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9) 왜 초기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을까?(행20:7)_2022-12-28(수)

https://youtu.be/gKQaVxqPWGY  [혹은 https://tv.naver.com/v/32115854 ]

 

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어느 요일에 모였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드로아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만 해도 주일은 쉬는 날(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때 바울은 어느 성도의 집 3층 다락방 안에 모여서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던 것이다. 

 

 

2. 안식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주일에 예배 모임을 가지면 안되고 꼭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이름하여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를 보면, 문제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구원론과 안식일 준수는 상당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대부분의 이러한 교리들이 다 엘렌 지 화이트라는 여사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엘렌 지 화이트 여사를 선지자라고 믿고 따른다. 이 여사는 안식교를 창시한 죠지 밀러(A.D.1782~1847)의 부인인데, 죠지 뮬러가 죽자 그 배턴을 이어 받은 자로서, 이 여사가 말한 것들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신뢰하며 따르고 있다. 사실 죠지 뮬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그때 오시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셨고 거기에서 천국에 들어올 자를 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름하여 '조사심판'이다. 안식교인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되면 결국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사심판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다. 

 

3.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구원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의 구원론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식일 준수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고, 계명(십계명)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특히 계명들 중에서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아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지만 계명들을 준수하지 못한 자는 조사심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생명(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조에')을 얻고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아무리 계명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뿐이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계명도 준수해야 구원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이다.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기 때문이다(마4:17, 요3:16, 롬10:8~9, 행16:31). 

 

4. 안식일에 관한 안식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안식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일종의 생명줄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주장을 모아서 살펴보면,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안식일은 폐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이미 폐지되었다(갈4:9~11, 골2:16~27, 호2:11, 히4;1,11). 둘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 자는 태양신 종교를 따라가는 우상숭배자여서 결국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도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초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제정하여,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강제로 일요일예배로 바꿨다는 것이다. 아니다. 초기 교회 중에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그것은 행20:7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여러 교부들의 어록과 초대 교회가 남긴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 강해 88강을 참고하기 바란다). 

 

5.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한 마디로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4, 골2:16~17). 안식일의 진짜 실체는 예수님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히4:11). 다시 말해, 구약에 주어진 안식일은 율법 중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야말로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은 완성되어졌다. 그리하여 폐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라는 것은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없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이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인데도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고 규정만을 내세워 사람을 정죄하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안식일)과 달과(초하루)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해(안식년, 희년)를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갈4:9~11).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 참된 안식과 평강을 이미 얻은 자들이 다시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할례, 안식일,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골2:16~17).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고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321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니 그날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편리하여졌기에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던 것이지,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요일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지, 일요일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또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8)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에 모였는가 주일에 모였는가?(행20:7)_2022-12-27(화)

https://youtu.be/-PhXsRzrhHU [혹은 https://tv.naver.com/v/31930661 ]

1.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언제 왔는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 수리아의 안디옥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던 중에, 바울은 잠깐 드로아에 들르게 된다. 그때 바울은 '그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하여 함께 모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주간의 첫날'은 어느 요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행20:7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안식일들의 첫[날]에'라고 되어 있다. 안식일은 주간의 일곱째 날로서 지금으로 치자면 토요일이므로, 토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두 안식일 가운데, 첫째 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날은 '주일'이라고 할 수 있다. 터툴리안의 제자였던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us, A.D.200~258)는 그의 편지에서 진술하기를 주의 날은 안식일 다음에 온다고 하였다. 즉 “그림자와 예식으로서 앞서 주셨던 성결 의식인 유대의 육체의 할례가 제8일에는 정중히 준수되었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진리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제8일 즉 안식일 다음인 첫째 날은 주께서 다시 부활하신 날이 되었으며 또한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신령한 할례를 베푸시니, 첫째 날이요 주의 날이니 모형 속에서 앞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형은 진리께서 오심으로써 끝이 난 동시에 신령한 할례가 우리에게 베풀어졌다”라고 했다. 그런데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에서는 이 날도 여전히 토요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첫째,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분명히 두 안식일들의 첫째 날이므로 토요일 다음날인 주일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드로아 성도들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 날이 당시에는 일하는 일요일로서, 낮에는 일을 해야 했고 밤에는 모여 집회를 했기 때문이다(행20:7~12). 바울이 떡을 떼려고 곧 성찬식을 하고 하려고 드로아에서 그날(주일에) 낮이 아닌 밤에 저녁 집회를 연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하루 종일 일하고 온 유두고라 하는 청년(아마도 '종'이었을 것)이 지쳐서 졸다가 그만 3층 난간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 그날은 일하는 날로서 당시에 일요일 곧 주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일 저녁에 모인 것이다. 

