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6(금) 금요기도회

제목: 귀신 축사의 의지, 과연 어떻게 불타오르게 할 것인가?(갈3:13)(부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z6Z7vCNo56g [또는 https://tv.naver.com/v/48262175]

 

1. 들어가며

  오늘날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큰 놀라운 발견은 바로 저주가 곧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주님이 주시는 저주는 귀신이 아니라 형벌이었다. 왜냐하면 형벌은 귀신이 자기 맘대로 직접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는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귀신이 직접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고 저주를 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놀라운 영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주님께서 한번 재앙을 내리시면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받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는 주님께서 저주를 내리시더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놀라운 영적인 메카니즘과 저주 해방법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한다. 

 

2. 신구약시대에 저주는 어떻게 내려졌는가?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하는 자에게 그 죄는 혹시 용서할 수도 있다고 할지라도 그 벌은 면제하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출20:5, 34:6~7). 특히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상들의 우상숭배로 인한 형벌을 아버지로부터 아들과 손자 3~4대까지 보응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제사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었으나 그 벌은 면제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형벌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왜냐하면 벌을 면제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늘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으니, 자신의 죄도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형벌까지도 다 면제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저주는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오늘날에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벌은 면제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일평생에 걸쳐서 그 형벌을 받고 사는 것이다.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에게 가서 물어 보라. 놀랍게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도 예외 없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과연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만 사해 주셔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저주까지 담당하셨는데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빠져 있어서 그런 것인가? 

 

3.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에게 주시는 형벌은 무엇인가?

  사실 구약시대에 사람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셨다. 즉 형벌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 방식과 예수님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형벌의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형벌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형벌하셨는가? 우리는 십계명과 그리고 우상숭배에 대한 처벌 기준을 출20:5, 34:6~7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우상숭배하는 사람에게만 그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3~4대까지 받게 하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는 형벌이 실제로 어떻게 임하였을까? 그것은 신명기 28장에 아주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죄값으로 주시는 형벌은 사실 여러 가지 재앙으로 나타난다고 했다(신28:59~61). 그리고 그것은 자손 3~4대까지 이어지는 것이므로 일종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신28:45~46).

  그렇다면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받게 될 재앙 곧 저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3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질병이요, 또 하나는 가난이며, 또 하나는 막힘의 저주다. 먼저 각종 질병들과 정신병에 걸리고 소경이 되는 것이다(신28:21~22,27,28). 그리고 가난의 저주도 임한다. 즉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데, 먼저는 토지 소산과 과실을 빼앗긴다(신28:30,33,40). 그리고 가축으로서 소와 양과 나귀 등을 빼앗긴다(신28:31). 그리고 자녀를 빼앗겨 포로로 잡혀가거나 노예가 된다(신28:32,36,41). 그래서 자손이 없어지고 망하게 된다(신28:62).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막히는 저주가 임한다. 형통함이 없어지는 것이다(신28:29, 수1:8, 왕상2:3). 그러면 하는 일마다 안 된다. 막힌다. 결국 망하게 된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십계명법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우상숭배의 저주를 받고 사는 것이다. 

 

4. 신구약시대에 형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데 신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형벌을 주시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과 오신 이후에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그 차이는 이렇다.

  첫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천사를 시켜 범죄자들을 형벌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벌을 주는 방식에 있어서 구약시대에는 2가지 방식을 사용하셨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천사를 시켜 형벌을 주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에는 예수의 피를 바르지 않은 곳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말년에 인구 조사를 하자 그 나라에 전염병을 내렸는데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이 직접 부리시는 천사 곧 여호와의 천사를 보내서 그 일을 행하셨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타락한 악의 천사 사탄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탄은 창조 직후부터 범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천국에서 그를 쫓아내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그를 참소자로 그리고 형벌 주는 자로 쓰고 계셨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욥기서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사탄이 욥을 참소한다. 그러자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이 욥에게서 물질과 자녀와 건강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제아무리 악의 화신인 사탄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불가능했다. 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일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형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을 취하셨는데, 그것은 이미 하늘에서 떨어진 귀신들을 통하여 재앙이 내려지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귀신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귀신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타락한 천사들이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한 천사들이라도 대부분은 아직 하늘에서 쫓겨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재앙을 내리고 저주를 주는 타락한 천사는 대부분 한 놈 곧 사탄 마귀로 나온다.

