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2) 구원얻는 회개는 무엇인가(33) 애국심과 우상숭배에 대한 회개 경고(계2:12~17)_2020-09-29(화)

https://youtu.be/Omz_qYg9CdA [혹은 https://tv.naver.com/v/16022250  ]

 

1. 버가모교회의 회개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 가운데 교회의 지도자들의 타락을 책망하면서 그들에게 회개를 권고한 교회는 "두라디아"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담임 목회자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외부의 어떤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타락한 소수의 무리를 가진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버가모교회"었었죠. 한편, 사데교회는 교회의 지도자가 명목상으로는 있느나 실제는 완전히 죽어있어서 시체 모양인 교회도 있었으니 그 교회는 바로 "사데교회"입니다. 

 

2. 버가모교회는 무슨 죄를 지었나요?

  버가모교회는 2가지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황제숭배의 죄요, 또 하나는 이교신숭배의 죄 곧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이 교회가 이러한 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교회가 위치해 있는 버가모 도시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가 황제숭배를 하게 된 것은 버가모가 소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로마 통치자를 위한 신전을 건립한 도시로서, 황제숭배를 수행하는 전 지역의 대표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도시는 이교신의 숭배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각종 신들의 숭배되었는데, 다양한 이교신들이 숭배되었습니다. 즉 아스클레피우스, 제우스, 디오니소스, 로마의 여신들이 숭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도시에 살면서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면 국가반역행위를 짓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유죄판결을 받게 되어 벌금을 물게 되든지 재산을 몰수당하든지 하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교신들 곧 우상들은 상업조합에 속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상품판매를 위하여 자기들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고 또한 그 신들에게 제사한 음식(우상의 제물)을 같이 나눠먹는 친교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 성도들 중에는 몇몇 소수가 황제숭배와 이교신숭배행위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이 교회는 발람의 교훈(가르침)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나요?

  그런데 버가모교회 안에는 발람의 교훈(가르침)을 따라가는 몇몇 성도들이 있었습니다(계2:14). 그래서 발람선지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몇몇 성도들은 황제숭배야말로 애국심의 표현이며, 사회적으로 볼 때 국민으로서의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교신의 숭배 곧 우상숭배는 문화행사이며 친교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행한 것은 자기의 재산을 몰수 당하지 아니하고, 길드(상업조직)에 나가서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발람선지자가 와서 그렇게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4. 주님은 황제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겠다고 책망했나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황제를 숭배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회개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계2:16). 그런데도 만일 그들이 그들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고 계셨는데, 장차 도착해서는 그와 같은 자들을 주님의 입으로서 나오는 칼로 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주의 종들이 발람의 교훈을 받아서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몇몇의 소수의 평신도들이 발람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와 같은 자들을 칼로 쳐서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향한 편지의 서문 인삿말에서도 예수께서는 "예리한 두 날의 검을 가지신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계2:12). 사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 하늘에 올라가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때도 주님의 입으로부터 날선 검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백마를 타시고 재림하실 때에는 그분의 입으로부터 좌우에 날선 칼이 나와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계19:15,21). 

 

5. 시험을 이기고 있는 자가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버가모교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고 우상숭배를 거부한 자들을  향하여서는 2가지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흰 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이름은 그 돌을 받은 자 밖에는 알 수 없는 이름이 있었습니다(계2:17). 먼저, 그들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한 것은 다른 이들은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행한 후 우상의 제물을 먹었지만 이들은 먹지도 못했기 때문에, 감추어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놀라운 천국잔치의 음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들에게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그 이유를 2가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흰 돌이 무죄선고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흰 돌이 대제사장의 판결흉패에 들어있는 2가지 돌의 하나로서, 흉패 안에 하나는 검은 돌, 하나는 흰 돌이 들어 있었는데, 무죄를 선고할 때에는 흰 돌을, 유죄를 선고할 때에는 검은 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황제숭배를 안 한 자들에게 나라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벌금을 물리며 재산을 몰수해갔지만 천국에서는 그들에게는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흰 돌이 "입장권"이라는 것입니다. 황제나 우상을 숭배하고 나면 거기에 바친 고기음식으로 잔치를 했는데, 그 때에 들어갈 때에 보여준 입장권이 바로 흰 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는 잔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자기가 속한 상업조직인들만 아는 방으로 안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맞든지 중요한 것은 그날에 주님께서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진정으로 회개한 자들에게는 우상의 제물 대신에 감추었던 만나를 주실 것이고,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실 뿐만 아니라, 어떤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로 우리가 비록 신앙을 지키다가 축제도 못 참석하여 음식을 먹는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오시면  만회해주실 그날을 바라보고서, 오늘도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신앙의 순결을 지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9월 29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1)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32) 사명을 감당치 못한 교회에 대한 충고(계2:1~7)_2020-09-28(월)

