차 전도여행 선교지였던 남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거쳐서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에 이른다. 왜 바울은 에베소로 갔을까? 그것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를 떠나면서 그곳에 있는 형제들에게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행18:21). 그래서 약 6년간의 바울의 3차 전도여행(A.D.53~58)이 여기에서 시작되고 여기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3차 전도여행은 사실 전도의 관점에서 볼 때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 바로 그때였다. 왜냐하면 2차 전도여행까지 바울은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몰두하였으나,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에베소에 선교센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교사들을 훈련시켜고, 거기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3. 바울이 에베소를 향하여 오고 있었을 때 에베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바울이 남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거쳐서 에베소에 오고 있었을 때에 에베소에서는 역사적인 아름다움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성경학자 아볼로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볼로는 북아프리카의 거대 학문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석학이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웅변술도 뛰어났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행18:24).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부터 세례 요한의 세례까지 배웠고 세례 요한이 소개한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에베소에 와서 전한 말씀은 회개의 세례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소개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에베소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볼로는 안식일이면 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그때 회당 안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있어서 아볼로의 설교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한 일은 무엇인가?

그때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그들 부부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로부터 1년 6개월 동안 들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바울에게서 들었던 말씀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복음전도자였던 바울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 대해 거의 모든 말씀들을 다 들은 셈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볼로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길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모르는 것을 알아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자신들이 바울로부터 들었던 메시지를 그에게 그대로 들려준 것이다. 그렇다. 평신도라고 해서 성경학자를 가르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는 교회적인 직분이 주어진 시기가 아니었으며, 또한 누구든지 먼저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누구에게 말씀을 배운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말씀의 깊이와 높이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러 있을 때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말씀이 얼마나 체계적이며 뛰어난 말씀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을 듣고 배웠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대 성경학자인 아볼로를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아볼로는 대 성경신학자인데 어떻게 되어서 평신도 부부의 지도를 받아들였는가?

아볼로는 누구인가? 바로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바로 그 아볼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아볼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고전3:5~6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그를 자신의 동역자이자 고린도교회의 사역자로 소개했으며(고전3:6), 또한 디도서에서는 그를 율법교사라고 소개했었다(딛3:13). 그렇다. 아볼로는 학문의 도시이자 유대인들이 아주 많이 살았던 북아프리카의 최대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성경신학자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장막 만드는 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평신도 선교사 부부의 지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아볼로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는 자신보다 더 먼저 주의 길을 걸어가신 분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분에게서 배운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써 준 추천서를 가지고 고린도에 갔다. 그리고 바울의 뒤를 이어 고린도교회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랬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지도를 받은 후에 담대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더 확실하게 증거했으며, 공공연하게 유대인들을 논박하며 회당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2월 09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8)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7가지 이유(행18:4~17)_2022-12-08(목)

https://youtu.be/Au3g7PvimtA  [혹은 https://tv.naver.com/v/31813996 ]

 

1.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개척되었는가?

  고린도는 아가야 주의 수도이다. 인구 75만 명을 자랑하는 고린도는 도시 내에 2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는 해양도시였다. 그리고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신전 창기가 무려 1,000명이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도시는 향락의 도시였고 쾌락의 도시였다. 그런데 이곳에 바울이 전도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혈혈단신으로 고린도에 왔다. 또한 선교비를 본인이 벌어서 충당해야 했다. 그래서 천막 제조업을 하는 공장 같은 곳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공장의 주인 부부가 바로 바울의 최대의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다. 이들은 로마교회 성도였다가 고린도에 이주해 온 것인데,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접하고는 그가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집을 교회로 내어 준다(고전16:19). 그리하여 고린도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2.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바울의 1~3차 전도여행 가운데 단일 교회로서 가장 크게 부흥한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였다. 이때 고린도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내 큰 교회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총 7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그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물질로 바울의 선교를 후원해 주었기에 바울이 주간에도 일하지 않고 전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전18:2~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그들의 지원을 받기 전까지 바울은 주간에는 일을 해야 했고 안식일에만 회당에 나가서 전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도의 결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때문에 바울은 전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곧이어 마게도냐로부터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여 바울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고전18:6). 바울은 혼자 고린도에 왔다. 왜냐하면 아덴에서 바울은 실라를 빌립보에 보내었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보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고린도에서 셋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바울도 이제 자신의 기도의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니, 얼마나 힘이 났겠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3.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셋째, 비록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바울을 비방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던 유대교 개종자였던 디도라고 하는 유스도가 복음을 듣고는 자기의 집을 교회로 제공함으로서 예배 처소가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행18:7). 사실 디도라고 하는 유스도는 로마의 명문 가문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회당에서 율법 말씀을 듣다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변화되었으며, 이내 자기의 집을 이방인의 복음 전도를 위해 전초 기지로 내놓았던 것이다. 

  넷째, 특히 회당장 그리스보가 복음을 듣고 온 가족이 함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가 복음의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다(고전18:8).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를 훼방했지만 정작 회당장이 변화되어 바울의 복음을 듣고 개종한 것이다. 그러니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세례를 받게 된다. 이때 세례를 받은 자들로는 그리스보 이외에도 '가이오'(고전1:13)가 있었고, 스데바나 집 사람(고전1:16) 등이 있었다. 

 

4.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이유는?

  이어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다섯째, 이것이 아마도 제일 큰 이유 같은데, 그것은 주 예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면서 계속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고전18:9~10). 사실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유럽 대륙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마게도냐인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환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핍박을 받을 때면 계속 밀려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해야 했다. 즉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고난을 겪은 후 바울은 그 도시에서 쫒겨나다시피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었다. 그런데 거기는 유대인들이 아주 많아, 바울의 복음 전파를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그래서 베뢰아로 갔으나 거기까지 유대인들이 쫓아와서 방해하였다. 그러자 배타고 아덴으로 향했고, 거기에서 철학자들로 인하여 전도의 열매가 적자, 그는 이어 고린도로 이동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분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왜냐하면 고린도에는 주님의 백성이 될 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섯째, 그때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새로 부임해 왔는데, 이 총독은 고린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갈리오가 총독이 되자, 고린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를 불법이라고 하면서 그를 고소하였다. 하지만 갈리오는 종교 문제를 가지고 고소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종교 문제는 종교인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린도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이처럼 이방의 지도자들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5.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일곱 번째 이유는?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마지막 이유는 바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고전4:19~20). 사실 고린도는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퇴폐와 향락의 도시였다. 그러므로 웬만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많은 은사들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들의 무분별한 사용과 잘못된 사용을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서 바울도 많은 은사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바울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방언의 은사를 비롯하여, 방언 통역, 예언 그리고 병고침의 은사와 귀신을 쫓는 은사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 전파에 표적이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많은 결신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고린도교회는 전례없는 부흥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론만으로 전도한 것이 아니라 실제를 가지고 능력 전도를 행한 것이다. 

 

2022년 12월 08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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