 

2. 안식교에서는 왜 개신교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하지 않고 있는 교단이 하나 있는데, 그들은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단이다. 그들은 만약 성도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사탄의 표시인 666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상숭배의 표를 받은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일은 태양신의 아들의 탄생일로서, 이 날(주일)을 지키면 태양신교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은 요한계시록 12:17의 말씀에 그것이 나와 있다고 한다.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마지막 때에 용이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일컬어지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핍박하게 될 것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자'이자 그리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만이 참 성도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정말 그러한 뜻일까?

 

3. 안식교에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안식교에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이란 곧 십계명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약에 들어와서 모든 의식법은 다 폐지되었지만 도덕법인 십계명만큼은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일법은 계속해서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은 옳은 것인가? 이것이 맞는 해석인지에 관하여 우리는 2가지로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는 그것이 옳은 해석인지 성경적으로 풀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 실제 초기 교회 성도들도 역시 역사적으로 안식일에 모여 예배드렸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답이 나올 것이다. 첫 번째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오늘은 두 번째부터 살펴볼 것이다. 

 

4. 초기 교회 성도들은 과연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가? 아니면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가?

  초기 교회 성도들이 언제 예배드렸는지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역시 사도행전인데, 그중에서 오늘 읽었던 사도행전 20:7절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사도행전 20:7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행20:7 그런데 안식일들의 첫날 안에서, 우리 자신들이 빵(떡)을 떼기 위하여 모이게 된 채 있을 때에, 바울이 이튿날에 떠나고자 작정하고 있으면서, 그가 그들에게 강론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한밤중까지 말씀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렇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예배드렸다는 것은 사도행전의 기록 뿐인가? 아니다. 이 외에도 초기 교회 교부들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첫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A.D.35~107)은 "안식일은 이제 성수되지 아니하고, 대신 저들은 이제 주의 날에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한다"고 하였다. 둘째, 디다케(A.D.100년경)에서는 제3부 14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성찬)을 나누고 감사드리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예배)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십시오". 이는 안식일의 다음날인 일요일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성도들이 떡을 나누고(성찬식) 제사(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다. 셋째, 저스틴(A.D.100~163)은 제1변증서에서 "주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함께 모여 시간이 허락되는 만큼 사도들의 기록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낭독자가 낭독을 마치면 사회자가 가르치며 이러한 말씀을 본받아 살기를 권한다. 그리고 사회자가 같은 방법으로 자기 능력에 따라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바나바의 서신(A.D.130년경) 제13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8일째 되는 날 즉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고,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 뒤에 하늘로 올라간 그날을 기꺼이 지키는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5. 안식교의 구원론은 정말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도 믿고 십계명도 지켜야 하는가? 즉 예수님도 믿으면서 안식일도 지켜야 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결국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2가지 것을 만족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 천국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녀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와서 내주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에 지었던 죄들은 예수님의 피로 탕감받게 되며, 그때 이후에 짓는 죄들은 자백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 문제는 죄사함과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십계명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십계명의 준수가 우리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지도 아니하며, 생명을 주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십계명도 지켜야 한다는 안식교의 구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범죄는 여전히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생기는 것이므로,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더 이상 죄짓지 않기 위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성령께서 우리가 십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로 안식교의 구원론은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22년 12월 27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7)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과 드로아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행20:1~12)_2022-12-23(금)

https://youtu.be/O11G4EEkXxA  [혹은 https://tv.naver.com/v/31902527 ]

1. 그동안 바울의 전도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바울은 적게는 3번, 많게는 5번 정도의 전도여행을 했다. 많게 5번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로마로 이동하면서 전도한 것(제4차 전도여행)과 로마에서 전도한 것(제5차 전도여행)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도여행 가운데 바울이 사용했던 전도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4가지 정도인데, 첫째, 그는 아는 사람에게 먼저 전하는 방식을 취했다. 바울이 이방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는 했으나 그가 항상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유대인의 회당'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찾아가서, 그들에게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이 예수님입니다"라는 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둘째, 한 번 세운 교회는 꾸준히 관리를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교회의 현황을 들은 후 바울은, 자신이 개척했던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자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고, 사람을 파송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본인이 직접 재방문하기도 하였다. 셋째, 선교센타를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전략으로서, 건물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 와서 훈련을 받아 각 지역으로 파송하는 전략이었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넷째, 적대자들을 만나게 되면, 주님의 지시가 따로 없을 때에는 그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소극적인 면인데, 바울은 이러한 소극적인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고 오로지 적극적인 일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2.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를 떠난 이후 어디를 다녔는가?