https://youtu.be/gkg2AkiVSro  [혹은 https://tv.naver.com/v/15985578  ]

 

 

1.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에게 당신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나요?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에게 편지할 때에 당신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의 오른손 안에 일곱별들을 붙잡고 있는 이, 일곱금촛대들 한 가운데 안에서 거니시는 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즉 그분이 당신의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일곱별들입니다. 특별히 여기에 나오는 "일곱별들"이란 "일곱교회의 사자들(메신저들=말씀전달자들)"라고 했습니다(계1:20). 곧 일곱교회에서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주의 종들이 바로 "일곱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금촛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써 좀 거대합니다. 그러므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주 예수님께서 그 사이를 거닐고 계셨습니다(계1:12~13). 이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며, 그분이 당신 손으로 직접 붙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교회의 "주의 종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주님은 칭찬들을 것이 많이 가지고 있던 왜 에베소교회를 책망했나요?

  에베소교회는 남다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고와 인내로 말미암은 행위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게2:2~3).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았고 견뎌냈으며 게으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서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계2:4). 

 

3. 에베소교회의 "처음 사랑"이란 무엇을 가리키나요?

  에베소교회의 "처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교회가 세워지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했던 모습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교회가 책망받은 것은 이 교회가 세워짐으로 인하여 실천하고 있었던 사명이 그만 식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베소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로서, 관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에 위치한 것과 또한 사도바울이 3차전도여행 때에 이 도시에 세운 교회를 세워 선교사 내지는 목회자 훈련소의 거점도시에 사용했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행18~20장). 이 도시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하고 부유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꼭 이 도시를 거쳐가곤 했습니다. 바울도 2차전도여행 때에 이 도시를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3차전도여행 때에는 이 도시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행19:1~7). 12명이 사도바울의 안수로 인하여 성령받음으로 시작된 이 교회는 금새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채워졌고 그러자 사도바울은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에서 무려 2년에서 3년 정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장로들도 세우고, 선교사 및 교역자들도 세워 파송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소아시아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먹고 입고 써야 할 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고, 그것을 이들을 섬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고로 주님께서 이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면,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 하셨습니다(계2:7). 이는 그들이 얼마나 훈련생들을 섬기는데 헌신을 다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습니다. 

 

4. 이들은 왜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었나요?

  그런데 이들은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훈련생들 중에 "악한 자들"이 있었으며(계2:2), 또한 이 교회를 방문하는 지도급의 인사들, 예를 들어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방문하기에 열심히 섬겼는데, 이들이 와서 가르친 것은 니골라당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엄연히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버가모교회에서는 "발람의 가르침"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계2:15), 발람의 가르침은 발람같은 선지자가 나타나 버가모교회 성도들에게 "믿는 성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죄가 되지 않고, 행음(우상을 경배)을 해도 괜찮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는 두아디라교회에 이세벨 선지자가 가르친 것과도 동일한 것입니다(계2:20). 그러므로 엄연한 우상숭배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를 "문화활동"이니 아니면 "친교활동" 등으로 왜곡한 것을 에베소 성도들이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에베소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훈련생들을 다 분별해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짜도 있었고,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칭 사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어려워졌던 것입니다. 