  다음의 예를 보라. B.C. 2091년경 욥기서에 보면 욥에게 재앙을 내리고 있는 이는 분명 사탄이라고 나온다(욤1:6~12, 2:1~6). 그리고 B.C.1025년경 사울왕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 속에 들어가서 역사했던 영도 여호와께서 부리신 악한 영이라고 했다(삼상16:14). 그놈은 아마도 사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B.C.853년경 미가야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거짓말하는 영으로 출현하는 그놈도 역시 사탄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아합왕을 길르앗 라못에 보내 전쟁통에 누가 죽게할 것인가에 대해서 천상회의가 열렸을 때, 한 천사가 나와서 자신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왕상22:22). 그는 거짓말장이기 때문이다(요8:44). 그리고 B.C.520년경에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에 따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참소하는 놈이 있었는데, 그놈도 역시 사탄이었다(슥3:1~6).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는 이미 지상에는 사탄의 왕국이 있었다(마12:26). 그리고 사탄도 귀신들의 왕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마12:24).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의 탄생 직전이나 직후에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공중으로 떨어진 것 같아 보인다(눅10:18).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귀신들의 왕 사탄 마귀와 싸워서 3대0 판정승으로 승리하셨다(마4:1~12). 그리고 십자가에서 KO로 이기셨다(골2:14~15). 그리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는 천국에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가엘과 그의 천사를 시켜서 그들을 쫓아버리셨다. 그래서 그날부터 사탄 마귀 대장은 음부의 무저갱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다만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올려보내 지금도 마귀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귀신들은 이미 셋째 하늘에서 떨어진 상태이면서 동시에 다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께 사람들의 죄를 참소하지 않는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곧바로 사람의 몸속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의 타락 직후 뱀더러 사람의 육체를 먹고 살라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창3:14). 그러므로 사람 몸속에 들어가 있는 귀신들에게 그 속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면 귀신들 중에 2,000년 이상 되었다고 하는 놈들은 하나도 안 나온다. 

 

5. 예수 승천 이후 시대의 성도들은 우상숭배의 죄값으로서 주어지는 재앙을 그대로 다 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 승천 이후 시대의 성도들은 우상숭배의 죄값 곧 형벌로서 주어지는 질병과 가난과 막힘의 저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구약시대의 경우처럼 계속해서 받는 것이 맞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재앙이며 저주를 계속해서 받고 있다. 재앙이라고 함은 자기만 받는다는 성격이 강한 용어이고, 저주라는 말은 3~4대까지 대를 이어받는다는 개념이 보다 강한 개념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질병에 걸리고 가난하게 살고 막힘의 저주를 받고 있는데 왜 그러는 것일까?

  첫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죄값으로서 사망을 지불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온갖 저주들까지도 대신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다(갈3:1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실 죄값으로서의 사망의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죄값을 지불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저주의 형벌도 대신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만을 알고 있을 뿐, 그때에 우리 죄인들이 받게 될 형벌들 곧 질병과 가난과 막힘의 저주까지도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우리가 받을 저주까지도 대신 받으셨다. 주님께서는 먼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질병을 대신 담당하셨으며(사53:5, 벧전2:24), 십자가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심으로 우리가 받을 가난의 저주도 대신 받으셨다(신28:48, 고후8:9). 그러므로 그때 예수께서는 옷벗김을 당하셨고 드시지도 못했으며 목말라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으심으로 막힘의 저주까지도 대신 담당하셨다(마26:26). 사도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을 보라. 다 예수님을 버린 채 도망갔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토록 따르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날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가 되시어 율법의 저주에서도 속량하셨다고 말이다(갈3:13).