  사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있어서 핵심 지역은 '에베소'였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선교센타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의 소요 사태로 인하여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 곧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로 이동하여, 자신이 2차 전도여행 때에 개척했던 교회를 다시 돌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헬라 곧 아가야 지방으로 갔다. 그리고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면서, 고린도후서를 집필하였고, 로마서를 써서 보낸다. 그리고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복귀하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것을 듣고 계획을 수정한다.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이동한 후 마게도냐를 지나서 배타고 드로아에 상륙한 후, 거기에서 밀레도를 거쳐 수리아의 두로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두로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다. 

 

3.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는가?

  바울은 이미 에베소에 있을 때부터, 마가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행19:21). 그는 이제 로마를 거쳐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3차 전도여행의 종착 지점으로서 그가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개척했던 이방 교회로부터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각 교회에서 직접 자신이 헌금을 받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각 지역의 교회의 대표자들을 대동하여 그들이 직접 예루살렘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가게 된,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총 7명이었다. 베뢰아교회에서는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교회에서는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교회에서는 가이오, 루스드라교회에서는 디모데, 아시아 곧 에베소교회에서는 두기와 드로비모가 있었다. 이런 교회에서는 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 준 모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받은 영적인 은혜를 물질으로나마 보답하고 감사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4. 바울이 드로아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 계획을 들었던 바울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하여 돌아가는 방식으로 계획을 수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도착한 곳은 '드로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들을 이제는 두 번 다시 와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므로 드로아는 바울이 그 다음날 곧바로 떠나야 될 장소였지만, 그는 드로아의 어떤 3층집에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라도 더 말씀을 전달하려고 강론을 밤중까지 이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두고'라고 하는 어떤 청년(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온 것이다. 캄캄한 밤중이라 등불을 많이 켜두었고 그래서 생겨난 탁한 공기 때문에 이 청년이 창가로 갔고 그곳에 걸터 앉아 있었는데,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했는지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삼층에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가서 일으켜 세워 보니 그는 죽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이 내려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린 후에 자신의 가슴에 그 청년을 껴앉고 기도하여 주님께 그 청년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하나님의 긍휼로 이 청년은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나게 된다. 물론 몸의 부서진 뼈들도 다시 다 달라붙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바울은 날이 새도록 떡을 떼고 그들과 이야기한 후에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 다음날 사람들(아마도 청년의 가족이나 친구들이었을 것)이 그 청년을 데리고 교회에 나온다. 그러자 교회가 적지 않게 위로를 받는다. 

 

5. 왜 하나님께서는 이 죽은 청년을 살려주었는가?

  그렇다면 왜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이 청년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살려주시고 그 몸을 치유해 주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이 청년이 살아나게 된 3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야로 수고하며 애쓰는 바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7절,11절). 바울은 조금만 복음을 전해 주고 떠나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혼신을 다해 밤을 지새워 가면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한 바울의 열정이 여기에 들어 있다. 고로 만약 그 청년이 죽는다면 바울의 열정이 허사가 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죽은 청년이지만 살려주셨던 것이다. 둘째, 낮에 일함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어보겠다는 사모함으로 집회에 나온 청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다(9절). 아마도 이 청년은 종이었을 것이다. '청년'이라 쓰인 단어가 '종,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정컨대 15세 전후의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복음을 사모하여 그 집회 장소에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주신 것이다. 셋째, 교회 공동체를 위로하여 힘주시기 위함이다(12절). 왜냐하면 위대한 사도가 와서 집회를 했는데 사람이 죽어서 집회가 끝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랬었는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청년을 살려주셨다. 그리하여 이 청년을 알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 청년을 다시 교회에 데리고 나옴으로 인하여 교회는 위로를 받았고 큰 힘을 얻게 되었다. 

 

2022년 12월 2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6) 두란노사역의 부흥에 따른 사탄이 거센 공격은 어떻게 끝났나?(행19:20~41)_2022-12-22(목)

https://youtu.be/B2LLJiF93bE [혹은 https://tv.naver.com/v/31818473 ]

 

1. 두란노 사역이 힘있게 부흥하자 일어난 에베소의 은장색의 소동은 무엇이었는가?