 

5.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어떤 말씀으로 권면했나요?

  그래서 주님은 이 교회에 3가지를 주문했습니다. 첫째, 그들이 어디에서 떨어진 채 있는지를 기억해보라고 하셨습니다(계2:5a). 둘째, 즉각적으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계2:5b).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즉시 처음의 행위들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계2:5c). 이는 에베소 교회가 소아시아의 대표도시에 있는 교회로서, 많은 주의 종들을 양육하고 파송하는 교회이니만큼 그 사명을 회복하고 즉시 그 일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존재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로 에베소교회에 대한 회개 촉구 명령은 교회사명에 관한 회복 촉구 명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처음 행위를 가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그 촛대를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2:5). 이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금촛대의 하나였던 에베소교회의 촛대를 제거해 버리시고, 다른 교회로 그 촛대를 교체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더이상 에베소교회를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촛대에는 성령의 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 교회에 더이상 성령이 불이 타오르지 않게 하겠다는 뜻도 됩니다. 이는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여 충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2020년 09월 28일(월)

정병진목사

성도들이 회개를 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물론 개인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자신에게 말씀의 꼴을 나눠주는 말씀사역자에게 그것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씀사역자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분명히 제시해 줄 때, 성도는 사망의 길로 가지 않고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두아디라교회에게 있었던 두 종류의 사역자와 그 작은 교회 성도들의 상태를 진단해보고 지금 나 자신은 지금 어떻게 하고 하는지를 점검해 보도록 할 것이다.

2020-09-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0) 교회의 두 종류의 지도자들과 회개의 상관관계(계2:20~28)
  [혹은  https://tv.naver.com/v/15985632 ]



1. 들어가며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에게 A.D.95~96년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를 향해 편지를 써보내라고 했다. 그중에서 네번째 교회는 두아디라교회였다. 두아디라교회는 칭찬은 아주 작고 책망이 아주 많은 교회였다. 그런데 그 책망의 주요한 요인이 주의 종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의 잘못이 아니라 주의 종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가 함께 통째로 우상숭배를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강한 책망을 쏟아낸다. 대체 두아디라교회의 지도자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만약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교회에게도 많은 교훈을 시사한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인구가 대한민국의 1/4이 되었지만 여전히 두아디라교회의 상황에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아디라교회의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삶의 상관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지도자의 견해가 얼마나 성도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두아디라 교회는 한 개의 교회인가 아니면 여러 개의 교회를 가리키는가?

  우리는 "두아디교회"라는 교회의 명칭을 보면서, '두아디라'라는 도시에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를 "두아디라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도시 안에서는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계2:24), 또한 거기에는 작은 공동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계2:22). 이 도시의 작은 공동체 교회들을 하나로 합쳐서 부를 때 "두아디라 교회"인 것이지, 두아디라 교회는 한 개의 공동체만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헬라어로 이 성경을 볼 때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에서 두 번씩이나 두아디라는 단수로 사용하지 않고 복수로 사용했기 때문이다(계2:18,24). 또한 본문에는 두아디라 공동체 가운데 거짓선지자인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가지 않은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24). 뿐만 아니라 이 교회 안에는 주님께서 "내 종들(예수님의 종들)"이라고 하는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계2:20). 그러니까 이 교회는 커다란 한 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그 교회의 이름은 "두아디라 교회"라고 부르며, 그 교회 안에서는 작은 공동체 교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작은 공동체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 교회들의 지도자들을 가르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여선지자 이세벨"이었던 것이다(계2:20). 

 

3. 한 개의 교회 안에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성도들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개 교회 안에 전혀 다른 종류의 성도들이 있게 된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 개의 큰 교회 안에 작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아 자기 교회 공동체에게 그것을 전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에는 다수의 작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 있고, 이들 중 대부분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가서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세벨의 추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 안에서는 당시도 이세벨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세벨이 가르쳐준 사탄의 깊은 것을 체험하지 않는 작은 교회도 있었다. 결국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었고 나중에는 천국에서 빛나는 영광을 받게 될 자들로 나온다. 