  둘째,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분명히 저주를 담당하셨는데,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하여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 사실을 몰라서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요일1:9). 신약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2가지 결과가 주어진다. 하나는 하늘의 행위책에 우리의 죄목이 기록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귀신이 곧바로 우리 몸속에 침투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는다. 즉 하늘에 기록된 행위책에서 우리의 죄목들이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한편 이때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도 있다. 그것은 이미 범죄로 인하여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다. 그래야 재앙과 저주가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도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귀신들도 알게 해 줘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백함으로 귀신에게도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그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야 비로소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이다(요일1:9).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자백하면 하늘에서는 내가 지었던 죄들이 지워지면서 용서가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는 귀신들이 우리 몸속에 들어 있어야 할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믿는 사람이라도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6. 오늘날 귀신을 내 몸에서 내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죄를 자백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내 몸에 저주를 가져다 주는 귀신을 확실히 내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은 첫째로, 내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 그것이 우상숭배의 죄가 되었든지 생활 속에 지은 죄가 되었든지, 십계명을 어긴 죄들을 자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들도 우리 몸속에 들어 있을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서 즉시 십자가 세우기를 하든지, 축사를 하든지, 영권이 작으면 강한 은사자에게 축사를 받든지 하여, 귀신을 내보내야 한다. 둘째로, 내가 지었던 죄만 자백할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비롯하여 십계명을 어긴 죄를 자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몸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들의 경우 약 70~80%가 내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나의 조상들의 우상숭배로 인한 형벌을 자손 3~4대까지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그러므로 오늘날에 우리 성도들이 힘써야 할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어서 하늘에서는 죄용서를 받았어도, 날마다 자신이 지었던 과거의 죄와 현재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마4:17, 계22:15). 더불어서 자기 몸속에 이미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들어와 있는 귀신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자백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몸속에 들어 있는 70~80%의 귀신들을 내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회개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질병과 가난과 막힘으로 이끌고 있는 귀신들을 내보내기 위함이다. 또한 이러한 악한 영들을 나의 사랑하는 후손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다. 귀신들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않는 한 계속해서 버틴다. 우리 몸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의 행위책에서 우리가 지은 죄를 사함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난 이래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여 귀신에게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고는 그 귀신을 떠나가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도 해결할 수 없었던 저주들이 비로소 우리에게서 하나씩 둘씩 떠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바로 저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주를 인격화시키면 그것이 곧 귀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당대에 저주를 끝내려면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내 죄를 용서받으며 동시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내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들어온 귀신들 곧 저주를 떠나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2024년 02월16일(금)

정보배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그리스도인의 율법관(05)]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가?(막2:23~3:6)_2024-02-16(금)

https://youtu.be/DZueQfGaZCM [또는 https://tv.naver.com/v/48262170]

 

1. 들어가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가 다 주일을 지킨다.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주일에 모여 주님을 기억하며 주일에 모여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던 구약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에 모여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날에는 결코 일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이방인들은 과연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려도 괜찮은 것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안식일의 개념을 정리하고 왜 주일성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이단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수 있을 뿐더러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구약시대에 안식일법은 어떻게 제정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B.C.1446년경 드디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안식일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주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법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에는 3가지 법이 있으니 하나는 '도덕법'이고 또 하나는 '의식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판법'도 있다. 이 모든 법은 61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 조항들 중에 도덕법에도 나오고, 의식법에도 나오는 한 가지 조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사실 십계명에도 나오고(출20:8~11), 절기법에도 나온다(레23:1~3). 다시 말해 안식을 지키라는 말씀은 도덕법이면서 동시에 절기법이기도 하는 것이다. 

 

3. 안식일은 왜 지키라고 하셨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B.C.1446년경 출애굽 1세대들에게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하늘들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기 때문에 그날을 기억하고 그날에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출20:11).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든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만드신 모든 만물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B.C.1407년경 출애굽 2세대에게 모압 평지에서 주신 말씀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여 내셨던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신5:15). 

  고로 우리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짜이므로(렘10:11, 사44:24)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이 예표가 되어 신약에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친히 모든 인류를 사탄 마귀로부터 건져 내셨으니, 우리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구원자 예수님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4. 안식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키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그 방법까지도 알려 주셨다. 그것은 첫째, 안식일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날을 기억해 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돌리라는 것이다(출20:8).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에 일하러 가지 말라고 하셨다. 심지어 일을 하면 그를 죽이라고 하셨다(출31:14~15, 35:2). 이는 일을 중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예배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안식일에 나무하러 갔던 자가 돌에 맞아 죽는 일도 있었다(민15:35). 그리고 다음의 2가지는 제사장이 할 일이다. 셋째, 안식일이 되면 백성들이 가져온 곡식가루로 떡을 만들어 성막(성전)의 성소에 있는 떡상에 이전의 떡은 물리고 새 떡을 진설하라고 하셨다. 넷째, 그리고 아침과 저녁에 상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대상23:3, 대하2:4, 31:3). 그리고 마지막으로 B.C.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도 있는데 그것은 그날이 되면 오락을 행하지 말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사58:13). 

