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다음,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고자 계획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형벌과 죄값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가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죄용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결국 인간은 믿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탄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어라 부르는지 아는가? 그것은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의 장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인 믿는 자는 장자로서 주어지는 권한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 자로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과 타락한 천사들을 향해 명령하고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로서 갖는 명령권과 선포권은 무엇을 위해 어디에 사용해야 한는 것인가? 그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로서 명령권과 선포권을 발동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자들을 위해 하늘에 큰 보상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보석으로 지어진 집을 얻는 것이요, 영광의 면류관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귀가 하는 일을 대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우리 인간이 협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당신 자신의 명예와 성공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당신은 하나님하고는 상관없는 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하나님의 동역자(파트너)가 될 수도 없다. 주님의 일에 참여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명령권과 선포권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해서 개인의 안위를 챙기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을 위해 산다면 우리에게 하늘의 상급은 없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장자권을 사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사용하고 있는가? 또한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명령권과 선포권을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만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라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그분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행한 공력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되어 불로 그 공력을 시험한다해도, 그 공력이 타지 아니하고 남아있어 하늘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노아는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500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500세 이후에 세 명의 아들들만을 낳았는데, 그 후로 또한 자식을 낳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노아는 약 7-80년동안 방주를 지었고 홍수 이후에 땅으로 내려올 때까지 그는 세상에 아주 없는 의인으로 살았으며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았다. 하지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땅을 개간하고 살던 어느 시기에 그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먹고 그만 하체를 다 드러낸 채 잠을 자다가 둘째아들 함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함은 그때 어떻게 했을까? 그가 본 것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도록 막고 다른 조치를 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아버지의 행위를 유심히 지켜보고는 그의 형제들에게 고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뒷걸음쳐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리고 나온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어주었던 것이다.
잠에게 깨어난 노아는 자식들이 한 일을 듣고는 함에게 다른 두 형제의 종이 될 것을 선포했고, 셈에게는 영적인 축복을, 야벳에는 땅에서 지경이 넓혀지고 잘 되는 땅의 축복을 선포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함이 그렇게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는가? 아니면 모함이었다고 보는가? 아니다. 함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함은 자신의 아들 가나안과 더불어 저주를 받았다. 당시 함의 넷째아들 가나안도 직간접으로 그 일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벗거벗은 행동은 잘 한 행동이라고 보는가? 이제 자신의 사명이 끝났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이제는 절대로 물로 심판받을 일이 없어졌으니 적당히 세상 것을 즐기며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포도주를 마시되 대낮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도 된다는 말인가? 자식들 앞에 수치를 다 드러내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노아의 입술을 통해 예언적으로 말씀을 선포케 하셨다. 그런데 그 선포된 말씀은 지금까지 그대로 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자녀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버이 공경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는 과연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옳은가? 사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요, 나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존중해드려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오직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다(신5:16).
문제는 부모가 자녀의 보기에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에 어떻게 하느냐이다. 자신의 부모가 공경받을만한 분이라면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노아처럼 자식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에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부모가 자식 앞에 보이지 말아야 할 추태를 보일 때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부모의 수치를 가리워주고 덮어주는 데까지 해야 한다(잠17:9). 둘째아들 함처럼 부모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떠벌리는 것은 결코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부모의 인격과 권위는 엄청나게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함의 실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함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2가지 잘못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는 먼저 아비의 권위를 존중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늘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실수하자마자 그것을 빌미로 형제들에게 아비의 행위를 고발함으로써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발설했다. 이제는 자신의 아비가 그 집안의 주도권을 쥐어서는 아니되며 이제는 아들들이 그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의 실수가 나오자마자 그것을 고자질하여 부모를 떠밀어내고자 했다. 둘째, 함은 자신은 아비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같으면 저런 볼썽 사나운 짓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떼어내어라고 한다.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다.
공경이란 아비의 허물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덮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누설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일을 자기를 돌아보아 자신의 더 큰 잘못을 행하고 있음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끝까지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공경이요 믿음의 태도이다.http://youtu.be/o2fUcWfELUQ

  악한 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을 악한 자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받으실까? 오늘 요한복음 11장 45부터 12장 11절까지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제공한다.
  오늘 본문(요11:45-12;11)은 예수께서 공생애 말기에,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는지와 아울러 향유를 허비한 마리아의 도유를 예수님은 왜 칭찬해주셨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 예수께서는 분명히 죄가 없으신 분이셨고 또한 산헤드린공회로부터 어떤 정죄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되어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예수님의 표적행하심은 사실 수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 보라. 38년된 중풍병자를 치유한 것도 엄청난 기적인데 그분은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까지 살리셨다.
  하지만 그러한 표적행하심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말 한 마디로 천국도 보낼 수 있고, 지옥에도 보낼 수 있었던 무소불위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분노와 시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 모의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때 산헤드린 공회의 회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민족을 죽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죄는 없지만 예수께서 죽어 주어야만 자신의 민족이 평안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죽여야 한다는 말했다. 어찌 유대의 최고사법기구 산헤드린공회가 이러한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악한 자 가아뱌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렇다. 뱀의 혀를 지녔던 가아바는 산헤드린의 욕심을 시행하도록 합당한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 악한 자들이란 오직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든지 다 동원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집단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가아바의 방향 제시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했으며 대대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사용해서 오히려 당신의 섭리를 이뤄가시기도 하신다. 왜 그런가? 가아바의 예언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한편, 유월절 엿새전 유다의 베다니에서는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 했던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리아는 엄청나게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그것을 전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 기름은 예수님의 머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나중에는 발까지도 흘러내렸다. 그러자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갑자기 일어난 광경에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그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향유는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부활은 시신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러니 향유가 있더라도 무엇이 소용이 있었겠는가? 마리아는 자기를 잘 알지 못했던 사이에 예수님의 육신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던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슬픔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헌신이라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며 칭찬해 주신다. 우리도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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