 

4. 두 무리의 교회들은 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두아디라 교회는 두 무리의 교회들이 있었다. 한 무리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무리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세벨의 어떤 가르침을 따라갔던 것인가? 그때 대다수의 작은 교회 지도자들은 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갔다. 그것은 성도들이 속한 도시상업조직(길드)에서 우상숭배행위를 했는데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라고 정의하지 않고 하나의 "문화"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우상숭배한 뒤에 나온 음식(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친교행위"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상업조직에서 섬기는 수호신 앞에 경배하는 것이 약간 꺼림직했던 성도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에 자유롭게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으며, 우상의 제물을 함께 나눠먹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업조직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은 성도들의 경제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두아디라 작은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그것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우상숭배행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고전10:20을 보면,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에 따라,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발이 그것을 하나의 "문화"라고 규정해 줌에 따라, 성도은 이제 꺼리낌없이 우상숭배를 행할 수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결코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공동체에 가서 전하지도 않았다. 

 

5. 두 무리의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책망과 칭찬은 어떤 것이었나?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분명한 우상숭배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행위"와 "친교행위"로 바꾸어버린 지도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을까? 그것은 엄히 책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한 소수의 작은 교회 성도와 지도자들에게는 축복해주셨다. 

  첫째, 이세벨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대다수의 작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어떤 책망을 하셨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 모든 일들을 조장했던 이세벨에게는 주께서 이미 그녀를 침상에 던져 놓았다고 말씀하셨다(계2:22). 이는 앞으로 주께서 그녀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계2:22). 고로 주님께서 그녀를 가리켜 "침상 안으로 던지고 있다"는 표현한 것은 일종의 환유법으로서 그녀가 질병에 침상에 누워있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이세벨은 하나님이 주신 질병의 징계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자기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이미 그녀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지만 그녀는 회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간 대다수의 작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도 역시 이미 큰 환난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커다란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게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은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거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가 맞이하게 될 엄한 징계가 있을 것임을 선언하셨다. 그것은 그녀의 자식들을 살해하겠다는 것이었다(계2:23). 하나님께서 그녀의 자식들을 죽여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목회자의 자녀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의 종들이 죄를 짓게 하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한 질병에 걸려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에게 중한 질병이 발생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의술을 의지하며 자기자식이 죽어나가도 잘 모른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여 그들도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둘째, 몇몇 소수의 작은 교회 지도자들은 아무리 이세벨이 자기를 꾀어 그렇게 가르치라고 했어도,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그냥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살았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는가? 그것은 그러한 성도들에게는 같은 종류의 다른(알로스)의 짐을 지우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다(계2:25). 신앙을 지키려다가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받은 만큼 다른 것에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지도자에게는 철장(쇠지팡이)로 성도들을 양육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계2:27). 이는 철장을 가지고 양떼인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게 하시고, 성도들을 공격하는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킬 수 있도록 권세와 능력을 이미 부여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장차 미래에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철장 권세로 악의 무리를 쳐단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약속해주셨고(계2:26), 또한 천국에 들어가서는 광명한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했다(계2:28). 이는 새벽별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분복이 되게 하겠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갔을 때 영광스러운 선두주자의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새벽별은 새벽녁 마지막으로 어둠을 밝히는 별이자 새벽을 밝아오게 하는 별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성도들이 과연 생명의 길을 걸어가느냐 사망의 길을 걸어가느냐의 차이는 성도들을 지도자는 말씀사역자의 사역에 달려 있다. 말씀사역자가 누구에게 배웠든지 상관없이 그가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가 가르치는 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의 길로 인도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가르침인지도 모른채 그것이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경제적으로 편하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적당히 타협하는 안을 제시한다면, 얼핏 보기에 그것은 성도들을 이롭게 하고 살릴 수 있는 일같이 보이나, 실제는 성도들을 사망의 길로 끌고가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의 말씀사역자는 자기가 전하는 꼴이 지금 어떤 말씀인지를 늘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생명의 길로만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주님이 바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성도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길이라면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기가 있는 말씀사역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사실 이 땅에 흠이 없는 지도자는 정말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도자를 만났다고 해서 지도자를 그냥 버릴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러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지도하는 지도자가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 진리의 말씀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반대로 목회자는 자신이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한다면 자기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처럼 각오하고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 내가 선택한 지도자의 가르침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나 자신이 받을 복과 저주가 결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게 될 천국과 지옥도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의 지도자가 바른 가르침을 전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자신이 가진 믿음도 변질되지 않도록, 그것을 꼭 붙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9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가? 여러분은 참 신이신 우리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만 회개를 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유교에서도 회개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불교에서도 회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죽은 조상들이나 석가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회개가 대체 무엇이길래 예수님과 신약의 사도들은 그토록 회개할 것을 외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오늘 그 3가지 이유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2020-09-25(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9)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30)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2)(눅10:13~16)
https://youtu.be/jURdHcHBMuM  [혹은 https://tv.naver.com/v/15968370 ]