 

5. 안식일법은 폐지되었는가?

  그런데 안식일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2가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날을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원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날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그날에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스라엘의 기쁨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다 폐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호2:11). 그래서 신약시대에 들어와 안식일법은 폐지되고 만 것이다. 

  둘째, 안식일법은 의식법으로서 모형이요 그림자인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안식일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더 이상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법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도 십계명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유효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의식법 중 절기법으로서의 안식일법은 폐지되었지만, 도덕법으로서의 안식일법은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은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지만, 도덕법으로서의 안식일법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6.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실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실 구약시대에 안식일의 제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가 안식을 주는지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라고 하셨다(막2:28). 예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니 그분이 안식일의 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누구도 사람에게 안식을 줄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일을 행하셨으며(막3:4),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쳐 주셨던 것이다(눅13:16).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024년 02월 16일(금)

정보배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그리스도인의 율법관(04)]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가?(갈5:1~6)_2024-02-15(목)

https://youtu.be/U6fG4BFuYZw [또는 https://tv.naver.com/v/48262167]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율법을 가리켜 '도덕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 주는 율법을 가리켜 우리는 '의식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난 3번의 시간을 통해 도덕법인 십계명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두 번째로 의식법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제정된 의식법으로서 '할례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왜 할례법은 생겨났으며, 할례법은 구원과는 어떤 상관성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할례법이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법인 율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덕법'이요, 나머지는 '의식법'과 그리고 '재판법'이다.

  제일 먼저, '도덕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켜야 할 윤리와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말씀하는 십계명을 가리킨다(출20장, 신5장). 그리고 '의식법'이란 정해진 방식에 따라 절차를 지키면 성취하는 법들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의식법에는 '할례법'에서부터 시작하여, '절기법(안식일법)'이 있고, '성막법'과 '제사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결법'과 '음식법(금기법)' 등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판법'이란 백성 사이에 소송이나 문제가 발생할 때 재판하는 법으로서 민법과 상법 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들 중에서 '할례법'이란 율법 중에서 의식법의 범주에 속하는 법이다. 할례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남자로 태어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법이다(창17:10~12). 이는 남자의 생식기의 끝부분에 있는 가죽을 베는 것을 가리킨다(오늘날에는 그것을 '포경수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의식법으로서 할례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할례법은 의식법들 중에서 최초로 제정된 법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식법들이 제정된 순서를 보면, 할례법이 가장 먼저 제정되었고(창17장) 이어서 절기법으로서 유월절과 무교절이 제정되었으며(출12장), 그리고 이어서 안식일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출16장).  

  둘째, 할례법은 모세보다 약 600년 전에 먼저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법이었다는 사실이다. 할례법은 사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B.C.1446년보다 약 621년 앞선 B.C.2067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정하셨던 법이었다(창17:10~12).  

  셋째, 할례법은 모든 다른 의식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은 사실 가짓수로 치자면 613가지나 된다. 랍비들이 그렇게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613가지 율법 조항들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의식법이 바로 '할례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할례의 날과 서로 겹쳤을 때에는 비록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보다 할례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한다(요7:22~23). 그러니까 안식일법보다 할례법이 더 우선하는 것이다.

