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2) 사도행전, 누가 왜 썼는가?(행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G9RWr5MRo  [혹은 https://tv.naver.com/v/27209983 ]

 

1. 사도행전의 저자에 대한 외적인 증거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서 '사도들'이라 함은 1~12장까지는 '베드로'를 지칭하는 것이요, 13~28장까지는 '바울'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전반부(1~12장)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전파가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13~28장)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전파가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쓴 것인가 아니면 바울이 쓴 것인가? 그런데 둘 다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까지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저술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찬찬히 읽어보면, 요한복음도 누가 썼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들어있고, 사도행전도 역시 누가 썼는지 그 힌트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성경 외의 기록이나 자료들 가운데 익히 누가 썼다고 하는 것이 있을까? 있다. 그것은 교회사적인 증거와 고고학적인 증거들인데, 먼저, 교회사적인 증거를 보면, 초기 교부들이 공히 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 교부들이었던 이레네우스(A.D.130~202)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150~215) 그리고 터툴리안(A.D.155~240)도 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썼다고 전해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한 세대가 지난 후 기독교인들의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A.D.260~340)도 다음과 같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저자였던 누가가 썼다고 전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 외적인 증거를 보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쓴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3권 제4장 '사도들의 초대후계자'에서 유세비우스는 "누가는 안디옥 태생의 의사로서,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나머지 사도들과도 잘 알고 지냈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서 얻은 영적인 치유 기술의 개요를 두 권의 영감된 책으로 남겨주었는데, 그중 한 권이 '누가복음'이다. 그는 이 복음서에서 자신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기록하였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을 따라갔다고 증언하였다. 또 한 권의 저서는 '사도행전'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가 들은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목격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2.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내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군지 알려주는 내적인 증거는 없는가? 있다. 성경 안에 증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과 바울서신의 기록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요약하면 첫째,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행전이 자신의 두 번째 기록인 것을 밝혀놓고 있다는 사실이다(행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그렇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데오빌로'라는 각하(고위관리)에게 먼저 써서 드린 글이 있다고 사도행전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글은 바로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누가복음의 서두가 이렇게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눅1:1-4)" 그렇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가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는 먼저 누가복음을 써서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냈으며, 그리고 이어서 사도행전도 써서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꼭 '누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로, 그 증거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 속에 나온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자. 

 

 

3. 사도행전의 저자였던 누가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와 기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럼, 사도행전의 저자였던 '누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소아시아의 에베소의 입구에 가 보면, '누가의 묘'라는 것이 있다. 그럼, 어떻게 되어서 누가의 묘가 에베소 입구에 있게 된 것일까? 우선 역사적인 기록들을 보면, A.D.60~62년 어간에 누가는 로마의 바울 곁에 머물면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으며, 이어 A.D.63년경에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약간의 시간적인 오차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A.D.67년이나 혹은 68년경에 바울이 네로 황제의 의해 목이 잘려 순교한다. 그러자 그후에 누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의 순교이후 누가(Loukas)는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 도시의 우상숭배자들에 의해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때 그의 시체를 에베소에 있는 사도 요한이 가져다가 에베소 도시 앞에 매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덤이 있었는데, 그 무덤이 누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석같은 것안데, 거기에 보면, '십자가' 표시와 더불어 '황소'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무덤의 주인이 누가라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4.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헬, 루카스)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위에서 잠깐 살펴보았지만, 교회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누가를 '안디옥 출신의 의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의사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역시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골4:14). 그리고 초기교부였던 이레네우스(A.D.130~202)도 누가를 '바울의 동역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레네우스는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기록하였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5권 제8장)고 말했던 것이다. 고로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도 누가가 의사였으며, 바울의 동역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안디옥 출신이라는 것은 성경 외의 기록에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교회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가 그를 안디옥 출신의 의사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터키 성지순례를 가서 보면, 가이드들이 에베소에 있는 누가의 묘 앞에서 누가에서 대해 소개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성지순례의 가이드에 따르면, 누가는 원래 로마의 판사였던 '푸리스쿠스'가 부리는 종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누가의 아버지 '엔자'와 어머니 '이리스' 모두가 푸리스쿠스의 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엔자의 헌신적인 죽음을 보고는 '푸리스쿠스'가 엔자와 이리스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누가는 프리스쿠스의 아들인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딸 '루블리아'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루불리아'가 그만 말라리아 열병으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간 원수와 싸우기 위해 누가가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결국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디옥에서 바울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바울의 선교를 도왔다고 한다. 만약 이러한 진술이 바른 것이라면, 우리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여자들과 소외되고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베들레헴의 목자들의 아기 예수 경배(눅2:8~20), 유대인들로부터 개 취급받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15~37),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세리의 기도(눅18:9~14), 가버나움까지 따라 와서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들의 이름들(눅8:2~3) 등은 누가복음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기사들이기 때문이다. 