 

 

1. 들어가며

  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던진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사람들은 왜 회개하지 아니하는가? 회개가 귀찮아서인가? 회개를 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회개하기가 힘들어서일까? 예수께서는 마땅히 회개했어야 할 갈릴리의 세 개의 고을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에 대해 책망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이 왜 회개하지 않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왜 회개하지 않는지도 함께 알아도보록 하자. 

 

2. 예수께서는 왜 갈릴리의 세 개의 고을들을 책망하셨는가?

  예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전도하러 내보면서 2가지를 행하라고 하셨다. 하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라고 했다(마10:7,막6:12). 또 하나는 그러면서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셨다(눅9:1~2,10:9). 그런데 예수께서도 일찌기 이 2가지 일을 먼저 행하셨다(눅13:32, 마8:14~17). 하지만 가장 많은 기적들을 보며 경험했던 갈릴리의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마11:20).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눅10:13). 왜냐하면 그 고을들에게 행한 일을 다른 이방인들의 도시들에게서 행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11:21,23).

  첫째, 예수께서는 먼저 두 도시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셨다(눅10:13). 이 도시들은 예수께서 기거하셨던 가버나움을 떠나 이동하실 때에 꼭 지나가야 했던 도시들이다. 그러므로 두 도시들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치유를 경험했고 귀신들이 떠나가는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만일 주께서 그들에게 행했던 능력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둘째, 예수께서는 이제 본 도시 가버나움을 책망하셨다(눅10:15).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공생애 3년반을 사셨던 도시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셨는데 공생애 기간에는 가버나움에 와서 사셨다. 그러니 가버나움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하늘의 기적을 맛볼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만일 그들에게 행했던 능력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그때에 멸망당하지 않고 오늘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했다(마11:23). 그러므로 가버나움은 심판의 날을 견디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능력과 이적들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갈릴리의 마을들을 엄히 책망하셨다. 만약 다른 이방인 고을들에게서 그들에게 행했던 것만큼의 기적과 능력들을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것이고, 그들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갈릴리의 세 개의 고을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렇다면, 갈릴리의 세 개의 고을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들이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요16:9). 그들은 기적과 치유만을 받아들였을 뿐,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언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치유와 기적은 어떤 이유로 베풀어진 것인가? 그것은 전부 다 그분이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결코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이 많으시고, 특출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먼저, 고라신과 벳새다의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눅10:13).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에게 행한 일을 두로와 시돈지역에서 행했더라면 두로와 시돈사람들은 이미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두로와 시돈은 대체 어떤 지역이었는가? 우선 이방인들이 사는 도시였다. 그리고 특별히 두 도시들은 바알신 숭배 곧 우상숭배가 가장 강했던 도시 가운데 속해 있었다. 그런데 두로와 시돈에 비하면, 우상숭배가 그렇게 강하지 못했던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으로부터 메시야적인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왜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라신과 벳새다는 메시야를 수용하지 못한 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한 죄를 지었던 것이다. 