  넷째, 할례법이 모든 의식법들 중에 최우선이기는 하지만 믿음의 법보다는 후순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자식을 낳을 수도 없었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2가지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손 번성과 가나안 땅 기업 차지에 관한 약속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시게 된다(창15:6). 그런데 그가 잠시 잘못 행하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떠나신 후 13년 만에 찾아오셔서 꾸중하시면서 할례를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가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할례 율법보다 믿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롬4:11). 그러므로 어떤 율법도 믿음보다 우선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자의 조상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무할례자의 조상도 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3. 할례는 왜 제정되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할례는 제정되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과 회개의 표시'로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 곧 우상숭배하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는 우상 제조업을 하고 있었다(수24:2).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창12:1). 그러자 아브라함이 두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가지를 선물로 약속해 주신다. 하나는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창13:14~15). 그리고 둘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의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했다(창13:16~17).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였다(창15:2).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그의 씨로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창15:4). 그래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자손 약속을 받은 후, 사래의 말을 듣고 10년 만에 사래의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게 된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장자인 '이스마엘'이다(창16:15~16).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 출생 이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신다. 무려 13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엘샤다이(전능한 하나님)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 다시 자기의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할 것을 몸에 새기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할례언약인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언약이란 일종의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따르겠으며 앞으로는 절대 다른 방법을 추구하여 자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하여 첩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회개하는 표시가 바로 할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시간이 흐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만 받으면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하다가 나라가 망하려고 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을 꾸짖었는데, 그때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이방 민족은 육체에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렘9:26). 그리고 그들이 진정 행해야 할 할례는 자신의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렘4:4). 이스라엘은 비록 육체에 할례를 받아서 스스로 언약백성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으니 그들은 언약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렘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4.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했던 참된 할례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중의 유대인이자 베냐민 지파의 히브리인이었다. 그런데 그도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지만 그도 역시 마음에는 할례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형식만을 추구하고 내용이 빠진 자신은 그리스도의 원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할례를 받은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였다(롬3:20).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진정 마음으로 믿을 때에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라는 의식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면, 이방인들은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던 유대인들이나,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다 똑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였다(롬3:30). 그러므로 육신에 할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언약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은 겉만 유대인일 뿐 속은 아니라고 했다. 할례는 마음에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고로 사람이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요,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며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롬2:28~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진정으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믿고 자신의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참된 할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고 했다(롬10:9~10).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있는 자가 바로 진정한 할례자인 것이다.  

 

5. 예수께서는 왜 할례를 받으신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으신 것일까? 그렇다. 예수께서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다고 누가복음의 저자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눅2:21).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할례를 받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할례자들도 구원해야 하고 무할례자도 구원해야 하는데, 할례자들을 구원하려면 먼저 자신도 율법을 지키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진정 실천하신 모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외적으로만 할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할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결코 육을 따라 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육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살지 않았다.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를 보라. 그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의 인기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사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사탄에게 절하여 세상 만국의 영광을 얻으라는 사탄의 제안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육체를 대속제물로 내어 놓으셨다. 그리고 육체 속에 들어 있는 귀신들이 결국 죄를 짓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사람들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을 추방했던 것이다. 그분만이 이땅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진정한 할례자의 삶을 살다가신 것이다. 

 

6.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방인으로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는 더 이상 할례를 받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마음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할례는 의식법으로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모형이자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제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정 믿고 회개하고 있는 자는 이미 할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그림자의 모형의 시대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유대인들이면서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은 한사코 이방인들도 자기들처럼 예수님을 믿었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행15:1,5). 그래야 의롭다하심도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갈5:4).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는 다시 거꾸로 육체에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대로 만약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갈5:2). 그리고 육체의 할례를 통해 의롭다함을 추구하려 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것이라고 했고 은혜에서 떨어질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갈5: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육체에 할례를 받은 것이나 육체에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나 다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둘 다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갈5:6, 6:15). 고로 할례를 받으려 하는 것은 육체에 모양만을 내려하는 것이며,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했다(갈6:12~13).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자랑해야 할 것은 십자가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갈6:14). 왜냐하면 십자가는 육체를 죽음에 넘기우는 수단으로서 진정한 할례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할례를 비롯한 모든 의식법들은 사실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실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 주는 모형이자 그림자이다(히10:1).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들게 되었다면 다시 그림자인 의식법들을 붙들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인 것이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례는 마음에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롬2:29).

  그런데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또다시 표면적인 할례자처럼 되어가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만을 가지고 자기는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라고 자랑하고 자신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구원받은 언약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행한 할례는 회개의 표시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한 번 믿은 것을 가지고 유대인들처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죽음에 넘겨야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인데,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고 구원받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이나 지금 그리스도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게 주장하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육체를 죽음에 넘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할례자로 살아가야지 형식만 남은 할례자로 살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2024년 02월 15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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