   선교센타 사역으로 인해 에베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자, 에베소에서 은으로 아데미신상 모형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데메드리오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우상 모형을 사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신상 모형을 제작해 기술자들과 함께 적지 않은 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이 회개함으로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일이 일어나자, 우상을 사는 이들이 전에 비해 훨씬 적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른 기술자들과 그러한 영업을 하는 자들을 모아, 선동을 한 것이다. 그가 그들을 선동할 때 사용했던 3가지 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큰 여인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아데미의 위엄도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데메드리오의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위대하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면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2. 왜 사람들이 우상 모형을 사는 일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에베소에 바울이 들어오기 전까지 에베소 도시는 아시아에서 큰 아데미 여신 및 제우스 신의 신전지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행19:35). 그런데 바울이 들어와서 주 예수님을 전파했다. 그러자 귀신들도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갔다. 특히 예수님을 믿지도 않은 어떤 유대인이 대제사장을 사칭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였다. 그들은 스게와와 그의 일곱 아들이었다. 그런데 악한 영이 일곱 아들 가운데 두 명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눌렀다. 그러자 그들이 옷이 벗겨진 채 몸이 상하여 도망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귀신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알고 있으며, 바울과도 아는 사이인데, 너는 누구냐"고 말함으로, 바울의 영적 권세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에베소에 퍼졌고 에베소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모두가 이 일을 듣고 두려워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자신의 죄를 아뢰었으며, 특히 마술을 하던 사람들도 자신의 책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으니 은 오만 정도가 되었다. 이는 값으로 따지자면 약 25억 원 정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베소 도시가 갑자기 주 예수님을 믿는 도시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상 모형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으며, 그것을 구입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데메드리오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3. 데메드리오 일행이 저지른 악행은 무엇이었는가?

  데메드리오는 자신의 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자 이 원인을 바울에게 돌리고는, 바울을 붙잡아 그들을 추방하든지 감옥에 처넣든지 아니면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마침 두란노 서원에는 바울이 없었고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있었다. 그러자 무리들은 이 두 사람을 붙잡아서 연극장(원형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위를 한 것이다. 그러자 이 소식을 바울이 듣는다. 그러자 그는 연극장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를 말렸다. 또한 이미 복음을 듣고 바울의 친구가 된 아시아의 관리들도 바울을 말렸다. 그때였다. 유대인들이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작금의 소요 사태는 자기들 곧 유대인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최근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일으켜진 것을 알리려고, 알렉산더를 맨 앞으로 내보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렉산더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위대하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치고 있었다. 

 

4. 이들의 소요는 어떻게 진압되었는가?

  그때였다. 이 도시의 책임자인 서기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3가지 말로 이 집회가 불법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킨 후 무리들을 해산시켰다. 첫째, 에베소는 예로부터 위대한 아데미 여신과 제우스의 신전지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둘째, 이들은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한 것도 아니고, 여신 아데미를 비방한 것도 아니다. 셋째, 만일 고발할 것이 있으면 정식으로 고발하여 민회에서 이를 결정하게 하라. 결국 모임은 유야무야되고 사람들은 흩어지고 만다. 그렇다. 바울이 언제 아데미 여신을 비방하거나 그것을 제거하자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다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행19:26). 고로 데메드리오의 집회는 불법 집회가 되고 말았으니, 서기장이 그 모임을 해산시켜 버린 것이다. 

 

5. 이 사건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돈벌이 때문에 화가 난 어떤 업자의 소요 사태로만 볼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 성에서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높은 계급에 있는 악한 영들을 화나게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스게와의 일곱 아들 사건으로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귀신은 예수보다 그리고 바울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수많은 마술쟁이들이 자기들이 점치는데 사용하던 책을 불사르고 최고의 신인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데미 신을 빙자하여 활동하고 있는 최고의 악한 영이 마술하는 사람들의 귀신들과 더불어 에베소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지 상상해 보라. 그래서 악한 영과 귀신들의 분노가 밖으로 표출된 사건이 이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 악한 영들이 모여 총공세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바울 일행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 돈벌이를 못하고 있는 데메드리오를 이용하여 신상 모형 판매자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우상숭배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우상과 귀신들이 제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사탄 진영에서는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에베소에 있는 악한 영들이 총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울 일행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회개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발적으로 우상숭배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권세를 가진 악한 영들이라 할지라도 바울 일행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서기장의 출현으로 인하여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렇다.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회개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자꾸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도 반항하고 총반격을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로 귀신을 쫓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악한 영들이 힘을 잃어버린 채 떠날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그들이 믿는 이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회개하는 일을 먼저 하기를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질서를 바로잡는 최고의 방법이니까 말이다. 

 

 

2022년 12월 22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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