 

5. 사도행전의 저술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누가는 누가복음 외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인가? 그것은 누가복음의 기록목적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의사 누가는 누가복음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동행하여 따라다닌 채 있는)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교육받았던)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알도록 하기) 함이로라(눅1:3-4)" 그렇다. 누가복음은 시작부터 예수님의 목격자가 되었고 말씀의 사역자가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을 그대로 저술하려고 붓을 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정확히 기록하여서 데오빌로에게 전해주려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고, 사도행전은 두 사도였던 '베드로와 바울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전혀 불순물이나 거짓말 등이 전혀 들어가지 않게 하여서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복음사역자들과 복음을 알기를 원하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성령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자 두 권의 책을 신중하고 그리고 철저하게 고증을 거쳐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은 곧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자를 만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복음서이자, 베드로와 바울의 신실한 복음전파 행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022년 06월 07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1) 사도행전, 어떤 책인가?(01)(행1:1~11)_2022-06-06(월)

https://youtu.be/AnUItRfQzko  [혹은 https://tv.naver.com/v/27209740 ]

 

1. 책 제목이 들려주는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

  사도행전은 헬라어로 '프락세아스 아포스톨론' 즉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어떤 행적인가?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후계자가 되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기록한 책이다. 한 마디로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인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단 두 사도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며 또 한 사람은 '바울'이다. 베드로는 육신을 입고 33년간 이 땅에 사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선택한 12사도들의 대표자이며,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선택한 사도들 중의 대표자다. 여기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한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곧 사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첫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첫 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도 딱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는 사도행전의 전반부인 1~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인 13~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이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에게해를 건너서 마게도냐(그리스)와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2. 사도행전의 기록은 어떻게 끝마치고 있는가?

  보통 성경책들은 내용상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서론과 본론은 있지만, 결론이 없다. 그냥 진행형으로 끝이 난다. 즉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고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럼, 잠깐 사도행전의 끝 부분을 살펴보자. 

행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렇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2년을 로마에 있는 자기의 전셋집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가르쳤다고 마무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열려있는 책이요, 미완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경향은 사도행전 내내 계속된다. 즉 복음전파가 계속해서 열린 문을 통하여 더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1차적으로 베드로에 의한 복음전파가 12장까지 나온다. 그리고 그 뒤에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냥 숨겨둔다. 계속해서 어딘가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15장에 가서 갑자기 나타난다. 최초의 기독교 예루살렘공회의 때에 그가 예루살렘교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기록이 없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바울을 부르실 때에 언제 어디에서 부르셨는지가 분명하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부르심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13장에서부터 전도여행을 떠나난다. 그래서 1차전도여행과 2차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로마여행(4차전도여행)을 하여 로마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2년동안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끝을 맺는다. 그 뒤에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여전히 그리고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마치 그 뒷부분은 우리들더러 "너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3. 복음전파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알려주는 아주 중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복음전파의 그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복음전파의 현장들을 기자가 취재하듯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에는, 사도행전의 최대의 분수령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9장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9장은 첫 번째로 복음전파의 기수였던 베드로가 여전히 살아았고 여전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두 번째 복음전파의 기수로서 사울(후에 바울)을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불러내어 사도로 삼았던 베드로를 제쳐두고 또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복음전파의 새로운 기수로 삼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우리는 이 부분에 아주 주목해야 한다. 나중에 사도행전 각 장 강해에 들어가서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베드로를 놔두고 왜 바울을 부르셔야 했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전파의 '개방성 여부'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전파의 '유연성 여분' 때문이다. 베드로는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적인 한계를 벗어나려 해보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 방문하면서 거기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어떤 할례자들이 온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만 이방인인과의 식사 자리를 피해버렸기 때문이다(갈2:11~12). 그러자 사도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를 책망을 엄히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할례자들의 사도'였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갈2:7). 그러나 그렇더라도 베드로가 그때 처신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에 있어서 개방적이었던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을 불러내어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복음전파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복음전파의 깃발은 바울에게 이어졌고 그로 인하여 복음을 유대인을 넘어서 이제 이방인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복음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가게 된 것이다. 

 

4.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훈을 회개와 천국복음이 이어받으려면?

  이렇듯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뜻과 방향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의 뜻과 의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천국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더 이상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의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를 쓰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로 복음전파의 깃발을 옮기시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회개와 천국복음"과 같은 엄청난 메가톤급의 복음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것이 마지막 때에 전파해야 할 최종적인 복음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답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천국복음'이 땅끝까지 증언되는 때라고 하셨다(마24:14). 그러므로 동탄명성교회와 같은 규모가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회개와 천국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복음전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우리만 듣고 우리만 천국에 들어오라고 주님께서 먼저 알려주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여 "회개와 천국복음'을 또한 폐쇄적으로 간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주어 흩어버리신 것처럼 우리들도 산산히 흩어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회개와 천국복음의 말씀을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능력있는 복음인지를 먼저 자신이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그것을 다른 사람과 지역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참된 복음을 먼저 깨닫고 먼저 믿은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5. 사도행전 1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12사도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사도행전 1장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거기에서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 그 앞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왕국)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는 것이었다(행1:6).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아닌가?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때와 기한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할 사명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령이 곧 그들 위에 내려오시면 능력을 받아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천국복음이 전해진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순간에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 언제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들려주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천국백성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고 이어서 이제는 그들이 모든 민족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나라의 독립만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모습인 것일까? 회개와 천국복음도 언젠가는 전세계으로 전파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지 복음을 듣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들어가서도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이 마지막 때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알곡을 추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끼리만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고 우리끼리만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빨리 그러한 생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도록 나도 열린 마음으로 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06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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