  둘째, 가버나움은 교만이 하늘을 찔렀던 도시였다(눅10: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갸?" 그렇다. 그들은 다시 도시들에 비해 더 많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표적을 보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을 낮추지 않았으며, 거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당시 유대나라의 양대 세관이 있는 도시의 하나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가버나움은 갈릴리에 있는 도시들 중에 가장 크고 가장 세련되고 가장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이리라. 가버나움에서는 매일 북쪽에서 들여오는 물품의 관세를 부과하는 도시였기에, 그 도시에서는 온갖 상업행위들과 숙박업으로 도시가 북적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는 남 부러워할 것이 없는 도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예수 따위는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굳이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거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가버나움은 교만의 죄를 짓고 있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자부심을 넘어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사고방식은 메시야를 배척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 오늘날 사람들은 왜 회개하지 않는 것인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왜 회개하지 않는 것인가?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들로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신은 죄를 안 짓고 살고 있다고 여기 있으며,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큰 해를 가져다주지 않음으로 그것이 그리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은 죄는 죄로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살아보니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장 급할 것이 없는데 왜 회개하겠는가? 만약 자신이 죄를 지었는데 곧 중한 질병에 걸려서 목숨이 얼마 안 남게 되었다면 좀 다를 것이다. 또한 죄를 짓고도 회개를 안 하고 있다가 그만 자식이 어떤 사건사고에 휘말려 도무지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박함이 찾아오면 좀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이 발생하여 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거나, 엄청난 물질에 손해를 보아 거지가 될 것 같으면 사람은 즉시 회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발생하지도 않고 그리 해가 되는 것이 없었을 때에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큰 손해가 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자들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고난"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사람은 고난이 닥쳐왔을 때에,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회개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두번째 이유는 사람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당장 회개하지 않는다면 회개할 기회가 영영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세례요한의 경고(마3:10)과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히12:16~17)를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누구든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외침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나무를 베서 불 속에 쳐넣기 위해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를 향해 놓여있는 상태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나무를 베어버릴 일과 불 속에 쳐넣는 일을 현재진행형으로 말했기 때문이다(마3:10). 그렇다. 회개는 조금 미뤄 놓았다가 뒤에 해도 되는 그러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 들어와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 자신의 죄가 지옥 갈 죄라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자신을 회개시켜셔 천국에 데리고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해야할 회개까지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명령하실 뿐, 우리에게 사정사정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인간의 무지 때문이다. 즉 사람이 회개하면 얻게 되는 엄청난 유익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에 일어나게 될 엄청난 해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회개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만일 그가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회개한다면 그는 죽을 때 곧 육신을 벗는 순간, 꼭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4:17). 하지만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은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결국 구원에서 타락하게 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온갖 저주까지 맛보게 될 것이다(계2:22~23). 특히 본인이 중한 질병에 걸려 침상에 던져잘 것이, 자신이 손을 대는 모든 현장이 망가짐으로 주변사람까지도 힘들게 할 뿐더러, 자녀들의 앞길을 가로막히거나 망하게 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회개하게 된다면,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도 들어갈 뿐더러,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도 자기와 자기의 자손들이 온갖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회개에 관한 말씀을 평소에 듣지 못했던 사람은 회개의 커다란 유익과 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자가 얼마나 복된 자인지는 나중에 그리고 죽은 다음에 알게 될 것이다. 

 

5. 나오며

  회개가 관건이다. 사실 회개야말로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성공의 여부를 결정해주는 핵심요체가 되기 때문이요, 회개 없이는 지은 죄를 사함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직접 자신이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시어, 속죄제사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자는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처음 믿을 때에 회개했던 것을 가지고서, 평생 회개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든 죄는 다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이외로 많다. 그러나 아니다. 그럴 일은 결단코 없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는 자백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모든 시대는 이미 "마지막 때"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떠나고 난 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지가 벌써 2천년이 넘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벧후3:9).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가 저주와 축복을 가르며,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최종열쇠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9월 25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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